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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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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29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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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시위현장에 참석하여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문 : 역사학자로서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료 수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습니까?

답 : 수집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중학생 때 광주항쟁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는 탄피를 모았습니다.

문 : 5.18 광주항쟁 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했는데, 탄피를 모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답 : 1980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저는 새벽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5.18 항쟁이 일어날 무렵 〈중앙일보〉 상무지국에서 받은 호외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달리며 제 손으로 두 차례나 이틀 연속 호외를 뿌려댔습니다. 하나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인데 소요조종자로 김대중, 리영희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자는 그 헤드라인에 김종필, 이후락 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부의 5.17쿠데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이튿날인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엄포고령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엄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지요. 그 뒤 신문이 반입되지 않아 광주가 봉쇄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장의 호외는 지금도 광주의 부모님 집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 당시의 〈중앙일보〉 수금장부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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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탄핵을 선고하던 날, 광화문광장에서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상태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철모르는 제 또래들은 탄피를 주워서 속칭 ‘짤짤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탄피는 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많았던 금남로와 계엄군의 부분확보작전이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많이 주웠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엄군(20사단)의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당시 탄피를 줍기 위해 그 현장에 나갔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통합병원과 가까운 내방동에 있었거든요. 국군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은 짧은 총격전이었지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8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는 계엄군이나 시민군이 아닌 동네주민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으로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저는 살기 위해 하수구 공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푸집 안으로 피신했습니됐습니다. 저보다도 군인이 더 깜짝 놀라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계엄군이 임시분초로 사용하던 한 이층양옥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여학생이 팔을 잡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군통합병원작전 당시 창문으로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을 받아 팔에 총상을 입은 것입니다. 저를 붙잡은 계엄군은 제 몸을 수색해서 서너 개의 탄피를 발견하고는 “폭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마구 다그쳤습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과 ‘짤짤이’ 하려고 모은 탄피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폭도라면 실탄을 갖고 있지 탄피를 갖고 있겠느냐며 울먹이자 계엄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 밤 그 병사는 날이 어두워 위험하다며 저를 계엄군이 사용하던 임시분초에서 묵게 하고 다음날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군요. 동네사람들이 간밤에 총격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저를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부터 저의 수집벽이 남달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집벽 때문에 대학생 때 또 한 번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80년대 중반 대학(경상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수집벽 때문에 학내에 암약하는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은 것입니다. 매년 5월이 오면 당시 학내에는 광주항쟁이나 민주화 관련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고 캠퍼스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베끼고 각종 유인물을 수집했습니다. 어느 날 총학생회 학생들이 제가 의심스럽다며 이야기를 좀 하자며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제 가방에서 유인물이 나오고 수첩에 대자보 내용과 학내 시위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프락치로 오인한 겁니다. 꼼짝없이 학원프락치로 몰려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과 선배(총대의원회 대의원)가 저를 알아보고 제가 사회학과 학생인 것을 보증해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수집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일제시기 진주지역의 인명록에 등재할 인명 3천4백여 명의 행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명록 때문에 이번에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수집벽이 아닐 수 없지요.

문 : <진주인명록>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드리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전남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김무성 의원의 선친 김용주가 설립한 학교인가요?

답 : 네, 맞습니다. 전남고는 제 모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김용주는 해방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아 임동에 있던 전남방직공장을 인수한 뒤 1966년 방직공장 옆에 중고등학교도 설립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전남고입니다. 남녀공학이 아닌데도 전남고에는 여자학급이 있었는데 바로 방직공장에서 주경야독하는 여공들을 위한 특별학급이 전남고 부설학급으로 방직공장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립학교시절의 전남고는 광주시내 소재 고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이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획일적인 교복과 교모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즉 일제 순사모 같은 학생모와 호크를 채우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고 스마트한 중절모를 쓰고 여학생 교복처럼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이런 교모와 교복은 오직 전남고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다녔지요.
또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선배들이 제일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위에 동참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남고 학생 중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전남고와 같이 있던 부설 전남중에서는 중학생이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또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이 희생당했는데 퇴근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료교사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광주항쟁추모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은 삭제되어 게재)했다가 보안대(현 기무사의 기무부대)에 체포되었고 그 길로 전남고에서도 강제해직되고 말았습니다. 김용주의 사학재단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비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듬해인 1981년 전남고와 전남중이 전격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어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전남고는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과 군사법원이 있던 옛 보병학교자리인 상무대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물론 제가 입학했을 때는 전남고가 방직공장 옆에 있을 때였지만 공립으로 전환된 까닭에 김용주나 사학재단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김용주 동상이나 송덕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용주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기념한 기증비가 교문 수위실 건너편 화단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남고는 김준태 시인 뿐만 아니라 노래 ‘직녀에게’로 유명한 문병란 시인이나 시 ‘봄비’로 유명한 이수복 시인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어서 문학적인 감성을 형성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중 제가 직접 배웠던 영어교사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전남고 선배로는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 등이 있습니다.

