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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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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29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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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시위현장에 참석하여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문 : 역사학자로서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료 수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습니까?

답 : 수집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중학생 때 광주항쟁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는 탄피를 모았습니다.

문 : 5.18 광주항쟁 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했는데, 탄피를 모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답 : 1980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저는 새벽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5.18 항쟁이 일어날 무렵 〈중앙일보〉 상무지국에서 받은 호외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달리며 제 손으로 두 차례나 이틀 연속 호외를 뿌려댔습니다. 하나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인데 소요조종자로 김대중, 리영희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자는 그 헤드라인에 김종필, 이후락 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부의 5.17쿠데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이튿날인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엄포고령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엄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지요. 그 뒤 신문이 반입되지 않아 광주가 봉쇄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장의 호외는 지금도 광주의 부모님 집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 당시의 〈중앙일보〉 수금장부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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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탄핵을 선고하던 날, 광화문광장에서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상태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철모르는 제 또래들은 탄피를 주워서 속칭 ‘짤짤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탄피는 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많았던 금남로와 계엄군의 부분확보작전이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많이 주웠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엄군(20사단)의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당시 탄피를 줍기 위해 그 현장에 나갔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통합병원과 가까운 내방동에 있었거든요. 국군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은 짧은 총격전이었지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8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는 계엄군이나 시민군이 아닌 동네주민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으로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저는 살기 위해 하수구 공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푸집 안으로 피신했습니됐습니다. 저보다도 군인이 더 깜짝 놀라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계엄군이 임시분초로 사용하던 한 이층양옥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여학생이 팔을 잡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군통합병원작전 당시 창문으로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을 받아 팔에 총상을 입은 것입니다. 저를 붙잡은 계엄군은 제 몸을 수색해서 서너 개의 탄피를 발견하고는 “폭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마구 다그쳤습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과 ‘짤짤이’ 하려고 모은 탄피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폭도라면 실탄을 갖고 있지 탄피를 갖고 있겠느냐며 울먹이자 계엄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 밤 그 병사는 날이 어두워 위험하다며 저를 계엄군이 사용하던 임시분초에서 묵게 하고 다음날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군요. 동네사람들이 간밤에 총격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저를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부터 저의 수집벽이 남달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집벽 때문에 대학생 때 또 한 번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80년대 중반 대학(경상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수집벽 때문에 학내에 암약하는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은 것입니다. 매년 5월이 오면 당시 학내에는 광주항쟁이나 민주화 관련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고 캠퍼스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베끼고 각종 유인물을 수집했습니다. 어느 날 총학생회 학생들이 제가 의심스럽다며 이야기를 좀 하자며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제 가방에서 유인물이 나오고 수첩에 대자보 내용과 학내 시위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프락치로 오인한 겁니다. 꼼짝없이 학원프락치로 몰려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과 선배(총대의원회 대의원)가 저를 알아보고 제가 사회학과 학생인 것을 보증해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수집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일제시기 진주지역의 인명록에 등재할 인명 3천4백여 명의 행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명록 때문에 이번에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수집벽이 아닐 수 없지요.

문 : <진주인명록>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드리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전남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김무성 의원의 선친 김용주가 설립한 학교인가요?

