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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가오카’ 신흥 주택지로 변신한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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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가오카’ 신흥 주택지로 변신한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터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32

식민지 비망록 42

‘미도리가오카’ 신흥 주택지로 변신한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터
– 메가타 재정고문의 관사는 왜 청파동 연화봉 언덕에 자리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여름 92세의 나이로 숨진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의 죽음은 잠시 기억 속에 잠겨있던 이른바 ‘삼김시대(三金時代)’에 관한 회상을 불러 일으켰다. 김대중(金大中, 1924~2009)과 김영삼(金泳三, 1927~2015), 그리고 김종필, 이들 세 사람은 굳이 이름 석 자를 적지 않더라도 각각 DJ, YS, JP라는 애칭만으로 통용되기도 했고, 그들의 위상은 동교동(東橋洞)이니 상도동(上道洞)이니 청구동(靑丘洞)이니 하는 동네 이름조차도 자신들의 대명사로 치부될 정도였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말이 난 김에 이들이 살았던 동네의 지명유래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더니 나름 흥미로운 내용들이 포착된다. 먼저 동교동은 예로부터 서울도성에서 양화진나루로 가는 대로에 걸쳐 있던 세교(細橋, 잔다리)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당시 경성부 연희면 일대가 고양군(高陽郡)으로 편입되면서 종전의 세교리 일계(一契)와 세교리 이계(二契)가 각각 서세교리(西細橋里)와 동세교리(東細橋里)로 바뀌었고, 다시 1936년 4월 1일에 이곳이 경성부로 재편입되는 과정에서 서교정(西橋町)과 동교정(東橋町)으로 명칭이 축약되었다가 해방 이후 오늘날의 서교동과 동교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다음으로 상도동에 대해서는 1911년 4월 27일에 경기도 고시 제9호에 의해 시흥군 동면 상도리와 성도화리(成道化里)를 합쳐 새로운 ‘상도리’로 설정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 <1872년 지방도(규장각 소장자료)>에 포함된 「시흥현 지도(始興縣 地圖)」에 ‘상도리’ 라는 표시가 이미 들어 있는 점에 비춰 보아, 정확한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조선시대 이래로 오래도록 사용한 지명이라는 사실은 명쾌하게 파악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청구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자료는 좀 더 복잡 미묘하다. 우선 이곳은 앞서 두 동네에 비해 연륜이 아주 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 ‘지방자치법에 의한 서울시 동 설치 조례’에 따라 새로운 동제(洞制)가 실시될 때 “신당동(新堂洞) 308-2를 기점으로 374-20을 경유 346-98에 이르는 도로 동북방의 지역과 신당동 308-2에서 금호동에 이르는 도로 이남의 지역”이 ‘청구동’으로 설정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역은 1970년 5월 18일에 이르러 법정동(法定洞)과 행정동(行政洞) 명칭을 일치시키기 위해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 ‘동장 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조례’가 제정되면서 ‘신당 제4동’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청구동 자체로 보면 존속기간은 의외로 15년 남짓에 불과한 셈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5.16 쿠데타를 통해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의장 등 군사정권의 권력자로 득세한 김종필에 대한 근황을 알리는 신문기사마다 거듭 “청구동 자택”이라는 수식어가 곁들여 등장하다보니 순식간에 이 동네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유명세 탓인지 법률적이건 행정적이건 청구동이 사라진 지는 오래지만 ‘관행적으로’ 청구동으로 부르는 상황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이곳을 청구동으로 부르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동아일보> 1946년 3월 31일자에는 「일본색 학교명(日本色 學校名), 시(市)에서 전면적으로 일소(一掃)」라는 제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앵구(櫻ケ丘, 사쿠라가오카)의 대체어로 등장한 ‘청구’의 초기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시청 학무과(學務課)에서는 일본 색채를 일소하여 시내 국민학교 명칭을 다음과 같이 변경
하고 4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 일출(日出) → 일신(日新) ▲ 앵정(櫻井) → 영희(永禧) ▲ 앵구(櫻丘) → 청구(靑邱)
▲ 서부남자(西部男子) → 태평(太平) ▲ 북부남자(北部男子) → 소의(昭義) ▲ 죽첨(竹添)
→ 금화(金華) ▲ 마장(馬場) → 동명(東明) ▲ 삼판(三坂) → 삼광(三光) ▲ 금정(錦町)
→ 금양(錦陽) ▲ 원정(元町) → 남정(南汀) ▲ 북아현(北阿峴) → 북성(北星) ▲ 서공덕(
西孔德) → 덕창(德昌)

 

이 기사에 따르면, 일제가 패망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9월 새학기를 앞두고 그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학교 시설 가운데 일본 색채가 농후한 명칭을 바로 잡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앵구 공립국민학교(櫻丘公立國民學校, 신당동 331번지; 1937년 9월 1일 앵구소학교로 개교)의 ‘앵구’에 앞 글자 하나만을 살짝 바꿔 ‘청구(靑丘)’로 개명한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가령 ‘일출(히노데)’이 ‘일신’으로 되고, ‘삼판(미사카)’이 ‘삼광’으로 되고, ‘금정(니시키쵸)’이 ‘금양’으로 된 것처럼 공연히 한 글자를 흔적 삼아 남겨두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완전한 일제잔재청산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야말로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결정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앵구’라는 것은 원래 동양척식(東洋拓殖)의 직계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朝鮮都市經營株式會社, 1931년 10월 7일 설립)가 경성부 외곽 신당리(新堂里) 지역에 개설하여 1932년 8월에 분양을 개시한 신흥주택단지에 처음 부여된 명칭이었다. 이러한 명명 자체가 일본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작명법’에 따른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왼쪽) 경성전기에서 제작한 ‘경성전차 및 버스안내도’에는 장충단 박문사 지역에서 성벽 동쪽으로 신흥주택지인 ‘앵구’ 정류장으로 버스 운행 노선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 1937)(오른쪽) <경성일보> 1932년 8월 21일자에 수록된 동양척식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의 ‘앵구주택지 분양광고’이다. 여기에 나오는 ‘앵구’가 곧 해방 이후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청구동’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는 셈이다.

