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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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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09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고등어찌개는 정말 맛있었고 서로 간의 정이 느껴지는 정겨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사람들은 풍찬노숙하며 역사전쟁을 주도하는 전사들이었고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긴 했지만 일심동체라는 동지적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문 : 2000년 『명석면사』 출간 보도를 보고 지역사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란 걸 직감했습니다.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여서 지역 친일파 연구에 천착하던 김경현 회원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석면사』는 어떻게 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답 :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민주화 이행기가 도래하면서 국민주주모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진주시민사회에서도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에 대항하는 지역신문 창간을 서둘렀습니다. 1991년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민주주로 <진주신문>을 창간했는데(이 신문은 2009년 등록이 말소될 때까지 18년간 진주지역의 참언론으로 역할했음), 이때 <진주신문> 발행인이던 시인 박노정 선생의 배려로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나름 민완 기자로서 취재 업무에 재미를 느껴갈 무렵 1997년 IMF사태(국제구제금융신청)가 터져 신문사가 폐업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남아있는 신문사 후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그때 저는 1998년 진주문화원에서 <진주이야기 100선>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을본 당시 진주시의회 손태기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였던 명석면의 역사책 집필을 의뢰해 왔습니다. 저는 단순한 지리지나 ‘내고장 전통’류 같은 ‘면지’가 아닌 면단위 역사책인 ‘면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손의원이 이에 동의하자 저도 흔쾌히 집필에 찬성했습니다.
<명석면사>를 집필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많은 면민들을 탐방하고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과 강제징용, 해방직후 좌우대립, 6.25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팩트’와 저널리즘 시각에서 면사를 집필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후 편찬위원회에 보이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좌우대립시 누가 누굴 죽인 것까지 공동체 촌락에서 매우 민감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일제 면협의원과 면직원, 경방단, 순사, 각종 친일부역자와 우익청년단, 남로당원 및 빨치산까지 다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편찬위원회에서는 문제 인사들의 이름을 복표(□□)로 처리하고 민감한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습니다. 진주에는 3대 토착성씨가 있었는데 진양 하씨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하순봉 의원이 바로 진양 하씨로 진주 출신입니다. 하씨 문중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명석면 출신의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경남에서 유명한 악질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반민특위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실렸고나중에국가기구에서도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중의 친일파를 하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빼지 않으면 <명석면사>를 출간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대 이유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저로서는 면사에서 하판락을 제외한다면 집필을 포기하겠다고 강조하며 편찬위원회에 사표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명석면사>에는 미관말직이라도 일제의 관공리라면 학교소사까지 조사해 실었는데 정작 고등계 형사를 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 인사들이 <명석면사> 출간의 역사적의미를 생각해 하판락의 이력을 빼더라도 면사를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조언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판락의 이력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지웠는데 인쇄 직전에 하판락의 친일 경력이 하씨 문중의 요구에 의해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을 넣으므로써 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즉 삭제된 부분에 괄호를 치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명석면 관련인물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추진위의 결정에 따라 전체내용을 모두 삭제함)”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문 : 친일파의 변명•변호 논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군요. 김경현 회원은 위암 장지연 명예훼손사건 등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소송을 겪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첫 번째 소송은 <진주신문> 기자로 있을 때 토호세력과 벌어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1993년 남강댐 보강공사와 관련한 수몰지역 측량비리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비리에 경남 사천군의원(이 자는 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자 사천시의회 의장까지 지냄)이 연루되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때 박노정 시인이 <진주신문>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사천군의원으로부터 저와 함께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주지검에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며 취재기자와 발행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구형했고, 1심(진주지원)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는데 창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2심에서는 취재의 정당성과 보도의 공익성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벌금형도 용납할 수 없어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고 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혼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덕수궁 뒤쪽 일제 때의 고등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당시 대법원 청사여서 그곳에다 접수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소송의 결과가 앞으로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까닭모를 서글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었고, 창원지법에 되돌아온 환송재판에서 저와 발행인은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을때 일어났지요. 장지연사건의 발단은 <경향신문>이 2005년 3월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의 출간소식을 전하면서, 저자인 제가 그 인명록에서 장지연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밝혀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장지연 후손이 저한테 ‘허위사실유포’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청량리경찰서(지금의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출두일인 2005년 6월 10일자에 맞춰 <경남도민일보>에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칼럼을 발표하고,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비꼬면서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는 속았다. 우리 4천만 겨레여, 친일의 망령으로 노예된 겨레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왕검 이래 5천년 가까운 민족정신이 위암 선생의 친일의혹으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상규명으로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할 것인가. 정말 원통하지만 상징 조작된 위암 선생을 단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정한 항일언론인 상을 다시 세우자. 겨레여! 겨레여!”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청량리경찰서에는 당시 방학진 사무국장(현 기획실장)과 함께 출두했습니다. 방 사무국장은 조사담당경찰관에게 실실 웃으면서 저를 가리키며 조사할 때 때리지 말라고 거듭 말했는데 조서를 작성하던 그 경사가 황당해 하며 방국장을 황급히 밖으로 내보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담당경찰은 친일 행위가 사실이라더라도 이를 언론매체를 통해 공포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그렇다면 장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국민이 받게 된 명예훼손은 누가 보상하는가”라고 주장하며, 입증자료로 <경남일보> 주필 당시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문사의 천장절 기념행사 관련 기사를 비롯해 하세가와 총독 부임 때 장지연이 이를 축하하며 <매일신보>에 발표한 한시 등 1차 사료와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했습니다. 그해 11월 서울 북부지검으로부터 장지연 명예훼손에 대한 혐의가 없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게 제기되었던 필화사건으로 첫 번째 소송은 무죄로 끝났고 두 번째 소송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제 생애에 소송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제가 직업적으로 소송을 수행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문 : 소송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듣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를 저술하여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출간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임종국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진주인명록>은 <명석면사>를 집필할 때 조사된 지역의 인물들을확인하기위한용도로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공리와 유력자 3,400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주지역 친일파인명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출간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언을 좇아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사실일제의관공리나식민지배의 유력자로 행세했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이 책에는 학교 소사까지 다 들어가 있었거든요.
또 제목에 ‘인명록Ⅰ’이라고 로마자를 붙인 것은 <진주인명록>과 같은 지역 인명록이 계속 발간되기를 지역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의미에서 붙였지만 이후 유사한 작업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한기억만 남아있는데, 마지막 교열작업 때는 아예 서울로 와서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청량리에 있던 연구소 인근의 떡전사거리 근처에서 2개월 가량 여관에 묵으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하는 조세열 상임이사님과 이를 녹취하는 박광종 선생님 등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친일청산을 토론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연구소 초창기에 임종국 선생의 인명카드를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명석면사>와 <진주인명록>을쓰 는데 큰힘이되었습니다.사실 제가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너무나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5월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족되자 그해 7월에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임종국상을 수상함으로써 반민규명위에서 대단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친일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임종국상을 받은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 상의 취지에 맞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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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기호(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이기형(시인), 임정택(임종국선생 자제), 정병화(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김시업(심산사상연구회장), 박중기(4·9통일평화재단 이사), 이건(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앞줄 왼쪽부터 김영만(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사회운동부문 수상자), 정길화(MBC방송 PD, 언론부문 수상자), 김경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 학술부문 수상자),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임종국상 심사위원), 이만열(임종국상 심사위원장), 주섭일(임종국상 심사위원), 함세웅(임종국상 심사위원)

 

