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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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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38

[회원마당 ]

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몇 해 전 한 언론사에서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후손들의 삶을 비교 분석한 기사를 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었고 봉급생활자는 겨우 10%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분들은 다행이라고 할까? 대부분 독립운동가가 일본군과의 전투 중 숨지거나 사형당했고, 그나마 후손이라도 남겨 그 이후 삶이 추적 가능한 분들이 이 정도다.
반면 친일파 후손의 삶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일제로부터 돈, 토지를 하사받은 친일파의 후손들 대부분은 사회 각계로 진출해 기득권을 누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부와 가난이 후대에 대물림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순천은 어떨까?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자료를 보니 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63명(추정),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파는 6명이다. 친일파 6명 중 해방 이후의 행적까지 기록된 3명을 확인하니 3선 국회의원, 조계종 총무원장, 고려대 교수 등 탄탄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삶은 살펴보진 못했으나 위 언론사의 자료와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다.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에서는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야 했던 왜곡의 현대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 앞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사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회원이 순천에 백선엽의 송덕비가 있다고 제보해 왔다.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해 제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던 독립운동가를 학살한 간도특설대 앞잡이 백선엽의 송덕비가 순천에 있다니! 그의 총에 쓰러졌을 이름 모를 독립군들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백선엽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 약탈 · 고문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수 있도록 했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 송덕비를 답사하고 온 회원이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소는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내우산마을 입구 ‘육군대장 백선엽 송덕비’
. 송덕비 측면에 새겨진 글에는,
“이재(罹灾) 8주년 정유(丁酉, 1957) 8월 26일 립(立) 우산부락 일동”이라고 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송덕비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여순항쟁 이후 국군이 이 마을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국군 토벌대가 흔히 쓰던 초토화작전) 많은 주민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이곳을 지나던 백선엽이 차를 세워 사연을 듣고서 본인 예하 부대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그 후로도 계속 마을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에 8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위 일화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굴절상을 보는 것 같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항상 합리화와 왜곡을 통해 역사를 굴절시켜 나간다. 백선엽의 부하들은 왜 민간인 마을에 불을 질렀을
까? 과연 이 마을만 불을 질렀을까? 다른 마을들은? 왜 선심쓰듯 사과하고 복구해 주었는지? 부하들이 상관의 지시 없이 마을에 불을 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일본군 백선엽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지면 감춰진 진실과 원인이 드러난다. 마을 주민들에게 가
면 쓴 선심으로 자기합리화 기반을 마련해 두었는지 모르지만, 친일반민족행위와 민간인에 대한 무분별한 학살과 토벌은 숨길 수 없는 백선엽이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공적도 논란의 측면이 있고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의 부끄러운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엔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5성 장군으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의 친일행적을 알고 있는 군 원로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내가 싸운다고 독립이 빨리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을 토벌하는 일이 조선을 안정시킨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이 민중을 위한 일이고 평화롭게 사는 일이라니. 자신의 친일반민족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응당한 대우를 해주어야겠다.
