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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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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09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고등어찌개는 정말 맛있었고 서로 간의 정이 느껴지는 정겨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사람들은 풍찬노숙하며 역사전쟁을 주도하는 전사들이었고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긴 했지만 일심동체라는 동지적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문 : 2000년 『명석면사』 출간 보도를 보고 지역사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란 걸 직감했습니다.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여서 지역 친일파 연구에 천착하던 김경현 회원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석면사』는 어떻게 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답 :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민주화 이행기가 도래하면서 국민주주모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진주시민사회에서도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에 대항하는 지역신문 창간을 서둘렀습니다. 1991년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민주주로 <진주신문>을 창간했는데(이 신문은 2009년 등록이 말소될 때까지 18년간 진주지역의 참언론으로 역할했음), 이때 <진주신문> 발행인이던 시인 박노정 선생의 배려로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나름 민완 기자로서 취재 업무에 재미를 느껴갈 무렵 1997년 IMF사태(국제구제금융신청)가 터져 신문사가 폐업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남아있는 신문사 후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그때 저는 1998년 진주문화원에서 <진주이야기 100선>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을본 당시 진주시의회 손태기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였던 명석면의 역사책 집필을 의뢰해 왔습니다. 저는 단순한 지리지나 ‘내고장 전통’류 같은 ‘면지’가 아닌 면단위 역사책인 ‘면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손의원이 이에 동의하자 저도 흔쾌히 집필에 찬성했습니다.
<명석면사>를 집필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많은 면민들을 탐방하고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과 강제징용, 해방직후 좌우대립, 6.25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팩트’와 저널리즘 시각에서 면사를 집필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후 편찬위원회에 보이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좌우대립시 누가 누굴 죽인 것까지 공동체 촌락에서 매우 민감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일제 면협의원과 면직원, 경방단, 순사, 각종 친일부역자와 우익청년단, 남로당원 및 빨치산까지 다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편찬위원회에서는 문제 인사들의 이름을 복표(□□)로 처리하고 민감한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습니다. 진주에는 3대 토착성씨가 있었는데 진양 하씨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하순봉 의원이 바로 진양 하씨로 진주 출신입니다. 하씨 문중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명석면 출신의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경남에서 유명한 악질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반민특위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실렸고나중에국가기구에서도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중의 친일파를 하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빼지 않으면 <명석면사>를 출간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대 이유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저로서는 면사에서 하판락을 제외한다면 집필을 포기하겠다고 강조하며 편찬위원회에 사표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명석면사>에는 미관말직이라도 일제의 관공리라면 학교소사까지 조사해 실었는데 정작 고등계 형사를 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 인사들이 <명석면사> 출간의 역사적의미를 생각해 하판락의 이력을 빼더라도 면사를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조언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판락의 이력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지웠는데 인쇄 직전에 하판락의 친일 경력이 하씨 문중의 요구에 의해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을 넣으므로써 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즉 삭제된 부분에 괄호를 치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명석면 관련인물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추진위의 결정에 따라 전체내용을 모두 삭제함)”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문 : 친일파의 변명•변호 논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군요. 김경현 회원은 위암 장지연 명예훼손사건 등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소송을 겪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첫 번째 소송은 <진주신문> 기자로 있을 때 토호세력과 벌어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1993년 남강댐 보강공사와 관련한 수몰지역 측량비리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비리에 경남 사천군의원(이 자는 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자 사천시의회 의장까지 지냄)이 연루되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때 박노정 시인이 <진주신문>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사천군의원으로부터 저와 함께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주지검에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며 취재기자와 발행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구형했고, 1심(진주지원)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는데 창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2심에서는 취재의 정당성과 보도의 공익성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벌금형도 용납할 수 없어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고 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혼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덕수궁 뒤쪽 일제 때의 고등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당시 대법원 청사여서 그곳에다 접수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소송의 결과가 앞으로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까닭모를 서글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었고, 창원지법에 되돌아온 환송재판에서 저와 발행인은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을때 일어났지요. 장지연사건의 발단은 <경향신문>이 2005년 3월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의 출간소식을 전하면서, 저자인 제가 그 인명록에서 장지연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밝혀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장지연 후손이 저한테 ‘허위사실유포’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청량리경찰서(지금의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출두일인 2005년 6월 10일자에 맞춰 <경남도민일보>에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칼럼을 발표하고,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비꼬면서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는 속았다. 우리 4천만 겨레여, 친일의 망령으로 노예된 겨레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왕검 이래 5천년 가까운 민족정신이 위암 선생의 친일의혹으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상규명으로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할 것인가. 정말 원통하지만 상징 조작된 위암 선생을 단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정한 항일언론인 상을 다시 세우자. 겨레여! 겨레여!”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청량리경찰서에는 당시 방학진 사무국장(현 기획실장)과 함께 출두했습니다. 방 사무국장은 조사담당경찰관에게 실실 웃으면서 저를 가리키며 조사할 때 때리지 말라고 거듭 말했는데 조서를 작성하던 그 경사가 황당해 하며 방국장을 황급히 밖으로 내보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담당경찰은 친일 행위가 사실이라더라도 이를 언론매체를 통해 공포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그렇다면 장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국민이 받게 된 명예훼손은 누가 보상하는가”라고 주장하며, 입증자료로 <경남일보> 주필 당시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문사의 천장절 기념행사 관련 기사를 비롯해 하세가와 총독 부임 때 장지연이 이를 축하하며 <매일신보>에 발표한 한시 등 1차 사료와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했습니다. 그해 11월 서울 북부지검으로부터 장지연 명예훼손에 대한 혐의가 없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게 제기되었던 필화사건으로 첫 번째 소송은 무죄로 끝났고 두 번째 소송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제 생애에 소송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제가 직업적으로 소송을 수행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문 : 소송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듣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를 저술하여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출간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임종국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진주인명록>은 <명석면사>를 집필할 때 조사된 지역의 인물들을확인하기위한용도로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공리와 유력자 3,400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주지역 친일파인명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출간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언을 좇아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사실일제의관공리나식민지배의 유력자로 행세했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이 책에는 학교 소사까지 다 들어가 있었거든요.
또 제목에 ‘인명록Ⅰ’이라고 로마자를 붙인 것은 <진주인명록>과 같은 지역 인명록이 계속 발간되기를 지역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의미에서 붙였지만 이후 유사한 작업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한기억만 남아있는데, 마지막 교열작업 때는 아예 서울로 와서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청량리에 있던 연구소 인근의 떡전사거리 근처에서 2개월 가량 여관에 묵으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하는 조세열 상임이사님과 이를 녹취하는 박광종 선생님 등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친일청산을 토론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연구소 초창기에 임종국 선생의 인명카드를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명석면사>와 <진주인명록>을쓰 는데 큰힘이되었습니다.사실 제가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너무나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5월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족되자 그해 7월에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임종국상을 수상함으로써 반민규명위에서 대단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친일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임종국상을 받은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 상의 취지에 맞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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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기호(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이기형(시인), 임정택(임종국선생 자제), 정병화(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김시업(심산사상연구회장), 박중기(4·9통일평화재단 이사), 이건(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앞줄 왼쪽부터 김영만(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사회운동부문 수상자), 정길화(MBC방송 PD, 언론부문 수상자), 김경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 학술부문 수상자),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임종국상 심사위원), 이만열(임종국상 심사위원장), 주섭일(임종국상 심사위원), 함세웅(임종국상 심사위원)

