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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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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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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토, 2019/12/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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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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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작곡을 의뢰했으며, 25일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새로운 교가는 창영초교 합창부 학생들이 직접 음원을 녹음했다. 임용렬 창영초교 교장은 선포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활동한 창영초교 선배님들이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른 교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임동혁)가 작곡한 교가였다”며 “현재 일본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새로운 교가를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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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점차 독점화하고 상업화해 가는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퍼블릭액세스 채널이 가진 지향점,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린 판단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명확한 자료에 근거해 제작했으며, 전체 다큐영화의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민방송의 <백년전쟁> 방송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이승만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나온 ‘무죄’ 결정과 같은 결과였다.
대법원이 ‘파기환송’ 했으므로 다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여 상식에 부합한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금, 2019/12/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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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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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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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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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역사만화 <반민특위>를 펴낸 조남준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이번에 발표하신 <반민특위전-청산의 실패, 친일파 생존기>(한겨레출판) 서문을 보면 작가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광주 5.18과 87년 6월항쟁인데, 반민특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1980년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필독서라고 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면서 반민특위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친일세력이 우리나라에 어느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친일세력의 1세대들은 이제 사라졌고 친일파는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박정희도 일본육사 출신인 게 알려지지 않았죠. 계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는 친일파가 장악하고 그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조중동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으로 언론개혁을 진행했는데 엄청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봤었고요. 2005년에는 사학법 개혁을 하면서 사학재단의 비리를 밝혀보
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의 박근혜가 한달 동안 청계천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반대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개혁이 제대로 안 되는 것들도 보았죠. 이승만 정권 때 친일세력들이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사학을 만들었고 그 학교들에서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또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하고 숨어있던 친일옹호론이 나타났죠. 그래도 처벌되지 않아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움직임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반민특위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모르거든요. 그래서 좀더 알기 쉽게 만화책으로 내게 된거죠.

 

문 : 직접 겪은 6월항쟁은 어땠나요?

답 : 너무 많은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어요. 이한열, 박종철만 많이 알려졌는데 김세진, 이재호, 황정하 등 많은 열사가 있었습니다. 황정하는 이 책 <반민특위전>에도 나오는 독립운동가 황옥 선생의 손자라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선 항상 일부 극소수 극렬좌경용공학생들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과 국민들을 떼어놓기 위한 용어였죠. 당시 사회민주화운동의 주축은 학생운동이었어요. 대학교 교문 앞에는 지독한 최루탄 냄새가 끊이질 않았어요. 그래도 시민들은 학생들 탓을 하질 않았습니다.
공권력은 극대화되어 있고 철의 요새처럼 전두환 정권은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6월 10일 명동에서 지나가는 차들이 약속대로 모두 경적을 울렸어요.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 일은 매일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어요. 계란에 바위치기 같았던 고립감 속에 외롭게 싸우던 학생들에겐 가슴부터 울컥 감동이 밀려오는 거대한 국민들의 힘을 느꼈죠. 전두환은 항복했고 일시 승리감을 느꼈었지요.
제가 85학번이고 1987년에 3학년이었어요. 6.10 때 경찰은 해산작전이 아니라 연행작전을 펼쳤어요. 명동에서만 세 번 끌려갔어요. 그 전에는 경찰서에 가면 몇박 몇일 밤샘 조사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6・10 때는 워낙 많은 사람이 끌려오니까 너무 편하더라고요. 그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식당 같은데 앉혀놓고 그냥 성명, 나이, 소속 이런 것만 빨리빨리 해서 조사받는데 5분, 10분 걸렸나 그랬어요. 그리도 밤새 대기시키다가 아침에 풀어줬어요. 만일 컴퓨터가 있어서 데이터화되어 있었다면 상습범이라고 풀려나질 못 했을 겁니다. 이 경찰서 갔다가 저 경찰서 갔다가 하면서 타자로 친 제 조서는 어마어마한 서류뭉치 중 하나로 캐비넷에 처박혀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죠.

문 : 6월항쟁 이후에 통일운동도 열심히 하셨겠네요. 군대에서 보복조치는 없었나요?

