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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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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29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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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시위현장에 참석하여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문 : 역사학자로서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료 수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습니까?

답 : 수집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중학생 때 광주항쟁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는 탄피를 모았습니다.

문 : 5.18 광주항쟁 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했는데, 탄피를 모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답 : 1980년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저는 새벽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5.18 항쟁이 일어날 무렵 〈중앙일보〉 상무지국에서 받은 호외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달리며 제 손으로 두 차례나 이틀 연속 호외를 뿌려댔습니다. 하나는 5월 17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인데 소요조종자로 김대중, 리영희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자는 그 헤드라인에 김종필, 이후락 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부의 5.17쿠데타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이튿날인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엄포고령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엄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지요. 그 뒤 신문이 반입되지 않아 광주가 봉쇄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장의 호외는 지금도 광주의 부모님 집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한편으로 그 당시의 〈중앙일보〉 수금장부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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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 탄핵을 선고하던 날, 광화문광장에서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상태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철모르는 제 또래들은 탄피를 주워서 속칭 ‘짤짤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탄피는 주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많았던 금남로와 계엄군의 부분확보작전이 있었던 국군통합병원 근처에서 많이 주웠습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6시 계엄군(20사단)의 국군통합병원 확보작전 당시 탄피를 줍기 위해 그 현장에 나갔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통합병원과 가까운 내방동에 있었거든요. 국군통합병원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시민군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은 짧은 총격전이었지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8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는 계엄군이나 시민군이 아닌 동네주민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으로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저는 살기 위해 하수구 공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푸집 안으로 피신했습니됐습니다. 저보다도 군인이 더 깜짝 놀라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계엄군이 임시분초로 사용하던 한 이층양옥집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한 여학생이 팔을 잡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군통합병원작전 당시 창문으로 총격전을 구경하다가 저격을 받아 팔에 총상을 입은 것입니다. 저를 붙잡은 계엄군은 제 몸을 수색해서 서너 개의 탄피를 발견하고는 “폭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마구 다그쳤습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과 ‘짤짤이’ 하려고 모은 탄피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폭도라면 실탄을 갖고 있지 탄피를 갖고 있겠느냐며 울먹이자 계엄군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 밤 그 병사는 날이 어두워 위험하다며 저를 계엄군이 사용하던 임시분초에서 묵게 하고 다음날 내보내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군요. 동네사람들이 간밤에 총격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저를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부터 저의 수집벽이 남달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집벽 때문에 대학생 때 또 한 번 맞아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80년대 중반 대학(경상대 사회학과)에 들어가서는 수집벽 때문에 학내에 암약하는 학원프락치로 오인받은 것입니다. 매년 5월이 오면 당시 학내에는 광주항쟁이나 민주화 관련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고 캠퍼스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이 흩날렸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베끼고 각종 유인물을 수집했습니다. 어느 날 총학생회 학생들이 제가 의심스럽다며 이야기를 좀 하자며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갔습니다. 제 가방에서 유인물이 나오고 수첩에 대자보 내용과 학내 시위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프락치로 오인한 겁니다. 꼼짝없이 학원프락치로 몰려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같은 학과 선배(총대의원회 대의원)가 저를 알아보고 제가 사회학과 학생인 것을 보증해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수집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일제시기 진주지역의 인명록에 등재할 인명 3천4백여 명의 행적을 수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인명록 때문에 이번에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수집벽이 아닐 수 없지요.

문 : <진주인명록>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드리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전남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김무성 의원의 선친 김용주가 설립한 학교인가요?

