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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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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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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여러 가지 이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답 : 저는 체육대학에서 운동재활과 트레이닝을 전공했어요. TV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라
고 나오잖아요. 그런 스포츠 관련학과입니다. 저는 운동재활 쪽에 집중했는데 그러다보니 트레이닝도
당연히 하게 되었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처음에 풍납동에 아산병원, 그때 당시에는 중앙병원이었는데 그곳 건강증진센터 내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그러다 학교 내의 생리학 실험실연구소에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됐죠. 병원 근무 후 모교에서 자리가 생겨서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모교 연구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다 집안에 어른들이 아프시고 동생도 아프게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매장 투자방식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초창기 한 15개 정도 매장이 있을 때 같이 시작했죠

문 : 투자만 하신건가요?

답 : 돈이 조금밖에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매장 투자를 결심했죠. 조금 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당시 저를 좋게 봐준 실장님이 계신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우신 분이죠. 그러다 나중에는 회사에 정상적인 출근을 했어요.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기 전에 조교 임기를 마치고 당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천대학교에 강사로 들어갔어요. 인천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님이 제가 진행하는 운동생리학 실험을 좋게 봤는지 마침 그때 강의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인천대에 외부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지금도 그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처음에는 매장 마케팅 업무를 했어요. 매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로컬 마케팅을 제 지인과 주변 인맥에 도움을 받아 진행했죠. 그러면서 규모가 조금씩 늘어났죠. 마케팅이라는 게 들어간 비용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케팅전문가들은 이번 홍보는 얼마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분석하는데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글로벌 IT 기업에 근무하던, 옛날 소대원이었던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면서 그 회사의 마케팅 방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실전마케팅이란 말을 써가면서 어떤 제품을 팔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제품과 브랜드의 가치를 함께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그 중에서 가수 에픽하이와 함께 콜라보한 제품을 출시해 보았죠. 이후 회사 차원의 자체 컴필레이션 음반도 3장이나 진행했어요. 그 외 홈쇼핑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했었죠. 그 당시 일과 강의를 병행하다가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강의는 조금씩 줄여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말마다 실험이 있으면 실험에는 꼭 참가하고 그랬었죠. 제가 또 실험실 출신이어서 실험에 대한 재미는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요. 마우스 테스트나 행동테스트 이런 것들을 선배 교수님이랑 종종 진행했었어요.

문 : 커피 티백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답 : 삼각뿔 모양의 커피 원두 티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먹을 필요가 있냐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했죠. 삼각뿔 모양이니까 안에 들어가는 양도 늘려야 했어요. 우려내는 정도를 고려해서 부직포가 아니라 실크타입의 비싼 재료를 썼어요. 그래서 투과율도 좋고 부직포 티백에서 나오는 잔맛을 최소화했어요. 부직포 티백에서는 차맛을 왜곡시키는 잔 맛이 나거든요. 커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 CJ 홈쇼핑에 런칭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완판이란 걸 해봤어요. 이렇게 하면 브랜드가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저를 믿고 함께 해준 홈쇼핑 담당자님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의 조언이 지금도 제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문 :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저는 1991년도, 대학교 2~3학년 때 연구소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 내력상 알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초대회장이셨어요. 4·19 당시 3학년으로 법대를 다니셨어요. 4월 19일에 아버지는 교내 학생들과 교문을 뚫고 나가다가 선두에서 바로 경찰한테 잡혀서 끌려가셨는데 이승만이 하야한 날 지프차에 실려 있다가 집 앞에 버려졌대요. 답십리 해병대사령부에 잡혀있으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다가 이승만이 하야한 것도 몰랐대요. 그러다 갑자기 지프차 타라고 했대요. 집에 와보니까 아버지 본인의 영정이 있더래요. 행방불명이니까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때 빨리 잡히신 게 그 나마 다행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 동지였던 노희두 씨는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지금 4.19묘지에 계세요. 아버지는 법대 졸업 후 4.19 이후 상황에 회의가 들었는지 군대에 바로 갔고 제대 후에 교직원을 하시다가 교수를 하셨죠. 현재는 돌아가셔서 4.19 묘지에 여러 동지분들과 함께 계세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문 : 어머님도 연구소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답 : 제 어머니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친손녀에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찬’자 ‘기’자 이신데 일제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중 일찍 돌아가셔서 해방되고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분들이 오실 때 유골로 같이 오셨어요.

