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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이 제시하는 21세기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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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이 제시하는 21세기의 존재론

익명 (미확인) | 월, 2018/10/08- 15:48

현대과학이 발견한 자연법칙중에서 존재론과 우주론으로 연결되는 내용을 찾아 본다면 아무래도 물리영역에 대해서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및 복잡계이론 그리고 마음에 관하여는 인지과학으로 압축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존재론을 모색하기전에 오늘날까지 인류문명의 토대가 되어온 서구의 존재론부터 먼저 검토해보겠습니다!

서구의 존재론은 그리스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플라톤을 거쳐 이후 기독교신학과 근대철학에서 활짝 만개한 실체론substance ontology이라할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becoming의 철학과는 상반되는 존재being의 철학을 구축하였는데 그 핵심은 사유와 존재는 일치하기에 오직 사유할 수있는 것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는 오로지 언어logos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데 언어의 특성을 살펴보면 언어는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으며 단지 실재들의 정태적인 공통점을 추출하여 이들을 존재의 고유한 속성,본질인양 추상적으로 관념화함으로써 존재를 명사적,형용사로만 설명되는 고정불변의 실체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해석할 수 있다라는 유용성때문에 존재를 실체로 규정하는 실체론이 서구의 존재론으로 내려오게된 것입니다.

칼럼_181008

하여 실체론이 서구의 존재론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어가면서 실체는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신, 근대의 주체, 현대의 표상성으로 이름만 바꾼채 오늘날까지 인류 대다수의 존재론으로 확장되어 자리매김하면서 인간의 사고 및 행동양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한편 실체론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존재를 생성의 과정이 아닌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게되는데 실체란 제1원인자로부터 시작하여 선행원인자로부터 존재근거 및 작용인, 목적인을 부여받으며 고정불변의 속성을 지닌채 자기원인자self cause로 규정되는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모든 존재는 선행원인자로부터 존재근거와 작용인 및 목적인을 선형 인과론linear causality에 따라 일방적으로 부여받게 되는 즉, 선형인과율을 특징으로 하기에 역사를 선행원인이 제시하는 목적을 향해 단선적으로 이끄는 결정론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실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존재를 고정불변의 동일자인 실체로 보기때문에 그 속성상 실체들은 서로 내재적인 생성관계가 없는 독립된 존재들로 실재할 수 밖에 없으므로 각 실체들은 서로 등가적인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를 섭취Input하는 자와 에너지를 제공Output하는 자의 지배-피지배의 계서적 관계를 기본 질서구조로 가질 수 밖에 없으며, 특히 가치론적 측면에서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가치마저 지배적 실체로 간주하고 타자의 가치를 피지배적 실체로 간주하는 이분법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타자의 가치는 지배적 가치를 거부하는 실체로 보기에 이들은 반드시 변증법적으로 지양aufheben 즉, 배제, 제거, 박멸 시켜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과 위, 선과 악, 미와 추를 이분법적인 실체로 간주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선에 반대되는 악은 절대적 실체이기에 반드시 박멸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실체론은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키릴로스가 네오 플라토니스트이자 당대의 지성인 히파티야를 악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흔적도 없이 죽인 사례나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실체론적 존재론은 근대에 들어와서는 인간을 주체적 실체로 간주하여 자연을 인간의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결국 인간도 생존의 위기에 처하는 어리석음을 초래하였으며, 또한 이성마저 실체로 간주하여 세계를 이성과 야만으로 이분화시키면서 서구의 식민주의를 정당화시켜 결국 제국주의를 거쳐 인류를 참화속으로 몰아넣은 세계대전까지 초래하게 되었음은 물론 감성을 가진 자연을 이성의 하위에 두게 되면서 결국 자연은 인간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는 실체론은 결국 환경파괴의 이론적 앞잡이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이러한 실체론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표상성Vorstellung을 실체로 간주하여 강자들이 제시하는 담론Discourse, 예를 들어 자본주의를 마치 진리를 구현한 실체인양 포장하여 유포, 강제시킴으로써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을 원자적으로 분절화시켜 개인을 자본에 노예적으로 복무하는 노동자부품으로, 자본이 만든 상품을 무조건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소비자로 길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대까지 이어지는 서구의 실체론을 대체하는 존재론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요?

하여 필자를 이를 찾기위해 무엇보다 현대과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양자역학의 정통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재는 실체의 단일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이중적 속성이 중첩되어 있는 실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소립자는 서로 병립할 수없는 파동성과 입자성이 중첩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실체론에 의하면 존재는 단일 속성을 가져야하는데 양자역학은 서로 모순된 속성이 동시에 중첩되어 있다고 보고있으므로 기존 실체론 관점에서는 절대로 설명이 불가하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 칩에 서로 병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0과 1이 동시에 중첩하여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런 원리를 응용한 양자암호와 양자컴퓨터가 조만간 실현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닐스 보아도 자신의 상보성이론에서 존재는 반드시 2가지 상보량으로 설명될 수 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 또한 존재는 하나의 속성만 가지고 있다고 보는 실체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속성,즉 물리량은 반드시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2가지 상보량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존재는 상보량으로 이루어졌기에 하나인 위치를 알면 반드시 다른 량인 운동량을 알 수가 없기에 존재의 모든 속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알 수가 없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찰자가 보고자하는 물리량외에는 알 수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이론은 어떤 존재는 선행원인자로부터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찰에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보게되면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 인과적으로 생성을 이루며 우주를 같이 창조해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론에 의하면 비실재성과 비국소성이 존재의 속성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존재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또한 우주는 비분리되어있기에 전일적인 하나Holistic One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을 도모하는 과정이기때문에 실체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나아가 우주의 모든 구성요소는 서로 원인으로 또는 조건으로 생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서로 불가분하게 내재적으로 연결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양자역학은 실재는 단일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실체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한편 아인쉬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관찰자의 운동속도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즉 시공간과 관찰자의 운동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찰자의 시간과 공간이 바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서로 실재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끝없이 변해가는 생성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물질의 분포에 의해 결정되며 물질은 시공간에의해 새로 성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말하면 존재는 상호 인과작용의 과정이자 그 산물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습니다! 즉, 상대성 이론은 단순인과로 이루어진 실체론이 진실이 아니라 현대과학의 상호인과와 복잡인과(연기법)로 이루어지는 생성론이 새로운 존재론이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최근에 각광을 받는 복잡계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열린계open system 는 항상 자기조직화 과정을 밟고있는데 일단 계의 내부에서 내적 요동과 외적 섭동에 의해 되새김feed back이 시작되면 계는 그러한 되새김을 통해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이 극에 달하게 되며 이후 임계점critical point에 도달하게되면 그 직후 새로운 질서를 창발하던가 아니면 카오스로 사라져 버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우주질서는 내부 구성요소들의 자기조직화를 하는 되새김과 임계점의 창발emmeregence과정의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구성요소들의 상호 생성작용의 결과 특히,창발의 산물이자 영속적인 창발의 과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계의 창발이론과 유사한 이론으로 엔트로피 이론의 대가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산일구조이론이 있습니다!)