백선엽 송덕비를 잘 보존하고 옆에 친일행적비를 세워 반면교사의 자료로 삼아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자. 순천시에서도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행해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걸맞은 처우를 받고 있는지 살피자. 그리고 지역의 친일·항일 역사와 인물을 정리하고 교육하는 사업을 진행하자. 그가 반성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다. 그에게 장준하 선생이 면전에서 박정희를 나무랐던 말씀을 전한다.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의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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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1. 유폐된 황제의 사상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소설, 알렉산드리아>,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팡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명물을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에다 소속시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행여 관할 서대문구청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관리 운영하고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온갖 박물관들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되는 데 비해 너무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민족사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가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병주가 이곳에 투옥당했던 1961~1962년(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1962년 부산교도소로 이감, 2년 7개월 만인 1963.12.16. 출감)은 서울교도소 시절이었다.
이런 감옥에서는 “원통형으로 굳어진 사등밥(통상 가다밥 혹은 콩밥으로 호칭)이란 관명(官名)이 붙은 밥”에, “소금 속에 미이라”가 된 새우, “된장의 향기를 살큼” 풍길 뿐 “들여다보면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멀건 국물이 한끼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 황제다운 품위를 지키며 젓가락질”을 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중년 사나이.
그는 이 감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카파레 안드로메다에서 악사로 있는 동생에게 “유폐된 황제의 사상을 아는가. 그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는 사상이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야만적인 시설을 갖춘 서울교도소의 감방에 갇힌 나, 이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유폐된 황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 선사의 불교적 변증법에 도취해서 그 징역살이의 고통을 감내한다.
세상에 억울한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사관 사마천도 그랬지만 천하의 명 제왕학 교재를 썼던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피렌체 공화정 시절에 정청 제2사무국장부터 대통령 비서까지 두루 거쳤던 그는,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외세(교황과 스페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조종, 귀국하여 재집권하자 중뿔난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몰렸다.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을 6회나 당한 뒤 바르젤로 감옥(현 국립미술관)에 투옥, 운좋게 간신히 풀려났으나 벌금에 파직까지 당했다.
도리없이 그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은둔, 거기서 <군주론>을 비롯한 명저들을 쏟아냈다. 이미 5살 아래 벗 프란체스코 베토리(서신교환 때는 로마주재 피렌체 대사, 나중 프랑스 대사,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와 2년여에 걸쳐 43통의 왕복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연은 실로 사마천이 사형수 임안(任安)에게 보낸 안족서(雁足書)만큼이나 절절하다.
“운명은 나를 견직물업에 밝게 해주지도, 면직물업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도, 금융업으로 입신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으므로, 정치를 생각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단 말일세”라고 노골적으로 호구지책을 애원하면서도 마키아벨리는 유형이나 진배없는 농막에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준다.
“나는 시골집에 있네……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 두어 시간 감독 겸 작업지시를 하고는 산림 속 옹달샘물로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필시 목을 축이고는 나르시스처럼 그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샘물이라도 그걸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어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 것 없는 재산이 허용해주는 식사를 들지.
”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식단인가를 암시하는 묘사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지라 이내 선술집으로 가서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과 어울려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궂은 짓이 자행”된다.
이 대목을 읽노라면 그에게 맞춤한 밥벌이 자리라도 마련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베토리가 왜 그런 건 전혀 고려조차 않았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내 그 해답은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온다.
어느 시대나 출세지향적인 몸보신주의자들은 험지에 빠진 동지나 벗들을 경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덕택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가을 이태리 여행 때 험지인데도 하루를 투자하여 나는 산탄드레아의 그 농장을 찾아가봤다. 한촌이라 관광객조차 별로 찾지 않았는데, 5백여 년 전의 그 마을풍경을 상상, 유추해보니 추방자의 처량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정황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334~335쪽. 위의 인용문도 다 이 책에서 발췌)

