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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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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8/09/07- 10:00

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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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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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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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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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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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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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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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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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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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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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기자가 직접 동참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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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쪽에서 카빈소총 탄피( 윗쪽 좌우 붉은 원안)가 발견됐다. 가운데 붉은 원안은 검정고무신의 잔해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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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폐금광터 유해발굴 구역도 ⓒ 심규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내려 놓았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B2 구역이다. 대나무 조각칼, 흙받이 등 개인 장비도 챙겼다.

천천히 호미질을 시작했다. 23일 오전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8부 능선. 이곳 폐금광터에서는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린 갓난아기까지 일가족이 끌려와 희생됐다는 증언도 많다. 1950년 인민군 점령 시기에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게 처형 이유였다.

유해 발굴 구덩이는 가로 10m, 세로 15m 크기다. 유해발굴단은 이 면적을 다시 7개 구역으로 나눴다. 유해발굴과 기록을 꼼꼼히 하기 위해서다. 기자가 자리한 B2 지역은 가로세로 3m 남짓으로 협소했다. 여기서 세 명이 자리를 잡았다.

끝날이 평평한 호미를 이용해 흙을 조금씩 긁어서 걷어내는 일이 시작됐다. 모인 흙은 양동이에 담아 따로 모은다. 양동이 흙 속에 혹여 유해가 섞여 있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호미질을 시작한 지 1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앞 경사면 중간쯤에 푸른색 물체가 살짝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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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치아(오른쪽)와 같은 희생자이 유품으로 보이는 옥비녀 ⓒ 심규상

“단장님! 단장님!”

기자가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을 급히 불렀다. 오전 10시께였다.

“옥비녀 같아요. 부녀자들이 쪽진 머리에 꽂던….”

온전히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조심조심 흙을 헤집었다. 부러져 있었지만, 옥비녀가 분명했다. 호미를 내려놓고 대나무 조각칼로 주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나갔다. 비녀가 있던 한 뼘 아래쯤에서 하얀 물체가 보였다. 치아였다. 유해가 손상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간간이 골짜기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왔다. 여러개의 치아가 가지런히 박힌 잇몸뼈와 턱뼈가 모습을 보였다.

박 단장이 치아를 유심히 살폈다.

“치아의 크기와 마모 정도로 볼 때 20대 여성으로 보이네요”

범위를 조금 넓혀 비녀가 나왔던 왼쪽 경사면 흙을 걷어냈다. 푸른 빛이 도는 탄피가 발견됐다. 당시 경찰이 두루 사용하던 카빈총 탄피였다. 학살이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와 지시로 이뤄졌다는 증언을 뒷받침했다. 30여㎝ 떨어진 오른쪽 경사면에서도 같은 탄피가 추가 발견됐다. 옥비녀를 꽂은 20대 여성을 쏜 총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손끝이 떨렸다.

주변 좌우로 척추·갈비뼈, 엉덩뼈도 나타났다. 1시간 정도 작업을 이어가자 머리뼈도 보였다.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에서 살해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검정 고무신 조각도 발견됐다. 박 단장은 “모두 20대 여성의 유해와 유품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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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모를 20대 여성 희생자와 기자와의 67년만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기자. ⓒ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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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주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오른쪽)과 발굴팀의 노용석 교수(영남대)가 드러난 희생자 유해를 들여다 보고 있다. ⓒ 심규상

주변 B1 구역에서도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머리 형체가 뚜렷한 유해도 있었다. 폐광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는 증언은 사실이었다. 유해와 함께 불에 탄 흔적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폐금광 안으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켰다는 또 다른 마을 주민의 증언도 나왔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이 끌고 온 사람들을 마을 방앗간에 가둬 놓았어. 어느 날 사람들을 금광으로 끌고 갔어. 한꺼번에 끌고 간게 아니라 수십 명 단위로…. 몇 명이었냐고? 암튼 셀 수도 없을 만큼 엄청 많았어. 금광이 일직선이 아니라 입구에서 곧바로 왼쪽으로 굽어 있었어.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질을 해 죽었는데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태우거나 동굴 안으로 연기를 피워 죽었어. 말도 마, 너무 끔찍해서….” (정윤섭, 80, 중리 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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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1구역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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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구역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 심규상

아산시에서만 부역 혐의로 8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이곳 폐금광에는 약 200~300명이 묻혀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산시와 시민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2일부터 한 달간 일정으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글: 심규상(djsim) 편집: 김시연(staright)

<2017-02-25>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옥비녀 꽂은 20대 여성 희생자, 67년 만에 빛을 보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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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 지원한 복기왕 전 아산시장 “너무 늦어 죄송”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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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2017.11.19)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2017.11.17)

화, 2018/02/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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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현충사 박정희 친필 현판 존치’ 판단 유감… 숙종 현판이 ‘복원 원칙’에 걸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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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박정희 대통령 친필 현판으로 1967년 걸렸다. ⓒ 구진영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지난 21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이재범 전 경기대 교수)의 검토 결과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아산 현충사 사당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이 밝힌 존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은 숙종 사액 현판을 철거하고 교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성역화 사업 당시 신 사당을 건립할 때 제작·설치하게 된 것’이며 둘째,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며’ 셋째,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원형 복원 원칙’ 무시한 문화재청의 판단

문화재청이 밝힌 박정희 현판 존치 첫째 이유를 반박하기 위해서 우선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살펴보자. 광화문은 임진왜란(1592년)으로 소실됐다가, 고종 4년(1867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신축되면서 1926년 해체돼 경복궁 동편인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겨지면서 원형이 훼손·변형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됐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특별지시로 1968년 12월 원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언론들은 이를 두고 ‘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박정희가 새로 쓴 현판을 빼곤 목조였던 누각마저 모조리 콘크리트로 만들면서 당시 미술평론가는 물론 복원에 참여한 인사조차 ‘콘크리트 모조 건축’ ‘콘크리트 모뉴먼트’라고 말했다.