 

이 당시에 경성부의 확장과 더불어 이른바 ‘문화주택(文化住宅)’으로 크게 붐을 이뤄 조성될 때마다 교외 지역의 주택지에는 대개 무슨 장(莊)이라거나 무슨 대(臺)라거나 하는 식의 이름이 붙여졌다. 예를 들어 연희장(延喜莊), 금화장(金華莊), 동명장(東明莊), 동산장(東山莊), 흥인장(興仁莊), 명수대(明水臺), 법덕대(法德臺), 신정대(神井臺), 쌍룡대(雙龍臺), 어대대(御代の台, 미요노다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보다 일본풍이 훨씬 더 노골적인 것이 ‘앵구’의 사례처럼 무슨 구(丘, 언덕)라고 붙이는 방식이다. 지금은 거의 옛 자취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한때 청파동의 들머리에 남아 있던 ‘녹구(綠ケ丘, 미도리가오카)’라는 지명도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맥락에서 창안된 명칭이었다. 이곳에 관한 흔적은 우선 ????경성일보???? 1930년 10월 5일자에 수록된 ‘한정 고상 이상적(閑靜 高尙 理想的) 신주택지 분양’ 광고에 그 단서가 포착된다.

 

1. 본주택 분양지는 민자작가 별저(閔子爵家 別邸)로서 소유했던 장소이며 경성시 중에 있어서 주택지로는 절대로 다른 곳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이상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으로써 금회 양수하여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2. 위치와 교통 : 청엽정 1정목에 있으며 약도(略圖)에 보이는 것과 같이 전차(電車) 오카자키쵸(岡崎町) 정류장에서 경성역저탄장(京城驛貯炭場) 앞의 다리를 건너 똑바로 50칸(間) 내외이며, 이 거리는 겨우 도보로 3분 사이에 주택지의 입구에 도달하며, 자동차의 출입이 자유롭고 전차도 실로 가까워서 정말로 교통이 편리합니다.
3. 지세(地勢) : 이곳은 서북으로 구릉을 끼고 동남을 향해 경사져 있습니다. 구역 내 도처에 송림과 기타 수목이 많고 한정 고상하며 자연의 풍치는 이곳의 자랑입니다.
4. 조망(眺望) : 전면으로는 경성역, 남산의 취록(翠綠), 조선신궁을 우러러보며, 언덕 위의 송림을 유원지로 설비하였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경성부청, 총독부, 창경원 방향을 비롯하여 성내(城內) 전 시가지를 조망하며, 남쪽으로는 용산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한 남산을 손짓하여 부를 만큼 가까이 두어 감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5. 기후와 위생 : 배면(背面) 즉, 서북에 구릉을 끼고 있으므로 바람을 막아주며, 아침 해가 일찍부터 빛나고 종일 햇빛이 차단되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겨울철에 일출부터 일몰까지 난방의 필요가 없을 만큼 햇살을 누릴 수 있고, 여름에는 동남의 부드러운 바람을 받아 더위를 잊게 되어 위생상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6. 시설 : 주택지 내의 도로, 배수, 돌축대, 기타의 공사는 모두 유감이 없으며, 다리가 있는 곳에서 똑바로 지내(地內)로 통하는 도로도 넓혀져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민자작’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을 지낸 민병석(閔丙奭, 1858~1940)자작을 말한다. 그는 1908년 6월에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에 임용되어 경술국치 당시에도 그 자리에 머물면서 이른바 ‘합병조약’의 가결에 동의한 경술국적(庚戌國賊)의 1인으로 지탄을 받는 인물이다. 1910년 12월 30일에 공포된 황실령 제34호 「이왕직 관제」에 따라 이듬해 2월 1일 궁내부대신에서 그대로 이왕직장관으로 전환 임명된 이후 1919년 10월까지 장기간 재임하였다. 나중에 그는 중추원 고문(1925.7), 조선귀족회 회장(1939.7), 중추원 부의장(1939.10) 등을 지내면서 한 평생 친일귀족의 길을 오롯이 걷다가 삶을 마감했다.

<매일신보> 1940년 8월 10일자에는 이왕직장관을 지낸 친일귀족 민병석의 부고광고가 실려 있다.

 

역대 이왕직장관 임면 연혁

<경성일보> 1930년 10월 5일자에 처음 수록된 ‘청엽정 1정목 22번지’ 주택지 분양광고이다. 민병석 별장 터에 조성된 이 주택지는 이듬해부터 구역확장과 더불어 ‘녹구(미도리가오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것으로 나타난다.