문 : 5.18과 관련해서 1982년 3월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죠. 5.18 항쟁이 무자비하게 짓밟 히고 난 직후 그해 겨울 광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시 황금동에 있던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문화원이 있던 황금동은 광주의 돈이 몰리는 번화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윤락가로 유명한 황금동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금동에는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회관도 자리 잡고 있어 저도 중고생일 때 회관 안에 있던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이처럼 황금동은 민족감정이나 자본과 탐욕 등이 엉켜있는 등 온갖 모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미운동의 단초가 열립니다. 시민들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에 의한 5.18 광주학살이 미국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광주항쟁 당시에 일반인들은 설마 자유우방국인 미국이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무력 진압된 후 광주시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컸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처음 일어난 반미운동사건이었고, 문화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도 광주 미문화원에 다시 불이 붙는 2차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부산과 서울에 있던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으로 번지는 등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세력의 폭거와 미국의 방조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은 문부식, 김현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김현장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지켜보고 문부식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그 발단이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5.18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에 가다가 백골단과 전경대에 의해 삼엄하게 둘러싸인 미문화원 앞을 지나치면서 문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광주학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즉시 광주 미문화원에 5.18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이 묵인, 방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책자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내야 할 만큼 저처럼 미문화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시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 : 최근에야 광주학살 진행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진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우리 현대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합니다. 화제를 바꾸어 전라도 광주에서 장성하여 어떻게 경상도 진주로 유학을 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우리 집안의 본적은 대구지만 현재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외가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국구 시민입니다.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 있는 K2 비행장에서 공군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0년대 말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제가 4살 되던 해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이후 저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전라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역차별을 당하셨지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저는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학해 고3 대학입시 때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되고 학비가 싼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되어 지방 국립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산대에 재학중인 외사촌 형님이 진주에 있는 국립대를 소개해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교육’으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전공해야 할 학문은 첫째가 철학이고 둘째가 경제학이고 셋째가 사회학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그중 사회학이 가장 수월하게 보여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까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원 때의 전공은 사회사인데,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경상대라는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경상대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은 1948년에 진주에서 개교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후 진주농대에 농학계열 이외의 학과가 많이 설치되면서 교명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문교부에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겠다고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산시에 있던 사립대학인 마산대학은 1971년 ‘경남대’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았습니다.
결국 1972년 진주농대는 당시 지방국립대에 붙었던 도명을 붙이지 못하고 경상도의 국립대라는 애매한 뜻으로 ‘경상대(慶尙大)’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발음만 들으면 경상대가 일개 대학의 단과대인 경상대(經商大)나 상경대(商經大) 정도로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해 경상대 동문들은 교명변경을 숙원사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남대는 단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대가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어 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박정희정권의 실세였던 ‘피스톨박’ 박종규의 입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명변경 당시 박종규는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고 있으면서 마산대학 이사장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진주농대가 경상대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교가는 여전히 진주농대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 진주 경상대에 진학하여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답 : 당시 경남 거창에서 유학온 진주 교대생이었던 제 아내를 대학 1학년 때 하숙집 친구의 소개로 진주우체국 건너편 다방에서 처음 만났고, 졸업 후 결혼해 2녀를 두고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너무 이야기에 몰두해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높다란 흰색담장에서 총기로 무장한 경교대와 맞닥뜨렸는데 바로 진주교도소(1989년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함)임을 알고 황급히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총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2005년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지금은 서로가 바빠 월말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요즘 말하는 ‘졸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의 아내가 30여 년 전의 애인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문 : 진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 일컬어졌고 양반의 고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울러 진주민란, 형평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한 지역이었죠.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진주로 수학여행을 왔습니다.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남강 촉석루 밑 의암에서 느꼈던 비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상대에 입학한 후 진주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진주목사, 경상우병마절도사, 경남관찰사의 소재지였고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직전까지 경남 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왜색불교를 없애고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청담스님이 진주출신이고,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일컫는 성철스님도 일제 때 진주고보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진주정신’을 낳게 한 것은 저항의 역사도 있지만 그 토양으로서 ‘진주문화’도 있다고 봅니다.
진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1941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에서 나오듯이 흔히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천리(420km)라고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진주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적으로 진주에는 기생문화와 유흥문화가 발달해 진주검무를 비롯해 진주포구락무, 진주한량무, 진주교방굿거리 등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예인들을 낳았는데, 몇 사람을 들면, ????친일인명사전????에오르긴했지만일각에서불세출의‘가요의황제’로추앙하는‘남인수’를비롯해‘산유화’와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재호’, ‘대머리 총각’과 ‘곡예사의 첫사랑’ 등을 작곡한 ‘정민섭’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최초의 종합예술제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진주에서 처음 열렸는데, 바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가 그것입니다.

