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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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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29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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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시위현장에 참석하여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문 : 역사학자로서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료 수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습니까?

답 : 수집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중학생 때 광주항쟁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는 탄피를 모았습니다.

문 : 5.18 광주항쟁 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했는데, 탄피를 모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답 : 1980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저는 새벽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5.18 항쟁이 일어날 무렵 〈중앙일보〉 상무지국에서 받은 호외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달리며 제 손으로 두 차례나 이틀 연속 호외를 뿌려댔습니다. 하나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인데 소요조종자로 김대중, 리영희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자는 그 헤드라인에 김종필, 이후락 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부의 5.17쿠데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이튿날인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엄포고령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엄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지요. 그 뒤 신문이 반입되지 않아 광주가 봉쇄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장의 호외는 지금도 광주의 부모님 집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 당시의 〈중앙일보〉 수금장부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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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탄핵을 선고하던 날, 광화문광장에서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상태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철모르는 제 또래들은 탄피를 주워서 속칭 ‘짤짤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탄피는 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많았던 금남로와 계엄군의 부분확보작전이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많이 주웠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엄군(20사단)의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당시 탄피를 줍기 위해 그 현장에 나갔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통합병원과 가까운 내방동에 있었거든요. 국군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은 짧은 총격전이었지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8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는 계엄군이나 시민군이 아닌 동네주민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으로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저는 살기 위해 하수구 공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푸집 안으로 피신했습니됐습니다. 저보다도 군인이 더 깜짝 놀라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계엄군이 임시분초로 사용하던 한 이층양옥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여학생이 팔을 잡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군통합병원작전 당시 창문으로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을 받아 팔에 총상을 입은 것입니다. 저를 붙잡은 계엄군은 제 몸을 수색해서 서너 개의 탄피를 발견하고는 “폭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마구 다그쳤습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과 ‘짤짤이’ 하려고 모은 탄피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폭도라면 실탄을 갖고 있지 탄피를 갖고 있겠느냐며 울먹이자 계엄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 밤 그 병사는 날이 어두워 위험하다며 저를 계엄군이 사용하던 임시분초에서 묵게 하고 다음날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군요. 동네사람들이 간밤에 총격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저를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부터 저의 수집벽이 남달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집벽 때문에 대학생 때 또 한 번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80년대 중반 대학(경상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수집벽 때문에 학내에 암약하는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은 것입니다. 매년 5월이 오면 당시 학내에는 광주항쟁이나 민주화 관련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고 캠퍼스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베끼고 각종 유인물을 수집했습니다. 어느 날 총학생회 학생들이 제가 의심스럽다며 이야기를 좀 하자며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제 가방에서 유인물이 나오고 수첩에 대자보 내용과 학내 시위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프락치로 오인한 겁니다. 꼼짝없이 학원프락치로 몰려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과 선배(총대의원회 대의원)가 저를 알아보고 제가 사회학과 학생인 것을 보증해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수집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일제시기 진주지역의 인명록에 등재할 인명 3천4백여 명의 행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명록 때문에 이번에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수집벽이 아닐 수 없지요.

문 : <진주인명록>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드리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전남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김무성 의원의 선친 김용주가 설립한 학교인가요?

답 : 네, 맞습니다. 전남고는 제 모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김용주는 해방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아 임동에 있던 전남방직공장을 인수한 뒤 1966년 방직공장 옆에 중고등학교도 설립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전남고입니다. 남녀공학이 아닌데도 전남고에는 여자학급이 있었는데 바로 방직공장에서 주경야독하는 여공들을 위한 특별학급이 전남고 부설학급으로 방직공장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립학교시절의 전남고는 광주시내 소재 고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이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획일적인 교복과 교모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즉 일제 순사모 같은 학생모와 호크를 채우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고 스마트한 중절모를 쓰고 여학생 교복처럼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이런 교모와 교복은 오직 전남고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다녔지요.
또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선배들이 제일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위에 동참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남고 학생 중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전남고와 같이 있던 부설 전남중에서는 중학생이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또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이 희생당했는데 퇴근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료교사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광주항쟁추모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은 삭제되어 게재)했다가 보안대(현 기무사의 기무부대)에 체포되었고 그 길로 전남고에서도 강제해직되고 말았습니다. 김용주의 사학재단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비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듬해인 1981년 전남고와 전남중이 전격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어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전남고는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과 군사법원이 있던 옛 보병학교자리인 상무대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물론 제가 입학했을 때는 전남고가 방직공장 옆에 있을 때였지만 공립으로 전환된 까닭에 김용주나 사학재단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김용주 동상이나 송덕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용주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기념한 기증비가 교문 수위실 건너편 화단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남고는 김준태 시인 뿐만 아니라 노래 ‘직녀에게’로 유명한 문병란 시인이나 시 ‘봄비’로 유명한 이수복 시인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어서 문학적인 감성을 형성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중 제가 직접 배웠던 영어교사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전남고 선배로는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 등이 있습니다.