 

위의 광고문안은 바로 그가 소유했던 ‘청엽정(靑葉町, 아오바쵸) 1정목’ 즉, 지금의 ‘청파동 1가’ 22번지 일대의 별저(別邸) 터가 주택지로 변신하여 1구좌당 100평(坪) 내외의 크기로 분양이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년가량이 지나 ????경성일보???? 1931년 8월 27일자에 수록된 새로운 광고문안을 보면, ‘녹구(미도리가오카) 신주택지 제1호지’라는 명칭과 더불어 전체면적이 약 3만 평으로 커져 있고, 주택지경영사무소의 소재지도 종래의 ‘청엽정 1정목 22번지’에서 ‘청엽정 1정목 1번지’로 변경된 사실이 눈에 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에 나타난 민병석 별장 터(청엽정 1정목 22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 후면 언덕에 자리한 1번지, 2번지, 8번지, 20번지 등을 일괄한 것이 ‘녹구(미도리가오카, 청엽정 1정목 1번지로 지번통합) 주택지’다.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수록된 해당 토지의 소유관계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민병석의 별장 터만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그 주변에 있던 민병석과 민형기(閔亨基) 등 민씨 일가 소유지 일체를 포괄하여 ‘청엽정 1정목 1번지’로 지번을 통합한 대규모 주택지로 변모된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등장한 ‘미도리가오카’ 주택지는 ‘앵구(사쿠라가오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래지 않아 버스정류장의 명칭에도 등장할 정도로 이 일대의 대표 지명으로 크게 부각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미도리가오카’ 주택지(청파동 1가 1번지)의 원 소유주 관계 현황

경성전기에서 제작한 ‘경성전차 및 버스안내도’에는 경성역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버스노선에 ‘녹구(미도리가오카)’ 정류장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 1937)

 

(왼쪽)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 터 일대에 조성된 ‘녹구(미도리가오카)’ 주택지의 전경이다. (<뻗어가는 경성전기>, 1937) (오른쪽) 옛 녹구(미도리가오카) 주택지인 ‘청파동 1가 1번지’ 구역에는 지금도 일제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돌축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 당시 용산 한강변에 포진한 철도국관사가 막대한 침수피해를 입게 되자 이를 근원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고지대로 관사를 이축하려는 계획이 추진된 바 있었는데, 이때 바로 이 민병석 별장 터가 그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25년 9월 13일자에 수록된 「철도국관사(鐵道局官舍) 지대확정(地垈確定), 민병석 씨의 소유지대로」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용산 한강통 부근에 있는 철도국관사에는 매년 여름만 되어 비가 오기 시작하면 전기 관사에 대개 물이 들어 이에 대한 피해와 곤란이 막심하므로 그전부터 철도 당국자들은 전기 관사 이전 문제로 고려를 하여 오던 중 요전 대홍수 때에는 더욱 물난리를 당하였으므로 이번에는 단연코 이전키로 결정이 되어 그간 관사 신축지를 선정하기에 매우 고심을 하던 중 시내 청엽정(靑葉町) 1정목 22번지 자작 민병석 씨의 소유로 있는 대지(垈地) 1만 8천여 평을 사기로 내정을 하고 목하 철도국 당국자는 민자작에게 교섭중이라는데 전기 집터가 원만히 결정만 되면 금년 가을 내로 신축에 착수할 터이라더라.

 

이 당시 철도국관사가 실제로 이전지로 확정한 곳은 효창원 구역이었다. 이에 따라 이왕직 소유지와 국유지였던 금정(錦町, 지금의 효창동) 4번지, 6번지 및 199번지(옛 만리창 터) 일대에는 1926년과 1928년 시기에 용산에 있던 철도국관사 200여 호가 옮겨와 이곳에 건설된 바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가 당초 예정한 대로 민병석의 별장 터에 철도국관사가 들어섰더라면 우리가 아는 청파동 일대는 훨씬 더 별스러운 풍경을 자아내는 공간으로 변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민병석의 별장 터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은 이곳이 바로 러일전쟁시기 일본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던 때 재정고문(財政顧問)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1853~1926)의 처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1904년 8월 22일에 맺은 「제1차 한일협
약(협정서)」에 따르면,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서 한국정부에 용빙(傭聘)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할 것”이라고 정해진 바 있었다. 이때 일본 대장성 메가타 주세국장(主稅局長)이 파견되어 그해 10월 15일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용빙계약이 이뤄졌고, 1905년 9월에는 실무기관으로 정부재정고문본부(政府財政顧問本部)가 설치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의 결과로 통감부 관제가 공포되면서 “한국정부의 용빙에 관계된 것을 감독”하는 권한이 통감에게 주어졌고, 나아가 1907년 3월 5일에는 「통감부 재정감사청 관제(統監府 財政監査廳 官制)」가 제정되어 한국재정고문은 재정감사장관이 되는 동시에 재정고문본부는 형식상 통감부 편제로 흡수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재정고문의 자리에 올라 경제침탈에 앞장선 메가타 다네타로의 모습을 담은 동상이다. 이 조형물은 1929년 10월 탑골공원에 처음 제막되었다가 1935년 9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지금의 농협중앙회) 앞뜰로 옮겨졌고, 다시 1943년 8월 금속물 공출로 사라진다. (<男爵目賀田種太郞>, 1938)

 