답 : 네, 맞습니다. 전남고는 제 모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김용주는 해방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아 임동에 있던 전남방직공장을 인수한 뒤 1966년 방직공장 옆에 중고등학교도 설립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전남고입니다. 남녀공학이 아닌데도 전남고에는 여자학급이 있었는데 바로 방직공장에서 주경야독하는 여공들을 위한 특별학급이 전남고 부설학급으로 방직공장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립학교시절의 전남고는 광주시내 소재 고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이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획일적인 교복과 교모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즉 일제 순사모 같은 학생모와 호크를 채우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고 스마트한 중절모를 쓰고 여학생 교복처럼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이런 교모와 교복은 오직 전남고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다녔지요.
또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선배들이 제일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위에 동참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남고 학생 중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전남고와 같이 있던 부설 전남중에서는 중학생이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또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이 희생당했는데 퇴근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료교사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광주항쟁추모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은 삭제되어 게재)했다가 보안대(현 기무사의 기무부대)에 체포되었고 그 길로 전남고에서도 강제해직되고 말았습니다. 김용주의 사학재단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비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듬해인 1981년 전남고와 전남중이 전격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어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전남고는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과 군사법원이 있던 옛 보병학교자리인 상무대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물론 제가 입학했을 때는 전남고가 방직공장 옆에 있을 때였지만 공립으로 전환된 까닭에 김용주나 사학재단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김용주 동상이나 송덕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용주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기념한 기증비가 교문 수위실 건너편 화단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남고는 김준태 시인 뿐만 아니라 노래 ‘직녀에게’로 유명한 문병란 시인이나 시 ‘봄비’로 유명한 이수복 시인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어서 문학적인 감성을 형성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중 제가 직접 배웠던 영어교사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전남고 선배로는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 등이 있습니다.

문 : 5.18과 관련해서 1982년 3월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죠. 5.18 항쟁이 무자비하게 짓밟 히고 난 직후 그해 겨울 광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시 황금동에 있던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문화원이 있던 황금동은 광주의 돈이 몰리는 번화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윤락가로 유명한 황금동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금동에는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회관도 자리 잡고 있어 저도 중고생일 때 회관 안에 있던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이처럼 황금동은 민족감정이나 자본과 탐욕 등이 엉켜있는 등 온갖 모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미운동의 단초가 열립니다. 시민들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에 의한 5.18 광주학살이 미국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광주항쟁 당시에 일반인들은 설마 자유우방국인 미국이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무력 진압된 후 광주시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컸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처음 일어난 반미운동사건이었고, 문화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도 광주 미문화원에 다시 불이 붙는 2차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부산과 서울에 있던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으로 번지는 등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세력의 폭거와 미국의 방조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은 문부식, 김현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김현장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지켜보고 문부식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그 발단이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5.18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에 가다가 백골단과 전경대에 의해 삼엄하게 둘러싸인 미문화원 앞을 지나치면서 문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광주학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즉시 광주 미문화원에 5.18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이 묵인, 방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책자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내야 할 만큼 저처럼 미문화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시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 : 최근에야 광주학살 진행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진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우리 현대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합니다. 화제를 바꾸어 전라도 광주에서 장성하여 어떻게 경상도 진주로 유학을 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우리 집안의 본적은 대구지만 현재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외가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국구 시민입니다.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 있는 K2 비행장에서 공군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0년대 말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제가 4살 되던 해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이후 저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전라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역차별을 당하셨지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저는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학해 고3 대학입시 때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되고 학비가 싼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되어 지방 국립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산대에 재학중인 외사촌 형님이 진주에 있는 국립대를 소개해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교육’으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전공해야 할 학문은 첫째가 철학이고 둘째가 경제학이고 셋째가 사회학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그중 사회학이 가장 수월하게 보여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까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원 때의 전공은 사회사인데,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경상대라는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경상대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은 1948년에 진주에서 개교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후 진주농대에 농학계열 이외의 학과가 많이 설치되면서 교명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문교부에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겠다고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산시에 있던 사립대학인 마산대학은 1971년 ‘경남대’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았습니다.
결국 1972년 진주농대는 당시 지방국립대에 붙었던 도명을 붙이지 못하고 경상도의 국립대라는 애매한 뜻으로 ‘경상대(慶尙大)’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발음만 들으면 경상대가 일개 대학의 단과대인 경상대(經商大)나 상경대(商經大) 정도로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해 경상대 동문들은 교명변경을 숙원사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남대는 단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대가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어 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박정희정권의 실세였던 ‘피스톨박’ 박종규의 입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명변경 당시 박종규는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고 있으면서 마산대학 이사장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진주농대가 경상대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교가는 여전히 진주농대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 진주 경상대에 진학하여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답 : 당시 경남 거창에서 유학온 진주 교대생이었던 제 아내를 대학 1학년 때 하숙집 친구의 소개로 진주우체국 건너편 다방에서 처음 만났고, 졸업 후 결혼해 2녀를 두고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너무 이야기에 몰두해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높다란 흰색담장에서 총기로 무장한 경교대와 맞닥뜨렸는데 바로 진주교도소(1989년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함)임을 알고 황급히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총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2005년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지금은 서로가 바빠 월말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요즘 말하는 ‘졸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의 아내가 30여 년 전의 애인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문 : 진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 일컬어졌고 양반의 고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울러 진주민란, 형평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한 지역이었죠.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진주로 수학여행을 왔습니다.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남강 촉석루 밑 의암에서 느꼈던 비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상대에 입학한 후 진주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진주목사, 경상우병마절도사, 경남관찰사의 소재지였고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직전까지 경남 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왜색불교를 없애고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청담스님이 진주출신이고,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일컫는 성철스님도 일제 때 진주고보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진주정신’을 낳게 한 것은 저항의 역사도 있지만 그 토양으로서 ‘진주문화’도 있다고 봅니다.
진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1941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에서 나오듯이 흔히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천리(420km)라고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진주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적으로 진주에는 기생문화와 유흥문화가 발달해 진주검무를 비롯해 진주포구락무, 진주한량무, 진주교방굿거리 등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예인들을 낳았는데, 몇 사람을 들면, ????친일인명사전????에오르긴했지만일각에서불세출의‘가요의황제’로추앙하는‘남인수’를비롯해‘산유화’와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재호’, ‘대머리 총각’과 ‘곡예사의 첫사랑’ 등을 작곡한 ‘정민섭’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최초의 종합예술제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진주에서 처음 열렸는데, 바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가 그것입니다.