답 : 통일투쟁, 통일선봉대 활동을 했죠. 그리고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중간에 보안사, 지금의 기무사가 저를 추적해서 신원을 알아내 중대장을 굉장히 압박하고 괴롭혔어요. 보안사에서 중대장한테, 네 부대 사병 중에 빨갱이 같은 놈이 있다고 하면서 누군지 가르쳐주지는 않고 오랜 시간 괴롭혔나 봐요.
알아서 나를 조지라는 거였는데, 중대장이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나란 걸 알게 됐죠. 그 다음부터 나를 괴롭히는데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도 학생시절과 사회시절이 더 힘들었기 때문에 군대는 휴가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문 : 졸업과 제대 이후에 사회진로를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화를 하시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원래 미대 출신이에요. 동아리 활동도 했었는데 동아리에 흰 벽이 있었어요. 거기에 전두환에 대해서 만평식으로 처음 낙서를 했어요. 그게 소문나면서 낙서일 뿐인데 많은 학생들이 보러오고 그랬어요. 그림은 자신이 있었지만 만화는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나한테 만화가의 재능이 있나 하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회화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죠. 만화는 회화보다 사람들과 소통에 강력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회화에서 만화로 전환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만화가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웠어요. 중간에 나한테는 만화에 재능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땐 그만두려고도 했어요.

문 : 저는 <한겨레21>을 통해 조작가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간 어떤 작품 활동을 하셨나요?

답 : 시사SF는 1997년도부터 8년 동안 연재했고 그전에는 공동체에서 작업했어요. 만화는 1993년도에 공모전에서 상을 탄 다음에 <내일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4페이지 정도 분량을 매주 그렸죠. KBS에서 ‘조남준의 세상 뒤집어보기’, ‘조남준의 시사포커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2년 동안 100편 정도 만들어서 나름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술자리에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시사만화가로 알려졌지만 남녀 사랑 인생에 대한 장편만화도 그리고 단편만화도 여러 편 냈기 때문에 시사만화가보다 그냥 만화가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도 아마 온라인으로 돌아다니는 ‘균형’은 많이 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문 : 제목을 ‘반민특위전(傳)’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다큐 만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반민특위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 ‘반민특위’가 주 제목으로 들어간 것은 거의 없어요. 반민특위가 많이 알려지고 이슈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에 꼭 반민특위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출판사에 얘길 했죠. 그래서 ‘반민특위전’으로 정해진 거죠. 역사만화를 계속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타이틀도 조남준의 역사만화라고 했고 나중에는 역사만화 1, 2, 3을 붙여 시리즈물로 구상중입니다

문 : 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 참조한 자료는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를 주요하게 봤어요. <친일인명사전>,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 번째가 경향신문의 ‘창간 30돌을 맞이하여 발굴하는 숨은 이야기들’입니다. 이게 1977년도 기사예요. 1년간 연재된 기사인데 그 중에 반민특위 부분이 70회 정도 있어요.

문 : 책에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답 : 다 기억에 남죠. 인물선정을 할 때는 경찰, 관리 도지사, 교육 언론 예술가 등 각계각층을 골고루 분야별로 맞췄어요. 박흥식이 1호 검거자로 경제 쪽이죠. 박중양은 도지사까지 하면서 일본에 대한 아부와 충성심은 최고였고 고위직 권력을 이용해 악행을 많이 저질렀어요. 그의 언행을 보면 일제시대를 민족의 영광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경찰 중에는 노덕술보다 김덕기, 하판락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판락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면서 ‘조센징들’이란 말을 많이했는데 자신을 일본인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문 : 이 책 마지막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선정기준’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친일파들이 잡히고 검거되는 과정에서 ‘중추원’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게 조선시대 중추원도 아니고 도대체 이 직책이 어떤 것인지. 또 경찰의 ‘경시’라던가 ‘경부’란 명칭이 나오는데 지금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이게 지금의 파출소 소장인지 궁금했었어요. 친일파를 선정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어느 선까지 인정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뉴라이트가 흔히 일제 강점기에는 누구든지 친일할 수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이승만은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에게 일제시대 통장을 한 것도 친일이라면서 해임안을 내는 등 공격하고 그랬잖아요.
우리는 보통 친일파로 을사오적의 이름 말고는 알지못하고 그러잖아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낸 <친일인명사전>의 맨 앞에 나오는 친일인물 선정기준을 보면서 이건 꼭 알려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
각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시대 각계각층 여러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서 기준을 세웠던 것은 과거만이 아닌 현대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비교 분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봤죠. 사람들한테 반드시 알려야겠다, 상식적으로도 누구나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정기준을 실은 거죠.

