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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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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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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여러 가지 이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답 : 저는 체육대학에서 운동재활과 트레이닝을 전공했어요. TV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라
고 나오잖아요. 그런 스포츠 관련학과입니다. 저는 운동재활 쪽에 집중했는데 그러다보니 트레이닝도
당연히 하게 되었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처음에 풍납동에 아산병원, 그때 당시에는 중앙병원이었는데 그곳 건강증진센터 내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그러다 학교 내의 생리학 실험실연구소에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됐죠. 병원 근무 후 모교에서 자리가 생겨서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모교 연구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다 집안에 어른들이 아프시고 동생도 아프게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매장 투자방식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초창기 한 15개 정도 매장이 있을 때 같이 시작했죠

문 : 투자만 하신건가요?

답 : 돈이 조금밖에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매장 투자를 결심했죠. 조금 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당시 저를 좋게 봐준 실장님이 계신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우신 분이죠. 그러다 나중에는 회사에 정상적인 출근을 했어요.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기 전에 조교 임기를 마치고 당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천대학교에 강사로 들어갔어요. 인천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님이 제가 진행하는 운동생리학 실험을 좋게 봤는지 마침 그때 강의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인천대에 외부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지금도 그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처음에는 매장 마케팅 업무를 했어요. 매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로컬 마케팅을 제 지인과 주변 인맥에 도움을 받아 진행했죠. 그러면서 규모가 조금씩 늘어났죠. 마케팅이라는 게 들어간 비용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케팅전문가들은 이번 홍보는 얼마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분석하는데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글로벌 IT 기업에 근무하던, 옛날 소대원이었던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면서 그 회사의 마케팅 방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실전마케팅이란 말을 써가면서 어떤 제품을 팔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제품과 브랜드의 가치를 함께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그 중에서 가수 에픽하이와 함께 콜라보한 제품을 출시해 보았죠. 이후 회사 차원의 자체 컴필레이션 음반도 3장이나 진행했어요. 그 외 홈쇼핑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했었죠. 그 당시 일과 강의를 병행하다가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강의는 조금씩 줄여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말마다 실험이 있으면 실험에는 꼭 참가하고 그랬었죠. 제가 또 실험실 출신이어서 실험에 대한 재미는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요. 마우스 테스트나 행동테스트 이런 것들을 선배 교수님이랑 종종 진행했었어요.

문 : 커피 티백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답 : 삼각뿔 모양의 커피 원두 티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먹을 필요가 있냐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했죠. 삼각뿔 모양이니까 안에 들어가는 양도 늘려야 했어요. 우려내는 정도를 고려해서 부직포가 아니라 실크타입의 비싼 재료를 썼어요. 그래서 투과율도 좋고 부직포 티백에서 나오는 잔맛을 최소화했어요. 부직포 티백에서는 차맛을 왜곡시키는 잔 맛이 나거든요. 커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 CJ 홈쇼핑에 런칭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완판이란 걸 해봤어요. 이렇게 하면 브랜드가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저를 믿고 함께 해준 홈쇼핑 담당자님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의 조언이 지금도 제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문 :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저는 1991년도, 대학교 2~3학년 때 연구소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 내력상 알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초대회장이셨어요. 4·19 당시 3학년으로 법대를 다니셨어요. 4월 19일에 아버지는 교내 학생들과 교문을 뚫고 나가다가 선두에서 바로 경찰한테 잡혀서 끌려가셨는데 이승만이 하야한 날 지프차에 실려 있다가 집 앞에 버려졌대요. 답십리 해병대사령부에 잡혀있으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다가 이승만이 하야한 것도 몰랐대요. 그러다 갑자기 지프차 타라고 했대요. 집에 와보니까 아버지 본인의 영정이 있더래요. 행방불명이니까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때 빨리 잡히신 게 그 나마 다행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 동지였던 노희두 씨는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지금 4.19묘지에 계세요. 아버지는 법대 졸업 후 4.19 이후 상황에 회의가 들었는지 군대에 바로 갔고 제대 후에 교직원을 하시다가 교수를 하셨죠. 현재는 돌아가셔서 4.19 묘지에 여러 동지분들과 함께 계세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문 : 어머님도 연구소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답 : 제 어머니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친손녀에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찬’자 ‘기’자 이신데 일제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중 일찍 돌아가셔서 해방되고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분들이 오실 때 유골로 같이 오셨어요.