문 : 진주의 고유한 전통과 독자성이 느껴집니다. 진주민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위 중앙관료 출신이 참여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주의 저항정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1월) 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관민을 모아 격렬히 항전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김시민 목사는 총탄에 맞아 순국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끝 무렵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총공세로 함락됩니다. 이때 논개도 순절합니다. 이와 같이 진주처럼 외세의 침략에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관군이 합심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곳도 드뭅니다.
그러나 조선말 진주지역 토호세력의 수탈이 극심했고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인 민중의 저항입니다. 진주민란은 진주의 병마절도사와 토호세력의 착취로 일어났는데 향반출신인 류계춘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는 농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일어나 의병이 크게 봉기했던 곳의 하나가 진주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진주의 민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서 최초의 한글(국한문 혼용) 지방신문이 탄생합니다.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의 유지들이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입니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에서 쫓겨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에 옵니다.
더구나 천민의 대명사이던 백정을 해방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처음 벌어진 곳도 진주입니다. 1923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사회적으로 이중차별을 받던 백정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형평운동을 주도한 한 선각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출신이었던 강상호였다는 점에서 진주의 진보성과 민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을 이끈 제2차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바로 진주의 사회운동가 강달영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고,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진주의 소년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볼 때 진주가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에 깃든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다음호로 이어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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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8/0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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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告金正恩

 

桀紂還生處(걸주환생처)

誰言有自由(수언유자유)

或嘆生地獄(혹탄생지옥)

萬姓化耕牛(만성화경우)

 

김정은에게 거듭 告함

 

夏나라 桀과 殷나라 紂의 還生處

그 뉘라서 자유가 있다고 말하나

或 산지옥 같다 嘆하기도 하느니

모든 백성은 밭갈이 소로 化했소.

 

<時調로 改譯>

 

桀과 紂의 還生處 자유 있다 뉘 말하나

或者는 산지옥이라 탄식하기도 하느니

오호라! 모든 백성은 밭갈이 소 되었소.

 

*桀紂: 중국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아울러 이름. 천하

폭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還生: 다시 살아남. 또는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남

*生地獄: 아서    지옥이란  뜻으로, 아주  괴롭고 힘든 곳 또는 그런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름. 산지옥 *萬姓: 萬民. 온갖 성(姓) *耕牛: 논밭 갈 때 부리는 소.

 

<2018.8.8, 이우식 지음>

수, 2018/08/0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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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다운로드]

교육부는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가?

