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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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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11/21- 13:51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은 일제가 항복한 지 21일 만에 쓰러져 순국했다. 아내 홍매영과 아들 영조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홍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아들 영조씨 성을 신씨로 바꿨다.

1942년 봄, 중국 시안에 있던 임시정부(임정) 광복군 훈련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허드렛일을 도왔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남편을 일제 경찰의 흉탄에 잃은 홍매영이었다. 서른 살 홍매영은 망명 생활을 하던 동암 차리석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차리석은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조작 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임정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 뒤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제 탄압으로 임정이 위기에 몰리자, 차리석은 국새와 핵심 서류 등을 가지고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는 항저우에서 흩어졌던 임정 각료들을 불러 모아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임정 버팀목’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차리석과 홍매영은 화촉을 밝힌 지 2년 뒤인 1944년 1월17일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조국 광복 소식을 가져다줄 하늘의 축복이라며 아명을 ‘천복’으로 지었고 중국인 작명가에게 부탁해 ‘영조’라는 본명까지 지었다. 임정 요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차영조가 태어난 지 20개월째, 1945년 8월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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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차리석의 아들 영조씨(사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며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고 말했다.ⓒ시사IN 이명익

임정 비서장으로 살림을 맡던 차리석은 환국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임정 27년 역사가 깃든 서류 더미 선별을 하던 차리석은 1945년 9월5일 밤 과로로 쓰러진다. 병원으로 실려간 차리석은 자신이 못 일어나리라는 걸 직감하고 홍매영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젊은 당신한테 큰 짐을 떠안기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미안하오. 해방된 나라로 돌아가면 정부건 국민이건 당신과 어린 영조 하나 정도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죽어도 부디 맘 편히 귀국해 새 삶을 시작하기 바라오.” 나흘 뒤 9월9일 그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그는 충칭에 임시 안장됐다. 백범 김구는 동암의 영전에 “귀국 후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가겠다”라고 약속했다.

1945년 11월 부산항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 차영조는 이제 74세 할아버지가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어머니 홍매영 여사와 어떻게 살아왔을까? 기자와 만난 차영조씨는 품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머니 홍매영 여사가 임정 사무실 앞에서 돌이 갓 지난 그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아버지 차리석과 백범이 지켜보고 있었다.

충칭에서 귀국한 임정 인사들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대우는 한마디로 철저한 무시였다.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뒤 어머니와 차영조가 머문 곳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정부 수립 전이라 백범이 미군정과 협상 끝에 우선 일제 적산가옥이었던 한미호텔을 받아내 귀국한 임정 가족의 임시 거처로 삼았다. “생계 대책이 막막하니 어머니가 한미호텔 1층에 양담배 좌판을 깔고 미군 양담배 장사를 했어. 미군정 경찰 단속이 심했지. 어린 나는 좌판 곁에서 놀다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좌판을 걷어차면 어머니랑 거리를 기어 다니며 흩어진 양담배를 주웠던 일이 아직도 생생해.” 어머니는 수시로 중부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조사받았다.

해방된 조국은 더 이상 아버지가 유언하던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친일파들이 득세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어머니는 어린 차영조에게 “고국에 돌아왔어도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와중에도 백범은 충칭에서 순국한 동암 차리석의 영전에서 한 약속을 앞당겨 이행할 결심을 한다. 이를 위해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했다. “백범이 1948년 5월에 남북 협상하러 평양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자마자 아들 김신에게 ‘중국에 들어가서 석오 이동녕 선생과 동암 차리석 선생 두 분 유해도 모셔오라’고 명하셨지. 1948년 9월 아버지 유해가 이동녕 선생 유해와 함께 돌아왔고, 백범 선생 주도로 사회장 장례식이 거행됐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의금 1만원을 냈더라. 백범은 무직인데 2만원, 친일파 거부 박흥식이 3만원을 냈고.” 당시 아버지 장례식장 연단에 오른 백범은 이렇게 추모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은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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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12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차리석 선생 장례식 사진ⓒ시사IN 이명익