 

김창숙선생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주로 지내셨다고 하셨구요. 어머님은 김구 선생님(어머니는 김구 선생님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라구요)도 직접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일화로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곰보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
려고 할 때 김창숙 선생님이 혼자 시위했는데 외증조부의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따라다녔대요. 그리고 제가 여기 효창동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과 유년기 시절에는 말썽을 부리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러면 안 된다고 일본놈들과 독재자들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냐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라서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초창기부터 알았던 거죠.

문 : 가입은 2015년에 하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는 저한테 친숙한 단체예요. 이질감이 없는 곳이죠. 제가 결혼할 때 김시업 선생님이 주례를 해주셨는데 그분이 심산 김창숙 연구소 회장을 하시면서 심산상을 만드셨고 1992년에 고 임종국 선생이 수상자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신 받았죠. 저한테는 그렇게 친숙한 단체라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저는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 있으면서 탈북자 학교를 가끔 후원했어요. 아버지도 실향민이고 하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후원 요청을 하니까 좀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 회사가 내 회사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2015년도에 회사를 나오게 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연구소 후원을 시작했죠.

문 : 효창독립커피 이야기를 해볼까요. 처음에 제안하신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답 : 제가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한 게 2005년에서 2015년까지, 투자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네요. 그러다 보니 커피업계를 두루두루 알아요. 지금 현직에 계신 분도 알고 있고요.
효창독립커피도 그런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죠. 방실장님을 만나서 최초로 그 말씀을 드렸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굉장히 좋은 취지, 정신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주변에서 연구소의 취지나 사업내용을 잘 모르더라고요. 더군다나 젊은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그래서 연구소를 더 많이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효창독립커피 사업을 떠올려 그 제안서를 만들어서 연구소에 왔던 거죠. 젊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커피라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그리고 제안의 취지, 사업 목표와 방안에 대해 방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문 : 효창독립커피를 위해 꾸려진 팀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답 : 제가 우선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방실장님에게 커피를 통한 수익사업을 제안하니까 방실장님이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셨죠. 이후 제가 브랜드 취지를 이해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들과 논의하기 위해 카페리즈의 강인규 대표를 만났어요. 그분은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고, 정말로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에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분, 그분이 효창독립커피의 원두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유통은 성빈인터내셔널의 전혁준 대표가 맡아주기로 했어요. 이렇게 두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효창독립커피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죠. 지금 효창몰이라는 쇼핑몰을 구축중이고 그곳을 플랫폼으로 효창독립커피와 또 다른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이고요. 여기에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차리석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그 후손인 차영조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가 그림을 그려주셨고 켈리그래프 예술가도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업과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예술가가 한데 모여 뜻깊은 효창독립커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 사업의 제안자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답 : 막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또 여유자금이 생긴다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에 쓰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엄청나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좋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자부심은 본인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빛나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숨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업의 수익을 통해 그런 세상보다는 우리의 선대가 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그분들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요. 그 후손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해방 후 남한에서 수립된 정권에 의한 전도된 가치관의 범람, 불의와 정의의 뒤바뀜으로 인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 보편적인 정의를 붕괴시키는 것, 허세와 위선, 기만과 권모술수로 인간관계를 파멸시키고 나아가서 남북 분단 상황을 조장, 이용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 하나라도 바치거나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민주주의와 모두의 정의를 위한 희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화, 2020/05/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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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6]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원화성 팔달문 쪽에서 성벽 옆의 계단길을 삼백미터 남짓 따라 올라가면 서남 암문 앞쪽에 이르러 숲속의 작은 빈터에 자리한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독립기념탑’이란 명칭으로 중포산(中布山)에 조성되었던 것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1969년 4월 12일 창립)에 의해 그해 10월 15일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기념탑 바로 옆에는 이것과 함께 옮겨온 약간은 이색적인 또 다른 기념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앞뒷면에 한글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띈다. 한쪽 옆에는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기 4281년 8월 15일 건립(유근홍 씀, 이상훈 만듬)’이란 글씨가 있다.