문 : 진주의 고유한 전통과 독자성이 느껴집니다. 진주민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위 중앙관료 출신이 참여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주의 저항정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1월) 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관민을 모아 격렬히 항전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김시민 목사는 총탄에 맞아 순국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끝 무렵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총공세로 함락됩니다. 이때 논개도 순절합니다. 이와 같이 진주처럼 외세의 침략에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관군이 합심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곳도 드뭅니다.
그러나 조선말 진주지역 토호세력의 수탈이 극심했고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인 민중의 저항입니다. 진주민란은 진주의 병마절도사와 토호세력의 착취로 일어났는데 향반출신인 류계춘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는 농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일어나 의병이 크게 봉기했던 곳의 하나가 진주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진주의 민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서 최초의 한글(국한문 혼용) 지방신문이 탄생합니다.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의 유지들이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입니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에서 쫓겨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에 옵니다.
더구나 천민의 대명사이던 백정을 해방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처음 벌어진 곳도 진주입니다. 1923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사회적으로 이중차별을 받던 백정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형평운동을 주도한 한 선각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출신이었던 강상호였다는 점에서 진주의 진보성과 민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을 이끈 제2차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바로 진주의 사회운동가 강달영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고,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진주의 소년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볼 때 진주가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에 깃든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다음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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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末日夜

 

昨日芳春節(작일방춘절)

今宵落葉聲(금소낙엽성)

思君尋紙筆(사군심지필)

不忍詠其情(불인영기정)

 

시월의 마지막 밤에

 

어제 꽃 피는 고운 봄철이었는데

오늘 밤에는 잎이 떨어지는 소리

님을 생각하며 종이와 붓 찾지만

차마 그 情일랑 읊지 못하겠구나.

 

<時調로 改譯>

 

어제 봄이었는데 오늘 밤엔 낙엽 소리

님 생각 간절하여 종이와 붓을 찾지만

애틋한 그 情일랑은 차마 못 읊겠구나.

 

*昨日:  어제  *芳春:  꽃이  한창  피는  아름다운 봄. 아름다운  여자의  젊은 시절.

방기(芳紀) *今宵: 금야(今夜). 오늘 밤 *紙筆: 종이와 붓 *不忍: 차마 할 수 없음.

 

<2018.10.31, 이우식 지음>

수, 2018/10/31-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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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10/3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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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권,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 안 돼”

[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피고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의 상고를 기각, 피고가 원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원고들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로 일본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철주금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고 원고들은 2005년 한국에서 다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모두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의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은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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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재심리한 서울고등법원은 다음해 7월 원고들에게 각 1억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함에 따라 장장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결론지어졌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①동일한 내용의소송이 일본에서 패소 확정됐는데 한국에도 효력이 미치는지 ②피고 신일철주금이 구 일본제철의 손해배상채무를 승계하는지 ③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있는지 ④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항변할 수 있는 지로 이 중 원고들의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먼저 대법원은 ①, ②, ④ 쟁점에 관해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으며,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핵심 쟁점인 ③쟁점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의 해석과 효력을 두고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엇갈렸다.

다수의견은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판단에는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칙적으로 부인했고,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권리문제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 불명확하다는 점,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했음에도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된 정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상고를 기각해야 한다는 결론은 다수의견과 같으나 그 이유를 달리하는 별개의견으로 이기택 대법관은 “이미 2012년 5월 24일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해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에 반해 권순일, 조재연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며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이들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며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고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정에 따라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허용되지는 않지만 협정으로 인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는 국가에 의해 보상돼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한편 이번 판결에 대해 일본 측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고노 다로 외무상도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위배되며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쌓아온 양국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제재판 등 강경 대응할 뜻을 나타냈다.

<2018-10-30> 법률저널

☞기사원문: 대법원 “日기업, 강제동원 피해자에 위자료 1억 지급해야”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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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의 재판 끝에 일본 기업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떠한 방식으로 배상받게 될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춘식(94)씨 등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2심 승소 판결 이후 흐른 5년…강제동원 소송 원고 4명 중 1명만 남아

신일본제철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배상 소송은 지난 1997년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구 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됐던 고(故) 여운택씨와 고(故) 신천수씨는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임금지급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2003년 10월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고 여씨와 고 신씨는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법원에 같은 내용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했던 또 다른 피해자 이씨와 고(故) 김규수씨도 소송에 합류했다. 1, 2심에서는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지난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 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5년이 지난 후에야 대법원은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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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 vs 강제집행…“국외 재산은 집행 절차 복잡해”

긴 기다림 끝에 확정 판결이 내려졌으나 즉각적인 배상금 지급은 요원하다. 배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일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일철주금에서 배상금 지급을 이행하지 않으면 법원으로부터 집행문을 받아 강제 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법령에 따라 재산조사를 걸쳐 국내에 있는 부동산과 주식, 채권 등으로 배상금을 받게 된다.

