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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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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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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
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총칼을 내려놓은 독립군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여 독립군의 역사를
남긴 일기, 수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교우단의 기
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 북로군정서의 훈련교본,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제3호, 봉오동전투상보와 더불어 의병 출신 독립군 김정규 일기, 한국광복군 김문택 수기, 지청천 친필 일기 <자유일기>, 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우석 수기, 한국광복군 지복영 수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를 통해 일제에 맞선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의 간절한 바람과 희생을 되돌아보고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이끌어온 한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특별전은 VR전시로도 제작하였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어 현장 관람에는 제약이 있지만, 2020년 11월에 개막한 상설전시, 특별기획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전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월, 2021/01/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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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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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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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화, 2021/03/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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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학예실 김슬기 연구원

1991년 2월 27일 문을 연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코로나로 회원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대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동시 접속자 300여 명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일 2천여 명이 행사영상을 감상하였다.
먼저 회원들과 각계 인사들의 30주년 축하인사를 담은 영상을 감상한 후 광주지부 회원이자 작가인 주홍 씨가 샌드아트로 그린 연구소 30년사 영상으로 기념식의 문을 열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듯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과 뿌리가 되어주신 분들은 후원회원 분들”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어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의 사회로 지난 30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를 진행했다. 마지막 순위를 발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회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식 5가지
를 소개하는 ‘당신이 몰랐던 민족문제연구소’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1위로 선정되고 당시 영상이 재생되자 모두에게 그때의 감격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음악 교사이자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한 고 노동은 선생의 자제인 노관우 회원의 밴드는 축하공연으로 항일음악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 등을 선보였다. 특히 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편곡·헌정한 ‘장타령’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가사 ‘삼십년을 한결같이, 삼백년도 끄떡없게, 삼천리에 퍼져가세’가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이들의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뒤이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30년 동안 함께 손잡아 주었던 후원회원들의 일상을 둘러볼 수 있는 ‘회원극장’을 상영하였다. 올해로 28년째 꾸준히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유동성 회원, 백년전쟁을 통해 가입 후 명실상부 연구소 간식보급에 힘써온 김진주 회원, 참치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연구소와 연구소의 활동을 알리는 박점구 회원의 일상이 직접 만날 수 없는 이 시기에 더욱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끝으로 박수현 사무처장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소 3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하였고, 임헌영 소장 및 상근자 전원의 감사인사로 행사를 마쳤다. 임헌영 소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평화의 주춧돌이 되어 영구히 남아 불행했던 한세기를 증언하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많은 시민들이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30주년 기 념식 영상은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과 유튜브 채널에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목, 2021/03/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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