동암을 효창공원에 모신 백범은 1년 뒤인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백범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김구 선생마저 암살당하자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충격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직감했다. “백범이 암살당하고, 의열단 김원봉 선생이 악질 일제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나와 격분해 월북하신 것을 본 어머니는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하셨지. 6·25 전쟁이 나자 피란을 간 부여에서 내 성을 차씨가 아니라 신씨로 바꿔서 학교에 넣으셨어. 차씨의 한자 위아래 획을 하나씩 떼버리면 신씨가 돼.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신영조라고 불러.”

피란지 충남 부여에서 차영조의 삶은 신산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행상을 하다 중풍으로 쓰러졌다. 어린 영조는 학업을 그만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여에서 여관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오일장이 서면 국밥 배달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 왜 독립운동을 하셔서 가족을 이리 고생시키냐고.”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때는 광복 후 17년이나 지난 1962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통성이 약하니까 고심했겠지. 독립유공자를 일부 인정해주기 시작한 거야.” 이때부터 모자에게 정부 지원금이 나왔다.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곧은 성품으로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 홍매영 여사도 어린 영조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남편의 옛 동지를 찾아 나섰다. 외면하는 이도 있었지만, 도움을 주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임정 법무부장을 역임한 최동오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화성의숙 숙장을 맡아 활동했다(이때 김일성은 6개월간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최덕신은 이승만 정권 시절 군에 있다가 박정희 정부 초기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순화동에 있는 외무부 장관 공관을 찾아가 차리석 아들이 왔다고 했더니 안에서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었던 놈이 살아서 나타나다니’라며 기쁘게 반겨주셨어. 이분은 임정 시절에 내가 태어난 사연을 알고 계셨거든. 중풍 걸린 어머니 소식을 듣고는 차비를 두둑이 주시며 곧바로 부여에 내려가 모셔오라고 했어.” 이때부터 차영조는 어머니와 함께 외무부 장관 공관의 부속실에 들어가 생활했다.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뿐 아니라 부인 류미영 여사도 차영조 모자를 챙겨주었다. 우선 차영조를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넣어주었다. 차영조는 낮에는 공관 청소 등을 돕는 한편 저녁에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최덕신 장관은 퇴임해서 사저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모자와 함께했다. 차영조가 2년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 장관은 상업고등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 “그 학교 교장선생님 집이 최 장관 바로 윗집인데, 하루는 교장선생 집을 찾아가 ‘내 아들인데 나이가 좀 많지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며 설득해 중간에 편입시켜주셨어. 그리고 바로 독일 대사로 나가셨지.”

최덕신은 1963년 9월 외무부 장관을 그만둔 뒤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최덕신은 동백림 사건 이후 서독 대사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났고 미국으로 떠났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1986년 자진 월북했다). 최 전 장관이 서독 대사로 간 뒤에도 그의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차영조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전력(한전) 검침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한전 박영준 사장의 부친이 내 아버지와 임정 동지였어. 최덕신 장관 어머니가 얘기를 넣어줘서 박영준 사장을 찾아갔더니 인사부장을 불러 바로 검침원으로 채용해주셨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10년 동안 검침원 생활을 하던 차영조는 추석날 아버지 성묘하러 효창공원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함께 묻힌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 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이석희 부회장은 그의 근황을 묻더니 대우그룹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렇게 대우 가서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나가 10년간 일했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개 어렵게 살고, 나도 어린 시절 어렵게 컸지만 돌아보면 난 아버지 영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한전 검침원도 그 인맥으로 갔고, 대우로 간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었으니까.”

그가 대우에 입사해 중동에 나가 있던 1979년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얼마나 강직하신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가시는 날까지 손수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해결하셨어.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김구 선생의 권유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셨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게 자식으로서 한이야.”

그는 임정 수립 99주년이던 지난 4월13일 효창공원 순국선열 묘역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린 그날 기념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후손과 동행하자고 했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헌화 분양하는 국무총리 뒤에 서 있다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생각했더니 감정이 거대하게 물결치더라고.”