“광화문을 영원히 욕되게 하고 XX을 만들어 버린다”(<경향신문> 1968.3.20)라는 극단적인 평가에도 박정희는 광화문 완공 당시 자신의 친필 현판이 마음에 들지 않자 얼마 후 현판 글씨를 새로 써서 걸었다. 박정희가 문화재와 문화재 복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박정희의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12월 4일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과 더불어 철거될 때까지 38년을 이어오다 2010년 8월 15일 지금의 모습으로 ‘원형 복원’됐다(물론 지금도 광화문이 제대로 원형 복원됐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원형 복원 원칙에 따라 ‘콘크리트 모조’ 광화문에 걸렸던 박정희 친필 현판은 19세기 말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돼 광화문 편액을 쓴 임태영의 글씨로 교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건일기>를 발견해 오랫동안 정학교가 광화문 편액을 썼다는 기존 통설을 수정하는 성과도 냈다. 이렇듯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은 문화재청이 20년에 걸쳐 끈기 있게 완성한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그중에서도 광화문 현판 복원은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었다.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에서 원형 복원 원칙을 고수했던 문화재청이 왜 현충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1968년 박정희가 만든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현충사 신 사당 역시 박정희가 만든 콘크리트일망정 숙종 사액 현판이 있는 만큼 숙종 현판으로 교체해야 그나마 원형 복원 원칙에 가까운데 말이다. 2008년 소실돼 2013년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 역시 원형 복원 원칙을 따랐음은 당연하다.

박정희가 새운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숙종보다 큰 걸까

문화재청은 박정희 현판 존치의 두 번째 이유로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을 들고 있으나 그것이 왜 존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므로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문화재청의 박정희 현판 존치 세 번째 이유는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인 1932년 건립된 현충사 구 사당에 걸려 있는 조선시대 임금인 숙종 현판도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하고 있으므로 떼어내야 할까. 숙종 대인 1707년에 처음 세워진, 300년이 넘는 현충사 구 사당의 역사적 의미보다 1968년 박정희가 세운 불과 50년의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박정희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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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의 모습 ⓒ 구진영

300년 역사를 지닌 현충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숙종 사액 현판은 더욱 값지다. 서울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의 글씨가 걸려 있던 것을 1967년 12월 중수 준공식을 하면서 박정희의 친필 현판으로 교체됐다. 그러다 2003년 독립선언서 서체를 이용한 현재의 현판으로 교체됐다. 삼일문은 박정희가 1967년 중수한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현판은 삼일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의 정신을 담아 독립선언서 서체로 새로 만든 것이다. 삼일문의 경우에서 보듯 문화재청의 주장처럼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은 영원불멸의 원칙은 아니다.

문화재청이 제시한 현충사 박정희 현판 존치의 세 가지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곳이니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이 온전히 박정희의 역사를 그곳에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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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현충사 지도. 2만여 조선 민중이 뜻을 모아 세운 구 현충사(빨간색 동그라미)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갈 때만 볼 수 있는 처지다. 파란색 동그라미 안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1967년 성역화작업 당시 세웠다.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당대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는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의 현충사 현판은 문화재청 관계자들의 눈에는 박정희가 조성해 놓은 현충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숙종 현판이 걸려있는 구 사당은 박정희가 조성한 충무문-홍살문-충의문-현충사(신 사당)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화장실 옆에 놓여 있는 처량한 신세다(이기환, ‘현충사, 꼭 박정희 현판이어야 하나’, 이기환의 역사흔적, 2018.2.8, leekihwan.khan.kr).

1932년 경매로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 제사 등과 관련한 비용 충당을 위해 마련한 토지)를 성금을 모아 지켜내고 현충사(구 사당)를 중건했던 당시 2만여 명의 조선 민중들의 역사는 1968년 박정희의 현충사(신 사당)에 밀려 이제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가야만 비로소 엿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충무문, 충의문 현판 역시 박정희가 썼다. 박정희는 1967년 신축 당시에는 한자로 ‘顯忠祠’ 현판을 걸었다가 1973년 지금의 한글 ‘현충사’ 현판으로 다시 걸었다. 광화문 현판을 두 번이나 다시 써서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충사에 공 들인 박정희, 그의 속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충사 신구 사당을 모두 살펴본 사람이라면 현충사가 ‘이순신 사당이 아닌 박정희 사당’으로 느껴진다는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2만여 명이 운집한 1967년 4월 28일 현충사 성역화사업 준공식 기념사에서 “수구 파쟁 시기 모략 아집 단견 무정견 등 전근대적이고 비생산적인 요소들이 이 나라의 새 역사 창조의 국민대열을 가로막고 있다”라면서 준공식 기념사로는 다소 어색한 발언을 했다.

