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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접근과 그에 따른 미국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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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접근과 그에 따른 미국의 역할

익명 (미확인) | 목, 2018/12/27- 16:59

정보를 얻는 유일한 방식인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북한과의 미래 약속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불편한 과정이다. 이들 매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평양 당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진정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정치인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국제사회 진입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전혀 트럼프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화석 연료나 프라이빗 뱅킹과 같은 파괴적인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을 대표하는 그와 그의 전시 내각은 미국 건국 이래 가장 부패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이 사용한 통치 방식은 전체주의 정부로 극소수의 억만장자들에 의한 부의 통제를 공고히 하면서 우선은 이란과 그 다음으로는 러시아 및 중국과 대규모 전쟁 즉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이는 국내 통제를 강화하고 군사 장비 및 무기 판매와 전세계 광물 자원의 전용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정부의 모든 권한을 무력화하고 공공 기관의 민영화와 감세를 통해 다국적 기업이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전쟁, 부유층에 대한 감세 및 교도소와 군대 자체의 급진적 민영화를 촉진하면서 임기 2년을 보냈다.

트럼프가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없으며 그는 이러한 기후변화 시대에 인류 전체를 쓰러뜨리려고 위협하는 타락한 제국의 얼굴이다. 이 사기꾼이 평양 당국과의 대화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그처럼 많은 평범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담당 기관이 너무도 부패하고 타락하여 그러한 냉소적인 결과가 전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본거지 워싱턴 DC 현지에서 실제로 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최근 새로 전개된 사건들이 훨씬 더 불안한 패턴임을 시사한다. ‘평양 책략’은 군사 분쟁과 세계 대전을 위한 체계적인 계획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및 세계인들의 주위를 딴 데로 돌리려는 수단으로 미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내어놓은 거대한 카니발 쇼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런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련의 분류된 지침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실제 상황으로 가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석유에 의존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경제적 및 법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신재생 에너지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결정에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각한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문명을 종식시킴으로써 어쩌면 인류의 멸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계획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 경제 권력을 통해 그와 같은 위험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면 그들은 세계 대전과 핵전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모든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현재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닌 사이코패스주의 다시 말해 사이코패스들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이며 재앙을 초래할 조치들을 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정부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 자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럼_181227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정상 회담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 관계에 대한 “스펙터클 정책” 접근 방식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성조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교대로 나타나도록 엉성하게 설계된 회의장 배경을 보았을 때 나는 꿈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하게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복잡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번 정상 회담은 몇 명의 아마추어들에 의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성급하고 엉성하며 엉망으로 이루어졌던 미북 정상 회담은 너무 일찍 실상이 드러났으며 그에 따른 무시무시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외치고 있다.

이 회담은 액면 이하로 할인 판매한다는 중고차 세일즈맨의 속임수처럼 한량들과 식객들을 놓친 바람잡이와 포주들이 함께 모여 내놓은 정책으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장 확실한 것은 그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과의 일종의 합의가 어쩌면 대규모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회담은 전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수단인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와 같은 방식으로 판매되었다. 트럼프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나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과 같이 계속 투덜거리며 전쟁을 주장해온 매파들의 도움을 통해 그의 생각대로 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상당히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계속 암시해왔다. 이 정상 회담의 사전 준비는 큰 상금이 걸린 싸움과 유사했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흥미 있고 무시무시한 일상에서 책임이 따르고 감상이 아닌 세부사항으로 그를 지루하게 만드는 실제 정책 입안보다 훨씬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순간 동안 진행된 본 정상회담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구절을 비틀어 해석해보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무능함의 연속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김정은에게 보여주었을 것으로 가정되는 동영상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급진적이고 과도한 개발 및 국민들(소비자와 저임금 노동자)의 착취 또는 미국과의 전면전 사이에서 국가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되어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이번 회담에서 긴장해 있는 모습이 눈에 역력했다. 김정은에게서 그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수십 년 동안 카지노를 운영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트럼프의 시간이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판돈을 두 배로 하라. 그러면 모두가 뒤를 따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몽유병자들의 세상에서 장님은 왕이다.”

