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의 앞날을 여전히 점치기 힘든 상황이다. 미국은 지난 7월과 8월 500억 달러의 중국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한 이래, 최근에는 중국 하이테크기업인 푸젠진화(福建晋华)에 대해 미국 반도체회사의 경쟁력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출제한 조치를 내렸다. 그전 처음 종싱통신(ZET)을 제제할 때만 해도 나름의 복잡한 형식상의 절차를 밟았지만, 이제는 중국에 대한 ‘기술봉쇄’를 위해서라면 아무 때나 자국기업에 거래중지를 명령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중국의 강경한 태도 역시 변함이 없다. 얼마 전 10월 31일 열린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는 기존 경제정책기조의 유지를 재확인하였다. “안정 속의 발전 추구”(稳中求进), “높은 질량위주 발전의 굳건한 추진”(坚定不移推动高质量发展) 등이 그것이다. 최근 중미 무역전쟁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중국정부의 일관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두 강대국의 싸움은 이제 남의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최근 한국 코스피지수가 연일 폭락하면서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을 실감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0월 한 달 새 종합주가지수가 무려 20% 이상 빠지면서, 근래 들어 최대의 낙폭을 기록하였다. 2000선 방어가 위태로워진 것은 물론이요, 한국경제를 둘러싼 사방팔방의 각종 악재들을 고려 할 때 앞으로 어디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진: KORUS NEWS)
이렇듯 애초 예상과는 달리 진행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사람들도 세기적인 두 초강대국 간의 무역전쟁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특수전쟁’의 끝은 어디이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 갈수록 궁금해지게 된다. 곧 싸움을 끝낼 듯 초기에 승기를 잡고 기세등등해 하던 미국도, 최근 다우지수와 나스닥지수의 폭락사태가 보여주듯 자기가 먼저 걸어 간 싸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사실 이 같은 사태는 일찍부터 예측되었던 바이다. 오늘날의 글로벌경제하에서 세계의 모든 국가는 서로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서 홀로 초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잠깐 필자의 경험담을 꺼내고 싶다. 필자는 금년 여름에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싸움에서 중국이 질 수 없는 이유를 나름대로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 중국경제는 얼마간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경제성장을 이끄는 삼두마차가 모두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우선 미국과의 무역분쟁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외무역과 수출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1~5월 상품수출입은 6,498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지만, 서비스무역 적자가 6,887억 달러에 달함으로써 경상수지적자 폭은 389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수출입 분야의 위축과 함께 심리적인 충격도 켜서 주식시장이 연일 폭락하고 (상해종합지수 3500선→2700선), 환율도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인민폐 절하가 지속되었다.(달러당 6.25위엔→6.7위엔) 또 그동안 ‘신상태(新常态)’ 하에서 경제성장을 이끄는 데 큰 몫을 해왔던 소비 증가폭도 한풀 꺾여 ‘피로’ 현상을 보여주었다. 소비품 소매매출액 증가율은 지난해 동기 대비 금년 5월에는 10.7%에서 8.5%로 다소 내려갔다. 임금인상율 하락, 부동산가격 상승 억제, 주식시장 불황 등 가계소득 향상을 뒷받침 해 줄 만한 요소들이 하나 같이 불안하거나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강도 높은 ‘반부패’ 투쟁의 지속으로 기존에 ‘공금’을 이용한 간부들의 소비향락도 대폭 줄어들었으며, 이 부분도 일정 소비열기를 식히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이러한 경제지표 자체보다도, 이처럼 다소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정부의 ‘구조조정’ 작업이 여전히 그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2015년부터 본격화된 철강·시멘트·아연 등의 과잉생산부문에 대한 구조조정과 기업 ‘부채 줄이기’ 작업이 여전히 꾸준히 진행 중에 있었다. 특히 후자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이었는데,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재무상에 있어 과도한 부채에 대한 ‘채무의 주식 전환(债转股)’ 작업이 활발하였다.
경제의 하방압력이 커지고 대내외적인 불안 요소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중국정부가 이렇다 할 부양정책이나 현재 진행 중인 구조조정 정책을 수정하는 조처를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 중국경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라 보여 진다. 예컨대 예전에는 일단 경기가 위축될 조짐이 나타나면 중국정부는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을 어느 정도 늦추면서 이 부분의 열기를 다시 끌어올리는 정책을 펼쳤던 기억이 난다. 이리하여 지가상승→지방정부의 재정소득 증대→정부투자확대를 통한 일련의 경기진작 사이클의 재가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같은 정책 변화의 조짐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주식시장에서도 당시 3000선을 사수하기 위해 ‘국가대표팀’이 출동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상해주가지수가 2700선까지 힘없이 밀릴 때까지 이에 대한 정부의 인위적인 주가 부양 조짐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중국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일각에선 지난 금융위기 시기인 2009년에 온자바오 정부가 ‘4조 위엔’의 화폐를 쏟았던 부양정책의 후유증을 연관시킨다. 그 때문에 다시 정부가 그러한 인위적인 케인스식 정책을 쉽게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필자의 해석은 좀 다르다. 비록 작금의 중국 경기가 얼마간 어렵고 국내외적인 불확실성도 증가하였지만, 그러나 기존의 정책방향을 수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작금의 어려움은 구조조정을 완수하기 위한 정상적인 진통을 겪는 과정에 불과하며, 이러한 고비를 넘겨야만 (길게 잡아 2~3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각오와 나름의 자신감의 발로라고 보여 진다. 만약 필자의 이러한 판단이 맞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현 무역전의 형세를 다시 바라보아야만 한다. 즉 중국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다는 국내 대다수 언론보도와는 달리, 미국과의 무역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처럼 자기 페이스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국이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 무엇보다도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금번 중미 간 무역전쟁은 결국 ‘무승부’로 끝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같은 형식의 이면에는 내용상으로 중국의 승리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중국이 양보한 것은 별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전력을 비교한다면, 미국이 비록 금융부문에서는 앞서간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단기간에 굴복시킬 수 있을 만큼 중국의 이 방면에 있어서의 수비가 허약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튼튼한 제조업 위주의 경제구조와 아직 덜 개방되고 국가의 강한 통제 하에 놓여 있는 금융시장은 국제 투기자본의 활동을 크게 제약시킨다. 그들은 지금으로써는 주로 해외시장을 통해 간접적이고 ‘심리적’인 방식으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미연준위의 금리인상 전략에도 한계가 있다. 현재의 취약한 미국의 경제성장 기조와 천문학적인 국가부채 규모는, 만약 미연준위가 무리하게 금리인상을 추진할 경우 먼저 미국 자신을 압박하고 쓰러트리게 만들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경제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경제는 올해 3% 성장률을 달성한 뒤 내년에는 곧바로 하락세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이처럼 미국경제의 체질이 많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트럼프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지지층의 분열과 불만으로 인해 이 싸움을 오래 끌고 갈수가 없다. 