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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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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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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식민지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대구의 역사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가 경북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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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 학술세미나 [사진=경북대 인문학술원]

경북대 인문학술원(원장 허정애)과 대구경북학회(회장 김영철), 대구경북연구원(원장 이주석)은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북대 대학원동 학술회의실에서 ‘식민의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황보영조 경북대 인문대학장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세미나는 김일수 경운대 벽강교양대학 교수, 김경남 경북대 사학과 교수,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사무국장 등이 발표자로 나서 식민지 시대 대구의 도시 재편 문제와 식민지 역사의 재구성, 그리고 도시 콘텐츠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발표·토론할 예정이다.

이어 박승희 대구경북학회 부회장 사회로 권상구 시간과공간연구소 이사, 김석수 경북대 인문학술원 부원장, 이재필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장, 조명근 영남대 역사학과 교수,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한다.

허정애 경북대 인문학술원장은 “대구의 식민지 연구는 대구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식민지 도시에 대한 성찰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대구를 위한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17-11-21> 뉴스민

☞기사원문: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관련기사

☞KNS뉴스통신: 경북대,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대학저널: 경북대,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베리타스알파: 경북대 인문학술원 학술세미나 24일

☞에듀동아: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국제뉴스: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수, 2017/11/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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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신청] [바로가기]

<항일음악회 –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가 서울시 강북구에서 열립니다. 이번 음악회는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립의 꿈이 담긴 우리 항일음악을 함께 부르고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음악과 역사가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출연진 : 장사익, 노브레인, 오단해, 가무악패 풍, 두레소리합창단, 강북구립여성합창단
사회 노기환 김초롱 | 연출 최윤필 | 음악감독 노관우 | 특별출연 오희옥(여성 광복군)

※관람예약 안내
◎<항일음악회_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 를 통해 무료로 관람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사전예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연장 주차장이 매우 좁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 02-903-7580(근현대사기념관), 02-969-0226(민족문제연구소)

※오시는 길
지하철
우이신설선 가오리역 2번 출구 → 걸어서 3분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 → 마을버스 강북01 환승(10분)

버   스
간선(청색) 104번, 144번, 109번, 151번    
지선(녹색) 1144번, 1166번, 1218번

토, 2017/12/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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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

내년엔 사드를 뽑자!-소성리 6차 범국민평화행동

아들이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던 날, 논산에 들어서자마자 물씬 풍기던 훈련소 분위기에 눈물이 났지만, 가장 슬펐던 순간은 그 넓은 운동장을 순식간에 채운 머리 짧게 깎은 젊은이들을 마주했을 때였다. 어디에서 몰려왔을까? 잔뜩 얼어붙은 자세로 열병식을 치르던 젊은 우리 아들들. 행진을 하면서 아이들이 우리가 서있는 스탠드 앞을 지날 때 혹시라도 마지막 인사를 못할 세라 부모들은 이름을 크게 불러댔다. 우리도 열심히 이름을 부르며 아들을 찾았다. 그 속에 아들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르더니 웃으며 손을 흔들 때 가장 눈물이 났다. , 네가 20살이 되면 통일이 되려나 기대했는데……

2년이 채 못 되는 사이에도 남북간 북미간 불안한 때는 많았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서로 두 개의 나라로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자기들은 전쟁터에 안 나갈 거면서 전쟁불사를 외치며 전쟁을 조장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보수적인 인사들이 가장 미웠다.

그리고 애국, 멸사봉공보다는 평화로운 일상이 가장 소중함을 깨달아 어느덧 나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로 공존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사드가 인근 성주 성산포대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자식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주가 가장 먼저 타격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쏜 탄환이 어디에 떨어질까? 꼭 성주만일까? 대구도 되고, 김천도 되고, 구미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사드는 성주 성산포대에서 성주 끝자락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배치 결정이 났다. 이제 소음과 전자파 피해마저 고스란히 김천의 것이 되었다. 전쟁의 위협은 김천을 넘어 경상북도, 대한민국 전체의 것이지만 직접적인 피해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모였고, 촛불을 들었고, 그 횟수가 어느덧 469일이 되는 날에 이르렀다.