결국 복잡계이론도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즉 영속적인 생성의 과정이라고 보여줍니다! 이에따라 현대물리학자인 스몰린Smolin은 존재는 무엇이라는 것은 없고 단지 빨리 변하는 과정과 느리게 변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 필자의 철학적 스승인 화이트 헤드도 존재는 명사,형용사가 아니라 다만 부사,동사일뿐이라며 그의 과정철학에서 스몰린과 같은 관점을 갈파하였습니다!) 결국 현대과학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은 존재가 실체가 아니라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즉 생성의 과정이라고 보기에 필자는 21세기의 존재론을 생성론(달리 표현하여 과정론 또는 사건론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생성론에 의하면 존재라함은 시공간의 조건속에서 인과적 사건들의 연속적인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과적 사건에 개입하고있는 구성요소들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라는 입니다! 나아가 우주의 생성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있기에 모든 구성요소들은 공생자이며 따라서 생성론은 수평적 상호적 공생질서를 반드시 전제한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성요소들 모두 138억년에 이르는 우주 생성의 산물이자 영속적인 생성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서구의 실체론에 의거하여 구축되어온 현대의 사고체계,즉 존재론과 우주론을 폐기하고는 것은 물론 현대의 사회체제와 규범및 제도가 노정하는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적 방안을 구축하는 시도를 이제는 생성론의 관점에서 모색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체제의 내적 모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모색은 물론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대응책을 새로운 존재론에 기반하여 심도있게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존재는 모순된 속성이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있듯이 인간이라는 개체도 독립성을 욕망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귀소성도 희구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는 개체와 공동체를 이분적인 실체로 분열, 대립시키면서 어느 한 쪽으로 배치시키며 그 자리에 머물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인간 또한 서로 모순된 속성을 동시에 구유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간을 원자적으로 분절시키고 형식적 민주주의는 개체의 가치를 충분히 발현시키기 보다는 집단에의 순응과 종속만 강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이분법적인 모순의 희생물이 되기 전에 생성론적 관점에서 중도적 대안(개체의 독립성과 공동체의 귀속성을 중도적으로 승화시킨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제시하여 상생의 세계를 펼쳐가야 할 것입니다. 한편 현대물리학자인 볼프강 파울리는 존재는 정신과 물질의 상보량으로 이루어져있기에 정신과 물질의 중도적 태도를 취할때만이 진정한 본성의 발현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보적 중첩성을 인간에게 적용해본다면 과연 정신을 배제하고 오로지 물질만 추구하는 화폐적인 삶이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지도 깊이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나아가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을 보게되면 미국과 중국이 서로 제1원인자 되어 신제국을 건설하기위한 헤게모니 다툼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사고도 아직도 인간이 실체론적 존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기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러한 계서적인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기 위해서는 결국 실체론에서 생성론으로 21세기의 존재론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국 생성론에 기초하여 개체로서의 자유와 평등은 물론 공동체에로의 참여와 책임을 병존적으로 추구할 수있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ㅡ실체론에서 생성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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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란 결코 지위의 높낮이에 있지 않다

물론 ‘저항’을 생각하는 공무원이 지나치게 많게 된다면, 그 또한 작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상명하복과 동종교배식의 조직 분위기만으로 과도하게 충만된 관료사회에서 그 권위와 관행에 ‘저항’하는, “미움 받을 용기”가 있는 공무원들이 존재해야만 조직이 그나마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조직 내에서 ‘왕따’되지 않고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우리 공직사회도 비로소 희망이란 게 존재하고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제까지 공무원 신분으로 국회에 근무하면서 몇 번이나 징계와 면직 위기를 겪어야 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한 기자는 필자에게 “걸어 다니는 징계혐의자”라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필자가 직면했던 대표적인 징계위기는 바로 지금 이 기고문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는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국회 공무원들이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막강한 입법권한을 행사하는 ‘검토보고’ 제도에 위헌 소지가 있으며 따라서 폐지되어야 한다는 기고문을 신문에 발표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국회사무처가 필자에게 뒤집어씌운 혐의는 ‘품위 유지 위반’ 혐의였다. 그러나 정작 ‘품위 유지’를 어긴 것은 오직 그들이라는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 필자는 양승태 전(前)대법원장이 추진했던 상고법원 추진법안에 국민들이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미 과반수 이상의 의원들이 서명한 사실을 비판하고 상고법원은 절대 도입해서는 안 된다는 기고문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다시 징계위기에 몰렸다. 당시 국회 법사위 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필자를 징계하기로 했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훗날 풍문으로 들었다(그런데 이 기고문을 계기로 필자는 대한변협의 ‘상고법원반대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침내 상고법원을 저지시키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보수정당 출신의 어느 국회의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기고를 포함한 필자의 활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아랫것’의 ‘하극상’에 못마땅해 한 것이리라. 봉건성과 비민주성의 뿌리가 깊다. 한편 국회사무처의 한 고위간부는 언론사에 메일을 보내 필자를 비방하면서 필자의 기고문을 실어주지 말 것을 종용하기도 했고,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학술대회는 발표를 불과 며칠 앞두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필자의 발표만 돌연 취소되기도 했다.

 

국가가 요구하지 않지만,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자

필자는 조직 내에서 이른바 ‘왕따’가 되어 시대를 앞선 ‘혼밥족’으로 산지 몇 년이 계속되었고, 또 필자가 조직 내 ‘왕따’로 지내는 사이에 나이가 상당히 어린 한 직원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듣는 수모까지 당했다. 하지만 결코 이를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심성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사실상 면직의 위기였던 두 차례의 징계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서면경고’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발단은 무슨 비판을 하고 기고문을 발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공포(公布)’라는 법률 개념을 둘러싼 학술 차원의 논의로 인한 것이었다.

사실 필자의 이 문제 제기는 최소한 입법을 주 업무로 하는 국회로서는 법률적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로잡은 것으로서 상을 받아야 마땅한 문제였다. 하지만 필자는 관련 개념의 정확한 규정을 요구했다고 하여 결국 기관으로부터 징계까지 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기관장으로부터 공식석상에서 “×××”라는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다. “정신병자”로 지칭되기도 했다(이 문제를 국가인권위에 진정했지만, 국회는 자신들 소관 밖이라며 접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국회의 다른 문제를 국민국익위에 제기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국회는 소관업무 외라는 회신만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하여 국회 조직은 ‘그들만의 리그’, ‘성역’으로 영역화한다).

또 그 ‘서면경고장’을 준 총무과 계장은 필자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훈계’까지 하였다. 나아가 이 징계의 부당성을 바로잡고자 요청해 열린 고충처리 소청조차도 “근무한지 몇 년이나 됐느냐?” 등 조롱 섞인 언사만 들어야 하는 채 기각되었다. 이 소청에서 필자는 중요한 증인이기도 한, 진보진영 출신으로서 훗날 국회의원까지 된 한 당료의 증언을 요청했지만, 그는 귀찮은 탓인지 아니면 문제의식이 결여된 때문인지 출석을 거부했다. 무릇 정치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배려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가장 큰 덕목일 터다. 불행하게도 타인의 아픔에 대해 이렇듯 무관심하고 경시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정치인들의 근본적인 폐단이리라.

내게 서면경고를 ‘부여’한 기관 측은 서면경고가 징계도 아니고 아무런 효력도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징계도 아닌 것”을 그토록 한사코 ‘부여’하고자 했을까? 필자가 서면경고를 받은 바로 그 날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 직원들이 복도에서 지나치면서도 아는 체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그 날로부터 완전히 ‘왕따’가 되었고, ‘혼밥족’이 되어야 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것은 ‘주홍글씨’로서 곧 조직 내 ‘왕따’의 분명한 신호라는 점이었다.

언젠가 이 ‘법률 문제’에 대해 내가 발표를 하고 기관에서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여 학술토론회를 연 적이 있었다. 당시 토론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할 때 한 법대 교수가 내 직함인 ‘해외자료조사관’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석했던 과장은 “번역하는 사람이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건 예를 들어 방호과 직원을 앞에 두고 “문지기”라고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소한 ‘조사관’이란 명칭그대로 조사를 담당한다고 하면 될 일을 굳이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예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격 모독, 인권 유린이기도 했다. 나아가 “번역하는 사람”이 발표하는 자리에 토론하러 참석한 교수들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 과장은 이후 사과하라는 내 요구도 들은 척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과장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공무원으로 된 후 기관에서 개혁적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것을 보거나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징계를 받던 당시 나는 갈릴레오처럼 탄식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모두가 막무가내 1+1=3이라 강변하면서 1+1=2라는 나의 정답을 처벌하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부연해야 할 특징적인 사실은 필자에 대한 징계 사안이 묘하게도 모두 교수 출신의 기관장 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여당이 파견한 인물이든 야당이 파견한 인물이든, 또 그들이 입으로 진보를 내세우는가 보수를 내세우는가와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필자는 결코 그러한 비정상적인 압박이나 상황에 굴복하여 무릎 꿇고 살 수 없었다. 필자는 매일같이 어둠 속 새벽 출근길에 국회 정문을 들어서면서 다짐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저항’하고 ‘투쟁’하자. 그리고 ‘연구’하자.” 그러면서 감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국가가 요구하지 않지만, 오늘도 국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전심전력, 실천하고자 하였다.

