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지역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11/21- 13:51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은 일제가 항복한 지 21일 만에 쓰러져 순국했다. 아내 홍매영과 아들 영조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홍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아들 영조씨 성을 신씨로 바꿨다.

1942년 봄, 중국 시안에 있던 임시정부(임정) 광복군 훈련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허드렛일을 도왔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남편을 일제 경찰의 흉탄에 잃은 홍매영이었다. 서른 살 홍매영은 망명 생활을 하던 동암 차리석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차리석은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조작 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임정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 뒤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제 탄압으로 임정이 위기에 몰리자, 차리석은 국새와 핵심 서류 등을 가지고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는 항저우에서 흩어졌던 임정 각료들을 불러 모아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임정 버팀목’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차리석과 홍매영은 화촉을 밝힌 지 2년 뒤인 1944년 1월17일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조국 광복 소식을 가져다줄 하늘의 축복이라며 아명을 ‘천복’으로 지었고 중국인 작명가에게 부탁해 ‘영조’라는 본명까지 지었다. 임정 요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차영조가 태어난 지 20개월째, 1945년 8월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1121-1

▲ 독립운동가 차리석의 아들 영조씨(사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며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고 말했다.ⓒ시사IN 이명익

임정 비서장으로 살림을 맡던 차리석은 환국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임정 27년 역사가 깃든 서류 더미 선별을 하던 차리석은 1945년 9월5일 밤 과로로 쓰러진다. 병원으로 실려간 차리석은 자신이 못 일어나리라는 걸 직감하고 홍매영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젊은 당신한테 큰 짐을 떠안기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미안하오. 해방된 나라로 돌아가면 정부건 국민이건 당신과 어린 영조 하나 정도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죽어도 부디 맘 편히 귀국해 새 삶을 시작하기 바라오.” 나흘 뒤 9월9일 그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그는 충칭에 임시 안장됐다. 백범 김구는 동암의 영전에 “귀국 후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가겠다”라고 약속했다.

1945년 11월 부산항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 차영조는 이제 74세 할아버지가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어머니 홍매영 여사와 어떻게 살아왔을까? 기자와 만난 차영조씨는 품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머니 홍매영 여사가 임정 사무실 앞에서 돌이 갓 지난 그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아버지 차리석과 백범이 지켜보고 있었다.

충칭에서 귀국한 임정 인사들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대우는 한마디로 철저한 무시였다.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뒤 어머니와 차영조가 머문 곳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정부 수립 전이라 백범이 미군정과 협상 끝에 우선 일제 적산가옥이었던 한미호텔을 받아내 귀국한 임정 가족의 임시 거처로 삼았다. “생계 대책이 막막하니 어머니가 한미호텔 1층에 양담배 좌판을 깔고 미군 양담배 장사를 했어. 미군정 경찰 단속이 심했지. 어린 나는 좌판 곁에서 놀다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좌판을 걷어차면 어머니랑 거리를 기어 다니며 흩어진 양담배를 주웠던 일이 아직도 생생해.” 어머니는 수시로 중부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조사받았다.

해방된 조국은 더 이상 아버지가 유언하던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친일파들이 득세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어머니는 어린 차영조에게 “고국에 돌아왔어도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와중에도 백범은 충칭에서 순국한 동암 차리석의 영전에서 한 약속을 앞당겨 이행할 결심을 한다. 이를 위해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했다. “백범이 1948년 5월에 남북 협상하러 평양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자마자 아들 김신에게 ‘중국에 들어가서 석오 이동녕 선생과 동암 차리석 선생 두 분 유해도 모셔오라’고 명하셨지. 1948년 9월 아버지 유해가 이동녕 선생 유해와 함께 돌아왔고, 백범 선생 주도로 사회장 장례식이 거행됐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의금 1만원을 냈더라. 백범은 무직인데 2만원, 친일파 거부 박흥식이 3만원을 냈고.” 당시 아버지 장례식장 연단에 오른 백범은 이렇게 추모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은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19-10

▲ 1945년 9월12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차리석 선생 장례식 사진ⓒ시사IN 이명익

동암을 효창공원에 모신 백범은 1년 뒤인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백범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김구 선생마저 암살당하자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충격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직감했다. “백범이 암살당하고, 의열단 김원봉 선생이 악질 일제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나와 격분해 월북하신 것을 본 어머니는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하셨지. 6·25 전쟁이 나자 피란을 간 부여에서 내 성을 차씨가 아니라 신씨로 바꿔서 학교에 넣으셨어. 차씨의 한자 위아래 획을 하나씩 떼버리면 신씨가 돼.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신영조라고 불러.”

