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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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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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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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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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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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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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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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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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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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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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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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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고향 선산 쌀과 고국의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차리고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허형식 장군 유적지 답사팀은 하얼빈 공항에 도착한 후 항러빈 춘천 빈관에서 1박 후 하얼빈 시내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실험을 자행한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인 731부대 유적지를 답사한 후 동북항일연군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 11월 18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시산 허필(許苾 1865~1932.건국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 대한민국장)의 5촌조카이기도 하다. 허 장군은 만주에서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항일영웅열사 명단에는 허형식 장군과 동북항일연군 연합지휘부 참모장을 지낸 이홍광 장군, 동북항일연군 7군 군장 이학복장군 그리고 중국에서 수차례 영화로도 나온 바 있는 무단장에서 1천여 명의 일본군·만주군과 싸우다 총알이 떨어지자 일본군에 잡히느니 강으로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8녀 투강의 주인공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 이봉선, 안순복이 조선인으로서 항일영웅열사에 포함되었다.

제례를 진행한 김병길 어르신은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허형식 장군이 왜 부모
형제와 함께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야 되었는지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는 우리가 상갓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내 자식, 내 딸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병길 회원은 “왜 그런가? 주권이 없어 그랬다. 민족의 아픔, 민족의 설움을 허형식 장군이 먼저 깨닫고 느끼고 여기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왜놈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 적은 왜놈이다. 바로 일본제국주의자 후예들이 지금도 얼쩡거리고 있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김병길 회원은 “우리 모두 이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민족 자긍심을 강화해서 진짜 동방에서 떳떳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허형식 장군을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 하며 남은여생 동안 허형식 장군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강조했다.

 


1939년 허형식 장군은 31세 젊은 나이로 조상지 군장의 뒤를 이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중국인 조상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는 주하현을 상지시로 개칭하고 상지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로타리에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을 세워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반면에 허형식 장군의 고향 경북 구미시는 물론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념비조차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역사를 망각한 나라, 영웅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항일결의문 채택 등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가 남발하지만 이러한 과거 항일영웅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널리 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진정한 항일운동이며 일본을 뛰어넘고 이기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이 유력하다고 학계에서 주장한다.
“허형식 장군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이육사의 외삼촌 허발선생의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창 허발은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큰오빠이다.
허발, 허길, 일헌 허규는 남매 사이며 허길에게 허형식은 사촌동생으로 이육사의 외당숙이 되는 셈이다. 1930년대 말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와 함께 허형식 장군을 만주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금, 2019/09/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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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오던가, 할아버지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얘기해 달래요. 이건 나라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찾으려 한 나라잖아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의 외손녀예요. 할머니는 3·1운동 몇 년 전 서울 사직동 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나셨어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울면서 집에 너무 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어요. 서울 집이며 동네 풍경을 그려주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신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아빠 손을 잡고 구경 다닌 곳을 가보고 싶다고, 흐느끼셨어요.
스탈린 때는 이런 말이 있었대요.“벽에도 귀가 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어른들이 잘 때 헝겊으로 입을 막고 잤대요. 잠꼬대라도 하다가 스탈린을 원망하는 얘기가 새나가면 아이들까지 죽을 수가 있으니까요. 제가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왜 이곳으로 끌려오셨는지,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말도 못 꺼내고 살았어요. 솔직히 지금도 좀 무서워요.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엄마 아빠는 종일 일하러 나가시고. 우리 고려인들 많이 힘들었어요. 뼈에 사무치셨던지, 아니면 어린것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셨던지, 저를 다독이면서 혼잣말을 하셨어요. 그 얘기들이 너무 낯설고 신기했어요. 할머니는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오셨나?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스카스카”를 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스카스카”는 동화라는 뜻의 소련말이에요.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게 저는 김경천 할아버지를 알
게 됐어요. 할머니 덕분에요.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 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할아버지 머릿속에는 진정한 자주독립의 경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설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독립전쟁으로 뭉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로 독립군을 키우러 가셨어요. 무모한 짓이라고 손을 젓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요.