1. 우리는 지난 5월 3일 성명(제목: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수정한 새 집필기준 마련, 당연하다)을 발표하여 새 교육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수정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7월 27일 최종 고시된 교육과정은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가하였다. 헌법 전문에 쓰여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 독일 기본법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the principles of freedom and democracy)’를 의미한다.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적 기본질서’와 ‘민주적 기본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교과서를 옹호했던 수구 세력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협소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로 견강부회하는 상황에 비춰볼 때, 교육부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교육과정에 불쑥 추가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가 여전히 수구·냉전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이 과정에서 교육부는 절차상 하자도 되풀이 하였다. 새 역사과 교육과정은 개발과정에서 역사교육 현장의 의견 수렴, 수많은 전문가 그룹의 자문과 공청회를 거치며 시안이 마련되었고, 행정예고 직전에 역사교육 전문가들로 구성된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행정 예고 기간에 수렴된 의견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교육과정 개발진과 심의위원회의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된 교육과정을 일방적으로 고시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지막 결재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를 바꾼 것과 닮은꼴이다. 교육부가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다짐한 “교육 민주주의 회복 및 교육자치 강화”가 무색할 따름이다.

3.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교육과정에 추가한 최종 단위는 박춘란 차관이 위원장인 교육과정심의회 운영위원회라고 한다. 대통령령인 교육과정심의회 규정 5조는 “운영위원회는 교육과정 제·개정에 있어서의 전체적인 원칙 및 목적조정에 관한 사항과 다른 위원회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을 조정 심의한다.”로 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소동은 운영위원회가 권한 밖의 사항에 대해 지극히 정치적 판단을 한 것으로 운영위원회 결정 과정 전체가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육부가 과연 교육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4. 교육부는 2018년 7월 31일 역사과 교과용 도서에 관한 검정 실시도 공고했다. 공개된 집필기준은 5쪽으로 대주제별로 대략적인 서술 범위만을 제시하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과서가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함께 공개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 기준’은 매우 실망스럽다. 박근혜 정부가 탄핵국면에서도 국정교과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2017년 2월에 급조하여 발표했던 국·검정 혼용을 위한 검정기준과 매우 흡사하다. 국정교과서 폐지 운동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논의되고 제안된 새로운 검정교과서의 상(像)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2020년에 현장에 적용해야 할 검정 역사 교과서 개발 전체 기간은 17개월이다. 교과서 집필, 교과서 검정과 현장 채택 등의 촘촘한 일정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국정교과서가 폐지된 이후에도 일부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며 새 교육과정 고시를 차일피일 미뤄온 교육부의 무소신과 무책임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5. 박근혜 정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부역했던 교육부는 권력의 힘으로 역사 교육에 개입했던 이전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고 몰락했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부가 할 일은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의견을 들어 역사교육이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도록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교육부는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데 더 이상 앞장서지 말기 바란다. <끝>

2018년 8월 6일
역사정의실천연대

화, 2018/08/0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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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수 신 : 각 언론사 정치, 사회, 통일, 외교담당. NGO 담당기자
발 신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준)
제 목 : [취재요청]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일 시 : 2018년 8월 9일(목) 오전 11시 30분
장 소 :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 (19층)
문 의 : 이하나 (언론담당 010-6584-2121)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010-8402-1718)


강제동원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피해자 김한수 어르신 발언 / 북측 민화협, 재일동포, 일본시민사회 연대사 발표
/ 양승태 재판거래 대응계획, 외교부 공개질의

1. 광복 73돌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일과거청산 및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겁지만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적인 동력과 집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피해자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지금 시민사회가 목소리 내고 행동하지 못하면 이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한 역사로만 남을 것입니다.

2. 이에 각계 시민, 사회, 종교단체들이 모여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이하 강제동원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기자회견을 가집니다 . 단체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를 포함해 민주노총 등의 노동단체 시민 사회 종교단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별첨. 강제동원 공동행동 조직구성안)

3.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향후 남북공동대응을 준비하며, 남북 강제동원 피해 실태조사 공동 피해자 증언대회 등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단체 결성을 축하하는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연대사 가 발표될 예정입니다.