 

모든 분야에서 비판자, 실천자가 나와야 하고,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2019년 11월, 필자는 청천벽력과 같은 아내의 췌장암 4기 확진으로 근무가 불가능해졌고 끝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과의 과장이라는 사람은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이나 문자도 없었다. 알고 지내던 한 국회사무처 고위 간부는 필자의 후임 채용에 자기 아는 사람을 도와준다며 정말 너무 경황이 없는 필자에 전화해 일언반구의 위로도 없이 필자가 수행했던 업무 내용 좀 보내줄 수 있냐는 어이없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또 내가 가슴이 무너지는 사연으로 직장을 떠났건만 국회도서관 노조 게시판에는 필자 후임 채용을 언급하면서 필자를 “문제아”라고 표현해 ‘조롱’과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아이러니하게도 이 노조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화목이 가득한 직장”이다). 물론 필자를 응원해준 국회 직원들도 적지 않게 있지만, 참으로 몰인성화(沒人性化)된 조직의 성격이 그대로 투영된, 어이없게도 슬프고 이기적이며 비인간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1760년대의 이탈리아의 계몽사상가 베카리아는 사람들이 분석적 탐구보다는 진부한 인상에 좌우되기 때문에 “생명과 자유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에서도 수많은 오판을 겪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지쳐 인내의 한도에 이른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괴롭혀온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은 가장 자명한 진리를 향해 열린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이제 진리를 향해 눈을 떠야 할 때이다.

민주주의란 결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비판자 그리고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정확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정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한 힘의 총화로써 우리 사회가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그리고 희망은 멀리 ‘추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곳에 ‘구체’로 존재한다.

모름지기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실천되어야 한다. 입으로 진보를 주창하는 인사일수록 정작 그 일터에서 진보의 가치를 실천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다. 공적 가치와 사적 이익 추구의 주관적 등치가 빈발한다. 자기의 삶터와 일터라는 가까운 곳에서는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침묵하고 방관, 동조하면서 오로지 멀리 ‘열매’와 ‘자리’만 추구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의 모순과 혼돈이 초래된 것이리라.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된다.

수, 2020/05/2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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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이 왜 국회에 존재하는지를 아는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당신은 국회도서관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국회도서관이 왜 존재하고 있으며, 원래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사실 국회도서관이 무슨 목적으로 국회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기관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국회도서관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국회의원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국회 직원, 심지어 국회도서관 직원 자신들조차도 거의 생각해본 적도 없고 또 아무런 인식도 관심조차 없다.

 

국회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진열하고 읽는 그런 곳이 아니다

 국회도서관이 과연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무슨 업무를 수행하는 곳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 ‘국회도서관’이라는 명칭에는 왜 ‘도서관’ 앞에 ‘국회’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이렇게 ‘국회’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고 한다면 (2) 과연 ‘국회’와 관련하여 어떠한 임무를 그 특성으로 하는 도서관인가가 분명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회도서관은 도서의 수집, 정리, 보존 업무를 위주로 하는 일반 도서관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들어가 책을 보고 자료를 찾는 그런 도서관이어서는 안 된다. 국회도서관이란 어디까지나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국회 내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국회’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영국 하원도서관의 『의회도서관을 위한 가이드』에는 “의회도서관은 입법부의 의원 및 증가하고 있는 의원의 보좌관이라는 특정하게 한정된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회도서관은 과연 이러한 존재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에 이런 의회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의회조사처의 역사를 살펴보면, 1900년대 초에 의회도서관 직원의 능력만으로는 대규모 연구기관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에 봉착했기 때문에 도서관 내에 입법정보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회조사처는 처음에 의회도서관의 6개 부서 중 하나의 기구로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오히려 의회도서관 전체보다도 질적인 측면에서 훨씬 중요한 부서로 발전하였고, 오히려 의회도서관이 의회조사처의 업무를 지원하는 거대한 정보 저장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세계 의회기구에서 해외정보 조사 업무는 모두 ‘의회조사처’ 기구에 소속되어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의회에서는 외교안보와 국제관계를 담당하는 ‘조사처’의 부서에서 수행하고 있다. 일본 역시 입법고사국의 해외정보조사실에서 수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국회 입법조사처의 직무 범위에도 ‘외국의 입법동향 분석 및 정보의 제공’(입법조사처법 제3조 5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도 해외정보 조사 업무는 여전히 국회도서관에 두고 있어 전체 입법지원 업무가 효율적으로 수행되지 못한 채 중첩되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아니 사실을 그대로 밝히자면, 국회도서관 내에 의회정보실과 법률정보실에 관련 석박사급 인력을 유지하면서 오직 그들을 활용해 국회도서관의 조직 유지 및 확대만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회도서관 내 전문 인력에게 승진의 기회나 계장 및 과장 등 간부의 길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의회 기구에서 ‘조사처’ 조직이 도서관과 별도로 분리된 프랑스 의회도서관은 직원수가 29명, 독일은 91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사처’가 통합되어 있는 영국의 경우에는 도서관 직원이 총 226명인데, 그 중 조사실에 82명이 배치되어 있다. 즉, ‘조사처’ 조직이 분리된 의회도서관은 기본적으로 100명 규모를 넘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일본과 미국의 경우에는 의회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는 우리의 경우와 전혀 단순 비교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현재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의 정원은 300명이 훨씬 넘는다. 이미 입법조사처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순수 도서관 기능’만을 수행하는 데 현재의 인력이 적정규모인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뒤바뀐 국회도서관의회도서관이란 사서가 지휘해서는 안 된다

현재 국회도서관의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은 거의 사서(司書)로 구성되어 있다. 국회도서관의 ‘의회정보실장’이나 ‘법률정보실장’이라 하면, 일반 사람들은 대단한 의회전문가 혹은 법률전문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직책들은 사서직 혹은 행정직이 담당하고 있다. 조직 구성에 있어서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조직 운용의 원칙을 지키고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그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배치한다는 뜻이다.

의회도서관이란 사서가 독점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독일 의회도서관은 일반 사서와 레퍼런스(입법지원 담당) 사서로 구성되는데 레퍼런스 담당 사서는 연구직으로서 일반 사서의 상위에 있다. 또 일본 국회도서관 입법고사국의 전문조사원의 대우는 행정부 1급에 준해왔다.

한편 사서에 관한 공무원 직제도 미국에서 일반 사서는 GS-7등급(GS; General Schedule, 미국 공무원은 GS-1등급부터 GS-15등급까지 분류되어 있다. GS의 숫자가 클수록 고위직이다)이고 전문성과 경력에 의하여 GS-9등급부터 GS-12등급으로 분류된다(그 이상의 등급도 가능은 하다). 이에 비하여 미국 의회도서관의 의회조사처 수석 연구원의 경우는 GS-18등급까지 승진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100에서 1016까지 순차적으로 구분된 공직 분류지수 중(숫자가 높을수록 직위가 높다) 일반직 사서(주제전문 사서 포함)의 지수는 204에서 779에 속해 있다. 여기에서 780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3급에 해당하고, 결국 일반직 사서는 3급 이상의 간부직에 임용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회도서관은 본래의 존재 이유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본말은 전도되고, 그 위상은 뒤바뀐 채 왜곡되었다. 감시가 결여되면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제 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의 설치 목적에 부합하는, 국회도서관다운 국회도서관으로서의 위상이 복원되어야 한다.

화, 2020/06/0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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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자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어 봅니다.

