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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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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17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고 방 속에 들어앉았던 친구들이 가만히 세상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도 한몫 보아야 한다. 이렇다면 진작 나올 것을 괜히 주춤거리고 있었다. 늦게 나온 것만 후회가 되고 가슴이 아프다고 여보라는 듯 큰 거리로 정당(政黨)으로 온갖 참예(참여)를 다해가며 소리치고 다니는 것이다.
해방되었다는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우습다면 우리가 애국자라고 큰소리치고 다니어도 어느 하나 다시 볼 사람이 없다고 점점 기가 높아가고 있으니 과연 이 풍진 세상이 또다시 이 땅에 찾아왔다. 일찍이 “이 풍진 세상이 왔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그 당시 사회풍조에 들떠 노래 부르던 시절 젊은 청년은 분에 넘치는 개화 바람에 금이빨을 해박고 삼팔바지 혹은 와이사쓰로 술집에 드나들며 전답은 다 올려버리더니 오늘날 코앞에 닥친 이 풍진 세상은 8·15 전 일본으로 수백만 석을 보내고도 쌀밥을 먹었는데, 해방되었다는 이곳에서 쌀 대신 강냉이와 밀가루로 배를 채우고 싫다고 해도 자양분이 있다고 갖다 안기는 ‘알사탕’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빨이 삭아가고 그런가 하면 조선사람은 쌀만 왜 먹느냐 자양분 있는 채소와 과실을 이제부터 먹으라는 간곡한 훈시에 가슴만 답답하고 징병을 나가라! 징용을 나가라! 학병을 나가라! 창씨와 국어를 상용하라! 황도문화(皇道文化)를 하라고 나팔을 불고 다니던 자들이 오늘날 와선 그 당시에는 사세(事勢) 부득으로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 한 행동이나 해방 후 자기비판 하였으니 아무 거리낌 없는 애국자로서 일할 수 있다고 온갖 책동을 다해가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토치카’(비위 좋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족의 메마른 등을 처먹기에 정신없는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강장제를 복용하는 ‘토치카’ 즉 정신의 중성환자(中性患者)들이란 새로운 이완용(李完用)의 후예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의 이 풍진 세상은 참으로 서글프고 얼떨떨하여라! 양조금지령(釀造禁止令)에 정체 모를 밀주와 조선판 브랜디와 위스키만 늘어 눈동자의 개가 풀리도록 독한 술에 노상에서 선량한 친구들이 코를 골고 형무소는 터질 지경으로 초만원이요 일찍이 왜놈 뺨 한 번 못 때리던 주제에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테러가 판을 치고 온갖 소득은 모조리 모리배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 숫자를 알지 못하여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딱한 백성들에게만 세금이 나날이 올라 목을 누르고 고등수학을 가지고도 계산 못할 만큼 하늘을 찌르는 물가고에 세간짐을 붙들고 갈팡질팡하는 오늘날 세상은 과연 이 풍진 세상이로다. 이 먼지와 바람 속에서 단연 용감하게도 새로운 활동으로써 그 진가를 날로 발휘하고 있는 위대한 ‘토치카’ 여러분을 독자에게 제1차로 소개하는 바이다.


1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을 말한다.
2 박흥식이 중추원참의를 지낸 적이 없다. 필자의 착오.

 