 

문 : 연구소에서도 제1회 임종국상 시상이라 수상자 선정에 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김경현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진주인명록』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고 신진 연구자의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진상규명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당시 반민규명위는 60년 만에 부활한 ‘반민특위’라고 하여 사회 각계에서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강만길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족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진상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총 1,006명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경찰, 밀정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처럼 증거주의와 문서주의에 입각하여 일제 문헌자료와 당시 발행된 신문・잡지 등을 뒤져 친일행적을 입증했으며. 계급이 낮더라도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살상한 고등계 형사 및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여했다면 가장 낮은 계급의 순사보나 헌병보조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에 적극 관여한 조희창이란 순사보의 경우 일본에 출장가 공문서관에서 찾은 것이 이력서 한 장밖에 없어서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암리 학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반민규명위 활동 당시 관련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미비했고 한정된 조사 기간 등으로 인해 미진한 부분이 많아 친일 진상 조사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친일 경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제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문 : 그 각오가 엄중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반민규명위가 해산되고 행정안전부에 남아 위원회의 송무업무를 맡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고서 보유편 발간으로 위원회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십 차례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에서 2차례의 부분 패소 외에는 전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히 홍난파, 이해승, 김성수, 방응모 등 지난한 상대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위원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만에 끝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의 유족들이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송은 주로 위원회 말기인 2009년부터 쏟아졌지만 이미 중추원 참의 조진태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고손 이해승 등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음악가 홍난파, 총독부 판사 김세완 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취소 소송도 잇따라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몰려오는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대 위원장이던 성대경 위원장이 각 부서 팀장을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법무팀을 따로 구성할 시간도 인력도 어려워 소송수행은 각 조사팀장이 담당한 분야에서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 말기에 조사3팀장을 맡고 있던 제가 조사3팀에서 결정한 기타단체의 이재면・이준용과 경제의 조진태・김연수 등에 대해 소송을 직접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위원회가 종료된 후 청산절차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에도 소송수행자가 계속 필요했습니다. 특히 홍난파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이 유족의 효력정지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홍난파가 반민규명위 보고서 인쇄중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 중추원 참의에 대한 친일결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들어오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원회 사무처의 요청으로 저는 위원회 청산기간에 다른 조사팀의 소송과 헌법소송까지 모두 맡게 되었고, 청산기간이 끝난 후 소송이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자 저도 역시 행안부로 넘어가 지금까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소송업무를 전담해 왔던 것입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소송이 행안부로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제기된 친일 관련 소송은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용직으로 있으면서 준비서면만 써주고 공무원이 아니어서 변론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 앉아 메모만 받아적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기 위해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어공’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때 제가 일용직으로 있다는 말을 들은 위원회의 한 지인이 ‘연구자 망신 그만시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등 핀잔도 들었으나 4년여 동안 위원회가 거둔 성과를 무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다시 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23건과 헌법소송 6건(이중 1건은 위헌법률심판제청) 등 총 29건의 소송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귀족회장 이해승,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음악계 홍난파, 문학계 김동인 등입니다.
이중에 이해승 사건은 2009년 취소소송이 제기된 이래 2010년 1심에서 쌍방간에 일부 패소해 각기 항소했고 2014년 2심에서 우리쪽이 승소하자 상대방의 상고로 2016년 3심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우리가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해승 사건은 확정종결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해승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송사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한 소송이 행안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소송을 넘어 소유권이전이나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 민사소송까지 진행되면서 국가와 후손간에 법리다툼과 입증공방이 한층 더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해승 후손이 법원(당시 재판장 박병대)의 법률해석에 따라 친일의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시가 3백억원대의 친일재산을 되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자 사회적 공분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조사법과 반민규명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해 관련 사건진행이 장기간 표류했는데, 이해승 사건을 진행하는 각 심급 법원은 ‘한일합병의 공’을 삭제한 개정된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시비를 가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해승 관련 소송은 모두 국가승소로 귀결되었고 개정법률 이후 진행된 친일재산 관련 소송도 모두 승소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와 방응모 사건의 경우도 이해승 못지않게 장시간 끌었던 지난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거대 메이저언론사의 설립자나 사주였던 관계로 이들의 변론은 막강한 변호인단으로부터 조력을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 선임없이 오직 혼자 법정에서 항변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성수와 방응모측의 변호인들은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입증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대해 총독부기관지 또는 일본측 신문이란 점을 들어 조작・날조・왜곡・도용되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제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학계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친일문제에 있어 독보적인 자료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쁜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아 지금도 송구합니다. 이때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낼 준비서면이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의견서에 대한 법률적 자문은 위원회의 율사출신 위원이던 박연철 변호사를 비롯해 연구소의 고문변호사였던 이민석 변호사와 제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고검의 공익법무관 및 정부법무공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밖에 개별사건과 관련해 위원회에서 조서를 썼던 조사관들과 위원회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의 지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은 김성수와 방응모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 : 김성수와 방응모 관련 소송에서 부분 패소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유효한 것이죠