그는 10월1일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는 운동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정에서 국군의 뿌리를 찾지 않으면 일본군이 우리 군의 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육사)의 뿌리가 되어야지. 그래서 이번에 육사에서 신흥무관학교 107주년 기념식을 열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선생 흉상을 세웠어요. 육사 생도대장이 건배사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금년부터 졸업하는 생도는 임정에 뿌리 둔 광복군, 독립군의 후예로 졸업하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지. 육사 생도가 이제부터는 독립군이 뿌리라는 얘기에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k

<2018-11-21> 시사IN
☞기사원문: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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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3/2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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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 “일본과 협의 안 돼” 답변만 반복
시민단체 활동만으로는 한계

▲ 서울 용산역 광장의 강제징용 노동자상(뉴스1DB) © News1 박지혜 기자

1945년 일본 열도에 광복의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일본 내 한국인들은 3년이 지난 1948년 스스로 배를 마련해 대한해협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1948년 가을 큰 태풍이 방생해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한국인들이 모여든 일본 규슈지역을 덮쳤다. 배는 난파되고 희생된 한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의 이키섬과 쓰시마섬으로 떠내려왔고 이후 수습된 유해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사찰인 곤조인(金承院)에 안치됐다.

지난 2010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의 조사로 곤조인에 강제징용 희생자로 추정되는 13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음이 밝혀졌다. 최근 곤조인에서 더는 유해를 보관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유해를 화장 후 일본 후생성의 창고에 보관될 처지에 놓였지만 한국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22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두 나라 정부에 곤조인에 보관 중인 131위의 유해 보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일본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의 유해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앞서 지난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반환을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도쿄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돼있던 군인·군속 유해 1134위 중 423위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네차례 걸쳐 봉환됐다.

유텐지의 군인·군속 유해의 봉환 작업에 대한 한·일의 합의가 이뤄진 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 봉환 문제도 제기됐고 약 2700여구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해가 남아 있다고 파악됐다. 하지만 이들의 유해는 여럿이 합장되어 있거나 무연고 유해가 대부분이어서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는 제대로 된 조사와 대응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한일 정부 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정부차원의 봉환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설치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 국내봉환 살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와 3·1절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제99주년 3·1절을 맞아 일본에서 봉환해온 일제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를 모시고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추모제를 거행했다, 2018.2.28/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정부 간 교섭이 멈춰서자 2014년부터 한·일 시민단체가 나서 일본정부에 유해 봉환 문제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봉환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수년 동안 일본정부와 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시민단체에서 향후 일본과의 ‘유골공동조사’에 대한 장기 로드맵 작성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구체화된 계획이 없는 상황이다.

또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역할이 한정될 수 밖에 없어 총리 산하에 행안부, 외교부, 법무부가 참여하는 공동 대책반 구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없다.

특히 지난 2016년 보추협이 요시다 가즈로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 사업과장 등 당국자를 만나 한국인 유해을 찾을 수 있도록 나서달라는 취지의 요망서를 제출했고 일본정부도 “한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본정부가 한국의 요청이 있으면 검토하겠다고 하는데도 한국정부는 요청이 없다”며 “정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있는 관료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 강제징용자 유해 봉환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관련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의 요청이 없었다는 일본 측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한국정부는 지속해서 협의를 요청하고 있으나 일본 측이 답변을 피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현재 한국정부는 일본 내 한국인 전몰자 유해문제에 대해 “국외에서 희생된 한국인의 유해을 국내로 발굴·봉환한다”는 기본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한·일 간의 민감한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당장 유해 송환 문제에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편, 전몰자 유해 수습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일본정부는 지난 2016년 태도를 바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해서 2차대전 당시 전몰자 유해 수집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유해수집사업에서 한국인은 배제돼 강제동원된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해는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위안부 문제 등을 사실 풀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유해 송환 문제는 한국정부가 키를 쥐고 풀수 있는 문제인데 한국정부는 무슨 이유인지 꼼짝을 안 하고 있다”며 “지금 당장 유해를 가져올 수는 없고 가져오는 것만이 능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장기적인고 종합적인 계획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potgus@