 

처음엔 이것이 선거용이라 생각했다. 보수파가 즐겨 하는 수법인 안보, 종북몰이로 선거에서 이기려는 전략이려니 했다. 그래서 새누리당 탈당 운동을 병행하고, 그런 무리에게 표를 주지 말자고 했다. 그랬더니 사드만 반대하면 되지 왜 정치적인 구호를 하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 내부에서조차 그런 비난이 일었고, 그래서 떨어져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박근혜가 탄핵되고서 우리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희망은 절망이 되었다. 박근혜 탄핵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에 롯데 이사회는 국방부와 부지교환을 승인하고 골프장을 미군기지로 넘겨주었다. 눈 앞에서 우리 땅이 미국 땅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선을 이 주 정도 앞두고는 사드발사대 2기가 들어갔다. 비로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미국의 실체를 깨달았다.

97일 추가발사대 반입은, 우리가 뽑았다 생각한 문재인으로서도 거역할 수 없는 미국의 힘을 깨달았다.

1120일에는 임시 배치했다는 사드기지에 공사 장비 반입이 역시나 경찰의 폭력적 주민진압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제는 너무나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이 땅은 언제든지 미군기지가 될 수 있고, 미군이 요구하면 그들의 무기를 사야 한다는 것을. 게다가 그들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으며, 우리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그것을 우리 속에 깊이 심어 왔음을.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 꿈의 나라, 우리를 위해 그 먼 거리를 날아와 우리를 지켜주는 혈맹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굳게 믿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우리 땅이 미국 것으로 단숨에 바뀌어도 사람들은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패배 속에서도 사람들은 단단해졌다. 싸움이 결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그 최전선에서 싸우는 우리의 위치와 과제도 확실히 알았다. 여전히 김천역 평화광장의 촛불을 지켜야 하고, 소성리 집회와 지킴이 활동에 함께 해야 하며, 서울에 전국 대회가 열리면 참석하여 우리 상황을 알려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록을 하고, 자기가 관계하는 모든 SNS에 올리고, 소식지를 만들고, ‘힘내라 촛불아김천촛불 365일 너머를 발간하고, 행사가 있으면 쫓아가 일인시위를 하는 등 우리 소식을 알리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 김천 시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소성리 집회.

사드 철회가 적폐 청산!

적폐 사드철회 소성리 6차 범국민평화행동

촛불은 계속된다행사다.

날씨가 추운데다 행사가 많아 사람들이 행여 적을세라 촛불집회에서는 우리 김천에서 많이 가야 한다고 참여를 독려했는데, 김천 성주를 비롯 전국에서 500여 명 정도 모였다.

 

여는 공연으로 평사단(성주 평화를 사랑하는 예술단)의 율동 들어라 양키들아가 있었다.

사드배치반대 대경대책위 집행위원장 전기창님의 사회로 집회는 시작되었다.

 

민중의례를 하고, 영상을 시청하였다. 1년간 투쟁의 모습이었다.

한국 경찰이 미국 물건 갖다 놓고 왜 한국 할머니를 못살게 구노?”하는 소성리 할머니 말과,

우리는 18시간 동안 열심히 싸웠다.”는 이석주 이장님 말에 눈물이 나왔다. 강형구 장로님의 하모니카 소리가 너무도 애절해서 더욱 눈물이 났다. 내 옆의 소성리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여는 말씀은 2018년 더 큰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였다.

소성리사드배치철회 성주주민대책위 이석주 공동위원장.

온갖 폭력을 자행하며 사드 장비가 들어갔고, 공사 장비가 들어갔다. 우리가 진 것인가? 비록 사드는 들어갔으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땅에 전쟁 무기를 강요하는 미국! 미국을 규탄한다!

공사 또한 두고 볼 수 없다. 모든 장비 공사를 막아나갈 것이다. 실망하지 말고 사드 뽑아내겠다는 마음으로 투쟁하자.

노사드! 양키 고 홈!”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 김대성 공동위원장.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광화문에서 촛불 들고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는데,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민주적, 절차적 정당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고생하면서 탄생시킨 정권인가?

사드가 북핵을 막을 수 있는 무기인가? 사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사드는 백해무익하고 전쟁만 부르고 평화에 도움 안 되는 것을 여러분도 저도 아는데 문재인만 모르는가?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언제나 민중이 앞장서 왔다. 사드 철회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

 

성주성지수호 원불교비상대책위 운영위원장 강해윤 교무.