이씨 등의 소송을 지원한 시민·사회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에 따르면 신일철주금은 국내 기업인 포스코의 지분을 약 3% 보유하고 있다. 다만 정확한 재산 내역은 조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해당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 김세은 변호사는 “신일철주금과 협의를 할지 강제집행을 할지 좀 더 논의를 해봐야 한다”며 “2013년 서울고법의 판결에 근거해 가집행할 수 있었으나 5년 동안 기다렸다. 신일철주금에서 직접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외에 있는 재산을 강제 집행해야 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국외 재산에는 우리 법원의 판결 효력이 미치지 못한다. 일본 법원을 통해 강제 집행 판결을 별도로 받아야 가능하다. 문제는 일본 법원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의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지만 일본 법원의 해석은 다르다. 일본 법원에서 강제동원 피해 배상에 대한 집행 판결을 승인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신일철주금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청구권 협정과 일본 정부의 견해에 반하는 판단이 나와 매우 유감”이라며 “일본 정부의 대응 상황 등을 감안해 적절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매우 유감이다.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국제 재판을 포함해 여러 선택지를 두고 대응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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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불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어떻게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손해배상 소멸시효 기간 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일본 기업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유효하다’고 밝혔다. 향후 강제동원 재판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언제부터냐는 것이다. 손해배상 소멸시효는 ‘객관적 권리행사 장애 사유가 없어진 때’부터 계산된다. 전문가들은 강제동원 손해배상의 경우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확정된 이날을 기점으로 봤다. 앞서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이 난후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가 너무 짧다”며 단기 소멸시효인 3년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은 지난 1938년부터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과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이소연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박효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8-10-31> 쿠키뉴스

☞기사원문: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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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지난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박수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여 만에 승소하면서 피해자 측은 강제동원 등 일제의 반(反) 인도적 행위에 관한 배상 청구권이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는 관련이 없게 돼 배상이 가능해졌다며 반겼다.

이날 승소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기업 징용 피해자나 근로정신대 등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도 잇따를 전망이다. 그러나 해당 일본 기업에서 실제 배상을 받아내기까지는 쉽지 않은 절차가 남아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변호사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대법원 선고가 나온 지난 30일 오후 민변 사무실에서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청구권협정에 관한 쟁점이 핵심이었던 것 같다”면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까지 모두 소멸했는가, 일본 기업 상대로 일제 때 있었던 불법행위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등이 쟁점이었다”고 짚었다.

이어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는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 대법원의 결론”이라면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는가는 오랫동안 논란이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확정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소송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법률과 조약에 대한 법률적 해석에 대한 최고 권한은 대법원에 있다”면서 “외교부와 법원이 입장이 다르다거나 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유권해석만 있었던 것이고, 오늘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구속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판결에 힘입어 이춘식(94) 씨 등 원고(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신일철주금에 위자료 지급을 임의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탓에 신일철주금이 임의이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태다.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한국 국내에 재산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강제집행 절차를 밟을 수도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오늘 판결을 근거로 국내 재산에는 법원을 통해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신일철주금이 포스코 제철소에 3%가량 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당 주식에 대한 집행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가느냐는 별개 문제”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강제집행 절차를 선택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신일철주금 주주총회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를 의향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면서 “다만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도 있기에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조시헌 연구위원은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일 간에 합의가 없다는 것이 오늘 확인된 것”이라면서 “앞으로 한일 간 협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협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 중재를 통해 분쟁 해결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피해자들이 고령인데 국제 분쟁 해결 절차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한일 간에 과거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관해 청구권협정 외에 추가 협정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그동안 강제동원 진상규명 노력이 충분치 않았던 점을 인정하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해·유골 수색 및 봉헌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혼조차 귀국 못하는 분들도 돌아오게 해야 하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외교적 보호 등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송 당사자인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씨는 “(원고가) 나까지 네 명인데 혼자 재판을 받으니 과히 기분이 안 좋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도 많이 나오고 서럽다”면서 “일본도 한국이 이렇게 해줬으니 ‘시원하다, 잘했다’ 하면서 환영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며 취재진 앞에서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원고들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 1997년부터 원고들을 도운 일본재판지원회의 우에다 케이시 씨는 “이번 판결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권리를 회복하고, 신일철주금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서 배상책임을 다해야 한다”면서 “이를 토대로 한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지털뉴스부

<2018-10-31> 경인일보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 측 “신일철주금 배상의사 타진할 것… 신일철주금 포스코 지분 강제집행 가능성”

수, 2018/10/3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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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신일철주금주식회사에 대한 배상판결에 대한 성명]

1. 판결의 경과와 ‘사법농단’

이번 판결은 1997년 12월 24일 이번 사건의 원고 가운데 고 신천수씨와 고 여운택씨가 일본의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소한 다음, 일본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최고재판소에서 2003년 10월 9일 패소한 후, 2005년 2월 28일 서울지방법에 제기한 소송에 대한 최종 판결이다. 일본 소송이 있은 지 21년, 한국 소송이 있은 지 13년 만에 최종 판결이 나온 것이다. 또한 해방이 되어 강제노동에서 풀려난 지 74년 만에 법적 판단을 받아보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 동안 원고 가운데 많은 분들이 오늘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이 판결은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이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하고, 이에 따라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이 원고들에게 일부 승소 판결한 것에 대하여 피고 회사인 신일철주금주식회사(新日鐵住金주식회사, 이하 ‘신일철주금’으로 약칭한다)가 상고한 것에 대하여 5년 여 만에 선고를 한 것이다. 이 판결은 이렇게 수년 간 재상고사건이 대법원에 계류된 동안 최근 전 박근혜대통령, 청와대 비서실, 외교부를 한편으로 하고 대법원장과 대법원 행정처를 다른 편으로 하여 재판에 불법으로 개입한, 이른바 ‘사법농단’, ‘불법 재판거래’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2. 이번 판결의 의미와 미해결된 강제동원 문제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그대로 수용하여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2013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확정되게 되어 최종적으로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온 것이다, 다만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된 청구권 가운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11:2의 다수의견으로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결로 피해자들이 갖는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이에 대한 일본정부와의 협상과 추가협정의 여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2012년 판결에서와 같이 피고인 일본 기업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최초로 일본기업의 일제하 침략전쟁중의 책임이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인정된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이번 판결은 1998년 이래 국제노동기구(ILO)의 전문가위원회가 취하고 있는 견해, 즉 전쟁시기의 강제노동자 문제는 일본에 의한 강제노동금지협약(제29호 협약) 위반이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판결은 이러한 관련 국제법이나 국제인권법상 피해자들이 가지는 권리에 관하여 구체적인 검토를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미흡하다.