물론 이 경우 트럼프는 최소한의 체면을 살리려 할 것이며, 중국 역시 적절한 타협과 현상 유지가 목표이기 때문에 트럼프를 막다른 궁지에 몰면서 완벽한 승리를 추구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약간의 위안화절상 (무역전쟁 본격화 이전의 1달러=6.2위엔을 크게 넘지 않는 선)이나, 이전에 합의 했던 중국의 미국산 제품에 대한 구매확대 조치 등을 이행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결국 불똥은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자력만으로는 자국 경쟁력의 완전한 회복과 충분한 일자리 창출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중국이 호락호락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상태에서, 미국이 다른 동맹국들에게 전가하게 될 ‘분담금’은 반대급부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간선거 이후 비록 트럼프정부가 중미 간의 무역전에서 한발 물러선다 할지라도, 특정 분야의 개별 국가를 지목한 무역분쟁은 지속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즉, 미국의 ‘실리 챙기기’ 작업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그 주요 대상국은 대미 흑자국가 중에서도 약소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바로 그 같은 케이스에 속하며, 필자가 중미 무역전쟁의 후폭풍을 계속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저항’을 생각하는 공무원이 지나치게 많게 된다면, 그 또한 작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상명하복과 동종교배식의 조직 분위기만으로 과도하게 충만된 관료사회에서 그 권위와 관행에 ‘저항’하는, “미움 받을 용기”가 있는 공무원들이 존재해야만 조직이 그나마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조직 내에서 ‘왕따’되지 않고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우리 공직사회도 비로소 희망이란 게 존재하고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제까지 공무원 신분으로 국회에 근무하면서 몇 번이나 징계와 면직 위기를 겪어야 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한 기자는 필자에게 “걸어 다니는 징계혐의자”라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필자가 직면했던 대표적인 징계위기는 바로 지금 이 기고문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는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국회 공무원들이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막강한 입법권한을 행사하는 ‘검토보고’ 제도에 위헌 소지가 있으며 따라서 폐지되어야 한다는 기고문을 신문에 발표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국회사무처가 필자에게 뒤집어씌운 혐의는 ‘품위 유지 위반’ 혐의였다. 그러나 정작 ‘품위 유지’를 어긴 것은 오직 그들이라는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 필자는 양승태 전(前)대법원장이 추진했던 상고법원 추진법안에 국민들이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미 과반수 이상의 의원들이 서명한 사실을 비판하고 상고법원은 절대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기고문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다시 징계위기에 몰렸다. 당시 국회 법사위 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필자를 징계하기로 했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훗날 풍문으로 들었다(그런데 이 기고문을 계기로 필자는 대한변협의 ‘상고법원반대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침내 상고법원을 저지시키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보수정당 출신의 어느 국회의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기고를 포함한 필자의 활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아랫것’의 ‘하극상’에 못마땅해 한 것이리라. 봉건성과 비민주성의 뿌리가 깊다. 한편 국회사무처의 한 고위간부는 언론사에 메일을 보내 필자를 비방하면서 필자의 기고문을 실어주지 말 것을 종용하기도 했고,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학술대회는 발표를 불과 며칠 앞두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필자의 발표만 돌연 취소되기도 했다.
국가가 요구하지 않지만,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자
필자는 조직 내에서 이른바 ‘왕따’가 되어 시대를 앞선 ‘혼밥족’으로 산지 몇 년이 계속되었고, 또 필자가 조직 내 ‘왕따’로 지내는 사이에 나이가 상당히 어린 한 직원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듣는 수모까지 당했다. 하지만 결코 이를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심성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사실상 면직의 위기였던 두 차례의 징계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서면경고’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발단은 무슨 비판을 하고 기고문을 발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공포(公布)’라는 법률 개념을 둘러싼 학술 차원의 논의로 인한 것이었다.
사실 필자의 이 문제 제기는 최소한 입법을 주 업무로 하는 국회로서는 법률적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로잡은 것으로서 상을 받아야 마땅한 문제였다. 하지만 필자는 관련 개념의 정확한 규정을 요구했다고 하여 결국 기관으로부터 징계까지 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기관장으로부터 공식석상에서 “×××”라는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다. “정신병자”로 지칭되기도 했다(이 문제를 국가인권위에 진정했지만, 국회는 자신들 소관 밖이라며 접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국회의 다른 문제를 국민국익위에 제기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국회는 소관업무 외라는 회신만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하여 국회 조직은 ‘그들만의 리그’, ‘성역’으로 영역화한다).
또 그 ‘서면경고장’을 준 총무과 계장은 필자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훈계’까지 하였다. 나아가 이 징계의 부당성을 바로잡고자 요청해 열린 고충처리 소청조차도 “근무한지 몇 년이나 됐느냐?” 등 조롱 섞인 언사만 들어야 하는 채 기각되었다. 이 소청에서 필자는 중요한 증인이기도 한, 진보진영 출신으로서 훗날 국회의원까지 된 한 당료의 증언을 요청했지만, 그는 귀찮은 탓인지 아니면 문제의식이 결여된 때문인지 출석을 거부했다. 무릇 정치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배려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가장 큰 덕목일 터다. 불행하게도 타인의 아픔에 대해 이렇듯 무관심하고 경시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정치인들의 근본적인 폐단이리라.
내게 서면경고를 ‘부여’한 기관 측은 서면경고가 징계도 아니고 아무런 효력도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징계도 아닌 것”을 그토록 한사코 ‘부여’하고자 했을까? 필자가 서면경고를 받은 바로 그 날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 직원들이 복도에서 지나치면서도 아는 체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그 날로부터 완전히 ‘왕따’가 되었고, ‘혼밥족’이 되어야 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것은 ‘주홍글씨’로서 곧 조직 내 ‘왕따’의 분명한 신호라는 점이었다.
언젠가 이 ‘법률 문제’에 대해 내가 발표를 하고 기관에서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여 학술토론회를 연 적이 있었다. 당시 토론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할 때 한 법대 교수가 내 직함인 ‘해외자료조사관’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석했던 과장은 “번역하는 사람이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건 예를 들어 방호과 직원을 앞에 두고 “문지기”라고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소한 ‘조사관’이란 명칭그대로 조사를 담당한다고 하면 될 일을 굳이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예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격 모독, 인권 유린이기도 했다. 나아가 “번역하는 사람”이 발표하는 자리에 토론하러 참석한 교수들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 과장은 이후 사과하라는 내 요구도 들은 척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과장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공무원으로 된 후 기관에서 개혁적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것을 보거나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징계를 받던 당시 나는 갈릴레오처럼 탄식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모두가 막무가내 1+1=3이라 강변하면서 1+1=2라는 나의 정답을 처벌하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부연해야 할 특징적인 사실은 필자에 대한 징계 사안이 묘하게도 모두 교수 출신의 기관장 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여당이 파견한 인물이든 야당이 파견한 인물이든, 또 그들이 입으로 진보를 내세우는가 보수를 내세우는가와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필자는 결코 그러한 비정상적인 압박이나 상황에 굴복하여 무릎 꿇고 살 수 없었다. 필자는 매일같이 어둠 속 새벽 출근길에 국회 정문을 들어서면서 다짐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저항’하고 ‘투쟁’하자. 그리고 ‘연구’하자.” 그러면서 감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국가가 요구하지 않지만, 오늘도 국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전심전력, 실천하고자 하였다.