답 : 네, 맞습니다. 전남고는 제 모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김용주는 해방 후 일제의 적산을 불하받아 임동에 있던 전남방직공장을 인수한 뒤 1966년 방직공장 옆에 중고등학교도 설립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전남고입니다. 남녀공학이 아닌데도 전남고에는 여자학급이 있었는데 바로 방직공장에서 주경야독하는 여공들을 위한 특별학급이 전남고 부설학급으로 방직공장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립학교시절의 전남고는 광주시내 소재 고교 중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이 유신시대를 상징하는 획일적인 교복과 교모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즉 일제 순사모 같은 학생모와 호크를 채우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고 스마트한 중절모를 쓰고 여학생 교복처럼 카라가 달린 교복을 입었습니다. 당시 이런 교모와 교복은 오직 전남고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교모와 교복을 착용하고 다녔지요.
또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자 선배들이 제일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위에 동참하고 시민군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전남고 학생 중에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전남고와 같이 있던 부설 전남중에서는 중학생이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또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이 희생당했는데 퇴근하는 남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료교사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독일어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는데,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광주항쟁추모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게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은 삭제되어 게재)했다가 보안대(현 기무사의 기무부대)에 체포되었고 그 길로 전남고에서도 강제해직되고 말았습니다. 김용주의 사학재단이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비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듬해인 1981년 전남고와 전남중이 전격적으로 국가에 헌납되어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전남고는 광주항쟁을 진압한 계엄군과 군사법원이 있던 옛 보병학교자리인 상무대로 교사를 이전했습니다. 물론 제가 입학했을 때는 전남고가 방직공장 옆에 있을 때였지만 공립으로 전환된 까닭에 김용주나 사학재단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김용주 동상이나 송덕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용주가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기념한 기증비가 교문 수위실 건너편 화단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남고는 김준태 시인 뿐만 아니라 노래 ‘직녀에게’로 유명한 문병란 시인이나 시 ‘봄비’로 유명한 이수복 시인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어서 문학적인 감성을 형성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분들 중 제가 직접 배웠던 영어교사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전남고 선배로는 헌법재판소 김이수 재판관 등이 있습니다.

문 : 5.18과 관련해서 1982년 3월 부산에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반미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죠. 5.18 항쟁이 무자비하게 짓밟 히고 난 직후 그해 겨울 광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광주시 황금동에 있던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문화원이 있던 황금동은 광주의 돈이 몰리는 번화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윤락가로 유명한 황금동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금동에는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회관도 자리 잡고 있어 저도 중고생일 때 회관 안에 있던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이처럼 황금동은 민족감정이나 자본과 탐욕 등이 엉켜있는 등 온갖 모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미운동의 단초가 열립니다. 시민들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는 5.18의 진상규명과 전두환의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에 의한 5.18 광주학살이 미국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광주항쟁 당시에 일반인들은 설마 자유우방국인 미국이 쿠데타와 학살을 묵인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가 무력 진압된 후 광주시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매우 컸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처음 일어난 반미운동사건이었고, 문화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도 광주 미문화원에 다시 불이 붙는 2차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1985년에는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은 부산과 서울에 있던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으로 번지는 등 반미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군부세력의 폭거와 미국의 방조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은 문부식, 김현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김현장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지켜보고 문부식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저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그 발단이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5.18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미국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에 가다가 백골단과 전경대에 의해 삼엄하게 둘러싸인 미문화원 앞을 지나치면서 문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광주학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즉시 광주 미문화원에 5.18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미국이 묵인, 방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책자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내야 할 만큼 저처럼 미문화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시민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 : 최근에야 광주학살 진행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진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이 우리 현대사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합니다. 화제를 바꾸어 전라도 광주에서 장성하여 어떻게 경상도 진주로 유학을 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우리 집안의 본적은 대구지만 현재 부모님은 광주에 살고 계십니다. 저는 외가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경남 진주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국구 시민입니다.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 있는 K2 비행장에서 공군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0년대 말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제가 4살 되던 해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이후 저는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오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전라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반대로 부모님은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역차별을 당하셨지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저는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학해 고3 대학입시 때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되고 학비가 싼 국립대만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되어 지방 국립대를 알아보았습니다. 부산대에 재학중인 외사촌 형님이 진주에 있는 국립대를 소개해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교육’으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전공해야 할 학문은 첫째가 철학이고 둘째가 경제학이고 셋째가 사회학이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그중 사회학이 가장 수월하게 보여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까지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원 때의 전공은 사회사인데, 역사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경상대라는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경상대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은 1948년에 진주에서 개교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후 진주농대에 농학계열 이외의 학과가 많이 설치되면서 교명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문교부에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겠다고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산시에 있던 사립대학인 마산대학은 1971년 ‘경남대’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았습니다.
결국 1972년 진주농대는 당시 지방국립대에 붙었던 도명을 붙이지 못하고 경상도의 국립대라는 애매한 뜻으로 ‘경상대(慶尙大)’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발음만 들으면 경상대가 일개 대학의 단과대인 경상대(經商大)나 상경대(商經大) 정도로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해 경상대 동문들은 교명변경을 숙원사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남대는 단과대학으로 경상대학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대가 경남대로 교명을 바꾸어 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박정희정권의 실세였던 ‘피스톨박’ 박종규의 입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명변경 당시 박종규는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고 있으면서 마산대학 이사장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진주농대가 경상대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교가는 여전히 진주농대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 진주 경상대에 진학하여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답 : 당시 경남 거창에서 유학온 진주 교대생이었던 제 아내를 대학 1학년 때 하숙집 친구의 소개로 진주우체국 건너편 다방에서 처음 만났고, 졸업 후 결혼해 2녀를 두고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너무 이야기에 몰두해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높다란 흰색담장에서 총기로 무장한 경교대와 맞닥뜨렸는데 바로 진주교도소(1989년 시내에서 외곽으로 이전함)임을 알고 황급히 되돌아 간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총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2005년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지금은 서로가 바빠 월말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나 요즘 말하는 ‘졸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의 아내가 30여 년 전의 애인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문 : 진주는 예로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라 일컬어졌고 양반의 고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울러 진주민란, 형평운동에서 보듯이 민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한 지역이었죠.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중학교 때 진주로 수학여행을 왔습니다.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 남강 촉석루 밑 의암에서 느꼈던 비장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상대에 입학한 후 진주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진주목사, 경상우병마절도사, 경남관찰사의 소재지였고 1925년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 직전까지 경남 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왜색불교를 없애고자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킨 청담스님이 진주출신이고,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일컫는 성철스님도 일제 때 진주고보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진주정신’을 낳게 한 것은 저항의 역사도 있지만 그 토양으로서 ‘진주문화’도 있다고 봅니다.
진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1941년)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에서 나오듯이 흔히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가 천리(420km)라고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천리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진주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독자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가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적으로 진주에는 기생문화와 유흥문화가 발달해 진주검무를 비롯해 진주포구락무, 진주한량무, 진주교방굿거리 등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예인들을 낳았는데, 몇 사람을 들면, ????친일인명사전????에오르긴했지만일각에서불세출의‘가요의황제’로추앙하는‘남인수’를비롯해‘산유화’와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재호’, ‘대머리 총각’과 ‘곡예사의 첫사랑’ 등을 작곡한 ‘정민섭’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최초의 종합예술제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진주에서 처음 열렸는데, 바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가 그것입니다.

