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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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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익명 (미확인) | 화, 2019/01/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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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영 한신대 교수.

[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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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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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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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4>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안익태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 

☞서울신문: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일제와 나치 독일의 나팔수였다” 

☞tbs교통방송: 이해영 “안익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즘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 

☞민중의소리: 안익태 친일파,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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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용식 <아시아엔> 독자] 답답한 심경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실향민인 아버지(문순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김포공항 인근 농촌마을에서 자랐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형편은 더 어려워져 중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묻곤 했지만 실향민인 부친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같은 미안한 마음은 언젠가는 부친의 생전 삶을 복원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05년 한 시민단체가 한일양국간 체결한 청구권 문서 공개 요청 소송에서 법원이 “협정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한 사실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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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그 결과 국회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나 역시 본격적으로 부친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나서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기관에 3년간 민원을 넣어 부친의 스무살 젊은 시절 삶을 확인하는 공식문서를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았다.

부친 문순남은 1924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으로 1945년 6월 2차대전 막바지에 강제동원되어 일본 관동군 130여단 776대대 소속으로 8월16일 중국 선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됐다. 부친은 이어 러시아 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 내 카라간다 탄광지역 99수용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을 하다 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74년 부친이 사고사가 아닌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당시 상가에 파출소 순경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부친은 과거 적성국가에 체류한 일로 ‘요주의 인물’로 늘 기관의 감시를 받고 사셨다는 것을···.

오는 2월이면 ‘시베리아 억류 한국인 귀환 69주년’이 된다.

일본은 2차대전 막바지 패전 위기에 몰리자 만주에서 중국과 전쟁 중이던 정예병력을 본토방어를 위해 차출했다. 이에 따라 부족 병력은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서 동원령을 선포해 무차별 징집하고 만주 등 최전선으로 내몰았다.

한국인 귀환자들은 전쟁 막바지에 일본 군인으로 동원되어 일본의 항복선언과 동시에 만주와 사할린 등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됐다. 이들은 시베리아 등에서 강제노동에 내몰리다 천신만고 끝에 북측 지역인 흥남을 거쳐 19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2009년 2월 27일, 귀환 60주년 행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되고 곧 이어 3월 2~15일 관련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벌써 9년 전 일이다. 당시 행사에는 일본에서 곤노 아즈마 참의원과 몇몇 의원이 참석했으나 정작 한국에선 이정희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당시)만 참석할 뿐이었다. 국회 내에서 진행된 행사임에도 주요정당의 ‘잘난 의원님’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 전쟁포로가 되어 지옥같은 체험을 하고 조국에 귀환한 지 70년이 되도록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국가가 해결도 못하고 있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동안 국가의 무관심 속에 피해자들은 한을 품고 하나둘 쓰러져 이제 생존자는 채 10명도 안 된다.

촛불혁명으로 달성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정부와 정치권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와 외교부에 그간 수차례 호소문을 제출하며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일의원연맹 총회가 매년 봄·가을 양국을 오가면서 2번씩 열려도 지금까지 의제로 의논 한번 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국민이 명백히 존재하며, 정부에 기록도 있고 수년 전 진상조사도 완료한 사안이다.

나같은 유족은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일제하 징병 갔다가 구소련에 의해 억류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같은 행위는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국민의 주권국가가 가해자인 상대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70년이 지나도록 일어나고 있다.

새정부 들어 촛불민심을 반영하는 국민참여 제안에 18만건이 접수되고 정부는 그 제안을 바탕으로 5개년 국정 계획으로 5대 국가비전 전략목표와 20대 국정 전략과제를 수립하고 총 100개의 현안 목표를 수립했다. 과거사 문제는 전략목표 1번 3번째에 위치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내걸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달라는 여망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국정 우선과제로 삼아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어 온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내 가슴이 이럴진대 당사자이자 먼저 가신 아버지, 그리고 아직도 생존하신 피해자들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면 피눈물이 솟는다.

<2018-01-05> 아시아기자협회

☞기사원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유족의 피맺힌 절규

금, 2018/01/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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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께

IDS홀딩스 사건은 제2의 조희팔사건이라고 불리우며 피해자 1만2178명, 피해액 1조 969억원에 달하는 사건입니다.

현재 IDS  홀딩스 대표 김성훈은 2심 징역 15년 구형을 받았으며 현재는 대법원 상고 중입니다.

피해자들의 피해금을 변제해 주면 무죄를 증명할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일텐데도 여전히 피해자의 피해금 변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할뿐실제로는 말도 안되는 꼼수로 1년 5개월이나 변제를 미뤄오고 있으며 오직 자기 살길만은 모색하고 있는 사기꾼 입니다.

