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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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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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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중국에서 온 편지

김춘련 중국 거주, 후원회원, 양세봉 장군 동생 양시봉의 외손녀

 

지난 1월 9일 방학진 기획실장이 “효창독립커피에 양세봉 장군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문자와 함께 사이트를 보내왔다. 사이트를 열어보니 아이디가 참신하여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며칠 후 “양세봉 장군의 직계 후손은 없지요?” 또 문자가 와서 양세봉 친손주 양철수가 이북에서 살고, 2014년 8월, 2018년 겨울 두 번 중국에 왔을 때 내가 만났던 적이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열흘이 지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 민족문제연구소) 표지와 “시집살이” 내용 넉 장을 위쳇으로 보내왔다. 방실장은 아무 말을 안 했지만 보내준 문장이 뜻이 있을 거 같아 꼼꼼히
봤다. 순간 열흘 전에 물어봤던 문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허은 여사님 글에 “왕청문에서 일본놈들이 끌어다 때려서 죽였단다. 죽이고 나서도 ‘저놈은 죽여도 그래도 죄가 남는다’면서 죽은 사람의 목을 또 잘랐단다. 그리고 그(양세봉)의 세살 된 어린애까지 데려다 죽이고…후손이 없어서 아직 유해는 못 찾은 거 같았다.”
양세봉은 1934년 8월 19일에 변절한 아동양의 총에 맞아 이튿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당시일주일간 장례식을 지니고 25일 흑구산 기슭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튿날 일본 통화영사관분관에서 양세봉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용차에 일본군경을 가득 싣고 향수하자촌에 들이닥쳐 양세봉의 시신을 파내라고 위협했다. 흑구산 기슭에서 양세봉 시체를 파온 일경은 또 김도선에게 양세봉 목을 작두로 자르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김도선은 “우리 독립군 사령관의 목을 절대로 자를 수 없다”라고 완강히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그리고 양세봉 머리를 작두로 잘라 조선의복에 싸서 통화사령관으로 가져가 통화, 산성진 등지에서 전시하였다. (조문기·정무, <양세봉> 278쪽)
허은 여사님이 “늦게까지 만주에 있다가 나온 분한테 들은 거”라고 했는데 잘못된 풍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죽은 사람은 세 살된 어린애 양의준이 아니고 김도선이었다. 양의준은 1932년 5월, 청원현 소산성자에서 태어났다. 글에 나오는 시동생은 양세봉의 둘째 동생 양시봉이다. 양시봉과 양세봉 부인 윤재순이 수백리 길을 걸어 양세봉 부대를 찾아가 아들을 보여주었다. 양세봉은 그때 본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후에 그 아들은 이북에서 1957년 3월 15일 임무수행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희생되었다. 당시 나이는 26살이었고 직무는 정치부대대장이었다. (양철수,<계승> 11쪽) 양세봉 친손자 양철수는 1956년 2월 10일 조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라는 말도 떼기 전에 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돌아갔고 한돌이 지나원인 모를 고열을 심하게 앓더니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영영 불구의 몸이 되었다. 양철수는 현재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국가 1급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으로 아동문학창작집 <희망의
날개>, <계승>(2007.6)이 있다.
양세봉에게는 생전에 딸 둘, 아들 하나 있었다. 맏딸은 1920년 신빈현 금구자에서 태어났다.
“1931년, 양세봉 가족을 멸족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김씨성으로 고쳐 신빈현에서 청원현 소산성자에 이사 온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단오날 양세봉의 맏딸 귀녀의 성화에 김화순이 두 살 난 자기 아이는 업고 12살 난 귀녀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갔다가 일본놈의 폭격에 귀녀는 즉사했고 그녀도 피못에 쓰러졌다. 왼쪽 발목이 골절되었고 다리에 수많은 파편이 박혔다. 수개월동안 병상에 누워 생사박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때 입은 상처가 흐린 날이면 아픈데 파편이 박혀 있는 곳은 더욱 쏜다고 하였다.”(<요녕조선문보> 1998.5.28) 김화순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파편이 다리에 있었다.
둘째딸은 1928년 5월 중국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양의숙이다. 1917년에 중국 신빈현에 이사온 뒤부터 1946년까지 장장 28년간 양시봉, 김화순 부부가 양세봉 가족까지 12식구를 거느리고 수없이 이사 다니며 파란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었다. 양세봉의 둘째딸 양의 숙 부부가 중국 신빈현 왕청문 향수하자향에 묻혀있던 양세봉의 머리 없는 유해를 1961년 평양 근교에 안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가 1986년에 평양 열사릉원에 이장했다. 
허은 여사님이 쓴 책과 특히 김동삼 손부 이해동님이 쓴 <만주생활77년>을 읽으면서 그분들이 겪은 고난의 생활이 어쩌면 나의 외할머니 김화순이 겪은 일과 너무나 비슷하여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외할머니 생전에 나한테 들려줬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한 유감이 컸다. 비록 고인이 되신 조문기, 유연산, 강룡권 등 분들이 외할머니 생전에 취재하고 글을 남기었지만 워낙 양세봉의 공이 크다
보니 양세봉 할아버지 사적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고생한 이야기도 많이 했을텐데 묵혀버린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다더니…

