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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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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09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고등어찌개는 정말 맛있었고 서로 간의 정이 느껴지는 정겨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사람들은 풍찬노숙하며 역사전쟁을 주도하는 전사들이었고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긴 했지만 일심동체라는 동지적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문 : 2000년 『명석면사』 출간 보도를 보고 지역사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란 걸 직감했습니다.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여서 지역 친일파 연구에 천착하던 김경현 회원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석면사』는 어떻게 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답 :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민주화 이행기가 도래하면서 국민주주모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진주시민사회에서도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에 대항하는 지역신문 창간을 서둘렀습니다. 1991년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민주주로 <진주신문>을 창간했는데(이 신문은 2009년 등록이 말소될 때까지 18년간 진주지역의 참언론으로 역할했음), 이때 <진주신문> 발행인이던 시인 박노정 선생의 배려로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나름 민완 기자로서 취재 업무에 재미를 느껴갈 무렵 1997년 IMF사태(국제구제금융신청)가 터져 신문사가 폐업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남아있는 신문사 후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그때 저는 1998년 진주문화원에서 <진주이야기 100선>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을본 당시 진주시의회 손태기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였던 명석면의 역사책 집필을 의뢰해 왔습니다. 저는 단순한 지리지나 ‘내고장 전통’류 같은 ‘면지’가 아닌 면단위 역사책인 ‘면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손의원이 이에 동의하자 저도 흔쾌히 집필에 찬성했습니다.
<명석면사>를 집필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많은 면민들을 탐방하고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과 강제징용, 해방직후 좌우대립, 6.25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팩트’와 저널리즘 시각에서 면사를 집필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후 편찬위원회에 보이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좌우대립시 누가 누굴 죽인 것까지 공동체 촌락에서 매우 민감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일제 면협의원과 면직원, 경방단, 순사, 각종 친일부역자와 우익청년단, 남로당원 및 빨치산까지 다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편찬위원회에서는 문제 인사들의 이름을 복표(□□)로 처리하고 민감한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습니다. 진주에는 3대 토착성씨가 있었는데 진양 하씨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하순봉 의원이 바로 진양 하씨로 진주 출신입니다. 하씨 문중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명석면 출신의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경남에서 유명한 악질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반민특위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실렸고나중에국가기구에서도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중의 친일파를 하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빼지 않으면 <명석면사>를 출간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대 이유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저로서는 면사에서 하판락을 제외한다면 집필을 포기하겠다고 강조하며 편찬위원회에 사표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명석면사>에는 미관말직이라도 일제의 관공리라면 학교소사까지 조사해 실었는데 정작 고등계 형사를 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 인사들이 <명석면사> 출간의 역사적의미를 생각해 하판락의 이력을 빼더라도 면사를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조언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판락의 이력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지웠는데 인쇄 직전에 하판락의 친일 경력이 하씨 문중의 요구에 의해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을 넣으므로써 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즉 삭제된 부분에 괄호를 치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명석면 관련인물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추진위의 결정에 따라 전체내용을 모두 삭제함)”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문 : 친일파의 변명•변호 논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군요. 김경현 회원은 위암 장지연 명예훼손사건 등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소송을 겪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첫 번째 소송은 <진주신문> 기자로 있을 때 토호세력과 벌어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1993년 남강댐 보강공사와 관련한 수몰지역 측량비리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비리에 경남 사천군의원(이 자는 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자 사천시의회 의장까지 지냄)이 연루되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때 박노정 시인이 <진주신문>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사천군의원으로부터 저와 함께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주지검에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며 취재기자와 발행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구형했고, 1심(진주지원)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는데 창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2심에서는 취재의 정당성과 보도의 공익성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벌금형도 용납할 수 없어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고 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혼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덕수궁 뒤쪽 일제 때의 고등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당시 대법원 청사여서 그곳에다 접수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소송의 결과가 앞으로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까닭모를 서글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었고, 창원지법에 되돌아온 환송재판에서 저와 발행인은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을때 일어났지요. 장지연사건의 발단은 <경향신문>이 2005년 3월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의 출간소식을 전하면서, 저자인 제가 그 인명록에서 장지연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밝혀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장지연 후손이 저한테 ‘허위사실유포’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청량리경찰서(지금의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출두일인 2005년 6월 10일자에 맞춰 <경남도민일보>에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칼럼을 발표하고,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비꼬면서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는 속았다. 우리 4천만 겨레여, 친일의 망령으로 노예된 겨레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왕검 이래 5천년 가까운 민족정신이 위암 선생의 친일의혹으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상규명으로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할 것인가. 정말 원통하지만 상징 조작된 위암 선생을 단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정한 항일언론인 상을 다시 세우자. 겨레여! 겨레여!”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청량리경찰서에는 당시 방학진 사무국장(현 기획실장)과 함께 출두했습니다. 방 사무국장은 조사담당경찰관에게 실실 웃으면서 저를 가리키며 조사할 때 때리지 말라고 거듭 말했는데 조서를 작성하던 그 경사가 황당해 하며 방국장을 황급히 밖으로 내보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담당경찰은 친일 행위가 사실이라더라도 이를 언론매체를 통해 공포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그렇다면 장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국민이 받게 된 명예훼손은 누가 보상하는가”라고 주장하며, 입증자료로 <경남일보> 주필 당시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문사의 천장절 기념행사 관련 기사를 비롯해 하세가와 총독 부임 때 장지연이 이를 축하하며 <매일신보>에 발표한 한시 등 1차 사료와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했습니다. 그해 11월 서울 북부지검으로부터 장지연 명예훼손에 대한 혐의가 없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게 제기되었던 필화사건으로 첫 번째 소송은 무죄로 끝났고 두 번째 소송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제 생애에 소송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제가 직업적으로 소송을 수행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문 : 소송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듣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를 저술하여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출간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임종국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진주인명록>은 <명석면사>를 집필할 때 조사된 지역의 인물들을확인하기위한용도로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공리와 유력자 3,400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주지역 친일파인명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출간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언을 좇아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사실일제의관공리나식민지배의 유력자로 행세했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이 책에는 학교 소사까지 다 들어가 있었거든요.
또 제목에 ‘인명록Ⅰ’이라고 로마자를 붙인 것은 <진주인명록>과 같은 지역 인명록이 계속 발간되기를 지역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의미에서 붙였지만 이후 유사한 작업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한기억만 남아있는데, 마지막 교열작업 때는 아예 서울로 와서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청량리에 있던 연구소 인근의 떡전사거리 근처에서 2개월 가량 여관에 묵으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하는 조세열 상임이사님과 이를 녹취하는 박광종 선생님 등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친일청산을 토론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연구소 초창기에 임종국 선생의 인명카드를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명석면사>와 <진주인명록>을쓰 는데 큰힘이되었습니다.사실 제가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너무나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5월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족되자 그해 7월에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임종국상을 수상함으로써 반민규명위에서 대단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친일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임종국상을 받은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 상의 취지에 맞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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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기호(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이기형(시인), 임정택(임종국선생 자제), 정병화(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김시업(심산사상연구회장), 박중기(4·9통일평화재단 이사), 이건(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앞줄 왼쪽부터 김영만(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사회운동부문 수상자), 정길화(MBC방송 PD, 언론부문 수상자), 김경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 학술부문 수상자),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임종국상 심사위원), 이만열(임종국상 심사위원장), 주섭일(임종국상 심사위원), 함세웅(임종국상 심사위원)