답 : 네. 그렇습니다. 김성수의 경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고,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국민정동연맹 및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사회・문화 기관 및 단체를 통해 일제의 내선융화나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방응모의 경우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쟁을 선전・선동한 점만 인정되고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친일행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판결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위원회의 결정대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유지된 것입니다.

문 : 방응모의 경우는 1심, 2심, 3심 판결이 다 달랐는데 특히 한 가지 법호만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뒷거래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 〈조선일보〉와의 유착관계도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대법원의 부분 패소 결정도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하여 은밀한 거래가 있었지 않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민규명위 소송의 마무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가 요즘 불거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사주 방응모에게 적용된 친일행위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과 뒷거래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응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으로 귀결되고 환송된 고법에서 일부 행위에 대한 판결이 달라졌지만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방응모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역사와 증거가 살아있는한 어떠한 사법농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응모와 김성수는 가장 논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하다고 인정되었으며, 다른 사건들도 모두 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6건의 헌법소송은 모두 반민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는데, 올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해승과 관련한 헌법소송은 개정된 반민규명법의 법률조항도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끝나면서 반민규명위 소송은 행정소송이든 헌법소송이든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그 결과를 정리했는데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한 각 심급 판결문을 비롯해 법원의 효력정지결정으로 보고서에 등재되지 못한 홍난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를 다시 실은 보고서 보유편을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일부 변경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끝으로 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업무와 후속조치를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 : 김경현 회원은 29건의 반민규명위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연구소 초창기부터 관계했기 때문에 연구소 안팎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연구소가 정말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했고 조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 간에 억척스러움과 아울러 정겨움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소가 초창기의 열정과 현재의 시스템을 잘 엮어 운영하고자 한다면 ‘임종국정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종국선생이 없는 연구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은 빛을 드러낸다는 운명의 힘을 믿고 그 운명을 엮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간다면 시스템도 조직도 사람도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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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 가치는 ‘자유, 평등, 진보'”
“남북한 역사인식에서 공통적인 부분 중심으로 공동사업 기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 바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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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천안=연합뉴스) 김은주 논설위원 =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통일의 토대가 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자유, 평등, 진보’가 오늘날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민주주의, 평화통일과 접목되는 독립기념관이 되면 좋겠다”라고 기대를 표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이 관장은 “남북한 교류를 통해 3.1운동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사료를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남지 않아 제대로 포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기념사업은.

▲ 아직 계획 단계이다. 일단 내년 4월 상하이에서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독립기념관 내 독립군체험학교가 있는데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복원해 거기서 독립전쟁을 체험하는 교육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임시정부가 운영했던 인성(仁成)학교를 복원해 인성학교 체험 프로그램을 병행하려 한다.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인성학교에서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1932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났고 인성학교도 더는 운영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교민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 한편으로는 민족교육, 한편으로는 민주시민교육이 이루어졌다. 중등과정의 삼일학교도 있었다. 임시정부가 직접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교사로 있었다.