2021.2.1. 기록

화, 2021/03/0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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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고 조문기 이사장님의 영전에 삼가 추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이순옥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완전한 친일청산과 조국의 통일만을 염원하시던 선생께서 영면하신 지도 어언 열두 해가 지나 다시 뵈옵는 오늘입니다. 절기는 입춘을 지나 봄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대지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찬바람만 살을 에며 지나고 있습니다. 꽁꽁 언 아스팔트 바닥에서 들고 일어선 촛불혁명으로 수구 모리배들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뜻을 담아 민주정부를 탄생시킨 지도 3년이 되어 옵니다.
독재자의 딸과 그에 붙어 기생하던 하수인들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우고, 이제 민주주의가 꽃피는 세상,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노동자가 대접받고 정의가 춤을 추는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바뀐 것은 대통령 한 사람뿐,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시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100년 이상 권세를 누리며 역사와 민중을 착취해 온 적폐 잔당들이 기득권과 이익을 한 톨, 한 치도 내놓지 않으려고 검찰과 언론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이빨 빠진 칼로 거친 칼춤을 추듯 민주주의와 법치를 유린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우리는 민족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견디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북미하노이정상회담을 장사꾼 트럼프가 한순간에 뭉개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 앞에 놓인 힘의 논리라는 사실에 치를 떨었습니다. 예의도 원칙도 없는 트럼프가 통일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돼 줄 것이라고 잠시나마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미완성입니다. 아직도 어둡고 차가운 구시대의 끄트머리에 우리는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이시여! 저희는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목표가 무엇인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그곳만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민족의 문제는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민족끼리 한 발 앞서는 행보를 하겠다고 하였으니, 선생이시여! 바람막이도 없이 위태로운 등불을 꺼트리지 않고 기어이 살려내려는 민족의 염원을 지켜 주시고 힘을 주소서.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친일 반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던 선생의 고귀한 열정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하나하나 심어 주소서.
적폐 잔당들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민중이 주인 되고 노동자가 대접받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저희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선생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본받아 끝끝내 싸워 이겨내겠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의 영전에 반드시 승리의 꽃다발을 바치겠습니다.

2020년 2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일동

목, 2020/02/2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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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54]

일본 개신교의 가마쿠라보육원으로 변신한 후암동 ‘전생서’ 옛 터
결국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힌 소다 카이치 원장

이순우 책임연구원

전의감(典醫監), 전옥서(典獄署), 전원국(典圜局), 전선사(典膳司), 전설사(典設司), 전생서(典牲署), 전교서(典校署), 전농사(典農司), 전연사(典涓司), 전비사(典備司), 전함사(典艦司)등등 ……
.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전(典)’자 돌림으로 시작하는 조선시대의 관아 명칭이다.