<참고사항>

[전쟁시기의 강제노동자 문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와 함께 1990년대 중반부터 국제노동기구(ILO)에 제기되었다. ILO의 전문가위원회(정식 명칭은 협약과 권고의 적용에 관한 전문가 위원회, CEACR)는 1998년 ILO의 강제노동금지협약(제29호 협약)에 대하여 “일본에 의한 협약 위반이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전문가위원회는 사건에 대하여 구체적인 구제조치를 명령할 권한이 없지만 2000년에 “피해자들의 연령과 급속한 시간의 경과를 고려할 때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과 정부에 모두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이들의 청구들에 대응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하였고, 2012년에는 일본정부가 “사건의 심각성과 장기에 걸쳐있다는 성격을 감안하여 피해자들과 화해를 하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계속할 것과, 지체 없이 산업강제노동과 군대에 의한 성노예제로 인한 고령의 생존 피해자들이 제기한 청구에 응답하는 조치를 취하기를 요망하는 확고한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이후에도 전문가위원회는 일본정부에게 지속적으로 관련 정보를 제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판결이 너무도 오래 끌고,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원고들에게 조금이나마 배상을 하고, 그 동안의 고통과 피해를 치유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과거 피고회사에 강제동원 된 피해자들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국외동원 피해자와 연인원 500만 명이 넘는 국내동원 피해자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2004년 한국의 특별법에 따라 진행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조사로 피해자 인정과 그에 대한 지원금 지급 등 보상이 한국정부에 의해 실시되었지만 여전히 강제동원 피해문제는 한일 간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로 자리한다. 현재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 등 일본의 기업들에 대한 다수의 소송이 한국법원에 제기되어있는 상태이다.

1030-13. 판결의 이행 문제

이번 판결로 원고들이 승소하였다고 하여 이들이 곧바로 배상금을 받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피고 신일철주금이 이 판결에 승복하고 판결이 명하는 대로 원고들에게 자발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원고들은 또다시 피고회사의 재산을 찾아서 판결을 강제집행하여야 하는 지난한 길을 걸어야한다. 벌써부터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느니 재판과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협박성 발언들도 들린다.

또한 이번 판결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금전의 지급만으로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배상의 권리가 충족된다고도 할 수 없다. 국제인권법에 따르면 강제동원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은 진상규명, 책임자의 공식 사죄, 피해배상, 피해자의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방지 등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원고들은 그 동안 피고회사 측의 선의를 기대하며 판결채권을 확보하기 위한 가압류절차를 밟지 않았다. 피고회사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성실히 이행해야할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의 차원에서 피해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사죄 등 필요한 조치들을 다하여 강제동원문제의 해결을 위한 훌륭한 본보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에는 비단 이번 사건의 피고인 신일철주금만이 아니라 원고들의 강제동원에 관여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따져 물을 것이 필요하고, 한국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4.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과제들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초를 연 이번 판결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남은 강제동원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국내적, 국제적 조치들이 뒤따라야한다는 점이다.

비단 이번 소송의 원고들에 국한되지 않는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제하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명목으로 사기와 기타 강제적인 방법에 의하여 자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 해외인 일본으로 끌려가 일방적으로 노동을 강요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수년 간 견뎌와야했다. 강제노동 또는 노예적 노동의 피해자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이 들리자마자 이들은 애타게 그리던 조국으로, 고향으로 서둘러 돌아가려던 한편 피해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또한 주목하고자 한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들이 일본에 진주하기 전과 후는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정부와 전쟁기업들은 이들 피해자들의 피와 땀에 대한 사죄나 배상은커녕 명목적인 임금과 강제저축 등 주어야 할 돈마저 주지 않고 자료를 소각하고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피와 땀으로 침략전쟁을 계속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으로 전후부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더욱이 최근 일본정부는 군함도 등 피해자들이 일했던 강제노동의 현장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하고, 피해자들이 일본의 전쟁노력에 ‘지원’한 것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지경이다.

