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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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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익명 (미확인) | 월, 2018/10/29- 18:37

[기고] ‘촛불’ 2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전쟁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이것이 나라냐?”고 분노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벌써 2년이 됐다. 그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고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전망도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촛불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국가재조’라는 혁명적 과제는 현실정치와 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자숙하는 시늉을 하던 수구세력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촛불항쟁의 정신을 외면하고 거침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분단 70년이 넘어 찾아온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호의 기회를 한갓 정치적 득실을 따져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숱한 개혁 입법도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두 차례 보수정권에서 고질화한 관료사회의 퇴행도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이제 일각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현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통설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더 늦기 전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은 촛불민심의 선택과 위임을 받아 출범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고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함께 외쳤던 주장이 무엇이었던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거창한 명제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하야–퇴진–탄핵-구속 촉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를 관통하는 구호는 ‘기본권의 보장’에 다름 아니었다. 각계의 각양각색의 슬로건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자연스레 수렴되었다. 즉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준수하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 2015.10.24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 부근에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국정교과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많은 이들은 자유 평등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헌법정신이 서구사회로부터 이식된 개념으로 이해한다. 법제 과정이나 문언으로만 볼 때는 얼핏 그런 해석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 전반을 조망해 보면 우리 민족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보편적 가치가 우리 스스로 수난 속에 스스로 체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학의 평등사상과 반봉건반외세운동, 3·1항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반제국주의와 민주공화운동, 사월혁명 5·18민주항쟁 6·10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반독재민주화운동 등 면면히 이어지는 저항정신의 요체가 바로 헌법정신으로 현현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부할 만한 전통으로 긍지를 가지기에 모자람이 없다.

촛불항쟁의 저변에는 이러한 역사의식의 계승이 작동하고 있었다.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물론 ‘최순실게이트’였다. 그러나 이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을 뿐 그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데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기간 가장 두드러졌던 폐해는 지배층의 무분별한 사익집단화 현상이었다. 청와대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에서부터 재벌 관료 정치인 언론인 학자, 심지어 사법부조차도 철저하게 결탁하여 특권을 향유하며 불법과 부정을 서슴지 않았다. 갑질이 난무하고 부패가 만연했으며, 비판세력에 대한 사찰 음해 탄압이 공권력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독재정권의 완벽한 부활이자 교활하고 세련된 파시즘의 대두였다.

다른 한편 역사와 교육에 대한 권력의 개입과 이를 전유하겠다는 망상은 왕조시대에도 지탄받았을 대표적인 폐정의 하나였다.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의식세계마저 지배하려 했다. 역사와 교육을 도구삼아 미래세대까지 세뇌하려 기도한 것이다. 이명박은 과거사위원회 폐지를 첫 번째 국정과제로 공언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공공연하게 뉴라이트세력을 지원해 식민지미화론 이승만국부론 박정희신격화를 전파시켜나갔다. 여기에 다수의 언론과 학자들이 부역자 역할을 자임했다.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같은 도발은 ‘역사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사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라는 연대기구를 조직하고 역사변조에 정면으로 맞서나갔다. 시민사회와 학계가 힘을 합쳐 뉴라이트의 교학사 고교한국사를 원천 봉쇄하자, 박근혜는 한 술 더 떠 아예 국정 한국사교과서 편찬이라는 강수로 맞불을 놓았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다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를 구성해 전 국민을 상대로 전국적인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박근혜의 오만과 무지는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결과는 놀랄 정도였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교육부와 교육청 수구언론과 극우단체를 총동원하고 전력을 기울여 역공작까지 벌였음에도,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며, 결국 폐기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박근혜가 국가기구를 동원해 총력을 기울인 역사쿠데타가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 교육계는 물론 국민적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시대착오적인 한국사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의 빗나간 효도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그를 권좌에서 쫓겨나게 하는 한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구국의 지도자 박정희’라는 우상화의 허구를 드러내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했다.

친일세력 대 항일세력, 독재세력 대 민주세력, 냉전세력 대 평화세력. 어떤 이들은 이분법적인 역사해석을 경계한다. 그러나 견고하게 뿌리박은 수구세력은 결코 자발적으로 특권을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작업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과 관용을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엄혹한 것이다.

내년은 3·1독립운동 100주년이다.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려 백여 년 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공화주의가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설 기회를 맞았다. 이를 위해서는 사익집단의 재생산 구조를 타파하고 민주시민을 양성하여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그 지름길은 역사인식의 정립과 민주주의 교육, 그리고 생활 속의 실천이다. 그래서 단언컨대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18-10-29> 프레시안

☞기사원문: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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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고 이이화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오는 18일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경황 중에 선생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 19 감염증이 번지고 있던 어수선한 형편에 제대로 추모의 뜻을 모을 겨를도 없이 놓아드려야만 했다. 고인을 따르던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많은 후진이 안타깝게 여겼지만, 격식을 싫어했던 생전의 선생을 떠올리면 간소하면서도 진정이 담긴 장례가 오히려 어울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시대의 반항아이자 학계의 이단아였다. 한국사 전 분야에 두루 해박했으나 그가 집중했던 관심사는 동학농민혁명, 일제의 전쟁범죄와 친일문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 민중의 역사, 약자의 역사였다. 남들이 쉬이 발 담그지 않는 분야를 기꺼이 전문으로 삼았다. 그의 풍모는 그냥 학자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투사에 가까웠다.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란 헌사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성과를 남긴 만큼 선생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전 22권에 달하는 한국통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학술서적으로서는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기록함으로써, ‘강단의 역사’에서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신기원을 열었다.

