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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연대의 힘을 깨닫다 – 서기호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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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연대의 힘을 깨닫다 – 서기호 변호사 인터뷰

익명 (미확인) | 금, 2018/09/14- 09:11

< 연대의 힘을 깨닫다 >

서기호 변호사 인터뷰

 

심재섭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서기호 안녕하세요, 서기호변호사입니다. 사법연수원 29기이구요.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예비판사 2년을 포함한 12년간 판사로 근무하던 중 2012년 2월 재임용 탈락사건을 겪었고… 12년 7월경에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승계 받게 되었다가 정의당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국회 법사위에서 4년간 활동한 다음 총선 불출마 선언 이후 16년 7월경 변호사 개업하면서 민변에 가입하였습니다. 사법위원회 소속으로 있긴 했는데 2년 여 동안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 업무에 적응하느라 너무 바빴고요. 심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최근 사법농단 TF 구성원으로서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사법위원회 회의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두 달 여전에 민변 사법위원회 김지미 위원장님으로부터 부위원장 맡아달라는 말씀을 듣고 수락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정기회의에 빠지기 어렵게 되었네요 ㅎ

2년여 동안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정리하고, 올해 8월부터 법무법인 상록에 구성원 변호사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민변 사법위원회 소속 변호사 두 분이나 계시는 법무법인 상록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심재섭 개인으로 하실 때 고용변호사님도 계시지 않았나요?

서기호 개인변호사 사무실 운영할 때, 고용변호사님도 두고 운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무실에 찾아오시는 의뢰인분들이, 억울한 사연을 갖고 계시면서도 증거부족 등으로 이기기 쉽지 않은 사건들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사무실 유지가 쉽지 않았어요. 전반적으로 수임료가 낮은 편으로. 그래서 올해 초부터 고민을 하던 중에 마침 법무법인 상록 변호사님들과 사법위원회 활동으로 친분도 있었고, 사무실도 바로 옆 건물이다보니 점심식사를 자주 같이 하면서 포섭되었다고나 할까요?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심재섭 포털에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변호사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데, 판사 시절 이전은 잘 안보이더라고요. 학생 때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서기호 학생 때 평범하고 공부만 주로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중고 동창생들이 가끔 저에게 학생 때랑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대학시절에 학생운동(가톨릭학생회 소속)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금씩 달라진 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제 안에 지킬과 하이드 같은 양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 자신에 대해 헷갈릴 때가 있어요.

심재섭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서기호 세례명은 베네딕토인데요, 2012년 이후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으면서 바쁘기도 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도 해서 신앙생활에 소홀한 상황이고요. 현재는 냉담자입니다.

2016년 2월 총선 불출마 선언 후 시간적으로 3개월 여유가 생겨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35일 정도 다녀왔는데요. 그때 하루종일 걸으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과연 신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는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아직까지 냉담 중입니다.

심재섭 ‘가카빅엿’ 사건과 이후 판사 재임용 탈락 뉴스로 일약 대중의 시선에 들어온 것으로 압니다. 재임용 탈락이라는 상황에 대해 당시 소회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서기호 너무 길게 이야기해도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짧게 넘어갈 수도 없는 질문이네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생각보다 큰 파장을 몰고 와서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법원행정처에서는 당시 저에게 10년 간 ‘하’등급 다섯 번 받았다는 이유를 제시했지만, 그 중 2009년 이후 3년 연속 받은 ‘하’등급은 신영철 대법관 촛불집회재판 개입 당시 제가 판사회의 주도하고 법원게시판에 신영철 대법관 사퇴 주장하는 글 등을 올려서 보복성 ‘하’등급을 받은 것입니다. 실제 객관적 통계 3년치 자료에 따르더라도 평균 정도였지 결코 최하등급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법원장 1인에 의한 주관적 자의적 근무평점 시스템 때문에 부당하게 3년 연속 ‘하’등급을 받으면서 재임용 탈락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그러한 점들에 관해 법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판사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지요.
그런 점들 때문인지 몰라도 저에 대한 재임용탈락처분 이후 판사들이 2주 연속 전국적으로 판사회의를 열어서 판사 근무평점 제도 및 재임용심사 제도의 개선책을 요구하는 판사회의 의결이 잇따랐습니다. 이처럼 법원행정처의 재임용탈락 사유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에 많은 국민들께서는 그건 법원의 핑계에 불과하고 약 두 달 전 제가 SNS에 ‘가카의 빗엿’이라는 표현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때문이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재섭 재임용 안 됐다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 있다가 출근 못하게 되신 건가요?

서기호 재임용 탈락 통보를 받은 후 일주일 뒤에 바로 법원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2년간 판사생활 정리하기엔 1주일이란 기간이 굉장히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었습니다. 1주일동안 굉장히 많은 기자분들이 북부지방법원에 찾아와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고, 그동안 정들었던 분들과의 이별을 맞이하는 등, 그로인해 당시 진행되던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후임 판사님께 떠넘기게 되어서 당사자분들에게도 너무 죄송했습니다.

심재섭 ‘하’등급을 받아왔던 것은 알고 계신 거였나요?

서기호 법원에서는 판사들의 매년 근무평정을 모두 비밀로 하고 있어서 당사자에게도 전혀 통지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2월 초 어느 날 행정처 심의관으로부터 재임용심사 대상이라는 전화 통보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서면으로 통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도 5년간‘하’등급 받았다라는 점만 알려줄 뿐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 설명 받은 바 없습니다. 그러면서 법관인사위원회에서 소명할 기회 있는데 참석하겠느냐 물어보길래 당연히 참석하겠다고 답변하였고 법관인사위원회에 소명자료를 충분히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법관인사위원회에 참석해 보니 위원들 사이에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고, 인사위원들 1 ~ 2명 정도가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물어보고서 끝내버리더군요. 제가 제출한 소명자료에 대하여는 아무도 물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안 읽어보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행정소송으로 재임용탈락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을 때도 재판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구체적 통계자료, 서술형 평가 등 세부 근무평정 자료 등을 제출하라고 문서제출명령 신청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피고인 법원행정처에서는 비밀이라면서 별 도움 안 되는 몇 가지 자료 외에 핵심적인 자료들을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1심 재판장도 문서제출 명령 신청을 기각하고, 항고, 재항고심에서도 기각해버리더군요.

심재섭 그런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하셨나요?

서기호 판사들 사이에서는 그 전까지도 재임용 심사는 형식적이라고 내부에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판사로서 직무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잘못을 했거나 사건해결 능력이 부족하다고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둑이 제 발 저리는지 법원행정처에서 구체적인 자료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서 황당했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당시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하러 왔을 때 기자분들 하시는 말씀이, 자기들도 언론사에서 근무평정을 받는데 그 결과를 공개해줘서 알고 있고. 이의제기할 기회도 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가장 투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법원에서 오히려 비밀스럽게 근무평정이 진행된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고들 하였습니다.