–임시정부의 이념적 지향은.

▲ 민주주의다.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공화제가 확립됐고,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됐다.

1944년 마지막으로 개헌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자유, 평등,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 가치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자유, 평등, 진보’가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세상,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더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생각해야 한다.

–북한과 공동 발굴 사업을 기대하고 있다.

▲ 북한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사료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에도 3.1운동 관련 사적지나 자료가 많다. 북한의 관련 재판기록을 조사하면 더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간에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소도 많다. 이를 중심으로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면서 남북 간 역사, 특히 근대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이 모두 인정하고 존경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북이 공동으로 유해발굴에 나설 필요가 있다. 또한, 남북이 협력해서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소재 안중근 의사의 생가를 복원할 수 있겠다.

안중근, 홍범도, 신채호 등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공동학술대회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채호 관련 원자료는 평양 인민대학습당이 많이 소장하고 있다. 10여년 전에 독립기념관에서 입수하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성사 직전에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무산됐다. 남한 자료만 갖고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간했다. 북한 자료까지 포함해서 다시 만들고 싶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 기록이 적기 때문이다.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독립운동과 관련돼 활동했으나 이름을 남기지 못한 여성들을 따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인 경우가 독립운동가의 부인들이다. 특히 해외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부인의 도움이 없었으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하는 남편의 뒷바라지 자체가 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의 구술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를 보면 밖에서 독립운동하다가 동료들과 집에 들어온 시할아버지의 식사를 차리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수발을 드는 것은 전적으로 부인, 딸, 며느리, 손주며느리들의 몫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한 경우 가장 중요한 포상기준이 옥고이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옥고가 적다. 여성이라고 봐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찰에 잡혀가도 기소가 안 되고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 남아있는 여성 한국광복군의 수는 10명 남짓인데 실제로는 더 많은 여성이 해외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의 남아있는 사진에는 군복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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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외국인들도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 지금까지 60~70명 정도가 포상을 받았다. 대다수가 중국인들로, 모두 중국국민당 쪽 인물들이다.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중에는 중국공산당 쪽 인물들도 있는데 공산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포상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공합작 당시 중국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충칭에 와 있었던 저우언라이는 임시정부를 많이 도왔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 중국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일본인들 중에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직접 참여한 사람이 제법 있다. 노동자도 있고 교사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보는 경향 때문에 지금까지 딱 한 명만 서훈을 받았다. 인권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이다.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 관리는.

▲ 중국 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대부분 독립기념관에서 관리한다. 직접 관리는 못 하고 현지 사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관리한다.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사적지 관리도 어렵다. 최근 들어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를 중국 정부가 직접 조성하고 관리도 직접 하는 경우가 나오고 있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사적지를 복원하고 시설물을 설치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관점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은 쌍방향 관계였다. 중국이 지원했지만,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본다. 중국의 역사해석이라는 것이 항상 중국 중심이기 때문에 우려가 된다.

–독립기념관 운영 방향은.

▲ 한국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통일의 토대가 되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독립운동과 평화통일로 접목되는 독립기념관을 만들고 싶다. 당장은 내년 100주년을 기리는 사업을 잘 꾸려나갔으면 한다. 특히 북한과의 교류협력 사업을 활성화했으면 좋겠다.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전문기관으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

▲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를 활성화하고 싶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사 연구센터가 되면 좋겠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의 세대 단절이 심각하다. 독립운동사 전공자들은 정년 퇴임을 했거나 이를 앞둔 교수들이 많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젊은 세대는 수도 적고 아직은 앞세대 만큼의 연구 업적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위축되고 있으니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지청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외할아버지이다.

▲ 첫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는데 어른들 말씀이 늦게 보신 외손자여서 말년에 매우 예뻐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현역 일본 군 장교 신분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잡히면 사형이었다. 가족들이 뒤늦게 수소문해서 만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공인으로 존경하지만, 사실은 외할머니가 더 존경스럽다. 농사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1919년생으로 충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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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조교수)를 지냈다. 2006∼2010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2013∼2017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2016년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을 거쳐 2017년 12월 18일 제11대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했다.

[email protected]

월, 2018/07/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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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耶蘇(문야소)

 

誰何神獨子(수하신독자)

或者起疑懷(혹자기의회)

復活登天話(부활등천화)

吾如對斷崖(오여대단애)

 

예수에게 묻다

 

뉘라서 神의 외아들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의심을 일으킨다네

되살아나 하늘로 올라간 이야기

내겐 낭떠러질 대하는 듯하다네.

 

<時調로 改譯>

 

神의 외아들인가 或者는 의심한다네

죽었다 되살아나 승천했다는 이야기

나에겐 낭떠러지를 대하는 듯하다네.

