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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13다61381 손해배상(기) 사건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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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13다61381 손해배상(기) 사건 보도자료

익명 (미확인) | 화, 2018/10/30- 14:38

[다운로드] [보도자료]

대법원 공보관실(02-3480-1451)


대법원(재판장 대법원장 김명수, 주심 대법관 김소영)은 2018. 10. 30.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여, 피고가 원고들(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음(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이 사건 핵심쟁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임. 이에 대하여 다수의견(7명)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서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음.

이러한 다수의견에 대해서는, ‘이미 2012. 5. 24.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대법관 이기택의 별개의견1과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소영, 대법관 이동원, 대법관 노정희의 별개의견2가 있고,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 조재연의 반대의견이 있으며,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하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재형, 대법관 김선수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 있음.

1. 사안의 내용

▣ 원고들은 1941년~1943년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임

▣ 2005. 1.경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었고 원고들은 2005. 2.경 일본 기업인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함

▣ 제1, 2심에서는 원고들이 패소하였으나,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환송판결)은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음

▣ 환송후 제2심은 환송판결 취지에 따라 피고가 원고들에게 강제동원 피해에 따른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고, 위자료 금액을 1억 원씩으로 정하였음

▣ 피고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음


2. 대법원의 판단

가. 사건의 주요 쟁점

▣ ① 원고1, 2에 대한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과 기판력 (상고이유 1점)
원고1, 2는 이 사건 소 제기에 앞서 일본에서 동일한 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일본 법원에서 패소 확정되었음
이러한 일본 법원의 판결이 외국법원 판결의 승인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그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②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부담하는지 여부 (상고이유 2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이 운영하던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하였는데,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채무가 피고(신일철주금)에게 승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③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 (핵심 쟁점) (상고이유 3점)

▣ ④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할 수 있는지 (상고이유 4점)
피고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다투었음

▣ 우선 대법원은 위 ①, ②, ④ 쟁점에 관해서, 환송판결 및 환송 후 제2심판결과 마찬가지로,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위 ①쟁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으며(위 ②쟁점),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위 ④쟁점)고 판단하였음

▣ 위 ③쟁점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갈렸음
청구권협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라고 정하였음. 제1조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하였고, 이어서 제2조 1.에서 “…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정하였음. 제2조 3.에서는 “…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고 정하였음.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서는 “…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으로부터 제출된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라고 하였음

이러한 청구권협정 등의 해석상, 1) 원고들이 주장하는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2) 포함되었다면 그에 따른 효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즉 권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만이 소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체법상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인지 등이 이 사건의 쟁점임

나. 다수의견(7명) :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음

▣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임(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구하는 것이 아님) ☞ 이는 아래와 같은 환송 후 제2심판결의 사실인정에 기초한 것임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사업체인 일본의 제철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사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일본제철은 철강통제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인력을 확충하였음
원고들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환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동원되었음
더욱이 원고들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으며, 일본 정부의 혹독한 전시 총동원체제에서 외출이 제한되고 상시 감시를 받아 탈출이 불가능하였으며 탈출시도가 발각된 경우 혹독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음

▣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음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
▪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이른바 ‘8개 항목’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관한 것이었음. 위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라는 문구가 있지만, 이 또한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음.
▪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위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사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간 청구권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음
▪ 청구권협정문이나 그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음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음
▪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도,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책임이 ‘도의적 책임’에 불과하다는 것임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환송 후 제2심에서 피고가 협상 과정에 관한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였으나, 그 증거들에 의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진다고 볼 수 없음
▪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언급한 사실, 1961. 12.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으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중 3억 6,400만 달러(약 30%)를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 기준)’한 사실 등을 알 수 있음
▪ 그러나 위와 같은 발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고, 13년에 걸친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었던 내용도 아님
▪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고, 실제로 당시에는 일본측의 반발로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음
▪ 위와 같이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되었음. 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이라고는 보기는 어려움

다. 별개의견1 (1명) : 이미 환송판결에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환송판결의 기속력(상급법원의 판단에 하급법원이 따라야 하는 것)은 환송 후 제2심뿐만 아니라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임

▣ 환송 후 제2심의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증거 등에 의하여 환송판결의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겼다면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볼 만한 사정이 없음

▣ 재상고심이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기속력이 미치고, ‘환송판결에 명백한 법리오해가 있어 반드시 이를 시정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환송판결이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아니한 채 종전 대법원판결이 취한 견해와 상반된 입장을 취한 때’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함

이 사건의 경우 환송판결에 위와 같은 예외적인 사정이 없으므로, 환송판결과 같은 결론을 취할 수밖에 없음

라. 별개의견2 (3명)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함. 다만 원고들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함. 따라서 원고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피고를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