4.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이후 재일동포 및 일본시민사회와도 연대해나갈 예정입니다. 이 날 기자회견에는 ▲재일동포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 연대 발언 ▲일본시민사회 연대사(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가 발표될 예정입니다.

5.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시민사회의 실천과 공동행동을 활발히 벌이고자 합니다. 특히 최근 양승태 대법원 강제동원 재판거래와 관련하여 외교부가 사법부 김앤장과 결탁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등에 대해 ▲외교부 공개질의를 발표하고, 강제동원 판결 관련 8월 22일 대법원 심리시작을 앞두고 대법원의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8월 13일 ~17일 대법원 앞 1인 시위 및 기자회견 등 계획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기자회견 개요조직구성안, 발족선언문을 첨부합니다. 이 외에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연대사, 일본시민사회 연대사, 외교부 공개질의서 등은 당일 배포될 예정입니다.


[기자회견 개요]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 일시 : 2018년 8월 9일(목) 오전 11시 30분 ○ 장소 :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19층)
○ 사회 : 김민철 (강제동원 공동행동 운영위원장)
○ 내용
▲ 여는말 : 홍순권 (강제동원 공동행동 상임공동대표)
▲ 피해자 발언 : 김한수 어르신
▲ 격려사 :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
▲ 발언1 : 일제 강제동원 사죄배상, 국민의 힘, 민족의 힘으로 해결하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김명환 위원장)
▲ 발언2 : 대일과거사, 다양한 과제 청산을 위해 단결하고 연대하자!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목사)
▲ 연대사 : 재일동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대독 : 이연희 강제동원 공동행동 사무처장), 일본시민사회/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 (대독 :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 발족선언문 낭독 (평화디딤돌 박진숙 사무국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하나 정책국장)
▲ 발족상징 퍼포먼스
▲ 향후 사업계획발표


[별첨1] 조직구성 (2018년 8월 9일 현재)

○ 단체명: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 고문 : 강만길, 김삼웅, 성타스님, 윤정옥, 이만열, 이이화, 이창복, 전기호, 함세웅

○ 상임공동대표 : 홍순권, 이수호, 조성우

○ 공동대표(단체)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이윤배)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원택스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서중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이희자)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조성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김명환)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권해효)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평화디딤돌 (정병호) 포럼 진실과 정의 (이석태 / 김효순 / 홍순권) 흥사단(류종열) 합천 평화의집(이남재)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KIN지구촌동포연대 (배덕호)

○ 공동대표(개인) : 김삼열, 단병호, 이수호

○ 운영위원장 :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 : 이연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정책위원장 : 김영환(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별첨2] 발족선언문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선언문]

해방 73년을 맞는 2018년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선언’은 분단 70년의 장벽을 넘어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평화의 첫걸음이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로 얼룩진 과거를 올바로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식민주의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아 ‘2015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식민주의와 식민지배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범죄이며,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음을 두 선언은 강조했다. 또한 식민주의의 청산을 위해 일본 정부가 해결해야 할 20개 과제를 제시하고 이의 신속한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주의 청산을 위한 시민들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답하기는커녕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안보법제를 제정하는 등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으며, 아시아 침략의 역사로 점철된 메이지(明治) 시대를 미화하는 ‘메이지유신 150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일본은 평화로운 동아시아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남긴 문제가 아직도 동아시아의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불행한 현실 앞에서 우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투쟁해 온 피해자들과 동아시아의 시민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국가권력은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에 자신들의 인간존엄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 일어선 피해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법정에서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 70여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 안겨준 고통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들은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준엄한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과 진정한 대일과거청산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자 한다.

우리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비롯하여 대일과거청산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남과 북, 재외동포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시민들과 연대할 것이며, 우리의 첫걸음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2018년 8월 9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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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8/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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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응원영상 5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라이터를 켜라’, ‘기억의 밤’ 등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하는 영상을 직접 보내왔습니다.