피란지 충남 부여에서 차영조의 삶은 신산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행상을 하다 중풍으로 쓰러졌다. 어린 영조는 학업을 그만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여에서 여관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오일장이 서면 국밥 배달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 왜 독립운동을 하셔서 가족을 이리 고생시키냐고.”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때는 광복 후 17년이나 지난 1962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통성이 약하니까 고심했겠지. 독립유공자를 일부 인정해주기 시작한 거야.” 이때부터 모자에게 정부 지원금이 나왔다.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곧은 성품으로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 홍매영 여사도 어린 영조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남편의 옛 동지를 찾아 나섰다. 외면하는 이도 있었지만, 도움을 주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임정 법무부장을 역임한 최동오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화성의숙 숙장을 맡아 활동했다(이때 김일성은 6개월간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최덕신은 이승만 정권 시절 군에 있다가 박정희 정부 초기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순화동에 있는 외무부 장관 공관을 찾아가 차리석 아들이 왔다고 했더니 안에서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었던 놈이 살아서 나타나다니’라며 기쁘게 반겨주셨어. 이분은 임정 시절에 내가 태어난 사연을 알고 계셨거든. 중풍 걸린 어머니 소식을 듣고는 차비를 두둑이 주시며 곧바로 부여에 내려가 모셔오라고 했어.” 이때부터 차영조는 어머니와 함께 외무부 장관 공관의 부속실에 들어가 생활했다.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뿐 아니라 부인 류미영 여사도 차영조 모자를 챙겨주었다. 우선 차영조를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넣어주었다. 차영조는 낮에는 공관 청소 등을 돕는 한편 저녁에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최덕신 장관은 퇴임해서 사저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모자와 함께했다. 차영조가 2년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 장관은 상업고등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 “그 학교 교장선생님 집이 최 장관 바로 윗집인데, 하루는 교장선생 집을 찾아가 ‘내 아들인데 나이가 좀 많지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며 설득해 중간에 편입시켜주셨어. 그리고 바로 독일 대사로 나가셨지.”

최덕신은 1963년 9월 외무부 장관을 그만둔 뒤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최덕신은 동백림 사건 이후 서독 대사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났고 미국으로 떠났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1986년 자진 월북했다). 최 전 장관이 서독 대사로 간 뒤에도 그의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차영조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전력(한전) 검침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한전 박영준 사장의 부친이 내 아버지와 임정 동지였어. 최덕신 장관 어머니가 얘기를 넣어줘서 박영준 사장을 찾아갔더니 인사부장을 불러 바로 검침원으로 채용해주셨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10년 동안 검침원 생활을 하던 차영조는 추석날 아버지 성묘하러 효창공원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함께 묻힌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 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이석희 부회장은 그의 근황을 묻더니 대우그룹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렇게 대우 가서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나가 10년간 일했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개 어렵게 살고, 나도 어린 시절 어렵게 컸지만 돌아보면 난 아버지 영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한전 검침원도 그 인맥으로 갔고, 대우로 간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었으니까.”

그가 대우에 입사해 중동에 나가 있던 1979년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얼마나 강직하신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가시는 날까지 손수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해결하셨어.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김구 선생의 권유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셨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게 자식으로서 한이야.”

그는 임정 수립 99주년이던 지난 4월13일 효창공원 순국선열 묘역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린 그날 기념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후손과 동행하자고 했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헌화 분양하는 국무총리 뒤에 서 있다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생각했더니 감정이 거대하게 물결치더라고.”

그는 10월1일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는 운동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정에서 국군의 뿌리를 찾지 않으면 일본군이 우리 군의 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육사)의 뿌리가 되어야지. 그래서 이번에 육사에서 신흥무관학교 107주년 기념식을 열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선생 흉상을 세웠어요. 육사 생도대장이 건배사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금년부터 졸업하는 생도는 임정에 뿌리 둔 광복군, 독립군의 후예로 졸업하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지. 육사 생도가 이제부터는 독립군이 뿌리라는 얘기에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k

<2018-11-21> 시사IN
☞기사원문: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 관련기사 

☞시사IN: “내 손으로 안두희를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사IN: 부부의 이름 앞에 민주주의라고 쓴다 