현대철학은 니이체와 프로이트 및 마르크스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니이체는 존재는 생성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폐기하고 생성론을 새로운 존재론으로 제시하였으며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에 칸트의 주체철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선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서구의 관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시하면서 물적 토대에 대한 구조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는 토대인 생산양식의 혁명을 주장하였으며(마르크스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객관적인 결정론을 버리고 토대의 모순이 극대화된 임계상황에서 정치적 의식화를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지가 고양되었을때 토대인 자본주의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인 슬라보이 지젝은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을(대중의 계급의식이 소멸함에 따라 토대의 혁명은 불가능해졌기에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의 혁명이라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유와 무가 둘이 아니듯 불교의 중도사상과 양자역학 의 중첩성의 원리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하나만의 혁명은 온전한 변혁이 아니기에 결코 그에 따른 희생에 비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마르크스의 혁명이 종국에 실패한 것은 상부구조에 위치한 욕망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상부구조는 토대에 종속된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이분법적인 실체론에 입각한 유물론의 필연적인 결론이라 할 것이므로 욕망의 본성을 반영하지 아니한 새로운 생산양식의로의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토대에 대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즉 상대적 결정론을 주장한 발터 벤야민이나 조르주 루카치의 견해를 계승한 지젝의 상부구조의 혁명론도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결코 절반의 치유책에 불과하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한 대중의 기본적 욕망의 결핍을 대부분 해소하였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욕망의 절대적 결핍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서 자본이 자신의 확장 및 심화를 위하여 생산한 잉여욕망을 마치 본래적인 인간의 욕구인 것처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에 대중은 무한한 잉여욕망을 당연한 본성인 것처럼 추구하다보니 결핍에 따른 계급의식 또는 투쟁의식을 상실하였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을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를 못 벗어난 대중이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할 수 있을까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진지전 이론을 개진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통을 옹호하는 전통적 지식인 대신에 유기적 지식인이 전선의 참호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이를 해체하는 진지전을 펼침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국가나 자본을 해체하여 재구성 하자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보다는 깨어있는 유기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를 해체하자는 의미에서의 혁명이론운 제시한 그람시의 이론이 더욱 실현가능성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볼 때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유물적인 심층분석 보다는 특정 정치집단이나 특정 진영의 이데올로기나 포플리즘의 전위로서 정치적 구호에 흡수되어 자신의 변혁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착잡함을 금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진보 또는 보수의 이항대립적 대결구도로 해석하면서 피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할 뿐 결코 한국의 국가재벌독점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온전한 혁명은 상부. 하부구조의 동시적 변혁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언듯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바램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는 온전한 혁명은 이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중은 물론 지식인조차 자본이 만든 잉여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토대와 상부구조를 변혁할 선구적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지혜와 토대를 변혁할 대중의 결집된 주체의식과 투쟁의지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을 전위에서 창도하고 대안을 설계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토대와 상부구조를 주체적, 자발적인 혁명에 의해서는 불가하므로 결국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슬프지만 어쩔 수없이 추단해봅니다. (그나마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회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사회의 독립성과 자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민운동이 시민단체운동으로 협소하게 왜곡되어버리고 그나마 시민이 아닌 실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그 결과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시민운동을 한 단계 레벨업을 시키기보다는 대부분이 정치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결코 시민운동과 주체는 물론 목적과 작동방식이 다른 정치운동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려 시민운동의 존재의미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기에 이제는 시민운동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페스트에 의해 중세가 몰락하고, 세계대전에 의해 근대가 몰락한 역사가 반증하고 있듯이 현대 산업화의 모순에 따른 인간사회의 불평등과 지구적 차원의 파괴도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여 이번 코로나 팬더믹 사태가 인간의 생존방식과 생산양식의 변환을 가져올 사건, 즉 알랭 바디우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부재의 진리’를 찾는 노력도 우리에게 그나마 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쳐주고 있읍니다만 이 또한 관념적 철학자의 현실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지젝은 불가능에 도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고민해야할 문제점은 현재의 생산양식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해야 할만큼 치명적인 결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복지국가를 통하여 이미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시켜왔기에 다른 보완재로 치유가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기본모순인 계급모순외에 한국만의 독특한 재벌자본주의에 따른 독점모순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불평등 모순 및 기타 부가적 모순인 분단모순 및 지역모순 등을 열거할 수가 있는 바, 과연 그러한 모순들이 한국사회 시스템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불가능한 치명적 상황을 만들었기에 대체재가 필요한 임계상황인지 아니면 재정비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으로 치유가 가능한 상태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으나 어떤 결론이 나던지간에 이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결국 구조적인 접근방식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내놓아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진보정권이라하여도 지금껏 계급과 계층 및 집단을 망라하여 한국사회 모순에 대한 구조적인 진단과 근본적인 치유책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집단을 초월하여 진지한 연구와 성찰과 변혁의지가 부재한 실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안목으로 한국사회를 구조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학적 자세를 갖춘 열린 대중과 유기적 지식인의 참여와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 2020/06/1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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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가 지나간 곳엔 시체가 즐비하다. 흔히 사모펀드를 기업사냥꾼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모펀드는 기업사냥꾼이라 불리는 것도 모자라 사냥한 후에는 기업을 완전히 시체로 만들어 버리고 장사를 지낸다. 그래서 나는 사모펀드를 ‘기업장의사’라 부른다. 사모펀드가 어떤 식으로 기업의 흡혈귀와 장의사 노릇을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미국의 예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예다. 경상북도 영덕으로 가보자.

사모펀드가 기업장의사임을 즉시적으로 보여주는 뉴욕타임스 기사. “어떻게 사모펀드가 신발소매업 체인점 페이리스(Payless)를 장사 지냈는가”란 기사 제목이다.

 

경북 영덕주민들 두 번 울린 사모펀드

경상북도 영덕에 가면 영덕풍력발전단지가 있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뒤에 지역주민들의 분노와 눈물이 있다. 이 풍력발전공사를 외국계 사모펀드 회사가 이른바 “먹튀”(먹고 튄다는 속어)를 했기 때문이다. 호주계 사모펀드 맥쿼리PE가 영덕풍력발전공사를 인수한 것은 2011년, 200억 원을 들여 유니슨 등으로부터 매입했다. 그리고 2019년 삼천리그룹의 삼탄에 매각했다. 7년간 맥쿼리가 소유주로 있는 동안 올린 수익은 630억 원. 그러나 현재 회사는 자본잠식상태다. 깡통회사란 뜻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018년 한 해만 보더라도 영덕풍력발전은 한 해 동안 약 81억 원의 매출에 영업이익은 약 19억3천만 원을 올렸다. 하지만 이자비용으로 45억 원을 지출해야 했다. 이렇게 7년간 맥쿼리에 이자비용(전환사채 차입에 대한)으로 지출한 것이 총 319억 원이다. 결국 모든 것을 계상하면 결손금 117억 원이 자본총액 40억 원을 초과해서 자본잠식 상태에 놓인 것이다. 빚밖에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멕쿼리는 2013년 영덕 근처의 영양풍력발전공사까지 인수했다가 작년 영덕풍력발전까지 한데 묶어 삼탄에 1천9백억 원을 주고 매각했다. 이로써 수백억 원의 매각 수익에 이자, 거기에 7년 동안 올린 수익을 쏙 빼먹고 튄 것이다. 영덕군이 올린 수입은 부지 대부료로 매년 331만 원 받은 것이 전부. 각종 기반시설 지원 등에 군민 혈세가 들어간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지역 경제 활성화라며 기대한 일자리는 고작 7명이다.

그럼 이게 다일까?

새 인수자 삼탄 역시 사모펀드와 은행을 끼고 영덕 및 영양풍력발전공사를 차입매수 했다. 각각 192억 원과 854억 원을 30년간 대출로 연리 12%의 이자를 내도록 했다. 해서 영덕과 영양풍력발전공사는 연간 각각 23억 원, 102억 원의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익을 내봤자 아무 소용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계속될 것이다. 영업을 할수록 손해만 쌓인다. 더 못 버티고 곧 문을 닫을 것이다.(『영남경제』, 2019. 9. 5; 2019, 9. 6; 2019, 9. 18).

 

기업흡혈귀와 장의사 사모펀드의 기업 고사 방식

다른 나라(미국) 이야기를 먼저 하면 관심이 덜 할 것 같아서 우리나라의 사례를 먼저 들었다. 그렇다면 사모펀드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것을 보면 사모펀드가 왜 기업장의사와 기업흡혈귀란 명칭이 어울리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사모펀드는 경영상태가 안 좋은 회사를 좋게 만들겠다는 명분을 들고 회사를 싼 값에 매입하거나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경영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을 한다. 이 뒤에 따라오는 명분들은 수익을 내는 튼실한 회사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 하겠다는 것이다. 매입 대상 업체는 둘 중 하나다. 상장사의 주식을 대거 매입해 상장을 폐지해 나중에 재상장해 매각 수익을 얻거나, 비상장사를 사서 상장사와 합병하는 우회상장을 통해 가치를 높여 매각해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공통된 것은 사정이 어려운 회사가 사냥의 대상이다.