‘전’이라는 것은 “무엇 무엇을 관장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전생서’의 생(牲)은 우리가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관용구에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데, 이는 곧 여러 제향(祭享)에 쓸 희생(犧牲, 제물로 바칠 짐승)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는 전구서(典廐署)가 설치되어 이 일을 맡았으나, 세조 때에 이르러 이곳이 ‘전생서’로 개칭된 것으로 알려진다.
순조 때의 인물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전생서의 항목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전생서는 숭례문 밖 남부 둔지방(南部 屯智坊) 목멱산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창설하였고, 희생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정청(正廳)은 간줄헌(看茁軒)이라 하며, 곁에 연못이 있어 정자를 일컬어 불구정(不垢亭)이라 한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의 간줄헌기(看茁軒記)가 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에는 양(羊)이 없으나 이곳에서만 양과 고력(羖䍽, 흑염소)을 길러 제향에 공급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염소만 있고 양이 없다고 한다. 생우(牲牛)로는 종묘(宗廟)에는 검은 소를 쓰고, 문묘(文廟)에는 성(騂, 붉은 소)을 쓴다.

 

이곳 전생서는 도성 남쪽 일대에서는 유달리 그 존재감이 두드러진 곳이었으므로, 두텁바위(蟾巖, 두껍바위)에서 유래한 후암동(厚巖洞)이라는 지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전생동(典牲洞)의 사용빈도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1914년 4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 당시 일본식 지명인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구역은 종전의 ‘갈월리(葛月里) 일부’와 ‘전생동’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더구나 전생서 앞을 지나는 길은 한강나루로 이어지는 주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 ‘성문분로(城門分路)’에 표시된 내용에 따르면, 서울 도성 숭례문에서 벗어나 부산 동래(4대로)를 향하는 이들이 거쳐야하는 행로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숭례문 남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주교, 청파역, 석우참까지 4리이다. ○ 석우참 동남쪽으로 둔지산을 지나 서빙고진에 이르기를 6리(한강진 아래에 있고 숭례문에서 10리 거리)이다.
(4대로를 보라) ○ 이문동에서 도저동을 경유하여 남묘, 이태원을 지나 곧장 서빙고에 이르는 것이 이것의 지름길이다. (崇禮門南經里門洞舟橋靑坡驛石隅站四里○石隅站東南經屯之山至西氷庫津六里在漢江鎭之下卽漢江津距崇禮門十里○見四大路○自里門洞由桃楮洞經南廟利泰院直至西氷庫此捷路)

 

여기에서 보듯이 동래 방향으로 내려가는 행로는 본디 청파배다리, 돌모루, 둔지산을 거쳐 서빙고나루에 닿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 남묘와 이태원을 거쳐 바로 서빙고로 가는 샛길이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경우 남묘 앞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우수현(牛首峴, 雨水峴)을 넘어오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전생서 앞길을 거쳐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숭례문을 빠져나와 남묘, 이태원을 거쳐 서빙고에 이르는 전생서 앞길(지름길)의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전생서는 갑오개혁 당시 궁내부의 종백부(宗伯府) 소관이 되었다가 이내 혁파(革罷)되었고, 희생을 기르는 일은 1897년 1월 29일 이후 봉상사(奉常司)의 소임으로 넘겨졌다. 그러다가 1902년 4월에는 포달(布達) 제82호를 통해 궁내부 소속 직원으로 내장원 전생과(內藏院 典牲課)를 증치(增置)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흔적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옛 전생서 터는 본격적으로 공간해체의 위기에 몰리는 상황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1911년 11월 29일 기사에는 “중부 황토현 기념비각(記念碑閣), 북부 관광방 옛 도서과(元圖書課) 및 부속지, 남부 둔지방 전생서 기지(典牲署 基址), 중부 황토현 옛 기로소(耆老所) 토지 건물이 총독부에 인계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7월 11일자에 게재된 ‘불필요 관유재산 입찰불하공고(不必要 官有財産 入札拂下公告)’의 내용을 보면, 여기에 전생서 터에 포함된 토지와 건물 일체가 매각대상에 나왔던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 표시된 택지면적(宅地面積)을 단서로 살펴볼 때 ‘ 삼판통 370번지(1,028평, 국유지)’가 전생서 터였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부속지로 표기 된 곳이 어딘지는 아쉽게도 구체적인 지번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元 典牲署) (조서 제328호)
一 택지면적 1,078평(坪) 2합(合) 8작(勺)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9동(棟), 136평 6합 8작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 부속(附屬) (조서 제330호)
一 택지면적 232평 5합 7작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2동, 33평 6합 6작

