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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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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8/09/07- 10:00

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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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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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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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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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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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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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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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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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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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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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師之妄語

 

不信憎嫌甚(불신증혐심)

恒言愛怨讐(항언애원수)

何緣前後異(하연전후이)

妄語滿其頭(망어만기두)

 

牧師의 거짓말

 

不信 미워함과 싫어함 심하며

늘 원수 사랑하라 말씀하시네

무슨 까닭으로 앞뒤가 다른고

거짓말이 그 머리통 가득하다.

 

<時調로 改譯>

 

不信을 憎嫌하며 원수 사랑 말씀하네

어떠한 까닭으로 앞뒤가 같지 않은고

오호라! 거짓말일랑 머리통 가득하다.

 

*妄語: 거짓말 *憎嫌: 미워하고 싫어함 *恒言: 늘 말함. 늘 하는 말 *前後: 앞뒤.

 

<2018.7.9, 이우식 지음>

월, 2018/07/0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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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原論讀後

 

誰云人被造(수운인피조)

聖經失其光(성경실기광)

進化今連續(진화금연속)

崇神莫作羊(숭신막작양)

 

‘種의 起源’을 읽고 나서

 

사람은 지어진 거라 뉘 말하는가

聖經이 그 빛을 잃고야 말았도다

進化 지금도 죽 이어지고 있으나

귀신 섬기는 羊은 되지 말지니라.

 

<時調로 改譯>

 

사람 被造物 아니니 聖經이 빛 잃었도다

차츰차츰 변하는 일 지금도 죽 이어지나

귀신을 숭배하는 羊이 되어선 안 될지라.

 

*種原論: 종(種)의 기원(起源). 영국의 生物學者 다윈이 생물의 진화(進化)를 밝힌

책. 자연 선택(自然選擇) 진화(進化)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으며, 생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59년 간행하였다 *進化: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

달하여 감. 생물(生物) 생명의 기원(起源)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변해 가는 현상

*連續: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지거나 지속 *崇神: 신(神)을 높여 소중히 여김.

 

<2018.7.9, 이우식 지음>

월, 2018/07/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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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泠浦(청령포)

 

木石懷悲意(목석회비의)

悠悠一曲江(유유일곡강)

君王何處去(군왕하처거)

蒼昊鷺飛雙(창호로비쌍)

 

청령포에서

 

나무도 돌도 슬픈 뜻을 품은 듯

유유히 흐르는 한 줄기 굽은 江

임금님께서는 어디로 가셨는가

푸른 하늘 날으는 한 쌍의 白鷺.

 

<時調로 改譯>

 

목석도 품은 悲意 유유히 흐르는 曲江

朝鮮의 六代 임금 그 어디로 가셨는가

蒼天을 훨훨 날으는 한 쌍의 해오라기.

 

*淸泠浦: 朝鮮의  六代  임금  端宗이  魯山君으로 格下되어 유배되었던 *悲意:

슬픈  뜻.  또는  슬퍼하는    *悠悠: 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으며  느림.

아득히 멀거나 오래됨 *君王: 임금 *何處: 어디 *蒼昊: 창천(蒼天). 푸른 하늘.

 

<2018.7.9, 이우식 지음>

월, 2018/07/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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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獄某人士

 

避火先奔逸(피화선분일)

何爲入沸湯(하위입비탕)

輕猫逢大虎(경묘봉대호)

晝夜獨多忙(주야독다망)

 

감옥에 들어간 어떤 人士

 

뜨거운 불 피해 먼저 달아나더니

어찌하여 끓는 물 가운데 들었소

고양이 깔보다가 큰 범 만났으니

밤이건 낮이건 홀로 썩 바쁘겠소.

 

<時調로 改譯>

 

불 피해 달아나더니 어찌 沸湯에 들었소

고양이를 깔보다가 큰 범 만나게 됐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매우 바쁘겠소.

 

*入獄: 감옥에 들어감.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奔逸: 뛰어서 도망감. 빨리 달림.

멋대로 행동함 *沸湯: 끓는 물 *大虎: 큰 호랑이 *晝夜: 밤낮 *多忙: 매우 바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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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隣叟(권인수)

 

孩童嘲國法(해동조국법)

已久紀綱崩(이구기강붕)

出外持藜杖(출외지려장)

安身遂可能(안신수가능)

 

이웃 노인에게 권하다

 

저 어린애도 나라의 法 조롱하니

紀綱 무너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외출 땐 명아줏대 지팡일 지녀야

몸을 편히 함 마침내 가능합니다.