문 : 이 책의 판매상황은 어떤가요?

답 : 아직은 거의 안팔렸어요. 중간에 2주 동안 묶여 있다가 이제 풀렸어요. 이번 주 월요일인가 아마 출고되었을 거예요.

문 :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요?

답 : 초등학생한테는 어려울 것 같고 중고등학생부터는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40대, 50대 이상도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책이 자꾸 커지고 무거워지는데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가벼운 책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 정도면 버스나 전철을 타고가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책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문 : 이 책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답 : 총 합쳐서 1년에서 몇 개월 더 걸렸어요.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는 민족분열’이라는 발언이었어요. 그때부터 그전에 그려놨던 것들을 다시 수정하면서 준비했어요. 나경원의 발언이 이슈화되고 친일 발언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를 만화로 내자고 여러 출판사에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모든 출판사에서 반민특위 만화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회신이 왔죠. 이런 경우는 제 경험상 거의 없었거든요.

 

문 :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요?

답 : 제주 43인데요. 이게 좀 어렵기도 하고 연재만화나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싶어하는 곳이 없어요. 보통 상업성을 많이 따지니까요. 팔릴 건지 안 팔릴 건지를 판단하는 거죠. 근래에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픽션화해서 영화처럼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사실관계에 근거한 다큐적인 작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픽션화해서 사람의 감정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큐로 풀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18을 직접적으로 다룬 다큐만화도 없어요.

 

문 : 이강수 선생이 감수해주셨네요. 도움을 많이 받으셨나요?

답 : <반민특위 연구>를 저술한 이강수 선생이 초고를 보시고 많이 보충하고 수정해주셨는데 대부분 이 책에 반영했어요. 그런데 제가 제일 아쉬운 부분이, 지면 관계상 중간에 보충해주신 것을 다 넣지는 못했어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반민특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실테지만 만화로 쉽게 볼수 있도록 엮어 놨으니까 이 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금, 2019/12/2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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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53]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의 현장, 도화동 공동묘지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나?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와 오랜 세월 출판과 언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남긴 저작물인 <한국의 쇠망(The Passing of Korea)>(1906)에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탓에 여느 사람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이 사진에는 “군율(martial law); 일본이 무상으로 토지를 징발한 데에 항거하여 철로를 중지시킨 일로 총살된 세 명의 한국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찍이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해철처형(害鐵處刑)」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군용철도는 경의선(京義線)을 일컫는 표현이다.

 

작일(昨日) 상오(上午) 10시에 일본 위관(日本 尉官) 1인(人)과 헌병(憲兵) 8명(名)과 병정(兵丁) 40명(名)이 군용철도(軍用鐵道)에 방해(妨害)한 자(者) 아현거 김성삼(阿峴居 金聖三), 양주거 이춘근(楊州居 李春勤), 신수철리거 안순서(新水鐵里居 安順瑞) 등(等) 3인을 공덕리 부근(孔德里 附近)에서 포살(礮殺; 총살)하였더라.

 

이 기사에 따르면 러일전쟁이 터지고 세상이 온통 일본인들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을 때 이에 항거하다가 ‘철도파괴범’으로 처형된 것이 바로 이들 김성삼(아현 거주), 이춘근(양주 거주), 안순서(신수철리 거주) 세 사람의 운명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21일자에 게재된 「가련한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법부에서 외부로 조회하되, 고양군보를 거한즉 음력 7월 17일에 철도역부 일인 3명이 본군 외성동 상리 이덕근 가에 승야 돌입하여 닭을 탈취하려다가 쫓겨 가더니 즉시 또 그 집 내정에돌입하여 부녀를 겁간하려는데 덕근은 출타하고 그 부친 제하와 그 아우 인화가 집에 있다가 일인을 꾸짖었더니 해 일인 등이 몽둥이로 난타하여 제하는 당장 치사하고 인화도 중상하였슨 즉 극히 참혹하다 하였으니 곧 일관에 조회하여 해 죄범을 착득하여 처형케 하라 하였더라.