 

수원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이다. 원래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있었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 관련 기사이다. 일제 때 조성된 ‘순직경찰관초혼비’를 헐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내력이 궁금하여 신문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 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滋玉)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泰鼎)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하략)

 

이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은 표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1월 16일에 제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궁금증은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독립기념비, 내무장관 참석 제막식> 제하의 기사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과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하략)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의 정체가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하고 맞아죽은 일본인 순사들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1889~1919)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으로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에게 쫓겨 돌에 맞아 처단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 1895~1919)는 수원경찰서 화수리경찰관주재소의 순사이며,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주재소로 몰려든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총격을 가하며 도망을 가다 그를 추격한 군중에 의해 역시 처결되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 (1937)에 수록된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관련 항목이다. 여기에는 “소요사건 때 폭동진압 중 투석(投石)에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을 보면,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성일보> 1919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서 노구치 순사부장과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의 사망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추모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리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숨진 만세시위대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듣자하니 독립기념비의 기단석은 추모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니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제치하를 벗어난 극복의 의미를 일부나마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은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비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자료가 알려진 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일본어 신문 몇 종류를 뒤져보니,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신히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경성일보>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비’의 제막 당시 모습이다. 이 비석의 사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여기에서 말하는 ‘화홍문의 고대’는 앞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제막장소였던 ‘방화수류정 언덕’과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히 이 기사에는 그동안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비석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통해 비석의 전면에는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순직한 경찰관은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이외에는 전무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이 초혼비는 결국 전적으로 3.1만세사건 당시에 숨진 두 일본인 경찰관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들을 위한 초혼제가 거행된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매일신보> 1929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제9회 순직경찰관초혼제의 광경이다. 여기에는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죽은 일본순사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모습과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제단에 옥관(玉串, 타마구시)을 바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살펴보니까 3.1운동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 헌병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위한 기념비가 건립된 흔적이 눈에 띈다. 우선 강원도 이천군에서는 이천헌병분견소(伊川憲兵分遣所)의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죽은 고세진(高世鎭)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어 1921년 10월 15일에 제막된 일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중상을 당하여 결국 숨진 성천헌병분대장 헌병대위 마사이케 카쿠조(政池覺造)의 기념비가 특히 사이토 조선총독의 휘호를 받아 1925년 10월 10일에 제막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경우, 그들에 대한 초혼제가 수원지역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혼비가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에도 당연히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혼제는 초기에는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거행되었고, 1926년 7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어김없이 초혼제가 개최된 바 있었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는 고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처럼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는 해마다 거행되면서도 정작 그들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동아일보> 192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46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아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초혼제를 지켜보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월 1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 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백 한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 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이 기사의 원문에는 원래 기사작성자의 표시가 없으나 해방 이후에 나온 소오 설의식(小梧薛義植, 1900~1954)의 <금단의 자유>(새한민보사, 1949), 150~151쪽에 이 기사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청년기자 시절의 그가 이 글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순직경찰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죽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하겠다.
해방 이후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헐리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들어선 것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 외면받고 있던 수백, 수천의 영혼에 대한 추모와 위령의 뜻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목, 2020/03/26-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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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1)