P씨1와 2천만 원

황민화를 위하여 비행기 제작을 위하여 총독정치에 사재(私財)를 바쳐가며 찬연한 충성을 다한 중추원참의2,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P씨는 지난 12월 4일 종로세무소에서 일찍이 일본이 패전한 직후 사장으로 있던 비행기회사가 해산케 됨에 당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上月良夫) 중장으로부터 미안하다고 위로금 겸 갱생자금으로 2천만 원을 받은데 대하여 제3종 소득세로 1천만 원을 P씨에게 과세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P씨는 고쓰키 중장한테 받은 2천만 원은 위로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받은 돈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세무당국에 이의를 신립(신청)하였다. 작년 2월 사기횡령 등 여러 가지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정에서 심리를 받을 때 그는 2천만 원은 해산되는 비행기회사 종업원의 노자(勞資) 문제 해결기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말은 공판기록과 판결문에도 역력히 올라 있으며 그날 방청객은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P씨는 무슨 심정으로 위로금으로 2천만 원을 받았다는 이 엄연한 자기진술의 사실을 모른 체 덮어두고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것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딴소리를 하는가! 아무리 조선이 가난하기로서니 총칼로 조선민족을 위협하여 피를 흘리게 한 군사령관 고쓰키가 주는 나미다낑(淚金. 위로금)을 받을 수는 없다. 이 돈을 받을 권한과 의무가 있는 자는 오로지 군부의 주구노릇을 하던 비행기회사 사장인 P씨 한 사람뿐이다.
조선땅을 쫓기어 나가는 군사령관 고쓰키가 제 놈이 감히 무엇이기에 2천만 원을 던져가며 사회사업에 쓰라고 자선을 아니꼽게 베푸는 것인가! (P씨의 말대로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었다고 가정하면) 그렇다면 학병, 강제동원을 위하여 남전(南電) 사장 오구라(小倉)3라는 자와 함께 막대한 운동비용을 전부 독담하겠다고 총독 고이소(小磯國昭) 앞에 나서던 열정적인 애국자 박흥식이 오늘날 건국기에 있는 조선을 위하여 세금 1천만 원을 낸다는 것은 물론 당치도 않은 일이요, 추호도 생각이 없기에 엉터리없는 소리를 꺼내 세금을 못 물겠다고 정면으로 대담하게 나서는 것이다.
고쓰키에서 받은 ‘위로금’으로 세금 1천만 원에 발악하는 P씨가 무슨 사회사업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한다면 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치욕이며 모독인가! 요즘 독립과 정부수립은 아득한 것 같고 친일파와 반역자들이 여보라는 듯 큰소리치고 다니게끔 세상이 어지럽자 이것을 기화로 옛날과 다름없이 자동차에 몸을 얹고 거리로 요정으로 서슬이 푸르게 돌아다니는 P씨여! 어느 지각없고 순진한 양반이 그대를 가리켜 조선에 필요하고 또 유력한 실업가라고 두둔해주는데 미련도 있겠지만 1천만 원 세금도 성가시다고 하니 절친한 황국(皇國)의 친구들이 그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으로 가서 황국의 사회사업을 위하여 마음껏 돈을 씀이 어떠한가!
2천만 원은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군사령관 고쓰키가 준 것이라고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이에 대한 1천만 원 과세가 나오자 위로금이 아니고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돈이니 소득세는 물 수 없다고 항의하는 한편, 모 단체에 50만 원을 기부하였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과연 P씨는 8·15의 서글픈 해방에서 우러난 강장제를 복용하는 위대한 심장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의 광신자들

귀족원의원 □□□4은 대궐 같은 그의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가 있고, □□□5는 어느 시골로 중학교 교원으로 갔다는 말이 들리더니 사랑을 바치던 (日帝) 정든 님이 자기 홀로 떠나버린데서 받은 번민에서인지 불경을 외고 있다 한다. 그러나 요즘 그는 황국 일본에 대한 자기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때때로 왜말로 떠들고 있다 하니 참으로 일본을 위하여 기특한 일이다. 초라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간혹 거리에 나타나는 총독부 기관지 사장 나리 가네가와 씨6 그리고 경향 각지에 뿌리를 박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악질관리들과 친일파 반역자의 거물과 잔재들이 8·15 직후엔 처분만 바라고 떨더니 이제는 다시 정면에 나서서 모든 모리(謀利) 기관을 독점하고 온갖 보복행위와 책동을 일삼아 민주독립을 좀먹고 있다.


3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를 말한다.
4 漢象龍이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韓相龍이다.
5 伊狂□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춘원 李光洙를 말한다.

 

<조선인의 나아갈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이라는 책을 만들어 황도정신을 선전하던 현영섭(玄永燮)은 그의 조국인 일본으로 떠나갔고, 황도문화를 위하여 조선말을 없애기에 왜놈보다도 한층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치던 자들 가운데 녹기연맹(綠旗聯盟) 쓰다(津田剛)의 참모장이고 <어동정(御東征)> 이라는시집을내어총독상을받은김용제(金龍濟)는쓰다를따라일본으로간 줄 알았더니 말에 의하면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시다催再書7는부산에 있는 남조선대학에 총장으로 들어앉았다 하며 세상이야 어찌 되던 철두철미 돈 모으기에 바쁜 만주국 명예총영사 □□□8는 돈 버는 여가에 추탕집에 그 얼굴을 나타내고, 학병과 노무자 동원에 총독 고이소가 경탄할 만큼 제1선에서 활약하여 위대한 공로를 세운 애국자 □□□9는 8·15 이후 재빨리 새로운 애국자로 등장하여 내가 무슨 이유로 입법의원 입후보로 당선운동에 나서는 등 아직도 그 거구와 더불어 자못 건강하다. 대동아문학이니 국민문학이니 하고 동경, 남경으로 갈팡질팡하던 키다리 K씨10는 명동거리에서 맹활약하여 있고,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정신을 떠들다가 그곳 우리 동포에게 쫓겨나온 우에다 다쓰오(上田龍男)(李英根)11. 조선말이라면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던 황도정신에 환장이 된 정신병자가 대화숙(大和塾) 참모로 있을 무렵 “나는 우리 늙은 부모 앞에서도 조선말을 쓰지 않는다”고 나가사키(長崎祐三) 검사에게 말하다가 기다렸던 칭찬 대신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 앞에서 조선말 대신 일본말로 떠들어 불효하는 것이 일본정신인가!” 꾸지람을 듣고 쫓겨난 우에다 다쓰오! 지금쯤은 이세신궁(伊勢神宮) 앞에서 미소기(禊)를 하는가 하였더니 이 어인 놀라운 출세인고! 그의 고향인 예산에서 통역관으로 서슬이 푸르게 온갖 재미를 다 보고 있다 하니 해방의 혜택은 ‘우에다 다쓰오’에게까지도 이래저래 신세를 고치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총독부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조선인이 조선말에 애착을 갖게 되고 도리어 엉뚱한 민족정신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오늘 당장 없애버리자”고 모리(森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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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일신보 사장 李聖根으로 그의 창씨명이 가네가와(金川聖)이다.
7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낸 崔載瑞다. 그의 창씨명이 이시다(石田耕造)이다.
8 任顯秀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성방직 사장 金秊洙다.
9 먹칠이 되어 있어 판독할 수 없다.
10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지낸 팔봉 金基鎭으로 추정된다.
11 녹기연맹 간부를 지낸 李泳根이다.