이날은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후보로 아산이 고향인 윤보선과 맞선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5일을 앞둔 날이었다.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현충사에서 야당을 공격하는 일종의 선거유세를 했던 것이다. 이미 여러 연구에서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현충사를 비롯해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이른 바 성역화사업은 정권 유지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박정희가 이순신의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 이미지 희석화하고, 이순신의 구국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며,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권력을 정당화했다.”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2000, 책세상 / 이상록, ‘민족의 수호신’ 만들기와 박정희체제의 대중규율화, 2004, 휴머니스트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계기는 한일협정이 제공했지만, 그 방향은 결코 반일에 있지 않았다. 즉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충사는 반북이데올로기의 선전장, 반정부세력의 성토장,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 확립을 위한 국민정신교육 도장이었던 셈이다.” – 은정태, ‘박정희시대 성역화사업의 추이와 성격’, 2005, 역사문제연구

실제로 1974년 4월부터 현충사 경역 내에 1만 평이 넘는 충무교육원이 개원돼, 학생·교원·일반 사회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정신교육과 훈련활동 프로그램이 마련됐는데 이곳에서는 중고생, 교육공무원·교수·서장·새마을운동 지도자 등을 대상으로 국민교육헌장 이념, 새마을정신교육, 유신이념, 반공・안보 교육으로 가득 채웠다(은정태, 2005). 한마디로 박정희가 충무공 정신을 빙자해 현충사를 정권 홍보의 교육장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박정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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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현충사의 모습 구 현충사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때는 박정희 성역화 작업 전으로 건물에 숙종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 국가기록원

<박정희 사상 서설>(정재경, 집문당, 1997)에 의하면 박정희가 직접 쓴 휘호는 1962년 1월 1일 ‘革命完遂'(혁명완수)를 시작으로 사망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유역 농업개발 기념탑’ 휘호까지 모두 647점에 이른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이야말로 공장을 몇십 개 몇백 개 세우는 것보다 더 큰 민족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성역화사업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던 박정희였던 만큼 그의 글씨들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곳에 현판과 금석문 등으로 남아있다.

현판으로는 <홍지문> <義節祠>(의절사) <忠烈祠>(충렬사) <육신사> <세종전> <훈민문> <文成祠>(문성사) <孤峯祠>(고봉사) 등이 있고, 이외에도 20여개가 더 남아 있다(장학진, ‘역대 대통령의 묵적 연구’,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석사논문, 2016).

현판 외에도 건축물, 다리, 도로, 터널, 기념탑, 호수, 비문 등에 남겨진 박정희 글씨는 차고도 넘친다. 전 국토와 문화재를 자신의 화선지로 여겼던 박정희가 남겨놓은 흔적이 너무도 많기에 이들 모두를 없애자거나 교체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겠다.

다만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에 덧칠해져 있는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의 정신이 원래 그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거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충돌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상컨대 이번 문화재청의 존치 결정으로 박정희 현판 교체 여론은 더욱 비등할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결정을 재고하고 박정희 현판을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보관·전시하는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박정희 현판을 대신해 숙종 사액 현판을 옮겨 설치하면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고 노심초사하는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들이 있는 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은 우리 시대와 교감하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 군인이 만든 콘크리트 사당과 친일 화가가 그린 표준 영정에 갇혀 질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방학진씨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퍼블리카에도 중복해서 게재됐습니다.

글: 방학진(vacationji) 편집: 김지현(diediedie)

<2018-02-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화, 2018/02/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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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모임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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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동구에 있는 보성학교(터)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현장이지만 1970년대 중반에 학교가 멸실 된 후 설립자 성세빈 선생을 뜻을 기리는 송덕비만 덩그러니 방치돼 있다. ⓒ 시민모임

지난해 울산 동구청이 동구 바닷가(방어진) 일제의 수탈 역사인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적산가옥(해방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은 많은 예산을 들여 개발하려는 반면 인근에 있는 항일운동 본거지 보성학교는 방치해 비난이 일었다. (관련기사 : 항일학교는 방치하고 일본인 골목 복원한다는 울산 동구청)

이에 각계 주민들은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 복원을 위한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을 결성해 동구청(장)의 이런 행보를 “방어진 친일미화 역사사업”으로 규정하고 중단을 촉구하는 한편 보성학교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민모임은 3.1 독립만세운동 99주년을 맞아 “울산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터)를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할 것”을 국가보훈처와 울산자치단체에 촉구했다.

이들은 27일 오전 11시 30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잊힌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천명했다”고 상기했다.

또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도 취임사를 통해 변화와 혁신을 언급하며 불합리한 보훈제도의 개선을 약속한 바 있다”면서 “우리는 새 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훈정책의 변화를 기대하며 일제강점기 울산의 항일운동 터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보성학교(터)의 국가현충시설 지정을 요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울산 동구 방어진 일제강점기 수탈 관문…이에 맞서 보성학교 세워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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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울산 동구 보성학교 학생들 ⓒ 시민모임

울산은 일본과 육지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주권침탈과 자원수탈의 관문이 됐다. 특히 동구 방어진은 일본인 수천 명이 이주 정착해 조선인의 어장을 침탈하고 막대한 부를 향유한 식민지 거점이었다.

시민모임에 따르면, 이에 울산 동구의 민족 사립학교 보성학교(1922~1945)를 중심으로 일제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친 선조들이 있었다.

보성학교는 수차례 탄압을 겪었고 결국 해방직전 강제 폐교됐지만 모두 515명(남 472, 여 43)의 졸업생을 배출한 울산 유일의 민족사립학교였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의 요람이며 학교 교사와 졸업생 모두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한 항일운동의 터전이었다.

