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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묻는 두 개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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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묻는 두 개의 영화

익명 (미확인) | 화, 2018/11/13- 11:16

 

지난 20여년간 이른바 ‘먼저 온 통일’라고 불리워온 북한출신 주민들이 한국사회에서 겪었던 선행 통일경험은 오늘날 평화체제 이행을 앞둔 한국사회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야반도주하다시피 떠났던 탈북민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16년 통일연구원 탈북민 조사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16.2%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응답하였다.

다큐멘터리영화 ‘북도 남도 아닌’ 탈남하여 유럽으로 간 탈북인들이 본 한국사회에 대해 담담하지만 솔직한 목소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단지 ‘부적응’하거나, ‘선진국 복지를 찾아’, 단순히 ‘차별 때문에’ 대한민국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의 정치적 동원, 공안기관의 지속적인 감시, 탈북자라는 낙인과 배제 등으로 한국사회에 희망이 없기에 떠났다고 말한다. 2017년 현재 한국에서 거주하는 탈북인들 역시 탈북자라는 낙인 그리고 배제로 마치 유리벽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고 심정을 토로한다. 한 탈북청소년이 최중호 감독에게 썼다는 쪽지, “탈북자는 언제까지 탈북자예요?‘라는 질문은 곧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얼마나 정상국가인가’ 라는 질문으로 평화이행기를 앞둔 우리에게 되물어지고 있다.


 

따뜻한 남쪽 나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2016과 2017년에 잇달아 개봉된 두 개의 다큐영화는 탈북민 연구를 십 수년간 해온 나로서는 부끄럽고 놀랍도록 우리 사회 탈북민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잡아낸 영화이다. 뉴스타파 최승호감독의 ‘자백’과 최중호감독의 ‘북도 남도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는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불리워왔던 탈북민들이 경험한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뒷모습과 한국사회의 민낯을 담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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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감독의 ‘자백’ 영화(왼)와 최중호 감독의 ‘북도 남도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오) (사진: 영화 ‘자백’ 포스터 엣나인, 북한인권국제영화제)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국가권력은 야누스와 같은 존재였다. 탈북인들에게 국가는 국내취약계층보다 한단계 높은 수준의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였지만 그것은 절대로 공짜가 아니었다. 입국시에는 6개월까지(현재는 3개월로 줄임) 구금이 허용되는 국정원에서 전쟁포로보다 열악한 ‘간첩 골라내기’ 실험장에 놓여 북한 내부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간첩으로 조작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지난 10여년간 국가권력에 의해 국정원 댓글사건, 반 세월호집회 알바시위 등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를 수행하도록 그들은 동원되었으며, 집단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3개월간 숙박교육을 거쳐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신변보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감시상황에 놓였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 북한을 떠났던 식량난민의 일부가 한국에 입국하면서 국내에 정착하는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주민의 대한민국 입국이 연 1,000명을 넘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2001년부터이다. 그 이후 북한이탈주민 입국자 수는 2008년에 2,914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점점 감소하여 2018년 9월 말 현재 입국자 수는 808명에 불과하다. 향후에도 이 정도의 감소세가 지속된다면 북한이탈주민 입국은 10년 내아니 5년 내로라도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된다. 국내 입국 북한이탈주민의 감소 원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북한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 개선, 김정은정권이 탈북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는 점은 북한주민 입국자 수 감소의 주된 요인이 된다. 그러나, 한국의 척박한 정착여건 역시 북한출신주민 입국자 수 감소의 중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주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불리우면서 이질적인 탈북주민들과 남한주민과 어울려 사는 과정 그 자체가 일종의 ‘통일실험’이자 ‘사람의 통일’이라고 미화되었지만 그들이 겪은 현실은 아름답지도 녹록하지도 않았다. ‘먼저 온 통일’이 대한민국에서 겪은 선행 통일경험은 무엇이며 평화체제 이행을 앞둔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되짚어보자.

 

북도 남도 아닌세상을 찾아 나선 이명준의 후예들

 

김일성수행 기자출신의 엘리트 이수근은 귀순직후 1967년 4월 1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에는 ‘사색의 자유’마저 없다”고 말했다. 북한 탈출직후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다” 라고 말했던 이수근은 다시 한국을 탈출하려다 공항에서 잡혀 위장귀순으로 몰리게 된다. 그는 “남쪽도 틀렸다. 자유도 없고, 독재이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최인훈이 쓴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이수근이 꿈꾸었던 세상은 “북도 남도 아닌” 세상이었다.

그러면, 49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북한을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온 탈북인들이 오늘날 겪는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신예 최중호 감독은 북도 남도 아닌 유럽으로 떠난 오늘날 이명준들이나 이수근들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갓 설흔의 싱싱한 감성으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북도 남도 아닌’에서 비추어주는 탈북민 인권현실은 49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유럽 현지에서 탈남한 탈북인을 만나 가진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민들이 겪었던 삶과 그들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육성으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한국에 5년간 정착했다 영국으로 떠나 살고 있는 새동네지 편집인 최승철 씨 등 한국에 정착했다 해외로 나간 이들과 2018년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 김 씨 등이 지적하는 탈북인의 현실은 다음 네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정치적 동원, 공안기관의 감시, 사회의 낙인과 차별, 분리와 배제, 한성무역 사기피해사건.

 

탈남한 탈북민들은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라고 말하는가?

 

한국을 떠난 탈북민들이 보는 한국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국가권력이 입맛에 따라 탈북민을 동원하는 사회이고 유리벽이라는 차별에 탈북민을 가두어 놓는 사회이고 낙인을 찍어서 감시하는 사회이다. 한성무역 사기피해사건에서 보듯이 국가권력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감시를 하지만 막상 위험에 부딪히면 정작 보호받지 못한다. 모든 탈북민들이 잠재간첩으로 의심받고 때로 간첩으로 조작되며 궁극적으로 간첩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값싸고 충성스럽게: 국가권력이 탈북민을 동원하는 사회

 

유럽에서 망명을 신청한 최승철씨는 한국에서 경험한 국가권력의 관제시위 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탈북자들이 원해서 데모를 하는게 아니고 데모 같은 거 가면 돈 줘요. 보수단체에서 돈 줘요. 거기 가면 뭐 주니? 한국사회가 나쁜 게 뭐냐면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 있어. 관변단체, 국가에서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는 거야. 행사 동원하면 돈 주니까. 대표적인 관변단체, 그 다음에 통진당 반대한다.. 교통비로 2만원씩. 그 다음에 탈북자들 댓글 알바 잘해. 자. 이제부터 무슨 사건 생겼으니까. 부화뇌동으로 탈북자들 희동시켜 놨으니까.