 

<매일신보> 1914년 7월 12일자에 수록된 ‘관유토지건물 입찰불하공고’ 내역에는 옛 전생서 터와 부속지에 대한 내용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때의 공매처분은 응찰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인지 끝내 무산되었고, 그 후 1917년에 이르러 무상대여의 형태로 이곳을 차지한 주체는 일본 기독교 계열의 사회사업기관인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財團法人 鎌倉保育園 京城支部)’였다. 이 단체의 연혁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편, <조선사회사업요람(朝鮮社會事業要覽)>(1924)에 잘 기술되어 있다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 소재지 : 경성부 삼판통 370번지
△ 설립 : 대정 2년(1913년) 8월 11일
△ 연혁 : 본원(本園)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보육원의 지부이다. 원주(園主) 사타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는 대정 원년, 2년(1912, 3년)에 걸쳐 조선시찰의 결과 신개지(新開地)에서 고아구제(孤兒救濟)의 필요를 느끼고, 동 2년(1913년) 8월 본부 출신의 남녀 2명씩을 동반하여 경성으로 와서 장곡천정(長谷川町, 지금의 소공동) 일본기독교회(日本基督敎會)에서 결혼을 시키고 곧장 한 부부를 남만주 여순(南滿洲 旅順)으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보육(保育) 및 개간(開墾)의 사업을 개시하도록 했으며, 다른 부부를 당지(當地)에 남겨 지부를 창설하도록 했다. 부부, 즉 전 주임(前主任) 사타케 곤타로 부처(佐竹權太郞 夫妻)는 한강통(漢江通) 삼각지(三角地) 부근에 협소한 집을 빌려 사업을 개시하
였는데, 이보다 앞서 인천(仁川, 내지인)으로부터 소아(小兒) 5인에 대한 구호신청이 있어서 사업개시와 동시에 이들을 인수하여 양육하여 왔으나 지부의 방침은 오로지 조선인 고아의 수용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이들 내지인 아동은 가마쿠라 본부로 옮기고 그 후 조선인만의 수용에 주력하였다. 대정 4년(1915년)에 이르러 한강통 일본기독교회의 신축 이전에 따라 그 터를 빌려 이전하였다. 당시 가족(家族; 본원은 고아 및 종사자를 전부 일가족으로 부른다)은 21명이다.
대정 6년(1917년) 8월 총독부에게서 경성 삼판통 옛 한국정부 전생서 터의 토지가옥을 무상대하(無償貸下)를 얻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자리는 천여 평의 면적을 지녔고, 커다란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산(南山)의 남록(南麓)에 있어서 조망이 좋아 대단한 건강지(健康地)여서 이 사업을 위해서는 실로 천여(天與)의 호적지(好適地)이다. 후에 가옥을 수선하고 증축하여 대정 7년(1918년) 경성부에서 수용 구호했던 빈아(貧兒)와 기아(棄兒)의 양육업무를 넘겨받아 해마다 사업을 확장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씨 부처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하략)

 

