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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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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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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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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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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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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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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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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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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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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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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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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之巨罪

 

可嘲云國父(가조운국부)

虐殺罪衝天(학살죄충천)

後世何忘此(후세하망차)

長歎起憤然(장탄기분연)

 

이승만의 큰 죄

 

國父 운운하니 조롱할 만하구나

동족 마구 죽인 罪, 하늘에 닿네

후세에서 어찌 이를 잊어버리랴

길게 탄식하며 분연함 일으킨다.

 

<時調로 改譯>

 

國父 가소롭구나 虐殺罪 하늘에 닿네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잊으랴

오호라! 장탄식하며 분연함 일으킨다.

 

*巨罪: 대죄(大罪).  큰 죄  *國父: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임금’을 이르는 말.
나라를  세우는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 *虐殺:  가혹하게  마구  죽임  *衝天: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으로  높이 솟아오름. 탱천(撑天).  분하거나  의로운 기개, 기세  따위가 북받쳐 오름 *後世: 다음에 오세상. 또는  다음 세대(世代)의 사람들. 來葉 *長歎: 장탄식(長歎息).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歎息)하는    *憤然: 성을  벌컥  내며  분해하는 기색이 있음.

 

<2018.7.28, 이우식 지음>

토, 2018/07/28-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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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4

[바로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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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3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8/07/3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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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아침좋은글>

 

좋은 일만으로 기억하며

지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향내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속 깊은 옹달샘의

맑은 물 같은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정말 즐거워할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난 행운아야 라고 말하며

어깨에 힘을 더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거나

짜증 나지 않고 미소 머금을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했다”

“잘 했어” 라고 말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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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7/3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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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아침좋은글>

 

좋은 일만으로 기억하며

지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향내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속 깊은 옹달샘의

맑은 물 같은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났다고

정말 즐거워할 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난 행운아야 라고 말하며

어깨에 힘을 더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거나

짜증 나지 않고 미소 머금을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했다”

“잘 했어” 라고 말할수 있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화, 2018/07/3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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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나라에 남아서 지킨 놈은 다 친일이고 도망간 놈만 애국자냐? 병신들…

화, 2018/07/3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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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만 하오리까. 일본이 연합국과 편하게 싸우라고 불가침조약 체결하고 뒤를 기켜준 소련.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떨어지자마자 8월8일 불가침조약 파기하고 다죽어가는 일본군 사냥하며 만주로… 딱 일주일 싸우는척하고 한반도 반을 쳐먹은 소련… 완장차고 따라 들어온 김일성… 그때 한반도 문맹률이 78%!  김일성이가 친일을 청산했다고 사기치는 놈들과 거기 속은 바보들… 글도 못읽는 무지랭이 완장채우준다고 나라가 되는가 아니고… 북조선 철도, 발전소는 일본 기술관료 출신 아니면 누가 운전했을까?  문과나와서 행정관료, 경찰관료했으면 친일이고, 이과나와 기술관료했으면 친일이 아니라고?  개가 웃는다!

화, 2018/07/3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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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8/0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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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함께만들어요!

수, 2018/08/0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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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01

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02

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03

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04

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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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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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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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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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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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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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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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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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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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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