우리는 이곳에서 5천 명, 8천 명의 경찰과 싸웠다. 사드는 아직도 꼼짝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뽑아낼 수 있는가?

싸늘한 시선, 언론, 그 어떤 것에도 물러나지 않고, 진밭교를 지키면서 그들이 이 땅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전 세계 800개 미군기지 중 83개가 우리 땅에 있다. 또다시 미군 기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은 계속 무기 장사를 하나 고립될 것이다. 미국이야말로 우리를 착취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드는 필요 없다. 평화는 우리가 만든다.

내년엔 청와대로 갈 것이다. 그동안 이곳을 비우지 않고 지켜낼 것이다. 함께 해 주기를!

미국놈들 물러가라!”

 

사드반대의 3주체에 이어 사드배치반대 대경대책위 김찬수 대표, 민주노총 경남본부 신종관 통일위원장,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 박석민 집행위원장이 각각 나와

여러분이 있었기에 투쟁이 가능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사드배치를 강행하고 추가배치를 강행하며, 공사를 강행할수록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동북아 긴장이 고조된다.

내년 더 큰 힘으로 단결 연대하여 훨씬 더 큰 투쟁을 하자!”고 한결같이 발언했다.

 

소성리가 낳은 세계적인 가수 정진석님의 노래 공연. ‘평화소성리 친구들(영일만 친구들 개사곡)’을 하는데 지금까지 부른 중 가장 멋지게 잘 불렀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정대협 윤미향님과 민주노총 산하노조에서 후원금이 들어왔다. 감사하다.

 

김천이 자랑하는 율동맘과 율동천사들이 나와 우리가 하나로행복합니다를 하여 또한 큰 박수를 받았다.

 

민중당 경북도당 김차경 위원장.

시대의 한 복판에서 온갖 칼바람 맞으며 투쟁하는 성주 김천 주민에게 감사한다. 소성리가 대한민국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권력이 국민에게 돌아오겠구나 생각했는데 대한민국 권력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경찰 차벽으로 차단한 순간 권력은 미국에 있었고, 트럼프의 연설에 국회의원들이 박수를 치는 순간 대한민국 권력은 미국에 있었고, 무기 구입 강요를 받아들이는 순간 대한민국 권력은 미국에 있었다.

소성리는 예속과 분단의 문제가 사드로 박혀있는 곳이고, 자주권, 통일, 평화를 열어가는 투쟁의 장소이다. 따라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하루빨리 소성리 사드 철회를 위해, 자주·평화·통일을 열어갈 수 있도록 함께 싸우자.”

 

부산평통사 박석분 상임운영위원.

“2017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부추기기 위해 기어이 사드를 배치하였다.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 소성리는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고 피폐해졌다.

굴하지 않고 일어나 소성리를 지키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도모 세력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 정의롭고 의로운 싸움이기에 앞으로도 줄기차게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공사가 강행되고 사드 운용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과제가 주어질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평화 실현, 한미연합 훈련 중단과 북핵 중단, 조건 없는 평화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민들 손을 놓지 말고 함께 줄기차게 이어나가자.”

박석분님은 아주 여리고 조용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연약하고 작은 몸매에서 어떻게 저렇게 힘찬 말이 나올까?

 

대구평화합창단이 아침이슬’, ‘한라에서 백두까지등 노래를 불렀다.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고, 소성리에 와서 노래로 연대해 주는 대구 사람들. 이어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311일 이후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원불교 진밭교 평화교당 천막까지 행진했다.

 

여기서 천주교를 대표하여 성베네딕트회 왜관수도원 황동환 신부가, 개신교를 대표해서 예수살기 강형구 장로가 발언을 하였다. 발언이 끝난 후 솟대를 세운 곳에 돌멩이를 하나씩 갖다놓아 다지는 작업을 하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원불교에서 끓여준 맛있는 떡국을 먹고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이제는 김천 촛불집회를 위해 떠날 시간.

 

긴 우리의 싸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우리가 미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지금 종북몰이는 더 심해졌다. 박근혜 때는 보수인사들만 우리를 욕했지만, 지금은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도 욕을 먹고 있다. “빨갱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세력이라는 게 전자의 비난이라면, “왜 박근혜때는 가만있다가 문재인이 되니 그러냐? 또 자한당을 지지할 거면서 그들에게 가서 떠들어라는 건 후자의 주장이다.