문 : 5.18과 관련해서 1982년 3월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죠. 5.18 항쟁이 무자비하게 짓밟 히고 난 직후 그해 겨울 광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시 황금동에 있던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문화원이 있던 황금동은 광주의 돈이 몰리는 번화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윤락가로 유명한 황금동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금동에는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회관도 자리 잡고 있어 저도 중고생일 때 회관 안에 있던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이처럼 황금동은 민족감정이나 자본과 탐욕 등이 엉켜있는 등 온갖 모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미운동의 단초가 열립니다. 시민들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에 의한 5.18 광주학살이 미국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광주항쟁 당시에 일반인들은 설마 자유우방국인 미국이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무력 진압된 후 광주시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컸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처음 일어난 반미운동사건이었고, 문화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도 광주 미문화원에 다시 불이 붙는 2차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부산과 서울에 있던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으로 번지는 등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세력의 폭거와 미국의 방조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은 문부식, 김현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김현장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지켜보고 문부식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그 발단이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5.18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에 가다가 백골단과 전경대에 의해 삼엄하게 둘러싸인 미문화원 앞을 지나치면서 문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광주학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즉시 광주 미문화원에 5.18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이 묵인, 방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책자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내야 할 만큼 저처럼 미문화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시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 : 최근에야 광주학살 진행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진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우리 현대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합니다. 화제를 바꾸어 전라도 광주에서 장성하여 어떻게 경상도 진주로 유학을 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우리 집안의 본적은 대구지만 현재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외가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국구 시민입니다.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 있는 K2 비행장에서 공군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0년대 말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제가 4살 되던 해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이후 저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전라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역차별을 당하셨지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저는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학해 고3 대학입시 때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되고 학비가 싼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되어 지방 국립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산대에 재학중인 외사촌 형님이 진주에 있는 국립대를 소개해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교육’으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전공해야 할 학문은 첫째가 철학이고 둘째가 경제학이고 셋째가 사회학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그중 사회학이 가장 수월하게 보여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까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원 때의 전공은 사회사인데,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경상대라는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경상대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은 1948년에 진주에서 개교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후 진주농대에 농학계열 이외의 학과가 많이 설치되면서 교명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문교부에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겠다고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산시에 있던 사립대학인 마산대학은 1971년 ‘경남대’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았습니다.
결국 1972년 진주농대는 당시 지방국립대에 붙었던 도명을 붙이지 못하고 경상도의 국립대라는 애매한 뜻으로 ‘경상대(慶尙大)’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발음만 들으면 경상대가 일개 대학의 단과대인 경상대(經商大)나 상경대(商經大) 정도로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해 경상대 동문들은 교명변경을 숙원사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남대는 단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대가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어 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박정희정권의 실세였던 ‘피스톨박’ 박종규의 입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명변경 당시 박종규는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고 있으면서 마산대학 이사장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진주농대가 경상대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교가는 여전히 진주농대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 진주 경상대에 진학하여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답 : 당시 경남 거창에서 유학온 진주 교대생이었던 제 아내를 대학 1학년 때 하숙집 친구의 소개로 진주우체국 건너편 다방에서 처음 만났고, 졸업 후 결혼해 2녀를 두고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너무 이야기에 몰두해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높다란 흰색담장에서 총기로 무장한 경교대와 맞닥뜨렸는데 바로 진주교도소(1989년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함)임을 알고 황급히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총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2005년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지금은 서로가 바빠 월말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요즘 말하는 ‘졸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의 아내가 30여 년 전의 애인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문 : 진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 일컬어졌고 양반의 고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울러 진주민란, 형평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한 지역이었죠.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진주로 수학여행을 왔습니다.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남강 촉석루 밑 의암에서 느꼈던 비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상대에 입학한 후 진주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진주목사, 경상우병마절도사, 경남관찰사의 소재지였고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직전까지 경남 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왜색불교를 없애고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청담스님이 진주출신이고,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일컫는 성철스님도 일제 때 진주고보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진주정신’을 낳게 한 것은 저항의 역사도 있지만 그 토양으로서 ‘진주문화’도 있다고 봅니다.
진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1941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에서 나오듯이 흔히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천리(420km)라고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진주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적으로 진주에는 기생문화와 유흥문화가 발달해 진주검무를 비롯해 진주포구락무, 진주한량무, 진주교방굿거리 등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예인들을 낳았는데, 몇 사람을 들면, ????친일인명사전????에오르긴했지만일각에서불세출의‘가요의황제’로추앙하는‘남인수’를비롯해‘산유화’와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재호’, ‘대머리 총각’과 ‘곡예사의 첫사랑’ 등을 작곡한 ‘정민섭’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최초의 종합예술제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진주에서 처음 열렸는데, 바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가 그것입니다.