 

문 : 연구소에서도 제1회 임종국상 시상이라 수상자 선정에 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김경현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진주인명록』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고 신진 연구자의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진상규명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당시 반민규명위는 60년 만에 부활한 ‘반민특위’라고 하여 사회 각계에서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강만길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족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진상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총 1,006명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경찰, 밀정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처럼 증거주의와 문서주의에 입각하여 일제 문헌자료와 당시 발행된 신문・잡지 등을 뒤져 친일행적을 입증했으며. 계급이 낮더라도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살상한 고등계 형사 및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여했다면 가장 낮은 계급의 순사보나 헌병보조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에 적극 관여한 조희창이란 순사보의 경우 일본에 출장가 공문서관에서 찾은 것이 이력서 한 장밖에 없어서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암리 학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반민규명위 활동 당시 관련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미비했고 한정된 조사 기간 등으로 인해 미진한 부분이 많아 친일 진상 조사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친일 경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제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문 : 그 각오가 엄중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반민규명위가 해산되고 행정안전부에 남아 위원회의 송무업무를 맡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고서 보유편 발간으로 위원회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십 차례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에서 2차례의 부분 패소 외에는 전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히 홍난파, 이해승, 김성수, 방응모 등 지난한 상대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위원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만에 끝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의 유족들이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송은 주로 위원회 말기인 2009년부터 쏟아졌지만 이미 중추원 참의 조진태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고손 이해승 등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음악가 홍난파, 총독부 판사 김세완 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취소 소송도 잇따라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몰려오는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대 위원장이던 성대경 위원장이 각 부서 팀장을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법무팀을 따로 구성할 시간도 인력도 어려워 소송수행은 각 조사팀장이 담당한 분야에서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 말기에 조사3팀장을 맡고 있던 제가 조사3팀에서 결정한 기타단체의 이재면・이준용과 경제의 조진태・김연수 등에 대해 소송을 직접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위원회가 종료된 후 청산절차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에도 소송수행자가 계속 필요했습니다. 특히 홍난파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이 유족의 효력정지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홍난파가 반민규명위 보고서 인쇄중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 중추원 참의에 대한 친일결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들어오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원회 사무처의 요청으로 저는 위원회 청산기간에 다른 조사팀의 소송과 헌법소송까지 모두 맡게 되었고, 청산기간이 끝난 후 소송이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자 저도 역시 행안부로 넘어가 지금까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소송업무를 전담해 왔던 것입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소송이 행안부로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제기된 친일 관련 소송은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용직으로 있으면서 준비서면만 써주고 공무원이 아니어서 변론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 앉아 메모만 받아적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기 위해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어공’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때 제가 일용직으로 있다는 말을 들은 위원회의 한 지인이 ‘연구자 망신 그만시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등 핀잔도 들었으나 4년여 동안 위원회가 거둔 성과를 무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다시 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23건과 헌법소송 6건(이중 1건은 위헌법률심판제청) 등 총 29건의 소송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귀족회장 이해승,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음악계 홍난파, 문학계 김동인 등입니다.
이중에 이해승 사건은 2009년 취소소송이 제기된 이래 2010년 1심에서 쌍방간에 일부 패소해 각기 항소했고 2014년 2심에서 우리쪽이 승소하자 상대방의 상고로 2016년 3심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우리가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해승 사건은 확정종결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해승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송사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한 소송이 행안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소송을 넘어 소유권이전이나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 민사소송까지 진행되면서 국가와 후손간에 법리다툼과 입증공방이 한층 더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해승 후손이 법원(당시 재판장 박병대)의 법률해석에 따라 친일의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시가 3백억원대의 친일재산을 되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자 사회적 공분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조사법과 반민규명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해 관련 사건진행이 장기간 표류했는데, 이해승 사건을 진행하는 각 심급 법원은 ‘한일합병의 공’을 삭제한 개정된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시비를 가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해승 관련 소송은 모두 국가승소로 귀결되었고 개정법률 이후 진행된 친일재산 관련 소송도 모두 승소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와 방응모 사건의 경우도 이해승 못지않게 장시간 끌었던 지난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거대 메이저언론사의 설립자나 사주였던 관계로 이들의 변론은 막강한 변호인단으로부터 조력을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 선임없이 오직 혼자 법정에서 항변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성수와 방응모측의 변호인들은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입증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대해 총독부기관지 또는 일본측 신문이란 점을 들어 조작・날조・왜곡・도용되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제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학계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친일문제에 있어 독보적인 자료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쁜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아 지금도 송구합니다. 