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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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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29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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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시위현장에 참석하여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문 : 역사학자로서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료 수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습니까?

답 : 수집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중학생 때 광주항쟁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는 탄피를 모았습니다.

문 : 5.18 광주항쟁 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했는데, 탄피를 모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답 : 1980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저는 새벽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5.18 항쟁이 일어날 무렵 〈중앙일보〉 상무지국에서 받은 호외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달리며 제 손으로 두 차례나 이틀 연속 호외를 뿌려댔습니다. 하나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인데 소요조종자로 김대중, 리영희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자는 그 헤드라인에 김종필, 이후락 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부의 5.17쿠데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이튿날인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엄포고령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엄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지요. 그 뒤 신문이 반입되지 않아 광주가 봉쇄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장의 호외는 지금도 광주의 부모님 집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 당시의 〈중앙일보〉 수금장부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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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탄핵을 선고하던 날, 광화문광장에서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상태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철모르는 제 또래들은 탄피를 주워서 속칭 ‘짤짤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탄피는 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많았던 금남로와 계엄군의 부분확보작전이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많이 주웠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엄군(20사단)의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당시 탄피를 줍기 위해 그 현장에 나갔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통합병원과 가까운 내방동에 있었거든요. 국군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은 짧은 총격전이었지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8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는 계엄군이나 시민군이 아닌 동네주민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으로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저는 살기 위해 하수구 공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푸집 안으로 피신했습니됐습니다. 저보다도 군인이 더 깜짝 놀라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계엄군이 임시분초로 사용하던 한 이층양옥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여학생이 팔을 잡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군통합병원작전 당시 창문으로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을 받아 팔에 총상을 입은 것입니다. 저를 붙잡은 계엄군은 제 몸을 수색해서 서너 개의 탄피를 발견하고는 “폭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마구 다그쳤습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과 ‘짤짤이’ 하려고 모은 탄피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폭도라면 실탄을 갖고 있지 탄피를 갖고 있겠느냐며 울먹이자 계엄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 밤 그 병사는 날이 어두워 위험하다며 저를 계엄군이 사용하던 임시분초에서 묵게 하고 다음날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군요. 동네사람들이 간밤에 총격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저를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부터 저의 수집벽이 남달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집벽 때문에 대학생 때 또 한 번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80년대 중반 대학(경상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수집벽 때문에 학내에 암약하는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은 것입니다. 매년 5월이 오면 당시 학내에는 광주항쟁이나 민주화 관련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고 캠퍼스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베끼고 각종 유인물을 수집했습니다. 어느 날 총학생회 학생들이 제가 의심스럽다며 이야기를 좀 하자며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제 가방에서 유인물이 나오고 수첩에 대자보 내용과 학내 시위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프락치로 오인한 겁니다. 꼼짝없이 학원프락치로 몰려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과 선배(총대의원회 대의원)가 저를 알아보고 제가 사회학과 학생인 것을 보증해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수집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일제시기 진주지역의 인명록에 등재할 인명 3천4백여 명의 행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명록 때문에 이번에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수집벽이 아닐 수 없지요.

문 : <진주인명록>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드리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전남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김무성 의원의 선친 김용주가 설립한 학교인가요?

답 : 네, 맞습니다. 전남고는 제 모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김용주는 해방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아 임동에 있던 전남방직공장을 인수한 뒤 1966년 방직공장 옆에 중고등학교도 설립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전남고입니다. 남녀공학이 아닌데도 전남고에는 여자학급이 있었는데 바로 방직공장에서 주경야독하는 여공들을 위한 특별학급이 전남고 부설학급으로 방직공장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립학교시절의 전남고는 광주시내 소재 고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이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획일적인 교복과 교모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즉 일제 순사모 같은 학생모와 호크를 채우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고 스마트한 중절모를 쓰고 여학생 교복처럼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이런 교모와 교복은 오직 전남고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다녔지요.
또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선배들이 제일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위에 동참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남고 학생 중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전남고와 같이 있던 부설 전남중에서는 중학생이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또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이 희생당했는데 퇴근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료교사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광주항쟁추모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은 삭제되어 게재)했다가 보안대(현 기무사의 기무부대)에 체포되었고 그 길로 전남고에서도 강제해직되고 말았습니다. 김용주의 사학재단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비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듬해인 1981년 전남고와 전남중이 전격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어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전남고는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과 군사법원이 있던 옛 보병학교자리인 상무대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물론 제가 입학했을 때는 전남고가 방직공장 옆에 있을 때였지만 공립으로 전환된 까닭에 김용주나 사학재단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김용주 동상이나 송덕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용주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기념한 기증비가 교문 수위실 건너편 화단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남고는 김준태 시인 뿐만 아니라 노래 ‘직녀에게’로 유명한 문병란 시인이나 시 ‘봄비’로 유명한 이수복 시인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어서 문학적인 감성을 형성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중 제가 직접 배웠던 영어교사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전남고 선배로는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 등이 있습니다.