문 : 연구소에서도 제1회 임종국상 시상이라 수상자 선정에 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김경현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진주인명록』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고 신진 연구자의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진상규명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당시 반민규명위는 60년 만에 부활한 ‘반민특위’라고 하여 사회 각계에서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강만길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족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진상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총 1,006명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경찰, 밀정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처럼 증거주의와 문서주의에 입각하여 일제 문헌자료와 당시 발행된 신문・잡지 등을 뒤져 친일행적을 입증했으며. 계급이 낮더라도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살상한 고등계 형사 및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여했다면 가장 낮은 계급의 순사보나 헌병보조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에 적극 관여한 조희창이란 순사보의 경우 일본에 출장가 공문서관에서 찾은 것이 이력서 한 장밖에 없어서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암리 학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반민규명위 활동 당시 관련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미비했고 한정된 조사 기간 등으로 인해 미진한 부분이 많아 친일 진상 조사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친일 경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제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문 : 그 각오가 엄중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반민규명위가 해산되고 행정안전부에 남아 위원회의 송무업무를 맡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고서 보유편 발간으로 위원회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십 차례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에서 2차례의 부분 패소 외에는 전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히 홍난파, 이해승, 김성수, 방응모 등 지난한 상대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위원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만에 끝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의 유족들이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송은 주로 위원회 말기인 2009년부터 쏟아졌지만 이미 중추원 참의 조진태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고손 이해승 등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음악가 홍난파, 총독부 판사 김세완 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취소 소송도 잇따라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몰려오는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대 위원장이던 성대경 위원장이 각 부서 팀장을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법무팀을 따로 구성할 시간도 인력도 어려워 소송수행은 각 조사팀장이 담당한 분야에서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 말기에 조사3팀장을 맡고 있던 제가 조사3팀에서 결정한 기타단체의 이재면・이준용과 경제의 조진태・김연수 등에 대해 소송을 직접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위원회가 종료된 후 청산절차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에도 소송수행자가 계속 필요했습니다. 특히 홍난파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이 유족의 효력정지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홍난파가 반민규명위 보고서 인쇄중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 중추원 참의에 대한 친일결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들어오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원회 사무처의 요청으로 저는 위원회 청산기간에 다른 조사팀의 소송과 헌법소송까지 모두 맡게 되었고, 청산기간이 끝난 후 소송이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자 저도 역시 행안부로 넘어가 지금까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소송업무를 전담해 왔던 것입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소송이 행안부로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제기된 친일 관련 소송은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용직으로 있으면서 준비서면만 써주고 공무원이 아니어서 변론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 앉아 메모만 받아적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기 위해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어공’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때 제가 일용직으로 있다는 말을 들은 위원회의 한 지인이 ‘연구자 망신 그만시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등 핀잔도 들었으나 4년여 동안 위원회가 거둔 성과를 무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다시 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23건과 헌법소송 6건(이중 1건은 위헌법률심판제청) 등 총 29건의 소송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귀족회장 이해승,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음악계 홍난파, 문학계 김동인 등입니다.
이중에 이해승 사건은 2009년 취소소송이 제기된 이래 2010년 1심에서 쌍방간에 일부 패소해 각기 항소했고 2014년 2심에서 우리쪽이 승소하자 상대방의 상고로 2016년 3심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우리가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해승 사건은 확정종결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해승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송사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한 소송이 행안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소송을 넘어 소유권이전이나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 민사소송까지 진행되면서 국가와 후손간에 법리다툼과 입증공방이 한층 더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해승 후손이 법원(당시 재판장 박병대)의 법률해석에 따라 친일의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시가 3백억원대의 친일재산을 되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자 사회적 공분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조사법과 반민규명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해 관련 사건진행이 장기간 표류했는데, 이해승 사건을 진행하는 각 심급 법원은 ‘한일합병의 공’을 삭제한 개정된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시비를 가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해승 관련 소송은 모두 국가승소로 귀결되었고 개정법률 이후 진행된 친일재산 관련 소송도 모두 승소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와 방응모 사건의 경우도 이해승 못지않게 장시간 끌었던 지난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거대 메이저언론사의 설립자나 사주였던 관계로 이들의 변론은 막강한 변호인단으로부터 조력을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 선임없이 오직 혼자 법정에서 항변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성수와 방응모측의 변호인들은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입증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대해 총독부기관지 또는 일본측 신문이란 점을 들어 조작・날조・왜곡・도용되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제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학계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친일문제에 있어 독보적인 자료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쁜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아 지금도 송구합니다. 이때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낼 준비서면이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의견서에 대한 법률적 자문은 위원회의 율사출신 위원이던 박연철 변호사를 비롯해 연구소의 고문변호사였던 이민석 변호사와 제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고검의 공익법무관 및 정부법무공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밖에 개별사건과 관련해 위원회에서 조서를 썼던 조사관들과 위원회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의 지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은 김성수와 방응모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 : 김성수와 방응모 관련 소송에서 부분 패소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유효한 것이죠

답 : 네. 그렇습니다. 김성수의 경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고,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국민정동연맹 및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사회・문화 기관 및 단체를 통해 일제의 내선융화나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방응모의 경우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쟁을 선전・선동한 점만 인정되고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친일행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판결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위원회의 결정대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유지된 것입니다.

문 : 방응모의 경우는 1심, 2심, 3심 판결이 다 달랐는데 특히 한 가지 법호만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뒷거래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 〈조선일보〉와의 유착관계도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대법원의 부분 패소 결정도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하여 은밀한 거래가 있었지 않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민규명위 소송의 마무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가 요즘 불거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사주 방응모에게 적용된 친일행위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과 뒷거래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응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으로 귀결되고 환송된 고법에서 일부 행위에 대한 판결이 달라졌지만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방응모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역사와 증거가 살아있는한 어떠한 사법농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응모와 김성수는 가장 논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하다고 인정되었으며, 다른 사건들도 모두 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6건의 헌법소송은 모두 반민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는데, 올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해승과 관련한 헌법소송은 개정된 반민규명법의 법률조항도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끝나면서 반민규명위 소송은 행정소송이든 헌법소송이든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그 결과를 정리했는데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한 각 심급 판결문을 비롯해 법원의 효력정지결정으로 보고서에 등재되지 못한 홍난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를 다시 실은 보고서 보유편을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일부 변경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끝으로 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업무와 후속조치를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 : 김경현 회원은 29건의 반민규명위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연구소 초창기부터 관계했기 때문에 연구소 안팎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연구소가 정말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했고 조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 간에 억척스러움과 아울러 정겨움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소가 초창기의 열정과 현재의 시스템을 잘 엮어 운영하고자 한다면 ‘임종국정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종국선생이 없는 연구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은 빛을 드러낸다는 운명의 힘을 믿고 그 운명을 엮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간다면 시스템도 조직도 사람도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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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 창구,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현해의 여왕’ 금강환(金剛丸)과 흥안환(興安丸) 홍보엽서,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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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딱 1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1905년 1월 1일은 서울 영등포의 분기점에서 시작되어 저 멀리 부산 초량으로 이어지는 경부철도의 전 구간에 대한 운수영업이 개시된 날이다.
하필이면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대에 의한 여순함락(旅順陷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뤄진 경부선의 개통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한국에 일본세력」이란 제하의 기사 한 토막을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경부철도가 내년 1월 1일에 개회식을 행할 터인데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수레는 올라간다 하고 부산에서 서울에 오는 수레는 내려간다 한다는데 그것은 동경을 중심으로 삼는 연고라 하고 차세는 일본 돈으로 받게 하고 철로변에 지명은 다 일본말로 부르게한다 하며 일삭 전에 경인철로회사에서 일본시간을 쓰기로 작정하였으니 그 전보다 삼십 오 분이 잃게 되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이 말을 미리 통기하지 아니하여서 차 타러나아갔다가 낭패한 자도 있고 다른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다더라.