 

이같은 탈북자들의 증언은 그간 jtbc언론보도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아니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반대파를 음해하기 위해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범죄행위에 탈북민들이 연루되거나 시민적인 공감대가 큰 사안을 반대하기 위해 지난 정부에서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사건 등의 반대집회의 경우에는 5개월 동안 39회에 걸쳐 연인원 1,259명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시위동원시 탈북인 1인당 2~3만원의 수당이 제공되었다. 한 탈북인은 하나원에서 나온 직후에 다른 탈북자를 통해 국정원 댓글을 달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받은 돈은 한 달에 5만원이었다. 그들이 동원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사람이라면 고액을 받고서도 꺼려했을 더러운 일들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알고 적은 돈으로 하는 저렴하고 어리숙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가장 근본적이고 무거운 책임은 국가권력에게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리벽에 갇히다: 분리하고 배제하는 한국사회

 

내가 ‘북도 남도 아닌’ 다큐멘터리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등장인물은 한국 거주 7년차의 한 탈북남성이다. 영상은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을 비추고, 그는 자신들이 유리벽에 갇혀 있다고 절규한다. 그는 탈북민이 유리벽에 갇혀있는 현실이야말로 10만명당 OECD 국가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 사람보다 몇 배나 높은 자살율을 초래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탈북자들은 유리벽 속에 살아. 숨 막히게 숨 못 쉬게 유리벽 속에 가둬놨거든. 유리벽이라는 차별에 우리를 유리벽 속에 탈북자들을 가둬 놨거든. 그래서 한 유리창 깨고 나가면 또 유리창이 있어.”

 

그가 말하는 유리벽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안기관의 감시에서 한국사회의 배제 나아가 분단체제까지를 포괄한다.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자살관련 데이터로도 증명되는데 사망자자가 많았던 2015년 상반기에는 사망자 대비 자살률이 한때 15.2%에 달했다(원혜영 의원실, 통일부자료).

 

낙인찍는 사회, 감시하는 국가

 

탈북민들은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동정하거나 얕보거나. 혹은 양쪽 다이다. 영국에 거주하는 최승철씨는 사업실패이후 회의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친구가 “너 여기(한국) 와서 아무리 해봤자 너는 탈북자 아니냐? 거긴 진짜 다르다”는 말에 영국행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 탈북여성도 아무리 한국 사람들을 흉내내고 살아도 자신들이 한국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동조한다.

 

북한사람들은 불쌍해요. 한국에서도 편견이죠. 왜 여기 와서 절망감을 느끼는가. 외형적으로 누가 죽이는 사람 없어. 이 사람들 아무리 한국 사람들을 흉내 내고 살아도. 한국에 오니까 자유스럽잖아요. 그게 다가 아니더라구요.(국내 거주, 40대 탈북여성)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계속 따라붙는 국가 공안기관들의 감시는 그들에게 말 못할 고통이다. 한 탈북민은 어느 정도 보안기간이 끝나면 그 탈북자라는 멍에를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늘 자신의 뒤에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격이라는 것이다. 보안기간은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 많은 탈북민들은 수년은 물론 십년이 넘어도 계속 경찰이나 기무사가 연락하고 체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유럽으로 떠난 한 군인출신의 한 탈북자는 그는 ‘감시’라고 할 정도의 관심을 받아야 했으며 결국 그가 한국을 떠나는 한 이유가 되었다.

 

“근데 그게 다 감시거든. 어디로 이제 가고 하는거 다 보고하라는 거야. 자기는 보호차원에서 그렇게 한데, 말은 그런데 감시차원이지. 그런 것들.”

 

신변보호경찰관은 공식적으로 말하는 보호의 이유는 북한의 테러 등 탈북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상에서 탈북여성은 다음과 같이 신변보호의 본질을 간파한다. ‘감시’이지 보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우리 진짜 살아가면서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되거나 우리 살아가는데서 이 사람들이 도움을 주거나 그런 것은 없어.”

 

 

영화 자백에 나타난 국정원식 정치: 간첩이 필요한 대한민국

 

2017년 12월 박주민 의원실 주최로 열린 합동신문시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법률 개정안 설명회에 참석한 한 탈북민은 ‘국정원 앞의 탈북민은 마치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와 같은 운명이다’ 라고 말했다. 필요에 따라 국가기관이 횟감으로도 매운탕꺼리로도 골라 쓰는 게 탈북자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최승호 감독은 영화 ‘자백’에서 유우성의 여동생 유가려가 합동신문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오빠를 간첩으로 고발하게 되었는지 과정과 심리를 자세히 보여준다. 그녀는 170일동안이나 고립된채 독방에서 수감된 채 합동신문을 거치면서 오빠인 유우성을 간첩이라고 자백하기에 이른다. 간첩이나 위장탈북인을 가려낸다는 명분으로 행하는 이러한 과정에서 탈북인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며 폭력과 감시를 당하게 되며, 심리적으로 수사관에게 순응하고 굴복하며 심지어 감사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탈북자는 언제까지 탈북자인가요? ”

 

“탈북자는 언제까지 탈북자인가요?” 영화감독 최중호는 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의 청소년에게 이같은 질문을 받았다. 대답은 명확하다. 현행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법률에 의하면 북한이탈주민의 지위는 입국후 5년간으로 한정되어 있어 2013년도 입국자부터 2017년까지 입국한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수는 6,731명이다. 탈북자는 5년까지만 탈북자이다. 그러나 법은 국가의 안보라는 현실 앞에 언제나 가볍게 무시된다. 통일부는 탈북민 3만2천명을 호명하여 이들을 별도의 분리된 정착지원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정상국가인가? 나는 이 두 개의 영화가 그려낸 탈북민의 현실에 깊이 공감한다. 이같은 현실은 가장 앞섰다는 탈북민 정착지원정책의 뒤에 숨어 가려졌던 대한민국의 민낯이라고 본다. 분단체제 국가권력이 언제까지 탈북민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일반사회에서 격리하여 별도로 관리할 것인가? 국정원 합동신문 6개월(2018년부터 3개월로 단축), 통일부 하나원 3개월 이어지는 각종 적응교육과 제2 하나원으로 불러들여 행하는 직업훈련 등. 별도의 교육, 별도의 행정체계, 별도의 취업지원체계. 분리는 통합을 역행한다. 새로운 전달체계는 별도의 조직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별도의 분리체계가 과연 누구를 위해 필요한 지도 근본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한의 통일은 단지 두 개의 국가의 통합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체제의 희생자들을 사회로 통합시켜 내는 일이며 남한 내의 통합과 평화에서 시작되어야(김동춘, 2013)”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단체제의 경계인들에게 어느 편인지 더 이상 묻지도 말고 분리하지도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분단체제가 아닌 평화로운 세상. 탈북자라는 이유로 낙인찍거나 배제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감시하지 않으며 간첩으로 만들지도 않는 사회, 노동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회. 평화체제는 일부 주류사회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소수자들을 인정하고 통합하는 포용국가의 건설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한 탈북청소년이 물었던 “탈북자는 언제까지 탈북자인가요? ” 이 질문은 “탈북민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얼마나 정상국가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 사회를 끌어가는 어른들에게 다시 되물어져야 한다. 이 질문은 탈북민을 위해서만 필요한 질문이 아니라 평화체제 이행을 앞둔 시민 모두를 위한 질문이다. 우리 안의 국정원식 정치와 분단체제의 뒤틀린 모습을 청산하고 대한민국이 정상국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에서 꼭 풀어가야 할 질문일 것이다.