이때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낼 준비서면이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의견서에 대한 법률적 자문은 위원회의 율사출신 위원이던 박연철 변호사를 비롯해 연구소의 고문변호사였던 이민석 변호사와 제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고검의 공익법무관 및 정부법무공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밖에 개별사건과 관련해 위원회에서 조서를 썼던 조사관들과 위원회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의 지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은 김성수와 방응모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 : 김성수와 방응모 관련 소송에서 부분 패소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유효한 것이죠

답 : 네. 그렇습니다. 김성수의 경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고,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국민정동연맹 및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사회・문화 기관 및 단체를 통해 일제의 내선융화나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방응모의 경우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쟁을 선전・선동한 점만 인정되고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친일행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판결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위원회의 결정대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유지된 것입니다.

문 : 방응모의 경우는 1심, 2심, 3심 판결이 다 달랐는데 특히 한 가지 법호만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뒷거래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 〈조선일보〉와의 유착관계도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대법원의 부분 패소 결정도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하여 은밀한 거래가 있었지 않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민규명위 소송의 마무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가 요즘 불거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사주 방응모에게 적용된 친일행위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과 뒷거래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응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으로 귀결되고 환송된 고법에서 일부 행위에 대한 판결이 달라졌지만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방응모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역사와 증거가 살아있는한 어떠한 사법농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응모와 김성수는 가장 논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하다고 인정되었으며, 다른 사건들도 모두 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6건의 헌법소송은 모두 반민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는데, 올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해승과 관련한 헌법소송은 개정된 반민규명법의 법률조항도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끝나면서 반민규명위 소송은 행정소송이든 헌법소송이든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그 결과를 정리했는데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한 각 심급 판결문을 비롯해 법원의 효력정지결정으로 보고서에 등재되지 못한 홍난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를 다시 실은 보고서 보유편을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일부 변경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끝으로 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업무와 후속조치를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 : 김경현 회원은 29건의 반민규명위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연구소 초창기부터 관계했기 때문에 연구소 안팎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연구소가 정말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했고 조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 간에 억척스러움과 아울러 정겨움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소가 초창기의 열정과 현재의 시스템을 잘 엮어 운영하고자 한다면 ‘임종국정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종국선생이 없는 연구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은 빛을 드러낸다는 운명의 힘을 믿고 그 운명을 엮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간다면 시스템도 조직도 사람도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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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족 김연옥 할머니의 손녀가 전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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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1주년 4.3 추념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4.3유족 사연의 주인공인 김연옥 할머니(78)가 자신의 기구했던 4.3 경험담을 추념식장에서 발표한 손녀 정향신 씨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오열했다.ⓒ 제주의소리

“1948년 일곱살이었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불타는 마을을 떠나 매일 밤마다 이 굴 저 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터라 맨발이 참 시렸습니다. 끝내 잡혀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 수용소였습니다. 주먹밥을 하나 먹었을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랑 애기였던 남동생까지 군인들이 다 끌고 나갔는데, 마지막 끌려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발로 밟히고 몽둥이에 맞는 걸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요. 순간 누군가가 확 잡아챘고, 아이는 그만 돌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깨어나 살아남은 그 아이의 이름은 김·연·옥.입니다.”

