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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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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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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4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올해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5·16쿠데타로 인한 좌절, 4월혁명이 한국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등 4월혁명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원래 4월 19일에 개막하려 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9월 25일에야 겨우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구성은 제1부 우상의 시대 : ‘국부’가 된 독재자,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 제3부 사월 그날 이후,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개의 패널과 이승만 관련 〈대한뉴스〉 영상, 신동엽 시인, 여중생이 죽기 전 남긴 편지 등 4개 영상, 그리고 4월혁명 관련 서적과 당시 격문, 음반, 영화포스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자료가 다수이나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아이엠피터
tv, 연세대학교박물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한상언영화연구소로부터 귀중한 자료의 전시 협찬을 받았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전시회 지상중계에서는 각 주제별 전시회 현장 사진과 주요 실물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며> 자유당, 1956.4. 근현대사기념관 소장
대통령후보 이승만박사 선거사무장 이재학, 부통령후보 이기붕선생 선거사무장 박영출, 자유당중앙위원 일동 명의의 자유당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추대 홍보물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5일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5·15 정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다.

① <4·19> 학생운동기 – 아혼록 1960.2.28.~4.2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4월혁명에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② <피어린 4월의 증언> 1960. 부산 거주 대학생의 일기로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4월혁명 양상을 전해준다.

③ <영한대역-4월의 영웅들>, 일신사, 1960. ‘세계의 눈에 비친-한국 자유혁명의 산 기록’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영미권 유수 언론이 이승만의 독재와 4월혁명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다룬 사설 칼럼 보도 등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④ <혁명재판 공판기> 1960.8. 혁명재판 법정 녹음을 녹취한 공판기록. 부정선거관리·모의·지령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자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 전성천선거법위반사건 순으로 편제되어 있다.

<격! 참의원 의원의 망동을 규탄한다> 사단법인 사월혁명단, 1961.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격! 삼천만은 사월 혁명 영령의 명복을 빌자> 월요회, 1961.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① 〈오발탄〉 1961년 4월 13일 개봉 이범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이다. 전후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두운 화면과 우울한 정조를 통해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이다. 사월혁명이 가져온 대표적 영화로 5·16쿠데타 이후 한때 상영 중지되었다.

② 〈삼등과장〉 1961년 5월 4일 개봉 삼등과장의 아들인 영구는 사월혁명을 주도한 대학생 계층으로 자부심이 있으나 놀고먹기를 좋아하며 여자친구에게 푸념만 하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사월혁명이 ‘실패’로 자인되고 있던 1961년 초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③ 〈잘돼갑니다〉 1968년 작, 1989년 9월 9일 개봉 경무대 이발사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말로를 묘사한 영화이다. 한운사 작 동명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1968년 영화로 만들었다.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 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가서야 해금되었다.

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유성기음반, 도미도레코드, 1960.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소장(이하 동일)
② 〈사월의 깃발〉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③ 〈아 4·19〉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④ 〈너를 찾아 서울 왔다〉 수록 <송운선 작곡집>, 세광출판사, 1961. 송운선은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 말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혁명 관련 대중가요로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못 잊을 4·19〉, 〈광명의 4·19〉 등을 만들었다. 〈너를 찾아 서울 왔다〉는 혁명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광명의 4·19〉 수록 노래책, 세광출판사, 1961.
⑥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유성기음반, 아세아레코드, 1960.

 

① <항쟁의 불길>,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정론, 시, 소설, 희곡을 실은 북한의 작품집
② <조선> 1960년 제5호, 조선화보사. 4월혁명 소식을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보도한 북한의 대외선전용 화보

③ <남조선 학생운동>,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4월혁명을 비롯해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각종 학생운동을 소개한 북한 도서

④ 〈항쟁의 서곡〉 영화 스틸사진, 조선예술영화제작소 출품, 창춘(長春)영화제작소 더빙, 중국영화배급사 배급, 1960. 4월혁명 직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항쟁의 서곡〉 스틸 사진. 강홍식이 연출을 맡았으며 심영, 김연실 등 유명 월북영화인들이 출연했다.

수, 2020/11/1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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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개최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독립전쟁 선
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이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독립전쟁선포 100주년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전쟁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본격화한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에서 기조발제와 주제 발표 및 토론, Ⅱ부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독립전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제1주제 ‘1910년대 유교계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 만주에 정착한 유림들과 신흥무관학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교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에 대해 다루었다. 토론자로 나선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유교계가 어느 정도로 관계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현황 분석과 독립운동’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구축한 신흥무관학교 인명 DB를 토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활동과 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숭실대학교 황민호교수는 신흥
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436명의 인물들을 직접관련 단체 9개와 간접관련 단체 5개로 구분하고 중요 인물들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동시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졸업 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다음으로 한성민 대전대학교 교수가 제3주제인 ‘일본의 간도출병 배경 검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한 ‘간도 출병’의 배경을 당시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교수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전체적인 배경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연구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주제는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청산리 전역과 절반의 작전’으로 발표하였다.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과 일본군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지도를 활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토론자 동덕여자대학교 이승희 교수는 <吉長日報>라고 하는 중국신문을 검토대상으로 삼고 청산리 전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활동의 양상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규명한 점과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투쟁과 일제 침략정책의 상관관계를 도출해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Ⅱ부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관계자와 예약 참석자 50명만 제한적으로 참석하여 진행되었지만 학술회의의 모든 진행 과정을 촬영하여 편집영상을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2/0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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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코로나 시대, 한일 시민들이 함께 외친
“야스쿠니 NO!”―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려

10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을 폭로하고,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현황을 점검하며, 국제사회에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려왔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올해는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으로 마련되었다.