 

<時調로 改譯>

 

어린애도 法 조롱, 紀綱 붕괴 이미 오래

바깥으로 나갈 때는 靑藜杖을 지니셔야

육신을 편안히 함이 마침내 가능합니다.

 

*孩童: 어린아이. 국자(鞠子). 동치(童穉). 동해(童孩). 유아(幼兒). 幼者 *已久:

이미 오래됨 *紀綱: 규율과 법도를 아울러 이르는 *出外: 외출(外出) *藜杖:

청려(靑藜).  청려장(靑藜杖).  명아줏대로  만든 지팡이 *安身: 몸을 편안히 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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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名假僧(모명가승)

 

寤寐貪錢貨(오매탐전화)

非人似夜叉(비인사야차)

僧官懸一命(승관현일명)

怨佛衆嘆嗟(원불중탄차)

 

어떤 이름난 땡추중

 

자나 깨나 돈을 탐내니

사람 아닌 夜叉와 같네

중 벼슬에도 목숨 거니

佛 탓하며 뭇사람 탄식.

 

<時調로 改譯>

 

자나 깨나 돈 탐내니 사람이 아닌 夜叉

저 중 벼슬 따위에도 저의 한목숨 거니

부처를 원망하면서 뭇사람 탄식한다네.

 

*假僧: 가짜  . 땡추중  *寤寐: 자나 깨나 늘 *錢貨: 돈  *非人: 사람답지  못한 사람

*夜叉: 두억시니.  八部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사나운  신.  염마

졸(閻魔卒) *僧官: 직(僧職). 법령, 수계(授戒), 관정(灌頂) 따위 儀式 寺院

운영을 맡아보는 僧侶의 직무 *一命: 하나의 목숨 *嘆嗟: 차탄(嗟嘆). 탄식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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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지만, 지난 623일 충남 아산에서 운영위원회/워크샵이 열렸다 한다. 정기 운영위원회를 겸해서 워크샵을 연다하고, 워크샵 안건 중에 운영위원회 발전방안이 있다 하길래 이미 지난 324일의 정관개정으로 인해 집행부의 들러리 지원기구로 (스스로) 전락한 운영위원회가 발전방안을 논의한다니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영위원들이 모여서 논의를 한다니 약간의 기대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발전방안에 대한 논의는 커녕,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전 운영위원 한명을 내가 발표한 정관개정 반대 성명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여러 명이 회의장에서 망신을 주며 퇴장시키는 횡포를 저지르는가 하면, 충북지부에 대해서는 정관 내규 어디에도 없는 사고지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충북지부/ 회원들에게 모욕을 줬다는 것이니

     이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참 모습인가? 연구소가 정치권 닮아 가는 모양이다. 회원 상대로 공작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 회원과 지부를 비토하고, 저네들 의견과 다르면 연구소를 와해시키려는 음해세력이나 적으로 낙인찍어 쫓아내기나 하고

     연구소에 정치에 야망이 있는상근자가 하나 있다더니 미리 정치권 입성 대비 연습을 하는건가? “민족문제연구소는 절대 정치와는 상관 없습니다라고 임헌영 소장님은 총회때고 어디서고 누누이 강조를 해 오셨는데

     아무튼, 그곳에 모인 운영위원(지부장)들과 집행부 상근자들은 도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있는 건지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끼리끼리, 저희들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모여 뭘 논의하겠다는 건지이게 파쇼아닌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날이 갈수록 합리성을 상실한 파쇼집단화 하는 것 같다.

     지난번 3월 정기총회 때도 내가 정관개정에 반대 발언을 시작하자 어떤 운영위원은 바로 내 앞자리에 서서 삿대질하고, 소리 지르며 발언을 방해하는가 하면, 의장은 연단에서 마이크에 대고 빨리 끝내라”, “3분 이내로 끝내라며 재촉하고

     어떤 다른 반대의견을 내려 하는 사람한테는 발언 시작한지 15초 정도만에 의장이 나서서 회비 냈어요?” 하며 발언을 제지하고, 발언자가 회비 냈다며 저항하자 곳곳에서 마치 미리 때를 기다린 듯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소동이 일자 의장이 발언자의 마이크를 빼앗고 퇴장시키라 지시하고