 

도서과장에게 덤벼들던 당시 이전(梨專) 교수 □□□12. 징병 징용 등 시국을 인식시키자면 신문을 계속 시켜야 한다고 또한 떠들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 □□□13과 부여신궁을 짓는데 땀을 흘려야겠다고 혹은 지원병에 관한 영화와 연극을 한다고 광신자처럼 날뛰던 일부 문인들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과 연출가들!
이 모든 광신자들이란 만약 일본이 그대로 나간다면 아주 일본사람으로 동화되어 조선놈 천대하기를 일본놈 이상으로 할 것이고, 유카타(浴衣)에 게다짝을 끌고 능히 다닐 만한 ‘토치카’지. 조금도 자기반성이 있어 중간에라도 태도를 고치는 일은 꿈엔들 상상 못할 일이다. 이렇게까지 세도에 아첨하여 동족을 파는 딱한 불치(不治)의 광신자들이 자기반성이니 자기비판이니 함부로 유행가 부르듯 하여 가장 조선을 사랑하는 체 큰소리를 하는 오늘날 세상이 어찌 이 풍진 세상이 아닐 수 있는가! 8·15 전 이들 광신자와는 다른 각도로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있은 후에 이루어지는 민주독립! 일제 아래서 영화를 누리던 특권계급과 모리배를 위함이 아니요, 40년간 헐벗고 굶주려 오면서도 민족을 팔지 않은 진정한 조선민족 전체의 해방과 독립을 방해하는, 봉건의 굴레를 쓰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자들이 싹트고 있으니, 이 새로운 광신자들을 이러한 바람과 먼지 속에서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2 <祥廈>라는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녹기일본문화연구소 간사를 지낸 裵相河이다.
13 먹칠 때문에 둘 다 판독 안됨.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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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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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오는 8월 29일은 한일합병조약문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합니다.

그동안 시민들의 성금으로 개관이 추진됐는데,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개관에 앞서서 이지수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빛바랜 종이에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께오서 양 내외가 걱정없이 사시고 아들도 잘 지내며…”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외준 씨가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 옆에는 전쟁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규철 씨의 수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하나. 일본을 위해서 죽고싶지 않다…”

벽면 한쪽에는 순사 임명장, 조선총독부 관료 임명장 등 친일파들의 행적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모두 식민지 시기를 겪었던 민중과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항일운동가들의 유족들이 활동하면서 모은 자료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보내온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내가 활동을 하면서 나도 나이가 먹어가잖아요. (기록들이) 재탄생을 하게 돼서 나는 정말 30년의 활동이 허무하지 않았고…”

전시된 물건만 4백여 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7만 점 가까이 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에는 일상적인 민중의 삶도 있고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시민 5천여 명의 기증품과 기금 35억 원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MBC뉴스 이지수입니다.