심재섭 판사를 그만두고 국회의원이 되십니다. 통합진보당에 입당을 하는데 비례대표 14번을 받으시지요. 이 숫자가, 국회를 가겠다고 마음먹으셨는지 아니어도 상관 없다였는지 애매한데, 어떠신가요? 정치를 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정치권에 들어가게 된 것은, 재임용탈락 이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sns에 가카빅엿 글을 올릴 때에도 정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이유로 해서 재임용 탈락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스스로 제 자신이 정치에 맞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정치하려고 사직한 것도 아니죠.
그런데 막상 재임용에 탈락되고 보니, 주변에서 이 문제를 계속 이슈화하기 위해 비례대표직을 알아보는 게 어떠냐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쪽으로 계속 나가라는 것보다는 사법개혁이라는 이슈로 비례대표을 알아보라는 수준이었습니다. 실제로 재임용 탈락 사태는 대법원과 맞서는 것이라서 그냥 평범한 변호사가 된 뒤에는 이 상황을 뒤집거나 지속적으로 이슈화시키기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 변호사 한 명의 권한은 거의 없기에 결국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제가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서 특별히 정치권과 인적 관계를 쌓아둔 것도 없었습니다. 단 하나. 오로지 단 하나,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와의 대학시절 개인적 친분(대학 1년 선배)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정치권의 동향을 전혀 몰랐고 통합진보당 내부의 정치 세력 간 갈등도 전혀 몰랐습니다. 단지 이 전 대표의 진정성 하나만을 믿고 들어갔던 것인데, 뜻밖에도 통합진보당 내부의 분열 사태 등 이후 전개되었고,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는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었던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 정의당 분들과 4년간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4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법사위 활동은 제가 아는 부분이 많이 있어서 나았지만, 정의당 소속으로서의 활동 부분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심재섭 진보정당에서는 판사출신 의원이 없던 걸로 아는데. 민주당에서의 제안은 없었나요?

서기호 당시 민주당에서의 비례대표직 제안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는 2012년 2월 하순경으로서 4월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던 상황이라서 이미 자리가 차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판사출신이 진보정당에 맞느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진 못했습니다. 다만 당시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등 3개 주체가 통합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진보정당이 커지는 흐름에 제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한계, 특히 현행 소선구제 하에서 진보정당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는데, 4년간의 경험을 통해 특히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면서 장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심재섭 14번이면 당선되기 힘든 번호였을텐데 안 되도 된다의 마인드였나요?

서기호 원래는 6번 제안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거치면서 14번을 받고서라도 백의종군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로서는 일단 사법개혁을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심정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마당인지라, 국회의원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구요. 어찌보면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마음을 비웠기에 2012년 7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비례대표직을 승계 받는 기회를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재섭 5시간의 필리버스터까지 한 뒤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만약에, 진짜 만약에 다시 정치를 하게 된다면 스스로 어떤 조건이 성취되어야 하겠다고 막연하게나마 설정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서기호 근본적으로는 돈과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지역구 선거를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현실정치의 높은 장벽을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또한 체력적인 문제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준비부족, 한계를 느끼면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비례대표와 지역구 국회의원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만약 다시 하게 된다면 기본적으로 체력과 그리고 재력,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 등이 있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다 갖춰지려면 20 ~ 30년 걸릴까요. (웃음) 어쨌든 지금 돌이켜보면 판사생활만 하다가 갑자기 곧바로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굉장히 무리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재섭 2000년 연수원 수료 이후 공직생활 16년을 지나고 변호사가 되었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전관 개업, 인지도 좋고, 전관은 아닌데.. 어려움, 아쉬움?

서기호 판사로 12년 근무를 했다고 하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적어도 적응기간이 1년 ~ 2년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판사는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역할이지만, 변호사는 처음부터 의뢰인과 만들어가는 역할이라서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사자에 동화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론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기에 그 사이에 균형을 잡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심재섭 예상과 다른 결과가 많이 있던 때도 있었나요?

서기호 그렇죠. 가장 많은 사례가 처분문서가 있는 사건에서 저는 주로 처분문서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상대방의 의뢰를 받은 적이 많습니다. 물론 제가 판사였다면 당연히 처분문서에 반하는 주장을 배척하고 의심해서 판결을 선고했을 것 같은데, 막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대변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처분문서 대로 판결을 선고하는 법원의 경향이 과연 맞는건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3자 위치의 판사는 증거에 의해 판단해야 하니 객관적 서면, 처분문서의 내용을 중시할 수밖에 없겠지만, 실제 그것이 과연 진실에 부합할 것인가라는 점은 의문이 자꾸 들게 되더군요.

심재섭 민변 활동에 열심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변에 가입하게 된 동기 내지는 민변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서기호 사법위원회 소속으로 가입했는데요. 사법위원회는 사법개혁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저의 핵심 관심분야기도 하고 국회의원 시절에도 2 ~ 3 차례 사법위 회의에 참석하기도 해서 친숙한 편입니다. 그리고 사법위 소속이신 장주영 변호사님은 목포고 선배이고, 민경한 변호사님은 국회의원시절 민변 사법위 회의에 참석했을 때 저에게 좋은 격려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민변활동에 적극적이신 분들과 친분이 있고 사무실도 같이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되는 거 같습니다.

또 한 가지 계기는 몇 달 전 최영도 변호사님 추모행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유신정권 시절 부당한 재임용 탈락 사건을 겪으셨으면서도 그 이후 민변 참여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셨더라구요. 그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판사출신 중에 민변 회원으로 가입한 분들은 좀 있지만 적극 활동하시는 분들은 별로 없잖아요. 성창익, 오지원 변호사 같은 예외적인 분도 계시지만, 아무래도 판사로 근무했던 기간이 오래될수록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아무튼 최영도 변호사님이 걸어오신 길은 그런 점에서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심재섭 최근 사법농단 TF에서 활약이 눈부십니다. 사법농단 대응이 본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서기호 활약이 눈부시다는 과찬이시구요. 단지 제가 관심이 가장 많이 가는 분야이고 잘 알고 있는 분야이기도 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함께 참여하시는 다른 민변 회원님들과의 여러 차례 회의 등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고 조직적 대응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그날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심재섭 변호사님 사건도 같이 대응하기로 했지요.

서기호 최근 사법농단 TF 회의에서 저의 재임용탈락 취소소송에 대한 법원행정처의 재판개입 사건도 함께 다루어서 이슈페이퍼 만들고 고발하는 등 다른 사법농단 피해자들 사건과 함께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볼 때 제 사건이 기존 긴급조치, 강제징용 피해자분들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반대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고 직접적으로 재판거래에 활용된 사건이고. 하지만 저는 그런 차원은 아닌데다 앞의 피해자분들의 아픔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 사건에 우선적으로 집중해도 바쁘고 모자랄 판인데, 제 사건까지 포함시키기에 죄송한 측면도 있었구요.