청구권협정 및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8개 항목’ 제5항에서 규정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 포함됨이 분명한데, ‘기타 청구권’에는 원고들 주장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함
대한민국은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음. 1961. 12.경에도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보상금을 3억 6,400만 달러로 산정하고 이를 포함하여 8개 항목에 대한 총 보상금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
▪ 1961. 5.경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이 위 요구액은 국가로서 청구하는 것이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은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여 협상에 난항을 겪었음
▪ 이에 일본은 증명의 곤란함 등을 이유로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하여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 그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대한민국은 순변제 및 무상조 등 2개 명목으로 금원을 수령하되 구체적인 금액은 항목별로 구분하지 않고 총액만을 표시하는 방법을 다시 제안하였음
▪ 이후 구체적인 조정 과정을 거쳐 1965. 6. 22.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제1조에서는 경제협력자금의 지원에 관하여 정하고 제2조에서는 권리관계의 해결에 관하여 정하였음


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대한민국이 각종 보상입법을 통해 보상조치를 취한 것도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됨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임

▣ 위와 같이 포함은 되지만,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 내에서 소멸하여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임

‘외교적 보호권’이란‘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

청구권협정에는 외교적 보호권의 포기에서 나아가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음
 ▪ 국가와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라는 근대법의 원리는 국제법상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권리의 ‘포기’는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 청구권협정에서는 ‘포기(waive)’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음

당시 일본은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된다고 보는 입장이었음이 분명함

▪ 일본은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하였음. 이러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음

마. 반대의견 (2명) :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됨.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하여 가지는 개인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되게 되었으므로, 원고들이 일본 국민인 피고를 상대로 국내에서 강제동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소로써 행사하는 것 역시 제한됨 ⇒ 파기환송 의견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별개의견2와 같음

▣ 하지만 별개의견2처럼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가 소멸되거나 포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청구권협정을 국민 개인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양 체약국이 서로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하는 내용의 조약이라고 보기 어려움.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 주체는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그의 국적국이며 개인의 청구권 유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음
▪ 청구권협정 제2조 1.에서 규정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문언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그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함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양 체약국은 물론 그 국민도 더 이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함

청구권협정 체결 과정이나 체결 이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도 소멸되거나 적어도 그 행사가 제한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임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고, 청구권자금의 분배는 전적으로 국내법상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하였음
국제법상 전후 배상문제 등과 관련하여 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국가간 조약을 통해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일괄처리협정’은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조약 형식임
대한민국은 청구권보상법, 2007년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등을 제정하여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함. 실제 피해에 비해 매우 미흡하다는 사실은 청구권협정의 효력을 해석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음 


청구권협정 제2조의 문언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됨
– 청구권협정에서는 명시적인 포기(waive) 표현이 없음. 개인청구권이 실체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보기 어려움. 제2조 3.에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음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함.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함.

대한민국은 피해국민의 소송 제기 여부와 관계없이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책무가 있음

바.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2명) :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함

▣ 청구권협정의 문맥, 청구권협정의 목적 등에 비추어 청구권협정의 문언에 나타난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해석할 경우,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권’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려움

▣ 교섭 기록과 체결 시의 여러 사정 등을 고려하여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결론이 달라지지 않음
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청구권과 그 포기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고 있지 않은데도 명시적 근거 없이 이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음


3. 판결의 의의

▣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2012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환송판결을 선고하였음

▣ 이후 위 판결에 대하여 학계 등에서 그 찬반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있었고,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포함되었다고 볼 경우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되는 것인지 등에 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음

▣ 본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피고의 다른 상고이유 주장도 배척함으로써, 피고가 원고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최종적으로 확정시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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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 자료실장이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 경교장 2층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있다. [이승환 기자]

툭 치면 와르르 쏟아졌다. 중국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향하는 길, 한 장의 사진에서 독립운동가 생애가 재현됐고 한 권의 책 표지에서 100년 전 기억이 육화됐다.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의 마지막 편을 송고한 뒤 만남을 청하자 “독립운동사의 교통순경일 뿐,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진심을 다하는 막후(幕後)의 배후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설득해 오래 사양하던 그를 탁자에 앉혔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이면을 쫓아 38년간 외길을 걸은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61)을 지난 5일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만났다.

―첫 출근 날 풍경부터 기억해 볼까요.

▷1982년 가을, 친구 집에 놀러가니 친구 시아버님이 “뭐하는 친군가” 하고 물으셨어요. 그분이 백범 제자 안윤기 선생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출근했죠. 을지로3가 상지빌딩 3층, 좁은 방에 철제 책상 3개뿐이었어요. 안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맡게 됐습니다. 그 일이 평생 업(業)이 됐네요.

―벅차오르는 한순간은.