모든 분야에서 비판자, 실천자가 나와야 하고,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2019년 11월, 필자는 청천벽력과 같은 아내의 췌장암 4기 확진으로 근무가 불가능해졌고 끝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과의 과장이라는 사람은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이나 문자도 없었다. 알고 지내던 한 국회사무처 고위 간부는 필자의 후임 채용에 자기 아는 사람을 도와준다며 정말 너무 경황이 없는 필자에 전화해 일언반구의 위로도 없이 필자가 수행했던 업무 내용 좀 보내줄 수 있냐는 어이없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또 내가 가슴이 무너지는 사연으로 직장을 떠났건만 국회도서관 노조 게시판에는 필자 후임 채용을 언급하면서 필자를 “문제아”라고 표현해 ‘조롱’과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아이러니하게도 이 노조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화목이 가득한 직장”이다). 물론 필자를 응원해준 국회 직원들도 적지 않게 있지만, 참으로 몰인성화(沒人性化)된 조직의 성격이 그대로 투영된, 어이없게도 슬프고 이기적이며 비인간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1760년대의 이탈리아의 계몽사상가 베카리아는 사람들이 분석적 탐구보다는 진부한 인상에 좌우되기 때문에 “생명과 자유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에서도 수많은 오판을 겪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지쳐 인내의 한도에 이른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괴롭혀온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은 가장 자명한 진리를 향해 열린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이제 진리를 향해 눈을 떠야 할 때이다.
민주주의란 결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비판자 그리고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정확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정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한 힘의 총화로써 우리 사회가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그리고 희망은 멀리 ‘추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곳에 ‘구체’로 존재한다.
모름지기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실천되어야 한다. 입으로 진보를 주창하는 인사일수록 정작 그 일터에서 진보의 가치를 실천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다. 공적 가치와 사적 이익 추구의 주관적 등치가 빈발한다. 자기의 삶터와 일터라는 가까운 곳에서는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침묵하고 방관, 동조하면서 오로지 멀리 ‘열매’와 ‘자리’만 추구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의 모순과 혼돈이 초래된 것이리라.
현대철학은 니이체와 프로이트 및 마르크스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니이체는 존재는 생성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폐기하고 생성론을 새로운 존재론으로 제시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에 칸트의 주체철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선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서구의 관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시하면서 물적 토대에 대한 구조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는 토대인 생산양식의 혁명을 주장하였으며(마르크스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객관적인 결정론을 버리고 토대의 모순이 극대화된 임계상황에서 정치적 의식화를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지가 고양되었을때 토대인 자본주의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슬라보이 지젝은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을(대중의 계급의식이 소멸함에 따라 토대의 혁명은 불가능해졌기에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이라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유와 무가 둘이 아니듯 불교의 중도사상과 양자역학 의 중첩성의 원리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하나만의 혁명은 온전한 변혁이 아니기에 결코 그에 따른 희생에 비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마르크스의 혁명이 종국에 실패한 것은 상부구조에 위치한 욕망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상부구조는 토대에 종속된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이분법적인 실체론에 입각한 유물론의 필연적인 결론이라 할 것이므로 욕망의 본성을 반영하지 아니한 새로운 생산양식의로의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토대에 대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즉 상대적 결정론을 주장한 발터 벤야민이나 조르주 루카치의 견해를 계승한 지젝의 상부구조의 혁명론도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결코 절반의 치유책에 불과하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한 대중의 기본적 욕망의 결핍을 대부분 해소하였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욕망의 절대적 결핍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서 자본이 자신의 확장 및 심화를 위하여 생산한 잉여욕망을 마치 본래적인 인간의 욕구인 것처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무한한 잉여욕망을 당연한 본성인 것처럼 추구하다보니 결핍에 따른 계급의식 또는 투쟁의식을 상실하였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못 벗어난 대중이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할 수 있을까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진지전 이론을 개진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통을 옹호하는 전통적 지식인 대신에 유기적 지식인이 전선의 참호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이를 해체하는 진지전을 펼침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국가나 자본을 해체하여 재구성 하자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보다는 깨어있는 유기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를 해체하자는 의미에서의 혁명이론운 제시한 그람시의 이론이 더욱 실현가능성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볼 때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유물적인 심층분석 보다는 특정 정치집단이나 특정 진영의 이데올로기나 포플리즘의 전위로서 정치적 구호에 흡수되어 자신의 변혁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착잡함을 금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진보 또는 보수의 이항대립적 대결구도로 해석하면서 피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할 뿐 결코 한국의 국가재벌독점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온전한 혁명은 상부. 하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언듯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램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온전한 혁명은 이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물론 지식인조차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토대와 상부구조를 변혁할 선구적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지혜와 토대를 변혁할 대중의 결집된 주체의식과 투쟁의지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을 전위에서 창도하고 대안을 설계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토대와 상부구조를 주체적, 자발적인 혁명에 의해서는 불가하므로 결국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슬프지만 어쩔 수없이 추단해봅니다. (그나마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회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사회의 독립성과 자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민운동이 시민단체운동으로 협소하게 왜곡되어버리고 그나마 시민이 아닌 실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그 결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운동을 한 단계 레벨업을 시키기보다는 대부분이 정치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결코 시민운동과 주체는 물론 목적과 작동방식이 다른 정치운동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려 시민운동의 존재의미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기에 이제는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페스트에 의해 중세가 몰락하고, 세계대전에 의해 근대가 몰락한 역사가 반증하고 있듯이 현대 산업화의 모순에 따른 인간사회의 불평등과 지구적 차원의 파괴도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여 이번 코로나 팬더믹 사태가 인간의 생존방식과 생산양식의 변환을 가져올 사건, 즉 알랭 바디우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부재의 진리’를 찾는 노력도 우리에게 그나마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쳐주고 있읍니다만 이 또한 관념적 철학자의 현실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지젝은 불가능에 도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고민해야할 문제점은 현재의 생산양식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해야 할만큼 치명적인 결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복지국가를 통하여 이미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시켜왔기에 다른 보완재로 치유가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기본모순인 계급모순외에 한국만의 독특한 재벌자본주의에 따른 독점모순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불평등 모순 및 기타 부가적 모순인 분단모순 및 지역모순 등을 열거할 수가 있는 바, 과연 그러한 모순들이 한국사회 시스템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불가능한 치명적 상황을 만들었기에 대체재가 필요한 임계상황인지 아니면 재정비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으로 치유가 가능한 상태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으나 어떤 결론이 나던지간에 이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결국 구조적인 접근방식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내놓아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진보정권이라하여도 지금껏 계급과 계층 및 집단을 망라하여 한국사회 모순에 대한 구조적인 진단과 근본적인 치유책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집단을 초월하여 진지한 연구와 성찰과 변혁의지가 부재한 실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안목으로 한국사회를 구조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 자세를 갖춘 열린 대중과 유기적 지식인의 참여와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모펀드가 지나간 곳엔 시체가 즐비하다. 흔히 사모펀드를 기업사냥꾼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모펀드는 기업사냥꾼이라 불리는 것도 모자라 사냥한 후에는 기업을 완전히 시체로 만들어 버리고 장사를 지낸다. 그래서 나는 사모펀드를 ‘기업장의사’라 부른다. 사모펀드가 어떤 식으로 기업의 흡혈귀와 장의사 노릇을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미국의 예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예다. 경상북도 영덕으로 가보자.