이곳에서는 경성부에서 맡겨지는 조선인 아동들을 양육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았다. 여기에는 고아(孤兒, 홀로 된 아이)뿐만이 아니라 미아(迷兒, 길 잃은 아이)와 기아(棄兒, 버려진 아이)도 포함되는데, 서울 지역에서 해당 사례가 발생하면 대개 이곳 가마쿠라보육원이나 ‘옥천동 126번지’에 자리한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1920년 1월 3일 창립)으로 나뉘어 수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7)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에 ‘간줄헌(看茁軒)’ 편액이 또렷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옛 전생서 건물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소다 카이치 내외가 가마쿠라보육원 원생들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옛 전생서의 정청(正廳)이다. (조선총독부, , 1935)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탐방기사에는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 고아들이 죄다 일본 복장에다 조선어는 잊어버린 상태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당시는 아직 전생서 터를 무상 대여하기 전이므로, ‘일본기독교회 터 (한강통 13번지)’에 있던 시절의 모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일본화(日本化)된 가련아(可憐兒)」 제하의 보육원 탐방기사를 통해 또 다른 운영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지나간 8일에 경기도청에서 다년 자선공공에 종사한 점으로 표창된 용산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씨를 방문하여 씨의 다년 진력하여 오던 소아보육 사업을 구경 갔더니 마침 사타케 씨는 집에 없고 부인이 정답게 면회하여 이층 위 한 방으로 인도하는데 창문 밖에는 뚝뚝 덧는 녹음이 어우러졌으나 방안에는 월계의 조화 하나 밖에 아무 장식품도 없더라.
부인은 근신하는 태도로 말하여 왈(曰) “지금 아이들은 열여섯 명 있는데 다 조선 아이들이나 아주 일본 아이들 모양이 되었고 또 말도 조선말은 잊어버리고 일본말을 잘 합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여덟 살이요 제일 어린 아이가 네 살인데 다 말도 잘 듣고 조용히 잘 있습니다.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돝(돼지)과 닭을 치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고 아침저녁에는 찬미가를 노래하고 기도를 할 뿐입니다. 또 매일 냉수목욕을 시키는데 전체가 다 건강은 합니다. 조선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여 재주들이 있고 공부를 시키면 한나절이고 하루 동안이고 싫어하지 아니하고 잘 합니다. 일본 아이들과는 달라요. 풍금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아이들을 위로하여 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녁때는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의좋게 산보를 다닙니다.
뜰에 나가본즉, 등꽃이 곱게 피어있는 아래에서 아이들이 닭의 모이도 주고 군대의 남은 밥을 얻어다가 돝을 기르기도 하는 옆에서 조그마하나 아이가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모양이 참 평화한 지경을 이루었더라.

 

약간 특이한 점은 이곳이 이른바 ‘사회사업기관’이라고 하여 해마다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을 기려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사회사업장려’ 명목의 내탕금(內帑金)을 수령하는 수혜기관의 명단에 가마쿠라보육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1934년 4월 6일에는 당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엄창섭(嚴昌燮)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의 안내를 받아 직접 이곳을 시찰한 일도 있었다.

 

<황성신문> 1906년 10월 4일자에 게재된 ‘황성기독교청년회 학원 모집광고’에 일본어 교사 ‘소다 카이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마쿠라보육원이라고 하면 으레 함께 떠올려지는 인물은 앞서 연혁 설명에서 나온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이다.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니 일찍이 1906년 이래로 황성기독교청년회관(종로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활동한 사실 정도가 우선 눈에 띈다.
그 후 가마쿠라보육원의 운영을 떠맡게 되는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윤치호일기> 1919년 7월 10일자의 기록에는 옛 전생서 터였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를 방문한 일과 관련하여 당시 이곳의 운영자로 일본인 기독교도인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본부 원주인 사타케 오토지로의 아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보면, 소다가 선임자인 사타케에 뒤이어 두 번째 주임으로서 이곳에 처음 부임한 때는 최소한 1920년을 넘어가는 시점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38년 5월 8일에 “내선인 기독교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서로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의 실효를 선양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총후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선인기독교연합회(內鮮人基督敎聯合會)가 결성될 때 평의원(評議員)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지만, 그에 관한 여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1940년에는 원산(元山)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전도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패망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아일보> 1962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소다 카이치의 사망 기사이다. 그는 전년도인 1961년 5월 7일에 입국한 지 10개월여 만에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자리인 영락보린원에서 숨졌다.

<경향신문> 1950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소다 타키코 여사(소다 카이치의 처)의 사망기사이다.

 

해방 이후 소다 카이치는 1947년 가을에 일본으로 되돌아갔으나 그의 처인 소다 타키코(曾田瀧子, 1878~1950)는 홀로 잔류하였다가 1950년 1월 14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졌다. 이때 사회부장관이 장의위원장이 되어 소다 원모(院母)의 사회장이 거행되었고, 유해는 ‘홍제동 화장장’으로 옮겨진 바 있었다.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자리한 ‘고아의 자부’ 소다 카이치의 묘소 전경이다. 오른쪽은 소다 카이치의 묘비이고, 왼쪽은 1987년에 사타케 신(佐竹伸)이 건립한 소다 카이치와 강진형(姜振馨, 가마쿠라보육원의 조선인 주임) 묘역 참배 기념비이다.

