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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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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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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5]

가토신사(加藤神社), 당고개에 터를 잡은 왜군장수의 추모공간
다치바나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이 깊이 관여했던 신사의 건립과정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된 내력을 지녔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攝社)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1916년 5월 22일에 타니무라 요리타카(谷村賴尙) 외 69명의 출원(出願)에 따라 신사창립에 대한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의 제정 당시에 덧붙여진 부칙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여기에는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 후 경성신사는 1936년 8월 1일부터 국폐소사(國幣小社,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로 승격되었고, 이와 동시에 1936년 8월 11일에는 기존의 「신사사원규칙」을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령 제76호 「신사규칙(神社規則)」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곳 경성신사에서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국혼대신(國魂大神, 쿠니타마 오미카미)’, ‘대기귀명(大己貴名, 오나무치노미코토)’
, ‘소언명명(小彦名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을 제신(祭神)으로 삼았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 (1941)에 수록된 경기도 지역 신사(神祠) 목록이다. 가토신사와 한강신사를 비롯하여 신메이신사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던 한강신사(漢江神社, 1912년 창립)를 비롯하여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충정로) 지역에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삼각지 인근에 도하신사(稻荷神社, 이나리 신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메이신사(神明神祠)라는 것은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라는 점도 가늠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 터를 잡은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의 존재도 결코 이 목록에서 제외할 수 없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 1915)라는 책, 173쪽에는 “용산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 와카노이케(和歌の池) 옆에 있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의 신령(神靈)을 제사지내는 구마모토(熊本) 가토신사의 분령(分靈)을 대정 3년(1914년) 12월에 봉영(奉迎)했다”고 쓴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 최초에는 다른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 지도를 통해 ‘와카노이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연못 곁에 가토신사가 처음 터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나오는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京城及龍山)」 지도자료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또한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제작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통해 확인해본즉 그 당시 ‘경성부 용산면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9번지(전체면적 2,734평)’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6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춘계대제(加藤神社 春季大祭)」 제하의 기사에도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구마모토시 쿄마치(熊本市 京町) 가토신사에서는 작년 이래 구용산 야시마쵸 와카노이케(舊龍山 八島町 和歌之池) 측(側)에 키요마사공(淸正公)의 분령(分靈)을 봉사(奉祀)하였는데 내(來) 24일로 복(卜)하여 춘계대제를 집행하기로 목하(目下) 준비중인데 기일(其日)은 생화진열회(生花陳列會), 예기가무(藝妓歌舞), 소인스모(素人相撲) 등 여흥도 거행하기 위하여 유지자(有志者) 간에 주선중이라더라.

 