보성학교 출신들은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보성학교 교사 출신 서진문(1928년 옥사, 건국훈장 애족장), 이효정(2009년 별세, 건국훈장 포장) 선생 두 분은 2006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보성학교가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가지는 의미는 이미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기념관이 발간한 <부산·울산·경남 : 독립운동사적지>(2010)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민모임은 “이 보고서에는 울산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사해 싣고 있는데 동구는 보성학교와 서진문 집터와 성세빈, 성세륭 집터가 포함돼 있다”면서 “보성학교터와 국가유공자인 학교의 교사, 설립자, 교장의 생가를 소개한 것이지만 보훈처에 지정하고 관리하는 울산의 국가현충시설은 13곳뿐이며 조사발표 후 8년이 지나도록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은 “보훈처울산지청에 조속한 지정 여부를 질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학교를 복원한 뒤에야 검토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었다”면서 “하지만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나 조병세 순국지(표훈원 터) 등 현 국가현충시설 중에는 건물이 멸실된 터를 지정한 사례가 쉽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울산 동구 보성학교(터)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현장이지만 1970년대 중반에 학교가 멸실 된 후 설립자 성세빈 선생을 뜻을 기리는 송덕비만 덩그러니 방치돼 있다. 해당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도 표지석도 설치되지 않았다.

시민모임은 “그동안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지 않아 오히려 시민들이 직접 나서 공청회를 열고 여러 방안을 제시해 왔다”면서 “동구주민단체와 문화단체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울산지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99주년 3.1절을 맞아 재차 가시적인 변화를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2018-02-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현장 울산 동구 보성학교, 보훈처와 지자체 ‘방치’ 

화, 2018/02/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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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운동’ 착수


▲ 박근혜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9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시청 앞에서 새마을회관 건립 추진 폐기를 촉구하면서 청사 앞 게양된 새마을기를 철거하고 있다. 2017.1.19/뉴스1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광주시와 광주 지역 5개 자치구를 상대로 ‘새마을장학금 지원 조례 폐기’를 촉구하고 나선다.

또, 새마을회에 매년 관행적으로 수억원씩 지원되는 ‘혈세 특혜’도 철회할 것을 촉구 할 예정이다.

26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등 9개 시민단체는 “새마을장학금은 매년 막대한 시민혈세를 단지 새마을지도자 자녀들이라는 이유로 특정 단체에 지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은 매년 30억원 이상의 예산을 1986년 제정된 ‘광주시 새마을장학금 지급 조례’에 근거해 지역새마을회에 지급해 오고 있다.

새마을회 측은 이 중 70% 가량을 회원 자녀 장학금, 조직 운영비, 자체 행사비로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시민단체는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이 새마을회에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장학금까지 지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를 구성해 대표적인 특권 반칙 조례인 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는 오는 27일 오후 2시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지난 2014~2017년까지 4년간 지급된 새마을장학금 내역과 지급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nam@

<2018-02-26> 뉴스1

☞기사원문: 광주시민단체 “새마을장학금 지급 납득하기 어려워” 

화, 2018/02/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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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자료집]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을 위한 국제회의-

 – 취지
○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유골이 해방된 지 73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과 동남아시아 각국, 그리고 태평양제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 일본정부는 2016년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하여 국가차원에서 군인, 군속 희생자 유골수집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함께 희생된 한국인의 유골에 대해 한국 정부의 제안이 있을 경우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에 관한 합의 이후 한국 출신 군인군속 희생자의 유골이 일부 송환되었으나 강제동원되어 희생된 민간인의 유골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에 의해 몇 차례 봉환되었을 뿐, 정부차원의 유골봉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이에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를 초청하여 유골의 현황을 파악하고 한국정부와 일본 정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때: 2018년 3월 2일(금) 오후 3시~6시
곳: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 주최: 서울특별시, 국회의원 진선미, (사)민족문제연구소
– 주관: (사)평화디딤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식순]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을 위한 국제회의 –
 

개회사 –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발표1: ‘70년만의 귀향’: 사자(死者)를 추모한다는 것의 의미
         –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대표)

발표2: 일본 정부의 유골 조사사업과 한국인 전몰자의 유골봉환운동 
         – 우에다 케이시(上田慶司,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

발표3: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에 관한 제언
         –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발표4: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발굴과 귀환
         – 정병호(평화디딤돌 대표, 한양대 교수)

토 론: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책
        –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외교부 담당자

질의응답 및 종합토론

 


손승현 사진전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DISPLACED SOULS”

– 때: 2018년 3월 1일(목) ~ 4월 15일(일)
– 곳: SeMA 벙커(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11 지하)
– 주최: 서울특별시, (사)평화디딤돌, (사)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 주관: 서울시립미술관  
– 후원: 한국문화인류학회, (사)민족문제연구소
– 출품작가: 손승현, 데이비드 플래스(다큐멘터리 “길고 긴 잠”), 송기찬(다큐멘터리 “또 하나의 고향”)

* 개막식
– 때: 2018년 3월 2일(금), 오후 2시
– 곳: SeMA 벙커
– 개회사: 박원순(서울특별시장) 
            정병호(평화디딤돌 대표) 
            도노히라 요시히코(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대표) 
            최효준(서울시립미술관장)
– 축사: 진선미(국회의원)
– 작가 인사 및 전시 소개: 손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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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2/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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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하고  연세나이테가  비스무리한  현진건속으로

사진은 경남민언련

 

목, 2018/03/0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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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시즌2. 9회 2부 “미당문학상 이야기_맹문재시인과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9회 1부 새로운 파일럿방송 “역전다방_의열단 2편”]

[팟캐스트 ‘역적’시즌2. 8회 2부 “친일 후손의 반성_이윤선생과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8회 1부 “갑신정변_겨울에 온 제비”]

[팟캐스트 ‘역적’시즌2. 7회 2부 “친일군인 김창룡 묘 이장과 국립묘지법 개정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7회 1부 “개화와 보수의 빅매치 1탄 임오군란”]

[팟캐스트 ‘역적’시즌2. 6회 2부 “과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_최홍이 선생과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6회 1부 “불평등으로 시작된 강화도조약 2편”]