우리는 또한 1945년부터 70년이 넘는 지금까지 계속된 이들의 정당한 요구가 어떻게 좌절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태는 이번에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강제동원재판에 대한 청와대와 외교부 및 사법부의 불법한 개입이 상징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2012년과 오늘 대법원은 개인의 청구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없어진 게 아니라고 확인하였다. 이로써 이제라도 한국정부는 수백 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하여 외교적 보호에 나서야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011년 8월 30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원폭피해자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피해자들의 보호를 위하여 일정한 외교행위에 나서야 할 헌법상의 의무를 진다고 하였다. 한국정부가 지금에라도 피해자들을 위한 외교적 보호에 나서지 않으면 이들의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국익과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짓밟은 가운데 청구권협정을 체결하고 피해자들의 모든 권리가 소멸되었다는 일본정부의 논리를 받아들였던 과거의 잘못이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사건을 통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일제의 불법한 지배와 강제동원의 피해자들 역시 진정한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에 대한 정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하고자 한다.

요 구 사 항

신일본제철은 이번 판결을 성실하게 준수하고, 사죄와 추모 등 피해자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추가적인 대책을 수립하라!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 대한 사법농단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함은 물론 그 동안 재판의 지연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원고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있는 조치를 취하라!

일본정부는 이번 한국의 대법원 판결이 보여주고 있듯이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 유해와 유골 반환, 공식 사죄, 피해배상,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방지 등 피해구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즉각 나서라!

한국정부는 그 동안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이번 사건과 현재 법원에 계류된 사건들뿐만 아니라 모든 식민지배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실태와 일본정부와 관련 기업들의 책임을 묻고, 아직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것을 감안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망한 피해자들의 유해와 유골의 수색과 봉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영혼조차 귀환하지 못한 식민지병사로써 전쟁터에서 죽음을 강제 당했던 피해자들의 문제와 해방 후 피해자들의 요구가 어떻게 좌절되었는지의 과정에 관한 조사를 포함하여 일제하 인권피해자들을 전면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에 나서고 필요한 국내외적인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조속히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라!

2018.10.30.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민족문제연구소・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평택원폭피해자2세회・평화디딤돌・포럼 진실과 정의・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합천 평화의집・흥사단・1923한일재일시민연대・KIN지구촌동포연대


다운로드   [판결문: 대법원 2018.10.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수, 2018/10/3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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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1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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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어디가 꽁떡하기 좋았는지 정리해 볼겸 끄적거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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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ㄷ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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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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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 설치 안해서 좋고 목적이 확실한 애들로 걸러져 있어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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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11/0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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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 2018/11/0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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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和華之證人之兵役拒否

 

無邦無百姓(무방무백성)

此理忽皆忘(차리홀개망)

背族焉容忍(배족언용인)

刑懲亦至當(형징역지당)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없는 것을

이러한 이치를 문득 다 잊었구나

민족 배신함 어찌 참고 용서하랴

형벌로 징계함 또한 썩 마땅하다.

 

<時調로 改譯>

 

나라 없는 백성 있냐 이 이치를 잊었구나

민족 향한 배신 행위 어찌 참고 용서하랴

형벌로 징계하는 것 그 또한 썩 마땅하다.

 

*耶華: ‘여호와’의 음역어(音譯語) *背族: 자기 민족을 등지고 배반함 *容忍:

참고  용서함  *刑懲: 형벌을  주어서  징계함  *至當: 이치에  맞고  지극히  당연함.

 

<이우식 지음>

목, 2018/11/0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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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役拒否及大法院之無罪判決

 

最優先義務(최우선의무)

拒否此誰何(거부차수하)

大法云無罪(대법운무죄)

愚氓歎息歌(우맹탄식가)

 

병역 거부와 대법원의 무죄 판결

 

가장 앞서 이행할 의무이거늘

병역을 거부하니 이 누구인가

대법원에서 죄 없다 운운하니

愚民은 탄식의 노래를 부른다.

 

<時調로 改譯>

 

최우선 의무이거늘 거부하니 누구인가

이 나라 최고 법원이 죄 없다 운운하니

오호라! 못난 백성은 탄식 노래 부른다.

 

*最優先: 어떤 일이나  대상을 특별히 다른  것에 비하여 가장 앞서서 문제로

삼거나  다룸  *誰何: 누구  *大法: 대법원  *愚氓: 우민(愚民).  어리석은  백성.

 

<2018.11.2, 이우식 지음>

금, 2018/11/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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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동북아역사재단서 개최…”일본 전역 활동가들 모여”

1102-1

▲ [70년 만의 귀향] 안장되는 유골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 봉환단이 2015년 9월 20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에서 115위 유골을 안장하고 있다. 2015.9.20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실태를 짚고 봉환 등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국제심포지엄이 6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에서 열린다.


재단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러한 내용의 심포지엄을 연다고 1일 밝혔다.


심포지엄에는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홋카이도, 오키나와, 야마구치, 오사카, 이와테 지역 시민단체 등에서 조선인 유골 실태조사와 봉환을 위해 노력하는 인사들이 참석한다.


재단은 “일본에서 조선인 유골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지역 거의 모든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이기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1부 개회식에 이은 2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의 역사적 경위와 현황’을 살펴보는 자리다.