 

김창숙선생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주로 지내셨다고 하셨구요. 어머님은 김구 선생님(어머니는 김구 선생님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라구요)도 직접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일화로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곰보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
려고 할 때 김창숙 선생님이 혼자 시위했는데 외증조부의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따라다녔대요. 그리고 제가 여기 효창동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과 유년기 시절에는 말썽을 부리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러면 안 된다고 일본놈들과 독재자들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냐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라서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초창기부터 알았던 거죠.

문 : 가입은 2015년에 하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는 저한테 친숙한 단체예요. 이질감이 없는 곳이죠. 제가 결혼할 때 김시업 선생님이 주례를 해주셨는데 그분이 심산 김창숙 연구소 회장을 하시면서 심산상을 만드셨고 1992년에 고 임종국 선생이 수상자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신 받았죠. 저한테는 그렇게 친숙한 단체라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저는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 있으면서 탈북자 학교를 가끔 후원했어요. 아버지도 실향민이고 하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후원 요청을 하니까 좀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 회사가 내 회사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2015년도에 회사를 나오게 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연구소 후원을 시작했죠.

문 : 효창독립커피 이야기를 해볼까요. 처음에 제안하신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답 : 제가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한 게 2005년에서 2015년까지, 투자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네요. 그러다 보니 커피업계를 두루두루 알아요. 지금 현직에 계신 분도 알고 있고요.
효창독립커피도 그런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죠. 방실장님을 만나서 최초로 그 말씀을 드렸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굉장히 좋은 취지, 정신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주변에서 연구소의 취지나 사업내용을 잘 모르더라고요. 더군다나 젊은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그래서 연구소를 더 많이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효창독립커피 사업을 떠올려 그 제안서를 만들어서 연구소에 왔던 거죠. 젊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커피라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그리고 제안의 취지, 사업 목표와 방안에 대해 방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문 : 효창독립커피를 위해 꾸려진 팀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답 : 제가 우선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방실장님에게 커피를 통한 수익사업을 제안하니까 방실장님이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셨죠. 이후 제가 브랜드 취지를 이해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들과 논의하기 위해 카페리즈의 강인규 대표를 만났어요. 그분은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고, 정말로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에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분, 그분이 효창독립커피의 원두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유통은 성빈인터내셔널의 전혁준 대표가 맡아주기로 했어요. 이렇게 두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효창독립커피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죠. 지금 효창몰이라는 쇼핑몰을 구축중이고 그곳을 플랫폼으로 효창독립커피와 또 다른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이고요. 여기에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차리석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그 후손인 차영조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가 그림을 그려주셨고 켈리그래프 예술가도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업과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예술가가 한데 모여 뜻깊은 효창독립커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 사업의 제안자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답 : 막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또 여유자금이 생긴다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에 쓰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엄청나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좋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자부심은 본인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빛나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숨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업의 수익을 통해 그런 세상보다는 우리의 선대가 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그분들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요. 그 후손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해방 후 남한에서 수립된 정권에 의한 전도된 가치관의 범람, 불의와 정의의 뒤바뀜으로 인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 보편적인 정의를 붕괴시키는 것, 허세와 위선, 기만과 권모술수로 인간관계를 파멸시키고 나아가서 남북 분단 상황을 조장, 이용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 하나라도 바치거나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민주주의와 모두의 정의를 위한 희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화, 2020/05/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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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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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자 대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설문조사를 실시하여여야 국회의원 90명이 법 개정에 찬성한데 이어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5월 24일과 6월 13일 각
각 서울과 대전현충원에서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서울과 대전현충원이 속해 있는 서울 동작구와 대전 유성구의 이수진, 김병기, 조승래 의원이 직접 참석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약속했다.
국민여론 역시 친일파 이장에 긍정적이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조사결과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반대는 17.5%) 6월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0%로 절반을 넘었다.(이장 반대 32.3%)

화, 2020/06/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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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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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도 1차 사원총회 열려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연기를 거듭했던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사원총회가 5월 30일 오후 4시 30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현안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는 법정회원 정수 49명 중 26명이 참석하였으며, 2019년도 결산을 승인하고 2019년 12월〜2020년 4월 기간 입금된 기부금사용 승인 신청안건도 통과시켰다. 2019년 사업성과와 2020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와 검토도 진행됐다.
임기 만료된 함세웅 임헌영 윤경로 이사와 최수전 감사의 연임안도 승인되었으며, 지난 3월 18일 별세한 이이화 선생 후임으로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전 덕성여대 교수)를 신임이사로 보선했다. 이어 개정 정관에 의거해 1차로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권위상 김순흥 김희원 박동규 이순옥 조승현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운영위원회 세칙안을 검토했다. 한편 올해 전국회원대회와 수련회는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개최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원대회 보고서는 별도로 발송할 예정이다.