 

만화 맨발의 겐에서 겐의 아버지는 홀로 대일본제국 천황폐하를 위한 성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비국민이라고 따돌림 당한다. 집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배급조차 주지 않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온 가족이 시골에 가서 고구마를 구해 희망에 부풀어 수레에 싣고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고구마를 다 빼앗아 간다.

그렇게 천황폐하 만세’, ‘귀축 영미와 전쟁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전쟁에 지고 미군이 진주하자, 이제는 미국을 찬양하며 한 자리라도 얻으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댄다.

 

초등학생 6학년이었던 아들과 그 책을 읽고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들아.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을 수도 있단다. 그때 아니라고 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니. 그런데 어느 게 정말 옳은지를 알려면 공부를 해야 해.”

그건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가, 역사의 바른 방향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면서 나아가는 것만이 이 외롭고 힘든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나를,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 언론이, 교육이 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거짓 애국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찾는 길을 가주었으면 좋겠다. 한 번쯤 이 사람들이 외치는 그 진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 정말 이대로 우리 땅이 허망하게 미국 땅이 되고 우리 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이 현실이 독립국가로서 올바른 길인가, 무엇보다 국민이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보장을 해주지 않으면서 애국심과 안보만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를 언론과 교육이 고민해 주었으면 하고 이 비국민은 간절히 바란다.

 

일, 2017/12/0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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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판정 형사사법 건축물

1. 역사적 과오

현재 검찰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체질적인 문제(검찰의 경찰화, 수사권조정, 내부 적폐청산 및 융합, 업무경감,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기 등)들을 안고 있다. 가장 큰 현안은 내년부터 본격화될 수사권조정이다.

지금껏 검찰에서 사달(법조비리, 권력의 시녀, 전관예우, 각종부패, 신뢰부재 등)이 나고 국민으로부터 온갖 비속어를 들으며 ‘적폐의 온상’이니 ‘개혁대상 1호’니 하는 노도와 같은 강물소리를 듣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원이자 발원지는 광복 후 법률제정 과정에서 패망한 일본이 내다버린 침략전쟁과 식민수탈의 제국주의 좀비 조항들을 표절하여 우리의 형사소송법에 그대로 심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서적『제국과 유신의 검찰』을 통하여 그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광복 후 위정자들은 1949년 검찰청법(제정)에 ‘경찰의 검사에 대한 상명하복’ 조항을 입법하여 지반(地盤)을 다진 후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에서 ‘친일반민족 기득권 유지’라는 반석(盤石)을 주춧돌로 삼고, ‘(정권 이외에는)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이라는 대들보를 튼튼히 지탱하기 위하여 그 주춧돌 위에 일본 제국주의 법률 조항들을 기둥으로 삼았다.

일본은 1945년 패망 후 제국주의 ‘무소불위 군부정권’과 함께 침략전쟁과 식민지탄압을 이끌던 ‘무소불위 검찰권력’을 지탱하던 대정 형사소송법 조항인 ①검사의 수사권독점(제246조) ②경찰에 대한 지배적인 수사지휘권(제248조) ③검사실 참여조항(제139조) 등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을 지탱하던 기둥 조항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경찰수사권 독립을 이루어 검찰 권력에 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는데 우리는 그 쓰레기통을 뒤져 그 조항들을 모두 주워와 우리의 ㉠제195조(수사권독점) ㉡제196조(경찰에 대한 지배적인 수사지휘권) ㉢제243조(검사실 참여) 조항들을 기둥삼아 위 친일반민족 주춧돌 위에 세웠으며, 이에 더하여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상 우월 조항을 입법으로 서까래와 지붕을 완성하였다.