수, 2018/08/0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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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4.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4탄!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응원합니다! 지난해 열렸던 ‘적폐청산 항일음악 콘서트’의 미공개 영상입니다^^

수, 2018/08/0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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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시교육청에 등록된 공익사단입니다.
관련단체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영리민간단체 (사)민족문제연구소가 있습니다.
‘(사)’는 교육청에 등록된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모체(?)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은 (사)민족문제연구소가 언제 설립되고, 어떤 목적 사업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민족문제연구소를 추가로 등록한 이유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목, 2018/08/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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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會議員輩特別活動費

 

外面民生苦(외면민생고)

錢與野同(탐전여야동)

如何多歲費(여하다세비)

私慾每無窮(사욕매무궁)

 

국회 의원들의 특별 활동비

 

백성들 삶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돈을 탐냄에는 與野가 똑같다네

많이 받는 그 歲費 어찌 된 건가

사사로운 욕심은 늘 무궁하구나.

 

<時調로 改譯>

 

민생고 외면하면서 貪錢엔 與野가 같네

많이 받는 그 歲費는 대체 어찌 된 건가

당신들 私的인 욕심 언제나 무궁하구나.

 

*歲費: 국가 기관에서 한 해 동안 쓰는 경비. ≒세용(歲用). 국가 기관에서 官僚

등에게 지급하는 돈.법률국회 의원이 매월 지급받는 수당 및 활동비 *私慾:

자기 한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욕심 *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2018.8.9, 이우식 지음>

목, 2018/08/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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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양승태 대법원, 충격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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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사 선임연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소중한

“항상 가슴에 피맺혀 있는 것은 일본과의 문제입니다. ‘인생 이렇게 살다 가면 끝인가’라는 생각에 한스럽고 슬플 때가 많습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한수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100년 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 할아버지는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켰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오늘까지 아무런 대가가 없다”라며 “지금까지 일본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의 사과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너무도 괘씸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는 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밤낮 남의 나라에 찢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며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문제 해결의)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하지 않고 좀 강력하게 헌신했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김씨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비롯한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모임이 9일 발족했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은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준엄한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과 진정한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한다”라고 발표했다.

이어 공동행동은 “일본 정부는 식민주의 청산을 위한 시민들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답하기는커녕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라며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일본은 평화로운 동아시아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북측 “굳은 련대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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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 소중한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아베는 사죄하라”, “남북이 힙을 합쳐 강제동원 문제 해결”, “재판거래 규탄, 양승태를 처벌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날 공동행동이 발표한 당면 과제는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최근 일제 강제동원 소송과 관련해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 재판거래의 실체가 드러났고, 외교부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깊이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라며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청와대, 외교부, 대법원이 헌법을 위반해 자국민 보호의 책무를 방기하고, 사법부의 독립을 유린한 국정농단을 펼친 것이다”라며 “이 땅에 정의를 수호할 법원도, 국민을 대변할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도 없었다는 참담한 사실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동행동은 ▲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외교부의 공식입장은 무엇인가 ▲ 강제동원은 국제법상 반인도적 범죄이며 중대한 인권침해인데 외교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 한일청구권협정문제에 대한 외교부의 대책은 무엇인가 ▲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외교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등의 내용이 담긴 외교부 공개질의서를 발표했다. 또 13~17일 릴레이 1인시위, 22일 기자회견을 대법원 앞에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공동행동은 북한, 재일동포, 일본 시민단체 등과 공조할 계획이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서면 연대사를 통해 “우리는 공동행동이 일본의 과거 죄악을 청산하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를 지키며 판문점선언의 기치 밑에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데 선봉적 역할을 다하리라고 확신한다”라며 “남녘의 각 계층 단체, 인사들에게 굳은 련대적 인사를 보낸다”라고 밝혔다.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의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도 “공동행동과 손잡고 운동을 추진할 일본 측 단체를 조속히 발족시키겠다, 이를 계기로 피해자들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반드시 문제가 해결되도록 노력하자”라는 내용의 서면 연대사를 보내왔다.

공동행동은 “남과 북, 재외동포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시민들과 연대할 것이다”라며 “우리의 첫걸음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라고 덧붙였다.