둘째, 그러나 그 명분은 말만 그럴 뿐, 회사의 구성원이나 회사 자체를 위하지 않고 오로지 주주나 소유주의 이익 실현을 위해서 무지막지한 구조조정 등을 강행한다. 그렇게 해서 장부상으론 이전 보다 괜찮은 회사로 거듭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매각해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 즉 회사의 정상화나 건실화 등이 목표가 아니고 오로지 산 것 보다는 비싼 값에 매각하는 것이 사모펀드의 목표다.

셋째, 회사를 매입할 때 절대로 자기의 돈으로만 하지 않는다. 남의 돈을 빌려 매수한다. 즉 차입매수(leverage buyouts)를 한다. 그 빚과 이자는 고스란히 회사에 떠넘긴다. 그러나 알맹이(수익)는 철저히 주주들과 소유주의 몫이다. 그러면 회사엔 뭐가 남는가. 계속해서 손실만 쌓이고 고사하는 것밖엔 다른 방도가 없다. 사정이 안 좋은 회사에 도움은커녕 설상가상으로 빨대를 꽂은 격이다.

넷째, 이렇게 부채더미를 쌓고 있는 회사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사모펀드는 이런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어떤 짓을 하는가? 부채에 대한 파생금융상품인 “대출채권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loan obligations, 이하 CLO)을 발행한다. 부채를 담보로 해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 또 한 번 재미를 보는 것이다. 노리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험분산, 나머지 하나는 수수료로 인한 수익창출이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장사를 하다가 실제로 위험이 닥쳐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가 그 위험을 떠안아 주니까. 구제금융으로. 이들이 그 때 내세우는 명분은 대마불사다. 자신들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렇게 노나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잘 나갈 땐 그 열매를 온전히 자신들의 몫으로, 위기가 닥쳐 망할 땐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혈세로 대신 메워준다.

코로나19가 악성 회사채를 가지고 무모한 노름을 하고 있는 월가(사모펀드)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고 기사를 낸 뉴요커

CLO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온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 월가에서 써먹던 “부채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CDO)의 사촌 격으로 작동 원리는 똑 같다. CDO는 대형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업체로부터 받은 불량채권에 대한 위험을 분산하고 동시에 투자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써먹었던 일종의 대출에 대한 보험 상품으로 우량과 불량대출을 섞어서 위험이 없는 것처럼 살짝 분칠해 파는 것이다.(김광기, 『정신차려 대한민국』, 2012). 본질 면에서 CDO와 똑같은 CLO는 대형금융회사나 사모펀드 자체가 발행, 관리 및 판매한다. 그렇게 거짓되게 위험을 분산한 것처럼 보이게 한 후 투자자를 모아 수수료까지 챙긴다. 그러나 위험은 인위적으로 희석되어 가려졌을 뿐 여전히 상존하고 있으며, 위기가 오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면 사모펀드는 망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이 들고 나올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대마불사론이다. 2008년 월가가 써먹던 수법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이게 바로 금융주도자본주의(finance-driven capitalism)의 실상이다.

 

잉글랜드은행 전 총재 마크 카니의 경고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전 총재 마크 카니(Mark Carney)는 2019년 1월 영국 하원에 나와 전 세계적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회사부채(corporate debt)의 폭증에 대해 경고했다. 당시는 코로나 때도 아니고 트럼프가 “나(미국)홀로 잘나가!”하면서 경제의 호황을 자랑하던 때다. 카니는 파행적인 회사부채 시장을 2008년 금융위기 때에 견주어 경고했다. 회사부채 시장에서의 이른바 “약식대출”(covenant lite loans: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확인하는 절차(검사)를 생략한 채 이루어지는 대출)의 만연이 “서브프라임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채권인수’(no doc underwriting)라는 의미에서 그 때와 동일선상에 있다”고 증언했다. 2019년 1월 현재 차입대출의 85%가 약식대출이다(Bank of England, Financial Stability Report, Issue No. 44, November 2018; “Leveraged loans at pre-crisis levels — and I’m worried, says Carney,” The Times, Jan. 17, 2019; “The risky ‘leveraged loan’ market just sunk to a whole new low,” Business Insider, Feb. 17, 2019).

급증하는 회사채와 레버리지대출을 2008년 금융위기에 견주어 경고하고 있는 잉글랜드은행 전 총재 마크 커니 <출처: 타임스/로이터스>

그런데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영국은행 총재의 저런 경고는 개 코로도 듣지 않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수십 년 전에는 소위 잘나가는 회사라면 높은 신용등급과 과도한 부채의 회피가 그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것은 완전히 구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돈 놓고 돈 먹는 금융주도자본주의에 편승한 뒤로는 사모펀드가 이것을 선도했다. 인수와 자사주매입을 위해 많은 대출이 이루어졌고 차입매수가 성행했다. 미국 연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4분기부터 2019년 4분기까지 비금융권기업의 회사부채는 총 6조1천억 달러(7,527조 원)에서 10조1천억 달러(1경2,463조 원)로 증가했다.

회사부채는 채권발행으로도 조달되었지만 위에서 말한 새로운 형태의 이른바 “레버리지대출”(leveraged loans)의 확산으로도 이루어졌다. S&P글로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에까지 대출해준 협조융자(syndicated loan: 둘 이상의 은행이 공통의 조건으로 기업에 자금을 융자해주는 대출) 총액은 5,540억 달러(684조 원)에서 1조2천억 달러(1,481조 원)로 급증한다. 이런 레버리지대출은 앞에서 언급한 CLO를 창출하는데 사용되었다. 2019년 말까지 7천억 달러(864조 원) 상당의 CLO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빚을 놓고 그것에 대한 금융상품이 투자 상품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위험천만한 돈 놓고 돈 먹는 돈 놀이가 지금 월가에서 사모펀드 주도하에 가진 자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The Coronavirus Is Exposing Wall Street’s Reckless Gamble on Bad Debt,” New Yorker, May 24, 2020). 문제는 그런 돈 놀이에 말려든 기업들과 거기에 속한 종업들이 말라 죽어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백화점의 서거: 니만마커스와 JC페니

5월 초 미국의 유명 백화점체인 두 개회사가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니만마커스와 JC페니다.(“Neiman Marcus and the demise of the US department store,” Financial Times, May 8, 2020; “J.C. Penney, 118-Year-Old Department Store, Files for Bankruptcy,” New York Times, May 15, 2020). 두 회사는 모두 미국 백화점 업계의 대명사이다. 니만마커스는 최고급백화점이고, JC페니는 서민들을 위한 백화점이다. 두 회사의 역사는 각각 113년, 118년으로 둘 다 유서 깊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매체들은 코로나 사태와 디지털시대에 맞는 변신에 실패를 파산신청의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 내가 보는 견해는 다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이유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코로나사태가 백화점에 직격탄으로 작용한 것은 도표에서 보듯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 이들 백화점이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기저질환이 도사리고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는 주식과 부동산 빼고는 나아진 게 없었다. 그 대표적 예가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쇼핑몰들의 폐쇄다. “쇼핑몰의 서거 경제학과 향수”라는 제목의 2015년 뉴욕타임스 기사

그 기저질환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008년 이후 미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하지만 증시와 부동산시장만 호황이었을 뿐 나머지 부문에서는 오히려 나아진 것이 없었다. 백화점의 서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백화점과 단독 점포가 들어선 대규모 쇼핑몰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전역에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쇼핑몰은 미국인들에겐 애틋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딱히 재미라고는 달리 찾을 수 없는 건조한 미국식 삶 속에서 그나마 쇼핑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고 놀기도 하는 곳이 쇼핑몰이기 때문이다. 하교 후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친목을 도모하던 곳 중 하나도 쇼핑몰이다. 그런 곳이 문을 닫으니 뉴욕타임스 같은 곳은 쇼핑몰의 서거가 향수를 불러온다고 제목을 달아 기사화를 했던 것이다.(“The Economics (and Nostalgia) of Dead Malls,” New York Times, Jan. 3, 2015). 그런 기사가 났던 것이 2015년이다. 그리곤 마침내 이제 백화점의 종언까지 고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는 이미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있던 백화점의 발에 살짝 걸린 돌부리와 같다. 다시 말해, 코로나가 미국 백화점 사망의 주효한 원인은 아니다. 이미 코로나 이전에 심각한 기저질환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니만마커스와 JC페니 등이 파산보호신청을 하자 백화점의 서거를 알리는 2020년 4월 뉴욕타임스

 

기업장의사 사모펀드에 의해 이미 고사 중이던 업계

나머지 기저질환은 사모펀드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파산신청의 주된 원인은 사모펀드다. 이것들의 농단으로 백화점들이 완전히 작살났다. 바야흐로 디지털시대에 온라인 쇼핑으로 노선을 바꾸고 재기할 자구노력과 자생력조차 사모펀드는 완전히 압살했다. 수익이 나는 족족 배당금과 이자로 현금을 다 빼갔으니 그렇다. 어떻게? 맨 처음 우리나라 영덕풍력발전공사의 경우에서와 같이 말이다.