위와 같이 구축한 ‘무소불위 검찰권력’에도 행여 불안감을 느낀 5.16 군사정권은 1962년 5차 개헌에서 ‘검사의 영장청구권 독점’을 헌법에 명문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현존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건축물(무소불위 검찰권력)을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서 지금껏 검찰이 사달이 난 것은 처음부터 건축물을 잘 못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중 필요에 따라 경찰처럼 또는 검사처럼(검사대신 피의자를 신문하는 것이 대표적) 포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 법률조항인 우리의 형소법 제243조(참여조항)는 대정 형소법 제139조(제136조 인용)를 표절(우리의 각 조항과 일란성쌍생아의 모습처럼 동일)하여 그대로 옮겨놓은 것임을 확인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경찰권 역시 검찰의 지배적인 수사지휘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검찰은 왜?”라는 물음을 달고 살아온 여정 끝에 국내에서 답을 얻지 못하던 중 올해 초 일본국립국회 도서관(홈페이지) 소장 관보에 실린 명치, 대정 형소법을 찾아내어 우리의 반문명적 법률조항들이 제국주의 당시 조항들과 일란성 쌍생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나라 특유의 검사실 조서작성 관행(법률 규정과 달리 검사 대신 참여수사관이 피의자를 신문) 또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또한 제국주의 유물인 ‘무소불위 검찰권력’이라는 터전 위에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낳은 관행으로서 이를 유지하고서는 진정한 광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검찰의 업무관행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매우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검사실 참여를 규정한 139조를 기반으로 조선형사령 그리고 당시 검사 인력부족(대부분 일본인, 일본 본토에서의 인구대비 검사 수의 절반)에다 집중된 권한(수사권독점, 경찰에 대한 지배적인 수사지휘권)으로 인하여 업무과중에 시달(현재 우리나라 검찰의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함)리는 가운데 제국주의 정권의 식민지정책을 흔들림 없이 뒷받침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부담하며 제반 문제를 타개하여야 한다는 현실적 난관과 민족적 차별 대상인 식민지 조선인을 상대한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제국주의 황실 내규와 법령에 기반을 둔 전관예우 문화는 고난을 이겨낸 검사들이 입신영달을 거듭하여 관료로서 퇴직한 후 그들을 위로하였고, 해방 후 이를 불문율로 계승하여 우리사회에 창궐하게 되었다. 이 또한 일본이 패망 후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제국주의 문화를 주워와 지금껏 우리사회에 창궐하게 된 것이니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국과 유신의 검찰』에서 자세히 언급)

식민지 조선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던 일제 검사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자국(법률 규정대로 검사가 피의자를 신문)에서와 달리 멸시대상인 조선인을 마주 대하지 않고 검사 대신 참여서기로 하여금 피의자신문을 하도록 한 후 그 결과 자신의 입신영달 거푸집에 맞는 조서를 작성해오면 이에 서명하여 마치 검사가 신문하고 작성한 것처럼 서명하여 법정에 그대로 제출하였던 것으로 이는 조선식민지 특유의 반문명적 관행으로서 조선인의 피눈물을 쥐어짠 조서재판으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대정 형사소송법 참여규정은 포괄적이어서 식민지 현실과 융합되어 검찰은 검사실에 참여서기 수만큼 무소불위 검사가 더 있는 것처럼 활용하여 조선인을 탄압하였고, 때로는 악질고문 경찰처럼 활용하여 조선인을 탄압하는데 제대로 활용해 먹었던 것으로 이에 바탕이 된 참여조항 또한 검사의 수사권독점, 경찰에 대한 지배적인 수사지휘권과 더불어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의 한 축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식민통치에 신음한 우리가 그러한 참여조항과 식민시대 업무관행을 그대로 이어온 것이니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광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반문명적 형사사법 업무행태에 메스를 가하는 개혁(일본은 패망 후 참여조항을 폐기하고 검찰직원의 직무범위를 구체화하는 입법을 단행하였음)이 결국은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의 한 축을 개혁(충격과 여파가 크기 때문에 치밀하고 신중하게 진행)하였을 때 국민은 비로소 광복 국민이자 선진국 수준의 형사사법서비스를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법관 모두는 사법연수원 시절 검사시보 생활 등을 통하여 검사실에서 법치에 반하는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검사실 조서작성 관행에 대한 문제가 법정에 올라올 때마다 대법원은 애매모호하고 궤변적이며 오십보백보 엉터리 신사협정 판례(3건)를 내놓고 식민잔재인 이를 바로 잡으려 진정성 있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가 그러한 조서를 형사피고인의 유죄의 증거로 삼는 한 진정한 의미의 법치국가라고 말할 수 없고 그러한 수준이 우리나라 형사사법의 후진 수준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검경 수사권조정 관련