전 22권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 지평 넓혀
동학혁명 농민군 위상 자리매김도
‘만화 한국사’ 내고 아이들 스타로
선생의 길 따라가야 할 책무 남아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의 위상을 제대로 자리매김한 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을 간행하여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특별법 제정에 진력하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통한 진실규명과 유족의 명예회복에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으며 이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종로의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은 수십 년간에 걸친 선생의 노고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한일 과거사 청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와 촛불혁명 등 당대 역사문화운동의 맨 앞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사자후를 터뜨리며 역사를 변조하려는 무리를 꾸짖던 선생의 기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학술연구와 현실참여를 온몸으로 일치시킨 시대의 참스승이었다.

살아생전 선생께서 가장 좋아했던 별호는 ‘역사 할아버지’였다. <만화 한국사 이야기>가 나온 뒤 선생은 어린이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어디에서든 만나면 “역사 할아버지다!”라고 환호했다.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쉬운 글쓰기와 신선한 시각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이화의 최대 업적은 역사학의 대중화와 사회화”라고 입을 모은다.

선생은 역사학계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많은 후학에게는 인자한 어른이자 다정한 벗이었다. 그는 문벌 학벌 직위 연배 등 이른바 족벌과 서열문화를 배격했다. ‘꼰대’스러움을 철저히 혐오했다. 그래서 항상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술잔을 나누며 격의 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나날들, 유쾌했던 그 자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선생의 후광이 빛나는 만큼 남긴 자취 또한 선연하다. 그의 부재가 던져주는 상실감도 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뚜렷한 ‘역사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가야 할 책무만 남아있을 뿐이다.

<2021-03-16> 한겨레

☞기사원문: “아이들에겐 ‘역사 할아버지’ 후학에겐 ‘인자한 벗’이셨죠”

수, 2021/03/1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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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가득한 전장의 참상 낱낱이 기록하다

<태평양실기집>을 남긴 고 장윤만씨.
만화사우곡’ 마지막 부분.

◇ 오키나와 전투, 전범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

오키나와 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범인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전투다.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오키나와에서 인간신경이 무너지는 원인은 광적인 적과의 끝없는 근접전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광적인 근접전이란 “덴노 헤이카 반자이” 라며 달려드는 자살돌격을 의미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온 국민을 세뇌시켰다. 일본인들은 ‘천황=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사후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다고 믿게 됐다. 이렇게 평범한 일본인들은 살인마로 둔갑됐다. 이미 수년전, 일본군은 1937년 난징 대학살에서 ‘100인 참수경쟁’을 벌였고, 이 사실을 신문에까지 냈다. 일본군은 1945년 패망 직전에도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며, 할복자살·자살돌격의 광란을 이어갔다.

1945년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6월 상반기 동안 하루 평균 1,000명 이었다. 하반기엔 6월19일 2,000명, 20일 3,000명, 6월21일 4,000명 이상이었다”며 6월19일 이후엔 대부분 자살한 일본군 사상자수를 보고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원주민들에게도 ‘미군이 강간하고 잔인하게 죽일 것’이란 거짓말로 겁을 줘, 적어도 9만5000여명의 집단자살을 유도했다. 미군측 추산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다. 미군 14,009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1945년 4월 게라마 제도에서 미 제77사단에 나포된 자살공격보트. 섬 전체에 잘 흩어져 위장된 은신처에서 350척 이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USA-P-Okinawa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해병대와 동굴 등에서 나온 오키나와의 주민과 어린이.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에서 미군포로가 된 장윤만씨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를 앞두고 3월 26일 오키나와 24㎞ 서쪽 섬인 게라마 제도의 자마미도, 아카도에 우선 상륙했다. 미군은 이 섬들에 있던 350척의 자살특공보트(신요)를 제거했다. 게라마의 주요진지는 5일 만에 미군이 점령했다. 게라마 도카시키도의 산 속에 숨은 일본군 사령관과 패잔병 등 300명은 미군의 식량지원을 받으며 종전(9월) 까지 3개월간 무혈대치만 했다.

게라마 제도에는 ‘아리랑 비’가 세 군데나 있다. 도카시키도에는 故배봉기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7명이 끌려와 있었고, 오키나와 전체에는 60여개 위안소에 60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아카도에서 도망가다 잡힌 조선인 12명을 총살했다. 총살 장면을 목격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총살되기 직전에 쌀밥 한 공기씩을 받아들자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는 자신의 키 길이만큼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서면 일본군이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 않아 구덩이에 덮은 흙이 움직이면 일본도로 몇 차례나 찔러서 죽였다고 한다.