사모펀드가 기업장의사임을 즉시적으로 보여주는 뉴욕타임스 기사. “어떻게 사모펀드가 신발소매업 체인점 페이리스(Payless)를 장사 지냈는가”란 기사 제목이다.
경북 영덕주민들 두 번 울린 사모펀드
경상북도 영덕에 가면 영덕풍력발전단지가 있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뒤에 지역주민들의 분노와 눈물이 있다. 이 풍력발전공사를 외국계 사모펀드 회사가 이른바 “먹튀”(먹고 튄다는 속어)를 했기 때문이다. 호주계 사모펀드 맥쿼리PE가 영덕풍력발전공사를 인수한 것은 2011년, 200억 원을 들여 유니슨 등으로부터 매입했다. 그리고 2019년 삼천리그룹의 삼탄에 매각했다. 7년간 맥쿼리가 소유주로 있는 동안 올린 수익은 630억 원. 그러나 현재 회사는 자본잠식상태다. 깡통회사란 뜻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018년 한 해만 보더라도 영덕풍력발전은 한 해 동안 약 81억 원의 매출에 영업이익은 약 19억3천만 원을 올렸다. 하지만 이자비용으로 45억 원을 지출해야 했다. 이렇게 7년간 맥쿼리에 이자비용(전환사채 차입에 대한)으로 지출한 것이 총 319억 원이다. 결국 모든 것을 계상하면 결손금 117억 원이 자본총액 40억 원을 초과해서 자본잠식 상태에 놓인 것이다. 빚밖에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멕쿼리는 2013년 영덕 근처의 영양풍력발전공사까지 인수했다가 작년 영덕풍력발전까지 한데 묶어 삼탄에 1천9백억 원을 주고 매각했다. 이로써 수백억 원의 매각 수익에 이자, 거기에 7년 동안 올린 수익을 쏙 빼먹고 튄 것이다. 영덕군이 올린 수입은 부지 대부료로 매년 331만 원 받은 것이 전부. 각종 기반시설 지원 등에 군민 혈세가 들어간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지역 경제 활성화라며 기대한 일자리는 고작 7명이다.
그럼 이게 다일까?
새 인수자 삼탄 역시 사모펀드와 은행을 끼고 영덕 및 영양풍력발전공사를 차입매수 했다. 각각 192억 원과 854억 원을 30년간 대출로 연리 12%의 이자를 내도록 했다. 해서 영덕과 영양풍력발전공사는 연간 각각 23억 원, 102억 원의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익을 내봤자 아무 소용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계속될 것이다. 영업을 할수록 손해만 쌓인다. 더 못 버티고 곧 문을 닫을 것이다.(『영남경제』, 2019. 9. 5; 2019, 9. 6; 2019, 9. 18).
기업흡혈귀와 장의사 사모펀드의 기업 고사 방식
다른 나라(미국) 이야기를 먼저 하면 관심이 덜 할 것 같아서 우리나라의 사례를 먼저 들었다. 그렇다면 사모펀드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것을 보면 사모펀드가 왜 기업장의사와 기업흡혈귀란 명칭이 어울리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사모펀드는 경영상태가 안 좋은 회사를 좋게 만들겠다는 명분을 들고 회사를 싼 값에 매입하거나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경영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을 한다. 이 뒤에 따라오는 명분들은 수익을 내는 튼실한 회사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 하겠다는 것이다. 매입 대상 업체는 둘 중 하나다. 상장사의 주식을 대거 매입해 상장을 폐지해 나중에 재상장해 매각 수익을 얻거나, 비상장사를 사서 상장사와 합병하는 우회상장을 통해 가치를 높여 매각해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공통된 것은 사정이 어려운 회사가 사냥의 대상이다.
둘째, 그러나 그 명분은 말만 그럴 뿐, 회사의 구성원이나 회사 자체를 위하지 않고 오로지 주주나 소유주의 이익 실현을 위해서 무지막지한 구조조정 등을 강행한다. 그렇게 해서 장부상으론 이전 보다 괜찮은 회사로 거듭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매각해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 즉 회사의 정상화나 건실화 등이 목표가 아니고 오로지 산 것 보다는 비싼 값에 매각하는 것이 사모펀드의 목표다.
셋째, 회사를 매입할 때 절대로 자기의 돈으로만 하지 않는다. 남의 돈을 빌려 매수한다. 즉 차입매수(leverage buyouts)를 한다. 그 빚과 이자는 고스란히 회사에 떠넘긴다. 그러나 알맹이(수익)는 철저히 주주들과 소유주의 몫이다. 그러면 회사엔 뭐가 남는가. 계속해서 손실만 쌓이고 고사하는 것밖엔 다른 방도가 없다. 사정이 안 좋은 회사에 도움은커녕 설상가상으로 빨대를 꽂은 격이다.
넷째, 이렇게 부채더미를 쌓고 있는 회사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사모펀드는 이런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어떤 짓을 하는가? 부채에 대한 파생금융상품인 “대출채권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loan obligations, 이하 CLO)을 발행한다. 부채를 담보로 해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 또 한 번 재미를 보는 것이다. 노리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험분산, 나머지 하나는 수수료로 인한 수익창출이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장사를 하다가 실제로 위험이 닥쳐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가 그 위험을 떠안아 주니까. 구제금융으로. 이들이 그 때 내세우는 명분은 대마불사다. 자신들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렇게 노나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잘 나갈 땐 그 열매를 온전히 자신들의 몫으로, 위기가 닥쳐 망할 땐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혈세로 대신 메워준다.