여길 보면 땅만 한국 땅이었지 철도운영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차의 운행시각도 일본의 표준시에 맞춰 제멋대로 변경하는 등 이미 시간에 대한 주권조차 빼앗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부산을 향하는 기차를 일컬어 공공연하게 자기들 식으로 ‘올라간다’고 표현했다는 대목 역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상용어로 정착되는 ‘동상(東上, 동경으로 가는 것)’이니 ‘귀선(歸鮮,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하는 따위의 표현들도 바로 이러한 일본중심의 관념에서 파생된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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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부철도의 개통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또 다른 교통수단의 확장과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905년 9월에 운행이 개시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부관연락선)이라는 존재이다. 관부연락선은 글자 그대로 한국의 부산(釜山)과 일본의 하관(下關, 시모노세키) 사이에 가로놓인 240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닷길을 연결하는 여객선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양쪽의 철도운행시각에 때를 맞춰 왕복한다는 것이 일본우선(日本郵船)이나 조선우선(朝鮮郵船)과 같은 여느 정기여객항로와는 다른 점이다.
대한해협을 오가는 이러한 연락선의 등장으로 일본 쪽으로는 산양선(山陽線, 시모노세키~코베 구간)과 동해도선(東海道線, 코베~신바시 구간)을 거쳐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 동경역은 1914년에 개설)까지 직통으로 연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한국 쪽으로는 예전처럼 구태여 배편으로 인천항을 경유할 필요 없이 부산정거장에서 곧장 서울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905년 11월에 경의철도(京義鐵道)마저 부설되자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단숨에 이동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닌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교통망은 1911년 11월에 안봉선(安奉線, 안동~봉천 구간)과 압록강 철교의 개통으로 정점을 찍게 되는데, 이로써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와 동청철도(東淸鐵道)까지 포괄하여 동아시아 일대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 일본제국의 영향권 내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길은 이른바 ‘우호선린’과 ‘동양평화’를 위한 통로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대륙침략’을 위한 기반시설로 고스란히 활용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관부연락선의 명칭 하나하나를 통해서도 이러한 침략야욕의 변천사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
최초의 연락선이었던 일기환(壹岐丸, 1905년 9월 취항)과 대마환(對馬丸, 1905년 11월 취항)은 이른바 ‘현해탄(玄海灘)’의 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반면에 고려환(高麗丸, 1913년 1월 취항), 신라환(新羅丸, 1913년 4월 취항), 경복환(景福丸, 1922년 5월 취항), 덕수환(德壽丸, 1922년 11월 취항), 창경환(昌慶丸, 1923년 3월 취항) 등은 식민지 조선이 이미 자기네의 영역에 완전히 흡수되었음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명칭으로 채택한 것이었다고 알려진다.

010

193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금강환(金剛丸, 1936년 11월 취항), 흥안환(興安丸, 1937년 1월 취항), 천산환(天山丸, 1942년 9월 취항), 곤륜환(崑崙丸, 1943년 4월 취항)은 조선과 만주 땅은 물론이고 저 멀리 중국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일본제국의 세력권으로 확장하겠다는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름인 셈이다. 이 와중에 한쪽에서는 신천지를 찾아 조선과 만주로 이주하려는 일본인들이 줄지어 탑승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수탈의 대상이 되어 이른바 ‘내지(內地)’로 건너가려는 조선인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에 정리된 자료에 따르면, 이들 관부연락선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천만 명에 달하는 승객을 실어 나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야말로 관부연락선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대동맥의 역할을 했음을 실감할 수있는 대목인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일제의 패망 당시 80만 명에 달하는 조선 거주 일본인과 200만 명에 육박했던 재일조선인들이 귀환선(歸還船)으로 삼았던 것 역시 관부연락선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연구소에는 관부연락선이나 부산항 잔교(棧橋)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엽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금강환과 흥안환의 홍보엽서(1937년 제작 추정)를 골라 이달의 전시자료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 홍보엽서에는 선박의 단면도를 통해 이 배의 세부적인 얼개가 소개되어 있는데, 기선의 연통에 그려진 표시는 관부연락선의 운영주체인 철도성(鐵道省)의 휘장 ‘에(工)’ 마크이다.
이들 배는 동일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된 쌍둥이 선박이며, 총톤수 7,104톤에 승선인원은 1,746명이고, 화물용적도 2,7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형 객화선(客貨船)의 용도로 건조된 것이었다. 이는 종래 총톤수 3,620톤에 승선인원이 945명에 불과했던 경복환, 덕수환, 창경환 등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들 배를 일컬어 ‘현해(玄海)의 여왕(女王)’이라고도 했던 것은 바로 화려한 외관과 더불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수송능력을 지닌 탓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의 이면에는 무수한 조선인들이 두려움 속에 대한해협을 건넜을 강제동원의 역사도 고스란히 배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부연락선과 현해탄은 ‘사(死)의 찬미(讚美)’로 상징되는 윤심덕(尹心悳)의 애잔한 비애가 얽힌 공간으로 기억되기에 앞서, 그 자체가 무려 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일제침탈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길목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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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무운장구’ 일장기
침략전쟁의 경로를 적어놓은 지나사변 출동경력표, 1937~1938년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일본군대의 잔학성을 얘기할 때마다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역사 사 건 하나가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촉발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해 12월에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南京)이 점령되었다.
이때 그들의 전쟁놀이감이 되어 전쟁포로뿐만이 아니라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무수한 중국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재앙수준의 참변을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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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직후 극동국제군사법정(極東國際軍事法廷)에서 조사된 내역에 따르면, 일본군에 살해당한 중국인들의 숫자가 무려 27만 7천 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이 끔찍한 만행에 책임을 물어 남경점령 당시 일본군의 최고책임자였던 중지나방면군사령관(中支那方面軍司令官) 마츠이 이와네 대장(松井石根 大將)은 나중에 B급 전범으로 체포・처형되었다.
남경대학살의 책임 규명과 관련하여 사형판결을 받은 일본군 지휘관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중일전쟁 당시 일본육군 보병 제6사단장을 지낸 타니 히사오 중장(谷壽夫 中將)이 바로 그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우리 연구소의 소장유물인 한 장의 빛바랜 일장기(日章旗)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쓰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의 소장자는 보병군조(步兵軍曹;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이다. 그리고 그의 소속은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를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 상태에서 적에게 자신들의 부대가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방식 말고도 숫자를 이용하여 조선 제23부대와 같은 방식으로 부르거나 아예 〇〇부대로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 사노 연대장(대좌) ― 마츠자카 대대장(소좌)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이 가운데 보병 제6사단의 지휘관 변동내역을 살펴보면 이나바 시로 중장(稻葉四郞 中將)이 사단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7년 12월 28일이었는데, 그 직전의 사단장이 앞에서 언급한 ‘타니 히사오 중장’이었다. 후지모토 군조가 원래의 소속부대를 ‘구 곡부대(舊 谷部隊)’라고 쓴 것은 그전까지 타니 사단장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장기(日章旗)에 쓰여진 부대명칭에서 ‘타니 히다오’가 남경대학살
현장의 지휘관이었다는 것과 후지모토 군조가 그 휘하에 있던 일본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후지모토 역시 마구잡이로 총칼을 휘두르며 학살행위에 적극 가담했던 흉악한 살인마 중 한 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남긴 무운장구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 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지나(支那)라고 하는 표현은 ‘차이나(China)’의 음가를 따온 한자어이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중국을 온전한 나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일본제국 측에서 즐겨 사용했던 명칭이라 알려진다.
어쨌건 그의 출동 경력표를 보면 1937년 8월초에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쳐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특히, 12월 14일에서 이듬해 1월 2일에 걸쳐 남경성의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타니 사단장으로부터 중대 상사(賞詞)를 수여받았다”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여기서 또 한 번 ‘타니 히사오’의 이름을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의 중대가 과연 어떤 연유로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는 바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아마도 그가 세운 전공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는 제일 먼저 남경성(南京城)과 한구(漢口)를 점령한 사실인 모양인지 일장기의 한 가운데 큼직하게 ‘일번승(一番乘, 이치방노리)’이라고 쓰고 두 곳에 각각 입성한 시각을 분 단위까지 자세히 적어 넣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제 아무리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고 한들 그것의 본질은 침략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 있다. 후지모토 군조가 소속된 보병 제6사단이 사실은 이미 우리나라와도 큰 악연으로 얽힌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가 이 땅에 주둔하던 시절, 1908년 9월부터 1910년 4월까지 순환배치형태로 파견된 부대가 바로 제6사단 병력이었다. 이때는 군대해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절이었으므로, 이 산하 곳곳에 쓰러진 무수한 영혼들은 바로 이들이 ‘폭도(暴徒)의 진압(鎭壓)’이라는 미명하에 휘두른 총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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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이번 달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부산에 있는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졸업앨범이다. 표지에는 ‘추상(追想), 2604’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숫자는 ‘황기2604년(皇紀;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을 일컫는 것으로 서기로 바꾸면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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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원래 1927년 4월에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부산여고보’로 줄임)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으나, 1938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에 따라 고등여학교로 편제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느냐 아니냐의 구분에 따라 조선인은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여자고등보통학교(5년 또는 4년)에 다녔으나, 제3차 교육령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구분 없이 일본인 학교처럼 모두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꿔달도록 했다.
따라서 이름을 고등여학교로 바꾸자니 이미 부산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부산고등여학교가 있었으므로 이를 피하다보니 ‘부산항고등여학교’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가령 서울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성제일중학교가 아닌 ‘경기중학교’로,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복중학교’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경성고등여학교가 아닌 ‘경기고등여학교’로 각각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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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첫머리에 봉안전(奉安殿)과 대마전(大麻殿, 대마봉사전)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봉안전은 교육칙어나 ‘천황’의 ‘어진영(御眞影, 사진)’을 받들어 모시도록 했던 공간이며, 대마전은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발급하는 부적인 대마를 보관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라면 대개 이런 시설물을 갖춰놓고 학생들에게 일상적인 참배를 강요하곤 했다. 사진 아래에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새긴 비석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것은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강원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에 참가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다시 두 어장을 넘기면 일본인 교장의 집무실 풍경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건전한 국민의 양성은 전적으로 사표(師表)가 되는 자의 덕화(德化)에 따른 것이니 …… 운운” 하는 ‘소화천황의 교육자에 관한 칙어’를 적은 액자와 함께 일본 도쿄 황궁 앞 이중교(二重橋, 니쥬바시) 사진이 벽면에 나란히 걸린 모습이 보인다. 특히, 천황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중교 사진 액자는 대개 각 교실마다 칠판 위쪽에 걸려 있어서 일본인 교사들이 걸핏하면 “천황 폐하께서 우리를 굽어보신다”고 하면서 학습을 독려하거나 학생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005