 

저 죄수복을 입은 청년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일본아, 네 죄에는 무슨 옷을 입겠느냐. 저 청년들은 내가 사랑하는 민족 중에 최고로 용감한 사람이다. 모두 20세가 되나 못 되나 하다. 저들은 동포라는 것을 알았다. 민족이란 것을 안 사람이다. 인종이 생긴 그 동시에 만물보다 더 먼저이며 최고로 아름다운 자유라 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자들이다.
호의호식하는 자칭 유지, 신사들아, 모두 어느 구석에 가서 숨었느냐. 외국유학도 쓸데없고 나이도 소용없다.…… 우리나라 신사나 청년이 두 눈이 멀거니 앉아 밥이나 먹고 있음은 죄인이다. 조국의 부름을 모르는가! 아아,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지만, 그대들은 모르는 체하는 적이다.

 

할아버지의 조국에 공부하러 왔어요. 경복궁에 처음 가봤어요. 어떤 분이 근처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거기가 이회영 선생님 기념관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교관을 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분이요.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기념관 분들이 저에게 누구냐고 말을 걸었어요. 김경천? 후손들이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 찾는 게 아닌 줄로만 알고 나왔어요. 그때까지 저는 이회영 선생님을 몰랐으니까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1년쯤 지나, 이회영 선생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게 소망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할아버지 유해를 찾고 싶다고, 할아버지 집터에 표지석을 놓고 싶다고, 백마 탄 할아버지 동상을 조국에 세워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유정화(柳貞和) 증조할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대요. 할아버지 댁에 재산이 많았는데, 그걸로 독립운동하는 분들 돕고. 옥살이까지 하셨대요. 할아버지가 망명한 뒤, 일본육사 후배들이 만든 <전의(全誼)>라는 회보에 할머니 이야기가 실려 있대요. 어느 분이 알려주셨어요.

 

김 부인은 수년 이래 부채와 생활난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작년 겨울 소유하고 있던 가옥을 매각해 부채를 정리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김 부인은 지 부인의 비참한 상황을 동정해 가옥 매각 때 일금 100원을 지 부인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그 의기 장하다고 할 만하다. <전의(全誼)> 1923년 6월 24일자

 

이 글에서 “김 부인”이 증조할머니이고, “지 부인”은 할아버지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이자 신흥무관학교에서 함께 교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부인이에요.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할아버지와 지청천 장군 그리고 동천(東天)이란 별호를 쓴 신팔균(申八均) 선생님 세 분을 가리켜 “ 삼천(三天)”이라고 불렀대요. 신 선생님은 고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申櫶) 어른의 손자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오셨대요. 할아버지들이 독립군 동지니까, 할머니들도 독립운동 동지였던 거예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아주 먼 곳에 우리 고향이 있단다. 그곳은 참 좋은 곳이란다. 우리는 지금 갈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한단다. 우리가 여기서 고생을 해야 고향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잘살 수 있단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릴 적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지금은 알아요. 할머니의 혼잣말은 할아버지가 맏딸에게 들려주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고백할 게 있어요. 어쩌면 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것만 같아 두려워요. 저는 할아버지 조국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나라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국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동료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대요.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일기에 이렇게 쓰셨나요? “아, 춥고 외로운 이 고독한 군대의 장졸들을 누가 위로할까. 이 장졸들의 심정을 훗날 누가 동포들에게 알려줄까.”
자기 뿌리가 뭔지 잊으면 어떡해요. 여기는 자본주의라서 그런지, 출세한 사람들이 다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익만 바라보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나라 망하잖아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가족도 잊어버리고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그 정신을 정말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그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께서 노력하고 계세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100인 위원회도 생겼어요. 저도 100명 중 1명으로 참여하게 됐고요. 정말 고맙고, 기뻤어요. 그런데, 저는 회의에 가면 울음부터 나와요. 어떤 분들은 저더러 왜 그리 서럽게 우느냐고 물어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리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어떻게 살았는데…. 귀 막고 입 막고….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끌려가셨어요. 몇 년 만에 풀려나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가족 곁으로 돌아오셨지만, 두 달 만에 또 잡혀가셨어요. 모스크바감옥에 갇혔다가 시베리아수용소에서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조국에 와서 결혼을 했어요. 얼마 전에 딸도 낳았어요.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첫 번째 후손입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핏줄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다고요.
증손녀 김올가 올림(<100년 편지> 334호, 2019.4.9.)

금, 2019/09/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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