코로나19가 악성 회사채를 가지고 무모한 노름을 하고 있는 월가(사모펀드)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고 기사를 낸 뉴요커
CLO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온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 월가에서 써먹던 “부채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CDO)의 사촌 격으로 작동 원리는 똑 같다. CDO는 대형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업체로부터 받은 불량채권에 대한 위험을 분산하고 동시에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써먹었던 일종의 대출에 대한 보험 상품으로 우량과 불량대출을 섞어서 위험이 없는 것처럼 살짝 분칠해 파는 것이다.(김광기, 『정신차려 대한민국』, 2012). 본질 면에서 CDO와 똑같은 CLO는 대형금융회사나 사모펀드 자체가 발행, 관리 및 판매한다. 그렇게 거짓되게 위험을 분산한 것처럼 보이게 한 후 투자자를 모아 수수료까지 챙긴다. 그러나 위험은 인위적으로 희석되어 가려졌을 뿐 여전히 상존하고 있으며, 위기가 오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면 사모펀드는 망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이 들고 나올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대마불사론이다. 2008년 월가가 써먹던 수법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이게 바로 금융주도자본주의(finance-driven capitalism)의 실상이다.
잉글랜드은행 전 총재 마크 카니의 경고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전 총재 마크 카니(Mark Carney)는 2019년 1월 영국 하원에 나와 전 세계적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회사부채(corporate debt)의 폭증에 대해 경고했다. 당시는 코로나 때도 아니고 트럼프가 “나(미국)홀로 잘나가!”하면서 경제의 호황을 자랑하던 때다. 카니는 파행적인 회사부채 시장을 2008년 금융위기 때에 견주어 경고했다. 회사부채 시장에서의 이른바 “약식대출”(covenant lite loans: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확인하는 절차(검사)를 생략한 채 이루어지는 대출)의 만연이 “서브프라임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채권인수’(no doc underwriting)라는 의미에서 그 때와 동일선상에 있다”고 증언했다. 2019년 1월 현재 차입대출의 85%가 약식대출이다(Bank of England, Financial Stability Report, Issue No. 44, November 2018; “Leveraged loans at pre-crisis levels — and I’m worried, says Carney,” The Times, Jan. 17, 2019; “The risky ‘leveraged loan’ market just sunk to a whole new low,” Business Insider, Feb. 17, 2019).
급증하는 회사채와 레버리지대출을 2008년 금융위기에 견주어 경고하고 있는 잉글랜드은행 전 총재 마크 커니 <출처: 타임스/로이터스>
그런데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영국은행 총재의 저런 경고는 개 코로도 듣지 않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수십 년 전에는 소위 잘나가는 회사라면 높은 신용등급과 과도한 부채의 회피가 그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것은 완전히 구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돈 놓고 돈 먹는 금융주도자본주의에 편승한 뒤로는 사모펀드가 이것을 선도했다. 인수와 자사주매입을 위해 많은 대출이 이루어졌고 차입매수가 성행했다. 미국 연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4분기부터 2019년 4분기까지 비금융권기업의 회사부채는 총 6조1천억 달러(7,527조 원)에서 10조1천억 달러(1경2,463조 원)로 증가했다.
회사부채는 채권발행으로도 조달되었지만 위에서 말한 새로운 형태의 이른바 “레버리지대출”(leveraged loans)의 확산으로도 이루어졌다. S&P글로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에까지 대출해준 협조융자(syndicated loan: 둘 이상의 은행이 공통의 조건으로 기업에 자금을 융자해주는 대출) 총액은 5,540억 달러(684조 원)에서 1조2천억 달러(1,481조 원)로 급증한다. 이런 레버리지대출은 앞에서 언급한 CLO를 창출하는데 사용되었다. 2019년 말까지 7천억 달러(864조 원) 상당의 CLO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빚을 놓고 그것에 대한 금융상품이 투자 상품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위험천만한 돈 놓고 돈 먹는 돈 놀이가 지금 월가에서 사모펀드 주도하에 가진 자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The Coronavirus Is Exposing Wall Street’s Reckless Gamble on Bad Debt,” New Yorker, May 24, 2020). 문제는 그런 돈 놀이에 말려든 기업들과 거기에 속한 종업들이 말라 죽어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백화점의 서거: 니만마커스와 JC페니
5월 초 미국의 유명 백화점체인 두 개회사가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니만마커스와 JC페니다.(“Neiman Marcus and the demise of the US department store,” Financial Times, May 8, 2020; “J.C. Penney, 118-Year-Old Department Store, Files for Bankruptcy,” New York Times, May 15, 2020). 두 회사는 모두 미국 백화점 업계의 대명사이다. 니만마커스는 최고급백화점이고, JC페니는 서민들을 위한 백화점이다. 두 회사의 역사는 각각 113년, 118년으로 둘 다 유서 깊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매체들은 코로나 사태와 디지털시대에 맞는 변신에 실패를 파산신청의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 내가 보는 견해는 다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이유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코로나사태가 백화점에 직격탄으로 작용한 것은 도표에서 보듯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 이들 백화점이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기저질환이 도사리고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는 주식과 부동산 빼고는 나아진 게 없었다. 그 대표적 예가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쇼핑몰들의 폐쇄다. “쇼핑몰의 서거 경제학과 향수”라는 제목의 2015년 뉴욕타임스 기사
그 기저질환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008년 이후 미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하지만 증시와 부동산시장만 호황이었을 뿐 나머지 부문에서는 오히려 나아진 것이 없었다. 백화점의 서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백화점과 단독 점포가 들어선 대규모 쇼핑몰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전역에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쇼핑몰은 미국인들에겐 애틋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딱히 재미라고는 달리 찾을 수 없는 건조한 미국식 삶 속에서 그나마 쇼핑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고 놀기도 하는 곳이 쇼핑몰이기 때문이다. 하교 후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친목을 도모하던 곳 중 하나도 쇼핑몰이다. 그런 곳이 문을 닫으니 뉴욕타임스 같은 곳은 쇼핑몰의 서거가 향수를 불러온다고 제목을 달아 기사화를 했던 것이다.(“The Economics (and Nostalgia) of Dead Malls,” New York Times, Jan. 3, 2015). 그런 기사가 났던 것이 2015년이다. 그리곤 마침내 이제 백화점의 종언까지 고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는 이미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있던 백화점의 발에 살짝 걸린 돌부리와 같다. 다시 말해, 코로나가 미국 백화점 사망의 주효한 원인은 아니다. 이미 코로나 이전에 심각한 기저질환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니만마커스와 JC페니 등이 파산보호신청을 하자 백화점의 서거를 알리는 2020년 4월 뉴욕타임스
기업장의사 사모펀드에 의해 이미 고사 중이던 업계
나머지 기저질환은 사모펀드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파산신청의 주된 원인은 사모펀드다. 이것들의 농단으로 백화점들이 완전히 작살났다. 바야흐로 디지털시대에 온라인 쇼핑으로 노선을 바꾸고 재기할 자구노력과 자생력조차 사모펀드는 완전히 압살했다. 수익이 나는 족족 배당금과 이자로 현금을 다 빼갔으니 그렇다. 어떻게? 맨 처음 우리나라 영덕풍력발전공사의 경우에서와 같이 말이다.