하지만 그 뒤에 여러 분들로부터 제 사건이 개인적인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구조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고 다수의 다른 판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예방적 성격도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함께 다루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의견을 주시는데 혼자 반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조직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이 점은 스스로도 반성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그동안 제 스스로도 혼자만의 활동에 초점을 맞췄던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여러 경험을 통해 보니 12년 재임용 탈락사태 이후 거대한 사법권력에 맞서서 모순점들을 풀어나가려면 혼자 힘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의견이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많은 분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재섭 이번에 법원 앞 1인시위에서 첫 주자를 하셨습니다. 과거 근무지, 혹은 동료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을 때의 그 느낌을 전해주셔요.

서기호 처음 1인시위 이야기가 TF 회의에서 나온 뒤에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 부분이 현 단계에서 무척 중요하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더기 영장 기각 사태를 통해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가 도를 넘어서 수사방해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가 극에 달하는 상황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대폭 받을 수 있는 1인 시위이고, 말없는 다수의 판사들조차도 속으로는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단지 동료 판사들의 재판에 관한 영역이라 비판적인 말을 못할 뿐이지요.

그런데 마침 첫 주자인인 김호철 회장님이 예정했던 시간에 급한 일정이 생기셨다고 해서, 이때다 하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인시위를 하는 동안 알고 지냈던 동료 판사, 직원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어떤 분은 격려를 해 주고, 어떤 분은 그냥 못 본 척 지나기도 했습니다. 그냥 지나간 판사들도 속으로는 부끄럽고 뜨끔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1인시위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잘못된 영장 재판을 바로잡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재섭 나중에라도 법원에서 일하실 것인가요?

서기호 기본적으로는 법원조직이 소위 법적안정성이라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향후 사법농단이 바로 잡힌다 해도 제가 판사로 복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을 주시는 분도 있지만, 제게 주어진 소명을 감안하여 볼 때 법원 밖에서 할 일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설령 복직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현재로서는 다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법원 밖에서 민변활동과 법무법인 상록 변호사님 등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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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슈로 뜨겁다. 동성애와 동성혼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 5월 동성애자 군인들은 군형법 추행죄로 대거 잡혀갔고, 이번 10월 제주퀴어문화축제와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지자체로부터 미풍양속이란 이유로 장소가 불허됐다. 성 정체성과 성적지향을 포함해 다양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차별금지법은 10년째 캐비닛 안에 잠겨있다. 성 소수자와 전혀 친근해 보이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로 살아남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변호사이자, 민변 6개월 차인 새내기 박한희 변호사를 민변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차게 대화를 이어가지만, 수줍은 웃음이 돋보이는 ‘트랜스젠더 여성’ 박한희 변호사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최은빈 : 국내에서는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서, 혹시 남다른 고충이나 보람이 있으신가요.

박한희 :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하리수씨 같은 연예인이나, 유흥업, 예체능 등이 대표가 됐어요. 변호사라는 전문직 또는 사무직에서는 대표가 안 됐고요. 그런데 제 기사는 그게 화제가 됐던 것 같아요. 페북에 알려지면서 응원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한 친구는 기사를 보고 트랜스젠더도 변호사가 할 수 있다고 부모님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하더라고요. 퀴어문화축제에 갔을 때도 젊은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와서 기사를 보고 감동 받아서 주변에 얘기하고 다닌다고 하고요.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한 선택이 어쨌든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사실 제가 한 선택도 나이가 많은 분들로부터 롤 모델을 받았던 거잖아요. “저도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겠구나”를 느끼면서 보람이 된 것 같아요.

고충은 사실 이게 최초이자 지금은 혼자잖아요. 그래서 “저로서 과잉대표 되지 않을까?” 그런 부담이 있는 거 같아요. 이거는 꼭 트랜스젠더 변호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강의를 나가도 트랜스젠더를 실제를 본 사람이라고 질문을 하면 거의 손 드는 사람이 없어요. 한두 명 정도. 그 사람들은 살면서 제가 실제로 눈앞에 처음 보는 트랜스젠더인거에요.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만, 나라는 존재 행동 하나하나가 트랜스젠더 전체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겠냐는 조심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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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새얀 : 성 소수자로서 사회에서 약자성을 깨닫고, 이것을 극복한 과정이 궁금해요.

박한희 : 저도 못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고, 무기력한 것도 많았어요. 남들과 다르다고 정체화한 건 중학생 때 13~14살 때였는데, 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한 28살부터였나 싶어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고, 이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게 길었어요. 그에 따라 고충도 많았죠. 회사도 다녔지만,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중간에 다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바뀐 계기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기는 싫다”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건 29~30살 넘어가는 로스쿨 겨울방학이었는데,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서 의미가 있을까? 계속 숨기고, 감추고, 피해 다녀야 하나?”라는 억울함이 있었죠. 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개인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상 없는데 왜 이래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렇게 되는 데는 나만의 결정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도움들이 있었어요. 두 명 정도가 있는데, 한 명은 저보다 6살 많은 트랜스젠더 언니에요. 그 언니는 남자로 회사에 입사해서, 회사에서 커밍아웃했어요. 휴직하고 수술을 받고 성별정정을 해서 여자로 복직했고요. 지금도 그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어요. 그 언니를 지금까지 안 건 벌써 10년 정도 되는데, 그분을 알면서 저도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안에서 커밍아웃하는 것과 회사 안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건 난이도가 천지 차이거든요. 자기가 다니는 직장에서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해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지 않겠구나”를 느꼈어요.

다른 하나는, 로스쿨에서 커밍아웃했을 때, 법조계라는 보수적인 공간에서 “과연 나 같은 성 소수자가 받아들여질까”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때 상담을 했던 분이 희망법의 한가람 변호사님이었어요. 저는 희망법에 상담 메일을 보냈고, 한가람 변호사님이 저한테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변호사님은 자신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주변 동성애자 친구들과 후배들도 많이 있지만, 다 커밍아웃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오히려 운동하면서 바꿔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줬죠. 그때의 대화가 지금 제가 희망법에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 성 소수자를 위해 일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류태광 :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여쭙고 싶어요.

박한희 :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MTF 트랜스젠더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운동적으로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말을 요즘 쓰고 있어요. MTF이라는 말 자체가 기정성별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 쓰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많았어요.