 

*耶蘇:  ‘예수’의  音譯語  *誰何: 누구  *獨子: 외아들  *或者:  어떤  사람  *疑懷:  의심

(疑心) *登天: 승천(昇天). 상천(上天). 하늘에 오름 *斷崖: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2018.7.24, 이우식 지음>

화, 2018/07/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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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客之辨明

 

天生人器小(천생인기소)

爲國遂無功(위국수무공)

醉詠唯吾事(취영유오사)

於他或一忠(어타혹일충)

 

술 취한 사람의 변명

 

타고난 그 바탕 사람 그릇이 작아

나라 위해 세운 功 마침내 없지만

취해 읊음이 오로지 나의 일인 바

남에게 혹 일개 忠이 될지 모르네.

 

<時調로 改譯>

 

사람 그릇이 작아 爲國의 功은 없지만

취하여 읊조림이 오로지 나의 일인 바

행여나 다른 이에게 一忠 될지 모르네.

 

*天生: 하늘로부터 타고남. 또는 그러한 바탕 *人器: 사람의 도량과 재간(才幹).

사람의 됨됨이를 이른다 *爲國: 나라를 위함 *無功: 아무런 공로(功勞)가 없음.

 

<2018.7.24, 이우식 지음>

화, 2018/07/24-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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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최종 결재권자 박근혜…
교육부를 행동대장으로 부린 청와대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10월27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끝내고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 등 지도부의 안내를 받으며 퇴장하는 가운데, 정의당 의원단이 국정화 반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모든 것을 강행한 처음과 끝은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교학사(교학사 검정 역사교과서)가 좌초되면서 검정은 안 된다고, 국정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실무 총괄 책임자였던 박성민 전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 조사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상조사 및 면담 대상자 모두가 ‘국정화 사건 주연’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박근혜의 청와대다.

교학사 사태 때부터 국정화 염두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는 지난 3월28일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박근혜·김기춘 기획, 이병기·김상률 위법·편법 강행’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국정화를 결정해 추진했고, 김 전 실장 후임인 이병기 전 비서실장과 김상률 교육문화수석 등이 위법·부당한 수단과 각종 편법을 동원해 강행했다는 것이다.

2013년 6월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국정화의 ‘서막’이었다. “한탄스럽게도 학생들의 약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육 현장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신중하게 대책을 마련하기 바란다.”

박 전 대통령의 ‘올바른 역사교육’ 지침이 내려진 뒤 같은 해 8월 청와대가 강력하게 지지한 교학사의 검정 한국사 역사교과서가 최종 검정을 통과했다. 하지만 1천 개 이상의 오류와 친일·독재 미화 등 편향적 서술로 교육 현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현행 검정제도에 ‘깊은 회의’를 느낀 박 전 대통령은 같은 해 9월17일 국무회의에서 검정을 통과한 모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전면 수정·보완할 것을 지시하면서 “더 이상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사실상 국정화를 지시했다.

그해 8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기춘도 박 전 대통령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김 전 실장은 10월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교과서는 이념 대결의 문제로 간단치 않다.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하지 않으면 박 정권 5년 내에 좌파 척결이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2014년 1월13일 새누리당과 교육부는 당정 협의를 통해 6월까지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편안을 마련하기로 하고, 실무를 담당할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을 신설한다. 하지만 국정화 여론 조성이 뜻대로 되지 않자 2014년 7월 말로 예정된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문제, 즉 한국사 국정 전환 여부 결정을 미뤘다.

이때부터 청와대의 압박이 구체화했다. 2014년 7월 최원기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행정관이 권성연 역사교육지원팀장과 통화하면서 국정화 결정을 종용했다. 교육부의 국정화 전환 방침은 2014년 9월 사실상 확정됐다. 이후 난항을 겪던 국정화는 2015년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국정화 결정과 실행 과정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했다.

음지에 숨은 결재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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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이병기는 국정화 정책을 앞장서 추진했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이 비서실장은 2015년 7월부터 국정화 추진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지시를 하달했다. 2015년 7월5일부터 그해 12월21일까지 17차례나 지시 사항이 내려간 것으로 나타난다. 비서실장의 지시는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이기봉 교육비서관-김한글 교육행정관을 통해 교육부로 전달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국정화 추진을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세부 사안까지 일일이 개입했다. 교육부는 2015년 9월29일 이 비서실장이 “상황실/ 티에프(TF) 구성 운영도 필요할 것”이라는 지시 사항이 나온 직후인 10월5일 청와대 접근성이 좋은 서울 동숭동 옛 국립국제교육원에 역사교육지원티에프를 구성했다. 운영 기간 내내 거의 매일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렸고, 청와대가 요구하는 각종 보고자료와 국정화 홍보자료가 생산됐다.

교육부는 청와대 지시를 받은 차관의 지시로 실국별로 학자들을 조직해 2015년 10월16일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학자 102인 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0월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고엽제전우회 등 친정부 단체들이 행사장에 난입했다. 이 비서실장의 지시와 10월26일 교육부가 작성한 전국역사학대회 대응 계획과 일치한 것이었다.

교육부는 2015년 10월12일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제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 과정에서 행정 예고 의견 수렴 마지막 날인 11월2일 일괄 출력물 형태로 국정화 찬성 의견서가 ‘차떼기 제출’된 사실이 드러났다.

