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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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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5:38

[회원마당 ]

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몇 해 전 한 언론사에서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후손들의 삶을 비교 분석한 기사를 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었고 봉급생활자는 겨우 10%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분들은 다행이라고 할까? 대부분 독립운동가가 일본군과의 전투 중 숨지거나 사형당했고, 그나마 후손이라도 남겨 그 이후 삶이 추적 가능한 분들이 이 정도다.
반면 친일파 후손의 삶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일제로부터 돈, 토지를 하사받은 친일파의 후손들 대부분은 사회 각계로 진출해 기득권을 누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부와 가난이 후대에 대물림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순천은 어떨까?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자료를 보니 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63명(추정),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파는 6명이다. 친일파 6명 중 해방 이후의 행적까지 기록된 3명을 확인하니 3선 국회의원, 조계종 총무원장, 고려대 교수 등 탄탄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삶은 살펴보진 못했으나 위 언론사의 자료와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다.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에서는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야 했던 왜곡의 현대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 앞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사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회원이 순천에 백선엽의 송덕비가 있다고 제보해 왔다.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해 제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던 독립운동가를 학살한 간도특설대 앞잡이 백선엽의 송덕비가 순천에 있다니! 그의 총에 쓰러졌을 이름 모를 독립군들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백선엽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 약탈 · 고문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수 있도록 했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 송덕비를 답사하고 온 회원이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소는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내우산마을 입구 ‘육군대장 백선엽 송덕비’
. 송덕비 측면에 새겨진 글에는,
“이재(罹灾) 8주년 정유(丁酉, 1957) 8월 26일 립(立) 우산부락 일동”이라고 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송덕비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여순항쟁 이후 국군이 이 마을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국군 토벌대가 흔히 쓰던 초토화작전) 많은 주민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이곳을 지나던 백선엽이 차를 세워 사연을 듣고서 본인 예하 부대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그 후로도 계속 마을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에 8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위 일화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굴절상을 보는 것 같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항상 합리화와 왜곡을 통해 역사를 굴절시켜 나간다. 백선엽의 부하들은 왜 민간인 마을에 불을 질렀을
까? 과연 이 마을만 불을 질렀을까? 다른 마을들은? 왜 선심쓰듯 사과하고 복구해 주었는지? 부하들이 상관의 지시 없이 마을에 불을 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일본군 백선엽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지면 감춰진 진실과 원인이 드러난다. 마을 주민들에게 가
면 쓴 선심으로 자기합리화 기반을 마련해 두었는지 모르지만, 친일반민족행위와 민간인에 대한 무분별한 학살과 토벌은 숨길 수 없는 백선엽이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공적도 논란의 측면이 있고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의 부끄러운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엔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5성 장군으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의 친일행적을 알고 있는 군 원로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내가 싸운다고 독립이 빨리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을 토벌하는 일이 조선을 안정시킨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항일무장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이 민중을 위한 일이고 평화롭게 사는 일이라니. 자신의 친일반민족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응당한 대우를 해주어야겠다.
백선엽 송덕비를 잘 보존하고 옆에 친일행적비를 세워 반면교사의 자료로 삼아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자. 순천시에서도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행해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걸맞은 처우를 받고 있는지 살피자. 그리고 지역의 친일·항일 역사와 인물을 정리하고 교육하는 사업을 진행하자. 그가 반성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다. 그에게 장준하 선생이 면전에서 박정희를 나무랐던 말씀을 전한다.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의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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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 ‘사인’ 기부증서 수여식

 

지난 11월, 박물관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신갈고등학교 역사인권동아리에서 독립운동가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고, 수익금을 박물관에 후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부증서를 수여하고자 방학을 맞이한 1월, 학생들을 박물관으로 초대하였다.


역사의 ‘사(史)’와 인권의 ‘인(人)’을 따서 만든 신갈고등학교 내 역사인권동아리 ‘사인’은 역사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로 올해 10년이 되었다.

2019년 교내 축제에서 ‘태극기를 그려라’라는 행사를 통해 전교생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일제시대 헌병경찰 복장을 대여하여 당시 상황을 재연하면서 학생들이 일제강점기를 잠시나마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기획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형상화한 배지를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1월 7일, 담당교사 송지호(후원회원)님의 인솔 하에 18명의 동아리 학생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방문하였다. 동아리 및 기부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듣고 모든 학생에게 기부증서와 기념 선물을 증정하였다. 이후 상설전시관을 관람하며 일제시기와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억과 성찰의 역사행동에 함께해준 소은지, 오혜빈, 유지나, 이서연, 정윤서, 안형민, 이유찬, 허정인, 김성욱, 배승연, 서화진, 장우혁, 김정호, 황서연, 황석우, 김민성, 한솔비, 김가연 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금, 2020/02/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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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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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민족문학연구회, <겨레의 큰 별들> 출간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 2020/03/2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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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에 만난
청계노조 출신 신광용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신광용 후원회원