화, 2020/06/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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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복회의 비전과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대해 듣다

인터뷰 MC노·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김혜영 선임연구원

이번 인터뷰는 6월 2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김원웅 광복회장과 가진,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5 제9화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를 요약 정리하였다. 인터뷰 전문은 유튜브와 팟빵에서 ‘내역사 김원웅 광복회장’으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편집자

● MC노 2019년 21대 광복회장으로 취임하신 김원웅 광복회장님을 모셨습니다. 지난 1년간의 광복회 사업과 앞으로 광복회 비전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김원웅 작년 6월 1일에 취임을 했으니까 딱 1년 됐습니다. 광복회는 독립유공자 후손 중 한명만 회원 자격이 주어집니다. 저 같은 경우도 7남매 중에 장남으로 저는 광복회원이지만 동생들은 광복회원이 아니고 독립유공자 유족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약 8,100명이 광복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 MC노 그렇군요. 광복회에서 주로 하는 사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김원웅 광복회는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사업,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 등을 하도록 정관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 MC노 김원웅 광복회장님에 대해서는 방학진 기획실장님이 소개해주세요.
● 방학진 많은 분들이 광복회장 김원웅보다는 정치인 김원웅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분의 숨겨진 이력 중에 하나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독립운동가십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는 ‘성골’이라고 하죠.(웃음)
● MC노 그러면 부모님 두 분은 어떤 분들입니까?
● 방학진 아버님은 김근수 선생님이시고 어머님은 전월선 여사님이십니다. 아버님은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셨고, 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하여 선전 및 정보수집 활동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16세인 1939년에 중국 귀주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고 이후에 광복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셨습니다. 부부 광복군, 부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십니다. 그래서 김원웅 회장님의 고향이 중국 충칭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도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요. 김근수지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추도사를 연구소 2대 이사장이셨던 조문기 선생님께서 하셨습니다. 생전에 조문기 선생님도 본인이 추도사를 한 집안의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하니까 큰 보람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 MC노 부모님과 관련해서 덧붙이실 이야기가 있을까요?
● 김원웅 저희 어머니는 의열단 후신인 조선의용대에 열여섯의 나이에 가입해서 스물한 살때 저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당시에는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활동지역은 북쪽이고. 어머니는 남쪽 계림(桂林)이니까 서로 몰랐죠.
● MC노 그런데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결혼하셨어요?
● 김원웅 김원봉 선생과 김구 선생이 합작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했을 때 거기서 만난 거죠. 김구 선생님이 두 분의 결혼을 주선해서 제가 1944년에 태어난 겁니다.
● MC노 부모님 두 분의 만남이 어떻게 보면 독립운동사와 맥을 같이 하는 거네요. 두 세력이 만나면서 두 분이 만나신 거니까요.
● 김원웅 제가 독립기념관에 있는 자료를 보다 보니까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데 쌀도 배급했더라고요. 1인당 쌀 두 말씩 지급한다는 표시로 이름 옆에 쌀미(米)자 쓰고 이두(二斗)라고 쓰여 있어요. 당시 제 화명(華名 : 중국 이름)이 왕원웅, 아버지는 왕석(王碩)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 MC노 광복회장 취임 전에 국회의원 김원웅으로서 친일청산활동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14대, 16대, 17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참여정부 시절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특별법이 제정되는데 이 두 가지 법 제정에 관여하셨습니다. 이는 반민특위 이후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MC노 이 당시에 법안 제정 과정에서 기억나시는 일이 있습니까?
● 김원웅 제가 1992년도에 마흔일곱 살 때 초선 국회의원이 됐어요. 그 당시에 이완용 후손이 재산을 찾아가겠다면서 재판을 하는데 법적으로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을 만들기로 하고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안 제정을 주도한 사람은 법률가인 장기욱을 포함해 제정구, 장영달, 이철, 유인태, 저 이렇게 참여했는데 법안을 만들려고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다가 놀랐어요. 국회의원 중에서 친일파 후손이 너무 많은 겁니다. 지금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신은 선대 때문에 서명을 못한다’고 합니다. 당시에 독립유공자 후손은 저와 이종찬 의원 단 둘밖에 없더라고요. 국회의원 중에 친일파 후손들은 많은데 말입니다.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 얼마나 많은 친일반민족세력이 있는가 하고.
● MC노 소수일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딱 두 분밖에 없었다는 건 충격적이네요.
● 방학진 두 명이라도 있는 게 어딥니까. 그 당시가 기억이 나요. 1992년도인데 우리 연구소가 당시에는 반민족문제연구소였을 때인데 저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그 당시에 말씀하신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 기사를 열심히 스크랩했던 기억이 납니다. 탑골공원에서 서명운동도 하고.
● MC노 광복회장으로 취임하신 지 1년이 되신 거잖아요. 1년 동안 광복회가 많이 달라졌다고요?
● 방학진 개인적으로는 광복회가 정권교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광복회가 1965년에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보면 박정희가 만든 관변어용단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MC노 그렇지만 출범 당시에도 독립지사 후손 분들의 단체 아닙니까?
● 방학진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서 국민적 저항과 친일정권이라는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제대로 광복회가 활동했으면 괜찮은데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는 않았었습니다. 회장님이 오시면서 바뀐 것이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현재 달고 계신 배지가 광복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배지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 김원웅 하나는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배지, 5·18 40주년 배지 그리고 광복회 배지입니다.
● 방학진 이전 광복회장님들은 언론에 나오는 게 일 년에 두 번쯤 됩니다. 삼일절과 광복절 기념식. 그런데 김원웅 회장님은 5·18은 기본이고 봉하마을 참배도 다녀오시고. TV조선과 채널A 재승인 취소요구, 윤봉길 의사 손녀가 미래한국당 비례대표가 된 것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남북정상간 응원 메시지도 남기셨고, 류석춘과 이영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전의 광복회장님들이 전혀 하시지 않았던 사이다 행보와 발언을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올해가 5·18 40주년인데 5·18민주묘지에서 광복회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하시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 MC노 5·18과 관련해서 광복회가 사과해야 될 일이 어떤 건가요?
● 김원웅 광복회는 매월 광복회보를 발행합니다. 5·18 당시 광복회보에는 광주항쟁을 소요사태라고 했고 소요사태를 진압한 전두환의 리더십에 대해서 칭송한 글이 있습니다.