그리고 사실 차별은 되게 개별적이에요. 똑같은 트랜스젠더라고 해도, 차별은 개개인에 따라 상황이 어떤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트랜지션(성별 이행)을 얼마나 했는지, 수술은 했는지, 성별정정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가 이런 차별을 겪는다’를 나를 기준으로 일반화할 수 없어요. 일단 제 기준으로는 저는 수술을 하지 않았고, 할 생각이 없는 비수술 트랜스젠더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한국체계 내에서는 법성별을 바꿀 수 없는 상태고, 법적 성별은 남성이고 주민등록번호도 1번이에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신분증적 차별인 것 같아요. 신분증을 내세울 때, 내가 어디에 뭘 적어야 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은행을 간다든지, 병원을 간다든지, 인터넷에 무엇을 가입할 때도 남성이라고 적어야 가입이 되니까요. 주민등록증은 항상 갖고 다녀야 뭘 할 수 있잖아요. 번호도 항상 입력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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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다는 게 법적인 차별에서 큰 것 같고요. 특히 저는 다행히 하는 일 자체가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이게 취업이랑 연관이 되거든요. 취업할 때 주민등록번호와 성별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취업이 많이 안 돼요. 자기가 여성적으로 보이지만 법정 성별이 남성이니까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면접에서 떨어지고, “당신은 왜 주민등록번호가 이래요?” 라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정규직 이런 곳은 사실상 취업하기가 아주 어렵고요, 서류에서부터 떨어지거나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실제로 붙은 다음에 알게 되어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으로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고용이 불안정해요. 또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판단하는 게 성별인 것 같아요. 가령 “남자야?, 여자야?”, “재 그거 아니야 그거?” 등. 제가 생각하기에 한 3~4개월에 한 번씩 겪는 것 같아요. 되게 비일비재한 것 같아요.

류태광 : 방금도 언급됐지만, ‘성 정체성’은 외관상 드러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자연히 빈곤에 더욱 취약할 것 같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한희 : 실제로 2014년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성 소수자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전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실제 트랜스젠더 집단의 평균소득이 가장 낮게 나왔어요. 일본에서도 성소수자 직장 환경 실태 조사를 하는데 항상 트랜스젠더 집단이 가장 수입이 낮고 이직률이 높고 근속기간이 짧은 것으로 나와요.

이게 악순환인데 우리나라는 수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돈을 벌려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했으니까 성별정정이 안돼요. 그래서 취업을 못 해요. 취업을 못 하니까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해요. 그러니까 취업을 못 해요. 이게 계속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20대의 10년을 거의 돈 모으는 데에 쓰게 되죠. 비정규직이나 공장 일 하거나 알바하면서 모아야 하니까 5~6년, 길게는 10년, 이렇게 걸려서 그 일 하나만 하는 경우도 많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은 되게 복합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고용상 차별을 금지하는 것도 당연하고, 불필요하게 이력서에서 성별 표시를 안 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굳이 사람이 살면서 법적으로 성별이 요구되는 직장도 있겠지만 그게 꼭 필요하지 않은 직장도 있잖아요. 성별정정 요건을 완화하는 것도 필요하죠.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빈곤이나 취업, 노동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경원 :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요건과 관련해 법률이든지 판례든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지금 현재로선.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요건으로 허가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그보다 엄격하면 허가를 안 해주는 나라고요. 대법원의 경우 성별정정은 위에서 허가해주는 거고, 허가해주기 위해서는 판단을 해야 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판단 기준을 굉장히 엄격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가장 큰 틀은 이게 권리라는 걸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법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권리, 거기서 도출되는 게 내가 나의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다른 사람과 차이 없이 내가 원하는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요. 세계 인권 선언에서도 그렇고 우리 헌법에서도 반영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 권리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면 의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게 내 권리인데,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이것도 수술하고, 저것도 수술하고, 이것도 고쳐야 해? 이게 정말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정당한 요건이야?“

결국, 프레임을 먼저 바꾸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애썼으니까 위에서 허가해주는 게 아니라, ‘너희 권리를 제한할 건데 이런 거로 제한하는 게 정당화될까‘라고 고민해야 하죠. 그래서 국제적인 추세는 최근에 아르헨티나 덴마크 몰타 등 6개 나라는 아무 조건이 없어요. 일종의 신고에요. 내가 ’성별을 바꿉니다‘라고 신고를 하면 ’바꿔줄게‘ 이런 식이에요. 가령 덴마크 같은 경우는 성별을 바꾼다고 하면 6개월 정도 숙련 기간을 둬요. 아일랜드는 이런 숙련 기간도 없어요. 아마 동성혼이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자기 결정권에 기반을 둔 성별정정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가 결정해서 하는 성별정정. 그쪽으로 방향이 바뀌지 않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한번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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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 외과 수술 자체가 되게 위험하고 평균 수명도 확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그런 걸 이렇게 법이 요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박한희 : 수술이 되게 위험하진 않아요. 수명이 확 떨어지지도 않고요. 트랜스젠더 오해 중의 하나가 ‘오래 못 산다’가 있는데, 모든 외과수술이 당연히 위험성이 있고 신체적 부담도 있지만 죽는 수술은 아니잖아요. 그것과 비슷하죠. 그렇지만 국가가 그런 수술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돼요. 우리 헌법은 신체의 자유와 운전성을 보장하는데 내 신체를 국가가 훼손하겠다는 거죠. 네가 너처럼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너한테 수술을 강제해서 너의 신체를 훼손하겠다는 거니까요. 사실상 국가가 외과수술을 강요하는 거예요. 이게 생식기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에 우생학적 절차처럼 국가가 불임수술을 강제하는 것과 같죠. 실제로 작년에 스웨덴 판결에서 트랜스젠더 수술 여건을 없애는 동시에 그동안 수술을 받았던 트랜스젠더에게 국가 배상을 해줬어요.

김민주 : 비교법적으로, 비교사회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가 성별정정과 관련해 특히 모자란 점이 어떤 지점이라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우리나라가 가장 특히 모자란 점은 이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요건인데, 우리나라는 미성년자가 성별정정을 못해요.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해요. 사실 이건 법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성인의 법률 행위가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행위죠. 심지어 법원에 따라서 이건 판사 재량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곳은 10년 전에 이혼한 아버지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해요. 다행히 최근 몇몇 법원들은 사유서를 제출하면 대체는 해줘요. 사람에 따라서 수술을 위한 돈은 사실 모으면 돼요. 그러나 부모님의 설득은 자기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모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절대로 허가를 안 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오히려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 요건 자체가 있는 건 정말 이상해요. 이건 정말 한국만 있거든요. 일본도 없는데 이게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최은빈 :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위해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신건가요?

박한희 : 사실 변호사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해서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법조인이 된 건 좀 두루뭉술해요. 들으면 이상할 수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회사 다니기가 싫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삼성엔지니어링 건설회사를 2년 다녔는데, 거기 규율이 되게 심하거든요. 항상 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해요. 머리가 귀만 덮어도 선배가 지나가면서 “한희씨 머리 좀 잘라야겠는데? 미용실 좀 갔다 오지.” 이래요. 저는 그런 것들이 되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로스쿨이나 의전을 생각했어요. 전문직을 가지면 좀 자유롭잖아요. 그러면서 나 같은 트랜스젠더, 성 소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전문직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은 뭘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의사는 정신과 의사를 생각했고, 변호사는 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의전과 로스쿨을 놓고 비교를 했는데, 의대를 다니는 친구가 의대는 규율이 빡세다 하더라고요. 의대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머리도 못 기르고, 슬리퍼도 금지하고, 반바지도 못 입게 하고요. 그래서 의대는 가면 안 되겠다, 회사랑 다를 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로스쿨을 가자고 선택했어요. 당시에는 운동적인 차원까지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단지 내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가지면, 사무실을 차렸을 때 어떤 형태로든 성 소수자 의뢰인에게 뭔가를 할 수 있겠다 정도였죠. 제가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던 것 같아요.