▷글쎄…. `백범일지` 영인본을 만든 1994년 기억이 생생해요. `백범일지` 원본(原本)을 품고 인쇄소를 한 달간 오갔어요. 흑백으로 하자는 어른들을 겨우 설득해 컬러로 했죠.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어요. 시대의 분신(分身)이었으니까요. 아, 그땐 `백범일지`가 보물로 지정되기 전이었습니다(`백범일지`는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됐다).

―보급판 `백범일지`도 만드셨죠.

▷도진순 교수님을 우연히 알게 됐고, 돌베개 출판사를 만나 의기투합했어요. 백범김구기념관 10주년을 맞아 2013년 `백범 김구 사진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주해본 백범일지`는 스테디셀러이며 현재 55쇄로, 총 63만부가 팔렸다. 역시 홍 실장이 참여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39쇄로, 12만부가 팔렸다).

―임정 길을 20회 밟으셨어요.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설렘과 절망, 어느 쪽입니까.

▷가끔은 거꾸로, 중국이 집 같아요. 그중에서도 충칭의 화상산 묘지는 특히 애착이 가는 임정 유적지예요. 갈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요. 이제 죽음과 거리가 멀어진 장소가 돼 버렸어요.

―중국에서 느낀 건데, 이봉창 의사를 특히 존경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퉁불퉁하게 살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정확한 길을 간 분이니까요. 이봉창 의사는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가 결국 시대정신을 알아채고 그 길을 걸은 분이에요. 시대정신요? 그 시대에 해야만 하는 불가능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죠.

―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는.

▷이명서·이명선 형제를 꼭 기억해 주세요. 황해도 장연에 살던 형제가 재산을 다 처분하니, 가족은 `우리 서울 가나` 했는데 내려보니 만주더랍니다. 두 형제는 독립운동 기지를 만든다고 떠나고 나머지는 여자들 몫이 되었지요. 훗날 손녀를 만났는데, 할머니가 그러셨대요. “김구의 `김(金)자`도 입 밖에 내지 말라.” 그보다 미운 사람이 있었겠어요?

―서거 전날 이곳 경교장에서 백범과 단둘이 만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갈까요.

▷역사에 선생님이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하고 싶어요. 결국 `김구(金九)`는 수십만 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하나의 앞선 이름이에요. 그 이면에는, 이름조차 못 남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독립운동을 실천한 모든 분께 올리는 말씀입니다.

―`임정 안내자`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후회는 없습니까.

▷한참 어려울 때 안윤기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적어도 우린 이 세상에 나와 뭐가 옳은 길인지 알고 가지 않느냐.` 옳음을 안다는 게 건방진 얘기인지 몰라도, 적어도 나쁜 길을 걷지는 않았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중국 난징의 거리에서 작은 기념품을 사는 홍 실장 옆에 오래 서 있었다.

한자가 새겨진 금속활자를 골라 만드는 기이한 도장이었다. 고심 끝에 그가 선택한 두 글자는 `쟁족(爭足)`이었다. 백범이 던진 화두로 `대가리가 되려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길 다투라`는 뜻이다. 다들 우두머리를 탐하는 세상, 누군가는 평생 `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김유태 기자]

<2019-04-11> 매일경제 

☞기사원문: [독립견문록] “백범은 수십만 독립운동가중 한 분…잊힌 영웅 아직도 많아”

토, 2019/04/1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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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강(羅智綱)은 일제강점기에 학무과, 공립학교 교직원 및 여러군의 군수로 활동해 친일행위를 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나지강이라는 서예가와 한자이름과 출생년도, 출신학교가 같다는 글이 있어서 찾아보니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친일파 나지강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교직원과 군수로 활동했는데 1997년판 한국미술연감 44쪽에 나온다고 하는 서예가 나지강도 출신지가 평양고등보통학교이고, 1899년에 출생했다는 글이 인터넷에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찾아본 결과 나지강은 반민특위 조사 후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경북대 등에서 공직을 하다가, 은퇴 후 서예가로 활동해 여러차례 상을 받은 뒤 1989년 사망한 것으로 보이나, 서예가 나지강과는 출신학교가 같고 생년이 같다는 것 외의 직접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81212003292…
기사에 따르면 1958년 12월 12일 경북대학교 사무국장인 이사관보에 보해졌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604003292…
1963년 6월 1일 행정부이사관에서 정년퇴직하였습니다.

일반직 공무원의 정년은 당시 61세였으나, 당시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자명칭이 같고 거주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공무원 나지강과 친일파 나지강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한편 서예가 나지강은 국선에 입상해 여러차례 상을 받았는데, 공무원에서 은퇴한 시기에 서예에 입문했다고 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며, 서예가 나지강이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글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출생년도와 한자이름이 친일파와 똑같았습니다.