 

경의철도의 건설에 종사하는 일본인 역부 세 사람이 야밤을 틈타 인근 동네에 들어가 닭을 훔쳐가려다가 들키게 되자, 되려 부녀자를 겁간하려는 것은 물론 사람까지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호머 헐버트의  <한국의 쇠망>(1906)에 수록된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총살형 집행후 군의관에 의한 검시 장면이다. 이때 일본군은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9매에 달하는 연속 사진을 촬영하였고,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이를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대량으로 배포하였다.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이때 처형된 이들의 정체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등 3인이며, 총살형을 당한 장소가 공덕리 부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사진첩(일로전쟁 사진 화보 25권)> (1905년 6월 20일 발행)에 수록된 ‘철도선로 방해자의 사형집행’ 광경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공동묘지는 장소 확인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공연히 남의 나라 백성을 셋이나 처형한 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도 이것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는 일본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부로 보내는 공문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김성삼 등 군율시행통보(金聖三 等 軍律施行通報) 및 대민훈계요청(對民訓戒要請)」이라는 문건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 처형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이러한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한국정부에서 잘 훈계 조치를 하라는 내용으로 일방통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일본의 횡포는 당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서양인들의 경악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대한제국 시절에 궁내부 소속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가 남겨놓은 일기와 서한을 묶어서 엮어낸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서울, 1904년 10월 6일
……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을 게으르고 믿을 수 없는 한국인에게 권리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들은 유럽 사람들이 크게 놀랄 일을 저질렀답니다. 제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한국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죠.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 한국인들을 술에 취해 서울―의주간 철도공사에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여기는 이미 전시법이 공포되어 총살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사형 집행과정을 사진사 두 명에게 찍게 하는 등 일처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은 불쾌했습니다. 이 지독한 총살장면이 담긴 사진을 살 수도 있답니다.
[인용출처 :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136쪽]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사진사 두 명을 동원하여 이러한 잔혹한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내게 했다는 대목이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 무렵 프랑스의 시사화보인 <르 쁘띠 빠리지엥(Le Petit Parisien)> 1904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사격연습」 제하의 기사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에 관한 내막을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사진에 관한 얘기가 등장하고 있다.

(전략) 본지 특파원은 즉석 사진 몇 장과 함께 참혹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였다. 사진은 서울의 일본인 사진사들로부터 돈을 주고 쉽게 구한 것으로, 그들은 이 사진이 가져올 여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인근에 농부 세 명이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중 한 명은 과부의 아들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고, 모두 문맹인데다 아는 것은 없고 술만 마셔댔다고 한다. 생각 없이 행동하던 세 농부는 어느 날 저녁 서울에서 의주로 향하는 철도의 철로를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철로에서 선로변경장치를 발견하고는 신문물을 신기하게 여겨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장치가 상하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하였던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순찰중이던 일본 헌병이 다가와 다짜고짜 불쌍한 사고뭉치들을 검거해 서울로 호송하였다. 세 농부는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백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범죄’현장에서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서울의 공인 사진사들을 인력거로 처형장까지 데려와 흥미로운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략) [재인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 2017, 222쪽]

 

여기에서 보듯이 한국주차 일본군대가 저지른 총살형 장면은 이를 은폐하거나 비공개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그 광경을 찍게 하고 그것을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아무라도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배포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본의 군사시설에 해코지를 하거나 자신들의 위력에 감히 맞선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무력과시의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904년 11월 8일에 간행된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10권(박문관 발행)을 보면, ‘한국철도방해자의 처형’이라는 제목 아래 총살형 장면과 관련하여 넉 장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8월 27일 한국 용산 부근에서 우리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하여 체포된 비적(匪賊)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은 9월 20일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1일 오전 10시 마포가도(麻浦街道) 철도답절(鐵道踏切, 철길 건널목)의 좌측 산기슭에서 총살되었다”는 설명 구절이 붙어 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 흩어져 수록된 이들의 처형 장면을 다시 취합하면, 당초에 최소 9매 이상의 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사진들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세 사람을 인력거에 태워 처형장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석 장이고,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어 처형을 하기 직전 상황을 담은 것이 두 장, ‘무릎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두 장, 총살형 집행 후에 군의관이 검시(檢視)하는 광경이 두 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대개 일본인 사진관을 통해 묶음으로 팔려나가 어떤 것은 낱장으로, 어떤 경우에는 서너 장 단위로 지면에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비단 헐버트의 책만이 아니라 근대시기 이 땅을 찾은 여러 서양인 탐방객들이 남겨놓은 여행기나 회고록, 그리고 화보잡지와 같은 종류의 매체에도 이들의 처형장면이 곧잘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이 총살형을 당한 장소는 어디였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공덕리 부근이라든가 마포가도 철도건널목 좌측 산기슭이라든가 하는 구절을 통해 개략적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단서는 사진 속 배경에 보이는 공동묘지의 존재이다.