이 기사에서 언급한 ‘야시마쵸(八島町)’는 ‘오시마쵸(大島町)’의 인쇄 착오로 봐야할 듯싶다. 어쨌건 가토신사의 위치는 여러 자료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와카노이케’ 옆에 가까우면서 ‘원정 2정목’에 속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지번 주소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0년 1월 1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개축(改築)」 제하의 기사는 이 신사가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 지역) 아래 공터로 자리를 옮긴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용산의 가토신사를 개축하여 용산의 사람들이 결혼(結婚), 기타 의식(儀式)을 그 신전(神前)에서 거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면 만사(萬事)가 편리할 것이라고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에서 이 논의가 점차 진전되어 왔는데, 만약 이 이야기가 진전되면 이를 기회로 동(同) 신사를 문평산(文平山) 아래 공지(空地)에 신축하고 현재의 신사부지(神社敷地)를 경성신사(京城神社)의 어려소(御旅所; 신사의 제례 때 신령을 태운 가마가 순행하는 도중에 쉬거나 숙박하는 장소)로 충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결과로 그 이듬해인 1931년 4월 24일에는 가토신사의 춘계대제에 맞춰 참도개수준공봉고제(參道改修 竣工奉告祭)가 열리기에 이른다. 이때 새로 조성된 가토신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번구획입 대경성정도(地番區劃入 大京城精圖)> 제8호(1936)와 일한서방(日韓書房) 편찬, <대경성시가지도(大京城市街地圖)>(1937)의 후면에 수록된 「경성요부(京城要部)」 와 같은 지도자료를 통해 문평산 지역의 철도수도급수소(鐵道水道給水所) 바로 옆쪽에 표시된 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1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참도개수 준공봉고제의 광경이다. 뒤로 보이는 언덕 일대가 이른바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이다.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고소사건 관련기사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조선국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가토의 통역이던 조선인 김관이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가토신사의 건립 내력과 관련하여 꽤나 흥미로운 내용 하나가 눈에 띄는데,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신사령(神社令)에 얽힌 가토신사(加藤神社)를 고소, 종교단체(宗敎團體)의 책동(策動)인가, 용산서(龍山署) 일응취조(一應取調)」 제하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순화(順和, 순화군) 임해(臨海, 임해군) 양왕자(兩王子)와 당시 키요마사공의 통역(通譯)으로 종사하면서 위덕(威德)을 경모하여 내지(內地, 일본)에 귀화(歸化)했고 장렬한 순사(殉死)를 했던 조선인 김관(金官)을 배사(配祀)하는 내선동화(內鮮同化)의 신(神) 용산의 가토신사에 대해 수 일 전 용산서(龍山署)에 고소장(告訴狀)이 제기되어 목하(目下) 동서(同署)에서는 관계자를 불러 취조중이다.
측문(仄聞)한 바에 의하면 동(同) 신사는 대정 3년(1914년) 통감시대의 경무총장(警務總長)이던 육군중장(陸軍中將)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씨(氏)의 재임중(在任中)에 용산의 유지가 상계(相計)하여 봉신회(奉信會)라는 것을 조직, 키요마사공 분령소(分靈所)를 건설하고자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가토신사를 건설, 구마모토(熊本)의 본사(本社)에서 사사(社司) 타케시타 마사미(竹下眞美) 씨가 내선(來鮮), 동사 건설과 흥륭을 위해 진력했으나 그 후 일시 동씨(同氏)를 대신하여 엔인 히토시(圓印等)가 사사(社司)로서 사사(社事)를 맡았으나 이런저런 재미없는 문제를 야기하여 결국 그 부덕(不德)한 행위로
부터 용산부민(龍山府民)의 비난을 야기(惹起)하여 퇴사(退社)에 의해 내지(內地)로 물러났고, 재차 부민의 간망(懇望)에 의하여 타케시타 씨가 사사로 취임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소(告訴)의 이유는 근년 동사 관계자와 유력자가 동사를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改名)하여 경성신사와 같은 모양으로 크게 하려는 의향에 당국에 출원(出願)했으나 당국으로서는 일부일사(一府一社)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허가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내 신사령(神社令)이 개혁(改革)되어 당시 이 신령(新令)에 부응하지 않는 전국의 각사는 5개월 내에 새롭게 신사(神社)로서의 허가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동사(同社)에서는 먼저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하려는 의향도 있어서, 개정된 신령에 따라 가토신사(加藤神社)로의 수속(手續)을 게을리 했던 관계상 형식적으로는 신사로서 존재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 여기에 주목하여 부내(府內) 황금정(黃金町, 지금의 을지로)에 거주하는 원(元) 한강신사(漢江神社) 근무 우에자키 아무개(上崎某)와 용산〇〇교(敎) 일파의 아무개(某)가 책동하고, 이에 겸해 이름 하여 신도관구소(神道管究所)라는 것을 통해 사실 현존한 가토신사의 〇〇을 꾸몄던 것이다. (이하 생략)

 

며칠 후 <경성일보> 1932년 10월 25일자에 다시 등장한 고소사건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익명(匿名)으로 표기된 종교단체의 정체는 천리교(天理敎)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우선 가토신사에는 왜군장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그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국 왕자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의 장자)과 순화군(順和: 1580~1607. 선조의 6남), 그리고 가토의 통역을 지냈다는 김관(金官)이라는 조선인도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으로 새로 임명된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육군소장의 인물 사진이다. 그는 가토신사의 건립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4년 4월 19일자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의 설립허가내역이다. 가토신사의 최초 설립은 1914년 12월의 일이지만, ‘용산신사’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계속 지연되면서 총독부령에 의한 설립허가는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6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렀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강압통치가 본격화하던 때와 고스란히 겹치며, 특히 그 자신이 헌병경찰제도의 수장인 ‘총독부 경무총장’을 지낸 만큼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한 장본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앞선 기사에서 눈길을 끌만한 또 다른 내용의 하나는 이곳이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일부일사(一府一社; 하나의 부에 하나의 신사만 두는 것)의 원칙에 따라 허가가 불발되었는데,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유독 이곳 가토신사에서는 1915년 8월의 「신사사원규칙」 또는 1917년 3월의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른 절차를 거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가토신사의 신사설립허가에 관한 기록은 무려 19년 가까운 공백기를 지나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 「휘보(彙報)」에 “경기도 경성부 영정(榮町) 1번지에 가토신사(加藤神祠) 설립의 건, 사이키 츠구시(齋木胤志) 외 25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4월 11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고 기재된 것이 최초이다. 짐작컨대 이 마저도 앞선 기사에 채록된 1932년의 고소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신사(神祠)였던 것이 다시 신사(神社)의 격을 갖춰 설립허가를 새로 받은 것은 일제패망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일이었는데,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5월 18일자 「휘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사창립허가(神社創立許可)] 경기도 경성부 용산구 영정(榮町)에 가토신사(加藤神社) 창립의 건,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 외 62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소화 20년(1945년) 5월 15일부로 이를 허가함.