조계종의 원학스님을 비롯해 서예가 나지강의 제자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고, 서예가 나지강이 참여한 서예 단체 또한 남아있는 만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수정 보완 작업을 할 때 반민특위 이후 행적과 사망년도가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져 있던 나지강씨가 이 서예가 및 공무원과 동일인물인지를 확인하여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 2019/04/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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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융화의 상징으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최초 외교관으로 발탁

일제가 어떻게 친일파를 양성했으며, 지식인은 어떤 과정으로

친일파가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유툽과 팟빵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월, 2019/04/1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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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항일음악회 성황리 개최… 남북공동행사로 개최되길 희망해
이재준 고양시장”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다.

[내외통신]정석철 기자=고양시가 지난 13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인 30사단 내(고양시 화전동 소재)에서 항일음악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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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고양시가 주최하고 고양문화재단이 주관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30사단이 가진 역사적 아픔의 의미(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지 및 강제징집 피해자들의 집결소)를 되새기고, 잊혀져가는 광복군가 등의 항일음악 연주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평화의 불씨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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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준 고양시장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재준 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 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며, “역사의 아픔을 지닌 이곳에서 잊혀져 가는 광복군가와 독립운동가를 함께 부르며 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 뜻깊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약 2천5백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의 참여와 함께,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등이 항일음악을 연주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인기가수 신형원씨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똥벌레를 시작으로 독립애국가, 더좋은날 등의 히트곡과 항일음악을 불렀고,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진이 함께 올라와 터를 부르며 많은 시민들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이재준 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 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며, “역사의 아픔을 지닌 이곳에서 잊혀져 가는 광복군가와 독립운동가를 함께 부르며 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어 뜻깊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약 2천5백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의 참여와 함께,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등이 항일음악을 연주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인기가수 신형원씨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똥벌레를 시작으로 독립애국가, 더좋은날 등의 히트곡과 항일음악을 불렀고,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진이 함께 올라와 터를 부르며 많은 시민들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2019-04-15> 내외통신뉴스 

☞기사원문: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관련기사 

☞뉴스1: 일제강점기 강제징집 집결소였던 30사단서 ‘항일음악회’ 개최 

☞신문고뉴스: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성료 

☞경인일보: 고양시, 일제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항일음악회’ 성료 

☞시사포커스: 고양시, 일제 강점기 아픔의 장소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KFM경기방송: 고양시, 일본군 주둔지 30사단 내 ‘항일음악회’

월, 2019/04/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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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4.16)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9편 “이승우”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앞장 서 추진한 변호사

☞ (4.0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8편 “김우영” _내선융화의 상징, 조선인 부영사 되다

☞ (4.0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7편 “최린” 독립선언의 주역, 변절의 아이콘이 되다

☞ (3.26) ‘내역사’ 시즌 3: 강제동원 3편 “피해자 변호인단에게 판결과정과 향후 활동계획을 듣는다

☞ (3.21)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6편 “박중양” 3.1운동 진압을 위해 자제단을 이끈 거물급 친일파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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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4/1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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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년 새 학기를 맞아 우리 고장 제주도에도 산과 바다, 공원, 흐드러지게 핀 꽃과 들판 여기저기서 봄의 완연한 기운이 우리를 감싸 안는 계절이 찾아왔다.

특히, 생동하는 이 자연과 더불어 가장 이 계절을 기다렸음직한 어린이들이 야외로 나가 실컷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소망은 나와 같은 어른들의 당연한 기대감이리라.

역시 아이들의 본성은 실내보다 실외를 선호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진리니까.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하나 있다. 미세먼지다.

면역에 취약한 어린이들에게는 건강의 적신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요새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또 하나의 적신호가 있다.

숫자로는 소수겠지만 어린이들만을 노리는 불순한 인간들의 존재가 훨씬 더 해롭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화, 2019/04/1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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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현상금 1위? 30만 달러 액수 근거 부족
김원봉·김구 현상금 역시 공식 근거는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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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

“이승만이 현상금 1위”라는 자유한국당 정미경 최고위원님께.

정 위원님께서 오늘 아침 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주 목요일 전화를 한 통 받았다”면서 말씀하신 KBS 기자입니다. 그날 아침 회의에서 말씀하신 “이승만 대통령이 현상금 1위”라는 근거가 궁금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김원봉에게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린 것 아닌가 궁금했습니다. 팩트체크 취재의 기본은 관련 주장을 한 인물 또는 단체 등에게 주장이 나오게 된 근거를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위원님은 질문에 “검색포털 등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하셨죠. 바로 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언론기사 검색 사이트와 인터넷 포털 등에서 연관 단어들을 검색했습니다. 역시 대부분의 언론 기사와 인용된 전문가 인터뷰들은 김원봉 100만원, 김구 60만 원에 이어 이승만 30만 달러라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위원님의 말씀을 맞다 틀리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KBS 펙트체크팀은 기사가 아니라, 원문과 공식 자료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중 일제의 공식적인 현상금 기록이나 원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원봉이 ‘현상금 100만 원의 사나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화’라는 점도 새로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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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발언하는 정미경 최고위원