 

최승호 감독의 ‘자백(Spy Nation)’. 뉴스타파. (정재홍 극본. 2016. 106분 다큐멘터리)

최중호 감독의 ‘북도 남도 아닌(Why I Left Koreas)’ (최중호 극본. 2017. 90분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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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분단 70년의 시간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자력이 아닌 미·소 연합의 힘으로 일본을 몰아낸 이상 코리아가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분단을 벗어날 수 있었던 아마도 유일한 방도는 전후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형 통합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내전이 격화되면서 코리아와 동아시아는 미소 냉전이 본격화하는 격발지가 되었고, 결국 코리아 남북은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자충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략 1946년에 시작되어 1953년까지 줄기차게 끓어오른 코리아의 적대와 충돌은 이후 70년 남북의 지형을 결정지었다. 이후로도 남북은 적대와 대립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소와 미중의 적대와 대립이 완강했을 때는 그런 이유가 단지 외부의 탓이라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먼저 미중 간 적대와 대립이 해소되었을 때(미중 데탕트와 미중 수교)도, 이어 미소 냉전이 종식되었을 때도, 코리아의 적대와 대립은 해소되지 못했다. ‘코리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주변 강국들의 탓’ 그중 특히 ‘미국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코리아 내부가 적대와 대립을 해소할 확고한 의지와 방법을 세워 내놓지 못했다. 두 코리아가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지도 못하면서 연방과 연합을 주장해보아야 그것이 적대와 대립을 해소할 리 없었다. 오히려 격화시키는 소재로 역용될 수 있었다. 먼저 코리아 남북이 양국체제로 전환하여 전쟁 상태와 분단체제를 끝내야, 남북 상호 간의 의심과 대결의 소지를 없앨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주변 강국들이 코리아의 적대적 대립을 이용하는 판을 바꿔갈 수 있다. 남북 두 국가 간의 연합도 연방도 그때서야 비로소 실제적인 방안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낙중은 70년 강고한 분단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살았고, 그 결과 남북 모두에서 수인(囚人)/호모 사케르의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명준은 어떤가. 남북 모두를 포기하고 중립국행을,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그는 남북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1950~1960년대 지식인들의 심리 상태를 표상한다. 김낙중은 반대의 길을 걸으려 했다. 남북을 모두 포기하는 길이 아닌 남북을 모두 인정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남북 두 나라가 그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버렸다. 그가 선택했던 ‘서로 인정하는 남북’이란 그의 관념 세계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남북의 전쟁 상태, 분단체제 속에서 허여된 자유와 책임이란 상대를 철저히 부정하고 말살하는 전제 위의 자유와 책임이거나 아니면 언제든 체포되어 고문받고 살해될지 모르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갈 자유와 책임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코리아 남북관계에서 가능한 네 가지 이념형(ideal type)적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다. I유형은 남과 북 모두를 인정한다. II유형은 남만을 인정하고 북을 부정한다. IV유형은 북만을 인정하고 남을 부정한다. III유형은 남과 북 모두를 부정하거나 남과 북 모두에 의해 부정된다. 이 유형은 코리아의 적대 상태, 분단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의 입장이다. 이명준은 스스로 남과 북 모두를 포기(부정)하는 유형을 표상하고, 김낙중은 남과 북의 양측에 의해 부정되는 유형을 대표한다. 지금까지 현실로 존재했던 것은 II, III, IV유형뿐이었다.(아래 〈그림 1〉 참조)

이제 지난 70여 년 존재할 수 없었던 I유형이 현실로 다가왔다. 남북이 통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I의 길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의 길이다. II, III, IV의 길은 모두 닫혀 있다. 지난 70년의 역사가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길은 이미 한 번 그 가능성이 열렸던 적이 있다. 1989~1991년 사이 미소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 두 국가가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할 것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던 시기다. 여기서 반보만 더 나갔다면 양국체제의 길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내부에서 I의 길을 열어갈 힘이 아직 부족했다.(종합적인 분석은 1부 1장 참고) 이제 2016~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그 가능성이 다시 한번 열렸다.

김낙중은 양국체제의 가능성이 처음 열리기 시작했던 1980년대 말의 상황 변화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남북의 상호 인정을 통한 통일의 길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1989년에는 통일 민간단체 대표 자격으로 4단계 통일론(평화공존 기초 구축 → 국가연합 → 연방국가 → 통일 민족국가)을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김낙중의 이런 활동에 주목한 북측이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공작원과 고위직 간부를 그에게 보냈고, 김낙중의 ‘원형적 분단초월의식’은 이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거나 기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조작’이라 항변하기도 어렵게 다시금 ‘간첩사건’에 말려들었고, 결국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당시 양국체제의 가능성을 폐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던 냉전대결 세력들에게 역이용되고 말았다.

필자가 특별히 주목했던 것은 이러한 체험 이후 김낙중의 변화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그는 양국체제의 요점을 최초로 분명히 명시하게 되었다. 연합인가 연방인가 문제보다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제 역사적인 문서가 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1989년 김낙중이 제안했던 ‘4단계 통일안’과 아주 가까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제 2000년의 김낙중은 이 두 역사적 문서의 한계를 분명히 제기하고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측의 ‘연합’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안의 공통성을 인정했지만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하였고, 그 이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흔히 칭송되어왔던 유명한 구절인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상호 간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또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비판이 매우 직설적일 뿐 아니라 암묵적으로 남북의 지도자와 지도층, 정책브레인들을 직접 향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통일에 이르려고 한다면 남북 지도자와 지도층의 획기적인 발상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김낙중은 그 요점이 코리아 남북의 두 나라가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1989~1992년 사이, 남측 여야의 지도층 인사들과 그리고 북에서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보낸 고위간부까지를 모두 만나 통일문제에 대해 심도 깊게 토론해보았다. 이 경험 속에서 그는 일단 이론과 언어 차원에서는 남북 양측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낙중의 2000년의 비판을 보면 그가 그동안의 남북 대화 당사자들 간의 논의에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북 대화에 나섰던 남북의 지도자와 지도층이 일면 용기 있게 남북 평화공존의 상황 조성에 나서면서도 바로 이 결정적인 지점을 ‘회피하고 거부해왔다’고까지 쓰고 있다. 통일문제에 관해 남과 북의 통일 정책 핵심인사들과 직접 대화해보지 않고는 쓰기 어려운 직설적인 표현이다.