이러한 페블 비치와 리얼리티 TV를 혼합한 행사의 장소로 싱가포르가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싱가포르는 국가가 아니지만 아시아, 중동 및 동남아의 글로벌 자본이 이번 정상 회담이 열렸던 카펠라 호텔과 같은 고급 호텔의 초현실적 세계로 들어가는 공간이다. 싱가포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와 같이 지역 내 문제들로부터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차단시켜왔던 곳으로 ‘사형이 있는 디즈니랜드’ 라는 농담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그런 초현실적 정상 회담을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이 독점적 행사는 북한을 국제 사회로 초청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김정은을 억만장자 클럽으로 불러 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결핵과 영양실조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본 회담의 전체적인 과정은 청중의 양심이 아니라 기본 욕구에 호소하는 식으로 매우 반지성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상회담 후 열린 트럼프의 기자회견은 부풀려진 감정과 연관되는 것들로 채워졌으며 어떤 논리도 찾을 수 없었다. 계획되지 않은 정상 회담은 날림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계책에 불과했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정상 회담 이후 기본적으로 동일했는데 막연하게 돌파구를 암시하고 평화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6개월 내에 전쟁 위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제도적 보장은 없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구속력이 있는 모든 계약 및 합의를 무시,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7년 트럼프는 UN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9월 트럼프의 UN 연설에서는 이란에게 전쟁 위협을 가한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찬사를 늘어놓았다.

당시 그는 “미국은 미국인들에 의해 통치된다. 우리는 글로벌리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애국심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인류 공동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보편적 법 규정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멸을 나타내면서 법적 구속력의 반환을 제안했다.

트럼프 치하에서 미국으로 인해 야기된 위험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 무술을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자기 홍보를 위해 우리에게 던졌던 힘을 가져와서 새롭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능숙하게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우리가 시민들의 엄청난 집중과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전쟁 수행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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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 전위주의가 수반하는 또 다른 동향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노동에 불리하게 변질된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가장 불변적인 교리 중 하나는 노동수익(실질임금)이 생산성 증가를 지속적으로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도그마는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노동수익의 강제적인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원래대로 돌아가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조건과는 별도로, 우리는 이 도그마가 명백히 거짓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다양한 요소부존량(특히 인구밀도와 천연자원의 부)의 발전과 제약에서 비슷한 경제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국민소득의 분할에서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떻게 이런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고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는 법적 제도에 있다. 경제성장은 수요측면과 공급측면에 대한 제약을 반복적으로 돌파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수요에 대란 제약을 돌파하는 가장 오래 지속되고 효과적인 방법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권을 통해 분배를 사후적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제도적 안배들을 혁신함으로써]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경제적 이익의 일차적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 중에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법적 위상을 정하는 안배(계약법, 회사법, 노동법)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을 규정하는 안배(재산권 체제)가 있다.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는 방법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기반을 두는 경우에만 안전하다.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조직과 대표 방식은 그러한 기반을 확보하였다. 부유한 북대서양양안의 국가들에서 노동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지배적인 안배와 지지대는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이거나 단체협상에 입각한 노동법 체제였다. 단체협상은 고용관계의 불평등한 여건에서 조직된 노동에 “대항력”을 부여함으로써 계약의 현실을 유지하려고 설계되었다. 중남미에서는 대안적인 조합주의적 노동법제가 등장하였다. 노동력의 절반 또는 그 이하를 관장하는 공식적이고 법적인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부의 보호 아래 직종별 노동조합에 자동적으로 가입되었다.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제체는 모두 기업 조직체들[협회들]의 비호 아래 확립된 생산단위(공장 등)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특징적으로 결집시키는 공장제 대량생산을 자신의 경제적 배경으로 삼았다.