이승만 현상금의 근거…<소년중국紙> “이승만 등 3인에 30만 상금”

마침 취재하던 문제도 있고 해서 이 문제는 잠시 미뤄뒀습니다. 오늘 위원님께서 다시 언급하시기 전까지 말입니다. 위원님께서 제가 드린 전화를 언급하시며 친절히 답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위원님의 근거는 첫째, <소년중국紙>를 근거로 임정수립 당시인 1919년 이승만 현상금은 30만 달러다. 다음으로 김구와 김원봉 등의 현상금은 시기도 1930년대일 뿐더러 근거도 특정되지 않았다라는 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럼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이승만의 현상금에 대한 근거는 말씀하셨듯, 미국에서 발간된 <소년중국>이란 잡지에 기록돼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는 1919년 5월 22일자 신한민보에 인용돼있습니다. 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된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입니다.

기사를 보면, “리승만, 리완, 리위종 3명 (三씨)를 잡기 위해 일제가 자객을 파견했다”는 ‘소년중국’의 동경 특별통신을 인용했습니다. 이때 기사는 “三十만 상금의 밀약으로 三씨의 머리를 구한다”고 돼있습니다. 이 기사의 진위를 떠나 표현을 보더라도 이승만 1명에게 30만 인지 3명에게 30만 인지도 불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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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국사편찬위 자료 ‘현상금’ 언급하고 있지만, 발언의 공신력 생각해봐야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자료들을 볼까요.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41.)을 보면 “한국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담력이 있다.”면서 “그동안 일본은 그들 각각에 5십만 달러에 달하는 현상금을 걸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거론했습니다. 이 내용은 “한국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적수이다”라는 1943년 3월 7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입니다. 즉, 국사편찬위의 공식 자료집이지만 출처는 언론보도여서 역시 현상금 관련 공식 기록이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또 1942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회의록(Korean Liberty Conference)을 보면, 피치 여사는 김구를 가르켜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린 김구 씨는 조용하고 친절하고 예절바른 신사”라고 말합니다. 피치 여사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를 피해 김구 등을 숨겨준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부인입니다. (임시정부 자료집 20.)

이승만의 현상금을 논하는 자료는 또 있습니다. 해리스 목사가 스팀슨 미 육군장관에게 1942년 2월 4일 보낸 서한에는 “한국인들의 지도자 이승만 박사는…40년 동안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어두었던 적들에게 그의 능력과 고국을 위한 헌신이 잘 알려져 있으며,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임시정부 자료집 43.)

회의록과 서한이었지만 역시 “얼마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단정할 순 없는 내용들입니다.

현상금 논란은 본질 흐리기…일제는 누굴 두려워했을까

취재에 도움을 준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이사는 “이승만이 자신의 현상금을 부풀려 과시해 교민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은 기록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정미경 위원님의 발언대로 김원봉의 현상금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백범일지만을 근거로 김구의 현상금을 논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조 이사는 그러면서 “누가 진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는가가 중요하지 현상금 논란은 본질을 흐리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일 때는 실제 일본에 위협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시기가 매우 짧았다”면서 “일제가 말기로 갈수록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 의열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원봉, 김구 어느 쪽을 위험시했을까는 쉽게 상식적으로 짐작이 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원님께서 “1919년 임정 수립 직후 항일독립운동가에게 내건 최고 현상금 건 사람 이승만이란 결론. 대답이 됐나?”고 물으셨는데 저는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KBS 팩트체크팀의 판단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2019-04-15> KBS NEWS 

☞기사원문: [팩트체크K] “이승만이 현상금 1위” 한국당 정미경 위원님께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팩트체크] 한국당 “이승만, 독립운동가 중 최고현상금”… 사실은

수, 2019/04/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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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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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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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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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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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목, 2019/04/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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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광동 지부 개소식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창립식이 지난 15일(월) 오후 5시 동관 东城国际호텔 3층 회의장에서 박호균 사무국장의 사회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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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이날 참석한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좌, 사진)은 “3.1혁명과 촛불혁명”은 인간혁명의 출발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가졌다. 이어 방학진 기획실장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소개와 앞으로의 방향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간단한 강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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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 광동 지부장