항일 민족지의 출발은 조선・동아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

김승은 학예실장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3‧1운동 101주년인 올해 우리나라 거대 두 신문사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100주년 특집호 표지에서 “조선일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었고, 조선일보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다음 100년에도 “사실 보도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 100주년 사설을 통해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연 두 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과거 100년에 이어 다음 100년의 존재가치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의 대명사, 살아 있는 언론권력으로 ‘검언유착’ ‘권언유착’을 일삼으며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온 대표적인 신문이니 말이다. 100주년 기념사가 사과와 반성이 아닌 자화자찬 일색인 것은 놀랍지도 않다. 현재도 매 시각 쏟아내는 기사마다 의혹만 부풀리고, 갈등을 부추겨 정치쟁점화하고, 인신공격에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으며, 사실 왜곡을 확대 재생산해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진실은 주장에 갇히고 정의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일들이 최근에 더욱 자주 목격된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언론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 기득권을 토대로 여전히 반역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 두 신문 이야기>

 

동아투위‧조선투위 등 57개 언론‧시민단체는 이미 작년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을 꾸렸다.
적폐언론 청산을 위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발간, ‘조선일보100년’ 전시,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리 연구소도 지난 100년 간 두 신문사가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오욕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 자신이 써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두 가지 기획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뉴스타파와 공동 기획한 ‘조동(朝東)100년: 두 신문 이야기’이다.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총 13편의 연속보도 가운데 연구소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6편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소와 역사디자인연구소, 뉴스타파는 두 신문의 창간부터 1940년 8월 폐간까지 기사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 특히 1937년 이후 일제 침략전쟁과 총동원체제에 두 신문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추적했다.
두 번째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 준비하는 기획전시이다. 두 신문사는 100주년 기념사에 여전히 ‘민족지’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내걸었다.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그들이 민족사에 기여한 ‘자랑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신문사는 1937년 이후 노골적인 일제 협력과 침략전쟁 미화에 지면을 할애한 전쟁부역언론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땅히 해방 후 철저히 청산되었어야 할 언론사였고, 사주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신문사는 부역의 역사를 은폐하고 온전히 ‘민족지’로 다시 포장해 과거를 날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그들이 덧발라온 분칠을 벗겨내고 자신들이 내뱉은 기사를 통해 민족을 배반한 거짓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획전시는 경술국치 110년을 맞는 8월, 그것도 일제의 폐간 농간에 순응해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8월 11일에 개막할 예정이다. 개막을 앞두고 앞으로 3회에 걸쳐 <민족사랑> 지면을 통해 기획전의 일부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누가 ‘민족지’인가

이번 호에 소개할 첫 번째 주제는 “과연 두 신문은 민족지인가”이다. 창간 65주년을 맞았던 1985년, 두 신문은 꽤 떠들썩하게 상대방 신문을 “친일신문”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족지 논쟁’으로 불린 이 사태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아 구축한(!) 디지털아카이브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첫 포문을 열자,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반일, 친일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사보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동아‧조선 창간과 ‘민족지’ 시비에 대하여」에서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공세에 나서 4월 19일자 사보 「우리의 입장-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에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 동맹군인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신문이 동아일보”라며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었다고 반격했다. 또한 “민족사의 내측에 숨겨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가 무려 35년 전에 ‘친일청산’을 주장했었다니 말이다. 물론 ‘민족지논쟁’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독재를 찬양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부역언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친일청산을 국론분열・친북용공으로 몰아세우는데에는 ‘일심동체’였다.