문 : 진주의 고유한 전통과 독자성이 느껴집니다. 진주민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위 중앙관료 출신이 참여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주의 저항정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1월) 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관민을 모아 격렬히 항전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김시민 목사는 총탄에 맞아 순국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끝 무렵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총공세로 함락됩니다. 이때 논개도 순절합니다. 이와 같이 진주처럼 외세의 침략에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관군이 합심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곳도 드뭅니다.
그러나 조선말 진주지역 토호세력의 수탈이 극심했고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인 민중의 저항입니다. 진주민란은 진주의 병마절도사와 토호세력의 착취로 일어났는데 향반출신인 류계춘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는 농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일어나 의병이 크게 봉기했던 곳의 하나가 진주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진주의 민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서 최초의 한글(국한문 혼용) 지방신문이 탄생합니다.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의 유지들이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입니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에서 쫓겨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에 옵니다.
더구나 천민의 대명사이던 백정을 해방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처음 벌어진 곳도 진주입니다. 1923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사회적으로 이중차별을 받던 백정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형평운동을 주도한 한 선각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출신이었던 강상호였다는 점에서 진주의 진보성과 민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을 이끈 제2차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바로 진주의 사회운동가 강달영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고,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진주의 소년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볼 때 진주가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에 깃든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다음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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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과 관련해, 일본이 외교적 협의를 하자며 30일 안에 답변을 달라는 요구를 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외교적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시한까지 제시하며 협의를 빨리 하자는건데, 우리 정부는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입장입니다.

한승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일본은 외교 협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청구권 협정에 대한 양측의 분쟁이 명확하니 분쟁 해결 절차를 밟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답변을 한 달 안에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호사카 유지/세종대 교수 : “일본으로서는 그것(강제 집행)을 조금이라도 멈추기 위해서 빨리 일단 협상에 들어가면 모든 게 멈출 수가 있다, 이런 속셈이죠.”]

그런데 외교적 협의와 관련된 청구권협정 3조 1항엔 답변 시한이 규정돼 있지 않은 데다가, 갈등이 첨예한 사안에 시한을 정해 답을 달라는 건 외교적 결례에 해당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한 시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방침입니다.

또 위안부 문제 등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같이 다루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는지에 대한 한일 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외교 협의로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시현/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청구권 협정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었어야 하는데 묻지 않은 채로 봉합을 한 상태에서 돈만 오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에 대한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가 국가간 협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국이었던 독일은 정부와 기업이 반반씩 부담해 강제 노동 피해자 166만 명에게 개별 배상했습니다.

KBS 뉴스 한승연입니다.

한승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4> KBS 

☞기사원문: 日, 강제징용 협의 ‘30일 내 답변’ 요구…외교 결례 논란

월, 2019/01/1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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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나 남영동, 후암동, 원효로 일대를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나 적산(敵産)가옥을 자주 만난다. 용산고 건너편 후암동 언덕길에는 이곳이 마치 일본의 어느 마을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주변에 십여 채의 일식 주택이 늘어서 있다. 숙대입구역 동편 먹자골목에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50년의 전통을 지닌 부대찌개 집들이 여전히 공존한다. 주변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던 일본군 사령부와 주한 미군이 남긴 이중 식민의 흔적이리라. 이제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느낄 만큼 이런 적산가옥이 점점 사라져 간다.

숙명여대 올라가는 길의 청파동 골목 한 귀퉁이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에서도 전통적인 골목이 많기로 유명한 청파동 골목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없는 듯하다. 지난해 여름 개관식을 한 신생 박물관이다. 이곳은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의 상흔과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건물 2층 86평의 면적이 일제 침략사, 독립운동사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으로 채워졌다.

한국 근대문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땅의 문학과 역사, 제도에 촘촘히 스며든 일본(문화)의 영향을 새삼 생생하게 절감한다. 어찌 문학 연구에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정치, 경제, 건축, 교통, 법률, 교육, 더 나아가 이 땅의 근현대 자체가 일본의 그림자와 이식(移植)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 대한 극복과 저항 역시도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문제의식 아래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 땅의 역사, 식민의 모순과 질곡, 그 상처와 저항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일본에 관한 면밀한 공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리라.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일본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일본을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소설가 최인훈, 비평가 김윤식 등 일본이 우리 문화와 현실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직접 체험하며 누구보다 일본 문화와 지성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는 평택으로 이전한 주한 미군 용산기지 터에는 1200여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이다. 이런 식민지 유산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파악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식민의 흔적을 상징하는 용산 미군기지 터의 옛 건물 한 곳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확대 이전하는 것도 식민의 기억을 응시하기 위한 뜻깊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단지 찬란한 전통에 대한 환기나 낙관적 역사 인식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 김수영이 읊었던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그 슬픔과 분노의 미학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이 땅의 역사와 피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식민을 넘어서는 전망을 얘기할 수 있으리라.