양국체제란 먼저 코리아 남북 두 국가가 ‘자신의 체제의 자기존립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상대에 대한 신뢰’는 상호 강화적인 미덕이다. 양국체제의 첫 계기였던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는 한국도 조선도 그러한 자신감과 신뢰가 부족했다. 양측이 큰 용기를 내어 양국체제에 접근했지만, 한발 더 내딛어 핵심적 신뢰의 조건을 합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필요조건은 되었으나 충분조건이 아직 채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2016~2017년을 거치면서 그러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비로소 형성됐다. 이 책 앞 장에서 상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핵심은 ‘촛불혁명’과 ‘북핵 완성’ 그리고 ‘북미 대화’의 조합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조선은 자기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신뢰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역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북미 공존의 대화 기조를 앞으로의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쉽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코리아 양국의 ‘자기존립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신뢰’가 강화될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로써 코리아가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 체제전환을 이룰 역사적 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양국체제는 남북 두 국가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식체계요 방법론이며,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중간 경로다. 양국체제가 안정되면 남북의 동포는 그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많은 자유를 얻는다. 우선 현재의 중국과 대만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도의 교류와 통신이 목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조차 단번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고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더디더라도 결코 되돌려지지 않는 단단한 합의의 기초를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양국체제의 기초는 두 나라가 서로의 주권, 영토, 정통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데 있다. 이 삼자를 서로 부정하고 적대해온 지 70년이다. 이를 바꾸어가는 일은 꾸준한 인내와 지속성, 그리고 용기를 아울러 요청한다.

김낙중과 이명준이 경험했던 분단체제에서 남북 두 국가와 사회는 이들 개인의 자유의 대극에 서 있었다. 그들의 자유혼을 유린하고 억압함으로써 자신(체제)의 무제약적 자유를 한껏 과시했던 셈이다. 분단체제의 남북 정권은 서로 자신에로의 동일화를 요구했다. 아울러 그 동일화의 강도만큼 상대에 대한 부정을 강요했다. 분단체제에서 허여되는 자유와 책임이란 그러한 동일화만큼의 자유와 책임이었다. 김낙중과 이명준의 자유와 책임이란 바로 그 동일화를 거부하는 만큼의 자유와 책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양국체제에서의 자유와 책임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인정에 기초한다. 이 속에서 (양국)체제의 자유와 김낙중·이명준의 자유는 상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를 존중하고 대화하면서 공존하려 했던 김낙중·이명준의 자유혼은 비로소 현실의 거처를 찾게 되고, 이로써 국가, 사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서로 발걸음을 맞추어가는 시대로 접근해간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와 체제는 분명 이명준, 김낙중과 같은 자유혼이 꿈꾸었던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에 한 걸음 다가간 곳일 터이고, 그때 비로소 통일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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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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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의회 의원의 입법 활동서면 인터뷰>

연방의회 바이에른 아욱스부르크 지역구 의원 울리케 바르 (Ulrike Bahr, 사회민주당•SPD) 의원실 답변으로 본 독일 연방의회의 입법과 의원의 역할:
상임위원회 법안 검토보고 및 토의과정을 중심으로

작성자: 지역구 보좌관 크라취(Kratzsch)

 <각 교섭단체는 상임위원회별로 주제에 따라 검토보고 의원을 둔다>

 

1. 연방의회의 한 의원이 공약사안 등과 관련하여 야심적인 법안을 발의하고자 하는 것을 상정하였을 때, 이 과정에서 의원, 의원실, 의회공무원 등이 어떠한 역할로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하는가?

답변:

a) 의원의 역할

바르 의원은 ‘가족위원회’(가족/노인/여성/청소년 위원회 약칭) 및 그 산하 ‘시민연대소위원회’ 상임위원이다. 추가로 보건위원회 및 가족위원회 산하 아동소위원회 대리위원이다(해당 상임위 및 소위 상임위원 궐석 시에 대리).

연방의회 의원들은 다양한 상임위 가운데 적절한 위원회에 배정받음으로써 전문정치가가 된다. 각 원내 교섭단체는 한 상임위 내에 전문 주제에 따라 각각 전문 검토보고 위원을 둔다. 바르 의원은 가족위원회에서 “아동‧청소년복지, 시민연대, 취약아동건강” 사안 등에 대한 전문검토 보고자이다.

법안이 연방의회에 발의되는 것과 관련하여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누가 발의자이고 어느 상임위가 주관 상임위인가이다. 그러므로 바르 위원의 경우, 가족부가 주관상임위이고 해당법안이 바르 의원의 전문검토보고 분야에 해당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대부분의 연정교섭단체의 법안은 해당 부처에서 준비되고, 내각(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의회에 발의된다. 이어서 연정 교섭단체는 법안의 변경 여부에 대하여 토의를 한다. 의원발의법안은 사실상 야당의원들이 발의하는 것인데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바르 의원이 찬성한 동성혼인허용법(민법개정)”을 사례로 본 당과 의원의 역할을 보자면)

연방의회가 열리는 매주 사회민주당(SPD)은 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의원총회를 개최한다. 여기에서 연방의회 본회의를 앞두고 논의될 법안과 의결될 법안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진다. 당에는 연방의회의 각 상임위원회 구성에 상응하는 원내 교섭단체 워크그룹(Arbeitsgruppe/AG)이 존재한다. 각 워크그룹 대표는 여기에서 현안의 내용과 각 상임위원회의 토의 및 표결 결과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이 과정에서 예컨대 바르 의원은 관련 상임위원회와 사회민주당 소관 워크그룹의 논증을 비교하여 어느 입장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한다. 당의 표결 권고(당론)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각 의원은 여기에서 자기 당의 모든 의원과 최고위원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할 수 있다. 표 분산을 막기 위해서 당론 구속이 존재하는데, 원내 교섭단체는 의원총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해당 워크그룹 대표를 통해 소속의원들에게 표결권고(당론투표)를 전달한다. 하지만 의원들은 법적으로 이에 구속받지는 않는다.

매 상임위원회 회의가 있기 전에 당의 상임위원들은 소속 당 워크그룹과 만나, 상임위 회의에 대비한 논의를 한다. 검토보고자들은 상임위에서 토의될 사안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며, 여기서 의원들은 특정 사안이나 법안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당 소속 워크그룹이 상임위에서 법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조율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워크그룹이 스스로 이니셔티브를 주도하고자 하면 스스로 법안이나 의안을 작성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연정의 상황에 따라 연정파트너와 조율을 하고 각 교섭단체별 의결을 거쳐 상임위나 본회의에 회부되어야 한다.