2020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특별히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코로나19 때문인데, 인류 역사상 이처럼 하나의 주제로 인류가 실시간으로 동시에 같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던가. 생각을 확장해 가다 보니 1, 2차 세계대전은 어쩌면 1, 2차 지역전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전쟁은 말 그대로 인류 멸망과 동의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인류 멸망을 대비해 화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지만 그 속도의 차이로 볼 때, 마치 개미가 호수를 건너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여하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은 2020년에 의미 있게 맞이했을 여러 기념일마저 비대면, 온라인이라는 말에 묻히고 있다. 그러한 아쉬움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올해는 10년 단위의 계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다. 경술국치 11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이번 달 인터뷰는 이러한 숨가쁜 역사적 사건 중에서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와 관련된 회원을 만나보려 한다. 문익환 목사가 교회를 벗어나 사회에 나오게 된 이유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양대 노총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일에 맞춰 매년 노동자 대회를 열어 자신들이 전태일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도 청계천에 잘 마련되어 있으니 관련 이야기는 가급적 생략하고 청계피복노조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신광용 회원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중국 광저우에서다. 신광용 회원은 작년에 결성된 연구소 광동지부 회원으로서 현재 부인인 김선주 님과 함께 광동에서 의류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도 있는 중견 업체이다. 신광용, 김선주는 청계노조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와 이어진 청계피복노조를 통한 노동운동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치열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광용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는다. 1977년 8월 이소선 여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노동교실’ 강제폐쇄에 항거한 투쟁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에 맞서 아프리 점거 농성 중 부상을 입었다. 아프리(AAFLI)는 아시아 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로서 미국의 노총에서 후진국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여야 우리의 투쟁이 많은 국민들한테 알려질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아프리 사무소를 농성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청계노동자들의 아프리 농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건물 벽을 부수고 농성장에 난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무려 11명을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광용, 전태삼(전태일 열사의동생) 등 2명이 투신하여 신광용 회원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경향신문』 1981년 1월 31일자 기사. 청계피복노조원 신광용 씨가 아프리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진압에 맞서다 3층 아래로 뛰어내려 다리를 크게 다쳤다.

 

문: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시어 활동하시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답: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이 만든 광저우 산악회에서 김유 님과 박호균 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두 분은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지부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계시지요. 이분들을 만나게 되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맞고, 마음도 잘 통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저없이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호균 사무국장님과는 올해 1월에 진행한 김산의 아리랑 로드 답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함께하면서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답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김산, 김원봉 선생 등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하나하나 찾아보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인 독립투사 13인의 명단도 찾아볼 수 있어서 아주 보람이 있었습니다.

문:신광용 회원님도 생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아리랑 로드 답사에 크나큰 수고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지난 번 민족사랑(2020년 1월호)에 김유 지부장님과 박호균 사무국장님의 인터뷰도 소개했지만 추가로 해주실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답:제가 17살 무렵에 백기완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백 선생님께서 “박정희는 독립군을 잡는 일본군 장교였고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발각되자 동지들을 팔아먹고 자기만 살아남은 나쁜 놈”이라고 일갈하셨어요. 당시는 대통령에 대해 조금만 불만을 이야기해도 바로 잡혀가던 유신시절인데 그렇게 당당히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 심장이 크게 뛰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김산이 거쳐 갔던 해방구 하이펑 등을 답사하며, 17살 때 느꼈던 그 벅찬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벅찬 감정이었습니다.

문: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평화시장의 현장 노동자로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우연히 청계피복노조를 알게 되어 그저 각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역사의 기록으로까지 남았네요. 그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5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 뭔지 모를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 싶습니다. 또한 청계피복노조 투쟁 과정 이외에 이한열 열사 사건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동대 버스 안에다 가둬두고 최루탄을 터트려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혀서 눈도 뜰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런지경인데 죽을 정도로 맞고,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맞고 또 맞고 기절하고 또 맞고 또 맞고 했던 기억들입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노동이 존중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광용 회원의 인터뷰는 여느 회원의 인터뷰보다 어려웠다. 코로나19로 원격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번 만나본 경험으로 술 좋아하고 등산 좋아하고 뜻 맞는 지인들과 어울리고 나서서 일하기를 좋아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이 지면에 그의 진면목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나의 능력 부족에 더해 그의 묵직함 때문일 것이다.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같은 작업장에서 열악한 노동자였던 그는 현재 외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있는 회사의 관리자가 되었다. 혹자는 개천에서 용났다거나 자수성가했다면서 추켜세웠을 것이고 나 같은 사람처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가 되었다고 어딘가 그의 약점을 찾아 찔러 보는 장난기 섞인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광용 회원은 체 게바라의 시 한편으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한다.


 

먼 저편
–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체 게바라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수, 2020/08/26-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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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20 행사,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화상회의로 동시 진행

 

 

8월 8일 도쿄의 재일본한국 YMCA에서는 ‘2020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열렸다. 이 행사는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이 2006년부터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를 외치며 평화의 촛불을 들어 온 이래 올해 15주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아 야스쿠니합사철폐 소송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화상회의 형식으로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서승 공동대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대표를 비롯한 유족들과 심포지엄의 발표를 맡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등 한국 참가자 20여 명은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코로나, 올림픽과 야스쿠니’를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기조발제를 맡은 다카하시 테쓰야(高橋哲哉) 도쿄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후쿠시마(무토 루이코 武藤類子), 오키나와(고메스 기요사네 米須清真)를 주제로 한 발표가 있었고, 우롱유엔(呉栄元) 타이완 노동당 주석은 ‘백색테러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주제로, 김동춘 교수가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재일조선인 가수 이정미 씨의 콘서트, 서승 공동대표의 폐회사에 이어 화상으로 진행된 촛불시위 순서에서는 한국 유족들을 비롯한 일본, 타이완 참가자들이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NO 야스쿠니! NO 아베!’의 결의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록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의 연대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08/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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