 

이병주는 감방에서 고독한 유폐된 황제의 꿈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일개 정신(廷臣)으로 자족하며 인문학자가 되었다.
둘 다 유폐된 상황에서 궁중을 가상무대로 삼은 것은 고난을 돌파하려는 투지의 역설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 전락한 운명을 사사로운 영욕에 억매여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우매와 범죄로 억룩진 역사에 도전하겠다는 결연함을 응고시킨 의지이기도 하다. 누구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상적인 금자탑을 쌓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누추한 거처를 왕궁으로 날조할 수 있도록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인허를 받은 격이다.
이 두 수인의 꿈은 그 형식이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신들처럼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하는 게 자연변증적인 전개일 터인데, 이병주도 마키아벨리도 그렇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병주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태리는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의 이상으로 공공적인 선과 자유로운 공민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추방당한 그에게 이런 사조는 공허했을 터였고, 공동체(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가 빈번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표변해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엿다.
그래서 <군주론>은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든가,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하겠다”는 등등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석화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란 정겹게 품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깔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피해에는 그럴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려면 복수의 두려움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George Bull trans, The Prince, Penguin Classics, 1966, pp 37~38)

 

물론 이 대목은 극한 상황이나 점령지를 통치하는 경우에 빗대어 거론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독재체제를 두둔하는 한편 그는 외침을 당했을 때의 방어능력에서는 군주국보다는 민주체제가 더 우수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편다. 로마에 잔혹하게 점령당한 군주국 카르타고는 식민지화되었으나,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경험한 공화정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에 결국 참주정치가 좌절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마키아벨리즘은 이병주의 초기 문학에 강력하게 반영된다.
이병주 문학의 핵심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인본주의자로서의 휴머니즘에 입각하면서 교양주의적인 양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 민족사의 비극을 소재로 삼든, 독재권력을 주제로 올리든 작가는 시종 냉소적인 양비론자의 시각으로 초월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좌익은 순진하고 우익은 이악스럽다는 식이다.
반쪽 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적당주의자, 김일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민족반역자, 박헌영은 미군정을 연구하지 못한 무식자, 여운형은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 조봉암은 대인이지만 변절자, 제주 4·3사태 등으로 동포를 많이 살해한 장택상이나 이범석은 아주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그의 인문학적인 가치관은 판관 포청천처럼 날선 도끼가 역사의 도마 위에서 번득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반기까지 실록 대하소설로 분류되는 한국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지리산> <산하> 등)은 시종 마키아벨리즘적인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대하여 가장 호의적이며 이념적인 밀착도를 지닌 작가는 이병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죄하면서 이렇게 역사의 법정으로 몰아세운다.
“들먹여볼까요? 보도연맹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부산에서의 개헌파동, 그리고 (중략) 통일할 능력도 없거니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성의도 없고 국민을 사랑할 줄도 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것으로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산하>) 박헌영으로부터 “수백 년 묵은 여우”(이병주, <남로당>)라는 별명이 붙은 이승만은 왕이 될
태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안에서도 “파시즘보다도 한 2세기 쯤 먼저 태어났어야 할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왕조를 지향하는 성향 때문에 “부르봉”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이승만/융통성 없는 김구/포용력 없는 박헌영”이라는 형용구처럼 8·15 직후 정치인 중 이승만만이 마키아벨리즘의 정치술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이병주는 평가한다.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정치론(<지리산>)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8·15 당시에는 좌우익 최고 이론가들도 꼭 집어서 이처럼 단정 짓지 못했던 게 대미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이병주가 한국전쟁 이후에 역사를 재점검하면서 낸 결과물이지만 8·15 직후에는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 동편 바다 왼-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라며,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야!/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라고 감격하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1945.8.20.)를 외쳤던 오장환 시인은 불과 넉 달 뒤인 12월에는 「가거라 벗이여- 흑인 병사 엘 에스 뿌라운에게」에서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흠의 길로 듸듸라”라며 내친다. GHQ(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칭인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는 일본 점령 통치에서 폈던 정치적인 관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분명히 강압하며 민족독립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했지만 그 마수의 정체를 몰랐거나 알고도 일말의 기대와 화해를 위해 유연했음을 숨길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기에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미군정 비판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 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사건(1946.5)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7월)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한반도 분할을 위한 국제정치쇼!)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당대의 최고 이론가의 하나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조선인민보사 후생부. 1946년판을 범우사에서 2013. 재출간)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준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조선민족의 진로>는 신건사, 1946,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은 민족문화연구소, 1947 출간된 것인데, 범우사에서 합쳐서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으로 2007 재출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9.7.)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거나 러시아의 한반도 우위권을 막는게 미국의 목적이라는 설까지 흉흉한 가운데,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6)했는데도 여운형조차도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할 정도로 태연한 척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하기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인정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이 1946년 3월이었는데, 이 명저는 레닌이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평이한 개설’이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태평양 일대 및 필리핀을 탈취하려는 노골적인 야욕으로 미서전쟁(1898)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야기한 남아전쟁(1899~1902)이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의 절실성을 제고한데다가, 제1차대전 전후의 제2인터네셔널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 지지냐, 국제평화냐는 치열한 논쟁 등이 집필 배경이었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일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을 지지해도 좋다는 주장과, 어떤 침략전쟁도 반대라는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레닌은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부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내의 검열 때문에 주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에 치중하여 독점은 식민지에서 형성된다는 입장에서 썼기에 이후 지구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상천외의 제국주의의 잔혹성과 교묘한 직간접적인 침략 양상은 피했다.