● MC노 1980년 광복회보에?
● 김원웅 예. 그것도 문제가 있고 최근 사례로는 박근혜 정부 때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노래라고 하면서 제창하지 못하게 했죠. 그때도 광복회는 다른 보훈단체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각종 행사에 보이콧하겠다고 언론에 발표했었습니다.
● MC노 그 당시 광복회의 입장이 그랬습니까?
● 김원웅 제가 회장으로 취임한 후 알아보니 광복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해 논의한 적도 없고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답니다. 그렇지만 침묵했죠. 거짓 발표에 대해서 본인들의 입장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거예요. 이런 점들이 미안했습니다.
● MC노 김원웅 회장님이 작년 6월 취임사를 보면 ‘민족민주진영의 맏형이 되는 광복회가 되겠다. 친일청산으로 대한민국을 애국의 대상이 되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동안의 활동들은 취임사를 구현하겠다는 활동이신 거죠?
● 김원웅 그렇습니다.
● MC노 TV조선과 채널A 재승인 취소요구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하신 겁니까?
● 김원웅 TV조선과 채널A에 대해서 줄곧 조사했어요. 패널이 한 얘기긴 하지만 〈반일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교수에 대해서 학계에서 존경받는 분이라고 홍보하고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잘못된 판결이라고 이야기해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강제성이 없고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친일을 비호하는 등의 이런 발언에 대해서 광복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고 이런 방송이 계속된다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면 안 되는 방송입니다. 저 혼자 한 것은 아니고 광복회원들의 의사를 듣고, 찬성하신 분들의 실명을 밝히고 방송통신위원회에 의견서로 제출했습니다.
● MC노 김원웅 회장님 취임하시면서 광복회가 역동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광복회는 박제화된 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에요. 용산구 청파동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생기고 오늘 처음 오신 건데 느낌이 어떠셨어요?
● 김원웅 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처음 생길 때 연구소 이사였습니다.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고, 잘 되기를 바랐고요. 그동안 연구소가 한국역사의 물길을 제대로 잡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를 각성하게 만들고 결집하게 만들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태서 같이 하자. 그래서 저희들이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 광복회 직원들이 연구소에 문의도 하고, 협의도 하고 있습니다.
● MC노 오늘 가장 중요한 주제인데 친일찬양금지법 제정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광복회가 이번 21대 국회의원 지역구 출마자 전원에게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관한 찬반의사를 물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 253명 가운데 2/3가 넘는 190명이 찬성의사를 밝혔고 광복회는 친일찬양은 물론이고 5·18민주화운동 왜곡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역사왜곡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이것과 관
련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김원웅 유럽은 나치찬양을 하면 처벌받습니다. 그것에 준하는 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며 결과적으
로 일단 청신호가 켜졌는데 역사왜곡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5·18과 묶어서 하던지 별도로 하던지 검토할 계획입니다.
● 방학진 190명이라고 한다면 소위 이야기하는 민주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미래통합당까지도 찬성한 거죠.
● 김원웅 미래통합당 당선자 중에 55%가 찬성했습니다. 국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면 원내 의석이 있는 당에게 당론으로 채택해 달라는 공문을 보낼 계획입니다.
● MC노 올해 2020년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광복회에서는 어떤 일들을 계획 중이신가요?
● 김원웅 6월 6일이 현충일이지만 광복회에서는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했습니다.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친일경찰들이 모의하고 반민특위 요원들을 감금했던 곳이 서울중부경찰서입니다. 그 중부경찰서 앞에서 우리가 인간 띠 잇기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경찰이 국가공권력을 가지고 역사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요구할 계획입니다.
● MC노 경찰 얘기를 했습니다만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해주셨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 김원웅 우리나라에서 보수라는 분들은 일본 천황을 지키고 해방 후에는 친일반민족세력들의 기득권을 지켜온 가짜 보수입니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아니라 민족과 반 민족의 구도다. 인류애와 반인류애의 구도다. 그런 관점에서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해방 후 75년 동안 사회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에 있습니다. 모든 갈등이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면서 친일세력을 기득권에 앉혀놓고 단결하라고 하면 일제의 내선일체와 뭐가 다릅니까. 국민통합이 불가능한 거죠.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도 친일청산을 이루어야 하며 그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화, 2020/06/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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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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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47년 만에 지정 해제

