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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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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17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고 방 속에 들어앉았던 친구들이 가만히 세상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도 한몫 보아야 한다. 이렇다면 진작 나올 것을 괜히 주춤거리고 있었다. 늦게 나온 것만 후회가 되고 가슴이 아프다고 여보라는 듯 큰 거리로 정당(政黨)으로 온갖 참예(참여)를 다해가며 소리치고 다니는 것이다.
해방되었다는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우습다면 우리가 애국자라고 큰소리치고 다니어도 어느 하나 다시 볼 사람이 없다고 점점 기가 높아가고 있으니 과연 이 풍진 세상이 또다시 이 땅에 찾아왔다. 일찍이 “이 풍진 세상이 왔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그 당시 사회풍조에 들떠 노래 부르던 시절 젊은 청년은 분에 넘치는 개화 바람에 금이빨을 해박고 삼팔바지 혹은 와이사쓰로 술집에 드나들며 전답은 다 올려버리더니 오늘날 코앞에 닥친 이 풍진 세상은 8·15 전 일본으로 수백만 석을 보내고도 쌀밥을 먹었는데, 해방되었다는 이곳에서 쌀 대신 강냉이와 밀가루로 배를 채우고 싫다고 해도 자양분이 있다고 갖다 안기는 ‘알사탕’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빨이 삭아가고 그런가 하면 조선사람은 쌀만 왜 먹느냐 자양분 있는 채소와 과실을 이제부터 먹으라는 간곡한 훈시에 가슴만 답답하고 징병을 나가라! 징용을 나가라! 학병을 나가라! 창씨와 국어를 상용하라! 황도문화(皇道文化)를 하라고 나팔을 불고 다니던 자들이 오늘날 와선 그 당시에는 사세(事勢) 부득으로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 한 행동이나 해방 후 자기비판 하였으니 아무 거리낌 없는 애국자로서 일할 수 있다고 온갖 책동을 다해가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토치카’(비위 좋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족의 메마른 등을 처먹기에 정신없는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강장제를 복용하는 ‘토치카’ 즉 정신의 중성환자(中性患者)들이란 새로운 이완용(李完用)의 후예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의 이 풍진 세상은 참으로 서글프고 얼떨떨하여라! 양조금지령(釀造禁止令)에 정체 모를 밀주와 조선판 브랜디와 위스키만 늘어 눈동자의 개가 풀리도록 독한 술에 노상에서 선량한 친구들이 코를 골고 형무소는 터질 지경으로 초만원이요 일찍이 왜놈 뺨 한 번 못 때리던 주제에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테러가 판을 치고 온갖 소득은 모조리 모리배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 숫자를 알지 못하여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딱한 백성들에게만 세금이 나날이 올라 목을 누르고 고등수학을 가지고도 계산 못할 만큼 하늘을 찌르는 물가고에 세간짐을 붙들고 갈팡질팡하는 오늘날 세상은 과연 이 풍진 세상이로다. 이 먼지와 바람 속에서 단연 용감하게도 새로운 활동으로써 그 진가를 날로 발휘하고 있는 위대한 ‘토치카’ 여러분을 독자에게 제1차로 소개하는 바이다.


1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을 말한다.
2 박흥식이 중추원참의를 지낸 적이 없다. 필자의 착오.

 