 

다시 몇 장을 더 넘기면 10여 명씩 짝을 이룬 졸업생들의 기념촬영사진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학생복이긴 한데 한결같이 치마가 아닌 이른바 ‘ 몸빼’ 차림인 것이 이색적이다.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활동성을 높이고 물자를 절약하는 방편으로 남자들에게는 국민복에 각반(脚絆)을 착용토록 했고, 일반여성은 물론이고 여학생들에게도 ‘몸빼’ 제복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행군연습을 나가거나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활동에 동원되는 경우에도 몸빼 차림을 한 학생들 모습이 사진첩 곳곳에 드러나 있다. 금속물공출(金屬物供出) 장면이나 용두산신사봉찬체육대회(龍頭山神社奉讚體育大會) 사진도 전시체제기를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눈 여겨볼 만하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이색적인 풍경을 하나 더 소개하면 바로 체력장검정(體力章檢定)이다. 일제는 1939년 4월 장차 강제 징병으로 국방의 제일선에 서게 될 청년남녀에 대한 체력관리를 목적으로 체력법(體力法)을 제정하고 조선 전역에 체력장 검정을 실시했는 데 체력검사 결과에 따라 등급별로 체력장(體力章)을 수여했다. 여학생들에게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하였는데, 여기에는 1천 미터 달리기, 줄넘기, 무거운 짐 들고 나르기(20킬로그램 무게를 들고 50미터를 20초에 달리면 ‘중급’으로 간주), 단봉(短棒)던지기 등의 종목이 포함되었다.

 

006

 

이 사진첩 말미에는 여느 졸업앨범과 마찬가지로 졸업생 명부와 출신지를 적은 향관록(鄕關錄)이 첨부되어 있다. 이 당시 졸업생은 4의 1조, 2조(‘반’이 아니라 ‘조’라고 부름)를 합쳐 99명이었는데, 창씨개명(創氏改名) 탓인지 조선식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학생은 거의 드물었다. 대신 졸업생 이름 끝자가 영자, 인자, 경자, 희자, 정자, 숙자, 광자, 애자처럼 자(子)로 끝나는 경우가 3분의 2나 되는 65명이나 되니 ‘자’자 돌림 여자 이름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 졸업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곧 아흔줄에 들어서는 연세가 된다. 졸업하자마자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 이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때가 하필이면 청춘기와 겹치다보니, 대부분 격동의 시대에 고통과 역경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학창시절의 푸른 꿈은 다들 얼마만큼이나 성취하였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광포한 군국주의에 짓눌린 세상에서 제대로 미래에 대한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한 권의 졸업앨범이지만 시대 변천과 라이프 히스토리가 무궁무진하게 담긴 생생한 역사자료로 평가된다. 우리 연구소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 70년대까지 졸업앨범이 적지 않게 수집되어 있다. 혹여 책장 귀퉁이나 집안 다락에 의미없이 꽂혀 있는 옛 졸업기념 사진첩이 있다면 개인의 소중한 추억거리이고 기념물이긴 하지만, 이를 기증해 훌륭한 역사연구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면 더욱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이런 자료를 취합하는 과정이 축적되면 될수록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일상을 구체화하고 이를 재현하는 일이 한결 더 풍성하고 용이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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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002

 

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녹천정에서
三載星霜夢裡經 삼년 세월을 꿈속에 지냈네.
心緖人間隨境變 마음이란 곳에 따라 변하는 것이
別時閑看岫雲靑 때로는 한가롭게 구름도 쳐다보네.
(己酉 七月 十有四日 將辭京城 援筆自題 春畝山人 ; 기유년 7월 14일에 장차 경성을 떠나려 하매 붓을 잡고 스스로 짓다. 춘묘산인)

 

녹천정(綠泉亭)은 본래 철종대에 건립된 정자로 주초만 남아 있었으나, 근처에 통감관저가 들어서면서 이토가 신축하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위의 자작시는 커다란 편액으로 꾸며져 총독관저에 걸려 있었으며, 특히 데라우치 총독은 스스로 이토의 위업을 허물없이 계승하였노라고 하면서 그 유래를 적은 글을 남긴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토의 칠언절구는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한시가 되었고,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신 다츠마(進辰馬)라는 일본인의 헌납으로 경성신사(京城神社)의 구내에 시비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그는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와 가메야(龜屋)라는 제법 유명한 수입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큰 재력을 쌓은 거류민 유지의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토 칠언절구 탁본자료는 바로 이 경성신사에 세워놓았던 시비에서 떠낸 것이다. 이 녹천정의 자작시를 보면 이토가 겉으로는 한가한 나날이 이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꿈처럼 보낸 3년 세월이란 것은 곧 한국병합으로 귀결되는 국권침탈의 치밀한 행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토는 불과 석 달 후에 안중근 의사의 손으로 처단되어 운명을 달리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죄상과 업보는 여전히 무겁고 또 준엄하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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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희귀자료를 중심으로 해설을 실어 회원들이 근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도록 하고 더불어 시민역사관 건립과 자료기증의 필요성을 널리 알려나가는 데 있다.