검토보고자는 상임위에서 다른 교섭단체에 대하여 자기 교섭단체가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결정하였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예컨대 바르 의원의 검토보고 사안인 경우 바르 의원이 워크그룹 및 다른 동료의원과 원내 교섭단체의 제1 대화창구가 된다. 바르 의원은 검토보고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유관 기관 및 활동가들과 수많은 면담을 진행한다. 물론 비판적 견해도 환영한다. 이로써 자신의 결정이 가능한 현실적이고 정의롭게 내려질 수 있도록 최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바르 의원은 교섭단체 내 워크그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판단과 평가 및 바람직한 수정사항 등을 다른 위원들에게 전달한다.

 

b) 각 의원의 보좌진

보좌진은 바르 의원을 위해 내용적인 작업을 한다. 문의사항에 대하여 리서치를 하고, (전문가) 소견을 청취하고, 간담회 일정을 준비하며 의원을 위한 현안보고서를 작성한다. 특정사안에 있어 불명확성이 존재하는 경우 바르 의원에게 완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보좌진이 활용할 수 있는 거대한 정보원으로서 예컨대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와 연방통계청 등이 있다. 보좌진들은 다른 의원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며 소속 당 보좌진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c) 정당의 전문위원

사회민주당 원내 교섭단체에는 각 상임위에 상응하는 워크그룹에 최소한 1명의 전문위원을 배치하고 있다. 전문위원은 의원들과 보좌진들을 응대하여 법안 제출 및 토의 과정에서 이들을 내용적으로 지원한다. 전문위원들은 워크그룹 대표들과 밀접하게 공조한다. 각 의원실의 업무가 전문위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전문위원들은 다른 원내 교섭단체들, 특히 연정 파트너와의 회합을 주선하여, 법안의 논쟁 부분을 적시에 인지하고, 필요한 경우 의견 조율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주나 지자체 의원 보좌진과의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는 법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 당중심부도 사회민주당 원내 교섭단체와는 별도로 움직인다.

 

d) 연방의회 공무원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의 학술지원직(입법조사관)들은 현안들에 대한 정보를 중립적으로 의원들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의원이나 의원실의 의뢰가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진다.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각 의원실에 달려있다.

상임위원회를 위해 일하는 연방의회 직원들은 조직 관련 사무지원인력으로서 일한다. 이들은 의사규칙의 준수를 살피면서 회의록을 작성한다. 입법과정에는 내용적으로 일체 개입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각 부처의 공무원들은 법안 작업을 하며 법안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들이 부처의 정치적 의지와 지시에 구속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법안 검토의원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한다면, 그것은 의회라 할 수 없다>

 

2. 법안의 발의 및 상임위원회 토의 과정

a) 상임위원회 참석자: 상임위원회 위원

▪상임위 위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대리참석자가 지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리위원이 존재한다. 보좌진이나 입법조사관에 의한 대리는 불가능하다. 회의는 위원회가 선출한 위원장에 의해 진행된다. 위원장은 회의를 가능한 중립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검토보고자는 각 원내교섭단체의 의원이며, 이들이 가장 먼저 법안과 의안에 대하여 발언을 한다.

▪연방의회 상임위원회 직원은 표결‧발언권이 없이 회의에 참석하여 회의진행을 지원하고 회의록을 작성한다.

▪연방정부 장관 및 차관 또는 부처의 대표단은 의원의 질문이 있는 경우 배석한다.

▪공청회 전문가는 해당 전문사안과 관련하여 초빙되어 의원들에게 해당 사안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하고 질의응답을 한 후 해당 사안에 대한 토의가 끝나면 퇴장한다. 공개 공청회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일반적으로 상임위원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연방의회학술서비스(입법지원실) 입법조사관의 경우, 미리 신청 등록을 한 경우 ‘등록된 게스트’로 상임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발언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b) 상임위원회 회의 진행

상임위원장에 의한 개회선언

▪의사일정의 소개

▪간사(일반적으로 워크그룹 대표)들이 회의 시작 전 진행일정에 대해 최종 합의: 당일 토의사항에 대한 연기라든지 표결 진행 등

▪검토보고자의 보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원의 직무이며, 입법조사관(전문위원)이 대신할 수 없다. 상임위 위원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 반드시 대리위원을 지명하여야 한다.

 

c) 상임위 법안 토의 및 의결 과정

법안이 상임위에 도달하면 토의가 시작되는데, 각 원내 교섭단체의 입장을 표명하는 검토보고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법안의 세부사항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며, 이는 연방의회 의사규칙이 정한 순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 모든 수정요청 사항은 위원회 다수결로 확인되어야 한다.

연정 원내 교섭단체들의 검토보고자들은 각 당 워크그룹 대표들과 때로는 부처 대표단과 회합을 갖고 위원회 표결을 준비하기 위하여 자체 검토보고자 회의를 갖는다. 종종 심야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토의과정에서 법안의 세부사항들이 연정 파트너들 사이에 조율되고 확정된다.

법안의 세부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위원회는 이에 대한 표결을 실시하며 본회의의결 권고안을 작성한다. 위원장은 결과를 접수한 후 직권으로 수정안을 본회의에 회부한다.

 

3. 법안발의자로서 본회의 의결과정에서 의원의 역할 여부?

사회민주당은 대연정 파트너이고 대부분의 법안은 각 부처에서 올라오며, 그 법안들의 토대는 연정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 의원의 경우 소관 검토보고자로서의 지위에서 관련 법안에 대하여 코멘트를 하고 평가를 할 수 있다. 사전에 당 워크그룹에서 의견조율을 한 후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수정제안도 할 수 있다.

법안은 본회의에서 3회독을 거치며, 각 원내교섭단체가 본회의에서 법안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역할을 (상임위) 검토보고자인 의원이 담당한다.

<이 글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학모 연구위원이 2018년 9월 독일 연방의회 아욱스부르크 지역구 의원 울리케 바르 의원실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서 독일어 원문을 박학모 연구위원이 옮겼다.>

화, 2020/04/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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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자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 봅니다.