 

여기에 나오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는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 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927년 7월 14일 정토종 대념사(淨土宗 大念寺; 한강통 11번지)의 사원창립허가와 1943년 10월 20일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신사창립신청 때에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가토신사는 일찍이 조선을 침략한 왜군장수를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상징으로 삼았던 공간이니만큼 일제의 침략전쟁과도 전혀 무관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신보> 1941년 9월 26일자에는 이곳에서 산업진흥과 황군(皇軍, 일본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기원제와 아울러 시국영화(時局映畫) 상영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는 이곳에서 약간 별스러운 행사가 벌어진 흔적도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비행기, 탱크, 오토바이로 남방보도(南方寶島)를 정벌(征
伐), 모모타로회 대표(桃太郞會 代表), 가토신사에 참예 맹서(參詣 盟誓)」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모모타로회(桃太郞會)’의 가토신사 참배 관련 기사내용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이곳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국민의 남방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부내 구용산 방면의 국민학교 생도들 사이에는 동화(童話) 속의 영웅 ‘모모타로(桃太郞)’가 남방의 보배섬을 쳐서 그곳의 금, 은, 보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한 달 전부터 ‘모모타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금정국민학교(錦町國民學校) 고등과 생도 야마모토 유키오(山本行雄, 15) 군을 비롯한 지원병지망소년의용대(志願兵志望少年義勇隊) 60명은 이 운동에 남 먼저 참가하여 모모타로회(桃太郞會)를 조직하여 26일 오후 3시반 원정(元町) 2정목 가토신사에 세 명의 대표자가 복숭아를 그린 ‘일본일(日本一)’의 깃발을 기증하며 다음과 같은 맹서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은 옛날의 모모타로와 같이 씩씩하고 명랑하고 굳세인 소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모타로의 꿩과 원숭이와 개 대신에 우리들은 비행기와 탱크와 오토바이를 가지고 남방의 보배섬을 치겠습니다.
” (사진은 모모타로회 대표들의 기도)

 

여기에 나오는 금정국민학교는 옛 용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전환된 것으로 지금의 ‘금양초등학교(錦陽初等學校, 효창동 126번지)’를 가리키며, 이곳은 원래 조선인 학교였으므로 야마모토 유키오라는 학생 역시 창씨개명한 조선인 아동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이곳을 찾아 ‘모모타로’와 같은 소년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일제 패망기에 이르러 가토신사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금, 2020/02/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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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2]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보병 군조 후지모토 쇼조가 중일전쟁 당시에 소지했던 ‘지나사변출동경력’ 표기 일장기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속부대가 ‘지휘관의 성’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전임 타니 사단장) ― 사노 연대장(대좌; 전임 오카모토 연대장) ― 마츠자키 대대장(소좌; 전임 카와키타 대대장)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의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일반적으로 전쟁상황에 돌입하면 부대 이동, 병력규모, 병과(兵科) 및 병종(兵種), 작전내용, 전투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사항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모부대(某部隊)’라고 표현하거나, 특히 숫자와 관련된 정보는 〇〇〇과 같이 공란으로 처리하여 공표하는 것은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滿洲事變) 시절의 자료를 찾아보면, ‘나남(羅南) 보병 〇〇연대’라든가 ‘〇〇부대’, 그리고 ‘무로(室)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 ‘카무라(嘉村)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주력(龍山部隊主力)’, ‘제〇〇〇단사령부’, ‘야포(野砲) 〇〇연대’라든가 하는 식의 표기방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로 〇단장’은 무로 켄지(室兼次, 육군중장) 보병 제20사단장(용산 주둔)을, ‘카무라 〇단장’은 카무라 타츠지로(嘉村達次郞, 육군소장) 보병 제39여단장(평양 주둔) 을 가리킨다.