 

 

항일 민족 언론의 부활, 조선독립신문

그렇다면 이들이 자인한대로 두 신문사는 과연 얼마만큼 ‘친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는 군대와 각종 식민지 악법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언로를 차단해 조선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문명과 번영을 기약한 “한일병합”은 무력 탄압과 차별로 점철된 “강점”이자 “병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 9년 만인 1919년,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만세운동의 열기는 일제의 탄압에도 반년 넘게 지속됐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한 장 한 장 만들어 배포한 지하신문들이 끌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모든 민족 언론이 폐간됐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언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지하신문은 바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3월 1일부터 배포된 <조선독립신문>이다. 신문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호외 형태의 단면 인쇄지였지만, 항일 민족언론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외에도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 <국민신문> <진민보> 등 약 30여 종의 지하신문이 1919년 내내 전국에서 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제 당국에 의해 ‘적발’돼 우리는 그 실체를 알 뿐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3.1(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 소장) 최초로 발간된 지하신문. 초기 천도교 계열의 신문 발행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9호부터는 이름 모를 후계자들이 발행을 이어갔다. 현재까지 43호와 호외, 국치기념호가 제작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이 신문이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물 차압의 건 보고 통보」 1919.4.2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가 출판법 위반으로 발매·배포를 금지해 압수 처분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의 목록들이다. 이 압수목록은 3•1운동 당시 얼마나 다양한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발행된 항일 지하신문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축소‧왜곡 보도하자 이에 맞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 <진민보>에 실린 신문의 역할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라는 민족 언론의 사명 그 자체였다.
“우리의 민족적 운동을 한껏 옹호하라, 우리의 운동이 안팎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속하게 보
도하라,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나아가더라도 소리만은 벽력같이 크게 질러라.” 항일지하신문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친일파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국적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해 일제 주구가 된 친일경찰과 헌병보조원들, 허위‧왜곡보도를 일삼았던 매일신보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신랄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인 민원식에 대해 <조선독립신문>은 “부여족의 면피(面皮)로서 일본의 혼을 가졌다. 인류의 골격으로서 짐승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굴뚝을 만들어야

이렇게 3‧1운동의 의의를 전파하고 혁명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언론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당국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미리 막지 못한 이유를 조선인의 민심을 파악할 조선인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지하신문을 압수하고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발행을 허가해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통해 민심을 살피거나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당시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기 위한 분출구, 즉 ‘굴뚝’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조선어신문의 허용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지하신문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민족 언론의 부활을 이끌었으나 총독부가 정작 신문 발행을 허가한 대상은 친일파들이었다. 조선인 신문 발행 곧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문화정치’의 상징과 같은 조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총독부가 발행 허가한 신문―조선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은 민원식이 주도한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주도한 조선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적한대로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의 합작인 동아일보 세 신문뿐이었다. 앞서 지하신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민원식이 ‘동화주의’를 내걸고 참정권‧자치운동을 벌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된 후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조선‧동아 두 신문이 조선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허가를 받을 때 비정치적인 ‘실업계 신문’을 표방했다. 이를 주도한 면면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시사신문과 함께 우군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을 가졌다.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한 세력이 대정친목회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사사에도 간간히 밝혔지만, 발기인 39명 중 32명이 대정친목회 회원이자 임원이라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게 실체를 알 수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망라돼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한 조선 최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자력으로 독립은 불가능하다’ ‘조선인은 실력을 길러야한다’며 일본 제국의 통치에 잘 따라서 산업 발달과 문화 향상을 이룰 것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한 조선일보는 초기부터 ‘친일신문’으로 민중의 배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극단적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 30건의 압수, 23회의 발매 반포금지, 2회의 정간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 최대의 친일단체가 가장 탄압받는 ‘저항신문’을 발행한 꼴이다. 이에 대해 장신 박사는 <개벽> 제37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그들이 ‘항일’ 기사를 게재한 이유는 경영난 타개를 위한 ‘판매 확장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동경유학생 등의 동아일보 「성토문」

 

그러면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순항했을까. 최근 연구소는 1924년 일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의 원문을 입수했고 이번 전시회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 성토문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서 발단이 됐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는 일제에 타협적인 정치운동을 주장한 이광수의 사설을 실었다. 즉각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과 배척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멀리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도 ‘성토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성토문에는 동아일보를 향한 민중의 배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사회까지 전파됐다. 민족지로서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는 창간 4년 만에 김성수 일가에 장악당해 사익을 추구하는 언론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정론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신문이다. 이들의 출발이 ‘친일’에 오랜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찬승, 「3•1운동기 지하신문의 발간 경위와 기사내용」, <동아시아 문화연구> 44권, 2008
박용규, 「3•1운동기 항일지하신문의 친일파 비판」, <언론정보연구> 56권 4호, 2019
장신, 「1920년대 대정친목회의 조선일보 창간과 운영」, <역사비평>, 2010.8.
장신, 「1924년 동아일보의 개혁운동과 언론계의 재편」, <역사비평>, 2006.5.