초대 지부장을 맡게 된 김유(우, 사진) 광동 지부장은 인사말에서 “묻어버린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어 언젠가는 비수를 들이댄다” 면서 역사바로세우기를 강조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평생을 친일문제를 연구한 문학가이며 재야 사학자 임종국(林鐘國)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1991년에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서 친일문제 관련 학술 행사와 전시회, 친일파 기념사업 저지, 독립운동유적지 및 독립운동가 발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등 역사정의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운영재원은 전국과 해외의 약 1만 3천여 후원회원들의 기부금과 연구소가 발간한 서적판매 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으며, 1995년 현재의 이름인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변호사 이돈명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제2대 이사장은 일제강점기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이, 제3대 이사장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설립한 김병상 몬시뇰 신부가 맡았으며 현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내일의 바람직한 역사를 열어가기 위한 첫 단계로 국민성금을 바탕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데 이어 국치일인 작년 8월 29일에는 역시 시민들의 성금으로 <식민지역사 박물관>을 건립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모두 4389명의 친일인사들이 올라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인구를 약 3천만명으로 봤을 때 0.01%에 불과하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민족반역과 부일협력자 중에서 비교적 역사적 책임이 무거운 인사들이 수록되었는데 대원칙은 친일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지속반복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했다거나 하급 관료 등 생계형 친일까지 문제 삼지는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내는 물론 미국의 워싱톤, 뉴욕, LA와 일본 도쿄에도 지부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 문을 연 광동지부는 중국에서는 최초이고 해외로서 5번째 지부인 것이다.

앞으로 광동지부는 강연회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통해 우리 교민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 해나갈 예정이다.

<출처> ☞【동관东莞】민족문제연구소 광동 지부, 동관에 문 열어

목, 2019/04/1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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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4/1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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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천교육너머’에서는 ‘김천의 3.1운동과 개령출신 독립운동가 김단야’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일시 : 4월 26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대한법률구조공단 대강당(김천시 율곡동)

금, 2019/04/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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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夜(춘야)

 

杏發桃花發(행발도화발)

他關似故鄕(타관사고향)

紅燈無數曜(홍등무수요)

此夜又成狂(차야우성광)

 

봄날 밤에

 

살구꽃, 복사꽃 만발하니

낯설은 타향도 고향인 듯

붉은 등불 무수히 빛나니

此夜에 또 미치광이 되네.

 

<時調로 改譯>

 

살구꽃, 복사꽃 피니 타향도 고향인 듯

발갛게 켜진 등불 셀 수도 없이 빛나니

어허라! 이날 밤에도 또 미치광이 되네.

 

*春夜: 봄밤  *杏花: 살구꽃  *桃花: 복사꽃  *他關: 자기 고향이 아닌 고장. 타향

*紅燈: 붉은 등불 *無數: 헤아릴 수 없음 *此夜: 이날 밤 *成狂: 미친 사람이 됨.

 

<2019.4.19, 이우식 지음>

금, 2019/04/1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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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10] 종로도서관 ②

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을 선구적으로 이끈 이범승의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범승의 공적과 별개로 일제가 경성도서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식민 시대 일제의 도서관 정책을 고려하면, 일제가 이범승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도서관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고 보는 게 진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용재 교수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 건립 제안에 대해 평한 부분을 살펴보자.

“조국의 왕통(王統)이 일제의 상징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제를 향하여 조선 땅에 ‘민중의 대학’을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애국계몽사상의 실천 중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하겠다.”

도서관 건립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범승이 일부러 일제의 비위를 맞추며 도서관을 ‘쟁취’했던 걸까. 경성도서관 이전과 이후 이범승의 행보가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있다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범승은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이범승의 애국계몽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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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사직공원에 재개관한 종로도서관 재개관 당시 종로도서관은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했고 하루 600여 명의 시민이 이용했다. 비슷한 시기인 1968년 8월 1일 종로도서관 근처에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은 1969년 개장한 장충 수영장과 함께 인기 있는 서울의 야외 수영장이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하는 선남선녀를 훔쳐보고 싶어서였을까. 한때 종로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좌석은 야외 수영장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 백창민

이범승은 1887년 8월 29일 만석 갑부 이기하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이범승은 경성도서관 운영 시절인 1924년 4월부터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만든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이사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당시 조선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를 11회나 면담하기도 했다.

경성도서관을 5년 동안 운영한 후에는 1926년 9월부터 고등관 5등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28년 11월에는 쇼와 천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조선박람회 사무위원,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황해도와 경상북도 산업과장을 지냈다. 1940년 9월부터는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해서 일했다.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활동과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경력 때문에 이범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경성도서관을 인수한 경성부는 이범승의 조카 이긍종을 분관장으로 임명한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시대 첫 분관장을 맡은 이긍종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긍종은 1926년 4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종로분관장을 맡았는데, 1929년까지는 촉탁, 1930년부터는 사서였다.