 

우리 연구소는 지난 2004년부터 친일경력이 있는 화가들이 그린 위인들의 표준영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는 2014년 10월부터 아산 현충사 앞에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을 즉각 교체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과 서명운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2010년과 2017년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 사무소는 문화체육관광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해제를 신청했지만 모두 반려됐다.
2010년 영정심의위원회는 심의규정에 ‘멸실, 도난, 훼손 등의 경우’에만 영정을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의 친일 논란은 지정 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2017년에는 “충무공은 국민적 영웅으로서 표준영정 지정 해제에 따른 혼란과 갈등이 야기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은 국가사적지인 현충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현상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문화재위원회 사전심의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역시 신청을 반려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의 영정을 친일 화가가 그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즉각 교체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지정해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특히 김영주 의원은 영정심의위원회 규정과 심의위원회 구성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 결과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영정 심의규정에 ‘복식, 용모 등이 잘못 표현된 경우’와 ‘사회통념에 비춰 재제작의 사유가 발생한 경우’를 추가한 것이다. 즉 ‘친일’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사회통념’을 추가하여 사실상 작가의 친일 경력을 재제작 사유에 추가한 것이다. 또한 미술계 인사들이 대다수였던 심의위원에도 역사 분야 전문가를 대폭 추가해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
문체부가 7월 중에 영정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순신 표준영정을 지정 해제하고, 광복절 이전에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을 철거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2023년까지 새로운 충무공 표준영정 제작과 지정 절차를 마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은 전체 표준영정 98점 가운데 14점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0/07/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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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 여름 시민강좌 ‘차별과 혐오의 역사 넘어서기’ 강좌 진행

 