화, 2020/05/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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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2]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보병 군조 후지모토 쇼조가 중일전쟁 당시에 소지했던 ‘지나사변출동경력’ 표기 일장기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속부대가 ‘지휘관의 성’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전임 타니 사단장) ― 사노 연대장(대좌; 전임 오카모토 연대장) ― 마츠자키 대대장(소좌; 전임 카와키타 대대장)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의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일반적으로 전쟁상황에 돌입하면 부대 이동, 병력규모, 병과(兵科) 및 병종(兵種), 작전내용, 전투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사항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모부대(某部隊)’라고 표현하거나, 특히 숫자와 관련된 정보는 〇〇〇과 같이 공란으로 처리하여 공표하는 것은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滿洲事變) 시절의 자료를 찾아보면, ‘나남(羅南) 보병 〇〇연대’라든가 ‘〇〇부대’, 그리고 ‘무로(室)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 ‘카무라(嘉村)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주력(龍山部隊主力)’, ‘제〇〇〇단사령부’, ‘야포(野砲) 〇〇연대’라든가 하는 식의 표기방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로 〇단장’은 무로 켄지(室兼次, 육군중장) 보병 제20사단장(용산 주둔)을, ‘카무라 〇단장’은 카무라 타츠지로(嘉村達次郞, 육군소장) 보병 제39여단장(평양 주둔) 을 가리킨다.

 

<매일신보> 1932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만주 출동 관련 기사에는 ‘나남 보병’이라는 표시는 드러나 있지만 나머지 몇 연대라거나 파견병력수에 관한 부분만큼은 〇〇 표시로 공란 처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은 소속부대의 고유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부대로만 소개되어 있다. 확인해본즉, 무로야부대(谷部隊)는 보병 제78연대[연대장 무로야 츄이치(室谷忠一)]이고, 키고시부대(木越部隊)는 보병 제79연대[연대장 키고시 지로(木越二郞)]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〇단장’은 이것이 여단장인지 아니면 사단장인지 하는 정도만 알 수 없도록 가리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또한 부대의 소재지에 나남이라든가 용산이라든가 하는것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보면 구태여 감추고자 하는 군사정보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방식이란 것도 신문지상과 같은 언론매체에 수록되는 보도내용에 대한 통제의 결과였을 뿐이지 부대의 고유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대의 명칭을 인위적으로 감춰 부르는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일전쟁의 전개과정과 맞물려 있는 193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는 육밀(陸密) 제1014호 「동원부대 등(動員部隊 等)의 칭호명(稱號名)에 관(關)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병력 등을 비닉(秘匿)하는 것”을 목적으로 “외지부대(外地部隊)는 부대장의 성(姓)을 붙여 칭호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 ‘내지부대(內地部隊;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보았던 후지모토 쇼조의 일장기에 표시된 소속부대는 바로 이러한 조치에 따랐던 것이고, 1937년이라는 시점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휘관의 이름으로 부대명칭을 정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전보(轉補)되거나 전사(戰死)하게 되면 그때마다 부대명의 변경을 동반하게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부대명칭의 비닉성(秘匿性)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것이 ‘통칭호(通稱號)’ 방식이다.
이에 관한 규정은 1940년 9월 10일에 제정된 육밀(陸密) 제1533호 「통칭호 사용에 관한건」을 통해 공식화하였다. 여기에는 “「소화 16년도 육군동원계획령 세칙」으로써 동원관리관(動員管理官)인 군사령관, 사단장(내지, 조선, 대만 및 만주부대) 등에게 병단문자부(兵團文字符)와 통칭번호(通稱番號)를 배당하고, 이를 동원계획된 부대에 통칭번호로 부여하도록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병단’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단과 여단에 해당하는 편제단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조선주둔 제19사단은 ‘虎(토라)’, 제20사단은 ‘朝(아사)’라는 문자부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가령 제19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5연대(회령)는 ‘虎8505’, 보병 제76연대(나남)는 ‘虎8506’, 그리고 제20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용산)는 ‘朝2053’, 보병 제79연대(용산)는 ‘朝2054’와 같은 방식으로 통칭호를 표시하였다. 그 후 치열한 전쟁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통칭호’의 사용에 관해 이를 강화하는 기밀명령이 거듭 하달되면서 여러 차례 관련 내용이 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
년 4월 20일에는 「육군부대 전시통칭호규정」에 따라 기존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전면 개편 되었고, 이 당시 조선군사령부를 대체하여 1945년 2월 6일에 창설된 ‘제17방면군사령부’의 경우 ‘築(키즈쿠)’라는 통칭호가 채택되었다.