 

<매일신보> 1932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만주 출동 관련 기사에는 ‘나남 보병’이라는 표시는 드러나 있지만 나머지 몇 연대라거나 파견병력수에 관한 부분만큼은 〇〇 표시로 공란 처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은 소속부대의 고유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부대로만 소개되어 있다. 확인해본즉, 무로야부대(谷部隊)는 보병 제78연대[연대장 무로야 츄이치(室谷忠一)]이고, 키고시부대(木越部隊)는 보병 제79연대[연대장 키고시 지로(木越二郞)]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〇단장’은 이것이 여단장인지 아니면 사단장인지 하는 정도만 알 수 없도록 가리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또한 부대의 소재지에 나남이라든가 용산이라든가 하는것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보면 구태여 감추고자 하는 군사정보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방식이란 것도 신문지상과 같은 언론매체에 수록되는 보도내용에 대한 통제의 결과였을 뿐이지 부대의 고유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대의 명칭을 인위적으로 감춰 부르는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일전쟁의 전개과정과 맞물려 있는 193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는 육밀(陸密) 제1014호 「동원부대 등(動員部隊 等)의 칭호명(稱號名)에 관(關)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병력 등을 비닉(秘匿)하는 것”을 목적으로 “외지부대(外地部隊)는 부대장의 성(姓)을 붙여 칭호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 ‘내지부대(內地部隊;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보았던 후지모토 쇼조의 일장기에 표시된 소속부대는 바로 이러한 조치에 따랐던 것이고, 1937년이라는 시점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휘관의 이름으로 부대명칭을 정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전보(轉補)되거나 전사(戰死)하게 되면 그때마다 부대명의 변경을 동반하게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부대명칭의 비닉성(秘匿性)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것이 ‘통칭호(通稱號)’ 방식이다.
이에 관한 규정은 1940년 9월 10일에 제정된 육밀(陸密) 제1533호 「통칭호 사용에 관한건」을 통해 공식화하였다. 여기에는 “「소화 16년도 육군동원계획령 세칙」으로써 동원관리관(動員管理官)인 군사령관, 사단장(내지, 조선, 대만 및 만주부대) 등에게 병단문자부(兵團文字符)와 통칭번호(通稱番號)를 배당하고, 이를 동원계획된 부대에 통칭번호로 부여하도록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병단’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단과 여단에 해당하는 편제단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조선주둔 제19사단은 ‘虎(토라)’, 제20사단은 ‘朝(아사)’라는 문자부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가령 제19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5연대(회령)는 ‘虎8505’, 보병 제76연대(나남)는 ‘虎8506’, 그리고 제20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용산)는 ‘朝2053’, 보병 제79연대(용산)는 ‘朝2054’와 같은 방식으로 통칭호를 표시하였다. 그 후 치열한 전쟁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통칭호’의 사용에 관해 이를 강화하는 기밀명령이 거듭 하달되면서 여러 차례 관련 내용이 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
년 4월 20일에는 「육군부대 전시통칭호규정」에 따라 기존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전면 개편 되었고, 이 당시 조선군사령부를 대체하여 1945년 2월 6일에 창설된 ‘제17방면군사령부’의 경우 ‘築(키즈쿠)’라는 통칭호가 채택되었다.

 

‘조선 제23부대’라는 표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지나사변기념사진첩>(1940년 11월 발행)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중국으로 출정하는 ‘조선 제23부대’ 병력이 군기(욱일기)를 앞세우고 용산병영을 떠나는 모습이  <지나사변기념사진첩>에 수록되어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부대 간판은 ‘검열관계’로 글자가 뭉개져 있으나, 사진엽서 또는 다른 사진첩에 포착된 장면을 통해 이곳이 ‘보병 제79연대’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 제23부대라는 주소지 표기가 들어 있는 나카노요시타케(中野義雄)의 개인엽서이다. ‘18(1943).6.5’ 일부인 아래 ‘점검제(點檢濟)’라는 검열확인도장이 함께찍혀 있다.

 

일본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의 소장자료인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의 표지이다.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주요 부대의 소재지 및 통칭호 일람 (1945년 7월 10일 현재)