문 : 5.18과 관련해서 1982년 3월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죠. 5.18 항쟁이 무자비하게 짓밟 히고 난 직후 그해 겨울 광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시 황금동에 있던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문화원이 있던 황금동은 광주의 돈이 몰리는 번화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윤락가로 유명한 황금동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금동에는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회관도 자리 잡고 있어 저도 중고생일 때 회관 안에 있던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이처럼 황금동은 민족감정이나 자본과 탐욕 등이 엉켜있는 등 온갖 모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미운동의 단초가 열립니다. 시민들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에 의한 5.18 광주학살이 미국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광주항쟁 당시에 일반인들은 설마 자유우방국인 미국이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무력 진압된 후 광주시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컸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처음 일어난 반미운동사건이었고, 문화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도 광주 미문화원에 다시 불이 붙는 2차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부산과 서울에 있던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으로 번지는 등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세력의 폭거와 미국의 방조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은 문부식, 김현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김현장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지켜보고 문부식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그 발단이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5.18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에 가다가 백골단과 전경대에 의해 삼엄하게 둘러싸인 미문화원 앞을 지나치면서 문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광주학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즉시 광주 미문화원에 5.18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이 묵인, 방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책자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내야 할 만큼 저처럼 미문화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시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 : 최근에야 광주학살 진행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진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우리 현대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합니다. 화제를 바꾸어 전라도 광주에서 장성하여 어떻게 경상도 진주로 유학을 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우리 집안의 본적은 대구지만 현재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외가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국구 시민입니다.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 있는 K2 비행장에서 공군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0년대 말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제가 4살 되던 해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이후 저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전라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역차별을 당하셨지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저는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학해 고3 대학입시 때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되고 학비가 싼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되어 지방 국립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산대에 재학중인 외사촌 형님이 진주에 있는 국립대를 소개해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교육’으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전공해야 할 학문은 첫째가 철학이고 둘째가 경제학이고 셋째가 사회학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그중 사회학이 가장 수월하게 보여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까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원 때의 전공은 사회사인데,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경상대라는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경상대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은 1948년에 진주에서 개교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후 진주농대에 농학계열 이외의 학과가 많이 설치되면서 교명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문교부에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겠다고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산시에 있던 사립대학인 마산대학은 1971년 ‘경남대’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았습니다.
결국 1972년 진주농대는 당시 지방국립대에 붙었던 도명을 붙이지 못하고 경상도의 국립대라는 애매한 뜻으로 ‘경상대(慶尙大)’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발음만 들으면 경상대가 일개 대학의 단과대인 경상대(經商大)나 상경대(商經大) 정도로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해 경상대 동문들은 교명변경을 숙원사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남대는 단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대가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어 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박정희정권의 실세였던 ‘피스톨박’ 박종규의 입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명변경 당시 박종규는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고 있으면서 마산대학 이사장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진주농대가 경상대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교가는 여전히 진주농대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 진주 경상대에 진학하여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답 : 당시 경남 거창에서 유학온 진주 교대생이었던 제 아내를 대학 1학년 때 하숙집 친구의 소개로 진주우체국 건너편 다방에서 처음 만났고, 졸업 후 결혼해 2녀를 두고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너무 이야기에 몰두해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높다란 흰색담장에서 총기로 무장한 경교대와 맞닥뜨렸는데 바로 진주교도소(1989년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함)임을 알고 황급히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총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2005년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지금은 서로가 바빠 월말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요즘 말하는 ‘졸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의 아내가 30여 년 전의 애인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문 : 진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 일컬어졌고 양반의 고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울러 진주민란, 형평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한 지역이었죠.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진주로 수학여행을 왔습니다.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남강 촉석루 밑 의암에서 느꼈던 비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상대에 입학한 후 진주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진주목사, 경상우병마절도사, 경남관찰사의 소재지였고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직전까지 경남 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왜색불교를 없애고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청담스님이 진주출신이고,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일컫는 성철스님도 일제 때 진주고보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진주정신’을 낳게 한 것은 저항의 역사도 있지만 그 토양으로서 ‘진주문화’도 있다고 봅니다.
진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1941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에서 나오듯이 흔히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천리(420km)라고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진주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적으로 진주에는 기생문화와 유흥문화가 발달해 진주검무를 비롯해 진주포구락무, 진주한량무, 진주교방굿거리 등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예인들을 낳았는데, 몇 사람을 들면, ????친일인명사전????에오르긴했지만일각에서불세출의‘가요의황제’로추앙하는‘남인수’를비롯해‘산유화’와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재호’, ‘대머리 총각’과 ‘곡예사의 첫사랑’ 등을 작곡한 ‘정민섭’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최초의 종합예술제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진주에서 처음 열렸는데, 바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가 그것입니다.