고립적인 지식경제의 등장은 대량생산을 유사하게 경제 전반에 퍼져있는 선진적인 생산방식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전위 부문의 동향은 전통적인 대량생산이 쇠락하는 상황과 안정적 노동력의 고용이 확고한 경제적 지원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대변한다. 기업들은 더 싼 노동력, 더욱 유연한 노동력의 고용, 세금 우대(노동과 세금의 차익 거래) 등을 찾아 세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고립적인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불안정계약의 제도들을 통해 업무를 할당받는 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비전위 기업들도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가 공히 의존하였던 경제적 기반을 침식하는 데에 일조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의 자연적 형태처럼 보이던 것들이 회고해보면 노동이 경제적 안전이나 시민권이 없이 주로 분권적, 계약적 안배들로 조직된 두 시대 사이에 상대적으로 짧은 간주기의 현상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공장제 대량생산과 계약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 이전에는 선대제수공업(先貸制手工業)이 존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초반부에서 기술하였다. 이제 대량생산의 쇠락과 새로운 선진적이지만 독점적인 생산방식(지식경제의 고립적 혹은 초고립적 전위주의)에 의한 대량생산의 추월 과정에서 또 다른 선대제수공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등장하였다. 많은 대량생산의 일자리들은 더 가난한 나라의 저임금 회사에 하도급으로 제공되었다. 다른 일자리들은 특히 서비스 분야에서 불안정한 도급직과 임시직으로 대체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를 위한 대안적인 법적 체제가 부재하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포용적 전위주의로 향하는 활동들이 부재하다면 노동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은 감소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와 유사전위주의의 출현이 초래한 동향들(과점기업들이 두 가지 전위주의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과 많은 노동자들이 불안정 노동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응들은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 이러한 대응들은 더 크고 더 넓은 변혁으로 휩쓸려 들어가야만 작동할 수있다. 현재까지 그러한 변화는 시행되기는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주변의 미미한 신생기업들로 둘러싸인 과점기업들이 지식경제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해답으로서 독점금지법을 고려해보자. 독점금지법을 적용할 수 있는 사실요건(예컨대, 특정한 제품의 확정된 시장에서 제품가격책정에 대해 측정 가능한 영향력을 통해서 경쟁을 억제하는 행위)이 자주 결여되어 있다. 독점금지법이 지식경제의 거대기업이 경쟁을 억제하는 양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개정되거나 발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개정된 법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소수의 글로벌 기업들에게 초고립성과 과점을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편익을 제공해온, 결합적이고 누적적인 요소들을 역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독점금지법의 개정은 시장경제의 제도적 법적 구조에서 파급효과가 더 큰 변화의 일환으로서만 작동할 수 있다.

더욱이 플랫폼기업들의 해체는 이러한 기업들이 사용자들의 단일한 커뮤니티로 결집시킨 다수의 사람들과 연결된, 기업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많은 부분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플랫폼기업들을 소규모 회사로 분할하고 덜 포괄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대신에 플랫폼기업들을 유지하려고 결정하면서도 이 기업들을 새로운 지배구조 형태에 복종하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법에 의해 설립된 독립적인 신탁회사들은 시민사회의 대표자들과 합께 플랫폼기업들을 통제할 권한을 보유하고 그리하여 주주의 권리와 경영자의 권한을 동시에 제약할 수 있다.

독점금지나 지배구조 활동의 효과는 경제적 제도들에 대한 더욱 파급력이 큰 혁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지식경제에 대한 참여 수단들, 즉 자본, 선진기술 및 선진관행 등에 대한 접근을 확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뿐만 아니라 정부와 신생기업들 간의 협력의 새로운 형식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혁신은 기본적인 재산권 체제(사람들이 사회의 축적된 자본을 배치하고 생산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방식과 조건들)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실험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현재 국한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계승자로서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에서 법적이고 제도적인 요소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순서도이다.

유사한 취지에서 특정한 직업 보유와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시민에게 제공되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휴대가능한 안정성-보장적인 안전장치와 역량-강화적인 기부재원의 발전에서 북구의 실험, 즉 “유연안정성(flexsecurity)”을 고려해보자.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은 모든 일자리에서 노동자와 함께 이동한다. 일부 이러한 제도적 안배는 새로운 생산현실 아래서 나타나는 고용불안에 대한 효과적인 해답을 구성해야만 한다. 유연안정성의 광범위한 채택은 유연성과 안정성이 역의 관계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혁신과 협력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체제의 일단을 범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경제의 카르텔 형성과 연관된 독점금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응답의 단편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없다.

유연안정성이 제공할 수 있는 더 넓은 해법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기존의 노동법 이외에 또 다른 노동법체제를 탄생시켜야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노동법 체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뚜렷한 경제적 불안에 대한 완곡한 언어로 복무하는 것을 보증하도록 설계될 수도 있다.

체제의 원칙들 중 하나로서 아마도 차등제의 채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불안정노동이 통신기술과 지식경제의 관행의 도움으로 더 많이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고용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법적 개입이 불안정 노동을 보호할 필요는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불안정노동이 덜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그러한 직접적인 법적 보호의 명분은 그만큼 더욱 강력해진다.