그런데 1940년 9월 10일자에 하달된 「통칭호 사용에 관한 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매일신보> 1940년 8월 13일자를 보면 “전몰용사 유족에게 금치훈장 수여식을 ‘용산 제23부대’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조선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에 대해 ‘숫자부대명칭’을 사용하는 별도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근거규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확인되질 않는다.
그리고 1940년 11월 14일에 하달된 육만기밀(陸滿機密) 제13호 「재만 제부대(在滿 諸部隊) 통칭호 규정」에 따라 만주 주둔 부대의 경우 ‘병단문자부’를 일괄 ‘만주(滿洲)’로 표기하도록 변경한 바 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關東軍防疫給水部本部)’를 일컬어 흔히 ‘만주 제731부대’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 셈이다.
해를 넘겨 1941년 7월 25일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陸軍大臣 東條英機)의 명의로 제정된 육지밀(陸支密) 제2249호 「만주, 조선에 있어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에 관한 건달(件達)」에 따라 “조선에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는 ‘병단문자부’를 ‘조선(朝鮮)’으로 한다”고 정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 제몇부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이 부분 역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94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성사단(京城師團), 나남사단(羅南師團), 평양사단(平壤師團, 추을사단) 등의 표기는 계속 허용되었으나, 가령 ‘보병 제78연대’와 같은 고유명칭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용산보병연대’라는 정도의 표현조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매일신보> 1940년 9월 25일자에 수록된 「과거 무훈을 찬양, 74부대 개대 기념식(開隊記念式) 성대」 제하의 기사에는 부대명칭을 ‘통칭호’로 감추고 소재지도 공란으로 처리한 실제 사례가 남아 있다.

 

[〇〇] 74부대의 빛나는 개대(開隊)기념일을 당하여 부대에서는 〇〇〇〇〇 원두에서 23일 오전 9시부터 개대기념식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만추(晩秋)의 청공은 74부대를 축복하는 듯 맑게 개었다.
식장에는 가토(加藤) 부대장을 비롯하여 나카노(中野) 부대 본부장, 사이토(齋藤) 44부대장, 이구로(伊黑) 병사부장, 기쿠치(菊池) 헌병대장, 오가타(緖方) 해군중좌, 기타 〇〇있는 각부대장 이하 관민 다수가 참석하여 금번 지나사변을 물론 ‘노몬한’ 사건, 장고봉(張鼓峰) 사건 등에 있어 빛나는 무훈을 날린 74부대의 위훈을 찬양, 식은 가토(加藤) 부대장의 식사와 옥관봉전(玉串奉奠)이 있은 후 최후로 사토(佐藤) 부윤으로부터 부민을 대표하는 옥관봉전이 있은 후 식을 마치고 계속하여 운동경기회로 들어갔는데 경기 번외로 서문고녀(西門高女)의 기원 2600년 창가가 일반의 인기를 끌고 부민대망의 황취(荒鷲, 아라와시. 전투기를 뜻함) 격추의 대모의전이 전개되어 10여 문의 거포가 일제히 불꽃을 올리어
당일 〇〇〇 일대는 마치 실전장(實戰場)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오후 5시경에 산회하였다.

 

이 기사에는 74부대의 소재지에 대해 모두 공란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서문고녀(西門高女)’라든가 ‘사토 부윤(佐藤 府尹)’이라든가 하는 구절로써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행기 격추를 위한 10여 문의 거포 운운”하는 부분은 이곳이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단서를 취합하면 여기에서 언급된 제 74부대는 바로 평양 평천리(平川里)에 자리한 고사포 제6연대(1935년 창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사포 제6연대는 가토 타카미네(加藤隆峰) 연대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를 ‘가토부대’라고 지칭한 것이며, 축하내빈으로 참석한 ‘사이토 44부대장’의 정체는 확인 결과 사이토 마사히코(齋藤正彦) 보병 제77연대장(평양 주둔)인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14일자에 소개된 조선 제26부대(야포병 제26연대)의 제22회 창립기념식 광경이다. 이날 함께 제막된 ‘충혼비’에 새겨진 ‘忠魂’이라는 글씨는 1938년 6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제20사단장(용산)을 지낸 우시지마 미츠네(牛島實常) 육군중장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 제27부대(공병 제20연대)의 창립기념식 모습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병 제20대대로 출범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치중병대대와 함께 일괄 연대 편제로 승격된 바 있다.

 

이러한 통칭호 부대명칭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눈에 띄질 않는데, 아쉬운 대로 <매일신보>와 같은 보도내용 등에 드러난 단서들을 하나씩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람표 형식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주요 부대 통칭호 일람표

해방 후에 간행된 강제동원 관련 여러 증언 자료집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도 이러한 부대명칭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육군지원병’이건 ‘학도지원병(학병)’ 이건 ‘징집병’이건 간에 강제동원을 통해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에게는 입영부대 또는 배속부대였던 22부대니, 24부대니, 30부대니, 42부대니, 44부대니 하는 이런 명칭들이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연결고리로서 어김없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한 전략기법의 하나로 짜낸 것이 바로 ‘통칭호’의 개념이다. 지금도 여느 군부대 앞의 정문 기둥 마다 걸려 있는 ‘육군 제XXXX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한 간판이란 것도 본연의 군사보안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구태여 그 뿌리를 따지고 든다면 일본군대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 2019/11/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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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
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
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