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지난 6월 30일부터 시민강좌 ‘차별과 혐오의 역사 넘어서기’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나날이 심각해가는 배외주의 분위기에다가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
믹까지 더해져 차별과 혐오가 노골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기반한 혐오범죄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써 촉발된 반차별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국제적 반차별 운동은 제
국주의 역사 기념물 철거운동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금도 지속되는 ‘차별과 혐오’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성찰해 보고자
이번 시민강좌를 기획하였다. 특히 이번 강좌는 ‘차별’의 오랜 기원이라고 할 제국주의 침략 역사와 과거 청산의 노력을 살펴보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차별과 혐오에 맞설 수 있는 공감과 연대의 힘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이 강좌에는 차별반대, 과거사청산, 식민주의 극복의 연구와 실천운동을 펼친 연구자와 활동가가 강사
로 초빙되었다. 1강 염운옥 교수의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는 강좌 주제 전체를 개괄 하였고, 2강 김민철 교수의 “‘차별’로 구조화된 일제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와 3강 이동기 교수의 “역사정의와 유럽의 과거청산-증오와 혐오를 넘어”는 제국주의 시대 차별 양산 구조와 과거청산의 현재적 실태를 살펴보았다. 4강 미류 인권활동가는 “질문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을 소개하며 차별 철폐
법제화의 의의를 강조하였고, 5강 조경희 교수의 “자이니치, 혐오와 차별에 맞서다”는 혐오범죄에 맞선 재일조선인 투쟁의 역사를 다루었다. 6강은 서승 교수가 “식민주의 극복, 동아시아 시민의 투쟁”이라는 주제로 할 예정인데, 마지막 강의인만큼 혐오와 차별에 맞서 우리가 연대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강좌는 117명이 수강 신청을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연구소에서는 최초로 시도한 온라인생중계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비대면 강의의 편의성까지 더해져 수강생들에게 만족도 높은 강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수강생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최근 경험한 온라인 연수 중 최고였다’는 강의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번 온라인강좌 진행의 경험을 발판삼아 온라인 비대면 강좌는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진행된 강의는 신청자에 한해 강의 후 2개월까지 다시 볼 수 있다. • 김슬기 학예실 주임연구원

월, 2020/07/2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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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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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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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0]

역대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벽제관을 시찰한 까닭은?
사쿠라와 단풍나무 동산으로 구축한 그들만의 성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년) 10월 3일(양력 11월 21일) 기사에는 평양이궁(平壤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려던 의정 이근명(議政 李根命, 1840~1916)에게 고종황제가 하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 이어 전교하기를,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았는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처음에는 수로(水路)로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만, 감동당상 민영철(監董堂上 閔泳喆)이 전보한 바에 근일(近日) 수로에 풍랑이 잦아 육행(陸行)을 권하기에 육로로 가려고 하나이다.” 하였다.
…… 상(上)이 이르기를, “며칠간의 노정(路程)인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550리인데, 하루에 7, 80리를 가면 7, 8일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오년(1894년) 이전에 칙사(勅使)나 동지사(冬至使)가 지날 때는 도로가 광탄(廣坦)하고 점막(店幕)도 즐비했는데, 지금은 틀림없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이니라. ”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그렇습니다.” 하였다

 

사진엽서에 남아 있는 벽제관의 옛 모습이다. 아래의 설명문에는 “임진왜란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명나라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라고 하여 이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전승지라는 점과 결부시켜놓고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이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벽제관의 외대문에 달려 있는 ‘벽제관(碧蹄館)’ 편액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아래에는 성종 때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 1430-1502)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편액의 잔편은 현재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오른쪽)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공사’로 인해 오히려 원형을 상실해가고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원래 온돌 구조의 방바닥과 벽면이 가리고 있는 형태였으나 느닷없이 마루 모양으로 변형되었고, 더구나 앞뜰과 주변 일대는 사쿠라와 단풍나무가 점령한 상태로 바뀌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이러한 대화는 1894년 청일전쟁과 더불어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두 나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곳이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선박이나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옛길의 이용빈도가 두드러지게 저하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던 이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1,050리(里), 다시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 도합 3,111리에 왕복으로는 6,222리나 되는 머나먼 행로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10에 수록된 ‘연기(燕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노정(路程)이 정리되어 있다.