     정말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속속 벌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에서 정관개정 같은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반대발언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매도당하고 쫓겨나야 하는지, 지금이 3, 5, 통일주체국민회의 시절인지, 운영위원회에 지부의 고문, 지부장, 운영위원 등 간부, 일반회원, 심지어 배우자까지 다 참석 가능해도 특정 성명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전직 운영위원은 쫓아내야 하는지

     이민우 운영위원장과 그 자리에 참석한 운영위원들은 그게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의장 말씀 인용)

   

2018. 7. 10

회원 여인철

(, 9대 운영위원장)

 

 

 

 

수, 2018/07/1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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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稱有識者

 

巧言藏淺識(교언장천식)

刊布露虛名(간포로허명)

問汝知千字(문여지천자)

危亡筆舌耕(위망필설경)

 

自稱 똑똑한 사람

 

교묘한 말로 얕은 지식은 감추고

책 찍어 퍼뜨려 虛名은 드러내네

그대에게 묻노니 저 千字 아는가

필설의 生業이 망할 듯 위태롭다.

 

<時調로 改譯>

 

교묘한 말씀으로 얕은 지식은 감추고

책을 찍어 퍼뜨려서 虛名은 드러내네

묻노니 千字 아는가 筆舌耕 위태롭다.

 

*巧言: 교묘하게 꾸며 댐. 또는 그 말. 巧語 *淺識: 얕은 지식이나 좁은 식견 *刊布: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림 *虛名: 실속 없는 헛된 명성. 부명(浮名). 허문(虛聞).

虛聲 *千字: 천자문(千字文) *危亡: 몹시 위태로워 망할 것 같음 *筆舌: 붓과 혀란

뜻으로, 글과 말을 이른다 *筆耕: 붓으로 농사를 대신한다는 뜻으로, 직업으로

이나 글씨를 씀 *舌耕: 강연이나 변호 따위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을 生業으로 삼음.

 

<2018.7.11, 이우식 지음>

수, 2018/07/1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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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人(기인)

 

老病持金骨(노병지금골)

巖居樂赤貧(암거락적빈)

吟詩山鬼和(음시산귀화)

訪問不逢人(방문불봉인)

 

기이한 사람

 

늙고 또 병들었지만 고상한 풍채

바위 굴에서 살며 가난함 즐기네

詩를 읊으면 山 귀신이 화답하며

찾아오는 이 있어도 만나지 않네.

 

<時調로 改譯>

 

老病이지만 金骨 숨어 살며 安貧樂道

문득 詩를 읊으면 山鬼神이 화답하며

방문객 있다 하여도 만나지 않는다네.

 

*老病: 늙고 쇠약해지면서 생기는 병. 노질(老疾) *金骨: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풍채와 골격 *巖居: 속세를 떠나 山野에 숨어 삶. 암서(巖棲)* 赤貧: 썩 가난함.

 

<2018.7.11, 이우식 지음>

수, 2018/07/1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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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牧者與僧

 

牧者僧云罰(목자승운벌)

同威不信人(동위불신인)

耶蘇逢佛氏(야소봉불씨)

共泣淚盈巾(공읍루영건)

 

목사와 중에게 답하다

 

목사와 중이 罰을 가함 운운하며

믿지 않는 사람을 더불어 으르니

기독교 예수가 佛家의 부처 만나

함께 울어 눈물이 수건 가득하다.

 

<時調로 改譯>

 

罰을 가함 운운하며 불신자를 으르니

기독교의 예수가 佛家의 부처를 만나

둘이서 흘린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다.

 

*不信: 믿지 않음. 믿지 못함 *耶蘇: ‘예수’의 音譯語 *佛氏: 석씨(釋氏). 석가모니.

 

<2018.7.12, 이우식 지음>

목, 2018/07/1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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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事件再審判決

 

昨非今是事(작비금시사)

惡政抑衆民(악정억중민)

有罪爲無罪(유죄위무죄)

其間送幾春(기간송기춘)

 

어떤 사건의 再審 판결

 

과거의 그름이 지금엔 옳은 일

악한 정치가 뭇 백성 억눌렀네

罪 있음이 罪 없음이 되기까지

그사이에 몇 번의 봄을 보냈나.

 

<時調로 改譯>

 

과거 썩 그릇된 일이 지금에는 올바른 일

당시의 저 악한 정치 많은 백성 억눌렀네

有罪가 無罪 되기까지 몇 번의 봄 보냈나.