<2018-08-14> MBC

☞기사원문: ‘경술국치’ 기록한다..식민지 역사박물관 개관

※관련기사

☞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시민 모금으로 ‘첫 개관’

☞ KBS: “치욕도 역사” 시민이 세운 ‘식민지 박물관’ 첫 공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이끈 이이화 건립위원장 인터뷰 이 위원장
“식민지 시대 아픈 역사 고스란히 알릴 것…청소년 위한 토론장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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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촬영 성서호]

 

(파주=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3·1 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편지나 일기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이이화(82)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자택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사학자인 이 위원장은 처음 건립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령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했지만, 오는 29일 박물관의 정식 개관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된 박물관은 특히, 여러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기증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돈을 주고 사 와도 자료를 못 구하는 마당에 국가 예산도 안 받고 어떻게 꾸릴지 걱정이 컸다”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호응을 받았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희사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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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의 칙유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전시 자료 7만 점 정도를 모았는데 국내외 통틀어 7개 정도밖에 없다는 3·1 운동 독립선언서 원본도 있다”며 “강제 징용된 일본군에서 몸에 두르던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적힌 띠는 물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의 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의 순종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을 적은 포고문)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포고문 등 국치의 아픔을 담은 사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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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나라를 팔고 귀족이 된 조선 고위층들이 1910년 11월 부부동반으로 일본을 관광하던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담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을 감시·탄압했던 경찰들의 자료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초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육군지원병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던 임용택 씨의 사진부터 1945년 징집된 뒤 관동군 자폭특수대에서 훈련받은 이규철 씨의 육필일기 등은 당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유족이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의의를 해방 후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디딤돌’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경제 발전상에만 집중했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이번에 개관할 박물관은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똑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들이 반성하도록 하고 이후 화해하자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초대 박물관장 제안을 손사래 치며 거부한 그는 앞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해방이라고 식민지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닌 만큼 자꾸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는 국민이,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알게 해야 한다”며 “기본 성격은 박물관이지만, 참신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이달 29일 문을 연다. 2007년 준비위원회 발족 이후 약 11년 만으로,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일반시민 성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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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살아있는 역사 될 것”

수, 2018/08/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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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寒露寄友人

 

霜降丹楓落(상강단풍락)

還鄕與我吟(환향여아음)

爲君新釀酒(위군신양주)

共醉臥空林(공취와공림)

 

寒露를 지나 벗님에게 띄우는 글

 

서리 오고 우수수 단풍도 지면

고향에 돌아와 나와 詩를 읊세

그대 위해 새로 술도 빚었으니

함께 취해 空林에 누워도 보세.

 

<時調로 改譯>

 

霜降에 단풍도 지면 還鄕하여 詩를 읊세

그대 벗님을 위하여 새로 술도 빚었으니

둘이서 함께 취하여 空林에 누워도 보세.

 

*友人: 벗 *霜降: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10월

23일경이다  *還鄕: 고향(故鄕)으로  돌아옴  *釀酒: 술을 빚어서 담금. 온양(醞釀)

*空林: 나뭇잎이 떨어져 공허한 숲. 또는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

 

<2018.10.12, 이우식 지음>

토, 2018/10/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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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본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묘표가 확인됐다는 소식 어제(15일) 전해드렸는데요.

오키나와 곳곳에 조선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의 유해가 발굴돼 국내로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유해 반환에 대한 논의도 답보 상탭니다.

윤봄이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본섬의 최남단.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후퇴해 주둔했던 숲입니다.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곳인데,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설수상근무대도 이 일대에 주둔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유해 발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렇게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와 발굴 작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손을 놓은 사이, 유해 발굴을 계속 하고 있는 건 자원봉사자 대여섯 명입니다.

[“(뭐가 나왔나요?) 손가락뼈. 아마도 이 부위인가? 손인지, 발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발굴된 유해는 오키나와 현에서 임시 보관하고 있는데, 대부분 DNA 확인도 못했습니다.

[구지켄 다카마츠/유해 발굴 자원봉사자 :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 중에 조선인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현장 인근엔 유골 3만 5천구가 묻혔다는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전쟁 직후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유해가 쏟아져 나와, 이를 한 번에 묻고 탑을 세운 겁니다.

[오키모토 후키코/강제 동원 조선인 연구자 : “(조선인 부대가) 이곳에서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인들의 유골도 이 혼백의 탑 아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군이 일본군 포로 7천 명을 감시했다는 수용소 자리.

이 해안가엔 지금 마을이 들어섰고 포로수용소 터를 표시하는 비만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한 단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확인한 매장자 명단.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름도 여럿 확인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산속부터 해안까지, 오키나와에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은 최소 7백여 명.

조선인 유해가 발굴돼 반환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정부 차원의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 “일본 정부와 유해 반환 교섭에서 어떤 내용을 요구했고, 이후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희가 수차례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적 사안이라 공개할 수 없다.”]

오키나와 외에도 소재가 파악된 한국인 유골은 2천 8백 위에 달하지만, 정부 차원의 유해 반환은 201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KBS 뉴스 윤봄이입니다.

<2018-08-16>  KBS

☞기사원문: 오키나와 섬 곳곳 거대한 무덤…조선인 유해 반환은 ‘0건’

금, 2018/08/1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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