류태광 : 6개월은 짧으면 짧은 기간인데 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소송을 수행하셨다면 소송이 있을까요?

박한희 : 제가 처음 희망법에 들어와서 했던 게 기지국 수사에 대한 위헌 소송이에요. ‘통신비밀 보호법 제13조’ 또 ‘기지국 수사’라고, 소위 말하는 검찰이나 경찰이 사건 현장 인근에 일어난 모든 전화번호를 수집하는 수사가 있어요. 이게 희망법에서 2013년 첫 헌법소송을 했던 건데, 사실상 헌재에서 계속 묶어두고 있다가 이번에 공개변론을 열었어요. 제가 들어온 7월에요. 주심은 한가람 변호사님이었는데, 변호사님이 이거같이 하자고 해서 들어 간지 일주일 됐는데, 헌법 소원 변론 요지서를 써오라고 했어요. 정말… 변시할때도 그런 건 안 쓰거든요. (일동웃음) 헌법재판소 변론 요지서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써오라고 해서 써와서, 첨삭 받고 고치고 고쳐서, 어떻게 했어요. 성 소수자 인권은 저도 알고 있고 활동하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건 정보 인권적인 내용이니까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7월이면 대통령을 탄핵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인데, 말로만 듣던, 그 대법정에 공개변론을 하러 간 거예요, 제가. 저는 아직 수습이니까 방청석에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2개월 만에 거기 간 거니까, 엄청 떨렸죠. 그래서 가족들한테 전화하니까 너 벌써 거기 가냐고 하더라고요. (일동웃음) 왜냐하면 헌법 소송은 안 하면 정말 안하거든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되니까요.

류태광 : 정치, 경제, 언론 등 산적한 적폐가 많기 때문에 성 소수자 인권은 ‘나중에’라는 주장도 일각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주장에 하시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박한희 : 성 소수자 인권이라는 게 마치 성 소수자만 챙기는 것 같지만, 어떤 인권이 하나의 인권으로 분리 돼서 떼놓고 단계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권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차별도 사회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죠. 소수자 인권이 말하는 건 결국 차별이에요, 사회적인 차별. 사회적으로 누군가가 차별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왜 나중이 있고 지금이 있죠? 오히려 그게 가장 큰 적폐가 아닌가. 권력적 차별이나 경제적 차별, 노동 차별 등이 다 복합해서 일어난 게 이전 정권의 문제였는데, 그 차별이라는 적폐를 무시한 상태에서 사회적 경제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겠느냐 싶어요. 사실 그건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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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 법조인으로서 성 소수자 인권 실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성 소수자 운동 전체에서 얘기할 수 있는 건, 저번 제네바 UPR(Universal Periodic Review)에 가서 얘기한 건데, 일차적으로는 군형법 추행죄죠. 우리나라는 징집국가로써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고 그 군대 문화의 영향이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군형법 추행죄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사회적 조항이에요. 군형법이 지금은 처벌하고 있지만, 처벌을 안 한다고 해도 성 소수자는 언제든지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이등 시민이 될 수 있는 상징적인 조항이기 때문에 이거는 무조건 없애야 할 조항이에요.

두 번째로는 입법과제로써 얘기할 수 있는 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에요. 이건 벌써 10년째 얘기되고 있지만 아직도 제정이 안 되고 있어요.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은 기본 틀인 것 같아요.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약속받고, 동시에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틀이 깔려야지, 그때부터 최소한 구체적인 제도적 보장으로 무엇이 필요할지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평등이라는 틀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뽑자면, 과제로써 하고 싶은 건 교육. 교육부에서 만든 국가 수준의 성평등 성교육 표준안은 성 소수자 얘기가 전혀 없어요. 사실 우리는 교육부에서 만든 교육안에 대해 계속 폐지 운동을 하고 있어요. 표준안은 ‘동성애는 인권의 문제이므로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음’이라고 앞에 써놨어요. 동성애는 인권과 사회 이런 데서 가르치지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죠. 교육현장에서 교육이 되어야지, 그 사람들이 나중에 더 자라서 어떤 의견을 실제로 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의견이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김민주 :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십 년 째 공회전하고 있는데 이 제정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한희 : 되게 복합적이겠죠. 사실 처음에 가로막은 건 재계와 교회의 반대였어요.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아니었죠. 오히려 재계의 반대가 최종적일 거라 생각해요. 비정규직 차별 금지나 학력 차별 금지 등 지금 나오는 블라인드 채용처럼 이런 걸 하면 저항감이 있으니까요.

정부랑 국회가 의지가 없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해요. 사실 필요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정부는 왜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차별이라는 게 지금 되게 복잡한 문제라서요. 사회적으로 우리가 평등이 아직 확산이 안 됐을 수도 있어요.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는 동의하지만, 어떤 게 정말 차별받지 않는지에 대한 의식도 필요한 거니까요. 사실 그걸 끌어올려야 하는 정부는 사회적 논란, 사회적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고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동력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 노동, 장애, 이주, 성 소수자, 거의 모든 분야의 114개 단체가 연대하고 있어요. 전방위적으로 캠페인과 서명운동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어요. 대중인식 개선과 차별이 뭔지에 대한 간담회도 하고, 정부 대상으로 법안을 만드는 것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공회전하는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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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광 : 얼마 전 지자체가 제주퀴어문화축제나 퀴어여성체육대회를 위한 장소를 불허한 사건이 있었는데, 성 소수자 차별은 아직도 가시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박한희 : 제주퀴어문화축제는 오늘이 집행정지기일이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제가 직접 하지는 않았고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제가 기획단이에요. 제가 차별받은 당사자에요. (일동 웃음) 불허 통보를 받고 실제로 면담도 갔어요. 이건 지금 인권위 진정을 써서 내서 인권위 진정에 들어가 있는 상태고요. 얼마 전에 궐기대회도 했었는데, 그것도 항의하는 것이었죠.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살면서 너무나 편하게 가는 체육대회가 성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허를 당한 것은 일상에서 차별을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체육대회는 학교 운동회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열리거든요. 이런 것들을 좀 더 의미를 살리고 얘기하면 우리가 지금 어떤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건지 얘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일을 당하니까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없어서 내가 무슨 차별을 받는지 확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넓은 권리에서 ‘건강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주거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 닿지 않는데, ‘내가 공을 차고 싶은데 못 차게 한다.’라고 하면 피부로 느껴지니까, 좀 더 얘기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는 것 같고요.