이즈음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최악의 한·일 관계에 봉착해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일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식민의 기억에 대해 정직하게 응시하는 게 필요하겠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1억원이 넘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 마음이 단지 한·일 화해를 위한 움직임만은 아닐 것이다. 양국 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상처와 업보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성금을 기꺼이 보내게 만들었으리라.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를 식민의 기억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한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용산 곳곳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탐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기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86평의 공간은 역시 너무 좁은 게 아닐까.


<2019-01-15> 서울신문

☞기사원문: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각

화, 2019/01/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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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영 한신대 교수.

[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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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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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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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4>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안익태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 

☞서울신문: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일제와 나치 독일의 나팔수였다” 

☞tbs교통방송: 이해영 “안익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즘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 

☞민중의소리: 안익태 친일파,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화, 2019/01/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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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위 징계, 경고…1·2심 “제재 적법”
상고 3년 5개월 만에 전원합의체서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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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 등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가 정당한 것인지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한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은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의 상고심 재판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고 15일 밝혔다. 전원합의체는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2명과 대법원장으로 구성된다.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거나 기존 판례 등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다.

2012년 나온 백년전쟁은 진보성향의 역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했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 독립운동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전쟁으로 보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다뤘다. 당시 진보·보수 진영이 나뉘어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RTV는 위성방송 등을 통해 2013년 1~3월 두 편을 모두 55차례 방영했다. 그러자 방통위는 그해 8월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뤘다”며 프로그램 관계자를 징계·경고하고 이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라고 명령했다.

1·2심은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RTV 쪽은 2015년 8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3년 5개월 만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본격 심리하게 됐다.

한편 지난해 8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지영 감독과 프로듀서 최아무개씨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최우리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5>한겨레 

☞기사원문: 다큐 ‘백년전쟁’ 제재 정당성, 대법원 전원합의체 간다 

※관련기사

☞PD저널: 대법원, “‘백년전쟁’ 제재 정당” 판결 뒤집나 

☞뉴시스: 역사다큐 ‘백년전쟁’ 제재 취소, 대법 전합서 가려진다 

☞뉴스1: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 사건, 대법 전원합의체 회부 

☞SBS: 대법, 이승만·박정희 역사다큐 ‘백년전쟁’ 사건 전합 회부 

☞KBS: 대법, 이승만·박정희 역사다큐 ‘백년전쟁’ 사건 전합 회부

화, 2019/01/1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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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李植盜問朝家

 

朝家多勢客(조가다세객)

孰虎孰狐狸(숙호숙호리)

巧語令民惑(교어령민혹)

迎新起大疑(영신기대의)

 

李植이 지은 ‘盜’라는 詩에 화답하여 朝廷에 묻는다

 

朝廷에 세력 있는 사람도 많으니

뉘라서 범이며 또한 뉘라서 狐狸

교묘한 말로 백성을 미혹케 하니

새해를 맞아 큰 의심을 일으킨다.

 

<時調로 改譯>

 

조정에 勢客 많으니 누가 범 누가 狐狸

교묘한 말재주로써 백성들을 미혹하니

오호라! 새해를 맞아 큰 의심 일으킨다.

 

*李植: 조선 仁祖 때 名臣(1584~1647). 字는 여고(汝固). 號는 택당(澤堂). 남궁

외사(南宮外史).  漢學  4대가의    사람으로  이조 판서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斥和派)로  淸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다. ≪선조실록≫을  전담하여  수정

하였으며,  저서에 문집 ≪澤堂集≫이  있다  *朝家: 조정(朝廷). 조당(朝堂) *勢客:

세력을  가진 자.  勢力家 *狐狸: 여우와 살쾡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巧語: 巧言. 교묘하게 꾸며 댐. 또는 그 말

*迎新: 새해를  맞음.  새로운  것을  맞이함 *大疑: 크게  의심함. 큰 의심이나 의혹.

 

<2019.1.16, 이우식 지음>

수, 2019/01/1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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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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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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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1)
– 나의 생애 첫 시민운동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나는 지난 1993년 1월 16일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당시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울산의 현대조선 중공업에 파견근무할  무렵 우연히 신문인지 잡지의 하단에 조그만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애타게 찾던 단체였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 것이리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만일 그런 단체가 없었다면 나는 그런 단체를 만들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유학중이던 1980년대 말경 우연한 기회에 문과성향인 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분야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적(?) 생각을 하면서, 해방후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만악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89년 어느때인가?  외국인 유학생 숙소 앞 주차장에서 만난 후배를 붙잡고 내가 두시간 가량이나 ‘친일 청산’ 관련 얘기를 하는데  고역이었다는..나는 그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걸 안 그 후배가 나에게 들려준 일화가 있다.