 

이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1961년 5월 7일, 이번에는 90세를 훌쩍 넘긴 소다 카이치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고, 해를 넘겨 1962년 3월 28일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1947년 가마쿠라보육원 터 불하, 1948년 서울보육원 인가, 1956년 영락보린원 개칭)으로 전환된 옛 전생서 터이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5년 가량에 걸쳐 조선인 아동들에 대한 보육활동을 한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문화훈장이 주어졌으며, 그는 ‘고아(孤兒)의 자부(慈父)’라는 수식어와 함께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1947년 이후 서울보린원을 거쳐 영락보린원으로 변신한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터의 현재 전경이다. 정문 앞쪽에는 ‘전생서 터’ 표석 하나가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

화, 2020/01/21-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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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
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
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

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같은해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

이제는 친일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현장의 친일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
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
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
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 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 2021.2

화, 2021/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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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19년 일제잔재 청산 움직임이 활발했던 학교 현장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전국의 여러 교육청과 교육단체들은 학교 현장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조사하고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남교육청은 작년 12월 16일 순천만생태문화교육원에서 학교장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도교육청은 지난해 4월부터 전문가그룹이 참여한 가운데 전수조사를 벌여 도내 169개 학교에서 일제 양식의 각종 석물과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무늬나 휘장), 친일음악가 작곡 교가, 일제식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등 175건의 친일잔재를 확인했다.

확인된 친일잔재는 일제 양식의 석물 34건, 친일음악가 제작 교가 96건, 학생생활규정 33건, 욱일기 양식의 교표 12건 등이다. 그 결과 석물 16개가 놓여 있는 현장에 친일잔재임을 확인하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이는 해당 석물이 일제식민통치 협력자의 공적비이거나 일제식 양식임을 알려 학생들의 역사교육에 적극 활용토록 하기 위함이다.

친일음악가가 제작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14개 학교에 대해서도 예산을 지원해 교가를 새로 제작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친일잔재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전체를 수정·보완했고 욱일기 양식의 교표도 시대에 맞게 학교 자체적으로 8개교가 수정 보완했다. 도교육청은 앞으로도 일제식 석물 안내문 설치, 새 교가 제작 등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역대 교육감 중 친일 또는 항일 행적이 뚜렷한 사실에 대해서는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탑재할 계획이다.

광주광역시교육청도 12월 26일 관내 초·중·고·특수학교장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현장 일제잔재 조사 및 청산 사업 성과보고회’를 열었다. 교가의 경우 친일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 14개교 중 6개교의 교가가 교체·완료됐으며 일본 음계, 군가풍 리듬, 7.5조 율격, 선율 오류 등의 교가를 사용하고 있던 5개교의 교가도 교체됐다.

아울러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문양의 교표를 12개교에서 교체했고, 끝이 뾰족한 일본 충혼비 양식의 석물 3건에 대해서도 안내문을 설치하여 교육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성과보고회에 참석한 이재남 정책국장은 “친일잔재 청산사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확산되어야 한다”며 “올해는 학교상징물인 교가, 교표, 석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앞으로는 학교문화 속에 남아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부산, 울산, 경남의 경우는 학부모단체가 앞장섰다. 교육희망경남학부모회(대표 전진숙)는 경남지역 1,656개 초‧중‧고교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10월 23일 경남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 동안 학교 홈페이지와 현장 조사를 벌여 이를 파악했다. 전진숙 대표는 “친일잔재가 학교 안에 의외로 많다. 그리고 교화와 교목, 교가, 교훈이 시대에 맞지 않고 차별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했다.

교육희망 울산학부모회는 10월 22일 울산시교육청 프레스센터에서 ‘학교상징으로 본 일제잔재와 성차별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간 초등학교 119개, 중학교 63개, 고등학교 57개, 특수학교 4개 등 총 243개 학교의 교표, 교화, 교목, 교가 등을 모두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지난해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소속 단체들이 자치구를 나누어 초, 중, 고등학교의 교화, 교목, 교가 등을 중점 검토해 8월 12일 부산시교육청앞에서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잔재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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