최새얀 : 로스쿨에서도 LGBTQ를 삶으로 사는 법조인들도 많을 텐데, 미리 경험한 입장에서 예비 퀴어 법조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한희 : 할 말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로스쿨이 생기면서, 로스쿨이 LGBT퀴어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실제로 많이 가거든요. 일종의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거죠. 전문직이라는 직업적 안정성, 사무직을 가졌을 때 비해서 전문직을 가졌을 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로스쿨을 많이 오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도 이 법조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어요. 로스쿨을 들어왔지만 들어와서 커밍아웃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했었거든요. 로스쿨 들어온 이유는 그냥 커밍아웃 안 하고, 남자 변호사로 살면서 성 소수자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왔어요. 실제로 저 주변에 그냥 법조인이 아닌 커뮤니티의 트랜스젠더분들도 “너 커밍아웃하면 끝난다, 너 법조계에서 대체 어떻게 커밍아웃할 것이냐, 말이 되냐“라고 했는데, 끝나진 않더라고요. 당연히 그게 항상 좋은 결과로 나온다고 볼 순 없지만, 그냥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게이 같은 경우에는 게이 법조회라고 있어요. 퍽퍽한 법조계 현실에서 게이다움을 잃지 말기 위한 게이 법조회가 있거든요. 한 오십 몇 명 있어요. 혹시 게이분이면, 거기를 가입해도 좋고. LGBT 법조회도 만들고 싶은데 아직 못 만들고 있지만, 아마 점점 만들어질 거예요. 현재 로스쿨생이나 현직 법조인을 대상으로 여름마다 ‘LGBTI 법률가대회’도 있어요. LGBTI 법률가들도 법조회의 형태로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고요. 어쨌든 본인이 항상 모든 걸 드러내고 살 순 없지만, 어떻게든 숨을 틀 수 있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 그런 것들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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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빈 :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따로 있으셨나요? 질문지에 없어서 아쉬웠던 점, 말하고 싶었던 게 있으신가요?

박한희 : 저희 희망법은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일동 웃음) 민변 회원분들 많이 후원해주세요.

월, 2017/11/0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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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 18년 동안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노동 재판 실무 편람과 국내 최초의 근로기준법 주석서인 근로기준법 주해 발간에 큰 역할을 했어요.
  • 그뿐인가요. 판사면서도 SNS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동료 판사들이 옹호하며 나서 징계를 받지는 않았어요.
  •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어요. 2013년에는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을 두고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했거든요.
  • 법원 내 사법개혁 논의를 주도해 온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도 했어요. 지금은 민변 회원이에요.
  • 요즘 일부 언론이 정부 요직을 장악한다는 바로 그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을 모두 관통하고 있는, 그야말로 ‘핫’한 나는, 최은배 변호사(사법연수원 22기)입니다.

 

 

이혜정 : ‘판사 최은배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페이스북 글이 먼저 떠올라요. 당시 응원이나 비판도 많았겠지만, 특히 법원 내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최은배 : 사실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크게 번질 줄 몰랐어요. 그런 부분도 생각 못하고 올렸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죠. 글을 쓸 때는 페이스북 친구 200명 정도가 보고, 서로 공감하고 말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글을 밤 9시쯤 올렸는데 이틀 후 조간신문부터 조선일보에서 “이 사람이 이랬다더라”하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제 일이 더는 제 일이 아니게 돼버린거죠.

그때 사용했던 말 자체는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어요. 당시 이상득 의원이 미국 대사한테 했던 말이거든요. 이상득 의원이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은 ‘to the core’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미동맹에 대한 의견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걸 약간 비틀어서 “그래서 FTA 했나보다” 한 거였어요.

 

사실 제가 FTA나 통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FTA에 대해 오해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국회 비준 절차가 충분한 토론 없이 날치기로 진행됐고, 시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잖아요. 국가 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농림수산업을 희생시키고 공업, 특히 자동차를 더 팔기 위해서 우리 경제 안에서 형성되는 부를 밖으로 이전하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로 서민들이 더욱 고통당한다는 공감도 있었고요. 공직자로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문제는 구분되는 일입니다. 지금도 공무원법 집단행동 금지 조항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부정선거의 악몽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법에 못 박았지만, 사실 정치적 중립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거든요. 공직자가 의무를 다하는 것과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양립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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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제가 무슨 말만 해도 반응이 득달같이 일어나는 상황이 됐어요. 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어딘가 휘말릴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아닌데요. 2012년 대선 때 대선후보 토론회를 보고 페이스북에 “국가원수가 되면 외신 기자 앞에서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하니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썼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법원장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판사로서 나라 일을 한다고 앉아있는데, 정말 판사가 말을 못하게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2013년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을 때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걱정되고, 누구하고 토론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하게 페이스북에 올려봤다가 사단이 났어요.

 

남이 하는 말을 내 뜻과 맞지 않다고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떤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틀리거나 잘못된 의견이라면 자연히 사라지겠죠. 그런 사회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헌법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이렇게 네 가지 자유를 규정해요. 앞의 두 가지는 개인적인 표현이고 뒤의 둘은 집단적인 표현이죠. 40년 전에 처음 헌법을 공부할 때는 왜 ‘결사’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귀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모여서 노는 것도 결사이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모이고 동창 만나러 모이는 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후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룰 때에야 이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인지를 깨달았어요. 어느 조직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상대의 생각을 재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사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연결되더라구요. 우리나라는 반공이라는 이념 하나로 다른 의견을 완전히 배제해왔고, 또 이렇게 얻은 권력이나 이득을 지키려는 습성으로 항상 적을 만들어왔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같은 모임은 ‘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잣대나 도구가 돼요. 옛날에는 ‘빨갱이’라는 말로 배제하면 다 통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은 말에 반응해주지 않으니 어떤 소수자를 만들어서 배제해요. 소수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상대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극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혜정 : 일반 시민들은 비슷한 정치적 표현으로 실제 기소된 분들이 많아요. 민변에서 표현의 자유 기금으로 도와드리기도 하구요.

 

최은배 : 표현의 자유에 대해 형법으로 제한하고 민사상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게 분명히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프랑스 식 관용, 즉, 똘레랑스의 훈련이 되면 사회적으로도 나 역시 저런 상황의 당사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프랑스는 시민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의 경험이 쌓였고, 2차대전 같은 비극의 피바람도 겪는 과정에서 똘레랑스를 확립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도 동족상잔, 이념갈등 같은 피바람을 겪을 만큼 겪었는데.. 우리는 똘레랑스로 서로를 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요.

 

정치나 선거의 영역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명분은 대체로 ‘선거가 혼탁해진다’ 이런 얘기잖아요. 옛날에는 일반 시민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많지 않았죠.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같이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뿐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설을 한다든가 그냥 확성기나 스피커에 대고 말하는 것,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것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퍼스널 미디어가 발달했고, 이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건, 보기 싫거나 듣고 싶지 않으면 피하면 되잖아요.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 서구에서도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옹호하는 등 반인류적인 발언,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처벌해요. 이런 부분은 제한되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정당한 발언을 했음에도 ‘혐오발언’으로 몰려 처벌당할 위험도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이론이 충분히 쌓여야겠죠. 혐오발언과 혐오발언이 아닌 것을 구분할 충분한 기준이 있다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발언에 대해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나도 어떤 점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기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학교 현장에서는 앞만 보고 가르치잖아요.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이런 게 행복이다, 노력하면 오늘은 괴로워도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 이런 이야기 대신 내가 실패를 겪거나 약자가 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죠.