문 : 진주의 고유한 전통과 독자성이 느껴집니다. 진주민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위 중앙관료 출신이 참여하는 등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주의 저항정신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1월) 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관민을 모아 격렬히 항전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김시민 목사는 총탄에 맞아 순국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끝 무렵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총공세로 함락됩니다. 이때 논개도 순절합니다. 이와 같이 진주처럼 외세의 침략에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관군이 합심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곳도 드뭅니다.
그러나 조선말 진주지역 토호세력의 수탈이 극심했고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인 민중의 저항입니다. 진주민란은 진주의 병마절도사와 토호세력의 착취로 일어났는데 향반출신인 류계춘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이 한창일 때는 농민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일어나 의병이 크게 봉기했던 곳의 하나가 진주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 대한제국 시기에는 진주의 민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주에서 최초의 한글(국한문 혼용) 지방신문이 탄생합니다.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의 유지들이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입니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에서 쫓겨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어 진주에 옵니다.
더구나 천민의 대명사이던 백정을 해방하기 위한 인권운동이 처음 벌어진 곳도 진주입니다. 1923년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사회적으로 이중차별을 받던 백정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형평운동을 주도한 한 선각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출신이었던 강상호였다는 점에서 진주의 진보성과 민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6.10 만세운동을 이끈 제2차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바로 진주의 사회운동가 강달영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고,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진주의 소년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볼 때 진주가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주에 깃든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다음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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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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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4.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실현 가능한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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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3 – ‘남북관계 개선’이 첫 번째로 언급된 이유 ?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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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반민족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

“반민족주의자 김창룡의 묘를 몰아내자!”
“친일청산하고 민족통일 이뤄내자!”
“국회는 국립묘지법을 신속히 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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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현충원 묘지 현충원 묘지 앞 ⓒ 송혜림

6일 10시, 대전국립묘지 현충교에선 뜨거운 열기를 잊은 듯한 힘찬 구호가 울려퍼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이 묻혀진 현충원에 ‘친일파’라니, 과연 무슨 일일까.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김창룡과 5.18 민주항쟁을 진압한 책임자들이 순국열사들과 함께 현충원에 묻혀있다고 문제를 제기 했다.