대표적으로 백화점 업계의 귀공자 니만마커스가 어떻게 엄청난 빚만 짊어진 채 빈껍데기만 남은 회사가 되었는지 보자. 현재 니만마커스의 부채는 50억 달러(약 6조2천억 원)이다. 심각한 수준이다. 2005년 사모펀드 TPG와 워버그핀커스(Warburg Pincus)는 51억 달러(약 6조 3천억 원)로 니만마커스를 차입매수 한다. 그리곤 2013년 사모펀드 아레스매니지먼트(Ares Management)와 캐나다연기금운용회사(CPPIB)에 60억 달러(약 7조 4천억 원)를 주고 매각한다. 이들 회사는 니만마커스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2015년 기업공개(IPO)를 시도하려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니만마커스는 지난 2년 동안 50억 달러의 부채를 조정해 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자는 수억 달러가 지출되었다. 2018년 마지막 회계보고엔 49억 달러(약 6조5백억 원)의 수익이 있었다. 그러고도 빚이 50억 달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은 매해 나는 수익이 한 푼도 안 남기고 거의 다 주주들의 배당과 이자 지불로 빠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디스는 니만마커스의 부채를 두고 “지탱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The Pandemic Helped Topple Two Retailers. So Did Private Equity,” New York Times, May 14, 2020;“J.C. Penney, 118-Year-Old Department Store, Files for Bankruptcy,” New York Times, May 15, 2020). 이런 판에 온라인쇼핑으로 전환하려는 자구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도 돈이 들어가는 일종의 투자인데 말이다. 거기에 들어갈 돈들이 주주들과 소유주에게 배당금과 이자로 다 홀랑 가버리는데….

 

사모펀드가 손 댄 소매업체마다 좀비기업으로

그렇다면 백화점만 그럴까? 아니다. 사모펀드가 손 댄 소매업체마다 사정이 똑같다. 그리고 기업은 회생은커녕 시체로 거듭나고 있다. 대표적 예를 두 곳만 더 보자. 옷가게 제이크루(J. Crew)와 중저가신발업체 페이리스(Payless)다.

먼저, 2011년 사모펀드 TPG와 레오나드그린&파트너스(Leonard Green & Parners)가 제이크루를 30억 달러(약 3조7천억 원)에 차입매수 한다. 소비자 옹호 단체인 <미국금융개혁연대>(Americans for Financial Reform)이 추산한 바, 2011년 이후 제이크루는 소유주인 사모펀드에게 배당금, 이자 및 수수료로 7억6천만 달러(약 9천4백억 원)를 지불했다. 니만마커스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쇼핑 등의 영업 전환 모색 등에 들어갈 돈은 한 푼도 없이 사모펀드가 탈탈 털어갔는데 무슨 자구노력이 가능했겠는가.(New York Times, May 14).

페이리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2년 사모펀드 골든게이트캐피탈(Golden Gate Capital)과 블룸캐피탈(Blum Capital)이 페이리스를 20억 달러에 차입매수 했다. 2015년 1월을 기준으로 과거 2년 동안의 에비타(EBITDA: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기업의 현금창출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를 보면 기가 막힌다. 페이리스는 그 기간에 3억2,200만 달러(약 3,986억 원)의 에비타(세전이자지급전이익)를 올렸다. 그러나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3억5,200만 달러(약 4,357억 원), 그리고 이자로 8,300만 달러(약 1,027억 원)가 돌아가서 손실만 기록했다. 이것을 쉽게 계산하면, 회사로 1달러(약 1200 원)가 들어올 때마다, 소유자에겐 1.09달러(약 1350원)가 대출자에겐 0.26달러(약 322 원)가 돌아가게 되어서 1달러 벌 때마다 계속해서 0.35달러(433 원)의 빚이 쌓이는 꼴이다.(“How Private Equity Buried Payless,” New York Times, Jan. 31, 2020).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딱 그 짝이다.

뉴욕시 진보단체인 <대중민주의센터>(The Center for Popular Democracy)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이후 파산한 소매점 체인 14개 중 10개가 사모펀드가 소유주로 밝혀졌다.(New York Times, May 14). 이렇게 기업은 시체가 되고, 사모펀드는 살이 통통 오른 승냥이와 장의사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먹거리와 시체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린다.

 

워런과 코르테스는 왜 코로나사태 동안 기업의 인수합병 금지를 주장 했는가?

그러니 회사들로서는 어떤 노력을 경주해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가 덮쳤고 완전히 고꾸라졌다. 그렇다면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언제가 그들에겐 가장 호기인가? 바로 헐값에 기업을 살 수 있을 때다.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봐서 비싸게 팔면 되니까. 이 칼럼시리즈 초반에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부동산 투자의 철칙인 “바이(buy), 픽스(Fix), 앤드 셀(Sell)”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팔 기업이 사라지면 사모펀드에겐 안 좋은 시기다. 따라서 코로나19야 말로 그들에겐 최적기다. 기업사냥을 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위험과 위기는 사모펀드의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것이라 사모펀드가 정말로 오매불망 기다리는 시간이다. 위험을 빙자해 고수익을 올렸으니(CLO가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 위험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위기가 있어야만 장사가 되는 모순이 사모펀드가 떼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주된 동력이다. 또한 위기 시엔 파산하는 기업체가 즐비하다. 그것들을 헐값에 거머쥘 수 있으니 위기란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위기는 사모펀드에겐 노다지인 셈이다. 죽어가는 회사를 기사회생 시키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직 관심은 그걸로 더 큰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사모펀드가 막강한 현금동원 능력을 가지고 기세가 등등한 사이 이들에게 더 많은 투자가 들어오고 그걸 가지고 전 세계 사업들에 마수를 뻗치며 제국으로 등극하고 있는 것이다.(“Scary Times for U.S. Companies Spell Boom for Restructuring Advisers,” New York Times, March 3, 2020; “Some Big Investors Smell Profit in Virus-Plagued Companies,” New York Times, April 3, 2020).

이 때문에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과 오카시오 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가 코로나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인수합병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수합병이 대다수는 사모펀드에 의해 벌어지기 때문이다.(“Elizabeth Warren and AOC’s Call for a Merger Ban May be a Moot Point,”, CNN, May 5, 2020).

 

사모펀드가 이끈 금융주도자본주의의 폐해

소위 미국식 선진금융의 핵심은 전 산업부문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금융화라 한다. 그것이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금융주도자본주의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선두에 현대의 제국 사모펀드가 있다.

산업자체가 이런 식으로 바뀌면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하나는 기업이 저렇게 좀비가 되고 파산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 종사하던 근로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가 실업자가 된다. 이런 펜데믹 시기에는 영원한 실직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2018년 현재, 미국에서 사모펀드가 소유한 회사에 약 880만 명의 근로자가 있으며, 이 회사들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한다.(New York Times, Jan. 31, 2020).