P씨1와 2천만 원

황민화를 위하여 비행기 제작을 위하여 총독정치에 사재(私財)를 바쳐가며 찬연한 충성을 다한 중추원참의2,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P씨는 지난 12월 4일 종로세무소에서 일찍이 일본이 패전한 직후 사장으로 있던 비행기회사가 해산케 됨에 당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上月良夫) 중장으로부터 미안하다고 위로금 겸 갱생자금으로 2천만 원을 받은데 대하여 제3종 소득세로 1천만 원을 P씨에게 과세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P씨는 고쓰키 중장한테 받은 2천만 원은 위로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받은 돈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세무당국에 이의를 신립(신청)하였다. 작년 2월 사기횡령 등 여러 가지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정에서 심리를 받을 때 그는 2천만 원은 해산되는 비행기회사 종업원의 노자(勞資) 문제 해결기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말은 공판기록과 판결문에도 역력히 올라 있으며 그날 방청객은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P씨는 무슨 심정으로 위로금으로 2천만 원을 받았다는 이 엄연한 자기진술의 사실을 모른 체 덮어두고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것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딴소리를 하는가! 아무리 조선이 가난하기로서니 총칼로 조선민족을 위협하여 피를 흘리게 한 군사령관 고쓰키가 주는 나미다낑(淚金. 위로금)을 받을 수는 없다. 이 돈을 받을 권한과 의무가 있는 자는 오로지 군부의 주구노릇을 하던 비행기회사 사장인 P씨 한 사람뿐이다.
조선땅을 쫓기어 나가는 군사령관 고쓰키가 제 놈이 감히 무엇이기에 2천만 원을 던져가며 사회사업에 쓰라고 자선을 아니꼽게 베푸는 것인가! (P씨의 말대로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었다고 가정하면) 그렇다면 학병, 강제동원을 위하여 남전(南電) 사장 오구라(小倉)3라는 자와 함께 막대한 운동비용을 전부 독담하겠다고 총독 고이소(小磯國昭) 앞에 나서던 열정적인 애국자 박흥식이 오늘날 건국기에 있는 조선을 위하여 세금 1천만 원을 낸다는 것은 물론 당치도 않은 일이요, 추호도 생각이 없기에 엉터리없는 소리를 꺼내 세금을 못 물겠다고 정면으로 대담하게 나서는 것이다.
고쓰키에서 받은 ‘위로금’으로 세금 1천만 원에 발악하는 P씨가 무슨 사회사업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한다면 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치욕이며 모독인가! 요즘 독립과 정부수립은 아득한 것 같고 친일파와 반역자들이 여보라는 듯 큰소리치고 다니게끔 세상이 어지럽자 이것을 기화로 옛날과 다름없이 자동차에 몸을 얹고 거리로 요정으로 서슬이 푸르게 돌아다니는 P씨여! 어느 지각없고 순진한 양반이 그대를 가리켜 조선에 필요하고 또 유력한 실업가라고 두둔해주는데 미련도 있겠지만 1천만 원 세금도 성가시다고 하니 절친한 황국(皇國)의 친구들이 그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으로 가서 황국의 사회사업을 위하여 마음껏 돈을 씀이 어떠한가!
2천만 원은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군사령관 고쓰키가 준 것이라고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이에 대한 1천만 원 과세가 나오자 위로금이 아니고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돈이니 소득세는 물 수 없다고 항의하는 한편, 모 단체에 50만 원을 기부하였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과연 P씨는 8·15의 서글픈 해방에서 우러난 강장제를 복용하는 위대한 심장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의 광신자들

귀족원의원 □□□4은 대궐 같은 그의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가 있고, □□□5는 어느 시골로 중학교 교원으로 갔다는 말이 들리더니 사랑을 바치던 (日帝) 정든 님이 자기 홀로 떠나버린데서 받은 번민에서인지 불경을 외고 있다 한다. 그러나 요즘 그는 황국 일본에 대한 자기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때때로 왜말로 떠들고 있다 하니 참으로 일본을 위하여 기특한 일이다. 초라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간혹 거리에 나타나는 총독부 기관지 사장 나리 가네가와 씨6 그리고 경향 각지에 뿌리를 박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악질관리들과 친일파 반역자의 거물과 잔재들이 8·15 직후엔 처분만 바라고 떨더니 이제는 다시 정면에 나서서 모든 모리(謀利) 기관을 독점하고 온갖 보복행위와 책동을 일삼아 민주독립을 좀먹고 있다.


3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를 말한다.
4 漢象龍이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韓相龍이다.
5 伊狂□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춘원 李光洙를 말한다.

 

<조선인의 나아갈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이라는 책을 만들어 황도정신을 선전하던 현영섭(玄永燮)은 그의 조국인 일본으로 떠나갔고, 황도문화를 위하여 조선말을 없애기에 왜놈보다도 한층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치던 자들 가운데 녹기연맹(綠旗聯盟) 쓰다(津田剛)의 참모장이고 <어동정(御東征)> 이라는시집을내어총독상을받은김용제(金龍濟)는쓰다를따라일본으로간 줄 알았더니 말에 의하면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시다催再書7는부산에 있는 남조선대학에 총장으로 들어앉았다 하며 세상이야 어찌 되던 철두철미 돈 모으기에 바쁜 만주국 명예총영사 □□□8는 돈 버는 여가에 추탕집에 그 얼굴을 나타내고, 학병과 노무자 동원에 총독 고이소가 경탄할 만큼 제1선에서 활약하여 위대한 공로를 세운 애국자 □□□9는 8·15 이후 재빨리 새로운 애국자로 등장하여 내가 무슨 이유로 입법의원 입후보로 당선운동에 나서는 등 아직도 그 거구와 더불어 자못 건강하다. 대동아문학이니 국민문학이니 하고 동경, 남경으로 갈팡질팡하던 키다리 K씨10는 명동거리에서 맹활약하여 있고,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정신을 떠들다가 그곳 우리 동포에게 쫓겨나온 우에다 다쓰오(上田龍男)(李英根)11. 조선말이라면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던 황도정신에 환장이 된 정신병자가 대화숙(大和塾) 참모로 있을 무렵 “나는 우리 늙은 부모 앞에서도 조선말을 쓰지 않는다”고 나가사키(長崎祐三) 검사에게 말하다가 기다렸던 칭찬 대신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 앞에서 조선말 대신 일본말로 떠들어 불효하는 것이 일본정신인가!” 꾸지람을 듣고 쫓겨난 우에다 다쓰오! 지금쯤은 이세신궁(伊勢神宮) 앞에서 미소기(禊)를 하는가 하였더니 이 어인 놀라운 출세인고! 그의 고향인 예산에서 통역관으로 서슬이 푸르게 온갖 재미를 다 보고 있다 하니 해방의 혜택은 ‘우에다 다쓰오’에게까지도 이래저래 신세를 고치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총독부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조선인이 조선말에 애착을 갖게 되고 도리어 엉뚱한 민족정신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오늘 당장 없애버리자”고 모리(森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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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일신보 사장 李聖根으로 그의 창씨명이 가네가와(金川聖)이다.
7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낸 崔載瑞다. 그의 창씨명이 이시다(石田耕造)이다.
8 任顯秀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성방직 사장 金秊洙다.
9 먹칠이 되어 있어 판독할 수 없다.
10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지낸 팔봉 金基鎭으로 추정된다.
11 녹기연맹 간부를 지낸 李泳根이다.