황우여 당시 교육부 장관은 국정화 발표 전 마지막 순간까지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마지막으로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황교안 총리는 국정화 발표 대국민담화에서 기존 검정교과서 모두를 “99.9% 편향된 역사교과서”로 몰았다. 청와대는 교육부의 반대에도 국정교과서를 ‘올바른 교과서’로 이름지었다.

편찬 기준은 교과서 서술 내용의 범위와 방향, 쟁점에 대한 서술 지침, 편찬시 유의 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2015년 9월 말 김한글 청와대 행정관은 교육부에 편찬 기준에 대한 21건의 수정 요구를 전달했다. “일제강점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등 5개 특별법 관련 항목을 모두 삭제” “‘새마을운동에 대해 서술할 경우 그 성과와 한계를 서술한다’에 ‘한계’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의의로 서술한다’로 교체” 등의 요구가 담겼다. 교육부는 21건 중 18건을 편찬 기준 최종본에 반영했다.

역사과 교과용 도서 편찬심의회는 교과서 편찬에서 집필진과 함께 교과서 내용을 좌우하는 핵심 기구다. 청와대는 선정위원회 심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교수 위원 명단을 바꿔 보냈다. 16명의 편찬심의위원 중 교수 위원 7명 전원을 청와대에서 제시해 지명했지만, 형식상으론 ‘초빙’해 선정한 것처럼 보고됐다.

청와대는 집필진 선정 과정에도 부당 개입했다. 진술에 따르면 집필진 선정은 2015년 10월께 시작돼 11월까지 국편을 통해 진행됐다. 김정배 위원장이 교육부 예비 명단을 참고하고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후보자 목록을 작성하면, 이를 청와대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에게 보고하고, 이를 박 대통령에게 올려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교과서 문구 하나까지 청와대 작품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어떻게 추진하고 관리할지 총 15가지 항목에 걸쳐 직접 꼼꼼하게 지시했다. 2016년 10월8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교과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광복 이후 수립 과정, 6·25전쟁, 이·박 대통령 평가, 북한 정권’ 등을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교육연대회의는 2017년 2월2일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최종본의 문제점을 발표했다. 연대회의는 “고교 한국사만 653개의 오류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대표적 편향 사례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는 부분이 지적됐다. 관권을 동원했음에도 역대 대선 중 15만 표라는 가장 적은 표차였는데, 이런 정황 설명이 전혀 없었다.

전정윤 기자 [email protected]

<2018-07-23> 한겨레21
☞기사원문: 대통령 기획 비서실장 감독 막 내린 국정화

※관련기사
☞한겨레21: 국정화 조연들, 굴종의 역사

☞한겨레21: 장관은 차관 탓 차관은 실장 탓

☞한겨레21: ‘○○’들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

화, 2018/07/2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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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訪我富僧韻

 

身貧心大富(신빈심대부)

所願若斯居(소원약사거)

起臥恒無礙(기와항무애)

休輕我草廬(휴경아초려)

 

나를 찾은 부유한 중의 詩에 화답하다

 

몸 가난하나 마음만은 大富라

이러한 생활이 바라던 바였소

일어서나 누우나 늘 無礙하니

내 오두막을 업신여기지 마오.

 

<時調로 改譯>

 

마음만은 大富라 이런 생활을 바랐소

일어서나 누우나 늘 거리낌이 없느니

스님은 내 오두막을 업신여기지 마오.

 

*大富: 큰  부자(富者)  *起臥: 일어남과  누움.  또는  일상적인  생활  상태 *無礙: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 *草廬:  초가(草家).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2018.7.25, 이우식 지음>

수, 2018/07/25-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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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政府過度福祉事業

 

昨今過福祉(작금과복지)

國債衆人憂(국채중인우)

好惰嫌勤勉(호타혐근면)

無錢晝夜遊(무전주야유)

 

政府의 정도에 지나친 복지 사업을 탄식함

 

요즘 정도에 지나친 복지 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負債 걱정

나태 좋아하고 근면 썩 싫어하며

돈이 없어도 밤낮으로 놀고 있네.

 

<時調로 改譯>

 

과도한 복지 사업에 많은 이 國債 걱정

게으름을 좋아하고 근면함을 싫어하며

오호라! 돈이 없어도 밤낮 놀고 있다네.

 

*過度: 정도에 지나침  *昨今: 요즘. 또는  어제와 오늘을 아울러 이르는 말 *國債:

나랏빚 *衆人: 뭇사람 *勤勉: 부지런히 일하며 힘씀 *無錢: 돈이 없음 *晝夜: 밤낮.

 

<2018.7.25, 이우식 지음>

수, 2018/07/25-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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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次陶淵明四時韻

 

來花鳥界(춘래화조계)

節四靑(하절사청봉)

夜同君醉(추야동군취)

天順一(동천순일송)

 

陶淵明의 ‘사계절’ 詩에 삼가 次韻하다

 

봄이 오니 꽃들과 새들의 세계

여름철엔 온 사방 푸른 봉우리

가을밤 님과 함께 술에 취하며

겨울날엔 한 그루 솔을 따른다.