두 번째 문제는, 노동이 신성하다는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경상도 말로 “쌔(혀)가 빠지게” 노력해서 돈 버는 것에 대한 회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일 게 뻔하다. 이것은 경제와 관련한 관념과 가치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세상 어디에 저런 젖과 꿀이 흐르는 장사가 있겠는가. 땀 흘려 일 안하고 남의 돈 빌려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기술만 터득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득달같이 덤벼들어 하려 들 것이다. 이게 바로 금융주도자본주의의 폐해다. 경제와 노동 가치의 왜곡, 그것은 기업의 시체가 늘비해진 상황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을 막을 방법은 딱 하나. 규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는 월가의 대형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보다 훨씬 더 느슨하다. 그 틈을 타고 제국들이 탐욕의 눈이 박힌 머리를 바짝 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완화와 당국의 방치는 한국이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와중 우리에게도 사모펀드란 이름이 어느덧 익숙해지고, 이윤에 이악스런 자들은 남 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사모펀드에 벌써부터 발을 담갔다. 사모펀드의 구성요건이 49명 미만에서 그 이상으로 풀어졌으며, 10%이상을 한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금지하는 “10% 룰”의 제한에서도 사모펀드는 제한이 없다. 500만 원 미만의 소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하게 문을 열어 놨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작년 우리나라의 사모펀드 시장 규모는 2천조 원을 넘겼다. 사모펀드의 규제완화는 정권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한국경제』, 2019. 5. 1; 뉴시스1』, 2019. 10. 4; 『한국경제매거진』, 2019. 6; 『동아일보』, 2018. 9. 28; 『이뉴스투데이』, 2020. 5. 28). 그리고 이 와중 어떤 이들은 막대한 이윤을, 어떤 이들은 소중한 노후자금까지 날리고 있다. 지금 한가하게 미국의 사모펀드 걱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참고자료

김광기, 『정신차려 대한민국』, (서울:랜덤하우스코리아), 2012.

“영덕풍력발전 매각한 맥커리는 호주의 최대 투자금융,” 『영남경제』, 2019. 9. 5.

“경북 영덕풍력발전 외국계 사모펀드 기업사냥하는 동안 손 놓고 있었던 영덕군,” 『영남경제』,2019. 9. 6.

“외국계 사모펀드의 고리대금에 멍들은 영덕·영양풍력발전,” 『영남경제』, 2019. 9. 18.

“자산운용시장 2000조원 돌파 “사모펀드 규제 완화로 위험성↑”,” 『한국경제』, 2019. 5. 1.

“2015년 사모펀드 규제완화 후 은행 파생상품 판매 49% 늘어,” 『뉴시스1』, 2019. 10. 4.

“사모펀드, ‘고공행진’…쏠림은 ‘우려’,” 『한국경제매거진』, 2019. 6.

“사모펀드 규제완화… 한국판 ‘엘리엇’ 생긴다,” 『동아일보』, 2018. 9. 28.

“금융위, 코로나19발 구조조정 위해 1조펀드 모은다,” 『이뉴스투데이』, 2020. 5. 28.

“Leveraged loans at pre-crisis levels — and I’m worried, says Carney,” The Times, Jan. 17, 2019

“The risky ‘leveraged loan’ market just sunk to a whole new low,” Business Insider, Feb. 17, 2019

Bank of England, Financial Stability Report, Issue No. 44, November 2018.

“The Death of the Department Store: ‘Very Few Are Likely to Survive’,” New York Times, April 21, 2020.

“The Economics (and Nostalgia) of Dead Malls,” New York Times, Jan. 3, 2015.

“Neiman Marcus and the demise of the US department store,” Financial Times, May 8, 2020.

“The Coronavirus Is Exposing Wall Street’s Reckless Gamble on Bad Debt,” New Yorker, May 24, 2020.

“Hertz, Car Rental Pioneer, Files for Bankruptcy Protection,” New York Times, May 22, 2020.

“J.C. Penney, 118-Year-Old Department Store, Files for Bankruptcy,” New York Times, May 15, 2020.

“The Pandemic Helped Topple Two Retailers. So Did Private Equity,” New York Times, May 14, 2020.

“How Private Equity Buried Payless,” New York Times, Jan. 31, 2020.

“Scary Times for U.S. Companies Spell Boom for Restructuring Advisers,” New York Times, March 3, 2020.

“Some Big Investors Smell Profit in Virus-Plagued Companies,” New York Times, April 3, 2020.

“Elizabeth Warren and AOC’s Call for a Merger Ban May be a Moot Point,”, CNN, May 5, 2020.

 

김광기 경북대 교수의 연재 ‘인사이드 아메리카’는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

화, 2020/06/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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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한민국 대전환의 시작을 선언했다. 지구촌사회를 휩쓸고 있는 미증유의 바이러스 위기를 벗어나면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까지 잡아보겠다는 야심찬 ‘한국판 뉴딜’ 추진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5년간 국비만 114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투자를 약속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지방비 25조원을 포함하여 어떻게 이 막대한 투자비를 조달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인재 양성계획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판 뉴딜’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노동과 자본, 정당 등 주요이해관계집단의 기대와 요구를 담아냈다. 정부안에서도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환경부, 산업부, 과기부, 행안부, 교육부, 복지부, 중기부, 해수부, 산림청, 고용부 등이 참여하여 정책통합을 시도했다. 기존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 등 3대 축으로 구성된 경제정책 기조아래 ‘사회 안정망 확충’을 바탕에 깔고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림 1> 한국판 뉴딜 3대 정책 및 5년간 투자 총액 160조 원, 예상 일자리 190만개

한국판 뉴딜 정책은 앞으로 5년 동안 국비와 지방비, 민간투자를 포함하여 총사업비 160조원을 투자하여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함으로써 3중복합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추격형 국가에서 추월하는 선도형 국가로 대전환하겠다는 담대한 포부와 정치적 의지의 반영이다.

<그림 2> 한국판 뉴딜 비전과 2+1 정책방향 <출처 : 기획재정부>

<그림 3> 한국판 뉴딜 4+3+2 사업 분야 및 28대 과제 <출처: 기획재정부>

녹색전환 선도국가로 나아가는 길 (1)

민간투자를 포함해 58조2천억 원을 투입하는 디지털 뉴딜은 ①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DNA) 생태계 강화, ② 교육 인프라 디지털 전환, ③ 비대면 산업 육성, ④ 사회간접자본(SOC) 디지털화하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 강화는 ① 고용사회 안전망과 ② 사람투자이다.

그린 뉴딜은 ① 도시·공간·생활 인프라 녹색 전환, ②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 ③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하는 것이다. 이 3개 분야에 아래와 같이 8개 세부 사업을 추진한다.

<그림 4> 그린 뉴딜 3대 분야 및 8대 사업 분야 <출처: 기획재정부>

정부의 담대하고 야심찬 계획 발표에 대해 많은 기대와 희망을 품으면서도 몇 가지 넘어서야 할 지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린 뉴딜이 ‘문재인 대통령식의 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을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은 5대 쟁점들이 모두 풀려나가야 할 것이다.【1】

첫째, 그린 뉴딜의 정의와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린 뉴딜을 단순히 친환경산업에 공공재정을 투입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전략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1930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을 추진했던 것처럼 그동안 정당한 사회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한 노동자계층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노사관계 개혁과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함으로써 미국식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실현하는 사회대개혁을 추진했던 것처럼 한국의 그린 뉴딜도 환경을 적극 고려하면서 경제성장도 도모하는 새로운 녹색경제체제로 대전환하는 사회적 합의, 사회적 협약인가 여부이다. 여전히 그린 딜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되고 있다. 임기 이후까지 5년 동안 막대한 규모의 재정투자를 통해 문제가 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을 언제까지 얼마나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2050 넷 제로(Net Zero)’를 달성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이 환경단체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 대신 이번 발표에는 “탄소 중립을 지향한다”라고만 되어 있어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았다.【2】

한국은 이명박 정권 시기에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고 녹색성장을 추진하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그린 뉴딜정책을 이미 시행했다.【3】 당시 정부는 이 녹색뉴딜 사업의 핵심인 국정과제 최우선순위인 일자리 창출 수치를 내놓았고, 그동안 부처간 중복이 심하고, 산출숫자가 ‘주먹구구’라는 비판과 지적을 의식해 비교적 구체적 계산방법과 함께 사업별 고용 창출 인원을 끝자리 수까지 맞춰 내놨었다. 그러나 이미 계획에서부터 건설단순생산직이 95.8%였다.【4】