대표적으로 백화점 업계의 귀공자 니만마커스가 어떻게 엄청난 빚만 짊어진 채 빈껍데기만 남은 회사가 되었는지 보자. 현재 니만마커스의 부채는 50억 달러(약 6조2천억 원)이다. 심각한 수준이다. 2005년 사모펀드 TPG와 워버그핀커스(Warburg Pincus)는 51억 달러(약 6조 3천억 원)로 니만마커스를 차입매수 한다. 그리곤 2013년 사모펀드 아레스매니지먼트(Ares Management)와 캐나다연기금운용회사(CPPIB)에 60억 달러(약 7조 4천억 원)를 주고 매각한다. 이들 회사는 니만마커스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2015년 기업공개(IPO)를 시도하려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니만마커스는 지난 2년 동안 50억 달러의 부채를 조정해 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자는 수억 달러가 지출되었다. 2018년 마지막 회계보고엔 49억 달러(약 6조5백억 원)의 수익이 있었다. 그러고도 빚이 50억 달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은 매해 나는 수익이 한 푼도 안 남기고 거의 다 주주들의 배당과 이자 지불로 빠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디스는 니만마커스의 부채를 두고 “지탱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The Pandemic Helped Topple Two Retailers. So Did Private Equity,” New York Times, May 14, 2020;“J.C. Penney, 118-Year-Old Department Store, Files for Bankruptcy,” New York Times, May 15, 2020). 이런 판에 온라인쇼핑으로 전환하려는 자구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도 돈이 들어가는 일종의 투자인데 말이다. 거기에 들어갈 돈들이 주주들과 소유주에게 배당금과 이자로 다 홀랑 가버리는데….
사모펀드가 손 댄 소매업체마다 좀비기업으로
그렇다면 백화점만 그럴까? 아니다. 사모펀드가 손 댄 소매업체마다 사정이 똑같다. 그리고 기업은 회생은커녕 시체로 거듭나고 있다. 대표적 예를 두 곳만 더 보자. 옷가게 제이크루(J. Crew)와 중저가신발업체 페이리스(Payless)다.
먼저, 2011년 사모펀드 TPG와 레오나드그린&파트너스(Leonard Green & Parners)가 제이크루를 30억 달러(약 3조7천억 원)에 차입매수 한다. 소비자 옹호 단체인 <미국금융개혁연대>(Americans for Financial Reform)이 추산한 바, 2011년 이후 제이크루는 소유주인 사모펀드에게 배당금, 이자 및 수수료로 7억6천만 달러(약 9천4백억 원)를 지불했다. 니만마커스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쇼핑 등의 영업 전환 모색 등에 들어갈 돈은 한 푼도 없이 사모펀드가 탈탈 털어갔는데 무슨 자구노력이 가능했겠는가.(New York Times, May 14).
페이리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2년 사모펀드 골든게이트캐피탈(Golden Gate Capital)과 블룸캐피탈(Blum Capital)이 페이리스를 20억 달러에 차입매수 했다. 2015년 1월을 기준으로 과거 2년 동안의 에비타(EBITDA: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기업의 현금창출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를 보면 기가 막힌다. 페이리스는 그 기간에 3억2,200만 달러(약 3,986억 원)의 에비타(세전이자지급전이익)를 올렸다. 그러나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3억5,200만 달러(약 4,357억 원), 그리고 이자로 8,300만 달러(약 1,027억 원)가 돌아가서 손실만 기록했다. 이것을 쉽게 계산하면, 회사로 1달러(약 1200 원)가 들어올 때마다, 소유자에겐 1.09달러(약 1350원)가 대출자에겐 0.26달러(약 322 원)가 돌아가게 되어서 1달러 벌 때마다 계속해서 0.35달러(433 원)의 빚이 쌓이는 꼴이다.(“How Private Equity Buried Payless,” New York Times, Jan. 31, 2020).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딱 그 짝이다.
뉴욕시 진보단체인 <대중민주의센터>(The Center for Popular Democracy)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이후 파산한 소매점 체인 14개 중 10개가 사모펀드가 소유주로 밝혀졌다.(New York Times, May 14). 이렇게 기업은 시체가 되고, 사모펀드는 살이 통통 오른 승냥이와 장의사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먹거리와 시체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린다.
워런과 코르테스는 왜 코로나사태 동안 기업의 인수합병 금지를 주장 했는가?
그러니 회사들로서는 어떤 노력을 경주해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가 덮쳤고 완전히 고꾸라졌다. 그렇다면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언제가 그들에겐 가장 호기인가? 바로 헐값에 기업을 살 수 있을 때다.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봐서 비싸게 팔면 되니까. 이 칼럼시리즈 초반에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부동산 투자의 철칙인 “바이(buy), 픽스(Fix), 앤드 셀(Sell)”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팔 기업이 사라지면 사모펀드에겐 안 좋은 시기다. 따라서 코로나19야 말로 그들에겐 최적기다. 기업사냥을 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위험과 위기는 사모펀드의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것이라 사모펀드가 정말로 오매불망 기다리는 시간이다. 위험을 빙자해 고수익을 올렸으니(CLO가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 위험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위기가 있어야만 장사가 되는 모순이 사모펀드가 떼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주된 동력이다. 또한 위기 시엔 파산하는 기업체가 즐비하다. 그것들을 헐값에 거머쥘 수 있으니 위기란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위기는 사모펀드에겐 노다지인 셈이다. 죽어가는 회사를 기사회생 시키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직 관심은 그걸로 더 큰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사모펀드가 막강한 현금동원 능력을 가지고 기세가 등등한 사이 이들에게 더 많은 투자가 들어오고 그걸 가지고 전 세계 사업들에 마수를 뻗치며 제국으로 등극하고 있는 것이다.(“Scary Times for U.S. Companies Spell Boom for Restructuring Advisers,” New York Times, March 3, 2020; “Some Big Investors Smell Profit in Virus-Plagued Companies,” New York Times, April 3, 2020).
이 때문에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과 오카시오 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가 코로나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인수합병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수합병이 대다수는 사모펀드에 의해 벌어지기 때문이다.(“Elizabeth Warren and AOC’s Call for a Merger Ban May be a Moot Point,”, CNN, May 5, 2020).
사모펀드가 이끈 금융주도자본주의의 폐해
소위 미국식 선진금융의 핵심은 전 산업부문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금융화라 한다. 그것이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금융주도자본주의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선두에 현대의 제국 사모펀드가 있다.
