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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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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03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4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4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19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 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 언론 필화사건>).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4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 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원희복, <조용수와 민족일보>).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 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낸(3월 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 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미국 원조’ 본질 파헤친 민족일보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3.25)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3.18)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 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 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2.8)이라며 “문제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없다’, 1961.2.16)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는 한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5.18)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 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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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錢庵住持逐客乃笑吟

 

執着奚如此(집착해여차)

無非暫借錢(무비잠차전)

紅樓恒不惜(홍루항불석)

向客放揮鞭(향객방휘편)

 

崇錢庵의 住持가 나그네를 내쫓기에 웃으며 읊다

 

집착하심이 어찌 이와도 같은고

잠시 동안 빌린 돈 아닌 게 없네

妓樓에서는 늘 아끼지 않으면서

나그네에겐 채찍을 막 휘두르네.

 

<時調로 改譯>

 

집착 어찌 이런고 빌린 돈 아닌 게 없네

아가씨 술집에서는 늘 아끼지 않으면서

가련한 나그네에겐 채찍을 막 휘두르네.

 

*逐客: 손님을  푸대접하여  쫓아냄  *如此: 이러함  *無非: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暫借: 잠시 동안 빌림 *借錢: 차금(借金). 돈을 꾸어 옴. 또는 그 돈

*紅樓: 기루(妓樓). 창루(娼樓). 娼妓를 두고 영업하는 집 *不惜: 아끼지 않음.

 

<2018.7.17, 이우식 지음>

화, 2018/07/17-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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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그 동안 비뚤어진 기득권층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신 훌륭한 단체입니다.  잘못된 식민사관을 바로잡고 역사를 통해 미래를 생각하는 바른 생각을 하는 분들이 모인 단체로 늘 응원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IDS홀딩스 김성훈의 채권자 파산신청을 검색하다가 대리인이 이 단체 고문으로 있는 정만순 변호사님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는 IDS홀딩스 김성훈의 유사수신. 사기 피해자입니다.

열심히 사는 소시민으로 우리 사회가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이길 바라며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IDS홀딩스 사기사건으로  가정경제는 뿌리채 흔들려 앞날도 희망도 계획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에 맞닥뜨렸습니다.  사기사건은 곧 경제살인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절실히 느낀것은 법은 피해자 편이 아니었습니다. 사기꾼은 오히려 여러 변호사들에게  둘러쌓여  보호받는데 정작 피해자는 어떤 법적 보호 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고문으로 계신 정만순 변호사님!

부디 사기꾼의 파산을 돕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12000명의 피해자가 있는데  십여명의 채권자가  파산을 신청하고 이에 사기꾼 김성훈은 파산시켜달라 판사에게 적극요청하고 있습니다.  사기꾼 공범들의 지휘와 선동으로  정보가 부족한 어르신들을 상대로  하루빨리  김성훈을  파산시켜달라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정의로움이  있어야 가치있는 일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사회는 IDS홀딩스 뿐만 아니라  유사수신 사기피해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고통속에  있습니다. 더이상 사기꾼이 이 사례로 답습하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도 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사기사건은 경제살인입니다.

부디 정의가 아직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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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조희팔”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하루하루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변제해준다는 말만믿고 기다렸지만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않고

단한푼의 변제도 받지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2,000명의 피해금에 대한 파산을

극히 일부인 29명의 파산신청인이 대표하여 진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29명이 만명을 대신할수는 없습니다

파산이 받아들여진다면

만명의 피해자들이 또한번의 절망적인 일을 겪는것입니다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않도록 파산을 막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목, 2017/12/0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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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운동’ 착수


▲ 박근혜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9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시청 앞에서 새마을회관 건립 추진 폐기를 촉구하면서 청사 앞 게양된 새마을기를 철거하고 있다. 2017.1.19/뉴스1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광주시와 광주 지역 5개 자치구를 상대로 ‘새마을장학금 지원 조례 폐기’를 촉구하고 나선다.

또, 새마을회에 매년 관행적으로 수억원씩 지원되는 ‘혈세 특혜’도 철회할 것을 촉구 할 예정이다.

26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등 9개 시민단체는 “새마을장학금은 매년 막대한 시민혈세를 단지 새마을지도자 자녀들이라는 이유로 특정 단체에 지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은 매년 30억원 이상의 예산을 1986년 제정된 ‘광주시 새마을장학금 지급 조례’에 근거해 지역새마을회에 지급해 오고 있다.

새마을회 측은 이 중 70% 가량을 회원 자녀 장학금, 조직 운영비, 자체 행사비로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시민단체는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이 새마을회에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장학금까지 지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를 구성해 대표적인 특권 반칙 조례인 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는 오는 27일 오후 2시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지난 2014~2017년까지 4년간 지급된 새마을장학금 내역과 지급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nam@

<2018-02-26> 뉴스1

☞기사원문: 광주시민단체 “새마을장학금 지급 납득하기 어려워” 

화, 2018/02/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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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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