<그림 5>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사업 구성도

한 마디로 이명박 정권의 녹색 뉴딜 사업은 일자리 창출계획이었고 사회간접자본 개발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추진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었고, 사회적 동의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효과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그린 뉴딜은 이것들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분명히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

어떤 경우든 녹색 세탁(green washing)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투자재원의 확보와 함께 투자 규모는 적정한가 여부이다. 그린뉴딜 종합계획은 “5년 단기투자 계획 제시에 그쳐 기후위기 대응 중장기 비전이 안 보인다, ‘2050년 넷 제로’ 같은 탈탄소사회 청사진을 못 내놨고, 에너지전환 정책 목표도 없고, “혁신적 계획 수립도 의욕적 재정투자도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5】

한국 경제 규모는 유럽(EU)의 10배라고 볼 수 있다. 유럽 역내 국가들은 그린 뉴딜을 위해 7년간 1,0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규모로 볼 때 100조원 정도는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5년간 42조7천억 원을 투자하는 데 그치고 있다.【6】

둘째, 그린 뉴딜의 대상 영역과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린 뉴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개념정의나 문제의식과 직결된 이 쟁점은 그린 뉴딜이야말로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과 세계경제의 파국적 변화 가능성, 감염병의 세계적 만연과 확산위기라는 점에서 에너지 전환을 비롯한 포괄적 전환에 치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에너지 전환만이 모든 문제 해결수단과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슨 분야나 영역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정책의 우선순위 배정과 비중 부여문제 해결이 매우 중요하다.

<그림 6>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초안

2020년 7월 14일 발표된 한국판 뉴딜정책 내용과 6월 1일 처음 발표된 정책내용의 기조가 사실상 동일, 유사하다. 더 나아가 그린 뉴딜과 관련해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문재인 정부의 그것 역시 동일, 유사하다(그림 3, 4, 5, 6 참조).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놓고 보자면 그동안 관련부처 정책입안자들은 교체, 이동, 보충되었으나 정책내용과 구조는 이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 유사한 틀 안에서 이것저것 꿰어 맞추는 방식으로 채워져 온 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석탄 화력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부에 달려있다. 석탄 화력발전의 조기 폐쇄와 가동 중단, 대체 에너지 개발, 석탄 화력발전 종사자의 전업 훈련교육과 전업, 탈석탄 발전시대의 지역경제 회복과 일자리 영향 최소화 등 보완대책이 병행 개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지속가능한 사회형성, 지속가능성을 보장·확보할 수 있는 미래를 지향하며 다양한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순환경제를 위한 자원순환정책, 농수산식품정책, 전반적 환경질 제고, 생물종 다양성 보전과 생태계 회복탄력성 유지 등을 포함한 포괄적 정책을 개발, 추진, 이행하고 있다.

셋째, 그린 뉴딜은 정의로운 전환인가? 정의로운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기술의 개발과 도입, 디지털 전환, 생태적 전환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고용기회가 확대될 수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 일자리 축소나 회색 노동자의 소멸로 이어질 기회가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 연소 동력의 자동차 생산은 수많은 부품업체와 협력업체, 완성차 노동자들의 고용 현장이었으나 전기차, 수소차 제조가 주류가 되면 기존 자동차공업 노동자의 대량실직, 해고는 불가피하다. 이 경우 이들 회색 노동자 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재교육 기회 제공, 전직을 통해 노동시장의 동요를 최소화하는 고용의 연착륙 대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전환포럼은 디지털 그린특구 지정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화력발전이 밀집한 당진과 보령지역에 그린데이터특수, 영덕 삼척 디지털 클린에너지특구, 자동차공업 밀집지역인 울산, 경남에 디지털모빌리티특구, 김해 그린데이터센터특구, 창원 그린리모델링특구 지정을 말한다.

넷째, 그린 뉴딜 추진을 위한 법률과 제도, 조직을 어떻게 입안, 구성, 운영할 것인가?

한 마디로 그린 뉴딜은 기존 방식과 접근으로 추진해 왔던 개별 사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이런 담대하고 통합적인 추진내용을 담아내는 법을 마련하여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지속가능발전법, 에너지법을 폐지하여 일부 통합, 전면 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린 뉴딜 추진, 이행을 위한 협치·공치(거버넌스) 기구로써 기존의 녹색성장위원회, 국가기후환경회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미세먼지대책특별위원회 역시 폐지, 전면 교체, 통합하여 운영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누가 그린 뉴딜 정책 수립과정에 참여하고 주도할 것인가?

말하자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추진하는 그린 딜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는가 여부이다. 디지털 뉴딜이든 그린 뉴딜이든 ‘한국판 뉴딜’은 말 그대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합의여야 한다. 그동안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와 정당 등은 기후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국판 뉴딜을 위한 대전환을 재빠르게 논의해 왔다.

▪2020년 6월 05일 : 228개 전국 모든 기초 지자체, “기후위기 비상선언”

▪6월 30일 : 국회 한정애 의원 등 48인,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 제출

▪7월 02일 : 김성환의원 등 109인, 기후위기비상선언 결의안 제출

▪7월 07일 : 17개 전국 모든 광역 지자체, 탄소중립 선언

▪7월 08일 : 국회 강은미 의원 등 12인,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기후위기대응 및 특별위원회 설치 결의안 제출

▪7월 14일 : 대통령, 한국판 뉴딜 발표. 2050년 탄소 제로 발표 예정되었으나 없음

<출처: 연합뉴스>

이들 뿐만 아니라 경제계와 노동조합, 시민사회와의 협치·공치와 공동행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보 논의와 범사회적 수용성이 검토되어야 한다. 최근 수도권 부동산가 파동을 해결하기 위한 주택공급을 위해 박정희 정권 이래 고수해 온 서울지역 그린벨트 해제 논의나 석탄 화력발전 해외 수출 결정과 같이 그린 뉴딜 시책에 정면 배치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회색정책이 반복된다면 누가 녹색정책의 주류화, 산업정책의 녹색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될 것인지 매우 의심이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만이 앞장서서 한국 뉴딜을 선도하는게 아니라 장관과 차관이 책임지고 이웃부처와의 정책조정과 협의를 통해 정책통합을 우선 실현하고, 확정된 추진과제는 대통령 임기이내, 국가계획 추진일정에 맞추어 지체나 차질이 없이 이행,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 그린 뉴딜 우선순위 정책 효과가 가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어 갈 때 시장과 시민사회의 신뢰가 축적되어 협치가 구현됨으로써 회색국가에서 기후불량국가의 오명을 씻어내며 이산화탄소 등 지구온난화기체 배출이 없는 녹색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1】 윤순진 2020 「그린 뉴딜의 원칙과 방향」. 그린뉴딜 경제위기 기후위기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현장과 정책의 대화. 주최·주관 국회의원 이학영·김성환·안호영·진성준·강은미·윤준병·이해식·한국환경정책연구원·한국환경회의 발표 자료. 2020. 7. 1.

【2】 경향신문 2020.07.15.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7152052005#c2b

【3】 기획재정부 2009.01.23. 보도자료. 국제기구 UNEP의 한국 녹색뉴딜정책에 대한 긍정평가. UN 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은 ‘09.1.9일 보도 자료에서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의 국제적 기조확산을 선도하고 있다고 평가하였음. UNEP Achim Steiner 사무총장의 브리핑 주요 내용 : ㅇ 글로벌 경제위기 대응 및 지구환경 보전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녹색뉴딜(Global Green New Deal) 및 녹색경제 이니셔티브(Green Economy Initiative)가 필요한 시기라고 언급.

ㅇ 청정기술ㆍ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경제침체와 실업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

ㅇ 최근 한국과 일본이 녹색뉴딜 정책을 입안ㆍ발표함으로써 국제적 기조확산을 주도.

* UNEP는 ‘10년까지 녹색산업 시장, 공공지출 및 정책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통해 각국의 경제위기 극복 및 녹색경제성장 전략 수립지원 예정.

【4】 아시아경제 2009.01.06. https://www.asiae.co.kr/article/2009010610274672546

【5】 한겨레, 2020.07.14.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53682.html

【6】 세계일보, 2020.07.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484470

목, 2020/07/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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