 

한성(漢城) →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 40리) → 파주 파평관(坡州 坡平館, 40리) → 장단 임단관(長湍 臨湍館, 30리) → 송도 태평관(松都 太平館, 45리) → 금천 금릉관(金川金陵館, 70리) → 평산 동양관(平山 東陽館, 30리) → 총수참 보산관(葱秀站 寶山館, 30리) → 서흥 용천관(瑞興 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관(劒水站 鳳陽館, 40리) → 봉산동선관(鳳山 洞仙館, 30리) → 황주 제안관(黃州 齊安館, 40리) → 중화 생양관(中和 生陽館, 50리) → 평양 대동관(平壤 大同館, 50리) → 순안 안정관(順安 安定館, 50리) → 숙천 숙녕관(肅川 肅寧館, 60리) → 안주 안흥관(安州 安興館, 60리) → 가산 가평관(嘉山 嘉平館, 50리) → 납청정(納淸亭, 25리) → 정주 신안관(定州 新安館, 45리) → 곽산운흥관(郭山 雲興館, 30리) → 선천 임반관(宣川 林畔館, 40리) → 철산 차련관(鐵山 車 輦館, 40리) → 용천 양책관(龍川 良策館, 30리) → 소곶참 의순관(所串站 義順館, 40리) → 의주 용만관(義州 龍灣館, 35리) → [이하 중국 행로는 생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머나먼 행로 가운데 서울 도성에서 벗어난 첫 번째 기착지이자 되돌아오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이다.사신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공식행렬과는 별개로 수행원들의 친구나 친지들이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전송하고 작별하거나 귀로에 오른 이들을 다시 마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을 소재로 한 무수한 시문(詩文)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의 주인행세를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벽제관이라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벽제관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이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은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역대 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이곳을 시찰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 의한 벽제관 시찰이다.
<매일신보> 1912년 4월 30일자에는 「총독 벽제관행(總督 碧蹄館行)」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행로를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은 재작(再昨) 28일(日) 오후(午後) 2시(時)부터 아카시 소장(明石 少將), 아라이 탁지부장관(荒井 度支部長官), 후지타 부관(藤田 副官)을 종(從)하여 자동차(自動車)를 승(乘)하고 고양군 벽제관(高陽郡 碧蹄館)에 부왕(赴往)하여 문록역(文祿役)의 전적(戰跡)을 시찰(視察)하고 오후(午後) 6시(時)에 귀저(歸邸)하였다더라.

 

데라우치 총독 자신이 남긴 일기(日記)에도 이날의 동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가 이날 벽제관 앞에 벚나무(櫻樹, 사쿠라)를 심어 기념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그가 심은 벚나무 주위에는 나중에 돌기둥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보호난간을 둘러 정성껏 관리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벽제관 일대의 공간변형을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풍경의 하나는 이곳 주변이 온통 벚꽃 동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에 수록된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조선> 1930년 9월호에 수록된 벽제관 후면 언덕의 ‘괘갑수(掛甲樹)’이다. 이곳이 정말 왜군의 갑주가 걸린 곳이었는지는 일본인들 스스로 의심하는 바였지만, 어쨌거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난간과 표석을 세워 나름으로 소중한 기념물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념식수일’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리는 동시에 애림사상(愛林思想)을 고취하고 식림(植林)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 공휴일)을 기하여 처음 기념수재일(記念樹裁日)로 정한 이래로 해마다 식목행사를 거행한 날이다. 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축이 되어 벽제관 주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 1만 그루를 심었고,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도 이미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단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시점부터 벽제관 일대에는 일본산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기 시작했다는 흔적도 발견된다. 가령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으로 장기간 서울에 체류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남긴 <연하승유기(烟霞勝遊記) 하권(下)>(1924), 325쪽에는 그 자신이 1916년 3월 17일에 벽제관을 탐방한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바 있다.

 

…… 관후(館後)의 소구(小丘)에는 당년(當年)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칭(稱)하는 노규(老槻, 느티나무 고목)가 있다. 구상(丘上)에서 지점(指點)하면, 양군공전(兩軍攻戰)의 터가역력(歷歷)하게 보인다. 이 주변에는 천주(千株)의 길야앵(吉野櫻, 요시노 사쿠라), 천주(千株)의 풍(楓, 카에데)을 기념(記念) 삼아 심었지만, 거의 전벌(剪伐)되어져 가까스로 두어 그루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인(朝鮮人)의 수목(樹木)에 무돈(無頓)이 지나침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 했다.