시사IN: 일본 꼼수 막은 한·일 법률가의 승리 

시사IN: 뒤늦은 재심과 무죄 그리고 비운의 가족사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타종식 공연에 ‘친일파’ 조두남 작곡 ‘선구자’ 준비
작사가 윤해영도 친일 행적…연습 중 지적 받고 제외

▲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 1일 오전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 민주종각에서 열린 ‘제99주년 3·1절 기념 민주의 종 타종식’에 참석해 이은방 시의회의장, 장휘국 시교육감, 독립유공자 유족, 시민 등과 함께 타종을 하고 있다./광주광역시 제공

제99주년 3·1절을 맞아 광주시가 진행한 민주의 종 타종행사 기념공연에 ‘친일노래’가 불려질뻔 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습 도중 문제제기를 받고 본 공연에선 제외했으나 행사를 준비한 광주시의 역사의식 부재를 반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광주시에 따르면, 이날 오전 광주시청에서 ‘제99주년 3·1절 기념식’ 후 5·18민주광장에서 민주의 종을 33번 타종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윤장현 시장, 이은방 광주시의회 의장,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후손 등이 참여했다.

“3·1절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시민대통합을 이루자”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가 자칫하면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할뻔 했다.

‘일’은 행사 준비 과정에서 터졌다.

광주나비는 이날 낮 12시 5·18민주광장에서 3·1절 99주년을 기념해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11차 광주 수요시위’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타종식은 이 행사 10분 전인 오전 11시50분 진행이 됐는데, 수요시위 참석을 위해 5·18민주광장을 지나가던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이 기념공연 연습 과정을 보게 됐다.

공연자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김순흥 지부장의 귀를 의심케 했다. ‘친일가요’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가곡 ‘선구자’를 부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 곡은 작사자와 작곡가 모두 친일행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다 노래 자체도 ‘친일가요’로 알려져있다.

작곡가 조두남은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한 ‘만주작곡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선구자’ 노랫말을 쓴 윤해영 역시 논쟁은 있지만 ‘친일작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순흥 지부장은 현장에서 바로 이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10년이 넘도록 (선구자가)친일 음악이라고 지적해 왔는데, 광주시는 그것도 모르고 3·1절이라는 중요한 날에 기념공연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같은 지적에 광주시는 부랴부랴 공연 계획을 수정, 본공연에선 ‘선구자’를 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함’은 남는다.

김순흥 지부장이 현장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타종식에 앞서 ‘선구자’가 3·1절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불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광주시 관계자는 “김순흥 교수님의 지적을 받고 혼란서러워 본 공연에선 ‘선구자’를 빼기로 했다”며 “이 노래 자체는 독립군의 기상을 표현하는 곡으로 알려져있고, 많이 불려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곡가 등의 행적이 특별히 문제가 된다는 것은 몰랐다”며 “공연을 준비한 기획사 쪽에서도 그렇게만 알고 ‘선구자’를 선곡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누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배경까지는 검증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며 “이와 관련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순흥 지부장은 시가 지적에 따라 ‘선구자’를 공연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선 “다행이다”면서도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특히 “‘선구자’는 독립운동가를 상징하는 노래가 아니다”며 “말을 타고 달리는 일본군을 부러워하는 내용이다”고 꼬집었다.

‘선구자’는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라는 시에 곡을 붙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노랫말 중 “말 달리는 선구자”가 만주벌판을 누빈 독립투사를 연상케한다고 해 독립군의 기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 지부장의 지적이다.

김 지부장은 “기획사가 선곡을 했더라도 타종식 자체는 광주시가 주관한 행사가 아니었나? ‘친일음악’이라는 것도 모르고 준비한 것 자체가 문제다”며 “반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경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3-01> 광주드림

☞기사원문: 광주시 3·1절 기념행사서 친일노래 불려질뻔

토, 2018/03/03- 03:05
81
0

【 앵커멘트 】
일제시대에 만든 일본 신사는 국내에 딱 하나 남아 있습니다. 고흥 소록도에 남아있는 것이 그것인데요,
최근 철거와 보존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99번째 3·1절을 맞아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보도에 박승현 기잡니다.

【 기자 】
지난 1935년 건립된
고흥 소록도 내 일본 신사입니다.