그러나 헤이그특사파견과 고종퇴위사건의 여파로 1907년 7월 24일에 체결이 강요된 「한일신협약(정미조약)」에 포함된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재정고문관련)은 이를 폐지할 것”이라는 구절에 따라 재정고문이 폐관(廢官)되자 당연직 기구였던 재정감사청도 연계되어 설치 이후 반년 남짓 만에 존속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메가다 재정고문이 물러나고,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가 개시되면서 신설된 통감부 참여관의 신분으로 아라이 겐타로(荒井賢太郞, 1863~1938)가 1907년 9월 7일 한국정부 탁지부차관(度支部次官)으로 임명되어 그의 역할을 승계하였다.
메가타 다네타로가 재정고문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이른바 ‘재정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정부재정과 황실재정을 분리한다는 명분으로 황실재산의 국유화가 시도되었고, 또한 ‘화폐정리사업’의 실시로 일본화폐의 유통이 허용되고 일본제일은행으로 하여금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차지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징세제도의 개편과 토지에 대한 기초조사 등 다양한 경제침탈이 노골화하면서 장차 식민지배가 용이하도록 기반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이러한 일들을 벌인 당사자인 메가타가 거처했던 곳이 바로 청파동 연화봉 언덕에 자리한 민병석의 별장 터였던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따르면 당초에 메가타 재정고문의 관사는 독일공사관(獨逸公使館, 남창동 8번지)을 사들여 이를 사용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9일자에 수록된 「고문 관사」 제하의 기사는 “탁지고문관 메가타 씨의 관사는 아직 확정치는 못하였으되 위선(爲先) 남문 밖 연화봉 민판서 산정으로 택정하였다더라”는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훨씬 나중에 이곳이 남산과 용산 일대의 전망이 빼어난 신흥주택지로 변신하는 바람에 그러한 흔적이 많이 가려지긴 했지만, 이곳이 한때 재정고문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관리가 터를 잡고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집어삼킬 궁리를 하던 국권침탈의 핵심 배후공간이었다는 점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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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 가치는 ‘자유, 평등, 진보'”
“남북한 역사인식에서 공통적인 부분 중심으로 공동사업 기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 바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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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천안=연합뉴스) 김은주 논설위원 =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통일의 토대가 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자유, 평등, 진보’가 오늘날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민주주의, 평화통일과 접목되는 독립기념관이 되면 좋겠다”라고 기대를 표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이 관장은 “남북한 교류를 통해 3.1운동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사료를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남지 않아 제대로 포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기념사업은.

▲ 아직 계획 단계이다. 일단 내년 4월 상하이에서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독립기념관 내 독립군체험학교가 있는데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복원해 거기서 독립전쟁을 체험하는 교육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임시정부가 운영했던 인성(仁成)학교를 복원해 인성학교 체험 프로그램을 병행하려 한다.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인성학교에서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1932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났고 인성학교도 더는 운영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교민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 한편으로는 민족교육, 한편으로는 민주시민교육이 이루어졌다. 중등과정의 삼일학교도 있었다. 임시정부가 직접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교사로 있었다.

–임시정부의 이념적 지향은.

▲ 민주주의다.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공화제가 확립됐고,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됐다.

1944년 마지막으로 개헌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자유, 평등,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 가치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자유, 평등, 진보’가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세상,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더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생각해야 한다.

–북한과 공동 발굴 사업을 기대하고 있다.

▲ 북한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사료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에도 3.1운동 관련 사적지나 자료가 많다. 북한의 관련 재판기록을 조사하면 더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간에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소도 많다. 이를 중심으로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면서 남북 간 역사, 특히 근대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이 모두 인정하고 존경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북이 공동으로 유해발굴에 나설 필요가 있다. 또한, 남북이 협력해서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소재 안중근 의사의 생가를 복원할 수 있겠다.

안중근, 홍범도, 신채호 등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공동학술대회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채호 관련 원자료는 평양 인민대학습당이 많이 소장하고 있다. 10여년 전에 독립기념관에서 입수하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성사 직전에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무산됐다. 남한 자료만 갖고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간했다. 북한 자료까지 포함해서 다시 만들고 싶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 기록이 적기 때문이다.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독립운동과 관련돼 활동했으나 이름을 남기지 못한 여성들을 따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인 경우가 독립운동가의 부인들이다. 특히 해외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부인의 도움이 없었으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하는 남편의 뒷바라지 자체가 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의 구술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를 보면 밖에서 독립운동하다가 동료들과 집에 들어온 시할아버지의 식사를 차리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수발을 드는 것은 전적으로 부인, 딸, 며느리, 손주며느리들의 몫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한 경우 가장 중요한 포상기준이 옥고이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옥고가 적다. 여성이라고 봐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찰에 잡혀가도 기소가 안 되고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 남아있는 여성 한국광복군의 수는 10명 남짓인데 실제로는 더 많은 여성이 해외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의 남아있는 사진에는 군복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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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외국인들도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 지금까지 60~70명 정도가 포상을 받았다. 대다수가 중국인들로, 모두 중국국민당 쪽 인물들이다.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중에는 중국공산당 쪽 인물들도 있는데 공산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포상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공합작 당시 중국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충칭에 와 있었던 저우언라이는 임시정부를 많이 도왔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 중국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일본인들 중에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직접 참여한 사람이 제법 있다. 노동자도 있고 교사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보는 경향 때문에 지금까지 딱 한 명만 서훈을 받았다. 인권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이다.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 관리는.

▲ 중국 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대부분 독립기념관에서 관리한다. 직접 관리는 못 하고 현지 사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관리한다.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사적지 관리도 어렵다. 최근 들어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를 중국 정부가 직접 조성하고 관리도 직접 하는 경우가 나오고 있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사적지를 복원하고 시설물을 설치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관점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은 쌍방향 관계였다. 중국이 지원했지만,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본다. 중국의 역사해석이라는 것이 항상 중국 중심이기 때문에 우려가 된다.

–독립기념관 운영 방향은.