<2018-03-22> 뉴스1
☞기사원문: 일본 내 한국인 유해송환 ‘답보’…정부 미온적 ‘日 정부 탓만’


[TF포토]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창고로 보낼 수 없습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 ‘곤죠인 사찰’에 해방 이후 태풍 등으로 조난을 당한 조선인들의 유골 131구가 유족을 찾지 못한 채 임의로 처리될 상황에 놓여있다며 한일 양국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장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관련기사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도자료]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


연합뉴스: 시민단체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131구 봉환해야”

☞BTV뉴스: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이 창고로?

☞불교신문: 조계종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신속히 봉환하라”

금, 2018/03/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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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철기요일

모교일의  몽욜

밍바기 행림은 길국

동부전녹서로…

촛불겨레들의  감동

…..  …..315

이기무신우사고

안자피간대통령을  뽀반기  마슬끼다.

ㄷㅗㅇ친형!

춘설의서설봄눈

그리고

카메라

 

카메라

초춘메에 내린 늦눈은

ㅊㅗㅅ불  동친형겨레라 해야지  안늘까?

….   …..다어메에  연재(창고사진 깅남민언련

열린마당자유게시판들은

퇴임후에

영새미하고  대중이는  안자피 간거  마째!

 

금, 2018/03/2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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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칠도보통먹치리아이고

교수님

고대하로가야대는지

연대로 하로가야대는지

칠칠이머꼬

ㅂㅐ성들은간대엄꼬

ㅈㅣ새끼는 리ㅗㄹ스로이스고,

이하중생략

 

월, 2018/03/26-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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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전거 탄 오륙칠 노총가근

공일이라

이사주

내라케도 낼때 엄꼬

이러케 조은 봄눈디에

ㅁㅜㅅ새 소리 창중고

팔용산  (배간사 사진을 와 아놀리노)

ㅇㅗ대 가꼬

갈대라곤….(방국장 박교수님 !  비정규회원은  315도부띠기 대회 사진 올리심미더)

사미로의  키워드의  오마이고

월, 2018/03/2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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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성사회학

남성과여성

미투

콘센트와플러그

나트와볼트

자작하는 볼트

그들에게  무신가?

 

월, 2018/03/26-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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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상관엄따

그러나그들은

페미니즘의 반대자

반대자의페미니즘

안티페미니즘은   할마리  엄따.

일부다처제와 일부이처제

여자성이 일마야 오대  ….고기가/

 

월, 2018/03/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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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3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0점 보내와
2월 2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3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공무여행증명서, 1940년도 소작료납입고지서 등 문서류와 일제강점기 농업교과서 등 도서류다.

조영숙 회원(도쿄지회 총무) 자료 기증
2월 1일 조영숙 회원이 지난해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자료에 이어 남편의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이건제 회원 자료기증
2월 20일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교주했던이건제회원이「노동자신문」(1989~1996)과 도서 16권 등 총 464점의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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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교장 김완태 중장)는 3월 1일 육사 충무관 앞에서 홍범도·이회영·지청천·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전쟁 영웅 5명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육사는 지난해 12월 11일 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을 위한 특별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최근 홈페이지에서 백선엽을 미화하는 웹툰을 삭제하는 등 군 역사 재조명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에 앞서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임원들은 지난해 11월 9일 육사를 방문해 김완태 교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연원은 신흥무관학교-한국광복군 등 독립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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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에 따르면, 다섯 분의 흉상은 군 장병들이 실제 훈련에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는데 5.56mm 보통탄 5만 발에 달하는 양이다. 이에 대해 김완태 교장은 “총과 실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에도 봉오동·청산리 대첩 등 만주벌판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조국독립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 선배 전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이다”라고 설명했다.