산업자체가 이런 식으로 바뀌면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하나는 기업이 저렇게 좀비가 되고 파산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 종사하던 근로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가 실업자가 된다. 이런 펜데믹 시기에는 영원한 실직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2018년 현재, 미국에서 사모펀드가 소유한 회사에 약 880만 명의 근로자가 있으며, 이 회사들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한다.(New York Times, Jan. 31, 2020).
두 번째 문제는, 노동이 신성하다는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경상도 말로 “쌔(혀)가 빠지게” 노력해서 돈 버는 것에 대한 회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일 게 뻔하다. 이것은 경제와 관련한 관념과 가치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세상 어디에 저런 젖과 꿀이 흐르는 장사가 있겠는가. 땀 흘려 일 안하고 남의 돈 빌려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기술만 터득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득달같이 덤벼들어 하려 들 것이다. 이게 바로 금융주도자본주의의 폐해다. 경제와 노동 가치의 왜곡, 그것은 기업의 시체가 늘비해진 상황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을 막을 방법은 딱 하나. 규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는 월가의 대형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보다 훨씬 더 느슨하다. 그 틈을 타고 제국들이 탐욕의 눈이 박힌 머리를 바짝 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완화와 당국의 방치는 한국이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와중 우리에게도 사모펀드란 이름이 어느덧 익숙해지고, 이윤에 이악스런 자들은 남 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사모펀드에 벌써부터 발을 담갔다. 사모펀드의 구성요건이 49명 미만에서 그 이상으로 풀어졌으며, 10%이상을 한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금지하는 “10% 룰”의 제한에서도 사모펀드는 제한이 없다. 500만 원 미만의 소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하게 문을 열어 놨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작년 우리나라의 사모펀드 시장 규모는 2천조 원을 넘겼다. 사모펀드의 규제완화는 정권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한국경제』, 2019. 5. 1; 뉴시스1』, 2019. 10. 4; 『한국경제매거진』, 2019. 6; 『동아일보』, 2018. 9. 28; 『이뉴스투데이』, 2020. 5. 28). 그리고 이 와중 어떤 이들은 막대한 이윤을, 어떤 이들은 소중한 노후자금까지 날리고 있다. 지금 한가하게 미국의 사모펀드 걱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당신은 국회도서관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국회도서관이 왜 존재하고 있으며, 원래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사실 국회도서관이 무슨 목적으로 국회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기관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국회도서관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국회의원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국회 직원, 심지어 국회도서관 직원 자신들조차도 거의 생각해본 적도 없고 또 아무런 인식도 관심조차 없다.
‘국회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진열하고 읽는 그런 곳이 아니다
국회도서관이 과연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무슨 업무를 수행하는 곳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 ‘국회도서관’이라는 명칭에는 왜 ‘도서관’ 앞에 ‘국회’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이렇게 ‘국회’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고 한다면 (2) 과연 ‘국회’와 관련하여 어떠한 임무를 그 특성으로 하는 도서관인가가 분명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회도서관은 도서의 수집, 정리, 보존 업무를 위주로 하는 일반 도서관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들어가 책을 보고 자료를 찾는 그런 도서관이어서는 안 된다. 국회도서관이란 어디까지나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국회 내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국회’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영국 하원도서관의 『의회도서관을 위한 가이드』에는 “의회도서관은 입법부의 의원 및 증가하고 있는 의원의 보좌관이라는 특정하게 한정된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회도서관은 과연 이러한 존재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에 이런 의회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의회조사처의 역사를 살펴보면, 1900년대 초에 의회도서관 직원의 능력만으로는 대규모 연구기관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에 봉착했기 때문에 도서관 내에 입법정보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회조사처는 처음에 의회도서관의 6개 부서 중 하나의 기구로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오히려 의회도서관 전체보다도 질적인 측면에서 훨씬 중요한 부서로 발전하였고, 오히려 의회도서관이 의회조사처의 업무를 지원하는 거대한 정보 저장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세계 의회기구에서 해외정보 조사 업무는 모두 ‘의회조사처’ 기구에 소속되어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의회에서는 외교안보와 국제관계를 담당하는 ‘조사처’의 부서에서 수행하고 있다. 일본 역시 입법고사국의 해외정보조사실에서 수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국회 입법조사처의 직무 범위에도 ‘외국의 입법동향 분석 및 정보의 제공’(입법조사처법 제3조 5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도 해외정보 조사 업무는 여전히 국회도서관에 두고 있어 전체 입법지원 업무가 효율적으로 수행되지 못한 채 중첩되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아니 사실을 그대로 밝히자면, 국회도서관 내에 의회정보실과 법률정보실에 관련 석박사급 인력을 유지하면서 오직 그들을 활용해 국회도서관의 조직 유지 및 확대만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회도서관 내 전문 인력에게 승진의 기회나 계장 및 과장 등 간부의 길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의회 기구에서 ‘조사처’ 조직이 도서관과 별도로 분리된 프랑스 의회도서관은 직원수가 29명, 독일은 91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사처’가 통합되어 있는 영국의 경우에는 도서관 직원이 총 226명인데, 그 중 조사실에 82명이 배치되어 있다. 즉, ‘조사처’ 조직이 분리된 의회도서관은 기본적으로 100명 규모를 넘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일본과 미국의 경우에는 의회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는 우리의 경우와 전혀 단순 비교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현재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의 정원은 300명이 훨씬 넘는다. 이미 입법조사처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순수 도서관 기능’만을 수행하는 데 현재의 인력이 적정규모인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뒤바뀐 국회도서관– 의회도서관이란 사서가 지휘해서는 안 된다
현재 국회도서관의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은 거의 사서(司書)로 구성되어 있다. 국회도서관의 ‘의회정보실장’이나 ‘법률정보실장’이라 하면, 일반 사람들은 대단한 의회전문가 혹은 법률전문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직책들은 사서직 혹은 행정직이 담당하고 있다. 조직 구성에 있어서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조직 운용의 원칙을 지키고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그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배치한다는 뜻이다.
의회도서관이란 사서가 독점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독일 의회도서관은 일반 사서와 레퍼런스(입법지원 담당) 사서로 구성되는데 레퍼런스 담당 사서는 연구직으로서 일반 사서의 상위에 있다. 또 일본 국회도서관 입법고사국의 전문조사원의 대우는 행정부 1급에 준해왔다.