1994년 내가 근무하던 직장(연구소)이 대덕연구단지로 옮기면서 나도 대전으로 이사하게 됐는데, 대전 와서 수소문을 해보니 대전에도 회원이 있었다. 회원이 당시 6~7명 정도였는데, 외롭지만 뜻이 맞는 우리끼리는 매달 꾸준히 3~4 명씩, 많이 나오면 5~6 명씩 모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김OO 소장님이 월례모임에 내려오셔서 나에게 지부장을 맡아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냥 박수로 지부장이 되어버렸다.

당시만 해도 어디 가서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고 소개하면 일반 사람들 중엔 그게 뭐하는거냐는 질문부터 빨갱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민운동 한다는 사람들도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대전지부장이라고 하면 멀리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때였다.

더구나 대전지역은 그런 쪽에서는 더 불모지였다.  그래서 민문연 대전지부가 1990년 중후반 경 어느 해 현충일날 처음으로 대전 현충원 앞에서 “친일청산”, “친일군인 김창룡묘 대전 현충원에서 이장하라”라는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할 때는 아마 7~8 명 나온 걸로 기억한다.   그저 우리 월례모임 장소를 현충원 앞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은 정도였다.

그저 그렇게 몇 명이서 대전 현충원 앞 다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현수막 하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 십여장 걸어놓고,  피켓 몇 개 들고 김창룡의 악행과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국립 현충원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바로보기시민연대(물총) 대전대표로도  있으면서 안티조선 집회를 어떤 해에는 거의 분기에 한번씩 할 정도로  왕성하게 언론개혁 운동을 했는데, 그렇게 친일청산 운동, 안티조선 운동, 통일연대 운동 등 찬바람 맞는 운동을 하며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됐고, 그들도 점차 우리 민문연이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와 대전지부는 대전 시민사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우리 대전지부의 친일청산-김창룡묘 이장촉구 집회에 다른 시민단체 사람들과 단체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전지역의 많은 시민단체가 함께 동참하는 상징적 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젠 민문연 대전지부의 위상도 대전지역에서 크게 올라가 있다고 알고 있다.

그후 2003년경부터 나는 개인 사정으로 현장에서 멀어져있다가, 2010년대 들어 다시 시민활동을 재개했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회원된지 22년만인 지난 2015년 3월, 9대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운영위원장을 하던 2년 동안은 정말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민문연 일 뿐 아니라 장준하선생 관련 일과 평화협정 관련 일 등 다른 일들도 같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청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가며 대전과 서울을 오간 일은 뒤돌아보면 지금 같아서는 어림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시민활동을 민족문제연구소로 시작하여 오늘 26년을 맞은 나는 지금 민문연으로부터 제명된 상태다.

2019. 1. 16.
회원가입 26년째 되는 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전 운영위원장 여인철

목, 2019/0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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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음해세력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입장문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와 관련된 논란으로 본의 아니게 여러 단체의 고유 업무에 지장을 주고 각종 대화방이 오염된 사태에 대해, 이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연구소 와해 기도에 앞장서고 있는 여 모씨는 2015∼2016년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던 자로서, 재임기간의 독선과 월권으로 역대 운영위원장이 모두 재추대되어 연임한 것과 달리 경선에서 큰 표 차이로 낙선하였습니다.

여 씨는 낙선을 자성의 계기로 삼기는커녕 이를 집행부의 음모로 돌리며 경선결과에 승복하지 않다, 작년 3월 총회를 계기로 어처구니없는 비방과 음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 지역과 직능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여 씨의 제명을 이사회에 건의하였으며, 소명절차를 거쳐 2018. 5. 11. 제명처분되었습니다.

이후 여 씨는 동조세력을 규합하여 소위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을 조직하고 온오프라인 허위사실 유포, 회비불납운동 전개, 1인 시위, 기자회견, 민원제기 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연구소의 업무를 방해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회원이 아니거나 오랜 기간 회비조차 납부하지 않은 무자격자들까지 동원하여 연구소를 공격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연구소를 불법 부정 비리 횡령이 만연한 문제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집행부 총사퇴와 ‘해산’까지 운운하고 있습니다. 정책 방향이나 사업성과에 잘못이 있다면 이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함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 연구소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노골적인 사찰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역경을 견뎌내고 나니 이제 연구소를 권력과 자산으로 이해하는 어이없는 무리들이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저들의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까닭은 합리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적인 조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노리는 바가 바로 이전투구식의 논란 확산이기에 상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들의 횡포는 상상을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의 공간을, 관계자들의 자제요청을 무시하면서, 허위사실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연예부까지 포함하여 모든 기자들의 공개메일에 가짜뉴스를 공급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고 관용과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연구소는 사실무근의 비방과 음해에 단호히 대처해 반드시 책임을 묻기로 했습니다. 우선 여 씨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제소하기로 하고 현재 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중 1명은 이미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상태입니다. 진위를 가려보지도 않고 부화뇌동하는 이들에게도 엄중 경고합니다. 어이없는 선동에 현혹되어 허위사실을 전파하다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법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지만 작년 한 해 내내 저들에게 시달리며 일에 집중할 수 없었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3·1운동 100주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인 올해는 과업에만 전념하고 싶은 것이 저희들의 간곡한 바램입니다.