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같은해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

이제는 친일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현장의 친일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
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
족문제연구소가 경기도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
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 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 2021.2

화, 2021/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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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0]

용산중학교, 일본 군인과 철도종사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 포진한 일본인 학교들의 연혁

 

이순우 책임연구원

 

총독부 기관지인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는 이른바 ‘용중(龍中, 용산중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인 무로 켄조(室兼三)라는 육군대위가 중국 난주(蘭州) 공습에 참가하였다가 고사포에 맞아 자폭(自爆)하면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그의 모교 담임선생이었던 마츠나가 교유(松永 敎諭)의 말을 빌려 그가 용산중학교를 다닐 때의 증언담이 이렇게 실려 있다.

 

무로 군은 소화 5년(1930년) 치바중학(千葉中學)에서 전학을 왔는데 소화 7년(1932년) 졸업 당시는 전체 생도 183명 중 141등으로 전혀 볼품이 없는 성적이었으나 졸업 후에 육사(陸士, 육군사관학교)의 난관돌파를 목표로 삼아 맹렬히 분발하여 마침내 희망하던 육사를 패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바리즘(頑張りズム)은 소위(所謂) 용중혼(龍中魂)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왼쪽)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 수록된 ‘용산중학교’ 출신 육군대위 무로 켄조의 전사관련 보도내용이다.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 주둔 제20사단장인 탓이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30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신임 제20사단장 무로 켄지 중장’의 모습이다.
그의 아들이 용산중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한 시기는 그의 재임기간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애당초 일본에서 경성으로 전학을 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용산 주둔 일본군 제20사단장인 육군중장 무로 켄지(室兼次, 1876~1966. 재임 1930.8.1~1932.8.8)였던 것이다. 일본 치바현(千葉縣)에 자리한 육군야전포병학교(陸軍野戰砲兵學校)의 교장이던 무로 중장이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장으로 부임한 때가 1930년 8월인데,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에 따라 치바중학교에서 용산중학교로 전학했던 시기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나타난 사례는 바로 용산중학교의 존재 이유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서 주로 군인들의 자제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이라는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이곳은 분명 일본인 학교인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들이 이 학교를 다닌 경우가 더러더러 눈에 띄기도 한다.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다.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劉升烈)의 차남이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수를 지낸 큰 아버지 유익렬(劉益烈)에게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다섯 살 되던 해 부친이 대위로 승진해 함경북도 나남으로 부임지를 옮기면서 경원군으로 이사했다.
경원의 소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했다. 1년만인 1932년 부친이 용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대위로 옮기자 경성 삼판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2년 경성의 용산중학교를 입학했으나 3학년 때 부친이 평양 77연대로 전속(轉屬)되어 평안북도 일원의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의 배속장교를 맡게 되자 신의주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4학년 2학기에 평양 77연대에서 일본육사 예과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9년 12월 일본육군예과사관학교를 입학했다. (하략)

 

용산병영지의 확장과 맞물려 1918년에 설립되고 다시 1919년 6월에 준공된 용산중학교의 모습이다. 이 학교는 원래 관립학교였으나 1925년 4월부터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경성과 인천(京城と仁川)>, 1929)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일본군 대대장 김석원(金錫源) 보병소좌의 가정탐방기사이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 김영철(金泳哲)이 용산중학교에 재학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수록된 일본군 대위 출신 ‘유재흥(劉載興, 1921~2011)’ 항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유재흥 또한 1932년 용산에 자리한 삼판소학교(三坂小學校, 지금의 삼광초등학교)를 거쳐 용산중학교에 재학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군 보병대위였던 아버지 유승렬(1891~1958)의 근무지를 따라 다닌 결과로 볼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장으로 중일전쟁에 가담했던 보병소좌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의 경우도 동일한 사례에 속한다.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출정장사가족(出征將士家族) 신년(新年)맞이, 가장(家長)의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祈願)으로 영신(迎新), 김석원 부대장 가정(金錫源 部隊長 家庭)」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의 장남 김영철(金泳哲, 1921년 2월생)이 용산중학교 4학년생이면서 경성제대 예과 입학준비에 분주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용산중학교의 설립 연혁을 잠시 살펴보면, 이 학교는 1918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에 따라 대전중학교와 동시에 신설된 내력을 지녔다. 원래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중학교의 연원은 1909년 5월 22일에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소유였던 독립관 국민연설대를 빌려 개교한 ‘경성거류민단립(京城居留民團立) 경성중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5월 22일에 발행된 ‘경성거류민단립 경성중학교 개교기념엽서(2매)’이다. 독립문 오른쪽 언덕위에 보이는 돔 모양의 건물이 독립관에 딸린 국민연설대(國民演說臺, 일진회 소유)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학교는 이내 1910년 4월 1일 관립학교(官立學校)로 전환되어 ‘통감부중학교’가 되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총독부중학교는 전국에 걸쳐 유일무이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을 갖지 않았다가, 1913년 4월에 부산에도 총독부중학교가 추가 설치되면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비로소 ‘경성중학교’로 명명되었다.
총독부중학교(관립)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경성, 부산, 평양, 용산, 대전, 대구, 원산, 광주, 나남의 순서로 추가되었고, 1925년 4월 이후 제학교관제(諸學校官制)의 개정을 통해 일괄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로 전환되었다.