[팟캐스트 ‘역적’시즌2. 5회 2부 “박순찬 시사만화가와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5회 1부 “역전다방_의열단 1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4회 2부 – 김활란동상 옆 친일 알림팻말_이화 친일청산프로젝트 기획단과 함께 ]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4회 1부 “불평등으로 시작된 강화도 조약 1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3회 2부 “임청각 이야기”_이항증선생과 함께(석주 이상룡선생 증손자)]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3회 1부 “내우외환 위기속 흥선대원군(2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2회 2부 반민특위 김상덕위원장 아들 김정륙선생과 함께]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2회 1부 “내우외환 위기속의 흥선대원군(1)”]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1회 2부 “효창원 역사적폐청산 과제_차영조 선생님”]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1회 1부 “백년의 역사여행을 시작하며”]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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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제작 등: PD 김세호, MC노, 김광진(前)국회의원,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방학진 기획실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금, 2018/03/0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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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이현경 기자] 서울시립미술관이 2018년 SeMA 벙커의 첫 기획적으로 3·1 운동 99주년을 기면해 일제 강점기 강제노동의 역사를 조명하는 전시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을 개최한다.

3·1 운동 99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이 전시는 강제노동을 목적으로 징용된 이주한국인들의 사진과 영상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어 범인류적 차원의 공감과 치유, 올바른 미래의 역사를 가늠해 보고자 마련됐다.

서울시와 한국(사)평화디딤돌, 일본(사)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서울시립미술관이 주관하는 전시는 140여점에 이르는 손승현 작가의 사진을 비롯해 미국의 데이비드 플래스 교수와 일본의 송기찬 교수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선보인다.

참여작가 손승현은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과 노동으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 발굴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특히 시간에 따른 변화 없이 과거의 사건이 현재처럼 느껴지는 심상을 주목하고 있다.

데이비드 플래스의 다큐멘터리 작품 ‘So Long Asleep(길고 긴 잠)’은 2차 세게대전 당시 일본 훗카이도에서 강제노동 중 사망한 115명의 조선인 희생자 유골을 한국과 일본의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발굴해 일본 열도를 관통하는 여정 끝에 고국 땅에 안치하는 과정을 담았다.

송기찬의 다큐멘터리 작품 ‘Another Home(또다른 고향)’은 유골발굴에 참여했던 재일동포들의 정체성에 관한 인터뷰 영상이다. 재일동포들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식미지성이 해방 후 동아시아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일본, 한국, 북한이라는 세 국민국가의 틈새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공고해진 것임을 주목한다.

전시는 과거 전쟁과 반인도적 범죄의 희생자들의 치유되지 않은 고통을 소개함으로써 세대 간 소통을 확대하는 한편, 역사적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공동의 노력을 촉구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실천하는 미래세대의 성장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은 3월1일 SeMA 벙커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4월15일까지 SeMA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후 8월, 일본의 오사카와 동경으로 전시가 이어질 전망이다.

[뉴스핌 Newspim] 이현경 기자([email protected])

<2018-02-28> 뉴스핌

☞기사원문: SeMA, 3.1운동 99주년 기념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3월1일부터 전시…8월, 오사카·동경서도 본다

※관련기사

☞서울문화투데이: 일제 강점기 강제노동 역사 조명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전

☞뉴시스: 3.1절 SeMA 벙커에서 만나는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금, 2018/03/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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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앞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유물 3만점 등 자료 수백만 건 
청파동 연구소 건물에 전시ㆍ보관
日시민단체 등 각계에서 후원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아야
독립운동의 가치도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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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이 5월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 전시에서 선보일 3.1운동 검찰 조서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박 실장은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터전으로 가꾸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99주년 3ㆍ1절에 새로 공개할 사료는 없습니다.”

2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서 만난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제강점기 의병장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산남창의지’, 이광수 서정주 등 친일파 문인의 친일행각 사진 자료 등 3ㆍ1절이면 의례적으로 친일, 독립 관련 사료를 발표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행보다.

친일파 명단 발표나 학술서 발간 행사도 올해는 없다. 박 실장은 “대신 연구소 모든 사력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에 쏟아 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제 침략과 수탈의 기록을 소개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5월 문을 연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대형 프로젝트다. 일제 식민지 시대 관련 유물 3만여점,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본군위안부 집단소송 등에서 모인 수백만 건의 자료가 전시, 보관된다. 박 실장은 “박물관 건립을 위해 지난해 12월 말 연구소를 용산으로 옮겼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 박물관 등과 교류하며 시민사회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연구소가 박물관을 구상한 건 2001년 무렵부터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한참 할 때에요. 사전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친일파 후손들이 증거 없다, 부정할 거 아니에요. 관련 자료를 수집해 전시할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이 나왔죠.” 사전 편찬이 마무리된 이듬해인 2010년 박물관 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2011년 역사관 건립위원회가 발족됐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관은 수차례 미뤄졌다. 다큐멘터리 ‘백년전쟁’(2012) 제작으로 시작된 뉴라이트 역사논쟁,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운동(2013)등이 대표적인 ‘우여곡절’의 사례. 2014년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모금 운동도 주춤해졌다. “처음에는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는 방식과 민간 박물관 개관 두 가지 방식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한데 지자체와 협력하게 되면 아무래도 시민운동의 자율성이 제약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민간 박물관 개관으로 방향을 정했는데 부지 선정부터 쉽지 않았죠. 역사성, 접근성을 다 갖춘 장소는 시세가 비싸 엄두를 못 냈으니까요.”