▲ 한국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통일의 토대가 되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독립운동과 평화통일로 접목되는 독립기념관을 만들고 싶다. 당장은 내년 100주년을 기리는 사업을 잘 꾸려나갔으면 한다. 특히 북한과의 교류협력 사업을 활성화했으면 좋겠다.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전문기관으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

▲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를 활성화하고 싶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사 연구센터가 되면 좋겠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의 세대 단절이 심각하다. 독립운동사 전공자들은 정년 퇴임을 했거나 이를 앞둔 교수들이 많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젊은 세대는 수도 적고 아직은 앞세대 만큼의 연구 업적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위축되고 있으니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지청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외할아버지이다.

▲ 첫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는데 어른들 말씀이 늦게 보신 외손자여서 말년에 매우 예뻐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현역 일본 군 장교 신분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잡히면 사형이었다. 가족들이 뒤늦게 수소문해서 만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공인으로 존경하지만, 사실은 외할머니가 더 존경스럽다. 농사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1919년생으로 충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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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조교수)를 지냈다. 2006∼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2013∼2017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2016년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을 거쳐 2017년 12월 18일 제11대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했다.

[email protected]

월, 2018/07/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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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耶蘇(문야소)

 

誰何神獨子(수하신독자)

或者起疑懷(혹자기의회)

復活登天話(부활등천화)

吾如對斷崖(오여대단애)

 

예수에게 묻다

 

뉘라서 神의 외아들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의심을 일으킨다네

되살아나 하늘로 올라간 이야기

내겐 낭떠러질 대하는 듯하다네.

 

<時調로 改譯>

 

神의 외아들인가 或者는 의심한다네

죽었다 되살아나 승천했다는 이야기

나에겐 낭떠러지를 대하는 듯하다네.

 

*耶蘇:  ‘예수’의  音譯語  *誰何: 누구  *獨子: 외아들  *或者:  어떤  사람  *疑懷:  의심

(疑心) *登天: 승천(昇天). 상천(上天). 하늘에 오름 *斷崖: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2018.7.24, 이우식 지음>

화, 2018/07/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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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客之辨明

 

天生人器小(천생인기소)

爲國遂無功(위국수무공)

醉詠唯吾事(취영유오사)

於他或一忠(어타혹일충)

 

술 취한 사람의 변명

 

타고난 그 바탕 사람 그릇이 작아

나라 위해 세운 功 마침내 없지만

취해 읊음이 오로지 나의 일인 바

남에게 혹 일개 忠이 될지 모르네.

 

<時調로 改譯>

 

사람 그릇이 작아 爲國의 功은 없지만

취하여 읊조림이 오로지 나의 일인 바

행여나 다른 이에게 一忠 될지 모르네.

 

*天生: 하늘로부터 타고남. 또는 그러한 바탕 *人器: 사람의 도량과 재간(才幹).

사람의 됨됨이를 이른다 *爲國: 나라를 위함 *無功: 아무런 공로(功勞)가 없음.

 

<2018.7.24, 이우식 지음>

화, 2018/07/24-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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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최종 결재권자 박근혜…
교육부를 행동대장으로 부린 청와대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10월27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끝내고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 등 지도부의 안내를 받으며 퇴장하는 가운데, 정의당 의원단이 국정화 반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모든 것을 강행한 처음과 끝은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교학사(교학사 검정 역사교과서)가 좌초되면서 검정은 안 된다고, 국정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실무 총괄 책임자였던 박성민 전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 조사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상조사 및 면담 대상자 모두가 ‘국정화 사건 주연’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박근혜의 청와대다.

교학사 사태 때부터 국정화 염두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는 지난 3월28일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박근혜·김기춘 기획, 이병기·김상률 위법·편법 강행’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국정화를 결정해 추진했고, 김 전 실장 후임인 이병기 전 비서실장과 김상률 교육문화수석 등이 위법·부당한 수단과 각종 편법을 동원해 강행했다는 것이다.

2013년 6월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국정화의 ‘서막’이었다. “한탄스럽게도 학생들의 약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육 현장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신중하게 대책을 마련하기 바란다.”

박 전 대통령의 ‘올바른 역사교육’ 지침이 내려진 뒤 같은 해 8월 청와대가 강력하게 지지한 교학사의 검정 한국사 역사교과서가 최종 검정을 통과했다. 하지만 1천 개 이상의 오류와 친일·독재 미화 등 편향적 서술로 교육 현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현행 검정제도에 ‘깊은 회의’를 느낀 박 전 대통령은 같은 해 9월17일 국무회의에서 검정을 통과한 모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전면 수정·보완할 것을 지시하면서 “더 이상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사실상 국정화를 지시했다.

그해 8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기춘도 박 전 대통령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김 전 실장은 10월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교과서는 이념 대결의 문제로 간단치 않다.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하지 않으면 박 정권 5년 내에 좌파 척결이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2014년 1월13일 새누리당과 교육부는 당정 협의를 통해 6월까지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편안을 마련하기로 하고, 실무를 담당할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을 신설한다. 하지만 국정화 여론 조성이 뜻대로 되지 않자 2014년 7월 말로 예정된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문제, 즉 한국사 국정 전환 여부 결정을 미뤘다.

이때부터 청와대의 압박이 구체화했다. 2014년 7월 최원기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행정관이 권성연 역사교육지원팀장과 통화하면서 국정화 결정을 종용했다. 교육부의 국정화 전환 방침은 2014년 9월 사실상 확정됐다. 이후 난항을 겪던 국정화는 2015년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국정화 결정과 실행 과정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했다.