종로분관장을 그만둔 이긍종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친일 신문인 <조선상공신문>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고 ‘조선춘추회’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도서관과 언론 분야에서 활약한 이긍종은 <친일인명사전>에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경성도서관을 분관으로 편입한 후 일제가 친일 성향 인물을 임명해서 도서관을 경영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부윤 이범승과 종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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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종로도서관 열람실 풍경 1967년 7월 촬영한 이 사진은 종로도서관이 탑골공원에 머물던 시절 열람실 풍경이다. 지금처럼 열람실에 “칸막이”가 있지 않았는데, “정숙”과 함께 모자를 벗으라는 ‘탈모’ 안내가 벽에 부착돼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해방 후 이범승은 미군정 치하인 1945년 10월 25일부터 1946년 5월 9일까지 6개월 남짓 경성부윤을 맡기도 했다. 경성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이범승이 ‘서울시장’이 아닌 ‘경성부윤’인 이유는 그가 재임할 때 서울은 ‘서울시’가 아닌 ‘경성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후임인 김형민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승격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이 됐음을 생각할 때 이범승은 ‘마지막 경성부윤’으로 일한 셈이다.

경성부윤 시절 이범승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을 ‘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종로도서관 초대 관장은 송몽룡이다). 승격한 종로도서관은 동대문도서관이 문을 여는 1971년 3월까지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과 함께 수도 서울에 자리한 유이한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이어갔다.

도서관에 관심 많던 이범승이 경성부윤 또는 서울시장으로 오래 일했다면 해방 후 서울의 도서관 정책에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집이 세고 자기 스타일이 강한 그는 미군정 책임자 윌슨 중령과 갈등을 빚다가 반년 만에 사임했다. 이범승은 1952년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경성부윤 외에 이범승의 이채로운 경력은 1957년 성균관 유도회(儒道會) 총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점이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심산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친일파 출신 유도회 집행부를 구성한다. 이명세, 윤우경과 함께 이승만이 앉힌 친일파 출신 집행부 중 한 사람이 이범승이다.

종로도서관이 사직공원으로 이전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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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을 부수고 지은 “파고다 아케이드” “파고다 아케이드”가 지어진 탑골공원 서문 일대에는 경성도서관, 지금의 종로도서관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파고다 아케이드를 짓는다.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파고다 아케이드는 당시에도 “불법 건축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21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탑골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은 1967년 10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된다. 종로도서관 철거 및 이전 과정은 황당하기까지 한데, 이전할 건물을 먼저 짓고 도서관을 철거한 게 아니라 건물을 짓기도 전에 철거부터 먼저 했다. 심지어 철거가 확정된 종로도서관은 수개월 동안 이전 부지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 폐관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다행히 시민의 지원과 각계의 관심으로 1967년 10월부터 사직공원 근처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서, 1968년 8월 20일 지금의 모습으로 개관하긴 하나 종로도서관은 종암동 서울시 자재창고에 장서와 비품을 보관한 채 10개월 동안 휴관해야만 했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부수고 박정희 정권은 탑골공원 그 자리에 뭘 지었을까? 바로 ‘파고다 아케이드’라고 불린 상가를 만들었다. 탑골공원 구역을 따라 2층 높이 현대식 상가를 짓고 악기와 의류, 전자제품 매장을 들인 것이다.

종로도서관 철거뿐 아니라 유서 깊은 탑골공원을 상가 건물로 빙 둘러싼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다. 3.1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고 4.19 혁명 과정에서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는 등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이곳을 상가 건설을 통해 ‘용도 변경’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한때 반도 조선 아케이드와 신신백화점과 함께 3대 아케이드형 상가로 꼽힌 파고다 아케이드는 결국 1983년 전두환 시대 철거된다. 하지만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상가 건물을 지은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 도서관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4년과 1974년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으로 각각 이전한 것처럼, 박정희 시대 도서관은 도심에서 산으로,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나마 사직공원으로 옮긴 종로도서관은 종로구 관내로 옮겨 그 이름을 유지했지만,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옮긴 남대문도서관은 이름을 ‘남산도서관’으로 바꿔야 했다.

이승만 시대 그나마 도심에 있던 주요 도서관이 박정희 시대 외곽으로 밀려 난 건 뭘 의미할까. 1963년 <도서관법>이 처음으로 마련되긴 하나 박정희 시대 도서관이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도서관은 그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한 채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도서관의 처지는 우리 시대라고 크게 다를까. 2015년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사직단 복원 계획에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이 포함되면서 철거 및 이전이 거론되기도 했다. “‘왕조 시대 유적’ 복원을 위해 ‘공화국 시대 유적’을 파괴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며 문화재청이 물러서긴 했지만 말이다.

도서관 선구자의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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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에서 <친일인명사전> 찾아보니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 우연인지 몰라도 종로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은 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 백창민

오랜 역사만큼 많은 고서(古書)를 소장하고 있는 종로도서관 앞뜰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종로도서관 전신, 경성도서관을 세운 건립자의 업적을 기리며 1971년 9월 17일 세운 이범승의 흉상이다. 반세기 가까이 된 이범승 동상은 도서관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동상이며, 울주도서관이 2017년 세운 엄대섭 동상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둘 뿐인 ‘도서관인 동상’이다.