“사대문 가까운 장소를 1년 반 가까이 조사한 결과” 지난해 상반기 지금의 자리로 부지를 정하며 ‘청량리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물관 개관이 미뤄지며 얻게 된 소득도 있다. 2015년 일본 역사ㆍ시민단체 30여곳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결성해 기금을 모았고, 일본 내 식민지 범죄 관련 자료도 다수 기증받았다. 이 단체들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자를 포함 2만5,000여명이 십시일반으로 11억여 원을 기부했다. 박 실장은 “식민지 가해국, 피해국 시민이 함께 역사 문제를 고민하게 됐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새로 둥지를 튼 연구소는 연면적 475평, 지상 5층 건물로 1, 2층은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ㆍ특별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3층은 연구소 사무실, 4층은 수장고, 5층은 교육실로 활용한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 ‘식민지 일상’ ‘전쟁과 식민지’ ‘한일과거청산운동’ 등 주제로 구성되는 상설 전시에는 연구소가 입수한 사료 200여점을 전시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 군관학교에 입학했다는 만주신문 기사, 기미독립선언서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를 우선 선보인다. 박 실장은 “5월 박물관 개관에 맞춰 미공개 자료 20~30점을 추가로 공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올 하반기에는 반민특위 구성 70년을 기념한 특별전시도 열 계획이다.

“박물관 명칭을 애초 ‘시민박물관’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바꿨습니다. 국내 박물관에서는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만 전시돼있어요.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식민지 민중생활사를 알아야 독립운동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진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3월 중순부터 포털사이트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식민지역사박물관 모금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8년간 박물관 모금운동에 참여한 2만5,000여명과 펀딩에 참여한 기부자 이름을 박물관 벽그림에 새겨 넣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email protected]

<2018-03-02> 한국일보

☞기사원문: [인터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앞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금, 2018/03/0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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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부지 구했지만 건립기금 여전히 부족일본에서도 성금, 자료 기부 이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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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5월 개관 예정인 식민지역사발물관 전경(민족문제연구소 제공)© News1

국내 최초로 식민지 시기 역사에 초점을 맞춘 박물관이 5월 개관한다. 정부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민간 시민단체의 기금마련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이 박물관 건립의 주춧돌이 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5월 식민지역사박물관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1일 밝혔다. 2007년 역사관 준비위원회가 발족한 지 11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다.

◇어렵게 구한 박물관 부지 “하늘에서 독립군이 도운 듯”

박물관 건립의 가장 큰 난관은 먼저 박물관이 될 건물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51억원을 건물비로 잡았지만 서울 시내 사대문 안에서 박물관 건립을 위해 연면적 500평 이상의 건물을 구입하는 것을 하늘의 별따기였다.

연구소의 박물관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강동민 자료팀장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현재의 박물관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을 ‘하늘에 계신 독립운동가들이 도우신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본래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건물주는 강 팀장 등 연구소 관계자들의 말을 듣고는 “이제야 이 건물이 주인을 찾은 것 같다”라며 흔쾌히 거래를 받아들였다. 이어 건물주는 “건물에 역사박물관이 들어서면 내가 자식들에게 내세울 게 생기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용산구가 가지는 의미도 박물관의 위치를 더 의미 있게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사령부가 바로 용산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용산 지역은 식민역사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 팀장은 종국에는 식민역사박물관이 현재 용산 미군기지가 위치한 옛 조선 주둔 일본 사령부터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건립 소식에 기부금 이어졌지만…20억원의 빚

연구소가 박물관 건립기금으로 책정한 금액은 55억원이었다. 이중 건물매입비가 51억원으로 가장 크고 나머지 금액으로 리모델링, 수수료, 세금, 이전비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기금마련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을 지난 송기인 신부의 기부금 2억원이 마중물이 됐으며 이후 연구소가 지난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판매기금 11억원이 더해져 종잣돈이 됐다.

이후 건립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사회 각계에서 기부가 이어졌다. 고사리 손으로 채운 저금통부터 평생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모은 한 노파의 성금까지 약 11억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2015년에는 일본에서도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 만들어져 한국 돈 1억원에 가까운 기부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55억의 건립기금 중 확보한 금액은 약 37억원으로 18억원 정도의 추가 모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연구소 건물 구입을 위해 50억원의 매입비용 중 20억원을 대출해야 하기도 했다.

현재 5층 건물 중 박물관으로 사용할 예정인 1, 2층에 대한 리모델링도 예산 부족의 이유로 미뤄졌다. 이에 따라 본래 올해 3·1절을 맞이해 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개관 일정 자체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강 팀장은 “현재 박물관 설계 및 콘텐츠 구성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어 자금만 마련된다면 바로 공사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박물관 개관 앞두고 새로운 자료 기부 이어져

박물관 개관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박물인 만큼 당시의 삶을 기록한 자료들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 사는 와카타니 마사키(69)씨가 박물관 설립 취지를 듣고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했던 어머니 와카타니 노리코씨(93)가 보관하고 있던 사진 자료를 연구소 측에 기증했다.

사진자료 중에는 1944년 당시 인천의 송현국립국민학교(현재 인천송현초등학교)를 다니던 학생 7명이 근로정신대로 선발돼 일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 공장으로 떠나기 직전 찍은 단체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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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카타니 노리코씨가 기부한 1944년 송현국립국민학교 학생들의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News1

이에 대해 노기 카오리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당시 여자 근로정신대의 사진이 실물로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라며 “특히 노리코씨의 경우 당시 사진에 날짜와 함께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히 기록해 두었다”고 밝혔다.