 

*再審: 재심사(再審査). <법률> 확정  판결로 사건이 종결됐으나 중대한 잘못이

발견되어 소송 당사자가 다시 청구해 재판을 함. 또는 그 재판. 형사 소송법에

  피고인(被告人)  이익을  위해서만  허용됨  *昨非今是: 전날엔  그르다고

여기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옳다고 여기게 됨 *惡政: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되게  하는  정치.  비정(秕政).  예정(穢政)  *衆民: 많은  백성 *其間: 그사이.

 

<2018.7.12, 이우식 지음>

목, 2018/07/12-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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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리왕’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장
일본인이 장악한 군산·김제, 식민지 농업수탈의 실상

김승은 자료실장

후지이 간타로가 1920년부터 3년간 조선 농민들을 동원해 간척한 군산 ‘불이농촌(不二農村)’은 현재 새만금 간척사업지의 절반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바닷가 척박한 토지를 600만 평의 드넓은 농지로 일구고, 100만 평 규모의 옥구저수지를 만들어 놓았으니 총독부가 식민지 농업 발전의 대표적인 성과로 요란하게 선전할 만한 사례였다.

조선총독부 ‘시정기념’ 엽서를 장식한 불이농장과 수리조합019

좌) 조선총독부 시정6주년 기념엽서. 1909년 후지이가 설립을 주도한 최초의 수리조합, 임익수리조합

우) 조선총독부 시정8주년 기념엽서.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과 대정수리조합

오사카 상인이었던 후지이 간타로는 미곡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해 1901년 후지모토합자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대한제국)에 건너와 일본 면포와 생활필수품을 한국으로 들여오고, 쌀과 쇠가죽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막대한 상업 이익을 올렸다. 한국으로 온 직후 후지이는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에 비해 땅값이 1/10에 불과한 조선토지에 눈을 돌렸다. 대규모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장을 경영하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투자대상을 토지로 바꾸었다. 1906년 전라북도 옥구‧익산 일대에 전북농장을 설립하면서부터 후지이는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착수했다. 1914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전국 각지에 이른바 불이농장(不二農場)으로 불리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후지이는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서선농장, 옥구농장, 철원농장 등을 연이어 설립하여 대규모 농업수탈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불이농장의 사업>(불이흥업주식회사,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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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 간척사업 경과와 성과를 소개한 책자.

중,우)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흙을 파서 나르고 돌을 쌓아 만든 제방

그의 농장개발은 저렴한 황무지를 구입하거나 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은 후 이주농민을 동원해 간척‧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농사개량을 통해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미를 징수하는 방식을 통해 확장되었다. 기간지를 경영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달리, 후지이는 저수량지나 황무지와 같은 미간지를 개척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수원확보가 관건이었다. 그가 농업경영 초기부터 대규모 수리사업을 입안하고 수리조합사업을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소유한 전북농장에는 임익수리조합, 서선농장에는 대정수리조합, 옥구농장에는 익옥수리조합, 철원농장에는 중앙수리조합, 어운수리조합이 설치되었다.

<농업 및 토지개량사업 성적>(불이흥업주식회사,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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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928년 대정수리조합에서 수확한 쌀을 도쿄로 이출하기 위해 쌓고 있는 모습
우) 중앙수리조합에서 수확한 쌀을 오사카로 이출하기 위해 검사하는 모습

또한 대규모 미간지를 간척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대부분 일본인에게 농지를 빼앗긴 농민이거나,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소작인들이었다. ‘영구 소작권 보장, 소작료 3년 면제, 간척 공사 임금 지급’이라는 불이흥업주식회사의 모집 광고에 현혹되어 호남과 충남에서 몰려든 농민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영세농민들은 약속과 달리 고율의 소작료와 각종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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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및 토지개량사업 성적>(불이흥업주식회사, 1929) 서선농장 간척사업에 동원된 농민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불이농장에서는 크고 작은 소작쟁의가 빈번했다. 그 가운데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에서는 1920년 중반부터 약 6년에 걸쳐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일제강점기 최대의 소작쟁의로 꼽힐만큼 조선 농민의 저항이 거셌다.
옥구농장에는 불이흥업주식회사가 ‘이상적 일본촌’ 건설을 목표로 일본인 이민사업을 직접 추진해 많은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출신지별로 마을을 이루어다 보니 불이농촌 안에 히로시마촌, 미나미사가촌, 나라촌 등 일본 지명의 마을이 생겨났고, 불이주택이라는 신식주택도 들어섰다. 
일본인 농업 이주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불이공립심상소학교(1925)와 불이심상고등소학교(1929)도 만들어졌다.