 


올해는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맞이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함께 해온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 원고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변호인단, 연구자, 활동가, 지원단, 시민 등이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가졌다. 특히 올해 국제회의를 준비하며 온라인 화상회의의 특징을 살려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일반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김영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 이희자공동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록 직접 만
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강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모든 이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모임’ 사무국장은 스가 정권의 출범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망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아사노 후미오(浅野史生),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코로나로 지연되고 있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소송전략에 대해 원고 유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시간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제안자이기도 한 서승 공동대표(우석대 석좌교수)는 15년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캠페인,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연구주체의 양성, 유럽에서의 국제회의 개최 등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했다. 한편, 평생 동안 모아온 야스쿠니 관련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기도 한 즈시 미노루(辻子実)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야스쿠니반대를 위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얻은 성과를 소개하고 국제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 패널토론은 야스쿠니반대운동에 참여한 청년세대를 대표하여 권다정(청년시대여행) 활동가와 도쿄촛불행동의 사무국으로 활약해 온 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씨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한 감상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 사무국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영채, 김영환 사무국장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의 성과와 한계, 과제와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국제회의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최낙훈, 이명구, 박진부, 박남순, 동정남, 박매자, 이병순, 신명옥 어르신들께서 함께 하여 일본의 변호단, 지원단 여러분들과 화상으로나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를 함께 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응원의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회의장 벽면에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원고로 참여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원고들(김희종, 임복순, 고인형, 임서운, 윤옥중, 남영주, 최두용, 유충현, 백귀례, 남영주)의 사진으로 채워진 현수막이 걸려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NO!”를 힘차게 외쳤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12/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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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 교사 직무연수 운영,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무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를 주관했다. 이번 연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 자료들 중에서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됐다.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5차에 걸쳐 ‘니시키
에’, ‘일출신문조선쌍육’, ‘애국반회보’ 등 일제의 선전 자료와 친일,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10월 27일(화) 진행된 이번 연수의 첫 프로그램, 「니시키에로 본 청일전쟁과 지워진 역사」에서는 강효숙 원광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니시키에(錦絵)는 근세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모태로 탄생한 회화 장르로,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유행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취시키고 선전 미술로 활용되는 등 어두운 양면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강효숙 교수는 니시키에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격하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한 ‘청일전쟁’이 니시키에를 통해 다시금 조망됐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들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방문, 「조선안성도격전지도朝鮮安城渡激戰之圖」 등 청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관람했다. 아울러 박물관은 강연장 내에도 10여점의 니시키에를 별도 전시하여 수강생들의 학습과 체험을 도왔다. 이러한 실물 사료 체험에 대해 수강생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때로는 설명을 청하기도 하며 높은 열의를 보였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어질 연수에서도 사료를 실제로 감상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편성할 예정이다.
올해 직무연수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2주차 「일출신문 조선쌍육으로 본 일제의 강제병합과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는 놀이, 삽화 속에 담긴 일제의 침략 의도를 분석해본다. 3주차 「친일 관련 사료와 디지털아카이브 활용방법」에서는 방대한 일제강점기 사료군에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다룰 예정이다. 제4강과 5강에서는 애국반 회보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사진을 통해 분석해보며 일제 지배 정책의 기만성과 식민지 폭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 자료와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활용하여 수강생들의 학습 성취를 돕는다. 한편, 이번 직무연수와 관련된 내용은 연수 종료 이후 유튜브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목, 2020/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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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이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강좌는 11월 28일에서 12월 13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1강과 2강 진행 이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3강에서 6강은 온라인 수강만으로 변경되었다. 강의는 촬영 후 편집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대전대학교 한성민 교수의 <3개의 총탄이 만든 역사, 안중근>이란 주제로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나?’라는 물음과 함께 당시 이토의 ‘만주시찰 목적’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은 <끝나지 않은 3·1운동의 전율, 강우규> 주제로 춘천교육대학의 김정인 교수가 강의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강우규의사의 의거와 함께 3·1운동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줌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였다. 첫 주 강의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강사와 현장참여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상황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3강에서 6강은 수강생 없이 온라인 수강을 위한 강의 촬영으로 진행되었다. 3강 <위대한희생 빛나는 투쟁, 의열단>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의하였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 특히 1923년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황옥경부폭탄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시현과 밀정 황옥을 통해 의열단의 활동과 조선총독부의 밀정 운용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또한 4강 <윤봉길, 한국과 중국을 잇는 폭탄을 던지다>는 남기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5강 <여성, 광복군에 들어가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승훈 교수가 강의하였다.
6강 <재일조선인의 삶과 저항, 이봉창>은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김광열 교수가 진행하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실태, 민족차별과 임금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정리하고 일본거주 조선인 노동자였던 이봉창이 민족차별에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요약하여 이해도를 높여준 강의였다.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은 1강에서 6강 모두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와 민족문제연구소, 서울시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12월 말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현장과 온라인 수강으로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역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수, 2020/12/30-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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