사진을 기부한 마사키씨는 연구소 측에 “어머니는 고령의 나이에 치매 증상을 보여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옛날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신다”라며 “사진을 박물관에 전시해 사진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고 사진의 복제품이라도 전달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식민시기의 역사에 대해 독립운동사, 즉 ‘저항’의 역사를 중점 기록한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새롭게 건립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노리코씨의 사진처럼 당시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강 팀장은 “당시 민중들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역사 전체를 봐야 한다”며 “식민지 역사와 함께 이후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모습도 전반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동해 기자 potgus@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식민지역사박물관 5월 개관…”민중들의 역사 담을 것”

금, 2018/03/02-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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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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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프리존=이규진기자] 3ㆍ1운동 99주년을 맞아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더욱 새롭게 주목된다. 실제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행한 기념사를 통해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정면으로 재조명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을 ‘건국의 아버지들’이라고 칭한 뒤 ‘건국의 어머니들’도 있다며 유관순 동풍신, 윤희순, 곽낙원, 남자현, 박차정, 정정화와 부산 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을 열거했다.

여성 독립운동군들을 기리는 행사가 별도로 열리기도 했다.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1일 오후 탑골공원 정문에서 보훈처와 항일독립운동단체연합 후원으로 ‘오늘 그들 여기에’라는 타이틀로 3.1혁명 99주년 기념식과 사업회의 4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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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후 탑골공원 정문에서 보훈처와 항일독립운동단체연합 후원으로 ‘오늘 그들 여기에’라는 타이틀로 열린 3.1혁명 99주년 기념식과 사업회의 4주년 기념행사 ©추광규 기자

역사여 외쳐라! 항일여성 독립군들의 이름을…

항일여성독립운동사업회 김희선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2015년도에 당시 만세운동을 해냈던 학생들이 모여서 만세 퍼포먼스를 했다”면서 “오늘은 두 번째로 특별히 여성독립운동가들에게 후손들로써 드리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5회차 4주년을 맞는 날”이라면서 “이 정부 들어서 사단법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계속해서 “남성 독립 운동가는 1만 4천600명이 넘게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고 있다”면서 “그런데 여성은 몇 분일까요? 현재는 293분이다. 남자는 독립운동가라고 책에 나오는데 여성은 유관순 누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역사를 잘못 배우게 된 것 아닌가?”라면서 “우리는 바른 역사를 배워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바른 역사를 배우기 위한 목적에 모자란 부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바른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또한 “100년 전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바쳐서 싸웠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라고 물은 뒤 “시대정신, 역사의 요구는 자주 독립이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 같이 말한 뒤 “3.1 그 당시 7천992명이 돌아가셨다”면서 “왜놈들에 의해서, 2월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돼서 4월까지 돌아가신 분들이 8천명이라는 것이다. 자주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돌아가셨는데 혁명이라고 말을 안 할 수 없다. 독립 운동가들이 가졌던 마음은 이 시대에 친일파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의미를 말했다.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전 대표는 축사를 통해 “3.1혁명의 정신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서 ”얼음산이 바다위에 떴을 때 7분의 1정도만 우리 눈에 보이고 7분의 6은 바닷속에 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수면 속에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울 때 교수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면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간다면 극락세계에 간다면 이 세상에서 평가받았던 그 모든 분들보다 10배 20배 100배가 되는 훌륭한 숨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렇게 저희가 배웠는데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여성독립운동가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누이 이분들이 바로 숨어계신 의인들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함 전 대표는 “항일운동가 단체들이 연합을 해서 그동안에 애썼지만 놓쳤던 항일 운동가들의 삶과 역사를 조명해서 아름다운 민족사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또 항일 저항의 역사를 또 독재 타파를 했던 역사의 장을 펼치자고 해서 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4월혁명회 정동익 회장은 축사를 통해 “오늘 역사적인 항일 3.1일 혁명 99주년을 맞아서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창립한지 4년 만에 국민들의 주목을 받는 비중 있는 단체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3.1 혁명은 다 아시다시피 외세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 민족적인 투쟁이었다”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 위기에 처해 있다, 외세에 의한 전쟁위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정신적인 원천이 3.1일 혁명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계속해서 “지금 남북 단일팀이 참가한 평창올림픽 덕택에 잠시 동안 전쟁위기에서 벗어나 있지만 미국은 다음 달이면 대규모 한미연합 전쟁 훈련을 하겠다고 한다”면서 “그렇게 되면 모처럼 남북대화가 문은 닫히고 평화는 물건너가고 다시 우리는 다시금 전쟁위기에 쌓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우리가 전쟁을 막고 이 땅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세가 우리 운명을 결정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지금 이시기야 말로 우리가 전쟁 말고 평화를 외쳐야 할 때다. 목숨 바쳐 자주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의 정신으로 평화를 외치자. 그 길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우리 모두 함께 뜻을 모아 평화를 위해 떨쳐나서자”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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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추광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3.1혁명 99주년이자 내년 100주년을 앞두고 100년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또 우리민족 앞으로의 100년은 무엇일까를 탐구하는 자리”라면서 “3.1 혁명을 추념하면서 3.1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 결심을 다지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이어 “3.1 만세운동을 불렀던 우리 선조들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씀 하실 것인지 생각하자”면서 “첫째 민주주의다. 우리 선조들이 들고 흔들었던 태극기가 모독 되지 않기를 바란다. 태극기 정신을 바로 살려야 된다. 태극기를 흔들 때 흔들어야 한다.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만이 태극기를 흔들고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는 3.1 혁명은 민주주의”라면서 “독재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3.1 정신을 받은 게 아니다. 지금까지 3.1일 혁명 기념식을 할 때마다 불만이었다. 하지만 올해 대통령 기념사는 최고로 마음에 들었다. 아주 잘했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아주 심도 있게 몇몇 분을 거론해 주셨다”고 말했다.