 

도서과장에게 덤벼들던 당시 이전(梨專) 교수 □□□12. 징병 징용 등 시국을 인식시키자면 신문을 계속 시켜야 한다고 또한 떠들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 □□□13과 부여신궁을 짓는데 땀을 흘려야겠다고 혹은 지원병에 관한 영화와 연극을 한다고 광신자처럼 날뛰던 일부 문인들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과 연출가들!
이 모든 광신자들이란 만약 일본이 그대로 나간다면 아주 일본사람으로 동화되어 조선놈 천대하기를 일본놈 이상으로 할 것이고, 유카타(浴衣)에 게다짝을 끌고 능히 다닐 만한 ‘토치카’지. 조금도 자기반성이 있어 중간에라도 태도를 고치는 일은 꿈엔들 상상 못할 일이다. 이렇게까지 세도에 아첨하여 동족을 파는 딱한 불치(不治)의 광신자들이 자기반성이니 자기비판이니 함부로 유행가 부르듯 하여 가장 조선을 사랑하는 체 큰소리를 하는 오늘날 세상이 어찌 이 풍진 세상이 아닐 수 있는가! 8·15 전 이들 광신자와는 다른 각도로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있은 후에 이루어지는 민주독립! 일제 아래서 영화를 누리던 특권계급과 모리배를 위함이 아니요, 40년간 헐벗고 굶주려 오면서도 민족을 팔지 않은 진정한 조선민족 전체의 해방과 독립을 방해하는, 봉건의 굴레를 쓰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자들이 싹트고 있으니, 이 새로운 광신자들을 이러한 바람과 먼지 속에서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2 <祥廈>라는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녹기일본문화연구소 간사를 지낸 裵相河이다.
13 먹칠 때문에 둘 다 판독 안됨.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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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 국군 역사에 편입 검토” 학술대회 개최 이례적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육사가 그간 독립군·광복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육사는 11일 서울 노원구 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특별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은 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게재된 초대 말씀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육군의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을 이번 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공론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다.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육사의 이런 움직임은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육사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등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다. 육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주요 연혁을 봐도 육사는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삼고 있다.

육사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방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장은 지난 9월26일 단행된 군 인사를 통해 임명됐다.

정희완 기자 [email protected]

<2017-12-07> 경향신문

☞기사원문: 정권 바뀌니 달라진 육사…‘임시정부’서 뿌리 찾는다

※관련자료

육사학술회의 –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歷史”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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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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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 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명입니다.

2016년 9월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이 되고

그 이후 모집책이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저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그동안 너무 신뢰했었던 사람이기에

이 일에 대해 모든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려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단돈 얼마라도 제발 변제를 해주었으면…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양파껍질같이 하나하나 들어날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제발… 제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일, 2017/12/1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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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자료 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1일 오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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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 섬의 한국인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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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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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며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연구팀은 이 기사가 위안부를 27명이라고 적은 것은 아이 3명 가운데 1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명부를 보면 승객 368명 가운데 조선인 249명, 여성과 아이 29명이 확인된다.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노동자’, 아이는 ‘무직’으로 돼 있다.