– 엮은이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교두보

첫번째로 소개하는 자료는 <사단대항연습기념사진첩>(1930)에 들어있는 ‘경성 및 용산 전경’이라는 제목의 항공사진이다. 최근 연구소로 용산에 관련된 자료 문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반환에 따른 공원화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이 지역의 공간 변천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자료는 2013년 서울시에서 개최한 ‘용산공원’ 사진전에 출품되었고, 이어 올해 전쟁기념관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등 여러 기관에서 대여요청이 이어질 만큼 주목을 받고있는 자료의 하나이다.

001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처음으로 전병력을 총동원하여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을 말한다.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이 사단대항연습에는 제19사단과 제20사단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전차대와 전신대 등을 더하여 3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였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여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사단대항기념사진첩>은 이때의 군사훈련상황을 생생히 남겨두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수록된 용산일대 전경사진에는 주요 군사시설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피하여 지휘부가 포진한 구역은 의도적으로 촬영각도에서 제외한 흔적이 보인다. 실제로 용산총독관저, 조선군사령부, 조선군사령관관저, 사단사령부 등은 사진앵글 밖에 살짝 벗어나 있거나 테두리에 반쯤 걸쳐 있는 듯이 담겨져 있다.
아무튼 이 항공사진은 지도상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던 일본군영지 일대의 공간배치와 지형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사진의 위쪽으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자리한 경복궁 일대를 포함하여 서울 도성 안쪽의 중심가가 한꺼번에 포착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애오개 너머 경성감옥(마포형무소)이 있는 곳까지 두루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려보면, 사진의 왼쪽 중간에 효창원과 선린상업학교가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남산 자락의 조선신궁과 그 남쪽으로 이어진 후암동 일대에 조선은행 사택지와 용산중학교 주변의 지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사진의 한 가운데에는 경성역 구역이 보이며 아래쪽으로 용산역까지 철길이 이어진 모습이 나타나 있다.
철길의 서편으로는 1920년 무렵 수색역 방향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철도 직통선로 개설공사 때 물길이 완전히 바뀐 만초천(蔓草川)이 이미 직선화한 상태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철길의 동편에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이 용산 일대의 신병영지로 연결하기 위해 개설한 신작로인 한강로가 죽 이어진 것이 보이는데, 그 중간쯤에 길이 크게 꺾어지는 지점에 형성된 세모꼴 자투리 공간이 곧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이다.
그런데 세밀히 살펴보면 이 항공자료에 나타난 도로구조와 공간배치는, 고층건물과 같은 구조물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백년을 훨씬 넘는 과거 시점에 일본군대가 그들의 편의대로 군영지로 조성하고 이에 곁들여 공간구획을 해놓은 틀 위에 지금의 용산시가지가 터를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잊고 지내지만 식민지배의 상흔은 주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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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 (1)
대일본제국과 천황에 대한 충성 확인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근대 일본의 훈장(勳章)·포장(襃章)·기장(記章) 등 각종 서훈(敍勳)과 영전(榮典) 제도는 1871년부터 시작되었다. 서훈과 영전 제도는 ‘천황대권’의 하나로 근대 일본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산물이며 근대 천황제의 근간을 이루어 온 장치이다. 또한 일제가 대외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남발한 각종 서훈과 영전은 ‘신민’의 충성심을 동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민족 지배의 통합장치로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리나 친일파들이 주로 받은 훈장은 욱일장(旭日章)과 서보장(瑞寶章) 이었다. 일제의 대외침략과 관련해서는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 관련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친일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대량으로 수여한 훈장은 이른바 ‘병합의 공로’로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이었다. 한편 만주국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의 경우 주국장(柱國章) 또는 경운장(景雲章)을 많이 받았다.
특급 친일파들의 경우 대한제국 황족이 아님에도 최고위의 훈장인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이완용), 십 수개 이상의 훈장을 줄줄이 받은 인물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고희경 : 서보장, 욱일중광장, 한국병합기념장, 대례기념장, 욱일대수장 등 15개
민병석 : 한국병합기념장, 유공장(有功章),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등 18개
이범익 : 한국병합기념장, 훈4등서보장, 대례기념장, 훈2등서보장, 만주국황제방일기념장, 만주국 국경사변 종군기장 등 14개

 

일제의 서훈과 영전 제도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잠시 폐지되었다가 천황의 이름으로 부활해 다시 시행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강점기의 다양한 종류의 훈장·기장·포장과 단체 휘장 그리고 각종 관련 증서 등을 소장하고 있다. ‘제국에 충성하라! 그려면 보답해 줄 것이다!’ 라는 충성 확인증인 훈장과 기장 등을 2회에 걸쳐 그 일부를 공개한다.

 

훈장-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 공로를 세워라!
일제의 훈장은 크게 국화장, 금치훈장, 욱일장, 보관장, 서보장, 문화훈장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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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훈장일람표. 하좌)  대훈위국화장경식과 대훈위국화대수장. 하우) 금치훈장

 

국화장(菊花章)은 일본 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서 대훈위국화장경식(大勳位菊花章頸飾, 1888년 제정)과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 1876년 제정)이 있다. 대훈위국화장경식은 황족 또는 공적이 있는 총리대신, 그리고 1945년 이전에는 군인에게도 수여되었다. 대훈위국화대수장은 경식 다음의 고위 훈장으로 황족, 총리대신 가운데 수상자가 많으나 친왕(親王)에게는 무조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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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욱일장. 2 욱일장-훈7등청색동엽장과 훈장첩. 3 욱일장-훈8등 백색동엽장과 훈장첩. 4 보관장

금치훈장(金鴙勳章, 1890년 제정, 1947년 폐지)은 전공이 있는 군인·군속에게 지급되었다. 현재는 폐지되었고 패전 전에 수상한 사람도 지금은 군대가 없으므로 장착할 수 없다.
공일급(功一給)부터 공7급으로 나뉘며 장관(將官, 장성)은 공1급부터 공3급, 좌관(佐官,영관)은 공2급부터 공4급, 위관과 견습사관, 해군소위후보생 등은 공3급부터 공5급, 준사관과 하사관은 공5급부터 공7급, 병졸은 공6급부터 공7급을 받았다.
욱일장(旭日章)에는 최고위인 훈일등 동화대수장(勳一等旭日桐花大綬章, 1888년 제정)이 있다. 그 아래 훈일등 욱일대수장, 훈2등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 훈3등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 훈4등 욱일소수장(旭日小綬章), 훈5등 쌍광욱일장(雙光旭日章),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 훈7등 청색동엽장(靑色桐葉章), 훈8등 백색동엽장(白色桐葉章)이 있다. 국가에 공적이 있는 남자에게 수여되며, 보관장과 동격이다.
보관장(寶冠章)은 공적이 있는 여자, 특히 황족 여성이나 황실 며느리 등에게 수여되었다. 욱일장과 동격으로 천연진주를 많이 사용해 만들었다. 훈1등부터 훈8등(훈1등부터 훈5등은 1888년, 훈6등부터 훈8등은 1896년 제정)까지 있다.
서보장(瑞寶章)은 1888년 제정에 제정되었다. 연공에 따라 처음에는 남자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19년부터 여자에게도 수여되었다. 훈1등부터 훈8등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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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서보장. 우) 서보장-훈8등 서보장과 훈장첩

문화훈장(1937년 제정)은 ‘문화발전에 훈적이 탁월한 자’에게 수여되었다. 서열로는 훈1 등 서보장의 다음에 위치한다. 예술분야에는 서훈된 예가 없고, 과학과 학술 부문에서 발견·발명에 대한 서훈이 있었다.