제국주의 유물 청산과 관련하여 수사권조정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경찰 수사권독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헌법 개정을 통하여 경찰이 경찰답게 현장 및 초동수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도록 최소한 경찰이 체포영장 및 압수수색영장청구권을 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사법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

수사권조정에 있어 검찰, 경찰 모두 선진국의 예를 들어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이들 모델 중에 우리에게 근대사법제도의 뼈대를 심었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패망 후 법제에 있어 반문명적, 반인도적 제국주의 유물을 청산하여 검경제도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일본은 우리 제도로부터 발전적이고 자연적인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식을 적극 들여다봤으면 한다. 일본 보다 더 잘해야 하는데 그 보다 더 못하고 있으니 일본 만큼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고 우리와 근대사법제도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갑자기 햄버거나 샌드위치, 빵과 고기를 주식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경찰, 검찰, 법원 조직 사람들로서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 될 형사사법 기관 종사자들의 각종 비리와 스캔들에 관한 뉴스를 달고 사는데 일본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그렇게 된 데는 우리와 달리 형사사법 법제에 있어 제국주의 유물을 청산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검경간 대등협력 관계에서 서로 긴밀히 우호적으로 협조하는 한편 검사는 경찰을, 경찰은 검사를 상호 견제하며 서로 잘하려고 하기에 경찰이 법원에 직접 청구하여 체포 또는 압수수색을 당하는 검사도 없거니와 검사의 경찰권 남용에 대한 최종 견제 망(194조, 검사의 경찰에 대한 징계, 해임 요구권)에 걸려드는 경찰에 관한 뉴스를 본 적도 없다. 물론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언론에 대서특필될 것으로 지금껏 우리처럼 언론에서 검사 또는 경찰의 비리나 스캔들을 사시사철 달고 살지도 않고, 경찰, 검찰 모두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경찰과 검찰이 너무도 못 미더워서 옥상옥(屋上屋)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니 하는 별도의 기구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는 일도 전혀 볼 수 없었다.

3. 경찰수사권 독립 후 경찰권남용 관련

경찰은 수사권조정에 있어 ‘검사의 보완수사요청에 의한 사후통제는 받겠다.’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으로서 정작 확보되어야 할 견제장치로서 넘어야할 가장 높은 산은 어설픈 경찰수사권 독립이 가져올 경찰권 남용에 대한 국민 그리고 검사의 궁극적인 우려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이 당사자 간 조정이 어려울 경우 ‘제3의 기구를 통한 조정’을 언급한 것은 서로 양보하지 않는 비타협성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우리나라 특유의 무소불위 검찰 권력의 유래와 현실에 관한 이해와 더불어 국가와 국민을 정점에 두고 검경의 직무특성상 상호 배려 하에 접점을 찾으면 당사자 간 합의에 이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불신의 골(일제강점기 검사에 굴종하던 경찰의 검사에 대한 반감은 해방 이후 권위주의 시대 지속)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성사되기는 지난하다. 경찰, 검찰 모두 국가와 국민은 뒷전이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니 꼭꼭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고 샅바싸움만 하고 있다. 이 모두 불신 때문이다.