음지에 숨은 결재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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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이병기는 국정화 정책을 앞장서 추진했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이 비서실장은 2015년 7월부터 국정화 추진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지시를 하달했다. 2015년 7월5일부터 그해 12월21일까지 17차례나 지시 사항이 내려간 것으로 나타난다. 비서실장의 지시는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이기봉 교육비서관-김한글 교육행정관을 통해 교육부로 전달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국정화 추진을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세부 사안까지 일일이 개입했다. 교육부는 2015년 9월29일 이 비서실장이 “상황실/ 티에프(TF) 구성 운영도 필요할 것”이라는 지시 사항이 나온 직후인 10월5일 청와대 접근성이 좋은 서울 동숭동 옛 국립국제교육원에 역사교육지원티에프를 구성했다. 운영 기간 내내 거의 매일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렸고, 청와대가 요구하는 각종 보고자료와 국정화 홍보자료가 생산됐다.

교육부는 청와대 지시를 받은 차관의 지시로 실국별로 학자들을 조직해 2015년 10월16일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학자 102인 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0월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고엽제전우회 등 친정부 단체들이 행사장에 난입했다. 이 비서실장의 지시와 10월26일 교육부가 작성한 전국역사학대회 대응 계획과 일치한 것이었다.

교육부는 2015년 10월12일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제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 과정에서 행정 예고 의견 수렴 마지막 날인 11월2일 일괄 출력물 형태로 국정화 찬성 의견서가 ‘차떼기 제출’된 사실이 드러났다.

황우여 당시 교육부 장관은 국정화 발표 전 마지막 순간까지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마지막으로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황교안 총리는 국정화 발표 대국민담화에서 기존 검정교과서 모두를 “99.9% 편향된 역사교과서”로 몰았다. 청와대는 교육부의 반대에도 국정교과서를 ‘올바른 교과서’로 이름지었다.

편찬 기준은 교과서 서술 내용의 범위와 방향, 쟁점에 대한 서술 지침, 편찬시 유의 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2015년 9월 말 김한글 청와대 행정관은 교육부에 편찬 기준에 대한 21건의 수정 요구를 전달했다. “일제강점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등 5개 특별법 관련 항목을 모두 삭제” “‘새마을운동에 대해 서술할 경우 그 성과와 한계를 서술한다’에 ‘한계’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의의로 서술한다’로 교체” 등의 요구가 담겼다. 교육부는 21건 중 18건을 편찬 기준 최종본에 반영했다.

역사과 교과용 도서 편찬심의회는 교과서 편찬에서 집필진과 함께 교과서 내용을 좌우하는 핵심 기구다. 청와대는 선정위원회 심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교수 위원 명단을 바꿔 보냈다. 16명의 편찬심의위원 중 교수 위원 7명 전원을 청와대에서 제시해 지명했지만, 형식상으론 ‘초빙’해 선정한 것처럼 보고됐다.

청와대는 집필진 선정 과정에도 부당 개입했다. 진술에 따르면 집필진 선정은 2015년 10월께 시작돼 11월까지 국편을 통해 진행됐다. 김정배 위원장이 교육부 예비 명단을 참고하고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후보자 목록을 작성하면, 이를 청와대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에게 보고하고, 이를 박 대통령에게 올려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교과서 문구 하나까지 청와대 작품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어떻게 추진하고 관리할지 총 15가지 항목에 걸쳐 직접 꼼꼼하게 지시했다. 2016년 10월8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교과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광복 이후 수립 과정, 6·25전쟁, 이·박 대통령 평가, 북한 정권’ 등을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교육연대회의는 2017년 2월2일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최종본의 문제점을 발표했다. 연대회의는 “고교 한국사만 653개의 오류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대표적 편향 사례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는 부분이 지적됐다. 관권을 동원했음에도 역대 대선 중 15만 표라는 가장 적은 표차였는데, 이런 정황 설명이 전혀 없었다.

전정윤 기자 [email protected]

<2018-07-23> 한겨레21
☞기사원문: 대통령 기획 비서실장 감독 막 내린 국정화

※관련기사
☞한겨레21: 국정화 조연들, 굴종의 역사

☞한겨레21: 장관은 차관 탓 차관은 실장 탓

☞한겨레21: ‘○○’들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

화, 2018/07/2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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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訪我富僧韻

 

身貧心大富(신빈심대부)

所願若斯居(소원약사거)

起臥恒無礙(기와항무애)

休輕我草廬(휴경아초려)

 

나를 찾은 부유한 중의 詩에 화답하다

 

몸 가난하나 마음만은 大富라

이러한 생활이 바라던 바였소

일어서나 누우나 늘 無礙하니

내 오두막을 업신여기지 마오.

 

<時調로 改譯>

 

마음만은 大富라 이런 생활을 바랐소

일어서나 누우나 늘 거리낌이 없느니

스님은 내 오두막을 업신여기지 마오.

 

*大富: 큰  부자(富者)  *起臥: 일어남과  누움.  또는  일상적인  생활  상태 *無礙: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 *草廬:  초가(草家).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2018.7.25, 이우식 지음>

수, 2018/07/25-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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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政府過度福祉事業

 

昨今過福祉(작금과복지)

國債衆人憂(국채중인우)

好惰嫌勤勉(호타혐근면)

無錢晝夜遊(무전주야유)

 

政府의 정도에 지나친 복지 사업을 탄식함

 

요즘 정도에 지나친 복지 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負債 걱정

나태 좋아하고 근면 썩 싫어하며

돈이 없어도 밤낮으로 놀고 있네.