경의선 철도와 마포행 전차선로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가 ‘도화동 공동묘지’가 있던 장소이다. (<용산시가도>, 1929)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펴낸 「일만분일 경성(1915년 측도)」(1917년 발행) 지도자료를 보면, 경의선철로와 마포전찻길이 교차하는 지점(지금의 공항철도 공덕역 자리) 아래에 작은봉우리 지형이 있고 바로 이곳에 인근 지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공동묘지’의 표시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가 러일전쟁 시기와는 10년가량의 격차가 있으나, 공동묘지라는 것이 금세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한 공간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를 통해 확인한 ‘도화동 1번지’와 ‘도화동 5번지’의 위치이다. 남서쪽으로 인접한 ‘도화동 7번지’구역은 ‘마포연와공장’(지금의 마포삼성아파트 자리)으로 잘 알려진 공간이다.

 

이러한 표시를 염두에 두고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를 뒤져보니, 경성부 용산면 도화동(京城府 龍山面 桃花洞) 1번지(국유지, 745평)와 5번지(국유지, 5,098평)의 지목(地目)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자리가 이른바 ‘철도파괴범’으로 죽은 세 사람의 처형 현장인 것이다. 이곳과 바로 남쪽으로 이웃하는 도화동 7번지(국유지, 13,969평)는 1907년 10월에 준공된 탁지부 연와제조소(度支部煉瓦製造所; 나중에 ‘경성감옥 연와공장’으로 전환)가 들어서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986년에 한불수교(韓佛修交) 100주년과 관련하여 당시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근대 시기 프랑스에서 발행된 화보잡지에 수록된 한국 관련 삽화들을 소개하는 와중에
이들 세 사람의 처형 장면도 함께 널리 알려진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 확인은 물론 처형지에 대한 고증작업도 추진된 바 있었으며, 자연스레 역사학계에서는 3
인의 항거를 일컬어 새로 발굴된 ‘의병(義兵)’ 활동의 하나라는 평가가 내리기에 이른다.

 

1912년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에는 도화동 1번지와 5번지의 지목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6권(2002)에 수록된 ‘마포아파트’ 일대의 항공사진(1965년 3월 8일 촬영)이다. 오른쪽에 길게
둔덕처럼 보이는 것이 경의선 철길이고, 마포아파트 옆쪽에 주택지로 둘러싸여 민둥산처럼 봉우리만 간신히 남은 곳이 ‘도화
동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이다. (ⓒ국정홍보처)

 

이와 아울러 이들의 항거를 기리기 위한 기념조형물에 관한 공론화의 결과로 서울시에서 이
를 건립하겠다고 공표했는데,
????조선일보???? 198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일제에 학살된 세 의
병 기념물 세우기로, 염(廉) 서울시장 “역사교육장 활용”
」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
온다.

 