당시 일제가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전국 천개 신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신사 존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존치하자는 쪽은 소록도 신사는 이미 원래 기능을 잃었고
일제 침략의 흔적인 만큼
교육자료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인터뷰 :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소록도 신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역사를 극복함으로서 후세에 좋은 교육자료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반면 철거해야 한다는 쪽은
신사는 단순 시설물이 아닌
일제의 정신적 의미가 담겨 있어
역사 청산과 함께 없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 노성태 / 향토 사학자
– “일본 군국주의 정신의 상징터 거든요. 따라서 저희들이 남겨놓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보존이냐 철거냐 논란이 커지고 있는
소록도 신사.

이제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kbc 박승현입니다.

<2018-03-01> KBC광주방송

☞기사원문: 국내 유일 ‘日 신사’ 존폐 논란

토, 2018/03/03- 03:15
47
0

미때미꼬?

민중이지팡이!

글카고

저울사들

칼사들…..동창핸….아나나?

갑장낼보재이,,,,,도미징친구차말로친구

渡美증칭구!

우짜건노 옷사이피고밥사미고잠재구고

 

…..&&&&그마드리  漢다카는데,

 

 

토, 2018/03/03- 21:59
91
0

총무국장 !

심재욱님!

호빵사부야!

삼월 열나흩날 이란다.

물요일?

사대강물은 우리핵고 댕길때처럼,

운재 돌아올란지,

꼴초야!

화면좀보자!

시계방울아!

상판대기 운재 배줄래…

경상고5기의 삼월십사일  사대강물요일이….

월, 2018/03/05- 19:45
164
0

역적 시즌2 #9-2 미당문학상 이야기 (맹문재 시인과 함께)

화, 2018/03/06- 09:33
32
0

MC노&방 팀장&조 작가의 역사를 전하는 수다방!

그 첫번째 에피소드 의열단 두번째 이야기!!

화, 2018/03/06- 09:32
31
0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미투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제 아내가 거의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몇 년전부터 오랜시간 정신과 상담을 받아오던 중이었습니다. 20대 청춘을 여 군으로 삶을 보내다가 전역한 아내입니다.

실제 아내가 보냈던 군 생활은 본인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이 계급사회고 그러다보니 상명하복은 기본인데 그렇게 강한 생활에서 많은 불만들이 있었고 과정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문제가 발생하여 심적인 상처가 깊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심리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심각할 정도로 병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왜그러는지 정말 남편에게도 말못할 일이 있는 건지…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내 입에서 나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정말…원통하고 화가나서 미칠 지경입니다.

군 내부에서 계급사회의 권력구조를 이용한 일상적인 성희롱, 성추행과 성폭력 만연하다는 사실…그리고 제 아내 역시 그러한 상황에 피해자로 노출이 되어있었다는 사실…

20대 젊은 나이를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한몸 바쳐보겠다는 아내의 애국심은 그렇게 군대 안에서의 만연한 성문제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동기들과 어려운 얘기를 나눠봐도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는 상황들…오롯이 지켜만보는 수많은 방관자들 속에서 아내의 삶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고…이런 일들이 결국 아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사실…

개인이 대응해서 해결하기에 너무 큰 군대라는 조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길은 보이지 않고…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MeToo운동이 꼭 군 조직에서도 만들어지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군대 안에서의 미투운동을 응원하며…저희 가족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동참하겠습니다…

<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 군(軍)의 성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군대 안으로 확산될지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계급이 낮은 여군을 상대로 한 상급 지휘자의 성폭력 사건 상당수가 공개되지 않은 채 묻힐 것으로 보고 있다.

6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의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478건이던 군내 내 성범죄 발생 건수는 2014년 649건, 2015년 668건, 2016년에는 871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지난해에도 6월 말 기준 442건으로 전년 수치를 웃돌았다. 군 별로는 육군이 전체 성범죄 발생 건수 3108건 가운데 77%인 2408건을 차지했고, 이어 해군 367건(12%), 공군 232건(7%), 국방부 직할부대 101건(3%)의 순이었다.

지난달 28일에는 군인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 전 육군 사단장(소장)이 상고심에서 징역 6개월로 원심판결이 확정됐고, 영관급 장교인 B 중령은 부서 회식 자리에서 부하 여군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아 보직해임됐다.