 

<時調로 改譯>

 

과도한 복지 사업에 많은 이 國債 걱정

게으름을 좋아하고 근면함을 싫어하며

오호라! 돈이 없어도 밤낮 놀고 있다네.

 

*過度: 정도에 지나침  *昨今: 요즘. 또는  어제와 오늘을 아울러 이르는 말 *國債:

나랏빚 *衆人: 뭇사람 *勤勉: 부지런히 일하며 힘씀 *無錢: 돈이 없음 *晝夜: 밤낮.

 

<2018.7.25, 이우식 지음>

수, 2018/07/25-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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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次陶淵明四時韻

 

來花鳥界(춘래화조계)

節四靑(하절사청봉)

夜同君醉(추야동군취)

天順一(동천순일송)

 

陶淵明의 ‘사계절’ 詩에 삼가 次韻하다

 

봄이 오니 꽃들과 새들의 세계

여름철엔 온 사방 푸른 봉우리

가을밤 님과 함께 술에 취하며

겨울날엔 한 그루 솔을 따른다.

 

<時調로 改譯>

 

봄 오니 花鳥世界 여름철엔 사방 靑峯

가을밤 님과 더불어 술에 흠뻑 취하며

차가운 겨울날에는 한 그루 솔 따른다.

 

*次韻: 남이 지은 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詩를 지음. 또는 그러한 방법 *陶淵明:

중국 동진(東晉)의 詩人(365~427). 이름은 잠(潛)이고 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

明은 자(字). 405년에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여 일 뒤에

<歸去來辭>를 남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자연을 노래한 詩가 많으며,

당(唐)나라 이후 육조(六朝) 최고의 詩人이라 불린다. 외의 산문(散文) 작품에

<五柳先生傳>, <桃花源記> 따위가 있다 *四時: 사철 *花鳥: 꽃과 새를 이르는 말

*夏節:  여름철  *靑峯:  푸른  산봉우리  *秋夜:  가을밤  *冬天:  겨울날.  겨울  하늘.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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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樓逢吝嗇友

 

四處多田宅(사처다전택)

宜當大富豪(의당대부호)

恒常先醉走(항상선취주)

衆友怨聲高(중우원성고)

 

술집에서 인색한 벗을 만나

 

사방에 많은 논밭과 집이 있으니

마땅히 大富豪라고 해야 할 텐데

언제나 먼저 술에 취해 달아나니

많은 벗님들 원망의 소리 높다네.

 

<時調로 改譯>

 

온 사방 田宅 많으니 의당 大富豪인데

언제나 가장 먼저 술에 취해 달아나니

그대의 많은 벗님들 怨聲이 썩 높다네.

 

*酒樓: 비교적 큰 규모의 술집. 주사(酒肆) *吝嗇: 재물을  아끼는 태도가 몹시

지나침. 어떤 일을 하는 데 대해 지나치게 박함 *四處: 사방(四方) *田宅: 논밭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전도(田堵) *宜當: 사물의 이치에 따라서 마땅히

*大富豪: 재산이 매우 많고 세도(勢道) 있는 富者  *怨聲: 원망(怨望)하는  소리.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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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冥福(소명복)

 

莫道祈冥福(막도기명복)

於吾但笑資(어오단소자)

何人云死後(하인운사후)

牧者假僧欺(목자가승기)

 

죽은 뒤의 福을 비웃다

 

冥福을 빈다는 말씀일랑 마시게

나에게는 오로지 웃음거리일 뿐

어떤 사람이 死後를 운운하는고

목사와 땡추중이 속이고 있도다.

 

<時調로 改譯>

 

죽은 뒤 福 말 말게 내겐 웃음거리일 뿐

죽음 이후에 대하여 뉘라서 운운하는고

목사와 가짜 승려가 뭇사람 속이는도다.

 

*冥福: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福. 죽은 뒤 받는 福德 *莫道: ‘말하지 말라’의 뜻

*笑資: 소병(笑柄). 웃음거리 *何人: 어떤 사람 *假僧: 가짜 승려. 땡추. 땡추중.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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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다운로드]

0726-12<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을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 때 : 2018년 7월 27일(금), 오후 2시
○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회의실
○ 주최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회 :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발언1 :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발언2 : 김세은(민변, 법무법인 해마루, 소송 담당 변호사)
기자회견문 낭독 : 안영숙(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시민모임 사무국장)
질의응답 : 김민철(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조시현(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기자회견문]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우리는 어제 한 용기 있는 현직 판사를 통하여 일제 강제동원 소송에 대한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면서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보상 청구사건 담당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에게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판결의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의혹으로 제기되었던 사법부의 재판개입 의혹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충격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 사법부의 독립은 이미 파탄이 났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양승태 법원행정처는 ‘정의의 심판’을 기다리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판결을 보지 못하고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슬픈 현실을 앞에 두고서도 재판의 결론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로부터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사법행정처를 총동원하여 재판 거래를 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도 확인되었다. 일제에 의해 짓밟힌 청춘에 대한 권리 구제를 평생 동안 기다리던 피해자들의 염원을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한 사법부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아니다.

더욱이 이 재판을 두고 사법부와 재판을 거래한 외교부는 어느 나라 외교부인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외교부는 이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일본 공사가 강하게 요구한 것을 수차례나 법원행정처에 전달하여 노골적으로 재판에 개입했다. 이에 대해 2013년 9월 박찬익 당시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외교부의 입장을 반영해 재판을 미루는 방안을 검토하여, 피고 측인 일본 기업들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김앤장을 통해 외교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접수하고, 국외송달을 핑계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2015년 6월 법원행정처 임종원 전 차장은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 의견서 제출을 협의하며 대사관 법관 파견을 청탁했다.