문 : 진주의 고유한 전통과 독자성이 느껴집니다. 진주민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위 중앙관료 출신이 참여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주의 저항정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1월) 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관민을 모아 격렬히 항전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김시민 목사는 총탄에 맞아 순국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끝 무렵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총공세로 함락됩니다. 이때 논개도 순절합니다. 이와 같이 진주처럼 외세의 침략에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관군이 합심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곳도 드뭅니다.
그러나 조선말 진주지역 토호세력의 수탈이 극심했고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인 민중의 저항입니다. 진주민란은 진주의 병마절도사와 토호세력의 착취로 일어났는데 향반출신인 류계춘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는 농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일어나 의병이 크게 봉기했던 곳의 하나가 진주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진주의 민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서 최초의 한글(국한문 혼용) 지방신문이 탄생합니다.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의 유지들이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입니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에서 쫓겨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에 옵니다.
더구나 천민의 대명사이던 백정을 해방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처음 벌어진 곳도 진주입니다. 1923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사회적으로 이중차별을 받던 백정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형평운동을 주도한 한 선각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출신이었던 강상호였다는 점에서 진주의 진보성과 민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을 이끈 제2차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바로 진주의 사회운동가 강달영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고,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진주의 소년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볼 때 진주가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에 깃든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다음호로 이어짐)

시민들의 의견

식민지역사박물관. 실수로 입금했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2013년 부정선거 주장때부터 주사파들에게 악용당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하였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문자 메세지도 그만 주시길 바랍니다.

이석훈  010-4335-7501     [email protected]      790812-1######

월, 2018/09/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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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502

안녕하세요?
위의 사이트는 모 교회의 계시판입니다.
건국 100주년이 아니다.
이승만은 배드로다.
등등 참 힘든 역사관으로 교인들이 힘들어 합니다.

최근에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까지 동원해서 몇개월간 계속 힘든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고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o 대한민국의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_건국 70주년의 의미

2018년 9월 16일(일요일)에는 다시 김문수 전 지사를 초청하여 2시간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 좌파의 근본 문제점, 좌파 탈출 경험, 좌파 정책의 필연적 실패 등에 대해 김문수 전 지사가 체험하여 느끼고 본 대로 진술하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사랑침례교회 서창동 캠퍼스로 오셔서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3시
강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연 제목: 나의 좌파 체험 및 탈출기

o 이병태 교수: 문재인 정부 1년_한국 경제는 왜 위기인가? 최저 임금 소득 주도 성장의 허구

o 이춘근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부국강병 2부_박정희 시대의 국제 정세

o 김철홍 교수: 나는 어떻게 좌파를 버렸나?_공산주의 주사파 이해, 좌파 탈출

o 전교조의 실체와 학교 교육의 문제 1부_전교조의 정체 및 사상

o 홍지수 작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1부_정치적 금기어(PC)의 정의 및 계보,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 세계 좌경화

일, 2018/09/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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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던 도중 철도순직자조혼비에 대해 알게되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철도순직자 조혼비에 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을까해서 글 남겨 봅니다.

추가적으로 기사에서 조혼비 설명해주시던 이순우 소장님께 연락이 닿아서 몇가지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을 알아갈 수 있을지 글 남겨봅니다.

일, 2018/09/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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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勸人君國家朝餐祈禱會不參

 

衆嘲祈禱會(중조기도회)

忽欲使君知(홀욕사군지)

孰語耶蘇國(숙어야소국)

愚民起大疑(우민기대의)

 

삼가 나라님께 국가 朝餐 기도회 不參을 권하오

 

많은 이가 朝餐 기도회 조롱하니

문득 나라님이 알도록 하고 싶소

그 누가 예수의 나라라 말합니까

못난 백성은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조롱하니 나라님 아셔야겠소

예수의 나라라고 그 뉘라서 말합니까

마침내 못난 백성은 大疑를 일으키오.