본의 아니게 시민사회에 폐를 끼친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리면서 신속한 조치와 정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9. 1. 18.
민족문제연구소

* 제소가 1차 마무리된 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회의 공식 입장과 이 사태의 전후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따로 발표하겠습니다.

금, 2019/01/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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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l4kU/4

2019년 1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에 대하여 법적조치를 진행하고 있다는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요약하면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이 허위사실 유포, 사실무근의 비방과 음해, 업무방해, 명예훼손….
주동자를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제소키로하고 법적 절차 진행중….

입장문 전문 보기

2018년 3월 24일 정기총회는 목불인견의 민주주의 파괴의 현장이었습니다.
임헌영 소장은 발언 중인 회원에게 회원이 아니라며 퇴장을 요구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회원들은 분노했고 발원권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상근자와 일부 회원이 물리력을 동원해 마이크를 뺏고 발언을 못하게 했습니다.

현장 녹취 보기  (용량이 커서 녹음파일은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순간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믿음이 깨졌고, 그동안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믿음에 가려진 문제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승인 정관 소위 운영정관이라고 하는 가짜 정관, 소집절차를 지키지 않고 이사 선출 및 등기부 등재…

회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 설립에 이르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문제는 봇물처럼 터져나왔습니다.

지난 12월 14일 서울시교육청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미승인 정관 사용’ ‘기부금 사용 부적정’을 이유로 행정처분했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인가? 아닌가?

민족문제연구소 정관 제6조(회원 자격)
① 이 법인의 회원은 본 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소정의 입회원서를 제출하여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매월 회비 명목으로  약정 금액을 인출하고 있습니다.
이사회에서 회원으로 승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가입한 회원이 (2017년 기준) 1만3천여 명이고, 회비 납부자는 9천8백여 명, 월 회비는 약 1억2~3천만원에 이릅니다.
지난해 역사관 개관식때 대통령, 서울시장, 서울시교육감이 축전을 보낼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단체가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입니다.
대한민국에 이러한 규모의 단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위상과 달리 운영상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3년부터 임원을 포함한 고작 10명이 모여 총회를 열고 주요 사안을 의결했습니다.
수백, 수천의 회원에게는 철저히 숨겼습니다.
만약 의사록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다행히 민바행이 의사록의 존재를 알았고,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하여 입수했습니다
이때 민족문제연구소는 교육청에 정관과 의사록이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 요청했습니다.
민바행은 회원에게 정관과 의사록을 비공개하라는 단체가 어디에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사록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허위라고 주장하는 민바행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에게 소집통지 하지 않은 10명의 총회에서 이사 선출 및 등기부 등재
● 10명이 개최한 총회는 민법과 정관에서 정한 소집절차의 중대한 하자로 모든 결의는 무효

● 정관, 의사록을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
● 2003년부터 임원과 직원이 포함된 고작 10명이 총회 개최 주요 사안 의결
● 미승인 정관 이른바 가짜 정관을 사용하여 설립허가 취소가 될 수 있는 위험 자초
● 1년에 두 번 열리는 정기총회의 실체
● 2014년부터 2017년까지 10명이 처분한 기부금 58억8천여만원의 행방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기부해 참여해 매입한 청파동 5층짜리 빌딩이 민족문제연구소와 별개의 법인인 재단법인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단독소유로 등기
● 2016년 8월부터 매월 수천만원씩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수입이 된 기부금의 실체
● 서울시교육청에 허위로 신고한 총회 및 이사회 의사록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낸 회비로 민문연과 별도인 단체의 상근자에게 지급한 급여 및 운영비 문제
● 매월 납부되는 회비가 1억2~3천여만원에 이르지만, 보고서 마다 차이가 회비와 기부금 총액
● 본부에서 회원의 도장을 보관하고, 전화해서 찍는 의사록 문제
등….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이상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

그동안 민바행이 제기한 의혹 가운데 하나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고작 10명이 모여 기부금 58억 8천여만원을 기본재산에 편입하지 않고 용도를 변경했다.
사용 용도는 자료조사 및 연구비 지원인데 그 결과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 결과물이 무엇인가?
출처는 민문연이 서울시교육청에 신고한 의사록이다.
어디가 허위인가?
민족문제연구소는 답하라!!!