2016년 10월 미쓰비시를 대리하는 김앤장은 박찬익 심의관이 제안한대로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였고, 11월 외교부는 “손해배상시 한국이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편 박찬익 전 심의관은 재판거래를 기획한 대가로 지난 2월 소송당사자의 대리인인 김앤장에 취업했다.

사법부와 외교부, 그리고 국내 최대의 법무법인 김앤장이 결탁하여 재판을 거래하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와 사법부의 존재의의, 그리고 김앤장의 범죄적인 행태에 대해 그 책임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요구한다.

1) 사법부는 강제동원 소송에 부당하게 개입한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새로운 재판부를 구성하여 신속하고 공정한 심리를 진행하여 판결하라.

2) 외교부는 사법부, 김앤장과 결탁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재판 거래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

3) 검찰은 강제동원 소송을 둘러싸고 재판 거래를 실행한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 박찬익, 재판에 개입한 대법관 등 사법부 관계자, 외교부 관계자, 김앤장, 그리고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라.

4) 국회는 강제징용 소송에 대한 사법부와 외교부의 재판 거래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하라.

2018년 7월 27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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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7/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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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식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요?

몇일에 한번씩 올리다가 갑자기 하루에도 몇번씩 이렇게 도배를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시상이 전보다 갑자기 몇배로 뛰어올랐나요?

 

웬만큼 하시지요..

게시판 혼자의 것이 아닌것 잘 아시지요?

잘못하면 오해받습니다.

목, 2018/07/2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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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2018월 7월 27일 오후 2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보도자료] 바로가기

 

금, 2018/07/2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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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피해자들 “재판 결과 기다리다 대부분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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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기자회견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30 여 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기자회견을 해봤지만, 오늘처럼 참담하고 슬프고 분통터지는 기자회견은 처음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참담하기만 하다.”

수 십년 간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해 왔으며, 자신 또한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75)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어디서든 기자회견을 하면, 항상 피해자 입장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제가 당당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 벽면엔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 등 일본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제동원 소송을 진행해 온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총 9명의 피해자 중 7명의 피해자 이름 앞에는 ‘故’(고)자가 붙어 있었다. 고인이 된 7명의 피해자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모국에서도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2분의 피해자 또한 현재 90세가 넘거나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에 이들의 재판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논란이다. 지난 26일엔 한 현직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대법원 측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관련 재판을 “재검토하라” 지시했다고 밝혀 논란이 더해지고 있다.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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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 벽에 걸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 ⓒ민중의소리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
피해자들 위로해온 이희자 공동대표의 낙담

이희자 공동대표는 발언 내내 재판 결과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떠올리는 듯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재판 결과가 나오질 않자, 제가 그분들을 위로해드렸다. 포기하지 말라고, 오래 살아달라고, 그게 이기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대법원 재판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라며 탄식했다.

앞서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각각 부산지법(2000년)과 서울중앙지법(2005년)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이들은 1·2심에서 패소했으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처음으로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희자 공동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일본에서 모든 재판을 지고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 재판을 시작하고, 처음 승소 소식을 접했을 때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이 우셨다”라며 “식민지 시대에 잃어버린 민족과 청춘을 다 찾은 것처럼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원심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대로 피해자 한 사람당 1억원(서울 고법) 또는 8천만원(부산 고법)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다. 이런 상태로 해당 사건은 2013년 8월 대법원에 재상고 됐다. 하지만, 이후 5년이 다 되도록 법원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원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위로했던 이 공동대표가 “당당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낙담한 이유다. 그는 “일본과의 문제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청와대가 거래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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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민중의소리

사법부·외교부·김앤장 유착,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충격적”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도 사법부·외교부·김앤장의 유착에 절망감을 드러냈다. 김세은 변호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그동안 무엇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기다려 왔는가 질문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탄식했다.

김 변호사는 “사법부는 다수의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라며 “그런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외교부, 청와대와 손을 잡고 우리 재판을 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했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법부가 삼권분립 원칙까지 어겨가며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한 정황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민사소송규칙 상으로는) 원고와 피고 등의 의견은 1-2심에서 모두 제기가 되어야한다”며 “그런데 이 규칙을 대법원 판결 전에 바꿨다.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 단계에서 소송과 관련도 없는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2심에서 시민단체나 관계기관들이 의견을 법원에 제출하는 길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교부가 일방적으로 일본기업 측에 유리한 내용의 의견서를 통해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라며 “이는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소송당사자에 대한 심각한 권리침해 소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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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외교부의 의견서 ⓒ민중의소리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외교부는 명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진 않지만 교묘하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안 된다는 의견을 표한다.

해당 문서에는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기업들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50년간 한일양자관계의 근간이 되어온 협정의 해석이 뒤흔들릴 경우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신인도 손상을 불러올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와 비즈니스에 장애가 되고 한일 간 경제관계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 사법부의 존재 의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강력히 요구한다”라며 소송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 새로운 재판부 구성을 통한 신속·공정한 심리, 외교부·사법부·김앤장이 결탁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검찰의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했다.

<2018-07-2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목숨 대가로 한 ‘사법부·외교부·김앤장’ 뒷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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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강제동원 재판 지연은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유착”

☞민중의소리:외교부 ‘고리’로 더욱 선명해진 양승태 사법부의 ‘일제 강제징용’ 재판거래

※ 뉴스영상

금, 2018/07/2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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