21세기의 레닌이 등장한다면 오늘의 신출귀몰하는 미 제국주의의 진상을 까발려 줄 수 있으려나?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적지도 않건만 아직까지 미국의 정체를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만한 책 한 권 없다는 게 부끄럽다.
지금도 이런 판이니 당시야 어땠겠는가. 이런 갑갑한 정세였던 지라 작가 이병주는 아예 터놓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 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지리산>)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썼다. 이 작가는 그런 미국에다 줄을 댄 이승만의 선견성을 적극 지지하는데, 그의 집권 이유로는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원숙성에서 찾고 있다.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남로당>)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는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의 참모습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조차도 “이승만 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으로 관대하게 풀이(<산하>)해주며 그의 피 묻은 추악한 손을 씻어주고자 진력한다. 바로 이병주 소설의 한계다.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이 집권 중 단연 돋보이게 빛을 낸 장면으로 이병주는 농지개혁을 들었는데, <산하>는 이를 극명하게 묘사해준다.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조병옥 등과는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유인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 기반(지주층)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대업을 위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앉혔는데, 그야말로 이 과업에는 적격이었을 터라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으로 임무를 멋지게 수행했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둔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는 것으로 이병주는 그려준다.
비판하며 지지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 무렵 이병주 자신의 역사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서당, 1991)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전직 대통령을 다루면서, 「이승만 편-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에서는 역사적인 거의 모든 과오를 되도록 비호, 변명해주는 입장이고, 「박정희 편-탓할 것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다」에서는 안면몰수하고 사사건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자세며, 「전두환 편-왜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내야 하나」에서는 이병주의 모든 글 중에서 최하급의 졸문으로 전두환을 추켜대는데, 너무나 사리도 논리도 안 맞는 억지춘향이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1979년 10·26 이후의 과도기 때 이병주는 손세일의 주선으로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고,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인색했던 찬양을 전두환에게 풍성하게 나열하게 된 계기를 잡아준 건 이동화 송지영 윤길중 고정훈 신상초 선우휘 남계희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이병주는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병주의 명성은 전두환 예찬으로 곤두박질 쳤다. 왜 이 작가가 이랬을까?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서 전두환을 빗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점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더구나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 2017)에는 이병주에 대한 언급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흑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미궁이지만 설상가상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병주를 높이 평가하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까닭은 박정희 신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재미있는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가장 인색할 지경인데, 이건 필시 학병으로 중국 체험자로서의 감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병으로 중국 대륙 체험을 한 이병주로서는 상하이 임정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들었을 터지만, 이승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김구와 비교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박헌영과 대비시키기를 즐겼다.
박헌영에 대한 이병주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하고 신랄하다. 영웅이기엔 “미학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냉대의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의 항일경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노선의 지지자인 이병주조차도 “공산당이 일제와 싸운 그 공적은 박당수, 아니 박헌영 선생이 몸소 증명하고 있지 않소”라는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냉대는 여전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노회함과 박헌영의 얕은 술수를 대비시키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만났던 두 사람을 “늙은 교사 앞에 앉은 젊은 학생”으로 비유한다.(<남로당>) 그러면서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가장 겁내고” 있던 이승만이 박헌영과 당분간 밀월관계를 가질까도 고려했다가 실망, “불쌍한 인간! 감옥에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하며 양광(佯狂:거짓으로 미친 체함)을 부렸다더니 기껏 지능이 그 꼴밖에 되지 못하는군”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병주가 박헌영을 유일하게 옹호한 대목은 그가 미제의 간첩은 아니라고 한 반북적인 주장뿐이었다.
이병주가 그나마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은 암살당한 이후의 여운형이다.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을 털어놓고 투표로써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여운형이 결정적인 다수표로써 선출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남로당>)(다음호에 계속)

수, 2020/04/22-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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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언급한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은 일상생활에까지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어 청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의 기초를 다졌으며, 더 나아가 시민의 역사의식을 제고할 수있는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5/2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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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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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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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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