 

‘조선 제23부대’라는 표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지나사변기념사진첩>(1940년 11월 발행)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중국으로 출정하는 ‘조선 제23부대’ 병력이 군기(욱일기)를 앞세우고 용산병영을 떠나는 모습이  <지나사변기념사진첩>에 수록되어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부대 간판은 ‘검열관계’로 글자가 뭉개져 있으나, 사진엽서 또는 다른 사진첩에 포착된 장면을 통해 이곳이 ‘보병 제79연대’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 제23부대라는 주소지 표기가 들어 있는 나카노요시타케(中野義雄)의 개인엽서이다. ‘18(1943).6.5’ 일부인 아래 ‘점검제(點檢濟)’라는 검열확인도장이 함께찍혀 있다.

 

일본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의 소장자료인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의 표지이다.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주요 부대의 소재지 및 통칭호 일람 (1945년 7월 10일 현재)

그런데 1940년 9월 10일자에 하달된 「통칭호 사용에 관한 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매일신보> 1940년 8월 13일자를 보면 “전몰용사 유족에게 금치훈장 수여식을 ‘용산 제23부대’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조선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에 대해 ‘숫자부대명칭’을 사용하는 별도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근거규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확인되질 않는다.
그리고 1940년 11월 14일에 하달된 육만기밀(陸滿機密) 제13호 「재만 제부대(在滿 諸部隊) 통칭호 규정」에 따라 만주 주둔 부대의 경우 ‘병단문자부’를 일괄 ‘만주(滿洲)’로 표기하도록 변경한 바 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關東軍防疫給水部本部)’를 일컬어 흔히 ‘만주 제731부대’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 셈이다.
해를 넘겨 1941년 7월 25일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陸軍大臣 東條英機)의 명의로 제정된 육지밀(陸支密) 제2249호 「만주, 조선에 있어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에 관한 건달(件達)」에 따라 “조선에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는 ‘병단문자부’를 ‘조선(朝鮮)’으로 한다”고 정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 제몇부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이 부분 역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94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성사단(京城師團), 나남사단(羅南師團), 평양사단(平壤師團, 추을사단) 등의 표기는 계속 허용되었으나, 가령 ‘보병 제78연대’와 같은 고유명칭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용산보병연대’라는 정도의 표현조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매일신보> 1940년 9월 25일자에 수록된 「과거 무훈을 찬양, 74부대 개대 기념식(開隊記念式) 성대」 제하의 기사에는 부대명칭을 ‘통칭호’로 감추고 소재지도 공란으로 처리한 실제 사례가 남아 있다.