대외침략을 기념하는 종군기장들
기장(旗章)에는 종군기장(從軍旗章), 기념장(記念章), 포장(襃章), 그 외 기장 등이 있다. 종군기장은 1875년 ‘대만출병(臺灣出兵)’을 계기로 만들어진 ‘명치7년 종군기장’이 시초이다. 그 뒤 일본의 대외 전쟁이 늘어나면서 많은 종군기장이 제정되었다. 종군기장을 받은 이들은 명예로 생각하고 패용했지만, 뒤집어서보면 일본의 대외침략의 역사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셈이었다. 종군기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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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종군기장. 명치7년종군기장, 명치28년종군기장, 명치33년종군기장, 명치37~8년종군기장, 대정3년내지9년종군기장, 소화6년 내지9년종군기장(오른쪽부터)

 

명치7년 종군기장(종군패從軍牌) : 1874년 표류한 류큐(오키나와) 주민을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대만 출병 종군기장. 최초의 종군기장. 1875년 수여.
명치27,8년 종군기장 :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 종군기장. 1895년 수여.
명치33년 종군기장 : 1900년 북청사변(청국사변, 의화단사건) 당시 중국 출병 종군기장. 1902년 수여.
명치37, 8년 종군기장 : 러일전쟁 종군기장. 1906년 수여.
대정(大正)3,4년(전역戰役)종군기장 : 제1차 세계대전 종군기장. 1915년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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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치38년 종군기장(러일전쟁)과 기장첩. 2 소화6년내지9년 종군기장. 3 지나사변 종군기장과 기장첩

 

대정(大正) 3년내지9년 종군기장 : 1차 세계대전 때 산동반도의 독일조차지 및 청도(靑島) 공략과 시베리아 출병 종군기장. 1920년 수여.
전첩기장(戰捷記章) : 제1차 세계대전 동맹 및 연합군 승리 기념 기장(自大正三年 至大正九年 文明擁護之大戰 日米英佛伊 其他 同盟及聯合國), 1920년 수여
소화6년내지9년 사변종군기장 : 만주사변과 제1차 상해사변 종군기장. 1934년 수여.
지나사변 종군기장 : 중일전쟁에 종군했던 자 중 중요임무에 관계된 자에게 수여. 1939년 수여
(다음 호에서 계속됩니다.)

목, 2018/07/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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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식민지 순사들
자료실 소장 식민지 경찰관련 자료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헌병경찰, 그 공포와 폭력상이 담긴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식민지 공포정치는 헌병경찰제와 함께 시작됐다. 병합 전에 이미 일제는 조선주차군헌병사령관이 경찰의 총수인 경무총감을, 지방 각 도의 헌병대장이 각 도의 경무부장과 경찰서장을 겸하도록 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정식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악명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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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37X25. 2, 1910. 8. 29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통감부 시기에는 헌병대장, 총독부 시기에는 초대조선군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아카시는 1907년 10월 조선에서 헌병대장으로 이토 통감을 도와 전국에 끓어오르는 항일의병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 의병 1만 7779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 학살을 아카시 등은 조선 병합의 ‘공로’로서 당당하게 포장해 1910년 8월 29일자로 기념화보집을 발행했다. 이름하여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이다.

식민지 일상의 감시와 탄압을 보여주는 자료들

식민지 병탄 후 일제는 불과 1년 동안 헌병과 경찰 인원을 2배 이상 증원해 총 1만 4천여명에 이르렀다. 헌병경찰의 권한은 ‘급속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할 수 있는 사법권에까지 미쳤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을 할 경우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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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 초대 경무국장 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 2 경성헌병대본부와 경기도 경무부원. 3 경무총감부 모습. 4 변복한 일본인·조선인 순사가 강화도에서 활약한 항일의병장 이용권을 체포한 뒤 기념으로 찍은 사진. 5 황해도 경찰부가 조직한 이른바 ‘폭도토벌대’(이상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에서 뽑음)

 

1920년대 이른바 보통경찰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식민지 조선의 경찰은 본래의 임무인 치안유지 이외에 검사권, 민사 조정권, 행정사무에 대한 원조, 즉결처분권, 제한된 입법권 등을 가졌다. 권력의 자의적 행사가 제도적으로 가능한 식민지 국가권력의 한 특징인 ‘경찰국가’가 조선총독부였다.

026

범죄즉결례, 16.7X24, 1910(왼쪽) 1910년 12월 제령(制令) 10호. 구류, 태형 또는 과료(科料)에 해당하는 죄,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하는 도박범과 상해죄, 행정법규 위반자들을 재판에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주차헌병대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직원록>, 15X21, 1916년 10월 1일 헌병과 경찰의 직원 명단이 통합되어서 나오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발행한 경찰직원록은 국내에 5, 6년도분 정도만 남아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광화문 근처에 있던 경찰관강습소는 강습과와 교습과 2과를 두고 소장·교수·조교수·서기 등의 직원을 두었다. 강습과는 현직 경찰관을, 교습과는 신규채용한 일본인 순사를 대상으로 경찰에 관한 학술과 운용, 실무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027

<조선총독부경찰관강습소 교습과 제78기생 졸업기념>, 23.4X 16.3, 1940.5. 1 조선경찰관강습소 입소장면. 2 조선총독부 경찰관강습소 경비근무 교대와 교련수업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유독 식민지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총독부 경찰들은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민중들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에비! 순사 온다!” 본래 울거나 떼를 쓰는 아이들을 달래던 말은 “호랑이 온다”였다. 좀 형편이 나은 집은 “곶감 줄게, 우지 마라”였다. 우는 아이도 달래던 호랑이와 곶감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어느덧 “순사 온다”라는 말로 바뀌었다. 식민지에서 피억압 민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역설적으로 일제 경찰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028

조선총독부 도순사 김재천에게 군산경찰서 근무를 명령하는 통지서(1923년 7월 31일, 왼쪽) 과거 통감부 순사·순사보 직의 경우 총독부 순사·순사보로 임명하였다. 또 헌병보조원 직에 있는 자는 순사보로 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경찰신문 朝鮮警察新聞> 제19호, 18×26.6, 1940.3.1 조선경찰신문사에서 매월 2회(2일, 15일) 발행. 1939년부터 발간하였으며 주로 경찰의 역할과 당면문제, 전시생활과 인사발령 등에 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029

상) <경비의 모습 警備の姿>, 황해도 경찰부, 27.3X18.5, 1937.8 [황해 경우] 제100호 발행을 기념해 발행한 사진첩. 식민지 경찰들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생검사, 방역, 지문 채취, 불심검문 장면

하) <종로경찰서 사진첩>, 25.8X18.9, 1926 이른바 조선 치안의 제일선을 담당하였던 종로경찰서 간부들의 모습. 고등계 주임으로 ‘염라대왕’이라 불리었던 미와 경부(오른쪽 아래)는 훈장을 요란스레 매단 채 사진을 찍었다.

 

되살아 난 친일파
해방이 되자 친일경찰들은 처벌 대신 이승만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이들은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요인들을 살해하려고 했으며, 반민특위 와해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독재자의 충견이 되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의 몽둥이가 되어서 활개를 쳤다. 공안통치가 판치던 수십 년간 경찰은 일제강점기 때와 마찬가지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공안 탄압의 주역으로서 오명을 이어갔다. 반민특위 와해와 이들의 부활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료를 두 점 공개한다.