남상구 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하수광 사무국장·니시자와 기요시, 이와부치 노부테루 태평양전사관 관장이 발표에 나선다.


남 소장은 “유골문제는 식민지 피해가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남북한과 일본이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라면서 “유골을 전부 봉환하지 못하더라도 사망 경위와 유골 실태를 유족에게 설명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밝힐 예정이다.


3부는 시민 활동가들이 조선인 유골 실태를 조사·발굴하고 봉환한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다.


다케우치 야스토(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도노히라 요시히코(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구시켄 다카마쓰(가마후야), 오바타 다이사쿠(물비상(水非常)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 우에다 게이시(전몰자 유골을 가족 품으로 연락회)가 발표한다.


4부에서는 종합토론을 통해 남북한과 일본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시민단체(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강제동원문제해결과대일과거청산을위한공동행동)와 종교 단체(통국사,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동북아역사재단,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email protected]

<2018-11-01>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피해 유골문제 해결 논하는 심포지엄 열린다

금, 2018/11/0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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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 “모집 응한 것…’징용공’ 대신 ‘한반도 출신 노동자'”
“식민지 압제下 日정부 주도로 모집…강제동원 부인은 ‘본질 흐리기'”

1102-20

▲ 일제 강제징용 13년만에 결론(CG) [연합뉴스TV 제공]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정부가 징용 피해자를 지칭하며 사용했던 ‘징용공’이라는 표현을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꿔 부르며 징용의 ‘강제성’을 희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강제노동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 판결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동원의 강제성’ 여부에 대한 새로운 논란을 끌어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일 국회에서 기존의 ‘징용공’이라는 단어 대신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에 대해 “당시의 국가총동원령법의 국가징용령에는 모집과 관(官)알선, 징용이 있었는데, 이번 재판의 원고는 모집에 응했다고 표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전날 관련 부처들에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일본어로 ‘징용’을 의미하는 ‘조요'(徵用·ちょうよう)는 한국어 ‘징용’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일정한 일을 시키는 것(쇼가쿠칸<小學館> 사전)을 뜻한다

1102-21

▲ 아베 “징용소송 韓판결,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단”
(도쿄 AFP/지지통신=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30일(현지시간)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판결 직후 도쿄 총리 관저에서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한국 대법원이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한 데 대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국제법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email protected]

아베 총리의 발언은 대법원 판결의 원고 4명이 형식상 ‘징용’이 아닌 ‘모집’에 의해 일본에 건너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징용 피해자들이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다고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피고인 일본 기업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은 가운데 모집을 했고, 당시가 군국주의 일제의 압제가 극에 치닫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제 동원임을 부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원고 이춘식 씨는 대전 시장의 추천을 받아 보국대로 동원돼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사실상 감금 당한 상태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처음 6개월간은 외출도 하지 못했고 임금은 저금해준다는 말만 듣고 구경도 못했다. 헌병들은 보름에 한번 노역장에 와서 인원을 점검했다.

상황은 야하타 제철소에서 노역한 다른 원고 김규수 씨도 마찬가지였다. 군산부(지금의 군산시)의 지시를 받고 모집돼 일본에 온 그는 일체의 휴가나 개인 행동을 허락받지 못한 채 임금도 못받고 노역을 했다. 그는 도주하다 발각돼 7일간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102-22

▲ 대법, 13년 만에 일본기업 강제징용 배상책임 확정
(서울=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2014년 사망한 여운택 씨 등 일제 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소송 제기 후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사진은 일본 탄광 징용 피해자 조선인들. 2018.10.30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email protected]

오사카 제철소에서 일한 여운택 씨와 신천식 씨는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기재된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지만 실제로는 죽도록 노역만 해야 했다.

한달에 1~2회 외출만 허용됐고 2~3엔의 용돈만 지급받고 월급은 받지 못했다.

원고들의 재판을 지원해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아베 총리의 발언이 대내외적으로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강제연행·기업 책임추궁 재판 전국 네트워크 사무국장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고 하더라도 징용 피해자들이 실제 노역 현장에서 겪은 일은 공고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며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팀장은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 총독부 지시에 따라 모집이 행해졌다”며 “아베 총리가 본질을 흐리게 하려고 새로운 논란거리를 끄집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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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강제징용 전시관인 ‘단바망간기념관'(丹波 マンガン 記念館)의 전시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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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1> 연합뉴스

☞기사원문: 돈도 못받고 맞으면서 일했는데…’징용 강제성’ 없다는 日아베

금, 2018/11/0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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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재단서 국제심포지엄…”공동 조사·발굴·감식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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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해결 위한 국제심포지엄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2018.1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해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송환 실태와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대규모 학술 행사가 6일 열렸다.

동북아역사재단,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재단 대회의실에서 공동 개최한 국제심포지엄에는 근대사 연구자와 유골 송환을 위해 노력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가 참가했다.

재단에 따르면 해외에서 사망한 조선인 군인과 군무원은 약 2만2천명에 달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 정부를 통해 들어온 유골은 2천여 위에 불과하다.