현대철학은 니이체와 프로이트 및 마르크스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니이체는 존재는 생성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폐기하고 생성론을 새로운 존재론으로 제시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에 칸트의 주체철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선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서구의 관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시하면서 물적 토대에 대한 구조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는 토대인 생산양식의 혁명을 주장하였으며(마르크스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객관적인 결정론을 버리고 토대의 모순이 극대화된 임계상황에서 정치적 의식화를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지가 고양되었을때 토대인 자본주의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슬라보이 지젝은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을(대중의 계급의식이 소멸함에 따라 토대의 혁명은 불가능해졌기에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이라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유와 무가 둘이 아니듯 불교의 중도사상과 양자역학 의 중첩성의 원리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하나만의 혁명은 온전한 변혁이 아니기에 결코 그에 따른 희생에 비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마르크스의 혁명이 종국에 실패한 것은 상부구조에 위치한 욕망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상부구조는 토대에 종속된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이분법적인 실체론에 입각한 유물론의 필연적인 결론이라 할 것이므로 욕망의 본성을 반영하지 아니한 새로운 생산양식의로의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토대에 대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즉 상대적 결정론을 주장한 발터 벤야민이나 조르주 루카치의 견해를 계승한 지젝의 상부구조의 혁명론도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결코 절반의 치유책에 불과하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한 대중의 기본적 욕망의 결핍을 대부분 해소하였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욕망의 절대적 결핍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서 자본이 자신의 확장 및 심화를 위하여 생산한 잉여욕망을 마치 본래적인 인간의 욕구인 것처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무한한 잉여욕망을 당연한 본성인 것처럼 추구하다보니 결핍에 따른 계급의식 또는 투쟁의식을 상실하였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못 벗어난 대중이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할 수 있을까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진지전 이론을 개진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통을 옹호하는 전통적 지식인 대신에 유기적 지식인이 전선의 참호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이를 해체하는 진지전을 펼침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국가나 자본을 해체하여 재구성 하자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보다는 깨어있는 유기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를 해체하자는 의미에서의 혁명이론운 제시한 그람시의 이론이 더욱 실현가능성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볼 때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유물적인 심층분석 보다는 특정 정치집단이나 특정 진영의 이데올로기나 포플리즘의 전위로서 정치적 구호에 흡수되어 자신의 변혁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착잡함을 금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진보 또는 보수의 이항대립적 대결구도로 해석하면서 피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할 뿐 결코 한국의 국가재벌독점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온전한 혁명은 상부. 하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언듯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램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온전한 혁명은 이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물론 지식인조차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토대와 상부구조를 변혁할 선구적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지혜와 토대를 변혁할 대중의 결집된 주체의식과 투쟁의지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을 전위에서 창도하고 대안을 설계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토대와 상부구조를 주체적, 자발적인 혁명에 의해서는 불가하므로 결국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슬프지만 어쩔 수없이 추단해봅니다. (그나마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회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사회의 독립성과 자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민운동이 시민단체운동으로 협소하게 왜곡되어버리고 그나마 시민이 아닌 실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그 결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운동을 한 단계 레벨업을 시키기보다는 대부분이 정치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결코 시민운동과 주체는 물론 목적과 작동방식이 다른 정치운동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려 시민운동의 존재의미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기에 이제는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페스트에 의해 중세가 몰락하고, 세계대전에 의해 근대가 몰락한 역사가 반증하고 있듯이 현대 산업화의 모순에 따른 인간사회의 불평등과 지구적 차원의 파괴도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여 이번 코로나 팬더믹 사태가 인간의 생존방식과 생산양식의 변환을 가져올 사건, 즉 알랭 바디우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부재의 진리’를 찾는 노력도 우리에게 그나마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쳐주고 있읍니다만 이 또한 관념적 철학자의 현실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지젝은 불가능에 도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고민해야할 문제점은 현재의 생산양식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해야 할만큼 치명적인 결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복지국가를 통하여 이미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시켜왔기에 다른 보완재로 치유가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기본모순인 계급모순외에 한국만의 독특한 재벌자본주의에 따른 독점모순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불평등 모순 및 기타 부가적 모순인 분단모순 및 지역모순 등을 열거할 수가 있는 바, 과연 그러한 모순들이 한국사회 시스템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불가능한 치명적 상황을 만들었기에 대체재가 필요한 임계상황인지 아니면 재정비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으로 치유가 가능한 상태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으나 어떤 결론이 나던지간에 이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결국 구조적인 접근방식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내놓아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진보정권이라하여도 지금껏 계급과 계층 및 집단을 망라하여 한국사회 모순에 대한 구조적인 진단과 근본적인 치유책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집단을 초월하여 진지한 연구와 성찰과 변혁의지가 부재한 실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안목으로 한국사회를 구조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 자세를 갖춘 열린 대중과 유기적 지식인의 참여와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 2020/06/1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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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한민국 대전환의 시작을 선언했다. 지구촌사회를 휩쓸고 있는 미증유의 바이러스 위기를 벗어나면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까지 잡아보겠다는 야심찬 ‘한국판 뉴딜’ 추진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5년간 국비만 114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투자를 약속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지방비 25조원을 포함하여 어떻게 이 막대한 투자비를 조달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인재 양성계획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판 뉴딜’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노동과 자본, 정당 등 주요이해관계집단의 기대와 요구를 담아냈다. 정부안에서도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환경부, 산업부, 과기부, 행안부, 교육부, 복지부, 중기부, 해수부, 산림청, 고용부 등이 참여하여 정책통합을 시도했다. 기존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 등 3대 축으로 구성된 경제정책 기조아래 ‘사회 안정망 확충’을 바탕에 깔고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림 1> 한국판 뉴딜 3대 정책 및 5년간 투자 총액 160조 원, 예상 일자리 190만개

한국판 뉴딜 정책은 앞으로 5년 동안 국비와 지방비, 민간투자를 포함하여 총사업비 160조원을 투자하여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함으로써 3중복합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추격형 국가에서 추월하는 선도형 국가로 대전환하겠다는 담대한 포부와 정치적 의지의 반영이다.

<그림 2> 한국판 뉴딜 비전과 2+1 정책방향 <출처 : 기획재정부>

<그림 3> 한국판 뉴딜 4+3+2 사업 분야 및 28대 과제 <출처: 기획재정부>

녹색전환 선도국가로 나아가는 길 (1)

민간투자를 포함해 58조2천억 원을 투입하는 디지털 뉴딜은 ①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DNA) 생태계 강화, ② 교육 인프라 디지털 전환, ③ 비대면 산업 육성, ④ 사회간접자본(SOC) 디지털화하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 강화는 ① 고용사회 안전망과 ② 사람투자이다.

그린 뉴딜은 ① 도시·공간·생활 인프라 녹색 전환, ②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 ③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하는 것이다. 이 3개 분야에 아래와 같이 8개 세부 사업을 추진한다.