그래서 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의 삶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어요. 다들 자라서 노동자가 될 텐데 노동3권 같은 기초적인 권리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죠. 노동자의 권리도 가르치고, 토론과 회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면모도 겪어보게 해야 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걸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요.

 

법률가로서의 소양에도 문제가 있죠. 예를 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단체법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차이가 있어요. 총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토론하고 결의하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 결의는 무효잖아요. 이런 과정이 민법의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배우거나 겪어보지 못하다가 법조인이 되어서야 주입식으로 배우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아요. 그나마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그 세대 때부터 조금씩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이혜정 : 그런데 오랜 법관 생활 후 어떤 계기로 민변에 가입하시게 되었나요.

 

최은배 : 제가 민변에 가입할 때 민변 회장이셨던 한택근 변호사님이 저와 연수원 동기입니다. 사법 연수원 때부터 같이 지냈고, 모임도 같이하고 해서 저는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가입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변 가입을 안 하면 한택근 변호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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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법원에 있다가 나와서 변호사가 되면 공직 출신이기 때문에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법원에 있을 때도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때도 비슷한 프레임이 있었어요. 보통 법원행정처 업무로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의 법관들이 우리법연구회를 탈퇴하고는 했어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이유가 많았죠. 그런데 저는 법원행정처에서 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이혜정 : 판사 재직 시절에 바라보았던 민변은 어땠나요?

 

최은배 : 사실 제가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본적으로 민변에 아는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제 시각이 일반적인 판사들의 시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때부터 조영래 변호사님을 비롯한 정법회 변호사님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이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한 저는 민변이 모든 변호사의 가치를 포함할 수 있다고 봐요.

70년대에는 사법시험을 통과해 법조인이 되는 것이 운동의 차선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8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87년 이전에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뭔가 양심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법시험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시절에 제가 사법시험을 치르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제 주변 사람들도 지금과 달랐을 거고, 제 생각도 지금과 달랐겠죠. 87년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사법시험을 부담 없이 치를 수 있게 되었고, 저도 주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혜정 : 그렇다면 법원에서 판사로서 민변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민변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민변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최은배 : 저는 법관 생활 하면서도 노동법을 많이 다뤘고, 민변에서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법원에 있을 때터 노동위원회 위원들과 이미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점이 좀 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민변에 막 가입했을 때도 낯설거나 겉도는 느낌은 받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법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전관예우’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거든요. 새내기 변호사님들은 민변 활동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이랑 같은 스텝으로 함께하기는 어렵더라고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비슷한 법조경력에 잘 알고 지냈던 분들이 여기서는 너무 높은 자리에 계세요. 회장 하시고, 총장 하시고(웃음). 그렇다고 막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과 같이 다니기에는 또 세대차이가 나고요. 활동하면서 그런 부분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지만, 다들 너무 잘해주시기 때문에 민변에서 늘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혜정 : 혹시 판사일 때 할 수 없었던 일 중에, 민변에서 회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은배 : 법원에 있을 때는 사실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았거든요. 판사를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여기면서 언젠가 변호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판사로 계속 일할 생각이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로 사직을 결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변호사가 되었고요. 판사로 일하는 동안에는 변호사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구사항을 주로 들었죠. 피드백이나 모니터링 중심이었고요. 내가 변호사가 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준비를 하지는 못했고요.

대신 법관으로서 법원을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있어요. 법원을 나오면 변호사가 되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죠. 민변에서는 사법위원회가 법원 개혁에 대한 일을 주관하고 계시죠. 저보다 전문성을 갖춘 분들도 계시고요. 저는 법원 안에서도 사법제도나 앞으로 법원이 추구해야 할 지향보다는 재판을 잘 하는 것, 어려운 사람이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를 위한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법제도나 외국의 법관 양성, 외국의 사법 인사 제도 같은 분야는 저 말고도 전문성을 갖춘 분들이 많으니 오히려 제가 따라가기 바빠요.

 

이혜정 : 판사하고 변호사를 경험하셨는데, 그 중 어느 쪽이 더 적성에 맞으신가요.

 

최은배 : 판사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입니다. 사실 가정경제면에서 보자면 월급은 모자란 편이죠. 물론 판사가 받는 월급은 공무원 중에서 최고액에 가깝고, 흔히 ‘월급쟁이’라 말하는 분들에 비하면 많기는 합니다만, 반대로 변호사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니 능력에 따라서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역으로 경기 부침에 따라 집에 월급을 못 가져다 줄 수도 있더라고요. 저도 작년에 한 달 반 정도 집에 월급 가져다주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다행히 제가 노동법에 특히 전문성이 있다는 약간의 이름을 얻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는 면이 있어요. 그 덕에 다른 부장판사 출신들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인데, 흔히 아기가 태어나서 사주를 보면 관운이 있다, 재물 복이 있다, 혹은 장수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준 작명소에서 제 사주를 봤더니, 행정 관료가 될 거라고 했답니다. 법관이 아니고요.

 

이혜정 : 판사는 변호사가 서면으로 정제하고 정리한 언어로 사건을 접하고, 변호사는 정제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사건을 만나게 되죠. 양쪽을 경험한 지금, 느낌이 어떤지 궁금해요.

 

최은배 : 일반론적으로 답하자면, 저도 절실하게 깨달았죠. 법원에 있을 때 변호사인 친구들이 “변호사가 서면으로 법원에 제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변호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법률 언어로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변호사는 사건의 전후와 쟁점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이성으로 파악하는 얘기고요, 사실 판사는 괴로워요.

봐야 하는 서면도 많고, 재판도 많고, 일에 시달리고, 짜증도 나고, 변호사하고 싸우기도 하죠. 가끔은 변호사의 서면을 받았을 때 “이렇게밖에 못하나”, “이런 신청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하나,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제로 법정에서 “그쪽에서 받아봐라, 당신이 요청한 그 자료 받으면 제대로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판사일 땐 제가 판단하기에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취하시키라고 하기도 했는데, 변호사가 되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 편에 서게 되더라고요. 의뢰인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는 “판사한테 오히려 인상만 망가진다”고 말리기도 하지만요.

 

변호사가 되어보니 알게 된 점은, 법원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기관이 법원의 명령을 핑계로 미룰 수 없어요. “판사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고요. 법원의 명령이 강력해요. 실제로 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영업비밀이라고 자료 요청을 거부할 때 법원이 명령해주면 훨씬 쉽게 풀리잖아요. 판사일 땐 몰랐는데 의외로 법원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법원이 강하게 나갈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변호사들이 많은 부분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법원이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 많아요.