속보= 염보현(廉普鉉) 서울시장은 29일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우다 학살당한 세 의병의
처형장소에 기념물을 세워, 후손들이 선조들의 의거를 기리고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염시장은 ‘학살된 3의병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각계의 움직임(조선일보 29일자 11면 보도)
에 서울시가 적극 동참, 수난의 역사를 현장으로 후세에 남겨주는 데 일익을 맡겠다고 말
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 문화유적고증위원회에 보다 더 정확한 사실(史實)과 위치의 규명
을 의뢰하고, 시정자문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기념물의 형태를 결정하겠다고 염시장은 덧
붙였다.
또 기념물 설치부지에 대해서는 학살현장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가 주택재개발구역인
만큼, 재개발사업 추진으로 확보되는 공공용지를 활용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염
시장은 그러나 “기념물 설치로 현지 주민들이 재산상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일을 추진
하겠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1991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공적 평가를 바탕으로 김성삼, 이춘근, 안
순서 등 3인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國章)’이 일괄 추서되었다. 그러나 당초 서울
시장이 언급했던 기념물 건립에 관한 약속은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아직껏 완료되
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토, 2019/12/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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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정의와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경자(更子)년 새해 민족문제연구소 모든 회원 가족 그리고 남북 8천만 겨레에게 은총 충만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다른 해보다 더 힘들고 소란했습니다. 십인십색이니 서로 다르고 나아가 갈등도 생겨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글귀로 “시시비비위지지(是是非非謂之知)라 하고 비시시비위지우(非是是非謂之愚)”라. 즉 옳은 것을 옳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틀린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시시비비를 가르는 법률적 판단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 당국이, 일상의 삶에서는 정치가 잘 작동해 대안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고 통합하여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한 해는 법과 정치 모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저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반성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시시비비를 가르고 조정해야 할 법과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에 올해에는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 시시비비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설정해 진실과 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부유하고 오만한 재벌들, 전관으로 수억, 수십억을 받아드는 고위 공직자들, 반공과 거짓 자유를 기초로 역사와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때 서로 편을 가르고 적대했고 우리 겨레는 결국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경자년 새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고 남북 8천만 겨레가 한 어머니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구소 가족들과 연구소를 사랑하는 모든 은인, 동지들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1. 함세웅 이사장

화, 2020/01/2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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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문제 인식

박수현 사무처장 정리

 

일반 시민들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구소는 지난해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주요 결과를 <민족사랑> 경자년 새해 1월호 특집기사로 싣는다.
이 조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한국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시대정신에 맞는 공익적・미래지향적인 친일청산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친일청산 문제가 핵심이지만, 이슈가 되는 다른 과거사문제도 설문조사에 포함했다.
설문조사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조사방법은 웹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는 성별・연령별・지역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40여 항목이며,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크게 4가지다. (1)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2)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3)<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4)기타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등이다. 다음은 주제별 주요 설문결과와 분석 내용이다.

 

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시민 10명 중 8명, 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 가장 미흡한 분야는 정치, 경제, 교육 순

시민 대다수는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친일파 처벌은 물론 일제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답했다. 민주화 이후 친일청산운동이 꾸준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조차도 대다수 시민들은 체감하지 못했거나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친일청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친일청산이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한 분야(중복 허용)는 정치 75.8%, 경제 53.9%, 교육 47.4%, 언론 44.7%, 사법 43.7%, 군경찰 43.4% 순이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일파를 과거의 역사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 현실 정치와 연계해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주관식)에 ‘자유한국당・’ ‘아베’ ‘나경원’ 등의 답변이 높은 빈도수를 차지했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주관식)에 대해서도 ‘나경원’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의 정치인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시민 10명 중 7~8명,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 … 더욱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7명(72.2%)이 개인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로 평가했으며, 지금까지 친일파를 옹호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1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시민 10명 중 8명(82.7%)이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을 더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81.3%)이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도층 친일인물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더라도 친일행위를 했다면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6명(65.6%)으로, 서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친일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에 과반이 약간 넘는 사람만이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58.2%)을 보여, 다른 분야의 친일 지도층에 비해 비판의 강도가 낮았다. 이는 문화예술계 인물과 작품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효과와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친일인명사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조 …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지도층 인사의 수록은 적절.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젊은 층일수록 낮아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사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9.7%였지만,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78.8%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인지도는 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사전 평가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사전이 친일문제를 공론화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의견에 62.3%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에 62.1%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의견에 62.7%가 동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지도만으로 사전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전에 대한 사회적 평판,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김활란・이광수・최남선・장면・유치진・홍난파・현제명 등 유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그동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은 이들이 사전에 수록된데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층도 사전 수록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거나 찬반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는 사전 수록에 대한 보수층의 의견이 찬성 32.4%, 반대 50.1%, 모름 17.5%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반대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우상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이 조사 결과는 박정희 평판에 대한 보수층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시민 27.6%가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름만 들어봤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65.5%였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의 이념성향별 분포다. 진보층 40.4%, 보수층 25.5%, 중도층 22.1% 순으로 진보층이 가장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보수층은 중도층보다 연구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일수록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34.4%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33.1%, 40대가 26.6%, 30대가 25.8%, 그리고 19~29세가 13.8%로 가장 적었다. 특히 19~29세의 인지도는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소의 장기적인 활동 방향이나 전망과 관련해 반드시 참고 해야 할 내용이다.
연구소를 알게 된 계기 및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이어 친일인물 훈장 취소, 교과서 왜곡 및 국정화 반대운동, 친일인물 기념사업 반대 등의 순이었다.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과거사문제 해결이 사회통합과 발전에 도움.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아,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해야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도 설문조사를 했다. 우선 과거사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5.8%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상당수 시민들이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52.7%),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해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51%)이 그 다음이었다. 또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 왜곡(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64.1%)이 가장 많았으며, 친일 진상 규명(35.1%), 시민 홍보(29.3%), 역사교육 강화(26.3%)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서는 38.2%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11.1%만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나 뉴라이트의 영향력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시민 10명 중 7명(70%)은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처럼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과거사 왜곡과 폄하에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 2020/01/2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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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 개최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12월 13일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를 개최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두 번째 기념학술회의였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현상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진행하는 자리였다.