강제동원으로 한국을 떠났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와 외국에 남은 노동자 유골 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일본 정부가 2015년 4월 한국에 제공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일본 전역에 산재한 시설 339곳이 조선인 유골 2천798위를 보관 중이지만, 신원이 명확하게 확인된 유골은 167위에 지나지 않는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송환은 2004년 한일 정상이 합의해 2008년부터 2년간 423위가 조국으로 돌아와 국립 망향의동산에 안치됐으나, 이후 큰 진척이 없는 상태다.

이와 관련해 민화협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지난해 8월 조선인 유골 송환을 위한 남북일 공동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남북 민화협은 지난 3∼4일 금강산에서 만나 유골 송환 공동추진위원회를 강제동원 진상 규명을 위한 공동추진위원회로 확대하는 안을 논의하고,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내년에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다룰 공동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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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해결 위한 국제심포지엄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서 일본측 참석자들이 박수치고 있다. 2018.11.6

심포지엄에서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송환이 인권과 존엄의 문제이자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과제이며, 남·북·일 정부와 민간단체가 힘을 합쳐 풀어야 할 사안이라는 점이 특히 강조됐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 유골의 행방에 대한 조사와 봉환 책무를 방기한 것은 비인도적 처사”라며 “유골 문제는 식민지 피해가 아직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희생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원됐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남 소장은 우리 정부를 향해서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유골을 봉환하지 못해도 사망 경위와 유골 실태에 대해 유족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도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적지 않고, 여러 유골이 합해진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북이 이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남 소장은 남북 정부와 남북 민화협, 일본 시민단체로 구성된 위원회가 단일 창구를 이뤄 일본 정부와 교섭하고, 사망자 명부와 유골 실태 자료는 남·북·일이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해외 유골 조사와 봉환에 남과 북이 참여하도록 일본 측에 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유골 문제는 인도주의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에 의해 보장되는 인권과 관련된다”며 “같은 일본인이라며 동원했다가 패전으로 방치하는 이율배반적 권리 침해 상태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골 문제를 다루면서 일관해야 할 원칙은 사망자에 대한 존중이며,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은 그들의 죽음을 성찰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 씨는 동아시아 국가와 미국 정상들이 직접 대화를 통해 전쟁 피해자 유골에 대한 공동 조사와 발굴, 감식을 추진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동북아 공동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사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유골 문제는 해결이 더디고 어렵겠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우선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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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유골송환은 존엄 문제…남북일 협력 필요”

화, 2018/11/0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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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단체 및 졸업생 등 총장후보자 토론회 앞서 기자회견… “3.8민주의거 정신 훼손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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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불씨를 당겼던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에 맞춰,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배재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과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대전충남4월혁명동지회’ 등은 7일 오후 대전 서구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학교는 하루 빨리 이승만 동상을 자진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지난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는 우리 대전지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인 ‘3.8 민주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며 “이는 우리 지역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운 4.19 혁명의 선봉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3.8민주의거’는 1960년 자유당독재와 부정부패에 저항했던 대전지역 학생시위다. 3월 8일 대전고학생 1000여 명과 10일 대전상고 학생 600여 명 등 총 1600여 명의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대전지역 대표적인 민주의거다.

그동안 대전시에서는 3.8 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 위해 ‘범시민추진위원회’를 결성, 대전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전달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 것.

그럼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배재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것은 대전시민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4.19 혁명에 의해 독재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당국자 일부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대학교로서는 유일하게 배재대학교에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며 “심지어 두 번이나 철거되었던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웠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배재대는 즉각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이승만 동상 철거는 대학 구성원은 물론, 대전시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것이 독재정권에 의롭게 맞서 싸웠던 3.8 민주의거의 대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 그리하여 이 땅에 정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도록 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날 규탄발언에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이승만은 친일파를 앞세워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온 국민의 저항으로 쫒겨 난 ‘독재자’다. 4.19혁명으로 그는 이미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며 “배재대는 더 이상 대전지역 학생들의 고귀한 희생을 욕보이는 짓을 그만 두어야 한다. 즉각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라”고 밝혔다.

또한 김영진 독립유공자유족회 대전지회 간사는 “이승만은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는 물론, 자신과 생각이 다를 것이라는 판단 하나로 보도연맹원 등 1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그 어떤 법적절차도 없이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이어 김 간사는 “이런자의 동상이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세워둔다는 것은 배재대 학생과 졸업생은 물론, 대전시민을 무시하고 우롱하는 처사”라고 배재대의 자진철거를 촉구했다.

배재대 졸업생도 규탄에 나섰다. 2001년 배재대를 졸업한 김인재씨는 “독재자의 동상을 세워놓고 대체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우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독재를 본받으라는 것인지, 그의 반헌법적 범죄행위를 존경하라는 것인지, 대체 그 의도를 모르겠다”며 “배재대학교는 대전시민과 학생, 졸업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진리의 동산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라”고 말했다.

한편, 배재대학교는 이날 오후 새로운 총장 선출을 위해 후보자 6명이 참여,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총장후보자 초청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다.

<2018-11-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여전히 이승만 동상 남아 있는 배재대… “자진 철거해야”

수, 2018/11/0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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