하지만 아직도 계급이 높은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3년간 여군 상대 군대 내 성폭력 사건 대부분은 기소유예나 집행유예 등 미온적 처벌만 내려지거나 부적절한 법 조항이 적용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군대 내 성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직권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 6월 말까지 성범죄 가해 군인 189명 가운데 징역형은 9명뿐이었다. 집행유예 22명, 기소유예 16명, 벌금 12명, 혐의 없음 11명, 선고유예 9명, 무죄 3명 등이었고 나머지는 재판 중이거나 가해자 전역으로 일반 검찰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피해 여군의 58%는 부사관이었고 대령 이상 장성급은 한 명도 없었다.

김학용 의원은 “사회 전반적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지만 계급사회인 군 내부에서는 여군이 현직 지휘관을 성범죄로 고발하기는 어려운 시스템”이라며 “피해자를 최대한 보호해주고 군내 성범죄에 대해서는 형벌을 강화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양낙규 기자 [email protected]

화, 2018/03/06- 16:04
46
0

0306-1

화, 2018/03/06- 11:32
23
0

금성정치인들(일부)

이사진을  봄시로

나의 칠팔년과

나의 중딩년…

ㄴㅏ의 초딩…칠공70

홍지팡이와박목탁에게!

가리느까?

가로노까?

퐁로사실을

동시다발적으로

ㅇㅣ바구하는 일부 자매들의

의도성 의문이 간다.

남한전국적으로  파문이 되는것과,    미혼여성미혼남성”””            홀로여성홀로남성”””

물론, 박목탁홍지팡!             …………………………….니도 그런생각이  들더나?

일부여성 즉+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는  겨레여동생은

ㅇㅕ태마리엄따!

나의성고백은 초딩에게.”””

ㅊㅜㄹ산과  남성

출산과 여성

아이와남성

아이와 여성 …….                      $%# 세계여성의날도  이서야 된다면  세계남성의날도 이서야

성사회학  입장에서본  전반적  일부성남성의 위기와 일부 성여성의  인과관계를  우째볼건지,?

“”””분단재벌성장남성여성피해노동자본종속미국일본중국남한북한비정규정규””””””저출산과성문제?

…..거둘절미해서….   (참고사진은 경남민언련)

스타인들과 관계된,

오늘여성들의 일부들도  당시에  왜?   원치않는 성침핼 당했다고,  박목탁들과  홍지팡들에게  이바구  안핸는지…… 필잔또…. 어느곳에 이력서를  넣고,  봄비  오훈…..실장님국장님도    ….엄꼬!

목, 2018/03/08- 06:10
84
0

유권자와독자관객은

봄비다.

성사회학의 남한조국은 또다른  시돌 해야지 않는지,

목, 2018/03/08- 08:03
101
0
팟캐스트 역적의 새로운 파일럿방송 “역전다방; 의열단 3편”
목, 2018/03/08- 09:35
14
0

국가인원위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군 안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솜방망이 처벌이 대부분이니 어떻게 문제 해결이 되겠나. 3년동안 군대안에서 벌어진 성폭력 문제의 가해자는 200명 정도이고 실제 처벌을 받은 사람은 10명이 안되는 상황이다.

대학시절 꽤 오래 만났던 여자친구가 초창기 ROTC 지원을 했다.
당시에 여성 ROTC 지원자에세 많은 혜택도 있었고, 여자친구가 평소에도 유난히 활동적이고 단체생활에서도 리더로 역할을 잘해내는 장점이 있어서 나 역시도 많은 응원을 했었다.

그렇게 군생활도 대학생활도 잘해내던 여자친구가 어느 날부터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평소와는 다르게 밝은 기색은 온데간데없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나에게 어렵게 털어 논 내용은 정말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다.

당시 여자친구의 상관이었던 작자는 회식자리나 식사자리에서 은근슬쩍 스킨쉽을 시도하기를 수차례 진행을 했었고, 나름 우회적으로 거절과 거부의 의사를 밝힌 여자친구의 의사표현을 묵살하며 더러운 짓을 계속하다가 심지어는 군생활을 오래 잘 해내기 위한 훈련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여자친구는 대학시절의 거의 대부분과 장교로 임관을 해서도 그렇고 대한민국 군인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여자친구를 제대로 보살펴줬던 나 역시도 힘든 시간을 보냈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군대라는 조직이 가지는 특성은 성폭력문제가 기생하여 독버섯처럼 퍼지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식 처벌은 우리나라 군대문화를 바꿔내기엔 너무 부족한게 현실이다.

하루빨리 군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수준과 방식으로 가해자들이 처벌받기를 기도해본다.

금, 2018/03/09- 19:41
15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