030

반민특위 특별재판정에 끌려가는 친일 거두(왼쪽) 차례로 친일 경찰 노덕술, 경성방직 대표 김연수,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이다(주간서울, 1949.4.4., 제33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진상> 1957년 12월호)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김상돈의 반민특위 피습 사건 증언록

 

친일 경찰 김판산과 윤기병 자료
김판산은 1933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순사로 임명되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53년 12월 그는 6·25전쟁 국난극복의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을 수여한 사람은 윤기병이었다. 윤기병은 친일 경찰로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으로서 반민특위본부 습격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031

김판산의 경기도 순사 임명통지서(1933.8.5)(왼쪽) 서울시 경찰국장 윤기병이 김판산 서울시 경무과 경감에게‘전시 하에 복잡다단한 난관과 애로를 극복타개한 공로’로 표창한다는 내용(1953년 12월 21일자)

목, 2018/07/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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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居(임거)

 

一犬雙猫子(일견쌍묘자)

三松作友人(삼송작우인)

酒樽吾愛妾(주준오애첩)

半遂自安身(반수자안신)

 

숲에서 살며

 

한 마리의 개와 두 고양이가 자식

또한 세 그루의 솔은 벗이 되었네

술 담은 통은 내 사랑하는 妾이니

스스로 몸을 편히 함 반쯤 이뤘네.

 

<時調로 改譯>

 

一犬雙猫가 자식, 三松은 벗이 되었네

술을 담은 통일랑 내 사랑하는 妾이니

스스로 몸을 편히 함 반쯤은 이루었네.

 

*友人: *酒樽: 술을 담는 통 *愛妾: 사랑하는 첩(妾) *安身: 몸을 편안히 함.

 

<2018.7.13, 이우식 지음>

금, 2018/07/1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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叱假僧語戱

 

無悲無喜境(무비무희경)

死後始完成(사후시완성)

未免當然事(미면당연사)

欺人罪不輕(기인죄불경)

 

땡추중의 말장난을 꾸짖다

 

슬픔도 없으며 기쁨도 없는 경지

死後에야 비로서 다 이뤄지는 바

아직 면치 못함 마땅한 일이거늘

사람을 속이니 죄가 가볍지 않다.

 

<時調로 改譯>

 

無悲無喜의 경지 死後에 이뤄지는 바

아직 면하지 못함이 마땅한 일이거늘

사람을 속이는 죄가 가볍지 아니하다.

 

*假僧: 가짜 승려. 땡추. 땡추중 *語戱: 말을 재미 삼아 하는 일 *未免: 아직 면치

못함 *當然: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함 *不輕: 가볍지 아니함.

 

<2018.7.13, 이우식 지음>

금, 2018/07/13-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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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名敎授誤譯宿雲以異義

 

宿雲何者譯(숙운하자역)

笑柄昔儒詩(소병석유시)

勸汝方投筆(권여방투필)

衆人起大疑(중인기대의)

 

이름난 교수가 ‘머무는 구름’을 다른 뜻으로 誤譯함을 비웃다

 

宿雲에 대해 그 누가 번역했는가

옛적 선비의 詩가 웃음거리 됐소

그대에게 권하니 지금 붓 던지게

많은 사람이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누가 번역했는가 옛 詩 웃음거리 됐소

그대에게 내 권하니 지금 붓 내던지게

저으기 많은 사람이 큰 의심 일으키오.

 

*誤譯: 잘못 번역함. 또는  잘못된 번역 *異義: 다른 뜻. 또는 다른 의미 *何者:

어떠한  사람.  또는 어떠한   *笑柄: 소자(笑資).  웃음거리  *投筆: 붓을 내던짐

*衆人: 뭇사람  *大疑: 크게  의심(疑心)함.  또는  큰 의심(疑心)이나 의혹(疑惑).

 

<2018.7.13, 이우식 지음>

금, 2018/07/13-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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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자 운영위원회에 <현안 관련 문답>이 배포되었습니다.
문답을 보면서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한 발짝만 들어가서 보면 이런 궤변도 없습니다.

오늘은 첫 문답인 두개의 정관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밝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연구소의 답변이라고 믿기 어려워 약간의 감정이 실렸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반론은 언제든지 환영하고, 운영위원회 그리고 사무국 그 누구라도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문: 정관이 두 가지라는 주장은 무엇입니까?
답:…….표준정관에 지부장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기능을 반영할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정관(신고용)외에 별도의 ‘운영정관’을 만들었다….
두 가지 정관을 모두 준수하고 있으나 혹 양자가 충돌할 경우 등기된 정관의 효력이 우선한다….
.
—–
대한민국 민법과 공익법인법에 따라 설립된 단체의 공식 답변이라고 도저히 믿기 어렵다.
더욱이 1만3천여 회원이 가입한 단체이고 매월 1억원이 넘는 회비가 납부되는 단체에서 이런말을 하다니….
.
단체 운영의 근본 규범인 정관에 대해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에게 단체 운영을 맡길 수 있을까?
근본 규범인 정관에 대해 이런 인식을 하고 있는 정도라면 다른 문제는 보나마나 뻔하다.
.
정관에 운영위원회를 반영하면 안된다는 규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표준 정관은 말 그대로 표준 정관이고 단체의 특성에 따라 기구를 둘 수 있다.
다만, 법에서 정한 총회와 이사회의 기능을 해하지 않으면 된다.
.
두 가지 정관을 준수????
이 말은 ‘대한민국 헌법이 두 개이고, 대통령과 장관, 공무원은 두 헌법을 준수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이런 말을 공식문건에 쓸 수 있는지 그 용기가 가상하다.
.
두 정관이 충돌하면 등기된 정관이 우선한다???
‘두 정관이 충돌’은 애초부터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강릉과 부산을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둔갑술을 부리지 않은 한 강릉을 가던, 부산을 가던 한 군데만 갈 수 있다.
.
‘등기된 정관이 우선’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왜?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
.
‘운영위원회 기능을 반영할 조항이 없다….’?????
정말??? 다른 사단법인을 보자.

<사단법인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대표 임순례)는 올해 총회에서 <사단법인 동물권행동 카라>로 명칭을 변경했다.

정관 제6장이 운영위원회이다.
제29조 구성
제30조 소집
제33조 의결정족수
제34조 의결사항……
.
언제까지 회원을 속이려는지 그 끝이 안보인다.

 

금, 2018/07/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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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3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2)
침략과 식민지배의 이력서인 각종 기념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기념장(記念章)
국가적 행사 참가자나 관계자를 대상으로 상훈국이 발행하며, 중요한 것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1) 제국헌법발포기념장(帝國憲法發布記念章) : 1889년 8월 3일자 칙령에 의해 일본제국헌법 발
포식에 관련된 친왕(親王) 이하 주임관(奏任官) 이상에게 수여했다.
2) 대혼25년축전지장(大婚25年祝典之章) : 1894년 3월 6일자 칙령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메이
지(明治) 천황과 쇼켄(昭憲) 황태후의 대혼 25년 축전에 초대되어 입궐한 자에게 수여했다.
3) 황태자도한기념장(皇太子渡韓記念章) : 1907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요시히토(嘉仁:
뒷날의 다이쇼大正) 황태자 대한제국 방문 기념. 1909년 3월 29일자 칙령에 의해 이와 관련된
한일 양국의 황족 및 주임관 이상에게 수여했다.
4)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 1912년 3월 29일 칙령에 의해 8월 1일 한국을 병탄한 후
1912년 8월 1일 한국 병합 사업에 직접 및 수반한 중요 업무에 관여한 자(제3조 1호), 병합 당
시 조선에서 근무하던 관리 및 관리 대우자 및 한국 정부의 관리 및 관리 대우자(2호), 종전
한일 관계에 공적이 있는 자(3호)에게 수여했다.
5) 대정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 : 대정4년(1915)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6)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 : 소화3년(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7) 제1회국세조사기념장(第一回國勢調査記念章) : 1920년 일제가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 등
지에 최초로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계자들에게 수여했다.
8) 제도부흥기념장(帝都復興記念章) :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난 후 진
재 복구를 위해 제도부흥심의회, 부흥원 등을 설치해 진재복구를 하면서 1930년 8월 13일자
칙령에 따라 관계자에게 기념장을 수여했다.