 

여기에 나오는 ‘괘갑수’는 벽제관전투 당시 싸움을 마치고 일본군 장졸(將卒)이 갑주(甲冑)를 벗어 이곳에 걸어놓고 휴식을 취했다거나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자신의 투구를 걸었던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전설이 있는 벽제관 뒷동산의 느티나무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얘기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글들이 곧잘 남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곳 역시 그들이 늘 자랑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28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이케카미 정무총감의 벽제관 수리공사 현장시찰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이케카미 정무총감이 정의현(鄭儀鉉) 벽제면장과 더불어 기념식수를 하는 보도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건설(公園建設)을 계획, 면민(面民)은 관상목 식재(觀賞木 植栽)」 제하의 기사 등에도 벽제관 일대에 대규모로 벚나무를 식재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처럼 벽제관 일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적극적으로 심고 이를 관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곳을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는 공간의 의미에 더하여 봄가을로 벚꽃구경과 단풍나들이의 명소와 같은 탐방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경승지(景勝地)로 자리매김한 벽제관 일대는 관람객들을 쉽사리 맞이할 수 있는 유원지(遊園地)의 형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한 조치들이 거듭 시도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22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전등시설(碧蹄館 電燈施設)과 뻐스 연장요망(延長要望), 벽제면민(碧蹄面民)이 경전(京電)에 진정(陳情)」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벽제(碧蹄)] 고양군 벽제관은 대도회지 경성(大都會地 京城)을 거(距)하기 4, 50리의 지점에 있어 불결(不潔)한 공기와 풍진(風塵) 사이에서 피곤한 뇌를 잠시 수양(修養)할 만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근일(近日)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맞게 되는 바인데 조등기관(照燈機關)과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불완전함을 관민일동(官民一同)이 통감(痛感)한 바있어 거(去) 18일에 신면장(申面長),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이 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기타 민간유지(其他 民間有志) 수십 명이 회동하여 전등가설(電燈架設)과 뻐스 총연장(總延長)을 경전회사(京電會社)에 실행토록 내(來) 22일에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일반민간에서는 지방발전(地方發展)과 산업개발상(産業開發上) 필요하므로 실행을 기대중이며 교섭위원(交涉委員)으로 좌(左)의 제민(諸民)을 선정하였다. 신 면장(申面長), 이 이사(李理事),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임창운(林昌雲), 이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코야마 협의원(小山協議員),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사에키 소장(佐伯所長), 안 기자(安記者).

 

여기에 나오는 ‘신 면장’은 일제강점기에 춘천군수, 원주군수, 홍천군수(1924년 12월 퇴직)를 역임하고 나중에 고양군 벽제면장(1932.1~1939.10)을 지낸 신규선(申圭善, 1882~1958)을 말하며, 지금도 벽제관 터 앞에는 1941년 1월에 건립한 ‘면장 신규선 치적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에키 소장’이라고 하는 이는 벽제우편소장(碧蹄郵便所長)이던 일본인 사에키 토루(佐伯融)를 가리킨다.
그는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나중에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1933년 9월 9일 제막)를 조성할 때도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 벽제면사무소가 자리했던 벽제관 터 앞쪽 비석군에는 ‘벽제면장 신규선(申圭善) 치적비(1941년 1
월 25일 제막)’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벽제우편소장 사에키 토루(佐伯融)의 경력과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된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
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는 벽제관 전적지의 보존과 기념비 건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총독의 시찰 때거나 일반 탐방객의 방문 때건 간에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4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형석(螢石)의 채굴을 독려, 개성에서 고미술(古美術)도 감상한 총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부임 후 두 달 남짓에 이곳 벽제관을 시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누누이 훈시를 한 다음 점심을 마치고 개풍군 중면(開豊郡 中面)에 있는 종양장(種羊場)을 시찰하고 대룡광산(大龍鑛山)을 찾아 경금속(輕金屬) 증산에 중요한 자재인 형석(螢石)의 채굴하는 현장을 독려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올랐다. 모색이 어리는 장단(長湍) 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도중 벽제관(碧蹄館)에 들러 충혼비(忠魂碑)의 비명(碑銘)을 읽고 측근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 동안 감개 깊은 듯 2백여 년 전의 옛일을 회고하고 일로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의 패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사쿠라와 단풍나무의 천국으로 변한 자신들만의 성지(聖地)에서 얼토당토않게 그저 그 옛날과 같은 또 한번의 전승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화, 2020/07/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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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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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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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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