이번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 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평화재향군인회, 대전충청 5.18민주유공자회 등 시민단체 주최로 현충교에서 진행되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묵념하기 위해 찾는 현충원,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날 행사는 가두 판넬 전시와 홍보물 배포, 성명서 낭독과 파묘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되었다.

현충원의 장군묘역은 반민족 사범들의 안식처인가” 울분의 성명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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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교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든 모습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가 열린 와중,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임재근

오전 9시, 가두 판넬 전시 및 홍보물 배포로 시작한 행사는 본격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를 열었다.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의 대회사와 촉구 발언이 이어지고, 대회 참가자들의 성명서 낭독이 시작되었다. 아래는 성명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으로 구석구석 이 땅의 적폐를 청산중에 있으며, 오래된 민족의 적폐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새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곳 국립묘지는 과거의 적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여전히 ‘국립묘지법’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국립묘지는 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 비호 아래 양민학살에 앞섰고, 민족 지도자이신 김구 선생님의 암살을 사주하는 등, 온갖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김창룡이 ‘국립 묘지법’의 비호 아래 이 곳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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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를 낭독중인 이순옥 부위원장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이 <국립묘지법 개정과 친일파 묘 이전 촉구대회> 성명서를 낭독중이다. ⓒ 임재근

그리고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주범이자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처벌받은 범법자 안현태와, 5.18 민주항쟁 당시 진압군 측 주요 책임자인 유학성, 소준열이 이곳에 버젓히 편하게 잠자고 있다. 이런 자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국립묘지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 국민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짓이자, 이 곳에 고이 잠들어 계시는 순국선열과과 애국지사를 능멸하는 것이다.”

대회 참가자들은 더불어 이해 관계자들에 주장하는 바를 밝혔다. 우선 김창룡과 안현태 등의 유족에는 “그들의 묘가 현충원에 있는 한 국민에게 조롱받을 것”이라며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묘를 이장”하길 요구했다. 또 국회위원들에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개정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길” 촉구했다.

더불어 현충원 유족들과 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우리 호국영령 들은 반민족 반민주 인사들과 한자리에 묻혀 맘이 편하실리 없다. 유족과 국민들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이들을 국립현충원에서 몰아내도록 여론을 만들자”라며 친일파 파묘에 힘을 보태주길 호소했다.

추모의 장에 친일파 흔적은 없어져라… 파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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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현충원 파묘 퍼포먼스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퍼모먼스를 대회 참가자들이 이행하고 있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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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룡 묘 앞에 놓인 피켓들 김창료 묘 앞에 참가들이 준비한 피켓들이 놓여져 있다. ⓒ 송혜림

‘민족의 반역자 김창룡 묘 파가라!’라고 적힌 커다란 삽이 등장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삽에 이어진 끈을 잡고 영차영차 잡아당기자, 마치 무덤을 파내는 듯한 파묘 장면이 연출된다. 현충원 장군묘역에 위치한 육군중장 김창룡의 묘에서는 위와 같은 파묘 퍼포먼스와 묘 이전을 촉구하고 국립묘지법을 개정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

김창룡,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들이 이렇게도 분노하는걸까.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한 그는 1940년에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중지군의 아마카스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다. 중국공산단 거물 왕진리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그는 이후 다수의 항일조직을 적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월남 이후 국방경비대 내부 좌익숙청을 벌이며 육군 방첩대장이 된 김창룡은 1949년 ‘김구암살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며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6.25 전쟁 이후 김창룡은 특무부대장으로 부임 후 정치적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한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암살당한 그의 장례식은 최초의 국군장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서 치뤄졌으나, 1988년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애국지사 조문기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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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원에 이장된 조문기 묘 앞에서 대회 참가들이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송혜림

친일파의 묘에서 퍼모먼스를 이행한 참가자들은 고 조문기 열사의 묘로 이동했다. 조문기 열사는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대한애국 청년당을 개설하고 국내 항일운동을 주도해왔다. ‘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아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하다 2006년 파킨스병으로 사망했다.