흉상 표지석 위에는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는 독립군의 ‘압록강행진곡’ 가사를 새겼으며 아래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이해 후배 장병들이 사용했던 탄피를 녹여 흉상을 만들어 세우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흉상 제막식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이종걸 국회의원, 한시준 단국대 교수,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독립운동가 후손, 육사 간부·생도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육사는 이날부터 ‘독립군·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독립전쟁의 영웅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를 충무관 1층 로비에서 12월 30일까지 개최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8/03/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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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집들이가 2월 23일 오후 5시에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연구소는 지난 해 12월 18일 용산구 청파동으로 이전했으나 내부 정리 작업에 의외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전 소식을 듣고 거의 매일 손님들이 찾아왔으나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상태여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회원들을 모시는 집들이는 3월 24일 정기총회 날 갖기로 하고 이날은 그동안 연구소와 연대했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하는 수준에서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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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홍보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함세웅 이사장의 환영사, 강만길 명예 이사장과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이 인사말을 했다. 끝으로 2월 13일 연구소 집행위원회가 앞으로 연구소도 통일문제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가입키로 결정했기에 함세웅 이사장은 집들이에 참석한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에게 민화협 가입신청서를 전달하는 순서를 가졌다. 김홍걸 상임의장은 연구소가 민화협 활동에 많은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막걸리와 시루떡 등 간소하게 마련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2시간 만에 마쳤다. 아래는 집들이에 오셔서 축의금을 비롯해 화분과 화환,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 명단이다.

 

[축의금] 4•9통일평화재단 권오헌(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김숙자(한국산문작가협회, 이하 ‘한국산문’으로 줄임) 김형자(한국산문) 김혜자(한국산문) 도면회(대전대 교수) 박서영(한국산문 사무국장) 박재호(생각정원출판사 대표) 박중기(추모연대 명예의장) 사월혁명회 신성호(전교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서울디지털대 수수밭 송경일(국가공무원노동조합 사무총장) 송학삼(재미 통일운동가) 역사문제연구소 임종명(역사학연구소장) 염무웅(문학평론가) 이경희(전교조) 이영희(한국산문) 이옥희(한국산문) 이용길(전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장) 이충재(공공서비스노조총연맹 위원장) 이형철(우정사업본부노조위원장) 이항증(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해동(목사) 임왕택(전 5·18서울기념사업회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역사교사모임 전재진(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장) 참교육학부모회 최만립(전 KOC 부위원장) 한국산문작가협회 한국산문문학회 한국진보연대 RTV시민방송

[화분 및 화환] 계간<문학의 오늘> 김대원(평론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이사장 윤경로, 소장 김승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부영) 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 서중석) 우당이회영장학회(이사장 이종찬) 세자시강원(원장 강신석)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 국가공무원노동조합(위원장 안정섭) 한국산문작가회(회장 정진희) 수림문화재단(상임이사 신경호) 안희정

[선물 및 축전] 금아피천득선생기념회 구대회 사무총장,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이장호(영화사 임원), 송영길 의원, 정숙항

 

