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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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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있던 ‘조선부로수용소’의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8/09/07- 10:00

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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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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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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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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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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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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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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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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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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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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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총리,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리석은 인간”, “하찮다”고 표현해
(선데이저널=채수영 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어리석은 인간(노로마,???)”, “하찮다(쯔마라나이, ?????)”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럽(프랑스)의 유명풍자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일본 소식통의 주장을 인용하여 아베 총리가 최근 진행된 ‘일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극렬히 비난했다고 전했다.

‘일본회의’는 일본 우익 최대로비단체로 1997년 우파단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 결성한 조직이다.

현재 아베 총리를 비롯한 대다수 각료가 일본회의 멤버로 있으며 ‘기본운동방침’은 황실 존숭(천왕제 부활, 국민주권 부정), 헌법 개정, 국방의 충실(재무장), 애국 교육 추진, 전통적 가족 부활이다.

아베 총리는 이 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 본토 상공을 가로지른 것을 두고 북핵문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무능을 지적했다.

최근 8월 29일과 9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넘어가면서 일본은 경보시스템을 발동하고 홋카이도 지방 대피훈련을 벌린바 있다.

아베 총리는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을 혼란에 빠트린 것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렸다.

문재인 대통령을 ‘무능’하다고 표현하면서 한국이 현재 북한 핵, 미사일문제에 대한 뽀족한 수가 없는 현실에 대해 지적했다고 한다.

또한 아베 총리는 ‘일본회의’에서 한일위안부합의 역시 재논의할 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하찮다(쯔마라나이)’고 평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위안부합의 수정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8월 17일에도 위안부 합의 변경과 관련해 “골대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지금까지 합의한 것이 전부다”라고 위안부 합의 변경에 대해 선을 그은 바 있다.

아베 총리는 현재 일본대사관 뒤 소녀상을 옮길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한국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뜻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아베 총리는 2013년 11월 한국을 두고 “어리석은 국가”라는 망언을 쏟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하찮다”라고 표현한 것 역시 과거 입장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017-09-20)

 

 

 


일, 2017/10/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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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님께 요청 드릴 사항 2가지가 있어서 게시판에 글 남깁니다.

1. 박정희가 일제때 활동했던 사진과 기록(어느 문헌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해방 후 빨치산

행적에 대한 사본을(원본 명시)  우편으로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요청 드리는 이유는 제 70 노모가 박정희(박근혜) 숭배자(일명 박사모)라 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기록,

뉴스 매체가 조작이라면서 신뢰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 개소리의 진원지인 유튜브 관련 박사모 관련 사이트는 왜 이리 신뢰하는지 참…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담긴 사진과 기록 내용, 해방 후  빨치산 행적을 공식 문서로 해 확인시켜주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제 메일로 받는 방법도 확인해 볼 수 있으나 정확한 기록에 의한 것이 더 확실한 팩트로 전달할 수 있기에

부탁 드립니다.  보내주실 주소는 제 개인 정보란의 집 주소(인천)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사 비용 및 우편요금이 발생한다면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 )

2. 핸드폰 기기 변경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재 다운로드 하려는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기존 핸드폰 기기(아이폰6s plus)에서 10,000으로 구매했는데 기기 변경(LG G6)하고 다시 받으려고 하니

다시 10,000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라서… ㅠㅠ

아니면, 다운로드 받은 사람의 기기 정보와 인적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연결하여 기기 변동이나 전화번호

변경시에도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수정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 2017/10/09-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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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에필로그

수, 2017/10/1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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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1

금, 2017/10/13- 12:52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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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1

월, 2017/10/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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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수리온부터 사드까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 =군의 적폐청산과 개혁방향

진행: 김미화 
출연: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하어영 한겨레21 기자

본 프로그램은 포럼 진실과 정의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 ·한겨레21 ·한겨레TV와 함께 합니다. 

프로듀서: 이경주ㅣ종합편집: 문석진ㅣ타이틀: 이정온ㅣ카메라: 정동화 이규호 김도성 조성욱ㅣ메이크업 : 강도겸ㅣ기술: 박성영 ㅣ연출: 이규호
제작: 한겨레TV

※ 한겨레TV <2017.10.17>

☞기사원문: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3화 (안보)

※ 관련영상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2화 (경찰)<2017.10.10>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1화 (검찰과 국정원) <2017.9.26>

화, 2017/10/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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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7/10/201710.pdf

목, 2017/10/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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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

목, 2017/10/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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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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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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