일순간 추념식장은 어느 유족의 사연으로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제주에 사는 어느 여대생이 들려준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는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 71주년 추념식장을 찾은 모든 이들의 눈과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유족이든 아니든, 제주도민이든 아니든, 귀가 열려 있고 심장이 뛰고 있기에 흘린 눈물이다.

제주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일곱살이던 아이는 이제 일흔 여덟.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됐다. 손녀 정향신씨가 전한 ‘4.3 광풍’에 의한 김연옥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통한의 세월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었고, 제대로 글을 배울 기회도 잃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았어요.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셨더라고요. 세뱃돈 봉투에 제 이름 정향신 세 글자를 써 주셨던 2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할머니 머리에 애기주먹만한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데요. 그게 4.3 후유장애였다는 것도 작년 4월에야 알았어요. 심지어 10살 때까지 신발 한 번 못 신어본 고아였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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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내 대학에 재학 중인 정향신씨가 자신의 할머니가 겪었던 4.3당시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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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이야기를 손녀가 4.3추념식 장에서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자 김연옥 할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죠.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하루 아침에,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당시 할머니는 고작 8살이었는데…”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선을 드시지 않는 이유를 전할 때는 자신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남은 4.3희생자 유족들이 4.3 트라우마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물고기를 안 드세요.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가 물고기에 다 뜯겨 먹혔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참으면서 멸치 하나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죠. 할머니의 바다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너무 미안해요, 할머니. 할머니 삶에 그런 끔찍한 시간이 있었고 멋쟁이 할머니가 그런 아픔에서 살고 계셨는지 몰랐어요.”

손녀가 대신한 김연옥 할머니의 말도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지금도 바닷물 잘락잘락 들이쳐 가민 어멍이영 아방이 ‘우리 연옥아’ 하멍 두 팔 벌령 나한테 오는거 닮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령 바다로 들어갈뻔 해져…” (나는 지금도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연옥아’ 하면서 두 팔 벌리고 나한테 오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려서 바다로 들어갈뻔 하지)

고아가 된 이후 10대의 시간을 대구와 부산, 서울에서 고생고생하다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왔을 때는 열여덟살. 김연옥 할머니는 이후 시신 하나 없는 ‘헛묘’를 조성해 여태껏 매년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향신씨는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 이제는 자식들에게 못해준 게 많다고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묵묵히 견뎌온 멋진 사람이에요. 할머니, 저랑 약속해요. 이제는 매일 웃기로.”

연단 맞은편 객석에서 손녀의 이야기 내내 그치지 않는 눈물이 앞을 가리던 김연옥 할머니는 통곡의 울음과 함께 허공을 향해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평화대공원을 내려다보던 하늘도 함께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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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가한 희생자 유족들이 김옥연 할머니의 사연을 듣던 중 곳곳에서 오열했다.ⓒ 제주의소리

<2019-04-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4.3 추념식장에서 모두를 통곡하게 만든 대학생 

※관련기사 

☞경향신문: “4.3때 바다에 던져진 부모님, 파도칠때마다 ‘연옥아’부르는 것 같아” 

☞뉴스제주: 제주4.3 71년,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 달래야 

☞파이낸셜뉴스: 제주4.3 추념식 봉행 “특별법 개정…4.3 완전 해결 첫 걸음“ 

☞아시아투데이: 제주4.3추념식 1만여명 참석한 가운데 거행

목, 2019/04/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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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스페셜 투어

『임정로드 4000km』 김종훈 기자와 함께 떠나는 《서울 임정로드 탐방》

“항일과 친일이 공존하는 공간: 현충원에 잠든 독립투사와 친일파를 찾아서”

서울 동작동에 자리 잡은 국립서울현충원은 신규식·박은식·홍진 등 임시정부 요인들 뿐만 아니라 신돌석·이회영·김상옥·우덕순 등 한국 독립운동사를 수놓은 영웅들이 잠든 신성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들 곁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현충원은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친일파 출신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등 무려 63명의 친일파들이 잠든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살아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었던 항일애국지사들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죽어서 동거하는 어이 없는 현장을 돌아보며, 우리 역사의 비극을 공부하는 스페셜 투어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투어는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인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가 함께 합니다.