 

<時調로 改譯>

 

봄 오니 花鳥世界 여름철엔 사방 靑峯

가을밤 님과 더불어 술에 흠뻑 취하며

차가운 겨울날에는 한 그루 솔 따른다.

 

*次韻: 남이 지은 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詩를 지음. 또는 그러한 방법 *陶淵明:

중국 동진(東晉)의 詩人(365~427). 이름은 잠(潛)이고 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

明은 자(字). 405년에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여 일 뒤에

<歸去來辭>를 남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자연을 노래한 詩가 많으며,

당(唐)나라 이후 육조(六朝) 최고의 詩人이라 불린다. 외의 산문(散文) 작품에

<五柳先生傳>, <桃花源記> 따위가 있다 *四時: 사철 *花鳥: 꽃과 새를 이르는 말

*夏節:  여름철  *靑峯:  푸른  산봉우리  *秋夜:  가을밤  *冬天:  겨울날.  겨울  하늘.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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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樓逢吝嗇友

 

四處多田宅(사처다전택)

宜當大富豪(의당대부호)

恒常先醉走(항상선취주)

衆友怨聲高(중우원성고)

 

술집에서 인색한 벗을 만나

 

사방에 많은 논밭과 집이 있으니

마땅히 大富豪라고 해야 할 텐데

언제나 먼저 술에 취해 달아나니

많은 벗님들 원망의 소리 높다네.

 

<時調로 改譯>

 

온 사방 田宅 많으니 의당 大富豪인데

언제나 가장 먼저 술에 취해 달아나니

그대의 많은 벗님들 怨聲이 썩 높다네.

 

*酒樓: 비교적 큰 규모의 술집. 주사(酒肆) *吝嗇: 재물을  아끼는 태도가 몹시

지나침. 어떤 일을 하는 데 대해 지나치게 박함 *四處: 사방(四方) *田宅: 논밭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전도(田堵) *宜當: 사물의 이치에 따라서 마땅히

*大富豪: 재산이 매우 많고 세도(勢道) 있는 富者  *怨聲: 원망(怨望)하는  소리.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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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冥福(소명복)

 

莫道祈冥福(막도기명복)

於吾但笑資(어오단소자)

何人云死後(하인운사후)

牧者假僧欺(목자가승기)

 

죽은 뒤의 福을 비웃다

 

冥福을 빈다는 말씀일랑 마시게

나에게는 오로지 웃음거리일 뿐

어떤 사람이 死後를 운운하는고

목사와 땡추중이 속이고 있도다.

 

<時調로 改譯>

 

죽은 뒤 福 말 말게 내겐 웃음거리일 뿐

죽음 이후에 대하여 뉘라서 운운하는고

목사와 가짜 승려가 뭇사람 속이는도다.

 

*冥福: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福. 죽은 뒤 받는 福德 *莫道: ‘말하지 말라’의 뜻

*笑資: 소병(笑柄). 웃음거리 *何人: 어떤 사람 *假僧: 가짜 승려. 땡추. 땡추중.

 

<2018.7.26, 이우식 지음>

목, 2018/07/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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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다운로드]

0726-12<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을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 때 : 2018년 7월 27일(금), 오후 2시
○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회의실
○ 주최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회 :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발언1 :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발언2 : 김세은(민변, 법무법인 해마루, 소송 담당 변호사)
기자회견문 낭독 : 안영숙(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시민모임 사무국장)
질의응답 : 김민철(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조시현(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기자회견문]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우리는 어제 한 용기 있는 현직 판사를 통하여 일제 강제동원 소송에 대한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면서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보상 청구사건 담당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에게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판결의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의혹으로 제기되었던 사법부의 재판개입 의혹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충격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 사법부의 독립은 이미 파탄이 났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양승태 법원행정처는 ‘정의의 심판’을 기다리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판결을 보지 못하고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슬픈 현실을 앞에 두고서도 재판의 결론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로부터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사법행정처를 총동원하여 재판 거래를 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도 확인되었다. 일제에 의해 짓밟힌 청춘에 대한 권리 구제를 평생 동안 기다리던 피해자들의 염원을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한 사법부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아니다.

더욱이 이 재판을 두고 사법부와 재판을 거래한 외교부는 어느 나라 외교부인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외교부는 이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일본 공사가 강하게 요구한 것을 수차례나 법원행정처에 전달하여 노골적으로 재판에 개입했다. 이에 대해 2013년 9월 박찬익 당시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외교부의 입장을 반영해 재판을 미루는 방안을 검토하여, 피고 측인 일본 기업들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김앤장을 통해 외교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접수하고, 국외송달을 핑계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2015년 6월 법원행정처 임종원 전 차장은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 의견서 제출을 협의하며 대사관 법관 파견을 청탁했다.

2016년 10월 미쓰비시를 대리하는 김앤장은 박찬익 심의관이 제안한대로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였고, 11월 외교부는 “손해배상시 한국이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편 박찬익 전 심의관은 재판거래를 기획한 대가로 지난 2월 소송당사자의 대리인인 김앤장에 취업했다.

사법부와 외교부, 그리고 국내 최대의 법무법인 김앤장이 결탁하여 재판을 거래하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와 사법부의 존재의의, 그리고 김앤장의 범죄적인 행태에 대해 그 책임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요구한다.