총독부중학교 설립 연혁

<조선총독부관보> 1925년 2월 13일자에 실린 총독부중학교의 생도모집공고문이다. 이 당시에는 보통학교 졸업자(조선인)라도 중학교(일본인 학교)에 입학지원은 가능하였으나, 구술시험 항목을 보면 “국어(國語, 일본어)에 정통하지 못한 자는 불합격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용산중학교의 등장에 따라 서울지역에서 일본인 남자학교는 경성중학교와 더불어 단 2개 학교만 존재했으며, 이러한 상태는 1936년 2월 29일에 성동공립중학교(城東公立中學校, 행당리 70번지)가 신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용산중학교는 개교 당시 경성중학교 재학생의 일부를 인계받는 형태를 취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경성부 편찬,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1941), 609쪽에는 용산중학교 설립 초기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매일신보> 1922년 5월 16일자에 공개된 ‘용산중학교’의 입학시험문제이다. 주로 일본어 해독능력을 측정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용산중학교는 대정 7년(1918년) 3월 칙령 제50호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 개정에 의해 설치된 관립중학교이며, 동교(同校)는 동년 4월 16일 부내(府內) 정동(貞洞) 소재 조선총독부의 한 청사(廳舍, 정동에 있는 3법원 자리) 내에서 가개교(假開校)를 행하고, 다시 동월(同月) 영락정(永樂町, 지금의 저동)에서 가기숙사(假寄宿舍)를 개시했다.
생도(生徒)는 이에 앞서 경성중학교 재학 제2학년 생도 중에서 50명을 인계받고, 제1학년 150명은 경성중학교장에 위촉(委囑)하여 2월중에 모집을 완료했던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는 후쿠시마 마타야(福島亦八)가 취임했다. 여기에다 동교는 익(翌) 8년(1919년) 6월 16일 부내 한강통(漢江通)에 신축중인 제1기 공사가 준공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용산중학교의 설립시기가 일본군 용산병영지의 추가 확장 과정과 고스란히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일제는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師團)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고, 새로운 편제에 맞춰 이들을 위한 병영지 건설공사를 광범위하게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1916년 4월에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위 : 용산중학교에 이어 1922년에 군영지 배후지역의 일본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신설된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의 전경이다. 앞쪽으로 하천의 물길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1938년 4월호)

아래 : 1919년 4월에 창립될 당시의 삼판소학교(현재 삼광초등학교 자리) 전경이다. 아래쪽에 보이는 밭들은 몇 년 후에 학교 운동장으로 변하게 된다. (경성부,<경성부사> 제3권, 1941)

 

이러한 변화에 맞물려 원래 대전(大田)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9연대가 1917년 11월말에 용산으로 재배치되었고, 이들이 머물 보병영(步兵營; 1917년 6월 기공, 1920년 3월 준공)’이 기존의 보병 제78연대 병영터 서쪽 일대에 남아 있던 광활한 대지를 정하여 새로 건설되었다. 또한 제28기병연대와 제
20공병대대(서빙고동), 그리고 제26야포병연대(종전 용산연병장 자리)의 본부와 병영이 완공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 결과로 용산 지역일대는 시가지 팽창과 더불어 인구유입이 급속히 늘어났고, 당연히 이들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 설립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던 것이다. 용산중학교에 이어 이곳과 인접한 지점에 통학거리의 편의를 고려하여 경성삼판공립심상소학교(京城三坂公立尋常小學校, 1919년 4월 설립)와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京城第二公立高等女學校, 1922년 5월 설립)가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들어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이 가운데 삼판소학교의 설립과정에 대해서는<경성부사> 제3권(1941), 603~604쪽 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급격한 인구증가와 과밀학급해소가 주요한 배경이었음이 적시되어 있다.