<그림 4> 그린 뉴딜 3대 분야 및 8대 사업 분야 <출처: 기획재정부>

정부의 담대하고 야심찬 계획 발표에 대해 많은 기대와 희망을 품으면서도 몇 가지 넘어서야 할 지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린 뉴딜이 ‘문재인 대통령식의 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을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은 5대 쟁점들이 모두 풀려나가야 할 것이다.【1】

첫째, 그린 뉴딜의 정의와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린 뉴딜을 단순히 친환경산업에 공공재정을 투입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전략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1930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을 추진했던 것처럼 그동안 정당한 사회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한 노동자계층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노사관계 개혁과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함으로써 미국식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실현하는 사회대개혁을 추진했던 것처럼 한국의 그린 뉴딜도 환경을 적극 고려하면서 경제성장도 도모하는 새로운 녹색경제체제로 대전환하는 사회적 합의, 사회적 협약인가 여부이다. 여전히 그린 딜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되고 있다. 임기 이후까지 5년 동안 막대한 규모의 재정투자를 통해 문제가 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을 언제까지 얼마나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2050 넷 제로(Net Zero)’를 달성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이 환경단체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 대신 이번 발표에는 “탄소 중립을 지향한다”라고만 되어 있어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았다.【2】

한국은 이명박 정권 시기에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고 녹색성장을 추진하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그린 뉴딜정책을 이미 시행했다.【3】 당시 정부는 이 녹색뉴딜 사업의 핵심인 국정과제 최우선순위인 일자리 창출 수치를 내놓았고, 그동안 부처간 중복이 심하고, 산출숫자가 ‘주먹구구’라는 비판과 지적을 의식해 비교적 구체적 계산방법과 함께 사업별 고용 창출 인원을 끝자리 수까지 맞춰 내놨었다. 그러나 이미 계획에서부터 건설단순생산직이 95.8%였다.【4】

<그림 5>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사업 구성도

한 마디로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 사업은 일자리 창출계획이었고 사회간접자본 개발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추진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고, 사회적 동의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효과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그린 뉴딜은 이것들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분명히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

어떤 경우든 녹색 세탁(green washing)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투자재원의 확보와 함께 투자 규모는 적정한가 여부이다. 그린뉴딜 종합계획은 “5년 단기투자 계획 제시에 그쳐 기후위기 대응 중장기 비전이 안 보인다, ‘2050년 넷 제로’ 같은 탈탄소사회 청사진을 못 내놨고, 에너지전환 정책 목표도 없고, “혁신적 계획 수립도 의욕적 재정투자도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5】

한국 경제 규모는 유럽(EU)의 10배라고 볼 수 있다. 유럽 역내 국가들은 그린 뉴딜을 위해 7년간 1,0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규모로 볼 때 100조원 정도는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5년간 42조7천억 원을 투자하는 데 그치고 있다.【6】

둘째, 그린 뉴딜의 대상 영역과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린 뉴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개념정의나 문제의식과 직결된 이 쟁점은 그린 뉴딜이야말로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과 세계경제의 파국적 변화 가능성, 감염병의 세계적 만연과 확산위기라는 점에서 에너지 전환을 비롯한 포괄적 전환에 치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에너지 전환만이 모든 문제 해결수단과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슨 분야나 영역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정책의 우선순위 배정과 비중 부여문제 해결이 매우 중요하다.

<그림 6>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초안

2020년 7월 14일 발표된 한국판 뉴딜정책 내용과 6월 1일 처음 발표된 정책내용의 기조가 사실상 동일, 유사하다. 더 나아가 그린 뉴딜과 관련해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문재인 정부의 그것 역시 동일, 유사하다(그림 3, 4, 5, 6 참조).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놓고 보자면 그동안 관련부처 정책입안자들은 교체, 이동, 보충되었으나 정책내용과 구조는 이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 유사한 틀 안에서 이것저것 꿰어 맞추는 방식으로 채워져 온 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석탄 화력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부에 달려있다. 석탄 화력발전의 조기 폐쇄와 가동 중단, 대체 에너지 개발, 석탄 화력발전 종사자의 전업 훈련교육과 전업, 탈석탄 발전시대의 지역경제 회복과 일자리 영향 최소화 등 보완대책이 병행 개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지속가능한 사회형성, 지속가능성을 보장·확보할 수 있는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한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순환경제를 위한 자원순환정책, 농수산식품정책, 전반적 환경질 제고, 생물종 다양성 보전과 생태계 회복탄력성 유지 등을 포함한 포괄적 정책을 개발, 추진, 이행하고 있다.

셋째, 그린 뉴딜은 정의로운 전환인가? 정의로운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기술의 개발과 도입, 디지털 전환, 생태적 전환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고용기회가 확대될 수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 일자리 축소나 회색 노동자의 소멸로 이어질 기회가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 연소 동력의 자동차 생산은 수많은 부품업체와 협력업체, 완성차 노동자들의 고용 현장이었으나 전기차, 수소차 제조가 주류가 되면 기존 자동차공업 노동자의 대량실직, 해고는 불가피하다. 이 경우 이들 회색 노동자 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재교육 기회 제공, 전직을 통해 노동시장의 동요를 최소화하는 고용의 연착륙 대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포럼은 디지털 그린특구 지정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화력발전이 밀집한 당진과 보령지역에 그린데이터특수, 영덕 삼척 디지털 클린에너지특구, 자동차공업 밀집지역인 울산, 경남에 디지털모빌리티특구, 김해 그린데이터센터특구, 창원 그린리모델링특구 지정을 말한다.

넷째, 그린 뉴딜 추진을 위한 법률과 제도, 조직을 어떻게 입안, 구성, 운영할 것인가?

한 마디로 그린 뉴딜은 기존 방식과 접근으로 추진해 왔던 개별 사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이런 담대하고 통합적인 추진내용을 담아내는 법을 마련하여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지속가능발전법, 에너지법을 폐지하여 일부 통합, 전면 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린 뉴딜 추진, 이행을 위한 협치·공치(거버넌스) 기구로써 기존의 녹색성장위원회, 국가기후환경회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미세먼지대책특별위원회 역시 폐지, 전면 교체, 통합하여 운영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누가 그린 뉴딜 정책 수립과정에 참여하고 주도할 것인가?

말하자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추진하는 그린 딜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는가 여부이다. 디지털 뉴딜이든 그린 뉴딜이든 ‘한국판 뉴딜’은 말 그대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합의여야 한다. 그동안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와 정당 등은 기후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국판 뉴딜을 위한 대전환을 재빠르게 논의해 왔다.