장윤만씨는 1945년 6월8일 자마미도의 산에서 미군에 체포 됐다. 오키나와 제1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그리운 경북 상주의 집으로 귀환 했다.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조선인 노동자(군속)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2005년 5월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건립한 ‘부조’와 ‘한의 비석’.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실기집 징용거귀고생기 완성

귀환 후 장씨는 1948년 2월 ‘대동아전쟁 실기집’을 완성했다. 본문의 첫제목을 ‘왜정시대징용거귀고생기(倭政時代徵用去歸苦生記)’로 했다. ‘대동아전쟁실기집’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면서 ‘태평양전쟁실기집’으로 변경됐다.

이 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세남매의 아버지인 장윤만님이 거주지인 공성면 사무소에 징발·집결한 이후 오키나와에서 포로가 되기 까지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희귀 자료다 ▲오키나와 현지로 수송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한인·일본인 관리들과 군인들의 말과 행위, 노예선을 방불케 하는 수송선의 이송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자살특공보트의 준비와 계획, 조선인에 대한 감금·만행· 학대·살육 등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만화사우곡>은 죽은 동료에게 쓴 글의 형식을 빌어, 고국산천과 동료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 드라마·영화·그림 등 문화 예술의 소재로서 활용가치가 높다고 분석했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7>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3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금, 2021/03/1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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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회부는 지난 3월 1일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명단과, 그들의 적나라한 반민족 행위를 담은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해 보도했다.

간도참변은 1920~21년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역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다수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공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학계를 포함해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입장에서 이들 48명은 충실한 하수인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족 학살에 가담한 반역자다.

48명의 한국인 경찰관들의 역할은 다양했다. 첩보 수집,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 회유 등만이 아니라 직접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다.


[연관기사]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 100년 전 민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사료 발굴을 기초로 한 탐사보도를 꾸준히 해왔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시의성이 있을 때마다 단독 보도를 계속해 왔다. 이번 자료 역시 이런 꾸준한 추적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KBS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일본 외무성(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 산하 자료실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과 관련된 고문서 다수를 복사해왔다.

이후 전문가들과 함께 해당 문서들에 대한 번역과 검토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고, 지난해 가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정확히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일제가 이들의 공적을 결재한 문서였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추가 취재에 돌입했고, 본격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3.1절에 맞춰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 경찰 등에 수여하는 상훈 중 하나)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 KBS 발굴 자료에 보훈처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

보도 이후 남은 과제는 크게 2가지다. ▲문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위 경찰관들의 친일 이력을 병기할 것인가다.

먼저 한국인 경찰관들로부터 체포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심사하는 문제다. 이번에 발굴한 문서에는 간도참변 과정에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유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KBS 보도 이후 국가보훈처는 해당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KBS에 요청했고 취재진은 이에 협조했다. 보훈처는 “자료를 분석해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강우범 선생(이명: 강구우)의 추가 독립운동 행적을 추정할 만한 내용이 자료에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훈처는 “인적사항 및 활동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동일인이 확인될 경우 공훈록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역대 기관장 친일 이력 전수조사…”왜 이리 소극적인지”

또 다른 과제는 친일 이력이 있는 고위 경찰관들의 이력 처리 문제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역대 청장과 서장 70여 명(중복 포함)을 확인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친일 이력에 대한 병기 또는 언급 없이 재직 사실만 기재돼 있었다.

KBS의 보도 이후 경찰은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역대 경찰 기관장 명단 간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찰은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 기준에 따라 공통 적용할 사안”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기도는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실을 병기하고 있다.

경찰은 또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친일파 조사를 위한 헌법기구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말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경찰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입장에 대해 역사단체들은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고, 그 당시 조선인 친인 경찰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며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 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청사 안에 세우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다졌다.

이후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 다시 말해 자신들의 ‘그늘’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고 청산 작업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0> KBS 

☞기사원문: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일, 2021/03/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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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00년 전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이른바 ‘간도참변’ 당시, 일제에 협력해 동족을 학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 그리고 이때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KBS가 최초 발굴해 보도해 드렸는데요.

보훈처가 이 자료를 제공받아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도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기로 했는데,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에 대해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송락규 기잡니다.

[리포트]

100년 전 일본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민간인들을 학살한 간도 참변.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차출돼 학살 현장에 가담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이름과 공적을 기록했습니다.

간도에 파견된 한국인 경찰들은 무봉촌과 의봉촌 등 간도지역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하는가 하면, 장암촌 부근을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을 조사하고 가택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관에 의해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17명.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4명뿐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KBS 보도 이후 자료를 제공받은 국가보훈처는 자료 분석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조사를 해서 발굴하는 사업들을 반드시 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70여 명의 역대 청장, 서장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KBS의 보도와 관련해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것에 대해선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해야 할 사안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방 뒤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공식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거든요. 해방 후에 대한민국 경찰이 조선인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소극적인지…”]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지만, 친일 역사에 대한 성찰 노력은 여전히 더디기만 합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영상편집:이재연/그래픽:최창준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2-23> KBS 

☞기사원문: 보훈처 “간도참변 유공자 발굴”…경찰 과거사 반성 또 미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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