이러한 보호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원칙은 법이 유사한 업무에서는 안정적 고용과 시간제 혹은 과업지향적인 고용 중 선택의 가격중립성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계약직 노동자는 유사한 노동에 대해서는 최소한 정규직 노동자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 목적은 지식경제의 관행과 관계들에 의해 요구된 유연성이 노동의 가격인하와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의 감소에 대한 구실이나 위장수단으로 복무하지 않도록 보장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노동법 체제의 진화의 후기 단계에서 노동법의 변화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금노동이 농노제와 노예제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자유노동의 하자 있는 과도기적인 형태라는 19세기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카를 마르크스부터 존 스튜어트 밀까지)의 공유된 믿음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미래에는 경제적 종속노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자유노동(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들이 종속적 또는 주변적 지위로 격하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그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경제의 포용적인 형태의 제도적 안배들과 사법은 21세기 여건에서 19세기 이상을 쇄신함으로써 이러한 이상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할 수도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현재 세계화되었으되 고립적인 지식경제 형태의 증가에 수반되는 위협적인 동향들에 대한 적합한 유일한 해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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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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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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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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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생명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전쟁 유도 범죄, 다시는 없어야 한다

오늘(6/12) 법원이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과 관련해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에게 일반이적죄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인정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1심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도발해 비상계엄 선포의 명분을 만들 목적으로 드론작전사령부로 하여금 평양에 무인기를 투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군사상 이익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 외에도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직권 남용, 김용현 전 장관과의 공관계 등 특검이 제기한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군통수권자와 군 책임자가 오히려 한반도 군사충돌을 유도한 이번 사건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고려할 때 중형 선고는 당연하고 마땅하다.

이번 재판과정에서 윤석열과 김용현 등이 저지른 범죄의 본질과 실체가 명확히 확인되었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전쟁 위기를 조장하고, 이를 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특검은 이를  ‘반국가적·반국민적 범죄’로 간주해 기소했고 법원은 유죄로 판단했다. 그동안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평양 무인기 침투, 오물풍선 원점타격 시도 등 일련의 행위가 단순한 군사적 오판이나 작전 실패가 아니라, 내란을 위한 전쟁 유도 시도였고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한 범죄라고 주장해왔다. 오늘 법원의 판단은 시민사회가 제기해 온 문제의식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 사법부가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은 그 자체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 작은 충돌도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 피해는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감당하게 된다. 따라서 다른 어떤 죄목보다 무겁게 물어야 한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다시는 권력자들이 사적·정치적 목적으로 군사작전을 기획하거나 지시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번 1심 선고로 모든 책임 규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의 기획, 지시, 보고, 실행, 은폐 과정 전반을 끝까지 밝혀야 한다. 오물풍선 원점타격 시도와 대북 군사작전, 심리전, 관련 군 지휘체계와 정보기관의 관여 여부도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재발 방지 대책도 시급하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위헌·위법한 지시가 어떻게 실제 군사작전으로 집행될 수 있었는지, 군 내부의 견제와 민주적 통제 장치는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국회와 정부는 군 정보기관과 작전 지휘체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군인이 위헌·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와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한반도 평화는 어떤 권력의 정치적 도구도 될 수 없다. 전쟁 위기를 조장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한 자들에게 관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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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6/06/1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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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 없는 메시지를 실용주의 외교 성과라 포장해선 안 돼
대통령실부터 각 부처까지 평화공존 구상에 맞춰 구체적 정책 조정돼야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6/19) 유럽 순방 성과를 브리핑했다. 정부는 이번 순방을 실용외교의 성과로 평가하며, 교황청과 국제사회에 한반도 평화 구상을 설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는 연설의 수사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바티칸에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는 말을 인용하며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고 군사적 신뢰를 회복하겠다 밝혔으나, 불과 며칠 전 한-EU 정상회담에서는 이와 정반대되는 대결의 문법을 반복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었다. 한편으로는 평화 구상을 말하면서 또 다른 편에서는 대결과 군사협력을 이야기 한다면, 국제사회가 한국 정부의 의도로 읽는 것은 평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정책적 모순일 뿐이다.

유럽 순방 과정에서 드러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입장은 ‘성과’라고 포장하기에는 도리어 오락가락 행보가 우려스러울 뿐이다. 지난 10일 순방 기간 중에 발표된 한-EU 정상 공동성명은 한국 정부가 평화공존보다 대북 압박과 군사안보 협력에 무게를 둔다고 해석될만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바티칸에서 밝힌 남북 군사적 신뢰 회복에 대한 의지나, 유럽 순방 직전 개최한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공존에 대해 밝힌 비전과도 맞지 않는다. 특히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완전한 비핵화라는 장기 목표를 견지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북핵 모라토리엄을 목표로 하는 ‘현실적인 접근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히고는 이틀 지나 유럽에서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며 북러 군사협력과 대북인권 등에 대한 규탄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 브리핑 직후 기자와의 문답 시간에도 북핵 문제에 대한 단계적 접근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명했다고 답하며 취임 1년 기자회견과 마찬가지의 입장임을 다시 한 번 설명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한EU 공동성명을 발표한 취지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결국 평화공존은 한 문단의 수사로 남았고, 대결과 군사협력은 정상외교 문서에 새겨졌다.