◎ 일시: 2019년 4월 13일 (토) 오후 2시 ~ 4시 30분

◎ 장소: 국립서울현충원 ‘만남의 집'(지하철 4·9호선 동작역)

◎ 코스: 현충원 만남의집(집결장소)-장군1묘역-박정희대통령묘역-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장군2묘역-임시정부요인묘역-충열대-애국지사묘역

◎ 인원: 선착순 30명 (미취학 아동은 참여 불가·초등학생 자녀는 성인 가족 동반 하에 참여 가능)

◎ 참가비: 1만 원 (1인당)

◎ 준비물: 활동하기 편한 복장 + 각자 먹을 생수와 간식

◎ 신청기간: 3월 29일(금) ~ 4월 10일(수)

◎ 신청하기: https://www.onoffmix.com/event/173789

 

※ 『임정로드 4000km』 지참시 현장에서 저자가 직접 싸인을 해드립니다.

※ 구역마다 즉석 ‘퀴즈 이벤트’가 있습니다. 필로소픽에서 준비한 특별 굿즈를 상품으로 증정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투어에 함께 하시길 권합니다.

목, 2019/04/0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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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4.0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7편 “최린” 독립선언의 주역, 변절의 아이콘이 되다

☞ (3.26) ‘내역사’ 시즌 3: 강제동원 3편 “피해자 변호인단에게 판결과정과 향후 활동계획을 듣는다

☞ (3.21)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6편 “박중양” 3.1운동 진압을 위해 자제단을 이끈 거물급 친일파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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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목, 2019/04/0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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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철·후지코시·미쓰비시·코크스 4곳
피해자 “인간에 자유 있어도 한계 있어”
민변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소송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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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운데)와 김용화 할아버지(오른쪽) 등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 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9.04.0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본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추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하기 전 기자들 앞에 선 김한수(101) 할아버지는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피해 당사자인 김 할아버지 등 생존 피해자 4명과 사망 피해자 6명의 유족 27명은 일본 기업 일본제철(신일철주금)·후지코시·미쓰비시중공업·코크스공업 4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소장을 접수했다. 손해배상 금액은 개인당 1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할아버지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서 사람이 아닌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며 “당시 같은 식당에서 일본 사람은 하얀 쌀밥을 먹고, 한국 사람은 기름짜고 남은 것에 쌀을 넣어 먹는데 그것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그런 세월이 흘러갔다”고 말했다.

이어 “이것이 과연 참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과를 받고 손을 싹싹 비는 모습을 봐야 하는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면서 “그들이 생각할 때 한국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인간에 자유가 있다고 해도 자유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 1944년 8월께 목재를 실어 나른다는 설명을 듣고 회사 트럭을 타고 갔다가 집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청년 200여명과 함께 미쓰비시조선소에서 강제징용을 당했다. 김 할아버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압적인 규율을 받으며 생활했고, 작업 중에 사고를 당했지만 병가를 받지 못해 다음날에도 출근해 일했다.

이후 1945년 8월9일에 공장에서 작업 중에 나가사키 원폭투하로 피폭을 당했지만 목숨을 건지고, 같은해 10월20일께 동료들과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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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본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 등은 이날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9.04.04. [email protected]

이날 함께 소송을 제기한 김용화(90) 할아버지도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보호해줘야 하는데 일본은 악용해서 노예화했다”며 “일본은 마땅히 보상해야 하고, 보상 이전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김용화 할아버지도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징용을 당했다.

민변 측은 “대법원 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정당성을 다시금 확인했다”면서 “일제강점기 시대 이 땅에서 자행됐던 강제동원은 인권의 관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나 강제동원에 책임 있는 어떤 주체도 사과나 배상에 나서지 않는 현실은 여전하고, 가해 기업들은 대법원 판결 후에도 손해배상채무의 임의 변제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 다수는 피해 회복을 받지 못한 채 눈감고, 기록되지 못한 역사도 사라지고 있어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해 소 제기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0월30일 이춘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각 1억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며 강제징용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1965년 한·일 정부 간 청구권협정이 있었더라도 개인별 위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고 봤다.

한편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판사 설범식)는 이날 고(故) 홍모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2차 변론을 열었다.

홍씨 등의 대리인은 “대법원 판결도 나오고 해서 가급적 포괄적 화해를 하려고 한다”며 조정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미쓰비시 측 대리인은 “일본에서 부정적 답변이 왔다”고 조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다.

재판부는 “더 이상 사실관계나 법리 문제에 주장할 것이 없으면 사건을 종결하겠다”며 “미쓰비시 측이 조정 의사가 있으면 중간에 조정기일을 잡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선고는 오는 6월27일 진행될 예정이다.

[email protected]

<2019-04-04> 뉴시스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들 추가 손배소…”日, 짐승 취급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개·돼지 대우도 못 받고 살았다”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기업 상대 추가 소송 제기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기업들 상대 또 소송 

☞뉴스1: 일제징용 피해자들 日 전범기업에 추가 소송…”짐승처럼 부려” 

☞SBS: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 기업들 상대 또 소송

목, 2019/04/0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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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장님

박교수님

희빌  몬네가

지송

달달앤공부의일부판사들

구형과선고

그리고   그판사들의  그금사

그비노사들의  전옥서

 

금, 2019/04/0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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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검사는 나에게

징역 파월을 구형해따.