공동행동에 참여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 민족문제연구소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조선학교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 평화디딤돌 ▲ 포럼 진실과 정의 ▲ 흥사단 ▲ 합천 평화의집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 KIN지구촌동포연대

<2018-08-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죽으면 끝인가…” 100세 강제징용 할아버지의 한탄

※관련기사

☞뉴시스: “일제 강제동원 문제, 남북한이 공동 대응”…공동행동 발족

☞연합뉴스: “남북 힘 합쳐 일제 강제동원 사죄받자” 공동행동 발족

목, 2018/08/0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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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문의를 드립니다.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2018년 여름호 출간은 언제인가요???

금, 2018/08/1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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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부근까지 400여명 촛불 행진
“반일 일본인 일본에서 나가라” 우익들 방해도
토론회에서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빛만 강조해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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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이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전쟁 반대. (야스쿠니 신사) 합사 반대”

11일 저녁 한·일 시민 400여명이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부터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근처까지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펼침막을 들고 촛불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촛불을 상징하는 형광 띠를 손목에 두르고 “아베 (신조) 총리는 그만둬라” “야스쿠니 반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아베 정부는 군국주의적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강한 비판 목소리도 나왔다.

이날 평화 행진은 태평양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신사 위헌소송 모임 등 한일 시민단체와 활동가 등이 참가한 촛불행동실행위원회가 주최했으며, 2006년부터 열리고 있다. 행진 마지막에 우치다 마사토시 촛불행동실행위원회 공동 대표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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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손팻말을 들었다. 일장기와 욱일승천기 모습도 보인다.

우익들의 평화 행진 방해는 올해도 계속됐다. 우익 세력으로 추정되는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반일 일본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같은 구호를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 “일본을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는 용서할 수 없다” 같은 펼침막을 욱일승천기와 일장기 함께 흔들었다. 행진 장소 중 한 곳이었던 진보초 사거리에서는 태극기를 찢는 이도 있었고 평화 행진 참가자를 향해서 돌진하려다가 경찰에 제지당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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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극좌 촛불 데모 용서할 수 없다”고 쓴 펼침막을 들고 있다.

평화 행진에 앞서 이날 도쿄 재일한국와엠시에서는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는 “올해는 메이지유신 발생 150년이 되는 해다. (아베 정부는) 메이지유신의 강점만을 강조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메이지의 빛만을 강조하고 어둠을 외면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메이지유신의 강점은 옛 일본군의 군사력과 천황 중심 문화인 것 같다. 그런 역사관이라면 나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군 병사-아시아·태평양전쟁의 현실>이라는 책을 쓴 요시다 유타카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숨진 이가 310만명이었는데, 이중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쇠약해져 숨진) 병사가 전체의 60% 정도였다, 근대 군대사 관점에서 볼 때 퇴행적 현상이 벌어졌다”며 “야스쿠니신사가 전몰자를 영웅시하는 것과는 달리 병사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처럼 가혹하고 무참했다”고 지적했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소송은 각하 또는 기각하고 강제징용피해자 소송은 지연하라는 내부지침을 내린 게 드러났다. 이는 한일관계에서 한국의 우파 정권이 무엇을 지향하려 하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두려워한 것은 ‘안보를 위해서 역사를 죽인’ 65년체제(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만들어진 한일 관계)의 균열을 우려한 것이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박근혜 정권은 65년 체제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65년 체제의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고 (2016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등으로) 이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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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심포지엄 뒤에는 야스쿠니신사에 아버지가 합사된 유족 이명구씨가 단상에 올랐다. 이씨의 아버지는 1943년 군속으로 강제동원돼 1945년 4월 팔라우섬에서 숨졌다. 이씨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끌려가신 3년 뒤인) 1946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9살 그리고 동생이 5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사상에 놓인 과일을 보고 먹고 싶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은 굶주림 끝에 쇠약해져서 숨졌다. 일본 때문에 나는 고아가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죽게 한 것도 억울한데 왜 일본 정부는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합사를 했는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은 야스쿠니신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 protected].k

<2018-08-12> 한겨레 

☞기사원문: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도쿄에 퍼진 한·일 시민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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