가짜 변제안, 자산가치도 증명 되지 않은 회사의 주식변제안 그리고 최근에는 파산신청까지 진행하며 여전히 피해자들을 기만하고 있는 시대의 사기꾼 입니다.

김성훈의 파산이 받아들여진다면 1만여명의 피해자들은 끝없는 괴로움으로 힘들어 할것이며 사기꾼과 그 공범자들은 또다시 이런 유사한  사기를 치며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 것입니다.

왜 변호사님은 이런 일에 사기꾼 김성훈편이 되시려는지요?

피해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고

김성훈의 실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주세요..

 

 

목, 2017/12/07-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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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R5OEl…

화, 2018/02/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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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 “일본과 협의 안 돼” 답변만 반복
시민단체 활동만으로는 한계

▲ 서울 용산역 광장의 강제징용 노동자상(뉴스1DB) © News1 박지혜 기자

1945년 일본 열도에 광복의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일본 내 한국인들은 3년이 지난 1948년 스스로 배를 마련해 대한해협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1948년 가을 큰 태풍이 방생해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한국인들이 모여든 일본 규슈지역을 덮쳤다. 배는 난파되고 희생된 한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의 이키섬과 쓰시마섬으로 떠내려왔고 이후 수습된 유해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사찰인 곤조인(金承院)에 안치됐다.

지난 2010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의 조사로 곤조인에 강제징용 희생자로 추정되는 13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음이 밝혀졌다. 최근 곤조인에서 더는 유해를 보관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유해를 화장 후 일본 후생성의 창고에 보관될 처지에 놓였지만 한국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22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두 나라 정부에 곤조인에 보관 중인 131위의 유해 보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일본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의 유해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앞서 지난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반환을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도쿄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돼있던 군인·군속 유해 1134위 중 423위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네차례 걸쳐 봉환됐다.

유텐지의 군인·군속 유해의 봉환 작업에 대한 한·일의 합의가 이뤄진 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 봉환 문제도 제기됐고 약 2700여구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해가 남아 있다고 파악됐다. 하지만 이들의 유해는 여럿이 합장되어 있거나 무연고 유해가 대부분이어서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는 제대로 된 조사와 대응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한일 정부 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정부차원의 봉환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설치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 국내봉환 살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와 3·1절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제99주년 3·1절을 맞아 일본에서 봉환해온 일제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를 모시고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추모제를 거행했다, 2018.2.28/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정부 간 교섭이 멈춰서자 2014년부터 한·일 시민단체가 나서 일본정부에 유해 봉환 문제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봉환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수년 동안 일본정부와 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시민단체에서 향후 일본과의 ‘유골공동조사’에 대한 장기 로드맵 작성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구체화된 계획이 없는 상황이다.

또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역할이 한정될 수 밖에 없어 총리 산하에 행안부, 외교부, 법무부가 참여하는 공동 대책반 구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없다.

특히 지난 2016년 보추협이 요시다 가즈로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 사업과장 등 당국자를 만나 한국인 유해을 찾을 수 있도록 나서달라는 취지의 요망서를 제출했고 일본정부도 “한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본정부가 한국의 요청이 있으면 검토하겠다고 하는데도 한국정부는 요청이 없다”며 “정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있는 관료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 강제징용자 유해 봉환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관련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의 요청이 없었다는 일본 측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한국정부는 지속해서 협의를 요청하고 있으나 일본 측이 답변을 피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현재 한국정부는 일본 내 한국인 전몰자 유해문제에 대해 “국외에서 희생된 한국인의 유해을 국내로 발굴·봉환한다”는 기본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한·일 간의 민감한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당장 유해 송환 문제에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편, 전몰자 유해 수습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일본정부는 지난 2016년 태도를 바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해서 2차대전 당시 전몰자 유해 수집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유해수집사업에서 한국인은 배제돼 강제동원된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해는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위안부 문제 등을 사실 풀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유해 송환 문제는 한국정부가 키를 쥐고 풀수 있는 문제인데 한국정부는 무슨 이유인지 꼼짝을 안 하고 있다”며 “지금 당장 유해를 가져올 수는 없고 가져오는 것만이 능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장기적인고 종합적인 계획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potgus@

<2018-03-22> 뉴스1
☞기사원문: 일본 내 한국인 유해송환 ‘답보’…정부 미온적 ‘日 정부 탓만’


[TF포토]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창고로 보낼 수 없습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 ‘곤죠인 사찰’에 해방 이후 태풍 등으로 조난을 당한 조선인들의 유골 131구가 유족을 찾지 못한 채 임의로 처리될 상황에 놓여있다며 한일 양국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장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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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3/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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