토, 2019/01/19-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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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의 세계 최

빈곤 전쟁거지나라였던 한국을…

 

1965년 일한협정 이후

 

수백억조의 무상 경제원조와 무상의 산업기술 원조

그리고 산업생산 공장을 지어줘…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의 세계 최

빈곤 전쟁 거지나라였던 한국을 지금 세계 경제11위

의 경제대국으로 경제발전시켜 잘살게 해준 고마운

일본과 남한인 한국은 경제협력 및 군사협력을 하야

오래오래 잘살자.

 

국가보안법을 더더욱 강화하야…

 

6.25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잿더미로 만들

고 수백만명의 전쟁 기아 및 전쟁 고아를 발생하게

만든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의 북괴를 찬양하는 한총

련 똥진당 빨갱이놈년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인천 맥

아더 장군 동상 아래서 일렬로 무릎꿀쳐 니뽄도로 대

갈통 처참히 잘라 죽이는 그날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

나이다.

토, 2019/01/1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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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전주 이가네의 미개한 조선을 일본이 통치하

게 하여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로 이끈 이완용 공작

각하야 말로 진정 존경 받아 마땅하다.

 

일본이 통치했기에 양반쌍놈의 신분제 철폐 그리고

양반쌍놈 남녀 할거 없이 공평하게 학교에서 서양의

근대화 교육을 받을수 있었던게다.

 

그리고 중국 청나라 짱깨새끼들한테 조공이나 바치

고 여자나 바치던 병신나라 조선을 중국 청나라 짱깨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던게다.

 

그런 고마운 일본과 조선 근대화에 이끈 친일파 분들

을 욕되게 하지말고 나라의 국토위협을 꿈꾸며 호시

탐탐 남조선인 한국의 안보를 노리는 북괴 빨갱이 척

결이 최우선인게다.

토, 2019/01/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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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email protected]

준비 과정부터 18년 걸친 대장정
시민들 자발적 모금이 큰 원동력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 정하고
편찬위원들 지인까지 수록했는데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동의 못해

특정한 사람 매도할 의도 없어
지도층 사람들이 행동을 할 때
훗날 받을 평가 신경쓰도록 영향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 미비
여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 중

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71)은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편찬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어느 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비난하는 신문 형식의 전단이 대량 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한 강연회에서 한·미 공조와 더불어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친북적’이라는 억지 주장이었다. “거기에 도표가 나오는데 강만길 선생-한완상 전 부총리-나 이런 식으로 무슨 간첩단 사건처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당시는 편찬위원장을 맡아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일부 교회 사람들이 연세가 아흔이 넘은 장모님에게 ‘당신 사위 빨갱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멈출 수 없었다. “1949년 친일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잇는 작업”이자 “역사정의를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가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음해와 소송전을 극복하고 2009년 11월8일 친일파 4389명이 담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발간기념식장 대관마저 취소되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으로 행사장을 옮겨 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사전을 헌정했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 10주년이 됐다. 윤 위원장을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 사전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나.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출범한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친일 문제를 꼭 한번은 다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해왔다. 준비 과정부터 따지자면 18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사이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오욕의 역사’를 제대로 성찰해야 한다는 국민적 지지와 성원이 밑바탕이 되었다.”

– 시민 참여가 가장 큰 원동력인 건가.

“한 예로 2005년쯤 기초조사 사업차 5억원 정도가 정부예산으로 편성됐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로 전액 삭감됐다. 이를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7억원이 모였다.”

– 왜 ‘사전’이라는 형태이고 명칭은 ‘친일인명사전’이었나.

“사전은 가치중립적이다.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사전이 적합하다고 봤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최근까지 널리 사용된 역사화된 용어다. 그대로 쓰자고 했다.”

–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했나.

“전문연구자 150명이 편찬위원을 맡았다. 180여명의 한국근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위원으로 참여했다. 1차 자료를 방대하게 조사했다.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사전에 수록 예상자를 발표해 이의신청까지 받았다.”

– 주변의 우려도 많았을 것 같다.

“2002년부터 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 한성대 총장 선거를 앞두고 보수적 교수사회에서 친일 청산에 앞장서는 게 총장이 되는 데 도움이 안된다는 우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총장이 안되더라도 이 일은 피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교수도 하고 총장도 했지만 역사학자로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것이 평생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 일부 보수세력은 편파성을 물고 늘어졌다.

“사전을 편찬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던 적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우리 문중에 친일한 사람이 많았다. 평소 존경하고 가까이 지낸 목사님의 아버지도 들어갔다. 안타깝긴 하지만 역사화는 개인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스승인 백철, 지도위원인 강만길 선생의 지도교수였던 신석호,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인 임종국 선생의 부친인 임문호까지 사전에 올랐다. 이게 편파적인가.”

–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누구였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위원장인 내가 최종 결정을 해야 했다. 당시 쟁점 중 하나가 ‘혈서’였다. 일제에 충성하는 혈서를 썼다는 얘기는 많이 돌아다녀도 막상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에 실린 박정희의 낯 뜨거운 만주군관학교 지원 혈서 기사를 찾아냈다. 박정희를 뺄 수 없었다.”