이재명 정부가 한반도 평화공존 구상에 진정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 기조는 외교문서와 실제 정책 속에서 일관되게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동성명에서는 대통령이 내세운 평화공존 구상을 외교안보 정책의 중심 기조로 확인하기 어렵다. 청와대는 공동성명이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을 뿐 평화공존 정책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북한 외무성은 이를 ‘엄중한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한국을 ‘불변의 적국’으로 다루겠다고 공식 반발했다. 정부의 설명과 달리 공동성명은 남북 간 불신을 키우고 관계 악화를 심화시켰다. 기존 입장의 반복이라는 해명으로 그 결과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더욱이 북러 협력에 이어 북중 관계까지 재편되면서 북한의 대외 선택지는 넓어지고 있다. 이런 정세에서 기존의 대북 압박 문법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스스로 대화와 위기관리의 공간을 좁히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정부 안에서조차 평화공존의 의미와 우선순위가 일관되게 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제 국방부는 2026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삭제될 수 있다는 보도를 부정하며 입장 변함이 없다고 밝힌데 반해, 이와 관련해 통일부는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채 평화공존을 추진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외교문서와 국방정책, 통일정책이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정부 차원의 조정 실패다. 이런 엇박자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일이 아니다. 평화공존을 국정기조로 제시한 대통령이 정부 전체에 그 원칙을 관철하지 못한 결과다. 스스로도 오락가락 하다보니 개별 부처의 입장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평화공존 정책의 컨트롤타워로서 대통령실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이제라도 이재명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부처 간 혼선과 정세 판단의 실패에 대해 책임 있게 설명하고, 외교·안보·통일·평화 정책을 하나의 원칙 아래 재조정해야 한다.

평화공존은 좋은 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말과 문서, 정책과 행동이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 듣기 좋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도 정상외교 문서에 대화와 긴장 완화의 원칙이 분명히 반영되고, 국방정책과 군사훈련, 예산 역시 군사적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조정되지 않고는 불신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말하면서 대북 압박과 군사협력만 구체적인 정책으로 추진한다면, 그 평화는 정책이 아니라 포장으로 읽힐 뿐이다. 평화공존은 연설이 아니라 대통령실부터 각 부처에까지 정책의 일관성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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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6/06/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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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9월 18-19 양일 간에 경기도와 경기연구원이 주관한 2019 DMZ 포럼이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최되었다. 뒤늦게 초대되어 포럼의 말미에 종합적인 견해를 발표한 스테판 코스텔로는 그간 정기적으로 다른백년을 통해 한반도 상황에 대하여 정기적인 기고와 수시로 강연을 담당하여 왔다. 그는 DJ가 미국에 체류시 개인비서를 자임하면서, 미주 평화재단 전 사무총장 겸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EastAsia Product를 설립하여 DJ의 햇볕정책을 미국조야에 소개하여 왔다. 아래로 DMZ포럼에서 행한 그의 발표내용을 번역 소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을 9월 24일 뉴욕에서 만났다. 김정은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다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암시하였다. 새로운 계기가 준비되고 있는 반면에 작년 9월19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맺은 위대한 선언이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다.

 

Where does Korea stand now?

한국은 어떤 상황에 있는가?

지난 30년 간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외교사야말로 이 질문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답일 것이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그 어떤 정책이익집단보다 국익을 확고하게 결정하는 만큼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강제력과 군사력∙경제력보다는 잘 만들어진 협정이 북한의 비핵화와 발전에 있어 진전을 가져올 것이므로 외교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숙련된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동맹이라는 핵심적 이해관계는 거의 완벽하게 들어 맞는다. 그러나 여러 리더들과 정치집단들은 사안을 달리 보고 있다. 특히, 서울과 워싱턴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핵심 이해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혼란스러워 하였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며, 때로는 관여와 협상보다는 냉정한 비평화노선을 선호하였다.