추모사를 발언한 박해룡은 “이승만 정권 하에 단독정부와 독재를 반대한 조문기는 민주화 투쟁과 통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현대사를 바로잡고자 노력했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함께 했다.”라며 “승리의 영광없이 고난밖에 없던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다. 그러나 현재 남북회담의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 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시대에 발맞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몰아내는 데 힘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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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곽낙원의 묘와 김 인의 묘 앞 단체촬영 김구 어머니 곽낙원의 묘와 김구 아들 김 인의 묘 앞에서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 송혜림

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의 묘 앞에서는 “민주화를 갈망했던 아들이 부당하게 세상을 뜬지 70년이 되었다. 여전히 국내 곳곳에는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다.”라며 “요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김구와 김구 어머니가 그토록 꿈꾸시던 통일을 앞두고 있다. 조속하게 친일과 유신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노력하겠다. 양심 민주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연대하며 만들어가겠겠다”라며 추도사를 마쳤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 인사 중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으로 총 63명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가슴아픈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의 하나로 이들 묘지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어져 왔으나, 현행 법에 제정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수년 째 미뤄져 왔다. 그러나 최근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사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어 현충원의 진정한 존재가치가 바로잡히길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2018-06-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에 드리워진 그림자, 친일파의 묘?

목, 2018/06/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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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어린이 책을 좌편향이라며 낙인찍은 정황이 보인다. <시사IN>이 입수한 문건을 보면 ‘전태일이 위인으로 소개’돼 있어 ‘도서 선택에 신중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집요하게 ‘좌편향’을 문제 삼았다. 기존 검인정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공격하며, “99.9% 전국 고등학교의 절대다수가 편향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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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과 안종범 경제수석이 청와대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좌편향’ 낙인찍기 집착은 교과서만이 아니었다. <시사IN>은 박근혜 정부가 기존 어린이 교양도서도 좌편향이라며 낙인찍은 문건을 입수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다. 여기에는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지시사항에 대한 이행 및 대책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같은 내용이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업무수첩 51권 곳곳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이하 국정화)를 추진하던 2015년 11월23일, 이병기 실장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아래 <그림 1-1> 참조). “당분간 ‘집필진 명단 미공개’의 불가피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해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고, 명단 보안 관리에도 만전을 기할 것(교문수석).”

이날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누가 참여하는지 이름을 밝히지 않아 ‘복면 집필진’이라는 비판을 샀다. 정부 입맛대로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고, 집필진의 비전문성을 숨기려는 의도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실장은 계속해서 집필진 비공개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다음 이어진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 문건 내용이 눈길을 끈다. “어린이 교양도서의 이념 편향성, 특히 위인전집에 있어 대상 위인 선정의 좌편향성이 매우 심각한데 이러한 도서가 교양도서로 출판되도록 놔둔 교육부/문체부에 문제가 있음. 행정조치에 앞서 이러한 실상을 학부모들이 정확히 알도록 해 도서 선택에 신중하도록 유도할 필요 *전태일, 레닌, 호찌민, 모택동, 체 게바라 등을 위인으로 소개.”

안종범 업무수첩에도 기록된 지시사항

같은 날(2015년 11월23일) 쓰인 안종범 업무수첩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5. 역사 교양도서(아래 <그림 1-2> 참조)’라고만 쓰인 단어에 위와 같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 등을 다룬 도서는 ‘좌편향’이 심하다며 어린이가 읽지 못하게 정부 부처가 민간 출판에도 개입하라는 초법적인 주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지역 중·고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이 또한 편향이라고 몰아세웠다.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에는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아래 <그림 2-1> 그림 참조).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용어가 자꾸 회자되지 않도록 하고, ‘학교가 특정 편향 단체의 출판을 지원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점을 적극 알려나갈 것(교문수석).” 같은 날 작성된 2016년 2월14일 안종범 전 수석은 청와대 티타임 메모를 남겼다. 1번부터 7번까지 기록한 내용의 다섯 번째가 ‘친일인명사전?(아래 <그림 2-2> 참조)’이다. 0608-4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4389명이 이름을 올렸다. 2008년 박지만씨 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실으면 안 된다”라며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기각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은 학문적 의견 표명에 가깝고 발간 목적이나 동기가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 볼 수 있다”라고 판단한 바 있다.