상해와전과를  가지고

그변호사는 국선….?

십팔마는이고  일당하고 치로비까지 요구하는 하물차 사장…

 

형동친  오시  우찌사노?

트키나 터기나

친구

ㄱㅗ마븐   ..그리고ㄱ…미아넌 칭구고향동창

 

시달린 실외기의 장ㄴ녀  칠월삼십일일

경찰의 이십구  삼십일

이사밀 시달린 마산 봉암동 옥주원룸의  그사람은

호솔  한다.

저녹서에서  이백  사시빌은  시마다.

금, 2019/04/0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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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교수님

방국장님

!!

보고싶다.

형동상

진단삼주의

원인과과정은  엄는가?

병원과검사판사변호사

그리고 좨인들

좨와블?

죄와벌!

방국장님  기소장하고  공소장하고  머가  다르요?

ㅆㅣ씨티브이  증거신청

진단삼주에  대한

나의 별론  안닌  변론

 

금, 2019/04/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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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

비야

비야

바기니

나무와숲

공기

군경은 대피만  할거신가?

 

 

금, 2019/04/0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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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인가

인간과숲….애리

자연과인류….소매

산소와무산소들

나도지금시순간분터  냉장고세탁기 자꾸돌리야 대거따….?

금, 2019/04/0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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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報(업보)

 

歿後成何物(몰후성하물)

祈求化犬豚(기구화견돈)

今生貪食甚(금생탐식심)

後世我當呑(후세아당탄)

 

업보

 

죽어 버린 이후에는 무엇이 될까

개나 돼지로 化하길 빌고 바라네

이승에서 탐내 먹는 일 심했으니

다음 세상에선 내가 먹혀야 하리.

 

<時調로 改譯>

 

죽어 무엇이 될까 개돼지 되길 바라네

저들의 肉 탐식함, 이승에서 심했으니

다음에 올 세상에선 내가 먹혀야 하리.

 

*歿後: 죽고 난 이후. 사후(死後). 신후(身後) *何物: 무슨 물건 *祈求: 원하는 바가

실현되도록 빌고 바람 *犬豚: 개돼지 *今生: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이승 *貪食: 음식

을 탐냄. 탐내어 먹음  *後世: 다음에 오는  세상. 또는  다음  세대 사람들.  내엽(來葉).

 

<2019.4.4, 이우식 지음>

금, 2019/04/0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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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日(춘일)

 

川邊春柳綠(천변춘류록)

聚散稚魚遊(취산치어유)

野老孤徐步(야로고서보)

吟哦上古樓(음아상고루)

 

봄날에

 

냇물 주변의 봄철 버들 푸릇푸릇

모였다 또 흩어지며 노는 稚魚들

시골 늙은이 홀로 천천히 걷다가

詩를 읊조리며 옛 누각에 오른다.

 

<時調로 改譯>

 

냇가 春柳 푸릇푸릇 노는 어린 물고기들

시골에 사는 늙은이 홀로 천천히 걷다가

저으기 詩를 읊조리며 옛 누각에 오른다.

 

*春日: 봄철의 날. 또는 그날의 날씨 *川邊: 냇물의 주변 *春柳: 봄버들 *聚散: 모임

흩어짐 *稚魚: 알에서 얼마 되는 어린 물고기 *野老: 한적한 시골에 사는

늙은이  *徐步: 천천히  걷는  걸음  *吟哦: 음시(吟詩).  吟詠.  시가(詩歌) 따위를 읊음.

 

<2019.4.4, 이우식 지음>

금, 2019/04/0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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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100주년 기념 행주나루터 선상만세시위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주최
대규모 상황극으로 100년 전 만세함성 되살려

800명 청소년·시민, 행사 주인공으로 적극 참여
새로운 100년 위해 ‘친일 청산’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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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혁명 100주년 기념 행주나루터 선상만세시위 재현행사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김정호 독자ㆍ사진작가>

“일제는 물러가라, 대한독립 만세!”

행주산성에서, 마을에서, 배 위에서…. 100년 전 행주나루터에서 울려 퍼졌던 고양땅 선조들의 외침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고양파주지부(지부장 백창환)가 주최한 3·1혁명 100주년 기념 행주나루터 선상만세시위 재현행사가 지난달 30일 고양 행주산성역사공원에서 열렸다.

이재준 고양시장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행진에 앞장섰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친일파 청산을 외쳤다. 백창환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은 만세를 선창했다. 그러나 이날의 재현행사를 성대한 기억과 체험의 장으로 완성시킨 진정한 주인공은 자발적으로 모여든 800여 명 시민과 청소년들이었다. 100년 전 기미년 3월, 민족대표와 지식인·학생들이 앞장서 시작한 독립만세의 외침이 노동자, 농민들에 의해 전국 방방곡곡의 장터와 마을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것을 연상케 했다.