한편 사서에 관한 공무원 직제도 미국에서 일반 사서는 GS-7등급(GS; General Schedule, 미국 공무원은 GS-1등급부터 GS-15등급까지 분류되어 있다. GS의 숫자가 클수록 고위직이다)이고 전문성과 경력에 의하여 GS-9등급부터 GS-12등급으로 분류된다(그 이상의 등급도 가능은 하다). 이에 비하여 미국 의회도서관의 의회조사처 수석 연구원의 경우는 GS-18등급까지 승진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100에서 1016까지 순차적으로 구분된 공직 분류지수 중(숫자가 높을수록 직위가 높다) 일반직 사서(주제전문 사서 포함)의 지수는 204에서 779에 속해 있다. 여기에서 780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3급에 해당하고, 결국 일반직 사서는 3급 이상의 간부직에 임용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회도서관은 본래의 존재 이유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본말은 전도되고, 그 위상은 뒤바뀐 채 왜곡되었다. 감시가 결여되면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제 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의 설치 목적에 부합하는, 국회도서관다운 국회도서관으로서의 위상이 복원되어야 한다.
2018년 7월 5일에 참여연대가 공개한 2011~2013년 국회 특수활동비 지출결의서 내역은 오늘날 국회가 가진 ‘전근대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수많은 언론들은 전직 국회의장이 얼마를 받았는지, 국회 내 상임위원장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다뤘다. 또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들과 달리 월 50만원 씩 수령했다는 사실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새로운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경우다. 어떤 언론도 국회사무처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의 특수활동비 수령액이 매달 150만 원씩이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보다 권한이 세다’고 평가받는 법사위 위원의 수령액보다 3배 더 많다는 팩트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법사위 위원과 수석전문위원, 양자 간의 위상 혹은 권력 차이의 반영이거나 최소한 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반영일 것이다.
전에 국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던 한 의원은 필자에게 “‘뭐든 희망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면, 힘써드리겠다’라는 수석전문위원의 말에 ‘이 사람들이 완전 자기들이 주인이고 우리(국회의원)는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객(客)으로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전문직 분야에 있는 한 지인은 자기들 협회에서 국회의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전문위원에게 로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회 전문위원 스스로 강조한 ”전문위원은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다”
국회 전문위원이 갖는 이렇게 센 힘의 원천은 그들의 ‘검토보고’ 권한에 있다.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심사하게 되는데, 국회법 상 전문위원의 검토를 반드시 거치게 돼 있다. 국회법 58조에 1항에 따르면 “위원회는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그 취지의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 대체토론[안건 전체에 대한 문제점과 당부(當否)에 관한 일반적 토론을 말하며 제안자와의 질의·답변을 포함한다]과 축조심사 및 찬반토론을 거쳐 표결한다”라고 명기돼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 검토보고서의 지적 내용을 위원회 회의 과정의 발언과 통과법안의 수정 부분을 비교한 한 논문은 그 두 내용 간에 높은 인용· 일치율로 미루어 상임위 전문위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논술하고 있다.【1】
한편 국회에서 일하는 입법관료 스스로 검토보고의 영향이 크다는 점을 알고 있다. 2010년 12월 상임위 입법조사관 12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조사대상의 90.8%가 법안 검토보고서가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과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했다.【2】
특히 한 국회 수석전문위원이 재직 당시에 쓴 논문은 아예 국회 전문위원의 역할이 지원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제출된 총 44개 조항으로 이뤄진 한 법률안에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전문위원이 19개의 검토 조항을 보고하였고 결국 법안은 11개 조항을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 11개 수정안 모두 전문위원이 적성한 검토보고에서 주장한 그대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면서 “전문위원은 소속 위원회 입법 활동의 단순한 지원 차원을 넘어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로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폐되고,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위험할 수 있다.
2017년 8월 22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국회사무처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사무처에서는 수석전문위원 2명이 성추행과 횡령 혐의로 면직 처리되기도 했으며 국회사무처 직원 간 음주폭행 사건도 발생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었다.
최저임금법 개정 사례에서 드러난 검토보고의 한계
그렇다면 이토록 영향력이 큰 검토보고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최근 국회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은 법안이 있다면 단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이 손꼽힌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법안 처리를 반대해왔다.
그런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내용을 살펴보면 단지 임금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최저임금법이 개정된 뒤 생긴 사회적 갈등과 논란을 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검토보고’라면 마땅히 이 법안이 사회적으로 마칠 파장까지 충분히 검토했어야 할 일이다.
한국 사회에는 단순히 입법관료의 검토보고에 의해 처리되어서는 안 되는 법률과 쟁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의 대표자로서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 소속의 정책위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안 처리의 길목에 국회 입법관료는 일종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역할을 한다. 국회사무처는 전문위원 임용자격에 관한 규칙에서 전문위원의 자격기준(국회에서 10년 이상 재직하고 2급 이상의 공무원이 돼 2년이 경과한 자로서 입법심사와 조사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자 등)을 정해놨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은, 그리고 전문가집단에서 선발되지 않은 ‘행정사무’의 역할을 갖고 있는 공무원일 뿐이다.
특히 전문위원의 업무상 전문성에는 의문부호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전문성이란 ‘개인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 그가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취득하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개인적 전문성’ 외에도 ‘조직에 들어와 업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그 업무를 통하여 획득하게 되는 전문적 지식’을 뜻하는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 전문위원의 경우, ‘개인적 전문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순환 보직 근무의 관행으로 인해 깊은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실제 지금은 퇴직한 한 수석 전문위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각기 다른 세 곳 상임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을 맡았다.
‘관료들은 전문성 있다’, 왜곡된 신화
흔히 공무원들은 대단한 전문성을 지니는 존재로 이해된다. 적지 않은 언론매체들이 그러한 시각으로 기사를 쓰고 있으며, 심지어 진보 쪽에 있는 정당들의 관계자도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전문성으로 무장한 공무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 등의 논리를 계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혹시 부분적으로나 특수한 상황에서 타당할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무엇보다 공무원들은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발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무원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부분의 경우 2년을 단위로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순환 근무하게 된다. 결국 전문성을 축적할 기회가 근본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료들은 전문성이 있다”는 시각은 우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최소한 정보 접근성이 압도적으로 용이한) 공무원들의 객관 조건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또 절차나 수속 등의 행정업무 분야에서 공무원들이 전문성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시각이 그런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밖의 관련 분야의 전문지식이나 분석력 등 순수한 의미의 ‘전문성’ 측면에서 관료집단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대단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이 높은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선입견과 시각은 우리 사회의 강고한 관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주요한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다.
“국민을 너무 힘들게 하는 국회”
국회는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라는 꿈도 야무진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회의원들은 입만 열면 스스로의 특권을 줄이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하지만, 그러나 실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쟁과 내로남불, 외화내빈의 말잔치만 난무한다.
‘국민을 힘들게 하는 국회’라는 말이 훨씬 정확하고 설득력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본업을 수행하지 않고 방기하는 조직은 왜곡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의 본업인 입법을 스스로 올곧이 수행하게 될 때, 국회는 시민의 진정한 대표로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발전하는 출발선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국회 전문위원 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
【1】 장봉아, “국회상임위원회 공무원의 입법과정상 영향력 분석: 법안 심사 회의록과 검토보고서의 일치 여부에 대한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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