지난30년간,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는 DJ 초기 집권의 중대한 3년이란 기간 동안 최대 수준의 연계를 이루었다. 되풀이 하면, 1998년2월 김대중이 한국대통령으로 취임한 때부터 2001년 1월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직을 그만두기까지의 기간 동안, 어느 때보다 남한과 북한간, 미국과 북한간, 그리고 남한과 미국간의 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8년10월 김대중과 오부치의 회담으로 한일관계가 정점에 다다른 것 역시 놀랍지 않다. 분명히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경수로형 원자로를 건설 중이었다. 그리고 북한을 미사일 기술통제 체제하에 포함시키기 위한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Now, South Korea is a middle power

이제, 대한민국은 중간국가이다

세부사항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중간국가로서 가져야 할 자질의 필수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자질과 역량은 행동과 리더십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두가지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동포이며, 북한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이해관계와 북한문제를 둘러싼 책임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대한민국이 지닌 잠재력과 유연성은 미국과 중국, 북한, 일본 또는 UN의 리더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중요하고 두드러지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늘날 주요한 진전을 이뤄내는 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적절하며, 가장 유용한 자질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다.

 

The US role on Korea is now at a standstill

한반도 문제에  있어 미국의 역할은 정지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황은 트럼프 정부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기보다는, 지난 20년간의 한국에 대해 실패한 비생산적인 불성실전략으로 인한 것이다. 미국의 불완전한 선거제도와 외교구조, 정책입안과 정책수행 제도로 인해 현재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스스로 내부적 합의를 보거나, 북한과 합의점을 찾아 대한민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는 기대 할 수 없다. 오늘날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나, 도달한 합의가 대한민국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맹으로서 당연히 미국의 이익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What could be done?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은 역사와 행운이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논리적이고(logical), 자연적이며(natural), 전략적인(strategic)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언급한 역할을 수행한다 해서 미국 및 동맹국가들과 대립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역으로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는 것은 동맹을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 동맹국들은 한반도의 긴요한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의 충고와 전략과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당사자로서 대한민국에게 가장 중요하고 생존적이며 핵심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맹인 미국에게는 그리 절절한(number-one, existential, core) 이슈에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성공적인 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반드시 활용하여야 할 UN에게도 역시 핵심적인 이슈에 해당되지 않는다. 동북 아시아의 이웃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다.

 

Professionals in DC and Seoul know the outlines of the deal possible

미국과 대한민국의 전문가들은 가능한 협상안의 윤곽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를 “하노이&플러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 측이 빠른 시일 내 확실하고 믿을만한UN 제재완화가 북한에 있어 핵심적인 제의가 될 것이라는, 대담하지만 명백한 아이디어를 포용할 수 있다면, 김정은 측에서는 마땅히 보여야 할 상호행동을 취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행위는 영변, 즉 모든 핵분열성 물질생산의 중지, 그리고 감찰을 포함한다. 이에 문정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플러스알파”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각각 당사자에 있어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도에서 섬세하지만 작은 조항 몇몇이 추가되는 것이다.

상기한 근거에서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트럼프 대통령을 김정은과 제3차회담을 갖도록 끌어 들인다면, 언급한 조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 제시할 기초협상안에 대해 김정은의 동의를 먼저 얻어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협상안을 공개하여, 말 그대로 이를 못박고, 트럼프와 기타 이해관계자, 그리고UN등 과 해당 협상안을 발전시키기 위해 중간국가로서 대한민국이 가지는 상당한 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헌신과 대담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한민국의 현재 입장을 바꾸지 않는 것이며, 미국의 입장도 거의 바꾸지 않는 것이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시도가 주는 잠재적 이점은 명백하다. 반면에 예상되는 불리한 점들은 (네오콘들이 만들어 내는) 거짓말들이며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이다.

북한에 대해 기본적이고 적절한 유인책을 제공하지 않는 한, 제재완화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로 인해 합의에 이르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주의적 원조를 압박을 가하기 위한 무기로 오용하는 것부터, 미국 연구자들과 관광객들의 여행금지, 그리고 유조선 압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조치들은 정상적인 외교를 방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이 그러한 “디테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왜 그가 디테일을 알아야만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백악관에서 존 볼턴이 떠난 것은 앞으로 다가올 대한민국과 미국의 회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의 회담착수에 따라 몇 가지 가능성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볼턴이 고용된 배경, 그리고 정상적 외교와 협상을 반대하는 미국정부 내 많은 세력을 생각해보라.

한반도 게임의 (미국 내) 참가자들은 운동화 끈이 풀려있고, 헬멧이 벗겨져 있으며, 주의력이 결핍된 상황이다. 대한민국만이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게임을 할 준비가 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자, 게임을 시작해 보자.

목, 2019/09/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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