022

좌)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촌 고치현(高知縣) 출신 일본인 마을 전경(<塭叺十万枚を顧みて-卒業生指導の足跡>, 불이공립심상고등학교)
우) 불이공립심상고등소학교 발행 교재들

<고시추의)신농가일기>(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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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심상소학교 사환으로 근무했던 조선인 고시추(高時秋)의 일기. 면화재배를 하면서 불이학
교에서 일하던 그의 일기를 통해 불이농촌과 불이학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불이농장은 단순히 일본인 대지주나 농업회사가 경영한 대규모 농장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일제는 조선을 안정적인 식량공급지로 확보하고 일본인 농업 이민자를 수용하는 한편, 식민지 농업경영을 안정화함으로써 조선 농촌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식민지 농정을 앞장서 실천한 것이 후지이 간타로의 불이농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수리왕’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말부터 농업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불이흥업주식회사는 경영난에 부딪혀 1934년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갔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는 불이농장 등 도처의 자리잡은 일본인 농장들의 웅대한 모습과 주로 일본인 농장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 수리조합 건설 등을 농업 개발의 치적으로 내세웠다. 그 속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소작농이나 조선인 농가의 몰락을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이를 이어받은 ‘뉴라이트’ 세력은 이러한 일본인 농장의 성장과 수리조합과 같은 외형적 성장을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으로 내세우지만, 실상 김제‧군산 일대는 근대화1번지가 아니라 수탈 1번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목, 2018/07/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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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인천항 부두에 세운 대륙침략의 ‘거룩한 자취’ 기념비
경성보도연맹 기관지에 수록된 ‘성적기념지주(聖蹟記念之柱)’의 건립과정

 

한국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에 이른바 ‘반공검사(反共檢事)’ 오제도(吳制道)와 선우종원(鮮于宗源) 등이 주도해 결성한 ‘사상전향자’ 포섭기관이다. ‘보도’라는 말은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에 대해 전향과 자수를 통해 반공정신이 깃들도록 보호하고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그런데 보도연맹의 발상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것이 고스란히 재현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패망기에 존재했던 대화숙(大和孰)과 같은 전향자 사상교화단체도 그러하고, 세월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 7월에 결성한 — 그 이름까지도 그대로 닮은 — 경성보도연맹(京城保導聯盟)과 같은 존재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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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제94호(1941년 7월호)에 수록된 ‘성적기념비(聖蹟記念碑)’의 모습

경성보도연맹은 원래 경기도 학무과에서 주도하여 결성한 교외감독기관(校外監督機關)이자 학생선도기관(學生善導機關)으로, 여기에는 경성시내의 모든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그리고 인천 지역의 중등학교들이 망라하여 가맹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각 학교의 생도들이 ‘유약한 음탕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선도하고 교외의 교육환경을 정화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의 비상시국 하에서 학생들이 ‘불순한 사상’에 노출되거나 물들지 않도록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상당한 주안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1933년 12월 이후 매달 <보도월보(保導月報)>라는 이름의 기관지(1939년 3월부터는 <보도(保導)>로 명칭변경)를펴내자신들의활동성과와 기타 선전내용을 확산하는 매체로 활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한 <보도>가운데 제94호(1941년 7월호, 8쪽 분량)에 수록된 내용을 골라 이달의 전시자료로 소개한다. 먼저 경성보도연맹의 소재지가 ‘경기도 학무과 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연맹의 정체가 글자 그대로 ‘관변기구’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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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방한 당시 일본황태자 요시히토가 타고 온 군함 카토리(香取)

이 기관지의 제1면을 살펴보면, 제법 큼직한 규모의 낯선 기념탑 하나가 사진 속에 등장한다. 그 장소는 인천부두(仁川埠頭)라고 표기되어 있고, 일본황태자 요시히토(嘉仁)가 이곳에 발을 디딘 ‘거룩한 공간’ 인 탓에 설립된 것이라는 설명이 언뜻 보인다. 그가 우리나라를 찾은 때는 대한제국 시절 헤이그특사파견과 고종퇴위사건의 여파가 한창이던 1907년 가을의 일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무려 3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점에서 이러한 기념물이 느닷없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인천교육회(仁川敎育會) 측에서 이 탑을 세우는 취지를 적은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정천황 성적기념(大正天皇 聖蹟記念)의 어주건설(御柱建設)의 사(辭)