서경식 교수(일본 도쿄경제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과 리버럴 세력의 자기붕괴 내지 변질을 비판적으로 역설했고, 조경희 교수(성공회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과 핵심 아젠다를 짚었다. 이진일 교수(성균관대)는 독일의 홀로코스트부정과 같은 역사수정주의의 전개과정을 발표해 일본의 역사부정 현상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강성현 교수(성공회대)는 뉴라이트의 등장과 역사교과서 파행을 거쳐 ‘반일종족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의 역사부정 현상을 정리하고,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과 한국 뉴라이트의 연대를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표에 대해 권혁태 교수(성공회대), 이동기 교수(강릉원주대),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서대교 기자(코리안 폴리틱스)의 토론이 이어졌다.
또 하나의 논점은 역사수정주의, 역사부정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문제였다. 홍성수 교수(숙명여대)는 한국의 ‘역사부정죄’ 논의와 법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마에다 아키라 교수(일본 도쿄조형대)는 ‘헤이트 스피치(차별혐오발언)’에 대한 일본의 법적 제재 움직임을 발표했다. 토론은 이재승 교수(건국대)와 이상희 변호사(민변)가 맡았다. 역사부정죄 제정과 법적인 처벌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논의되는 자리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문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고민하는 발표도 있었다. 연구소 김승은 학예실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분석, 검토해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진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연구소 노기 카오리 연구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른바 ‘메이지산업유산’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지방 정부, 시민사회의 입장과 그 변모 양상을 정리했다. 토론에 나선 히구치 유이치 선생은 일본 내 강제동원피해자의 증언 수집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고, 야노 히데키 선생은 메이지산업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조사 연구하여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평일인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종일 이어진 학술회의임에도 많은 학자와 시민들이 참석했다.
‘반일종족주의’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한일공동심포지엄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에 부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화, 2020/01/2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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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19년 일제잔재 청산 움직임이 활발했던 학교 현장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전국의 여러 교육청과 교육단체들은 학교 현장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조사하고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남교육청은 작년 12월 16일 순천만생태문화교육원에서 학교장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도교육청은 지난해 4월부터 전문가그룹이 참여한 가운데 전수조사를 벌여 도내 169개 학교에서 일제 양식의 각종 석물과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무늬나 휘장), 친일음악가 작곡 교가, 일제식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등 175건의 친일잔재를 확인했다.

확인된 친일잔재는 일제 양식의 석물 34건, 친일음악가 제작 교가 96건, 학생생활규정 33건, 욱일기 양식의 교표 12건 등이다. 그 결과 석물 16개가 놓여 있는 현장에 친일잔재임을 확인하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이는 해당 석물이 일제식민통치 협력자의 공적비이거나 일제식 양식임을 알려 학생들의 역사교육에 적극 활용토록 하기 위함이다.

친일음악가가 제작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14개 학교에 대해서도 예산을 지원해 교가를 새로 제작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친일잔재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전체를 수정·보완했고 욱일기 양식의 교표도 시대에 맞게 학교 자체적으로 8개교가 수정 보완했다. 도교육청은 앞으로도 일제식 석물 안내문 설치, 새 교가 제작 등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역대 교육감 중 친일 또는 항일 행적이 뚜렷한 사실에 대해서는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탑재할 계획이다.