임헌영 소장은 “세 번째는 반외세”라면서 “일본의 아베가 마치 조선반도의 총독처럼 발언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북폭을 우리 허락도 안 맡고 하겠다고 한다. 반외세 민족자주독립 민주주의 복지국가 건설 이것이 내년 3.1혁명의 기본적인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기념식은 1부 순서로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4주년 기념식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봉헌, 전시. 2부 순서에는 화윤차례문화원 주관으로 박남식 박사외 문하생들이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추모헌공차례가 3부 시민과 함께하는 그날의 합창으로 대북 공연팀 ‘수’의 대북 공연과 합창단의 선창으로 독립군가 홀로아리랑 등을 참석자들과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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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를 올리고 있다. ©추광규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과 일문일답이다.

-창립 4주년을 맞은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그분들의 정신을 받들어서 이 시대의 정신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단체다.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나서 그 뜻이 후손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오늘 행사에 대한 의미를 말해 달라
“오늘 행사는 유무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후손으로서 기리기 위한 자리”라면서 “제례를 시작으로 해서 차례로 지내면서 그분들의 정신을 많은 대중들에게 시민들에게 그리고 참여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준비가 되었다. 대북을 치고 그 당시에 불렀던 원곡 애국가라든가 홀로아리랑 등을 부르는 것도 독립정신이 어떤 것이고 그 당시에 여성 독립 운동가들이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노래로서 그날의 함성을 합창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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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화 ©추광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항일 운동사에 미쳤던 영향과 의미는 무엇인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은 독자적인 독립투쟁운동을 한 것뿐만 아니라 군자금을 모아오고 정보를 캐오는 것 등을 하는데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아직은 가부장제 사회여서 여성들이 한 일은 뒷일로 뒷바라지 일 정도로 여기지 않았다. 남자현 선생님의 혈서나 윤희순 선생님의 의병대장 노래 등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남성들 못지않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 시대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규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8-03-01> 뉴스프리존

☞기사원문: 항일운동 이후 남성 독립 운동가는 1만4,600명…여성은 몇 분일까?

토, 2018/03/03-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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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식 공연에 ‘친일파’ 조두남 작곡 ‘선구자’ 준비
작사가 윤해영도 친일 행적…연습 중 지적 받고 제외

▲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 1일 오전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 민주종각에서 열린 ‘제99주년 3·1절 기념 민주의 종 타종식’에 참석해 이은방 시의회의장, 장휘국 시교육감, 독립유공자 유족, 시민 등과 함께 타종을 하고 있다./광주광역시 제공

제99주년 3·1절을 맞아 광주시가 진행한 민주의 종 타종행사 기념공연에 ‘친일노래’가 불려질뻔 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습 도중 문제제기를 받고 본 공연에선 제외했으나 행사를 준비한 광주시의 역사의식 부재를 반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광주시에 따르면, 이날 오전 광주시청에서 ‘제99주년 3·1절 기념식’ 후 5·18민주광장에서 민주의 종을 33번 타종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윤장현 시장, 이은방 광주시의회 의장,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후손 등이 참여했다.

“3·1절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시민대통합을 이루자”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가 자칫하면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할뻔 했다.

‘일’은 행사 준비 과정에서 터졌다.

광주나비는 이날 낮 12시 5·18민주광장에서 3·1절 99주년을 기념해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11차 광주 수요시위’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타종식은 이 행사 10분 전인 오전 11시50분 진행이 됐는데, 수요시위 참석을 위해 5·18민주광장을 지나가던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이 기념공연 연습 과정을 보게 됐다.

공연자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김순흥 지부장의 귀를 의심케 했다. ‘친일가요’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가곡 ‘선구자’를 부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 곡은 작사자와 작곡가 모두 친일행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다 노래 자체도 ‘친일가요’로 알려져있다.

작곡가 조두남은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한 ‘만주작곡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선구자’ 노랫말을 쓴 윤해영 역시 논쟁은 있지만 ‘친일작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순흥 지부장은 현장에서 바로 이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10년이 넘도록 (선구자가)친일 음악이라고 지적해 왔는데, 광주시는 그것도 모르고 3·1절이라는 중요한 날에 기념공연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같은 지적에 광주시는 부랴부랴 공연 계획을 수정, 본공연에선 ‘선구자’를 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함’은 남는다.

김순흥 지부장이 현장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타종식에 앞서 ‘선구자’가 3·1절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불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광주시 관계자는 “김순흥 교수님의 지적을 받고 혼란서러워 본 공연에선 ‘선구자’를 빼기로 했다”며 “이 노래 자체는 독립군의 기상을 표현하는 곡으로 알려져있고, 많이 불려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곡가 등의 행적이 특별히 문제가 된다는 것은 몰랐다”며 “공연을 준비한 기획사 쪽에서도 그렇게만 알고 ‘선구자’를 선곡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누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배경까지는 검증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며 “이와 관련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순흥 지부장은 시가 지적에 따라 ‘선구자’를 공연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선 “다행이다”면서도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특히 “‘선구자’는 독립운동가를 상징하는 노래가 아니다”며 “말을 타고 달리는 일본군을 부러워하는 내용이다”고 꼬집었다.

‘선구자’는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라는 시에 곡을 붙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노랫말 중 “말 달리는 선구자”가 만주벌판을 누빈 독립투사를 연상케한다고 해 독립군의 기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 지부장의 지적이다.

김 지부장은 “기획사가 선곡을 했더라도 타종식 자체는 광주시가 주관한 행사가 아니었나? ‘친일음악’이라는 것도 모르고 준비한 것 자체가 문제다”며 “반성을 통해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경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3-01> 광주드림

☞기사원문: 광주시 3·1절 기념행사서 친일노래 불려질뻔

토, 2018/03/0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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