명치(明治) 40년(1907년) 10월 16일 당시 황태자로 계시던 대정천황께서 황공하옵게도 이 땅에 어상륙(御上陸)하시었도다. 이 존귀한 황저(皇儲, 황태자)의 어신(御身)으로서 대륙(大陸)에 제일보(第一步)를 디뎌 주시니 실로 우리나라 개벽(開闢)이래 공전(空前)의 성의(盛儀:성대한 의식)일지어다. 또한 전(全) 반도서민(半島庶民) 절대의 광영으로 영원히 후곤(後昆, 후세사람)에게 전해야할 창경(昌慶 : 빛나는 경사)이도다.
이래(爾來) 33 성상(星霜), 바야흐로 안으로는 황화(皇化:천황의 교화)가 십삼도(十三道)에 골고루 미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결실을 드디어 거두고, 밖으로는 황은(皇恩)이 멀리 만주(滿洲)에 이르렀으며, 더 나아가 동양평화확보(東洋平和確保)의 성전(聖戰)이 이에 4년, 팔굉일우(八紘一宇:전 세계가 하나의 집)의 황모(皇謨, 통치의 계책) 아래 대륙 몇 억(億)의 생민(生民)이 모두 황택(皇澤:천황의 은택)에 젖으리로다. 생각건대 여기에 이르면, 성덕(聖德)이 더욱 광대(廣大)해지고 어릉위(御稜威, 천황의 위세)가 두루 높아짐에 공구감격(恐懼感激:삼가 두려워하며 감격함)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다. 이에 인천부교육회원(仁川府敎育會員)은 상의(相議)하여 이 성적(聖蹟)에 기념의 어주(御柱, 기둥)를 세우고, 한없는 성덕을 영원히 우러러 받드노라. 때는 기원(紀元) 2600년 소화(昭和) 15년(1940년) 10월 16일이도다. 명(銘)하여 가로되,

황풍(皇風)이 육합(六合, 천지사방)에 끼치고,
만민(萬民)은 성택(聖澤)을 우러르네.
건덕(乾德:하늘의 덕 곧 천황의 덕)이 팔굉(八紘, 온 세상)을 엄호하니,
사해(四海)는 창평(昌平)을 노래하네.

 

요약하자면 1907년의 방한 때 황태자의 신분으로 요시히토(뒤의 대정 大正)가 몸소 인천항 부두에 발을 디딘 것은 일본제국이 아시아 대륙으로 세력을 뻗어가는 첫걸음이 되며, 이를 계기로 결국 조선과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 땅에 이르는 수 억의 사람들이 천황의 치세에 들어 황은을 입게 되었으니, 그러한 성스러운 곳에 기념탑을 세운다는 얘기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가 벌인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컬어 ‘동양평화를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 대목은 참으로 적반하장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보도> 제94호의 제3면에 수록된 인천항 부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이른바 ‘황군(皇軍, 일본군대)’이 상륙했던 유서 깊은 지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도 눈에 띈다.

 

016<매일신보> 1930년 6월 12일자에 수록된 경성신사 구내 ‘황태자어주가지처’ 기념비 설계도

한편, <매일신보> 1941년 6월 17일자에 수록된 성적기념비(聖蹟記念碑) 제막식 관련기사를 보면, 이 탑을 세운 1940년이 바로 ‘황기(皇紀; 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 2600년’이 되는 해 이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가로폭 106척(약 32.1미터)의 화강석 기단 위에 9척(약 5.9미터) 규모의 돌기둥을 포함하여 전체 높이 32척(약 9.7미터)에 달하는 기념탑이 그 자리에 들어섰으며, 공사 도중 땅 속에서 옛 부두의 잔교초석(棧橋礎石)이 발견되어 그것을 수습하여 기단 위에 보존토록 하였던 사실도 확인된다.
석주(石柱)의 전면에 보이는 ‘성적(聖蹟)’ 두 글자는 이른바 ‘창덕궁 이왕 은(昌德宮 李王垠)’이라는 신분으로 격하되어 있던 영친왕(英親王)의 글씨를 받아 새겼다고 알려진다. 요시히토의 방한 당시 한국 ‘황태자’로서 몸소 인천항 부두까지 나와 마중을 한 당사자였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제는 격하된 망국의 보잘 것 없는 왕자(王者)로 글씨를 헌상한 꼴이다.
여기에 1907년 일본황태자의 방한과 관련해 한 가지를 덧붙이면,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경성신사(京城神社) 구내에도 또 다른 종류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통감관저(統監官邸, 지금의 서울 예장동 2-1번지 구역)에 숙소를 정한 일본황태자는 방한 3일째에 남산 왜성대공원에 있는 갑오기념비(甲午記念碑) 부근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서울 시내의 전망을 감상한 일이 있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조차 크게 기릴만한 행적이라고 하여 1930년 9월 그 자리에 ‘황태자전하어주가지처(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라고 새긴 기념비를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기념물들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천년만년 갈 거라는 그네들의 염원과 달리 곧 일제는 자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인천항 부두에 세운 ‘성적기념탑’은 불과 4년 남짓에 식민통치가 끝나다 보니 이러한 시설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만큼 졸지에 사라져 버렸다. 대륙을 향한 ‘거룩한 첫 자취’는 실상 그들 스스로 침략과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첫 걸음이었다고 고쳐야 옳을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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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친일귀족 민영휘 일가의 만폭동 바위글씨