광주광역시교육청도 12월 26일 관내 초·중·고·특수학교장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현장 일제잔재 조사 및 청산 사업 성과보고회’를 열었다. 교가의 경우 친일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 14개교 중 6개교의 교가가 교체·완료됐으며 일본 음계, 군가풍 리듬, 7.5조 율격, 선율 오류 등의 교가를 사용하고 있던 5개교의 교가도 교체됐다.

아울러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문양의 교표를 12개교에서 교체했고, 끝이 뾰족한 일본 충혼비 양식의 석물 3건에 대해서도 안내문을 설치하여 교육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성과보고회에 참석한 이재남 정책국장은 “친일잔재 청산사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확산되어야 한다”며 “올해는 학교상징물인 교가, 교표, 석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앞으로는 학교문화 속에 남아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부산, 울산, 경남의 경우는 학부모단체가 앞장섰다. 교육희망경남학부모회(대표 전진숙)는 경남지역 1,656개 초‧중‧고교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10월 23일 경남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 동안 학교 홈페이지와 현장 조사를 벌여 이를 파악했다. 전진숙 대표는 “친일잔재가 학교 안에 의외로 많다. 그리고 교화와 교목, 교가, 교훈이 시대에 맞지 않고 차별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했다.

교육희망 울산학부모회는 10월 22일 울산시교육청 프레스센터에서 ‘학교상징으로 본 일제잔재와 성차별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간 초등학교 119개, 중학교 63개, 고등학교 57개, 특수학교 4개 등 총 243개 학교의 교표, 교화, 교목, 교가 등을 모두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지난해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소속 단체들이 자치구를 나누어 초, 중, 고등학교의 교화, 교목, 교가 등을 중점 검토해 8월 12일 부산시교육청앞에서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잔재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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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서울시교육청 2019하반기 교원 특수직무연수 실시

연구소는 2020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전국 초·중등 교원을 대상으로 특수직무연수를 실시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과 상설전시관, 효창공원에서 진행한 직무연수에는 서울, 경기, 강원, 울산, 전북 등 전국의 초·중등교사와 교육연구사들이 참여하여 역사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직무연수는 왜 아직도 ‘친일청산’인가라는 주제로 박수현 사무처장 등 연구소 상근연구자와 한철호 동국대 교수 등 외부 전문강사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유형과 활동을 설명하고 최근의 뉴라이트의 공세로 뜨거워진 ‘기억투쟁’ 등을 분석하는 등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책임윤리와 정의에 대한 이해력과 감각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마지막 강의일인 10일에는 참가자와 진행요원, 내부 상근연구자가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친일문제와 역사교육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직무연수중인 교사 세 분이 신규로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주었다. 또한 연수 종료 직후 참가 교원들에게 연수이수증을 수여했는데, 연구소에서 발간한 <내일을 여는 역사> 76호와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도 함께 증정하였다.

이번 교원특수직무연수 진행은, 지난해 봄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자유시민대학> 캠퍼스로 지정되어 시민역사교육의 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데 이어 교원 특수직무연수기관으로 발돋움하여 앞으로 내실 있는 역사실천운동을 벌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1/21-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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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동지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 주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라는 부제의 이번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가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 5일 동안 진행됐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연구소 광동지부(지부장 김유, 사무국장 박호균)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과 조선인 혁명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일반적인 역사 답사의 경우 현지 여행사를 통해 진행하는 데 비해, 이번 답사는 광동지부 소속 회원들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숙박, 식당, 버스 등을 예약했고 가이드 역할까지 전담해 참가비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지부 회원들은 주말과 연차를 이용해 <아리랑>과 <김산평전> 그리고 중국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 서적을 펴들고 직접 김산과 혁명가들의 길을 따라가며 답사 코스를 개척했다.

당초 답사 참가인원을 20명으로 공지했으나 약 60명이 신청하여 최종적으로 34명으로 답사단을 꾸렸다. 답사단원들은 지역, 직업,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해 다양하게 구성했는데 특히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상윤 선생(1897~1927)의 손자인 김기봉 전 광복회 서울강북지회장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의 손녀인 김춘련 현 요녕민족사범고등전문대학 교수 등이 참여해 답사의 의의를 높였다.

그동안 연구소는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로 매년 여름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해왔는데 답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추가 답사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따라서 이번 광동지역 답사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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