국정화를 ‘이념 전쟁’으로 인식한 박근혜 정부는 비판세력을 제어할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했다. 2015년 9월30일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교과서 국정화 성공을 위해 국민을 설득하고 비판세력을 제어할 정교한 추진 전략과 디테일한 상황 진전 계획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함…. ※이러한 대국민 홍보 강화를 위해 KBS, EBS 등 매체를 잘 활용할 필요(위 <그림 3-1> 참조)”.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안종범 전 수석에게 국정화 홍보전에 나서라는 주문을 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뜻하는 2015년 9월20일자 VIP 메모에 ‘1. 국정교과서, 부모들 마음 움직여야, 조갑제 대한민국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김일성 보천보 전투 X, 조선 MBC 한경 매경, 시민단체 부모단체(위 <그림 3-2> 참조)’로 기록되어 있다. 국정화 찬성 여론 조성을 위해 언론과 시민단체 등을 활용하라는 취지다.

이와 같은 지시를 내리고 시행하는 데 관여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병기 전 비서실장, 안종범 전 경제수석,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은 현재 모두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다만 이들은 박근혜 게이트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고, 국정교과서 관련 직권남용 등 혐의는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2018-06-05> 시사인

☞기사원문: 어린이 책에 붙인 좌편향 딱지

※ 관련기사

시사인: 박근혜 정부 역사교과서 블랙리스트를 공개합니다

시사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향한 ‘보이지 않는 손’

시사인: 국정교과서 타임라인

금, 2018/06/0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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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방한
“남북 분단 연원은 일본 식민지배…남북 평화 무드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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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시절 북한의 피해자들에게도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에서 모은 성금 1억여 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고자 7일 방한했다. 야노 국장이 성금 모금을 위해 만든 팸플릿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8.6.9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배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9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일본의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에도 위안부 할머니, 강제동원 피해자 등이 많이 계시는 만큼 일본 정부가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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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팸플릿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제공=연합뉴스]

야노 국장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에서 모은 성금 1억여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고자 7일 방한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통해 탄생한 4·27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다며 종전선언 이후의 남북과 일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야노 국장은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후 한국 전쟁도 있었지만, 결국 한반도 분단의 연원은 일본 식민지배에 있다”며 “하지만 그 사실을 일본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일본은 자민·사회당이 북한 노동당과 양국 관계 정상화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현재 아베 정권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아베 정권은 대북 압력만 넣고 있는데 이는 북미정상회담 등 화해 과정을 방해하는 길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아베 정권의 이런 방해 공작을 막는 것이 일본 시민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야노 국장은 또 “많은 일본인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만 생각하면서 일본을 피해국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일본 때문에 피해를 본 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 관계가 더욱 개선되고 종전선언이 나오더라도 향후 북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은 쉽게 진행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야노 국장은 “현재 한일 간에도 위안부 문제나 군인·군속의 강제동원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현재 한일 양국의 상황을 극복해서 향후 북한에 대해서는 더 발전된 해결책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공원으로 뒤바뀐 효창공원과 김구기념관, 대공분실을 참관하는 등 식민지배와 강제병합, 한국 현대사 등을 배운 뒤 10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야노 국장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내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열 계획”이라며 “일제강점기 시절 자행된 인권 유린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과 학습이 가장 중요한 만큼 앞으로 과거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8-06-09>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 일제강점기 북한 피해자에게도 제대로 보상해야”

토, 2018/06/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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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일제강점기 북한 피해자에게도 제대로 보상해야”
(서울=연합뉴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팸플릿.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9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일본의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에도 위안부 할머니, 강제동원 피해자 등이 많이 계시는 만큼 일본 정부가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노 국장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에서 모은 성금 1억여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고자 7일 방한했다. 2018.6.9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제공=연합뉴스]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일본 시민단체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9일 민족문화연구소에 식민지역사박물관 설립기금으로 써달라며 1억여원을 기부했다.

안자코 유카 모임 공동대표와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은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민문연에서 열린 기금전달식에서 지난 2년간 일본에서 모은 성금 1억345만원을 관련 자료와 함께 전달했다.