9) 대정14년 조선국세조사기념장 : 192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게자들에게 수여했다.
10) 소화5년 조선국세조사기념장 :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계자들에게 수여했다.
11) 기원2600년축전기념장(紀元2600年祝典記念章) : 일본의 전설상의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한 해(기원전 660년)로부터 2600년이 된다는 1940년에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수여한 기념장

047

1 을사오적 중 하나인 권중현에게 수여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과 증서 51X40.5 1912.8.1

048

2 한국병합기념메달 메이지43년(明治43年, 1910년) 8월 29일 : 앞면과 뒷면
3 권중현에게 수여된 대정(大正) 대례기념장증서 41.5X32.5 1915.11,10
4 소화대례기념장

 

금, 2018/07/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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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

물망국치(勿忘國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인정받은 일제는 이후 무력을 앞세워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등을 체결하며 단계적으로 식민지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이미 러시아와 영국, 미국 등 서구열강으로부터 조선 병합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받고 있던 일제는 1909년 7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對韓施設大綱)’을 결정해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맞춰 친일단체 일진회는 이른바 ‘합방촉진성명’을 발표하면서 여론을 조작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의 구실을 마련해주고자 했다. 일제 또한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의병항쟁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저항의 불씨마저 없애고자 했다.
1910년 6월 일제는 내각회의를 통해 ‘병합 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병합을 위한 막바지 준비를 끝냈다.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국민에게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제는 강제병합을 전후해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다양한 기념엽서와 홍보자료들을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대개 그 내용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병합 요청에 따라 일본 ‘천황’이 조선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이를 허락했으며, 이 조치에 대해 조선인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는 황당한 내용들이었다.
곳곳에서 해방 70년이라고 경축하지만, 박근령과 같은 역사의 정신질환자마저 퍼져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8월 15일 광복절보다 8월 29일 국치일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뼈저린 반성과 친일 잔재 척결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며, 물망국치(勿忘國恥)!

037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칙유(勅諭)> 61 x 42.6 1910.8.29 황제로서 부덕함을 토로하고 백성을 곤궁함에서 구하기 위해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이다.

 

038

<데라우치 마사다케 통감의 유고(諭告)> 42.6X228.3. 1910.8.29 3대 통감 데라우치가 순종의 칙유에 맞추어 자신이 이제 ‘천황’의 대명(大命)을 받들어 “전(前) 한국 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통치권의 양여를 수락”하며, 한국 병탄에 공이 있는 친일파들에게 훈포상과 등용을 약속하는 한편 통치를 어지럽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징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039

<‘일한병합’기념엽서>14.1 X 9.1 역대 통감과 통감부 청사가 오얏꽃과 일본 벚꽃의 줄기가 얽힌 채색도안을 배경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다.(왼쪽)
 <‘일한병합’기념엽서>14.1 X 9.1 순종황제와 메이지천황.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040

<일한병합기념엽서> 14.1 X 9.1 대한제국 황태자(영친왕)와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후의 다이쇼大正천황) 사진 아래 이른바 일한병합조약 정문(正文)을 실었다.(왼쪽)
<한일합방조서> 14.1 X 9.1 일본 메이지천황의 명의로 발표된 「한일합방조서」

 

041

 

042

<매일전보(每日電報)-‘일한병합조약’정문> 40.5 X 18.5, 1910.8.29. 마이니치신문이 발행한 한국 ‘병합’ 관련 호외 제1호.

 

043

<한국병합기념장과 증서> 14.1 X 9.1 을사오적 중 하나인 권중현이 받은 병합기념장과 증서.

 

044

<‘일한합방’ 축하 제등행렬 엽서> 14.1 X 9.1, 1910.8 이른바 ‘일한병합’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 등불 행진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

 

046

<한국병합기념화보(韓國倂合記念畵報)> 78 X 53, 1910. 오사카매일신보사가 한국‘병합’을 기념해 제작한 특별화보. 한일 양국의 황제와 주요 인물들의 사진, 한일관계사 연표, 한반도 각 지역의 지하자원 등을 설명하고 있다.

 

045

<일출신문조선쌍육(日出新聞朝鮮雙六)> 78 X 53, 1911.1.1
일본 교토의 히노데신문(日出新聞)이 1911년 1월 1일 신년 특별 부록으로 발행한 주사위 놀이판. 신라의 ‘조공’, 조선통신사의 ‘내조(來朝)’,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침략 선봉이 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부산 상륙과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호랑이 사냥,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소재) 등이 상단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에 나오고, 가운데에는 이른바 ‘삼한 정벌’을 했다는 일본의 고대 진구황후(神功皇后),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수양딸인 배정자, 그리고 맨 위에 ‘병합조칙’을 읽고 있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이 등장하고 있다. 한반도는 과거 일본의 영향력 또는 조공 지역으로서 대한제국 ‘병합’은 잃었던 옛 땅을 되찾은 것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주사위 놀이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주입하는 내용이다.

금, 2018/07/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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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초 보냈고 우체국으로부터 연구소에서 수령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지난 511일 열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회의 제명 결정 통보를 523일에 받았으니 한달 남짓 지났네요. 

이사회 중 어떤 분이 네 눈에 들보말씀도 하셨고, 무엇보다도 최종 결정을 내리신 분에 대한 예우를 다하려 셀프숙려기간을 가졌습니다. 

주인인 회원의 대표기구인 운영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을 박탈수준으로 추락시킴으로써 민문연 주인은 회원이 아님을 만방에 고하고, 지부/회원/지부장을 감시 하에 놓는 겁 없는 규정 신설 등, “유신정관으로의 개정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반대의견과 개인성명을 냈다는 이유로 회원을 제명처분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제 셀프숙려 기간도 끝났고, 제명처분은 어떤 관점으로도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선 이사회 구성부터 불법/위법이 있었고,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민우 운영위원장은 정관에도 명시돼있는 당연직 이사로서의 대접도 못 받고도 주장할 생각도 않고 있고, 이사회에 참석 요청을 받지 못해도 아무런 말도 없고. .게다가 부적격한 자가 이사로 참여해서 내린 결의는 당연히 무효이지요. 감독관청인 서울시 교육청에도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만, 혹시라도 이사회에서 저에 대한 제명 결정을 유지한다면 제2, 3의 방안이 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제명결정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제명을 안 당했다면 중간에 주저앉을 뻔 했습니다. 그만큼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라고 제명을 해주셨으니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바로세우기>를 위해. 

2018. 7. 13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 9)

 

 

금, 2018/07/1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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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筆(고필)

 

後人逢古筆(후인봉고필)

不解醉書香(불해취서향)

每句含神韻(매구함신운)

慇懃發瑞光(은근발서광)

 

옛사람의 필적

 

훗사람이 옛사람의 필적 만나니

알지 못하여도 書香에 취하겠네

每句節 신비한 韻致 머금었으며

은근히 상서로운 빛 발하는구나.

 

<時調로 改譯>

 

옛 필적 만나게 되니 그 書香에 취하네

구절마다 신비로운 韻致를 머금었으며

은근히 상서스러운 광채도 발하는구나.

 

*古筆: 오래된 붓. 옛사람의 필적 *後人: 훗사람 *不解: 알지 못함. 이해하지 못함

*書香:  학자풍(學者風).  선비  집안  *神韻:  고상(高尙)하고  신비스러운  운치(韻致)

*慇懃:  정취가  깊고  그윽함  *瑞光:  상서(祥瑞)로운 빛. 상광(祥光). 서색(瑞色).

 

<2018.7.14, 이우식 지음>

토, 2018/07/1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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