1) 사법부는 강제동원 소송에 부당하게 개입한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새로운 재판부를 구성하여 신속하고 공정한 심리를 진행하여 판결하라.

2) 외교부는 사법부, 김앤장과 결탁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재판 거래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

3) 검찰은 강제동원 소송을 둘러싸고 재판 거래를 실행한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 박찬익, 재판에 개입한 대법관 등 사법부 관계자, 외교부 관계자, 김앤장, 그리고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라.

4) 국회는 강제징용 소송에 대한 사법부와 외교부의 재판 거래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하라.

2018년 7월 27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0726-13

목, 2018/07/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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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식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요?

몇일에 한번씩 올리다가 갑자기 하루에도 몇번씩 이렇게 도배를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시상이 전보다 갑자기 몇배로 뛰어올랐나요?

 

웬만큼 하시지요..

게시판 혼자의 것이 아닌것 잘 아시지요?

잘못하면 오해받습니다.

목, 2018/07/2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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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을 고발한다!

2018월 7월 27일 오후 2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보도자료] 바로가기

 

금, 2018/07/2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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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피해자들 “재판 결과 기다리다 대부분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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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기자회견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30 여 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기자회견을 해봤지만, 오늘처럼 참담하고 슬프고 분통터지는 기자회견은 처음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참담하기만 하다.”

수 십년 간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해 왔으며, 자신 또한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75)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어디서든 기자회견을 하면, 항상 피해자 입장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제가 당당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 벽면엔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 등 일본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제동원 소송을 진행해 온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총 9명의 피해자 중 7명의 피해자 이름 앞에는 ‘故’(고)자가 붙어 있었다. 고인이 된 7명의 피해자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모국에서도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2분의 피해자 또한 현재 90세가 넘거나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에 이들의 재판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논란이다. 지난 26일엔 한 현직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대법원 측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관련 재판을 “재검토하라” 지시했다고 밝혀 논란이 더해지고 있다.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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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 벽에 걸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 ⓒ민중의소리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
피해자들 위로해온 이희자 공동대표의 낙담

이희자 공동대표는 발언 내내 재판 결과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떠올리는 듯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재판 결과가 나오질 않자, 제가 그분들을 위로해드렸다. 포기하지 말라고, 오래 살아달라고, 그게 이기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대법원 재판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라며 탄식했다.

앞서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각각 부산지법(2000년)과 서울중앙지법(2005년)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이들은 1·2심에서 패소했으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처음으로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희자 공동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일본에서 모든 재판을 지고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 재판을 시작하고, 처음 승소 소식을 접했을 때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이 우셨다”라며 “식민지 시대에 잃어버린 민족과 청춘을 다 찾은 것처럼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원심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대로 피해자 한 사람당 1억원(서울 고법) 또는 8천만원(부산 고법)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다. 이런 상태로 해당 사건은 2013년 8월 대법원에 재상고 됐다. 하지만, 이후 5년이 다 되도록 법원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원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위로했던 이 공동대표가 “당당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낙담한 이유다. 그는 “일본과의 문제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청와대가 거래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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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민중의소리

사법부·외교부·김앤장 유착,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충격적”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도 사법부·외교부·김앤장의 유착에 절망감을 드러냈다. 김세은 변호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그동안 무엇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기다려 왔는가 질문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탄식했다.

김 변호사는 “사법부는 다수의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라며 “그런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외교부, 청와대와 손을 잡고 우리 재판을 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했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법부가 삼권분립 원칙까지 어겨가며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한 정황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민사소송규칙 상으로는) 원고와 피고 등의 의견은 1-2심에서 모두 제기가 되어야한다”며 “그런데 이 규칙을 대법원 판결 전에 바꿨다.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 단계에서 소송과 관련도 없는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2심에서 시민단체나 관계기관들이 의견을 법원에 제출하는 길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교부가 일방적으로 일본기업 측에 유리한 내용의 의견서를 통해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라며 “이는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소송당사자에 대한 심각한 권리침해 소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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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외교부의 의견서 ⓒ민중의소리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외교부는 명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진 않지만 교묘하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안 된다는 의견을 표한다.

해당 문서에는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기업들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50년간 한일양자관계의 근간이 되어온 협정의 해석이 뒤흔들릴 경우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신인도 손상을 불러올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와 비즈니스에 장애가 되고 한일 간 경제관계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 사법부의 존재 의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강력히 요구한다”라며 소송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 새로운 재판부 구성을 통한 신속·공정한 심리, 외교부·사법부·김앤장이 결탁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검찰의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했다.

<2018-07-2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목숨 대가로 한 ‘사법부·외교부·김앤장’ 뒷거래”

※ 관련기사

☞프레시안: 외교부는 일본 지부, 대법원은 일본 민원 처리 기구?

☞한국일보: “강제동원 재판 지연은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유착”

☞민중의소리:외교부 ‘고리’로 더욱 선명해진 양승태 사법부의 ‘일제 강제징용’ 재판거래

※ 뉴스영상

금, 2018/07/2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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