민문연은 “한국과 일본 시민의 연대의 뜻을 모은 만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들기 위한 평화의 인권의 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문연의 식민지박물관 건립을 응원하는 취지로 지난 2015년 11월 발족했으며, 홍보 팸플릿 4만 부를 찍어 지난해 초까지 일본 전역에 배포했다.

[email protected]

<2018-06-09>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 시민단체, 식민지역사박물관 설립기금 1억원 기부

※관련기사

☞헤럴드경제: 아베와 다른 일본인들…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1억원 기부

토, 2018/06/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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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하는 사관생도(서울=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8일 오후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처음으로 열린 ‘신흥무관학교 설립 제107주년’기념식에서 사관생도들이 분열을 하고 있다. 2018.6.8 [email protected]

“육사, 신흥무관학교 계승한 학교”…독립군 전통, 국군역사에 편입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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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설립 기념식 육사에서 처음 개최(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 열린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에서 육사 군악대와 생도들이 분열의식을 하고 있다. 2018.6.8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생도 1천100여명은 육사 화랑연병장에 집합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을 위한 분열의식을 했다.

8개 중대로 나뉜 육사 1~4학년 생도들과 육사 군악대는 약 15분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연병장을 돌며 연단 앞에 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및 육사 관계자들을 항해 큰 소리로 ‘충성’ 경례를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와 호국간성의 대한민국 정예장교를 양성하는 육사의 역사적 만남이었다.

이날 신흥무관학교 설립 기념식이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것은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의 의미가 있다. 나아가 신흥무관학교와 광복군 등 독립군의 전통이 국군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 3월 신민회의 국외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 결의를 계기로 이듬해 6월 10일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통화현으로 이전한 뒤 이듬해 건물을 신축해 신흥중학교로 개칭했다가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국권을 되찾기 위한 군 조직이라는 점에서 국군의 효시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동안 국군의 역사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지는 못했다. 과거 군 당국이 독립군의 전통을 국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2011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행사를 육사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육사에는 독립군의 역사를 가르치는 제대로 된 교육과정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작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군 당국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작년 9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독립군과 광복군과 관련한 역사를 국군의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육사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당시 박일송 육사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효시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 발표문을 통해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 등의 군사교육기관은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육사의 정신적 정통성의 연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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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교내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8일 오후 2시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열린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및 육사 관계자들이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 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6.8 [email protected]

이어 올해 3월 독립전쟁에 나섰던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육사 교내 충무관에 설치됐다.

이날 신흥무관학교 기념식이 육사에서 열린 것도 군 당국의 이러한 태도 변화로 가능했다.

기념식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와 육사 생도대장인 김태진 준장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및 육사 관계자 1천200여명이 참가했다. 기념식은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육사 생도들의 분열의식,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및 특별전시회 관람, 항일음악회 순으로 진행됐다.

항일음악회에선 ‘안중근 옥중가’, ‘기쁨의 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압록강 행진곡’ 등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들이 연주됐다.

육사 관계자는 “육군사관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독립 정신을 계승한 학교”라고 “전쟁사 과목 중 포함됐던 독립전쟁 역사교육의 시간을 크게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겸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오늘 기념식은 신흥무관학교와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국군의 뿌리는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국군 장병들이 앞으로 독립군이 불렀던 노래도 군가로 불렀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18-06-08 

☞기사원문: 신흥무관학교 기념식 육사서 처음 열렸다…”독립군 정신 계승”

금, 2018/06/0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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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다운로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인 ‘역사교육위원회’의 조속한 신설을 촉구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완료에 부쳐-