 

경성학교조합(京城學校組合)이 경영하는 8개 공립소학교의 아동 총수는 대정 7년(1918년) 7월말 현재 8,140명으로 이를 146학급(學級)으로 편제(編制)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일출(日出, 히노데), 남대문(南大門), 앵정(櫻井, 사쿠라이), 종로(鍾路) 및 용산(龍山) 등 5 소학교는 모두 18학급 이상으로 소학교령(小學校令)에 의한 제한을 초과하는 것이 총계 9학급에 달하고, 기타 3 소학교에서도 아동수용의 여지가 전혀 없어서 대정 8년도(1919년도)에 있어서 증가하는 취학아동 약 500인에 대해서는 새로이 1개교를 설립하지 않는 한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학교조합은 조합회의 결의를 거쳐 부내 삼판통(三坂通) 186, 187, 238, 239번지에 하나의 소학교를 신축했던 것이었다. 교사(校舍)의 대부분은 대정 7년도(1918년도)에 건축하고, 일부분은 필요에 따라 점차 건축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대정 7년(1918년) 9월 7일부로 설립인가신청(設立認可申請)을 하였고, 동년 10월 2일부로 인가를 받았다.(중략)
또한 동교 구역은 고시정(古市町, 동자동), 길야정(吉野町, 도동) 1정목과 2정목, 삼판통(三坂通, 후암동), 서계동(西界洞), 청엽정(靑葉町, 청파동) 1, 2, 3정목, 강기정(岡崎町, 갈월동),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 2, 3, 4정목이며, 동 구역 내에 거주하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호수(戶數) 및 인구는 대정 6년(1917년) 12월말 현재로 호수 1,126호, 인구 3,963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한 경험을 지닌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성용산공립소학교동창회(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가 펴낸 것으로 <용산소학교사·용회사(龍山小學校史·龍會史)>(1999)라는 책이 있다. 우선 이 책의 114쪽을 보면 “본교에 다니는 아동(兒童)은 철도(鐵道)와 군인(軍人)의 자제(子弟)가 많았다”는 설명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같은 책, 127쪽에도 이 학교의 가정환경과 관련하여 “군인관계(軍人關係), 철도관계(鐵道關係), 일반(一般, 주로 상공인) 세 가지로 대별(大別)된다”는 표현이 있는데, 용산 지역에 포진한 여러 일본인 학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학생구성상의 특징이 잘 묘사된 구절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병영지와 그 배후공간에 흩어진 흔적들은 상당수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지만, 유독 일본인들의 자제들이 다닌 학교공간만큼은 100년의 세월을 넘기도록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거나 비교적 고스란히 그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교육은 100년 대계”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는 얘기가 되고 말았으니 이 대목에서 그저 쓴웃음만 짓게 된다.

금, 2019/09/2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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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2]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경성일보> 1942년 7월 9일자에는 남방 지역의 일본황군(皇軍)이 보내준 고무로 만든 ‘전첩 기념 고무공’이 경성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9일자에도 남방 지역 일본군의 선물인 ‘전첩 기념 고무공’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에게도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매일신보>1942년 6월 20일자에는 남방 전선의 전첩 선물로 고무공과 운동화가 조선인 학동들에게 배급된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병정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일본제국관보>1941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상공성 고시’ 내역에는 ‘일불인 공동방위기념 고무볼(日佛印 共同防衛記念ゴムボール)’ 개당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매일신보>1941년 7월 29일자에는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재 스미타 기관(澄田機關)의 스미타 소장(澄田 少將)과 도쿠(Jean Decoux)총독 사이에 공동방위에 관한 세목협정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들여온 고무원료로 제작한 고무공이 처음으로 ‘공동방위 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조선신문> 1933년 9월 18일자에 소개된 만주빵 제조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이다. 만주사변 2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만주침략의 부산물로 얻어낸 만주산 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만주빵’이었다. (오른쪽) <동아일보> 1938년 9월 1일자에 소개된 파인애플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는 “파인애플은 열대지방 과실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대만산(臺灣産)입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처럼 대만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조선에까지 쉽사리 유통된 것은 이들 지역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일자에 수록된 화태청(華太廳) 포획 해구신(海狗腎)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곳 역시 일본의 점령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 여타 식민지로 쉽사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수, 2021/07/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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