윤익선과 이범승은 우리 도서관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됐다.

윤익선의 행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40년 4월부터 ‘대동일진회’ 산하기관인 ‘동학원’ 교장으로 활동한 것이다. 대동일진회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의 지원을 받아 만든 친일단체다. 대동일진회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기치로 내걸고 활동했다. 윤익선은 1939년부터 일진회보에 ‘황인종은 결속하자’는 글을 기고하고, 1941년 8월 삼천리사 주최 좌담회에서 황국신민으로 임전국책(臨戰國策)에 전력을 다해 협력하겠다고 결의했다.

윤익선은 해방 후인 1962년 3월 <조선독립신문> 발간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는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윤익선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친일부역 행위가 드러나면서 윤익선은 2010년 서훈이 취소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이장(移葬)했다. 2010년 윤익선의 서훈 취소 때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국회부의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도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특위가 적용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준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을 선정해서 사전을 발간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와해되지 않았다면 윤익선과 이범승은 오래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분받았을 것이다.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직접 찾았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친일인명사전>(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도서관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참고도서여서 관외 대출도 불가능한 책이다. 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분실됐다”라고 했다.

종로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해 봐도 <친일인명사전>은 역시 2권만 빠져 있었다. 종로도서관이 2권이 없음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했다는 건데, 누락을 알고도 다시 책을 채우지 않은 것이다.

혹시 몰라 17일 오후에도 책을 검색해 봤지만 역시 2권만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 이날 종로도서관 측에 해명을 요청한 결과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8일 “찾아보니 서가에서 발견됐다. 이제 홈페이지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라고 알려왔다. 도서검색 결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건 단지 해프닝이었을까.

이범승 동상을 ‘철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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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 앞뜰에 있는 이범승 동상 이범승 동상은 1971년 당시 서울시 교육감 하점생이 세우고 동상 아래 이범승 업적에 대한 글은 종로도서관 9대 관장 이홍구가 썼다. 도서관인 동상 중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동상이다. 이범승 동상 아래 그의 업적을 새긴 비문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다. 반 세기 가까이 그의 동상은 “친일파”가 아닌 “도서관 선구자”로 종로도서관 입구를 지켰다. ⓒ 백창민

공공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도서관 선구자가 모두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 선구자로서 업적만큼 그 친일 행각도 제대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 분야 선구자가 아쉬운 상황이라 해도 ‘업적’만 칭송하고 친일파로서 ‘죄상’을 눈감는 건 문제 아닐까.

친일파 동상 철거와 친일파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한창 일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이범승 동상에 대해 반세기 동안 도서관계에서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역사적 무관심 때문인가, 도서관 선구자의 부끄러운 친일 행각을 덮기 위함인가. 종로도서관 이범승 동상은 ‘철거’하거나, 최소한 동상 옆에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적시’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틀이 놓인 우리 도서관 분야는 일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한 걸까. 도서관 용어와 공간, 제도, 운영 면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 시대를 얼마나 극복한 걸까. 식민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일반 열람실)을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도서관은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인가(관련기사 : “도서관의 칸막이 공부방은 식민지배 잔재”).

1985년 11월 9일 대한도서관연구회 엄대섭 회장이 마련한 ‘한일 공공도서관 관계자 간담회’에서 일본 도서관 관계자는 한국 공공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도서관이 학생들에게 자리를 빌려주는 ‘대석업'(貸席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서구로부터 ‘번안한 도서관’을 이식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도서관을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운영하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발 빠르게 도서관을 변화시켜 나갔다(일본 공공도서관에서 ‘칸막이 열람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 역시 미국과 세계로부터 ‘도서관학'(문헌정보학)을 수입했다. 세계 도서관 변화를 직접 목도하고 그 흐름을 따라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번안해서 이식한 ‘식민지 도서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도서관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과거의 제도와 운영을 관성적으로 답습한다면 우리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식민지 도서관’에 머물 것이다. 34년 전 일본 도서관 관계자가 통렬히 지적한 ‘대석업’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종로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9길 15-14(사직동)
– 이용시간 : 인문사회자연과학실 / 어문학실(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자연과학정보실(평일 09:00 – 20:00, 주말 09:00 – 17:00), 인왕관(평일 09:00 – 18:00, 토요일 09:00 – 17:00), 자율학습실 / 노트북실(평일 07:00 – 23:00, 11월-2월 평일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주말 08:00 – 22:00)
– 휴관일 : 매주 둘째, 넷째 월요일,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 홈페이지 : http://jnlib.sen.go.kr/
– 전화 : 02-721-0707
–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2019-04-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종로도서관 친일파 동상, 그냥 두고보면 안 되는 이유

금, 2019/04/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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