1. 오늘(8일)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완료 및 백서 발간에 맞추어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국민 대다수의 뜻을 거스르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권력의 횡포’이자 ‘교육의 세계적 흐름을 외면한 시대착오적 역사교육 농단’으로 규정하고, 국정화 추진이 “교육부를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교육부장관으로서 “정부 과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새로이 되새기며 국민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2. 지난 3월 28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 발표문>을 통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박근혜 정부가 헌법과 각종 법률, 그리고 민주적 절차를 어겨가면서 국가기관과 여당은 물론이고 일부 친 정권 인사들까지 총동원해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역사교과서 편찬에 부당하게 개입한 반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국정화 사건’으로 명명한 바 있다. 한마디로 국정화 사건은 청와대와 교육부가 작당하여 자행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정체성을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쿠데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발표문을 접하고, 교육부가 과연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건을 헌법을 유린한 중차대한 사안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3. 가장 심각한 점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최고·최종 책임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 의뢰 대상에서 배제하였다는 사실이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독단적으로 기획하고 결정한 다음, 여당(새누리당), 교육부, 관변단체 등을 총동원하여 추진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가 (가)편찬기준 수정요구, (나)편찬심의위원 선정 개입 (다)집필진 선정 등 교과서 편찬과 내용 수정과 같은 세부적인 사안까지 일일이 점검하고 개입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이 박근혜 전 대통령임이 명약관화한데도 교육부는 그를 수사의뢰 대상에서 제외하는 납득할 수 없는 조치를 취하였다.

4. 다음 국정농단에 동조한 교육부 관료들에 대한 처벌이다. 진상조사위원회는 ‘교육부가 청와대의 지시에 적극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가)국정화 추진과 실행 계획을 수립‧추진하였으며, (다)청와대의 국정화 논리를 홍보하고, (다)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기관을 동원해 실무적으로 뒷받침하였다’고 하였다. 교육부는 청와대의 국정농단에 자발적‧적극적‧반복적으로 동조한 ‘공동정범’인 것이다. 그럼에도 국정화 방침을 결정할 당시 교육부 수장이었던 황우여 장관이 수사의뢰 대상에서 빠졌다. 게다가 교육부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지시에 따라 국사편찬위원회 등 산하기관을 총동원하여 국정농단에 부역하였는데, 겨우 여섯 명의 고위 공무원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것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5. 교육부의 과장급 이하 중·하위직 공무원들에 대한 면죄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 이들은 국정교과서 추진과정에서 상급자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던 수동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국정화를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기회로 삼아 견마지로를 다한 적폐세력이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들이 (가)국정화 논리를 적극 개발하고 홍보하였으며 (나)검정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고 거짓 선동하였으며 (다)여론 조사를 빙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과장급 이하 실무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公僕)’이 아니라 정권의 ‘충견(忠犬)’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과장급 이하 실무 공무원들은 자신의 영혼을 함부로 팔아넘겨도 된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6. 교육부는 <보도 자료>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결과 발표(‘18.3.28) 당시의 권고안을 최대한 수용하여 추진”하겠다면서, 구체적으로 (가)역사교육지원체제 구축 (나)역사교과서 발행관련 제도와 법규 개선 (다)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역사교육 방향 정립 (라)역사교육 공론화 장 및 기구 마련 등을 제시하였다. 친일-독재-분단을 미화하는 국정교과서 제작에 올인한 교육부가 역사교육과 관련된 이와 같은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교과서 폐지를 선언하고 1년이 넘었는데도, 교육부는 아직까지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를 대신할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 자유한국당이 적반하장으로 근거 없는 색깔론 공세를 퍼붓는데도 교육부는 아무런 반박도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부역한 수구-냉전 세력인 교육부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어 ‘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역사교육 방향을 정립’한다고 하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7. 역사학계·역사교육계는 작년 4월 28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역사교육의 정치성 중립성 확보를 위한 정책 협약’을 맺은 바 있다. 그 가운데 3항이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차후 신설되는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역사교육을 논의하는 기구(전담 위원회 등)를 신설한다.”는 내용이다. 진상조사위원회도 재발방지책으로 ‘역사교육위원회를 설치하여 역사교육 거버넌스 주관기구로 역할을 부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교육부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면피용 재발 방지책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학계와 체결한 대통령 공약이 조속히 이행되도록 노력하여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끝>

2018년 6월 8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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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53-5251

호반식당의

유뤌이십일

사대강물요일이

기다려지는구나!

월, 2018/06/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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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사진 등 주요 자료가 화면에 표시됩니다.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골라 다소 깊게 파보겠습니다. 100년 전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추적하는 시간, 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미식가 6회 “을사늑약과 이토히로부미”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금, 2018/06/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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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만드는 역사 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화요일은 ‘역사를 전하는 수다방_”역전다방”‘이 방송되고

목요일은 ‘미리 식민지 역사박물관에 가다 : 미식가’ 가 방송됩니다.

금, 2018/06/1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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