 

*人君: 임금. 나라님 *朝餐: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아침 식사 *耶蘇: ‘예수’

音譯語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大疑: 크게 의심함. 의심이나 의혹.

 

<2018.9.17, 이우식 지음>

월, 2018/09/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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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世態(탄세태)

 

愚夫論國事(우부논국사)

雜漢說儒經(잡한설유경)

牧者錢蟲化(목자전충화)

山僧尙未醒(산승상미성)

 

세태를 탄식하며

 

어리석은 남자가 나라의 일 논하고

잡스런 놈이 儒家의 경전을 說하네

牧者는 그만 돈벌레 되고 말았으며

山僧은 아직도 술에서 못 깨어났네.

 

<時調로 改譯>

 

愚夫가 國事 논하고 잡놈이 儒經 설하네

예수 믿는 목사님은 錢蟲 되고 말았으며

산속의 저 스님 또한 아직도 未醒이라네.

 

*愚夫: 어리석은 남자 *國事: 나라에 관한 . 나라 정치에 관한 일. 나랏일 *雜漢:

잡놈 *儒經: 유서(儒書). 유가서(儒家書). 유가(儒家)에서 쓰는, 유학에 관한 책.

 

<2018.9.18, 이우식 지음>

화, 2018/09/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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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전진 도상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과 남이 서로 손을 맞잡고 뜻과 힘을 합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는 흔들림을 모르고 더욱 힘 있게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목, 2018/09/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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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8/09/201809.pdf

금, 2018/09/2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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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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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金正恩國務委員長

 

孰測人民苦(숙측인민고)

村儒欲問君(촌유욕문군)

好機南北美(호기남북미)

此際拂喧紛(차제불훤분)

 

김정은 국무 위원장에게 띄우는 글

 

그 누가 人民의 괴로움 헤아리나

시골 선비는 그대에게 묻고 싶소

南과 北과 또 미국에게 好機이니

차제에 떠들썩함 탁 떨쳐 버리오.

 

<時調로 改譯>

 

人民의 苦 뉘 아나 시골 선비 묻고 싶소

南北과 미국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이니

차제에 떠들썩함을 화들짝 떨쳐 버리오.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好機: 좋은 기회. 호기회(好機會) *喧紛: 매우 떠들썩함.

 

<2018.9.22, 이우식 지음>

토, 2018/09/22-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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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戊戌秋夕思北韓同胞

 

獨裁三代續(독재삼대속)

民主悉虛言(민주실허언)

測度飢寒苦(측탁기한고)

方知孰犬豚(방지숙견돈)

 

戊戌年 추석을 맞아 북한 동포를 생각하며

 

독재 정치가 三代를 이었으니

민주주의란 모두 헛된 말이라

飢寒의 괴로움 따져 헤아리니

누가 개돼지인지 이제 알겠다.

 

<時調로 改譯>

 

三代 이은 독재이니 民主란 다 빈말이라

굶주림과 추위의 苦 따져서 헤아려 보니

그 누가 개돼지인지 바야흐로 알 만하다.

 

*獨裁: 독재 정치. 특정한 개인, 단체, 계급, 당파 따위가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

차지하여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함 *虛言: 실속이 없는 빈말. 허어(虛語).

*測度: 따져서 헤아림 *飢寒: 굶주리고 헐벗어 배고프고 추움 *犬豚: 개돼지.

 

<2018.9.23, 이우식 지음>

일, 2018/09/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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悖子奉父母祭祀

 

隣人嘲奉祀(인인조봉사)

悖子設膏粱(패자설고량)

問汝誰何食(문여수하식)

嗚呼孝失光(오호효실광)

 

패륜 자식의 부모 祭祀 받들어 모시기

 

이웃 사람 奉祭祀를 조롱하는데

패륜 자식 膏粱珍味 늘어놓았네

그대에게 묻겠노니 누가 먹는고

오호! 孝가 그만 빛 잃고 말았네.

 

<時調로 改譯>

 

이웃은 조롱하는데 膏粱珍味 늘어놨네

그대 향해 내 묻노니 누가 祭需 먹는고

오호라! 효도가 그만 빛을 잃고 말았네.

 

*悖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자식 *隣人: 이웃

사람 *奉祀: 봉제사(奉祭祀). 주사(主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 *膏粱: 고량

(膏粱珍味). 기름진 기와 좋은 곡식(穀食)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誰何: 누구.

 

<2018.9.25, 이우식 지음>

화, 2018/09/2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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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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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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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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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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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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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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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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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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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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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목, 2018/09/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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