고양시와 고양시3·1혁명100주년추진위원회, 민족얼지킴이, 고양시민사회연대회의, 행주어촌계 후원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종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특히 고양시 소재 10여 개 학교 550여 명의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해 고양의 자랑스런 독립운동 역사를 되새겼다.

정치권에서는 이재준 고양시장, 이규열 고양시의회 부의장과 김해련·김미수·정봉식 시의원, 김경희 경기도의원이 참석했고, 이이화 역사학자와 김재득 농협중앙회 고양시지부장을 비롯해 많은 지역인사들이 참석해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기림행사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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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준 시장은 “고양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고, 새로운 100년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진밭두레보존회가 길놀이 농악으로 문을 열었고, 이어 24반무예 전수자들이 친일 청산을 주제로 한 호쾌한 전통무예 시연을 펼쳤다. 참가자들은 무예인들의 칼과 활이 일제와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 친일매국노를 응징하는 대목에서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어 열린 개회식에서 이재준 시장은 “역사는 기억할 때만 살아난다. 100년 전 선조들이 이곳에서 선상만세를 불렀던 역사를 살아 흐르게 하자”고 말했다. 이어 “친일자본가를 비롯해 친일 세력들이 여전히 죄과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청소년들이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써 달라”고 말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열린 수많은 행사에 참석했지만, 고양 행주나루터에서 열리는 오늘의 행사가 가장 멋지고 감동적”이라고 소감을 밝힌 후 “고양시를 넘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행사 중 하나로 키워내자”고 제안했다. 임 소장은 여전히 남은 과제를 상기시키며 “친일파 청산!”을 기운차게 선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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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잔재 청산”을 힘차게 외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다음으로 파주 수억고등학교 ‘민족얼지킴이’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배세준군과 이아람양이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33명의 청소년들이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들의 얼굴을 받쳐 들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했다. 이어 역사어린이합창단이 3·1절 노래를 합창하고, 백창환 지부장이 만세삼창을 선창하며 개회식이 마무리됐다.

한강 수로의 관문이자 개화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았던 행주지역은 3·1운동 당시 고양땅에서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이 수차례 반복해서 일어난 곳이다. 특히 1919년 3월 11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시위에서는 총칼을 앞세운 일경의 진압에 쫓긴 행주어민들과 주민들이 행주나루터에서 나룻배와 고기잡이배에 올라 타 전국 유일의 선상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는 고양에서 항일 운동이 치열하고 다양하게 펼쳐졌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날의 뜨거웠던 외침은 개막식 후 이어진 재현행사에서 생생하게 표현됐다. 상황극을 연출한 젊은 배우들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외침의 소문을 들은 고양의 민중들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며 자발적으로 통문을 돌리고, 시위 날짜를 약속해 대대적 만세운동을 일으킨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또한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잔인함과 그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의 함성을 외친 선조들의 의기를 고스란히 표현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 없이 농민과 학생들이 한 몸이 되는 모습은 고양은 물론, 우리 땅 구석구석에서 펼쳐졌던 민중 중심 만세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여기에 행주나루에서만 발견된 선상만세 장면이 상세히 보태졌다.

재현행사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주최측은 전문배우들의 연기와 의상·소품 등을 활용해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커다란 말이 등장하고 총탄 소리에 만세를 부르던 학생들이 쓰러지는 장면은 한 편의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였다. 여기에 손수 치마저고리, 학생교복 등을 차려입고 행사장을 찾은 청소년들이 재현행사의 적극적 주인공이 돼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만세를 따라 부르며 상황극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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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행사 준비를 총괄한 백창환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

행사 준비를 총괄한 백창환 지부장은 “신임 지부장 취임 후부터 행주나루 선상만세 재현행사를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서 “100인 추진위원회와 33인 어린이 합창단, 남과 북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낭독, 민족대표 33인 퍼포먼스, 그리고 출연진과 참가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연극 등이 올해 새로 선보인 순서”라고 밝혔다. 이어 “내년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오후에 행사를 여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는 4월 13일 친일·항일 음악회를 개최하고, 고양교육청과 협력해 ‘학교 내 친일 잔재 청산 TF’도 구성할 예정이다. 백 지부장은 “학교 교가, 석물 등의 친일잔재 조사를 위해 회원들과 발로 뛸 일이 많아질 것”이라며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 사진으로 보는 3.1혁명 행주나루터 선상만세 재현행사
 (사진제공=김정호 독자ㆍ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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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선조들의 뜨거운 외침,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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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밭두레패의 길놀이 농악공연. 3.1운동과 같이 100년의 역사를 지닌 진밭두레패는 농악대 깃발 끝에 태극기를 꽂고 공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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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행사에선 다양한 모양의 태극기와 독립운동기가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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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무예 수련자들이 한민족을 침탈한 일제의 만행을 응징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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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얼지킴이’ 동아리 배세준군과 이아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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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동안 33명의 청소년들이 민족대표의 얼굴을 들고 입장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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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김미수.김해련 고양시의원, 김경희 경기도의원, 이규열 시의회부의장, 이재준 고양시장, 백창환 민문연 고양파주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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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행사에선 역사어린이합창단이 독립군가와 3ㆍ1절 노래를 합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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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만세행렬이 행주나루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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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비폭력 평화시위를 총칼을 앞세워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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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나루터 빨래터 강물 위에 마련한 행사용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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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 기자 [email protected]