예전에 김 모 검사장이 검사를 의사에, 경찰을 간호사에 비유하여 빈축을 산 적이 있었다. 매우 잘 못된 비유이다. 오히려 검찰내부에서 검사와 검사실 참여수사관에 비유하면 좀 더 가까울 것 같고, 법치에 반하게 자기(의사) 대신 간호사로 하여금 수술을 집도(피의자신문)하게 한 후 그 사이 다른 업무를 수행한 후 그 수술을 자신이 집도한 것이라고 하는 현실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경찰과 검찰의 관계는 좋은 옷감(정의)를 짜내는 씨줄과 날줄의 관계가 기본이고, 때로는 찢어진 옷감을 꿰매는 실과 바늘일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형사사법서비스를 받을 주권자의 입장에서 대등협력 관계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번 더 예를 들자면 같은 부모(국가와 국민, 헌법과 법률)가 낳은 친자녀여서 서로 우애 있고, 역할이나 절차에 있어 형제간 우열이 있을 수는 있어도 서로 열심히 하여 국민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찰은 헌법과 법률에 규정한 검사의 직무 중 위 비유(씨줄날줄, 실과바늘)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하되 검사의 직무수행(경찰의 수사결과물에 대한 최종 결정 및 공소유지)을 하기 때문에 경찰권남용에 대하여 ‘사후보완 수사지휘’와 더불어 최후로서 실질적인 안전장치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검사의 직무수행에 회복할 수 없는 장애(옷감을 아주 못 쓰게 망침)를 초래한 경찰관의 중대하고도 심각한 과오가 사후에 드러난 경우 이에 대하여 검사에 의한 합리적이고 실질적이면서도 최후의 견제(안전장치)를 받아야 한다. 그러한 취지를 살린 일본 형사소송법 194조(검사의 경찰에 대한 징계, 해임 요구)와 반드시 똑 같이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다가올 경찰수사권 독립에 있어 우리와 근대사법제도 도입의 뿌리가 같은 검사의 경찰에 대한 최종 견제장치로서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국민을 속이고 개혁에 저항하며 일본 제국주의 쌍둥이 조항을 이용해먹은 정치인, 법조인, 학자, 언론인, 공직자들은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함구하고 있다. 오랜 세월 검찰을 이용해먹었던 업보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부화(검찰개혁)는 알 밖에서의 어미 새의 지극정성 노력(밖으로부터의 개혁동력)과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건강한 성장(안으로부터의 개혁동력)이 병행되어야 가능하다.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그 어떤 정부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거나 성공한 정부가 될 수 없다.

토, 2017/12/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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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 약 800명과 10개 단체 2년 동안 후원
민족문제연구소, 내년 3월 박물관 개관식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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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는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News1

내년 3월 개관 예정인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1억원이 넘는 후원금을 보내왔다. 당초 계획보다 2배가 넘는 금액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가 지난 2011년 건립위원회를 발족해 추진해 온 것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원 인근 지하1층 지상 5층 규모 건물에 들어설 예정이다.

30일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에 따르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총 55억원 중 일본 시민 약 800명과 10개 단체가 모금한 금액이 1억여원을 넘어섰다.

일본 시민들의 후원은 2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이들은 지난 2015년 11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발족하고 일본 각지에서 건립 기금을 모금했다. 당초 모임은 약 5000만원 모금을 목표로 했었다. 모금에는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를 실현하는 모임,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 보상입법을 추진하는 일한공동행동 등 14개 일본 시민단체도 함께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 이사, 히다 유이치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대표 등 5명이 공동대표 직책을 맡아 발족했다.

모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야노 히데키는 일본 지방공무원 출신으로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알리고 지원하는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박물관 건립 기금 모금 외에도 박물관에 전시될 각종 자료도 기증해왔다.

민문연 관계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동아시아 인권 강화 등을 추구해온 시민운동의 역사도 함께 담아보려고 한다”며 “일본 시민들도 이런 취지에 공감해 적극적으로 건립기금 모금에 참여해줬다”고 밝혔다.

민문연은 건립기금 총 55억원 중 37억여원을 확보한 상태다. 나머지 18억원은 박물관 건립을 위해 모금을 이어가고 있다. 민문연은 12월에 박물관이 들어서는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한 뒤 리모델링을 거쳐 내년 3월에 박물관을 개관할 계획이다.

hanantway@

<2017-11-30> 뉴스1

☞기사원문: [단독]’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일본시민·단체 1억원 후원

※관련기사

인사이트: ‘일제 식민지 만행’ 알리는 박물관 건립에 ‘1억원’ 후원한 일본인들

금, 2017/12/0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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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일시 후원]

(주)경향신문사 28만4천원 (주)위드고 75만7천500원 기부금 28만원 살림문화재단 5만원 신미숙 1만원 윤흥노 400만원 이경아 3만원 이평준 5만원 임순자 10만원 정인남 5만원 해피빈 52만8천100원 현동기 3만원 홍한기 10만원

●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명단에 누락되신 분은 사무국(02-2139-0406)으로 전화주시면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화, 2017/11/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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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 홀딩스의 피해자입니다.

15년형을 받은 IDS 홀딩스 대표 김성훈의 파산은 부당합니다.