• 사무국

월, 2018/03/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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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22일부터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 터에서 제5차 유해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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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1951년 1월 7일과 8일 ‘마을회의’ 또는 ‘도민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나온 주민 약 200~300명이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해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가 덮어 씌워졌다.
10여 일 동안의 발굴작업 결과, 3월 8일 현재 4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발굴된 유해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성들이고, 너무나 참혹한 희생자들의 모습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거꾸로 처박혀 발견된 두 구의 유해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로 보인다. 그 아이의 다리뼈 옆에서는 희생된 아이가 갖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슬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옥비녀와 은비녀 10여 개, 돌반지로 보이는 아기의 은반지도 발굴되었다. 67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국가에 의해 이곳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박선주 단장을 비롯한 발굴단 관계자들은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을 해왔지만, 참혹하게 아무렇게나 포개져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는 처음 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산시의 예산 지원과 연구소 아산지회의 전면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번 발굴작업은 3월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3/2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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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이사장은 2월 11일(일요일) 연구소 워싱턴지부(지부장 박진영)가 페어팩스 윌리엄조평화센터에서 개최한 동포간담회에 참석하여 동포들과 뜻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윤흥노 워싱턴지부 이사장과 박진영 지부장을 비롯한 워싱턴 지부 회원들과 그 지역 한인들, 함 이사장의 막역지우 이용규 씨, 21년 전 결혼식 주례를 해준 최태영・임수아 부부, 대한민국 의문사 1호 최종길 서울대 교수 동생 최종선 씨, 독립운동가인 조성환 선생 손녀 조은옥 씨, 상록수를 지은 심훈 선생의 손녀 심영주 씨,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의 전 소장이자 내과의사인 이화영 씨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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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영 사무국장이 진행한 간담회는 윤흥노 이사장의 환영사, 영화 <1987>에서 함 신부 역을 맡았던 배우 이화룡 씨의 깜짝영상, 최태영・임수아 부부의 환영사, 함 이사장의 강연 순으로 이어졌다. 함세웅 이사장은 참석자들과 통일과 한반도 정세, 정치인과 국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대화를 이어가며 “동포들은 나라를 떠날 때 가졌던 ‘꿈과 의지가 깃든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초심을 지킬 때 비로소 내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샘솟고, 남북 일치와 화해·민주주의 실현의 염원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연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는 문재인 정권과 트럼프 정권의 한・미문제 해법, 통일에 대한 대응방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과 앞으로 과제, 미주지역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의 임무와 활동 방향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한편 함세웅 이사장은 전날인 2월 10일(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워싱턴협의회(회장 윤흥노)가 조지메이슨대학 존슨센터에서 연 평화통일 공감포럼에서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민족의 초심’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 함 이사장은 “한국에서는 ‘이게 나라냐’는 말처럼 ‘이게 종교냐’, ‘이게 교회냐’는 외침이 일고 있다. 요즘 하나님 이름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실한 사람이라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해야 한다.” “(종교는) 잘못된 구조와 문화, 관념과 논리에 대해서는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한국 교계의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 편집부

월, 2018/03/2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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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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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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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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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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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8/03/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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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4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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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15년판조선사정> (1939)에 수록된 센닌바리 자료사진

 

여기 일제강점기에 제작 배포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소화15년판조선사정(朝鮮事情)>(1939)에 수록된 이 사진은 그냥 보면 여느 조선인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빨랫감을 건네며 정담을 나누는 일상풍경인 듯이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진 아래에는 ‘천인침(千人針, 센닌바리)’이라는 짤막한 구절이 친절하게도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의 정겨운 시골풍경이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자행된 군국주의 동원체제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매일신보> 1944년 8월 12일자에 실린 「단성(丹誠)의천인침,여학생들이학병(學兵)에게」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여름에 여름방학은 고사하고 근로봉사에 더하여 이러한 센닌바리 제작에 여학생들이 광범위하게 동원된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경성부내의 여학도들이 더운 여름 근로작업하는 중에 틈을 내어 정성껏 만든 학병 오빠에게 보낼 센닌바리가 총독부 학무국 안에 있는 조선장학회에 연달아 들어와서 관계자들을 감격시키고 있다. 실로 조국의 흥망이 달려 있는 이 싸움에 안연히 교실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연필 대신 총을 잡고 지난 1월 감연히 입대한 반도인 학병들의 사기를 격려하고저 조선장학회에서는 그동안 총독부 조선연맹 등과 협력하여 이들에게 센닌바리를 만들어 보내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내 각 여학교에서는 자진하여 이 귀중한 일을 맡아 갔다.
각 여학교에서는 전력증강에 봉공하기 위하여 여름휴가도 없이 운모(雲母)의 가공이며 군의(軍衣) 재봉 등 근로봉사작업을 하는 터이었지만 학병을 위하여 이 일을 자원한 것이었다. 그 후 각 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이 정성껏 한 바늘씩 뜬 다음 천 명이 다 못되는 남은 것은 거리로 가지고 나가서 땀을 흘려가면서 지나가는 부인들에게 청하여 한 바늘씩 얻어서 전부 완성시킨 것이다. 군국여성의 사무치는 열성과 의기로 뭉친 이 센닌바리에 관계자들은 감격하는 터인데 장학회에서는 이것을 조선신궁에 가지고 가서 참배하여 학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한 후 근근 조선 내 각 부대에 있는 학병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 <매일신보> 1944년 7월2일자에 수록된 「이만큼 성장한 반도해병(半島海兵) 연마의 공(功) 일등병(一等兵)에」 제하의 기사에도 센닌바리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 아들의 이날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저 식장에 임석한 해병의 어머니 경상남도 마산부 교방동 이와모토(岩本大山, 47) 여사는 말한다. 내 자식 석원(石原)이가 형설의 공이 이루어져 일등병에 진급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 애가 출정할 때 주려고 한 바늘 한 바늘 꿰맨 센닌바리를 줄 때는 이때라고 생각되어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애는 이미 폐하께 바친 병정입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 가는 이때 석원이가 제일선에서 훌륭한 무훈을 세울 날도 머지않았거니 생각하면 감격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26<일로전쟁 시사화보> 제2권(1904년5월8일발행)에는일본오사카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백목면으로 하라마키(服卷)를 만드는 풍경삽화가 묘사되어 있다.