<2019-04-02> 고양신문 

☞기사원문: 고양의 청소년·시민들이 재현한 100년 전 행주나루터 만세 외침

※관련기사

☞경기인터넷신문 : 고양시,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주 선상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경기&뉴스: 고양시,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주 선상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내외통신: 고양시,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주 선상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민족문제연구소:[화보] 선상만세시위 재현 (3.30)

※관련영상

금, 2019/04/0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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待燕子(대연자)

 

鄕村多燕子(향촌다연자)

何去遂無踪(하거수무종)

忽見空檐下(홀견공첨하)

深憂半廢農(심우반폐농)

 

제비를 기다리며

 

시골 마을에 제비가 참 많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마침내 자취 없네

문득 텅 빈 처마를 바라다보면서

반쯤 廢農됨 깊이 근심하게 되네.

 

<時調로 改譯>

 

시골에 참 많았는데 마침내 자취 없네

이제는 텅 빈 처마 문득 바라다보면서

오호라! 반쯤 廢農됨 깊이 근심한다네.

 

*燕子: 제비 *鄕村: 시골 마을. 향리(鄕里) *無踪: 행방을 모름. 종적(蹤跡)이 없음

*檐下:  처마.  처마    *深憂:  깊이  근심함. 또는 그런 근심 *廢農: 농사를 그만둠. 

 

<2019.4.6, 이우식 지음>

토, 2019/04/06-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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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次李塏先生善竹橋韻

 

擧事遂成(거사수성공)

誰能測意(수능측의중)

今人雖拙妄(금인수졸망)

不忘六臣(불망육신충)

 

삼가 李塏 선생의 ‘善竹橋’란 詩에 次韻하다

 

擧事가 마침내 보람 없게 됐으니

뉘 능히 그 意中 헤아리겠습니까

지금 세상 사람 비록 拙妄하지만

여섯 신하의 충성 잊지 못합니다.

 

<時調로 改譯>

 

擧事가 空이 되니 意中 뉘 알겠습니까

지금 세상 사람 비록 拙妄하다 하지만

死六臣 그 충성일랑 잊을 수 없습니다.

 

次韻: 남이 지은 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詩를 지음. 또는 그런 방법 *李塏: 조선 前期

  文臣(1417~1456).  字는  청보(淸甫)ㆍ백고(伯高).  號는  백옥헌(白玉軒).  直提學

지냈으며,  詩文이  청절(淸節)하고  글씨를    썼다.  死六臣의    사람으로, 世祖  2년

(1456)에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善竹橋: 경기도  開城  있는

돌다리.  高麗  말기의  충신  鄭夢周가 李芳遠이 보낸 趙英珪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今人: 지금 세상의  사람 *拙妄: 옹졸하고 孱妄함 *不忘: 잊지 않음.

 

<2019.4.7, 이우식 지음>

일, 2019/04/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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逢自稱文豪者自評

 

猫兒那作虎(묘아나작호)

鳳鳥化村鷄(봉조화촌계)

醜拙吾天性(추졸오천성)

詩文似雪泥(시문사설니)

 

스스로 文豪라 일컫는 者를 만나 自評하다

 

괭이 새끼가 어찌 범이 되겠으며

鳳이 시골에 사는 닭으로 化하랴

나의 天性 추잡하고 또 졸렬하니

詩文일랑 눈 녹은 진창과도 같소.

 

<時調로 改譯>

 

猫兒 어찌 범이 되며 鳳 어찌 촌닭 되랴

내 타고난 본성일랑 추잡하고 졸렬하니

오호라! 詩와 글월도 눈 녹은 진창 같소.

 

*文豪: 뛰어난 문학 작품을 많이 써서 알려진 사람 *猫兒: 고양이의 어린 새끼 *鳳鳥:

봉황(鳳凰). 봉(鳳) *村鷄: 촌닭. 시골의 *醜拙: 지저분하고 졸렬함 *詩文: 詩歌와

散文을 아울러 이름 *雪泥: 눈과 진흙을 아울러 이름. 눈이 녹아 뒤범벅이 된 진 땅.

 

<2019.4.7, 이우식 지음>

일, 2019/04/0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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