 

[〇〇] 74부대의 빛나는 개대(開隊)기념일을 당하여 부대에서는 〇〇〇〇〇 원두에서 23일 오전 9시부터 개대기념식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만추(晩秋)의 청공은 74부대를 축복하는 듯 맑게 개었다.
식장에는 가토(加藤) 부대장을 비롯하여 나카노(中野) 부대 본부장, 사이토(齋藤) 44부대장, 이구로(伊黑) 병사부장, 기쿠치(菊池) 헌병대장, 오가타(緖方) 해군중좌, 기타 〇〇있는 각부대장 이하 관민 다수가 참석하여 금번 지나사변을 물론 ‘노몬한’ 사건, 장고봉(張鼓峰) 사건 등에 있어 빛나는 무훈을 날린 74부대의 위훈을 찬양, 식은 가토(加藤) 부대장의 식사와 옥관봉전(玉串奉奠)이 있은 후 최후로 사토(佐藤) 부윤으로부터 부민을 대표하는 옥관봉전이 있은 후 식을 마치고 계속하여 운동경기회로 들어갔는데 경기 번외로 서문고녀(西門高女)의 기원 2600년 창가가 일반의 인기를 끌고 부민대망의 황취(荒鷲, 아라와시. 전투기를 뜻함) 격추의 대모의전이 전개되어 10여 문의 거포가 일제히 불꽃을 올리어
당일 〇〇〇 일대는 마치 실전장(實戰場)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오후 5시경에 산회하였다.

 

이 기사에는 74부대의 소재지에 대해 모두 공란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서문고녀(西門高女)’라든가 ‘사토 부윤(佐藤 府尹)’이라든가 하는 구절로써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행기 격추를 위한 10여 문의 거포 운운”하는 부분은 이곳이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단서를 취합하면 여기에서 언급된 제 74부대는 바로 평양 평천리(平川里)에 자리한 고사포 제6연대(1935년 창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사포 제6연대는 가토 타카미네(加藤隆峰) 연대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를 ‘가토부대’라고 지칭한 것이며, 축하내빈으로 참석한 ‘사이토 44부대장’의 정체는 확인 결과 사이토 마사히코(齋藤正彦) 보병 제77연대장(평양 주둔)인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14일자에 소개된 조선 제26부대(야포병 제26연대)의 제22회 창립기념식 광경이다. 이날 함께 제막된 ‘충혼비’에 새겨진 ‘忠魂’이라는 글씨는 1938년 6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제20사단장(용산)을 지낸 우시지마 미츠네(牛島實常) 육군중장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 제27부대(공병 제20연대)의 창립기념식 모습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병 제20대대로 출범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치중병대대와 함께 일괄 연대 편제로 승격된 바 있다.

 

이러한 통칭호 부대명칭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눈에 띄질 않는데, 아쉬운 대로 <매일신보>와 같은 보도내용 등에 드러난 단서들을 하나씩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람표 형식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주요 부대 통칭호 일람표

해방 후에 간행된 강제동원 관련 여러 증언 자료집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도 이러한 부대명칭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육군지원병’이건 ‘학도지원병(학병)’ 이건 ‘징집병’이건 간에 강제동원을 통해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에게는 입영부대 또는 배속부대였던 22부대니, 24부대니, 30부대니, 42부대니, 44부대니 하는 이런 명칭들이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연결고리로서 어김없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한 전략기법의 하나로 짜낸 것이 바로 ‘통칭호’의 개념이다. 지금도 여느 군부대 앞의 정문 기둥 마다 걸려 있는 ‘육군 제XXXX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한 간판이란 것도 본연의 군사보안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구태여 그 뿌리를 따지고 든다면 일본군대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 2019/11/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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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작곡을 의뢰했으며, 25일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새로운 교가는 창영초교 합창부 학생들이 직접 음원을 녹음했다. 임용렬 창영초교 교장은 선포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활동한 창영초교 선배님들이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른 교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임동혁)가 작곡한 교가였다”며 “현재 일본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새로운 교가를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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