여러 해 전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그의 전기에서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거만한 포즈를 취한 총독과 총독 부인이 등의자(藤椅子)로 만든 순여(筍輿, 대나무가마)에 나눠 타고 금강산 탐방에 오른 모습이 나란히 포착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대한 몸집을 어깨와 팔뚝으로 지탱하며 서 있는 짚신 차림의 왜소한 조선인 가마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처로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권세를 지닌 누구에게는 신선놀음과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험난한 계곡과 비탈면이 끝없이 이어진 고생길을 뜻하는 곳, 금강산(金剛山)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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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예로부터 금강산은 무수한 금강예찬(金剛禮讚)을 쏟아내게 만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달라지는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그 풍경에만 주목한다면 금강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보기가 그만큼 더 어렵게 되고 만다. 금강산을 세계적인 명산으로 떠들썩하게 부각시키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 했던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또한 식민통치기와 고스란히 겹치니까 말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고 탐승회(探勝會)라는 이름의 여행단이나 아니면 개인단위의 탐방객들로 대규모 인파들이 골짜기마다 밀려들게 되자 이곳에 생업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음식점, 숙박업, 찻집, 기념품점, 사진사들이었지만, 드물게는 석공(石工)이라는 직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강산을 탐방한 기념으로 바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놓고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새로이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오니 그 역할은 일본인 석공의 몫으로 귀착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금강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고 가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일본황족 나카마쓰노미야(高松宮, 쇼와‘천황’의 동생)은 1926년 9월에 외금강 상팔담(上八潭)에 오른 뒤에 이곳을 등반한 기념으로 큰 문자를 암면에 새겨놓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에 수록된 만평가 최영수(崔永秀)의 「금강산 만화행각」이라는 연재물에는 금강산 계곡마다 그득한 이름새기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 금강산 속엘 다녀나간, 말하자면 탐승객들 중에 ‘미친 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볼품 있는 바위에 부질없이 성명 석자를 써놓고 간 자들을 하는 말이다. 그 좋은 경치, 그 아름다운 바위 위에 왜 그 더러운 이름들을 기록하였을까? 혹자는 금강산 족보(族譜)를 만들렴인지 삼대(三代)까지 이름을 써놓았고 혹자는 그것이 옥판선지(玉版宣紙)로 알았던지 휘호를 하고는 도장까지 찍어놓았고 혹자는 크게 혹자는 적게 또는 쓰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고 — 그리하여 일견 그 속에도 빈부(貧富)의 계급적 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보라 — 이 부질없는 사람들이여! 그렇게도 그대들의 이름을 날리고 싶거든 명함(名啣)을 수억 장 백여 가지고 비행기를 세내 타고 상공에서 뿌리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 아니냐 말이다.

이러한 일본인 석공의 존재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흔적으로는 외금강 구룡폭포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바위글씨가 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썼으며, 세 글자를 합쳐 그 길이가 무려 64척(尺, 약 19.4미터)에 달할 만큼 굉장한 규모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소가 소장한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조선산림회, 1926년 발행)에 실린사진을 보면, 이 글자 옆에는 ‘세존강생 이천구백사십육년(世尊降生 二千九百四十六年; 서기 1919년에 해당)’, ‘해강 김규진 서(海岡 金圭鎭 書)’라는 낙관(落款)과 더불어 시주(施主), 화주(化主), 감독(監督)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고, 그 말미에는 석공(石工) 스즈키 긴지로(鈴木銀次郞)라는 구절도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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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의 글씨 ‘미륵불’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 1926)