IDS 홀딩스 사건 관련 내용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

파산 반대 청와대 국민 청원 및 제안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5021?navigation=petitions

1조 피해, 37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입니다.
정재계 인사들이 엮인 일반 시민이 겪기엔 이미 너무 큰 사기 사건입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지점장들을 2심에서 유죄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곳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른 이 시간에
파산을 막기 위해 또 생업을 뒤로하고 진정서와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성훈의 파산은 김성훈의 파산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지점장과 본부장 또한 피해자를 수배하여 피해자로 인한 파산 신청을 할겁니다.

그리고 현재 재판을 받거나 사기를 진행 중인 많은 금융사기꾼들의 표본이 될것입니다.
현재 파산 신청인들 중에 영업자 등록을 한 자도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정만순 변호사님
더이상의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사기꾼 파산을 소수의 피해자들로 인하여 다수의 피해자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 사건을 들여다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훌륭한 일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잘못도 바로 잡을 줄 알아야 과거의 잘못도 올바로 바로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수의 피해자들과 파산을 진행중인 정만순 변호사님에게 부디 부당한 파산으로
김성훈이 어디에 숨겨놨을지 모를 재산들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화, 2017/12/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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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하시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만순변호사님이 1조원대 사기범(김성훈)의

파산신청을 돕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갖게 됩니다.

이 사건이 어떤건지 알고는 계시는지요????

1조원대 사기로 벌써 37명이나 죽은 , 피해자만도 1만 2천명이 넘는 …..엄청난 사기사건입니다.

개쓰레기 김성훈은 갈취한 돈으로 변호사들과 , 어마어마한 갑부로 둔갑시킨 한재혁(도망중)에겐 100억 이상의 돈을 쓰면서…..

피해자들이 고통중에 죽어가는데는 1원 한푼 안준 …..개같은 사기꾼입니다.

조희팔 사태를 아시죠?

파산은 제 2의 조희팔 사태를 만드는 겁니다. 왜 사기꾼…그것도 개쓰레기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십니까?

이 파산이 성립되면 모든 사기꾼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주게 되는 꼴이 됩니다.   ㅠ.ㅠ

이 사건의 본질은 사기입니다.     15년 형을 받고도 감옥에서 잔대가리 굴리며 ….파산을 하려는 게 김성훈의 계략입니다.

다시 한번 이 사건을 숙고해 주셔서…민족문제연구소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불미스런 사유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화, 2017/12/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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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께

사기꾼 김성훈은 감옥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수많은 피해자들은 할게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합니다

한순간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이러한 고통 속에 빠졌고 어찌하든 정당한 방법으로 이고통을 끝내려하는데 어찌된 법인지 사기꾼에게는 할것이 많고 피해자들은 그저 탄원서 진정서밖에 쓸게 없네요

변호사님 사기꾼 김성훈을 도우면 안되십니다 김성훈은 정말 온갖 방법으로 사기에 사기로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있어요

끝까지 김성훈이 이땅에서 피해자들에게 법에 의해 심판받도록 파산만은 말아주세요

파산이 어떤 의미인지 변호사님이 더 잘 아실것입니다

부디 이런 정당하지 못한 일에 앞장서지 말아주세요

화, 2017/12/0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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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호사님

아이디에스 사기사건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요.

살인마보다 더한 김성훈에게 면책의 기회를 주지 마세요.

법이 좀더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쓰여져야합니다.

김성훈이 같은 쓰레기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해주세요.

채권자파산신청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부디 거두어주셔서 제2제3의 김성훈같은 인간들을 엄벌에 처해지게 도와주세요.

간곡히 부탁 또 부탁드립니다.

화, 2017/12/0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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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ids사기 사건의 피해자로 1년 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김성훈은 이미 2심에서 15년의 중형을 받은 사기꾼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피해금을 변제하겠다

변제하겠다 하면서 시간을 끌어오다  지난 8월에는 비상장주식인 정체불명의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 자신의 감형에만 정신을 쏟다기 몇몇 몰지각한 피해자의 파산신청을 옳다구나 받아들여

자신의 1조에 채무를 벗어나려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를 바르게 풀어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 변호사이신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김성훈 사기꾼을 돕고 수많은 피해자를 또다른 고통으로 몰아가는 일에 앞장서신다는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김성훈의 파산은 부당합니다 김성훈 본인도 은닉재산이 있다하였고 또 변제한다 변제한다 하였으니 파산은 옳지 않습니다. 이많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화, 2017/12/0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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