▪2020년 6월 05일 : 228개 전국 모든 기초 지자체, “기후위기 비상선언”

▪6월 30일 : 국회 한정애 의원 등 48인,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 제출

▪7월 02일 : 김성환의원 등 109인, 기후위기비상선언 결의안 제출

▪7월 07일 : 17개 전국 모든 광역 지자체, 탄소중립 선언

▪7월 08일 : 국회 강은미 의원 등 12인,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기후위기대응 및 특별위원회 설치 결의안 제출

▪7월 14일 : 대통령, 한국판 뉴딜 발표. 2050년 탄소 제로 발표 예정되었으나 없음

<출처: 연합뉴스>

이들 뿐만 아니라 경제계와 노동조합, 시민사회와의 협치·공치와 공동행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보 논의와 범사회적 수용성이 검토되어야 한다. 최근 수도권 부동산가 파동을 해결하기 위한 주택공급을 위해 박정희 정권 이래 고수해 온 서울지역 그린벨트 해제 논의나 석탄 화력발전 해외 수출 결정과 같이 그린 뉴딜 시책에 정면 배치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회색정책이 반복된다면 누가 녹색정책의 주류화, 산업정책의 녹색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될 것인지 매우 의심이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만이 앞장서서 한국 뉴딜을 선도하는게 아니라 장관과 차관이 책임지고 이웃부처와의 정책조정과 협의를 통해 정책통합을 우선 실현하고, 확정된 추진과제는 대통령 임기이내, 국가계획 추진일정에 맞추어 지체나 차질이 없이 이행,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 그린 뉴딜 우선순위 정책 효과가 가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어 갈 때 시장과 시민사회의 신뢰가 축적되어 협치가 구현됨으로써 회색국가에서 기후불량국가의 오명을 씻어내며 이산화탄소 등 지구온난화기체 배출이 없는 녹색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1】 윤순진 2020 「그린 뉴딜의 원칙과 방향」. 그린뉴딜 경제위기 기후위기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현장과 정책의 대화. 주최·주관 국회의원 이학영·김성환·안호영·진성준·강은미·윤준병·이해식·한국환경정책연구원·한국환경회의 발표 자료. 2020. 7. 1.

【2】 경향신문 2020.07.15.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7152052005#c2b

【3】 기획재정부 2009.01.23. 보도자료. 국제기구 UNEP의 한국 녹색뉴딜정책에 대한 긍정평가. UN 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은 ‘09.1.9일 보도 자료에서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의 국제적 기조확산을 선도하고 있다고 평가하였음. UNEP Achim Steiner 사무총장의 브리핑 주요 내용 : ㅇ 글로벌 경제위기 대응 및 지구환경 보전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녹색뉴딜(Global Green New Deal) 및 녹색경제 이니셔티브(Green Economy Initiative)가 필요한 시기라고 언급.

ㅇ 청정기술ㆍ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경제침체와 실업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

ㅇ 최근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 정책을 입안ㆍ발표함으로써 국제적 기조확산을 주도.

* UNEP는 ‘10년까지 녹색산업 시장, 공공지출 및 정책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통해 각국의 경제위기 극복 및 녹색경제성장 전략 수립지원 예정.

【4】 아시아경제 2009.01.06. https://www.asiae.co.kr/article/2009010610274672546

【5】 한겨레, 2020.07.14.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53682.html

【6】 세계일보, 2020.07.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484470

목, 2020/07/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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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3차 유행을 예감하면서, 한국 역시 서구와 유사한 상황에 돌입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반면에 서구 사회는 점점 더 명료하게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는 모습이다. 코로나 1차 유행 시에 서구의 ‘기본권’ 개념은 명료했고, 아시아의 ‘파시즘’적이거나 ‘독재’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데에 거리낌 없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제 구미에서 극우세력과 코로나 부정 세력 간에 연대가 커지면서, ‘기본권’ 개념은 점점 더 극우적으로 옹호되는 ‘묻지 마 자유’의 방향으로 오용되고 있다.

이에 <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최근 유럽 언론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단지 코로나19 상황이라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에 그러한 화해가 급조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기에는 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대립이 매우 완강했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구별되지 않는 경향 역시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한병철이 새롭게 주장하듯이 공동체 정신이 자유주의의 전제라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굳이 공동체주의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자유주의를 옹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정의로운 분배의 절차를 제도화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 존 롤스였다.

따라서 코로나19로 구미에서 ‘기본권’이나 ‘자유’와 같은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과도 같은 개념들이 ‘이기주의’나 ‘경제적 생존’과 동일시된다고 해서, 공동체주의자가 갑자기 자유주의를 옹호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수렴이 아니라, 오히려 그도 저도 아닌 제3의 다른 원칙이 필요해진 것은 아닌가? 공동체주의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사회적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추상적 절차에 기초하여 개인들의 권리와 연대를 조절하려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아무리 가는 길이 급해도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최근 한 학술지에 투고했다가 수정 재심 요청을 받아 투고를 철회한 논문에서, 필자는 ‘공동체’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의존성’의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공동체’는 사회 구성원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함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분화해서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가치 갈등’ 및 ‘가치 지배’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반면에 ‘상호의존성’은 가치와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 조건, 즉 서로 돌봄이 필요한 개인들의 취약성이라는 조건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어떤 가치로 어떤 형태의 공동체를 정당화하는가의 경험적 사실과 무관하게, 사회는 모종의 ‘연대’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원칙이다. ‘공동체’는 ‘상호의존성’의 조건에서 출현하지만, 그러한 조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상호의존성’ 관계에 대한 특정 해석방식, 즉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특정 가치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서로 돌보는 연대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아닌 ‘상호의존성’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수렴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상호의존성’ 개념과 관련된다. 즉 자유주의에서는 사회적 연대를 ‘상호의존성’의 결과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들의 자발적 협동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공동체적 상호 돌봄’을 전제로 삼을 수 없으며, ‘합리적인 협동의 형태에 대한 자율적 합의’를 추구한다. 즉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가장 먼저 자유주의의 인간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상호의존성 속에서 사는 개인’으로 개인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주장하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가치의 공유’까지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런 행보는 ‘가치 지배’라는 새로운 위계와 불평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공동체’로 한 발 더 내딛는 행보를 생략하고,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코로나19의 n차 유행을 통해 점점 더 명료해지는 서구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개인을 집합체나 타인과 분리해서 보는 ‘개인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리를 ‘완전한 자율과 독립’으로 고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히려 ‘분리’는 순간순간의 ‘사건’들에 불과할 터인데, 그것을 영구적인 개인의 실체적 속성으로 정의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책임’은 정언명령을 따르는 실천 이성 또는 개인의 합리적 성찰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들이 더 이상 정언명령을 따르거나 합리적일 수 없을 때, 자유주의 사회에서 책임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현재 구미에서 ‘자유’의 개념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극우적으로 오용된다. ‘경제적 생존’ 문제가 실천 이성의 정언명령이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에, 책임 없는 자유가 ‘기본권’의 개념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실천 이성을 장착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앞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시장 논리는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서구 자유주의에 거울이 되어주고 또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 개념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서구 사회를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한다는 절충론적인 접근은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는 ‘가치 동일적 사회=공동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서구 사회는 ‘자유주의적 개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상호의존성’이라는 인간 조건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를 기획하는 것이 두 사회 모두에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목, 2020/12/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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