일찍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같은 이는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를 통해 ‘미륵불’이라는 글자에 대해 “구역이 날 뿐더러 이토록 아까운 대자연의 경치가 파괴된 것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해강 김규진은 실로 금강산에 대하여 대죄(大罪)를 범한 자라 하겠다”고 혹평을 더한 바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글자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그 시절 신문지상에 수록된 금강산 탐방기에는 한결 같이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는 대단한 꼴불견의 하나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 글자를 새긴 당사자가 하필이면 일본인 석공이었다는 점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스즈키 긴지로라는 인물은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경성에서 개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나미총독(南總督)이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휘호를 인왕산 병풍바위에 큰 글씨로 새길 때에 그 작업을 직접 수행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글자 당 사방 12척(약 3.6미터) 크기에 달했던 바위글씨는 해방 이후 간신히 표면을 깎아내긴 하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인왕산의 이마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큰 상처처럼 일제 패망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런데 해강 김규진이라고 하면 이 외금강 구룡연의 ‘미륵불’ 글씨만이 아니라 내금강 만폭동 쪽으로도 ‘법기보살(法起菩薩)’, ‘천하기절(天下奇絶)’,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여러 점의 큰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법기보살이라는 글자는 모두 합쳐 72척(약 21.8미터)에 달하는 것이며, 원본글씨가 하도 이색적이라 서울 수송동 각황사 법당에서 임시전람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킨 적도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 있는 <만이천봉 조선금강산>(1929) 사진첩에 이 ‘법기보살’ 바위글씨가 생생히 담긴 사진이 실려 있다. 여기에 ‘세존응화 이천구백사십칠년 사월(世尊應化 二千九百四十七年 四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자가 1920년에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쪽의 구절은 판독이 힘들 뿐더러 나머지 부분은 사진앵글에서 벗어나 있어 그 내역을 모두 확인할 수 없으나, 이 또한 일본인 석공 스즈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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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보살’ 아래 민영휘 일가의 이름 (『만이천봉 조선금강산』, 1929)

한편, 이 사진자료에서 크게 눈길을 끄는 대상은 오른쪽 아래에 함께 포착된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일가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다. 민영휘는 강원도 지역 백성들이 ‘민철구(閔鐵鉤, 쇠갈고리)’라고 불렀다는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 1850~1902)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잘 알려진 대로 조선 제1의 갑부(甲富)이자 조선귀족회의 부회장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귀족의 하나이다.
이 바위글씨를 보면 민영휘를 필두로 김기현(金箕賢, 측실, 1926년에 사망), 민대식(閔大植, 둘째 아들), 민평식(閔平植, 둘째딸, 1923년에 사망), 민천식(閔天植, 셋째 아들, 1915년에 사망)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민영휘의 본처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1915년에 사망)는 물론이고 큰 아들이자 양자인 민형식(閔衡植), 맏딸 민윤식(閔潤植), 넷째 아들 민규식(閔奎植), 그리고 ‘해주마마’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또 다른 측실 안유풍(安遺豊)의 이름은 보이질 않는다.
<동아일보> 1924년 9월 20일자에 수록된 소일생(小日生)의 「금강유기(金剛遊記)」 연재물에는 “…… 그 외에도 염치 모르는 탐리배(貪吏輩)들이 첩(妾)의 이름이며 얼남녀(孼男女)의 이름을 마치 후인(後人)에게 자랑이나 할 듯이 새긴 것들이 무수하게 보였다”고 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글씨를 보고 일컫는 대목인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민영휘 일가의 사람들이 직접 금강산을 탐방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올려놓은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연재물에 포함된 <동아일보> 1924년 9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삼불암(三佛岩) 지척에 있는 수충영각(酬忠影閣)에 자작 민영휘(子爵 閔泳徽)의 대판사진(大版寫眞)이 역대 고승들의 화상(畵像) 가운데에 버젓이 함께 걸려 있음은 대망발(大妄發)’이라고 개탄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 상당한 금액의 시주가 있었을 테고, 그러한 결과로 그들의 이름이 줄줄이 바위에 새겨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만폭동 계곡에 각자된 민영휘 일가의 이름은 그 자체로 가문의 영광은커녕 그들의 추한 행적을 천년만년 상기시켜주는 훌륭한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산에 남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도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언젠가 다시 금강산관광이 재개된다면 꼭 가서 두 눈으로 그 글자들의 내역을 모두 확인해 보고 싶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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