 

센닌바리라는 것은 1미터 남짓 되는 흰 천에다 붉은 실로 천 명의 여성들로부터 바늘 한 땀씩을 얻어 매듭지어 만들며, 이렇게 하면 적의 탄환에 맞지 않는다고 믿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던 다소간 해괴한 물건을 가리킨다. ‘천’이라는 숫자는 “호랑이가 하룻밤에 천리를 오고 간다”는 속담에 따른 것이라 한다.
제작 주체는 출정군인을 둔 가족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군국주의가 가속화하면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와 같은 관변단체가 개입하거나 여학생들이 대거 동원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초창기에는 범띠 여성 1천 명에게서 바늘땀을 받는 식으로 이뤄졌으나, 여러 차례의 침략전쟁을 거치고 특히 중일전쟁 때에 이르러 출정군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런저런 형편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하자 범띠의 여성에게는 나이 수만큼, 다른 일반여성에게는 한 땀씩 수를 놓게 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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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전쟁시사화보>제6호(1904년5월25일발행)에수록된 삽화자료. 센닌바리 제작광경이 담긴 이 그림에는 ‘센닌리키(千人力)’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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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에 처음 등장한 ‘구멍 뚫린’ 오전짜리 동전(왼쪽)의 모습. 센닌바리의 제작에는 이런 유공동전은 총알구멍을 연상시킨다 하여 그 사용이 금기시되었다.

 