– 의외의 친일파도 있었나.

“장지연이 대표적이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로 얼마나 애국자로 칭송받았나. 조사를 해보니 1910년 일제에 병합된 뒤 경남일보 주필 등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친일 시문을 기고했다.”

– 일부 보수세력은 색깔론, 공과론, 민족공범론으로 비난했다.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역사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특정한 사람을 매도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역사가 엄중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 발간 후 10년 동안 호응이 얼마나 있었나.

“최근까지 8쇄를 찍었고 1만1000질 정도가 나갔다. 처음에 출판 전문가들이 와서 사전은 어차피 많이 팔리는 종류가 아니니 초판 500질만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2000질이 순식간에 다 나갔다. 한 질이 30만원이다. 그런데도 초판 대부분을 개인 후원회원들이 구매했다. 집안의 가보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 사전이 10년간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 ‘무슨 행동을 하거나 발언할 때 훗날 어떻게 평가를 받을 것인가’하는 문제 인식이 커진 것 같다. 지도층 사람들이 앞으로 행동 하나, 발언 하나에 신경 쓰도록 만들게 된 것 같다.”

– 편찬 작업이 선생님에게 끼친 영향도 있는 건가.

“언제 한 인터뷰에서 좌우명을 묻길래 준비 없이 ‘역사학도로서 훗날 어떻게 내 행동과 발언이 평가받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행동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신 앞에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한다’고 답변했다. 이후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민족과 역사 앞에 행위가 바르지 않으면 결국 심판을 받는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작업은 지속되나.

“아직 미비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가 그렇다. 여기에는 다수의 전문인력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민간기구라 여건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

–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을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된 사건이다. 그 혁명을 ‘민’이 주도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우리 근대사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갔던, 일제에 순응했던 사람들과 3·1운동으로 핍박받았던 사람들, 그 둘이 대비가 된다. 3·1운동에서 민이 들었던 횃불이 오늘날의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 힘으로 <친일인명사전>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인터랙티브] 맹렬한 무장투쟁가, 아나키스트 역사가…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100년 전,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3·1운동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택한 방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만주에 정착해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고, 누군가는 머나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이념과 노선도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 안에서도 누군가는 맹렬한 무장투쟁가로, 누군가는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대중운동가로 궤도를 달리했다. 만약 내가 독립운동가라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지 알아보자.

▶ [인터랙티브]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링크 클릭이 안 될시 주소창에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myact/ 를 입력해주세요.

토, 2019/01/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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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의 항소심서 “피해자에 8천만∼1억원 배상” 1심 판결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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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선고가 끝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인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심에서도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12부(임성근 부장판사)는 18일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27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 1인당 8천만∼1억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한 원고들은 당시 대부분 10대 초반이었으나 위험한 작업에 종사했고, 70년이 넘도록 보상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후지코시와 일본이 나이 어린 원고 등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교사 등 연장자를 동원하거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등 기망·회유·협박 등 수단을 동원해 근로정신대에 지원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앞서 일본 법원이 후지코시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 국내에서까지 기판력(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본 법원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 하에 당시 시행된 메이지헌법 등에 근거해 후지코시의 책임을 판단했다”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일청구권 협정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는 후지코시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2003년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해 패소했다는 것만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애사유가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며, 소멸시효도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928년 설립된 후지코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12∼18세 한국인 소녀 1천여명을 일본 도야마 공장에 끌고 가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피해자들은 교육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지원해 군대식 훈련과 매일 10∼12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급여는 받지 못했고, 열악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외출이 제한되고 감시당했다.

피해자들은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도야마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재판소는 한일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패소 판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11년 이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이 신일본제철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고, 일본 법원 판결의 국내 효력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자 이후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이와 같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에 따라 후지코시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어진 항소심은 앞선 신일본제철 상대 소송의 최종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을 거쳐 돌아온 재상고심의 결론을 대법원은 5년간 차일피일 미뤘다.

최근의 검찰 수사로 이렇게 결론이 미뤄진 배경에는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청와대 사이에 ‘재판거래’ 의혹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결국 지난해 10월에야 대법원은 최종 승소 판결을 했다.

년간 기다린 항소심 재판부는 이와 같은 대법원 판단에 따라 후지코시 측의 항소를 기각했다.

[email protected]

<2018-01-18> 연합뉴스 

☞기사원문: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 2심도 승소…”일본이 기망·협박”(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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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심도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 배상해야” 

뉴시스: 日근로정신대 피해자 측 “법원, 아동노예 불법 인정” 

천지일보: 日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최대 1억 배상’

토, 2019/01/1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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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그냥 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도움 요청합니다.

월, 2019/01/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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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1/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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