 

이혜정 : 작년에는 변호사님이 민변에서 신입변호사를 위한 강연도 하셨죠. 판사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좋은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인지, 후배 법조인들에게 팁을 주시다면.

IMG_0312최은배 : 사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내용 없는 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면은 공들인 만큼, 공부하고 쌓아온 실력만큼 나오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판사 입장에서 가장 보기 편한 서면을 내는 사람들은 부장판사 출신인 변호사가 직접 쓴 서면이에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자기 판결문을 쓰듯 써 낸 서면이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판사를 경험할 수 없고, 또 부장판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잖아요. 그러니 이건 특별한 일부의 이야기죠.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컴팩트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이야기 많이 하는 게, 서면 60페이지씩 써 내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고민하는 만큼 정제된 서면을 쓰게 됩니다. 분량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판결문도 너무 긴 판결문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읽을 만한 판결문이 더 좋고요. 짧게 쓴다고 생각도 짧은 건 아니에요.

둘째는 국어 실력입니다. 법학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그 변호사를 가르친 국어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부장판사가 되고 남의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나이 드신 변호사님들 중에 서면의 문장이 항상 ‘것입니다’로 끝나는 분들이 있어요.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게 모든 문단에 나와요. 그러면 읽는 입장에서 지쳐요. 최근 문장 교정하는 법을 다룬 책이 있는데, 전문교정인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적, 의, 것, 들 이 네 가지만 주의하면 훨씬 깔끔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중언부언하는 서면, 보여주기 식으로 분량만 길게 쓴 서면, 습관적으로 문장에 군더더기가 붙어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면. 이런 글쓰기와 국어 실력 문제가 두 번째 문제예요.

세 번째가 법학이론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공부를 충실하게 한 만큼 장기적으로 실력차이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사법시험 세대에 빗댄다면, 민법 총칙 교과서 네 권을 다 읽은 사람과 수험서로 본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길게 보면 노동법을 다룰 때도 민법을 성실하게 공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정치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혜정 : 서면이 중요하다, 판사님도 정성들인 만큼 본다, 글 잘 쓰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죠. 그런데 가끔은 저 수많은 사건과 기록을 판사님이 정말 다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최은배 : 기본적으로 눈에 들어와야 더 읽게 된다는 건 맞아요. 사실 세 페이지 정도 넘기다가 덮게 되는 서면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했던 말 또 내는구나, 상대방이 서면 써냈으니까 반박하겠지’ 지레짐작으로 안 본 서면도 있었고요. 그런 재판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서면이 몇 개 안 나와요. 소장, 답변서, 답변서에 대해 제출한 원고의 서면, 그리고 끝이죠. 나머지는 감정이 필요할 때, 혹은 중요한 증거 조사 결과가 밝혀졌을 때 보면 되고요.

민사재판도 재판이 수십 차까지 길어지는 재판이 많고 변호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자기가 원고라면 첫 번째 변론기일, 증거조사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법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이 두 가지이고, 시간이 모자라 똑같은 말 그대로 쓴 똑같은 서면 내는 것보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 싶어요. 변론의 기술보다 강력한 건 진실이에요. 사실관계가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글도 간단히 핵심만 전달하면 되죠. 그게 아닌데 어떻게든 돌이키고 만회하려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고 변명처럼 느껴집니다.

 

이혜정 : 지금 민변 활동 중에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노동법 전문가로서 최근 통상임금 판결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은배 : 저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사용자 입장이 되었어요. 도발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사용자가 큰돈을 버는 것은 위험부담을 떠안는 대가 아닐까요? 기업이 성공과 실패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사업적 위험을 감수한 결과 성공하여 큰돈을 벌었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사업 기반이 모두 마련되어있어 땅 짚고 헤엄치면서 들어오는 돈만 챙기는 기업도 있어요. 특히 지금의 통신사 같은 기업들이요.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CEO는 앉아서 1억 이상 급여를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스톡옵션으로 수십억씩 챙겨가기도 하죠. 그런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주주들도 마찬가지고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기업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기업 그 자체가 기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세팅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사람의 조직과 사업 기반에서 재화가 생산되고, 용역과 재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의 조직체고 용조물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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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기업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비용’ 취급하면서 기업 그 자체의 보전만을 가치로 삼고 있어요.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돈입니다. 매출이 적어서 임금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하더라도 그게 정당한 사업의 결과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상한 일이 아니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두는 유보금, 예비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기업에서 실제로 일을 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의 절반도 안 된다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대기업의 순수익 중 일부는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들여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 분배해줘야죠. 결국 임금, 세금, 상품 원가를 제하고 나면 주주가 가져갈 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주주가 자본을 투입한 것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보상해주는 게 맞지만, 회사가 주주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주주자본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 나타난 극단적인 이론이에요. 지금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있다는 게 정설이에요. 기업의 기반은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첫째, 회사의 사업에 노동을 투여하는 노동자가 둘째입니다. 자본은 마지막이에요. 소비자, 노동자,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기업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기업과 노동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회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는 비용 지출을 발생시키는 대상으로만 보고, 이윤이 안 나면 인건비를 가장 먼저 깎아요. 일을 할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기업의 존재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공헌은 ‘비용’으로 환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판결을 본다면 임금을 더 주는 바람에 적자가 생겨도 그 때문에 기업이 망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사람이 모이는 조직체이니 이 문제도 사람이 해결하겠죠.

 

이혜정 : 마지막으로, 요즘 법원개혁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가장 시급한 사법개혁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최은배 : 법원 내부의 문제라서 국민들이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로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 문제가 있어요. 기업에서도 직급별로 권한이 구분되어야 하잖아요. 판사도 스스로 협의회를 구성해서 의견도 내야하고, 사법 현장에서 대법원장 개인의 판단에만 근거하여 행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러 판사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권력이나 권한을 분산해야 해요. 지금은 전국의 모든 법정이 일사분란하게 의자 개수까지도 대법원의 결정을 따르고, 법원장은 법원 안에서 기금 운영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권한을 모두 분산시켜야죠. 연방제 국가는 주 법원과 연방법원이 완전히 달라요. 우리나라도 법원 자체적으로 특색 있는 법정도 만들어보고,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의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법원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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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법부가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판사 수 늘리고 법정 늘리고 법원 많이 만들어서 국민이 재판을 받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게 가장 급선무입니다. 판사나 사법부의 틀도 국회의 입법에 의해 결정되고, 행정부는 공무원의 정원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사실상 검사가 민사재판을 하고 있거든요. 판사가 모자라니 민사재판을 진행하는데 오래 걸려서 재산 분쟁이 일어나면 사기, 횡령, 배임 같은 형사 사건으로 해결하려 해요.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면 재산 문제나 개인 분쟁을 민사 재판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하는 많은 일을 법원이 가져와야 하고, 그러려면 법원이 경찰서만큼 많아야 해요. 경찰서는 자치구마다 하나씩 있잖아요. 법원이 인구 50만명당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 검사가 형벌로 다스려 사회 질서와 사법정의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금, 2017/09/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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