시는 “다른 문서와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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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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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이키노호 승선 명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그래픽] ‘트럭섬’으로 끌려간 위안부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이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인물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있는 고(故) 이복순 할머니라는 점을 판명해냈다.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 구술자료를 남기지 않고, 1993년 12월 정부에 피해를 신고했을 때에도 간략한 피해 내용만 남겨 삶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이 생전 이복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에게 트럭섬 위안부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며칠 뒤 할머니의 아들도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 경북 안동, 대구의 공무원들이 자료를 뒤진 결과 하토가와 후쿠준이 할머니의 창씨명이 맞고, 주소지도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시는 “할머니의 남편 호적이 있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사무소 계장은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온종일 제적등본을 뒤져 해당 자료를 찾아줬다”고 관계자의 노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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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복순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일본 패전 후 그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항으로 갔다.

이 할머니는 이후 도쿄로 갔다가 규슈 후쿠오카 현 하카타 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26명 가운데 이복순 할머니를 뺀 나머지 25명의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나머지 할머니들의 신원도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이날 오후 1시 30분 서울시청 신청사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발표한다.

또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출간한다. 내년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해 성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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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연합뉴스

☞기사원문: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관련기사

☞뉴스1: 일본군 위안부 남태평양 ‘트럭섬’까지 끌려갔다…서울시 첫 확인(종합)

☞민중의소리: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한국NGO신문: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명부, 사진 … 서울시 첫 확인

☞KBS: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첫 확인

※뉴스영상

☞MBC: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화, 2017/12/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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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2/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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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유산에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강제동원 상처 아물지 않았다”
日강제동원네트워크,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노동’ 가이드북 출간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재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시설의 강제동원 역사 은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진상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한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정보센터를 하시마에서 1천㎞를 훌쩍 뛰어넘는 도쿄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 각종 꼼수를 동원해 은폐에 급급한 상태다.

이런 일본 정부에 맞서는 일본 시민단체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최근 우리나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이라는 책자를 내고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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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발간한 강제동원실상 소개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우선 하시마에 대해 가이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가량이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고로 변을 당했다. 탄광 매몰에 의한 질식사, 압사, 외상에 따른 사망, 여기에 탈출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익사도 있었다.

책자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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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에서 군함도의 실상을 설명한 부분.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실제 1943년 전북 김제군에서 군함도로 끌려온 윤춘기 할아버지는 “임금의 3분의 1은 강제 저금되었고, 3분의 1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됐다”고 일본측을 고발했다.

그는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며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밥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시 열악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경우 14세이던 1943년 전북 익산에서 군함도로 강제동원됐다.

책자에는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증언도 소개됐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관계자는 12일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설명 속에,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되는 강제노동 등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 한다”며 “이는 2차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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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email protected]

<2017-1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군함도는 지옥”…日시민단체, 진상은폐 日정부 ‘꼼수’에 맞선다

※관련기사

☞한국일보: “군함도는 지옥이었다” 日시민단체, 일제 강제동원 만행 고발책자 출간

세계일보: ‘군함도 진상 규명’ 책 출간한 日 시민단체

☞인사이트: ‘군함도’ 사실 은폐하려는 아베에 맞서 싸우는 일본 시민들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이렇게! –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가이드북 공개

※ [다운로드] 2017 유네스코 가이드북 [한글] [영문] [일문]

화, 2017/12/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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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일 연구소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여는역사_역적’시즌 2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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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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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출연진 : 박한용, 노기환, 방학진, 김광진 등

목, 2017/12/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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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린 대한민국의 자존심

이게 다 친중사대주의에 빠진 민족문제연구소때문에 생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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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1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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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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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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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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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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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2017-1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관련기사

경향신문: “임정의 민주공화제 기반은 삼균주의”

경향신문: “민주 이어 공화 정신 살려야”…3.1운동 100년 준비하며 다시 짚어보는 민주공화정

토, 2017/12/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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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 만드는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프롤로그

수, 2017/12/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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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포스터 ©근현대기념관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와 근현대사기념관은 22~23일 오후 2시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강좌를 개최한다.

이번 강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올해 극장가에서 주목 받은 영화를 보며 일제 강제동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2일은 ‘근현대사에 매료된 한국영화, 화제작 ‘군함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23일에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국제사회로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본다.

강의는 무료이며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참여 대상은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으로 매 강좌 25명 내외를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mhmh.or.kr) 또는 전화(02-903-7580)로 신청하면 된다.

15~16일에는 다큐멘터리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과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2016년 5월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찾을 수 있도록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를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선열들의 묘역을 따라 그 뜻을 새기며 걸을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2구간 ‘순례길’ 아래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년간 약 2만 명이 방문했다. 인근 국립4·19민주묘지와 함께 근현대사 탐방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2017-12-20> 뉴스1

☞기사원문: 영화 ‘군함도’ ‘아이캔스피크’ 보며 역사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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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2/2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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