센닌바리의 제작에 관한 연원을 좇아가다보면, 러일전쟁 때 출정군인을 둔 가족이 무사귀환을 비는 뜻에서 백목면(白木綿)으로 만든 복권(腹卷, 하라마키) 또는 천인결(千人結, 센닌유이)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실제로 <일로전쟁사진화보>나 <일로전쟁시사화보>와 같은 당시의 전시화보잡지를 보면 길거리를 지나는 여인들에게서 바늘 한 땀을 얻어내는 장면이 묘사된 삽화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원래 센닌바리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봉제선을 이어 만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나 사봉(仕奉), 필승(必勝)과 같은 구호문자나 호랑이 문양 또는 일장기의 모습을 함께 새겨 넣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밖에 센닌바리 안에 여자의 머리카락을 넣으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것을 모자에 꿰매거나 복대의 형태로 착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신주처럼 몸에 계속 걸치고 있는 바람에 오히려 몸에 이가 번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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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에는 일본인과 조선여인이 함께 어울려 센닌바리 바늘땀을 짓고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구멍이 없는’ 5전짜리 동전이나 10전짜리 동전을 함께 꿰매어 넣는 일도 성행했던 모양이다. 이 경우 총알구멍을 연상시키는 유공동전(有孔銅錢)은 당연히 사용치 않았다. 오전(五錢, 고센)은 사전(四錢, 시센)과 발음이 똑같은 사선(死線, 시센)을 지났다는 뜻으로 새겨지며, 또 십전(十錢, 쥬센)은 구전(九錢, 쿠센)과 발음이 같은 고전(苦戰, 쿠센)을 넘어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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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 여기에는 길거리의 남자들에게서 글자를 받아 센닌리키를 제작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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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27일자에 소개된 친일조각가 윤효중의 목조 ‘천인침’. 이 작품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천인침과 거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천인력(千人力, 센닌리키)라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9년 2월9일자에 수록된 국방헌금 및 위문품등의 내역을 보면 중일전쟁개시 직후인 1937년 8월 이후 1938년 12월말까지 이 기간에 위문대(慰問袋)가 149,204개, 그리고 센닌바리 및 센닌리키가 모두 4,185점이 헌납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센닌리키라는 말은 초창기에 센닌바리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원래는 천 명의 남성으로부터 역(力)이라는 글자를 얻어 제작한 것을 착용하면 남자 천 명의 힘과 동일한 용맹함을 얻게 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여자들에게서 바늘땀을 얻고, 남자들에게서 한 글씨를 받아내는 장면이 일상풍경처럼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것조차 나중에는 변질되어 ‘역(力)’이라는 스탬프를 만들어 급조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모두가 다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침략야욕이 낳은 서글픈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난데없는 센닌바리의 제작 열풍에 부화뇌동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의 윤효중(尹孝重, 1917~1967)이 여기에 속한다. 그가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바로 바늘땀을 짓는 조선여인의 모습을 나무에 새긴 ‘천인침’이었으며, 그해 특선(特選)에 선정되는 한편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센닌바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는 <매일신보> 1944년 1월20일자에 수록된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의 기고문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천인침」이다. 여기에 나오는 마츠무라는 친일 문인으로 변절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삼팔조끼(명주조끼)에 풀솜을 두어 붉은 실로 한 바늘 두 바늘 천 사람의 어머니와 누이의 정성을 모두어 뜨는 ‘센닌바리’. 학병의 입영날짜를 앞두고 종로네거리 백화점 어구에 세패 네패로 벌어진 정성의 바느질. 어제날까지도 보기 어렵던 새로운 풍경을 나는 가던 발을 멈추고 묵묵히 본다.(중략)
그 정성은 곧 무운장구를 비는 정성인 동시에 임전무퇴의 용기를 비는 것이요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충성을 비는 것일지며 옥쇄(玉碎)의 영광과 격멸의 기백과 필승의 신념을 바늘마다 아로새긴 정성일 것이다.
대동아전쟁 이후로 오늘날까지 흰옷 입은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그의 지킬 본분을 지켜온다 하였지마는 오늘처럼 뜨거운 가슴을 정성 드린 ‘센닌바리’를 누비어 본 적이 없었으리라.(중략)
저기서는 더벅머리 여학생 한 떼가 바늘을 움직이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마스크 쓴 노인이 붉은 실을 꿰고 있다. 웃옷을 입은 상점의 점원들도 웃는 낯으로 한 바늘 꿰매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 굳센 어머니 굳센 누이 굳센 병정 그리고 굳센 나라. ‘센닌바리’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나타남인 동시에 이 땅의 가장 굳셈을 자랑하는 풍속임을 이제사 나는 깨달았노라.

 

자랑스런 풍속으로까지 미화한 센닌바리야말로 일제의 군국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교묘한 자
기위안의 최면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책임마저 고약하게도 그저 개개인과 그 가족의 운수 탓
으로 돌려버리는 일종의 면죄부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화, 2018/03/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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