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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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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39

박광종 선임연구원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 후 조만식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을 거행하였고, <인민신보> 9월5일, <매일신보> 9월16일, <해방일보> 10월3일자등에 현준혁의 장례기사와 조사(弔詞)가 실렸다.현재 현준혁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고, 그가 태어난 개천군 북면 용등리를 ‘준혁리’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해방 후 보름 만에 정치 테러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현준혁의 죽음은 이후 해방 격동기에 벌어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암살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자의 암살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다. 다음에서 현준혁의 일제시기 활동과 그의 암살과 연관된 백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준혁의 생애와 활동

평안남도 개천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개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1922년 협성학교를 거쳐 1923년 4월 중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 3월 졸업했다. 4월 연희전문학교 본과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26년 5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졸업했다. 학창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으로 학비를 조달했고, 연희전문학교 때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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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경북도립사범학교였다가 1929년 4월에 교명이 바뀜) 교사로 발령받고 영어, 한문, 교육사를 담당했다. 현준혁은 영어와 한문을 주로 가르쳤지만 한글과 민족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수업시간에 광주학생사건이나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꺼내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현준혁은 1930년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5명을 조직책으로 뽑아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주의 서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에게서 자비를 들여 비밀리에 입수하였다. 이를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 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몇 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이나 잡혀갔다. 현 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범학교 적화사건으로 불리며 일간지에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32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현준혁은 구속 당시의 심정을 친구한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네, 평생의 원한을 풀었으니. 연전 대구사범에 있을 적에 학생들과 같이 수갑을 차고 송국되던 날, 외아들을 가진 과부 어머니가 원망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고로 나의 가슴은 터질 듯하였네. 언젠가 저 원한을 풀어주겠소! 말을 못하고 나 혼자 입술을 깨물어 맹서하였더니, 인제는 내가 일일이 변명을 안 하더라도 그 어머니들이 곧잘 이해할 터이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사회과학연구회 사건으로 교직에서 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1933년 개천과 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종사했고 1935년 무렵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1935년 6월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좌익소비조합을 만들고, 지하층 노동자들에게 적화사상을 고취하고자 개천 천동철광, 봉천탄광, 자작탄광 그리고 영변 용등탄광 등지에다 각 1명씩 동지를 두어 지하운동을 벌이는 한편, 경성에 이광진을 파견하여 적색 팸플릿을 발행하고 노동대중의 적화 교과서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현준혁은 1945년 8월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창당에 힘썼고 모종의 사명을 띠고 8월 17일 평양으로 향했다.

극우테러의 기획자 염동진

현준혁 암살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놓고 1945년 9월 사건 직후부터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그 중의 하나가 소련군의 음모설이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 정적이 될 수 있는 현준혁을 미리 제거하고자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현준혁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동평양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유기선은 현준혁이 우익의 백색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준혁 계열과 적위대를 관할하던 장시우 계열의 갈등으로 적위대원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2002년 1월 20일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회 비밀결사 – 백의사〉에서의 백근옥(백관옥의 형)의 증언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여 2002년 1월 공개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 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를 통해서 우익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이뿐 아니라 백의사가 해방 공간에서 좌우를 막론한 요인 암살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 9월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기도,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암살 등을 백의사 단원들이 직접 실행했으며 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인사 암살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것이다.
백의사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본명 廉應澤)에 대해 알아보자.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염도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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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기록에 의하면 염동진은 1934년 3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낙양군관학교는 1934년 2월 중국 하남성 낙양 소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운영되었던 한인특별반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고, 1년간의 단기과정이었다. 이 한인특별반은 윤봉길의 의거 직후 중국 국민당이 김구와 김원봉을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염동진은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지청천이 남경에 세운 신한독립당 외교부 부장으로 잠시 맡았다. 이후 백의사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춘택이란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하다가 국민당 비밀첩보조직인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다. 1937년 중일전쟁 후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했다. 염동진은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었다.1


1 염동진이 관동군 밀정 노릇을 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측 자료인 <日寇關東憲兵隊在吉林省的組織槪況>(吉林省革命委員會淸査敵僞檔案辦公室編, 1965.7.10) 186쪽에 관동군 통화(通化)헌병대 본부 밀정으로 ‘廉應澤’이 나온다. 만일 이자가 염동진과 동일인이라면 염동진의 친일 전력을 확인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廉應澤’ 항목의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염응택(廉應澤) : 통화헌병대 본부 밀정.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찍이 우리 동북지하당과 항일연군의 조직정황과 교통연락망, 식량과 탄약 등 정황 및 통화지구 중국인과 조선인의 시국 인식에 대해 비밀리에 정찰하였다. 또한 관할구 내 철광, 오도강과 이도강 지구에서 노동자의 사상동태를 비밀리에 조사했을 뿐 아니라 해당 지구의 우리 지구당 구성원의 활동을 추적하였다. 특무비로 34차에 걸쳐 총 2,481위안(圓)을 받았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염동진은 평양 기림리 영명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의 주지는 박고봉이었고 그의 주위에는 민족주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으며 박고봉의 추천으로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합류했다.
해방 후 대동단이 첫 번째 벌인 일이 바로 현준혁 암살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현준혁을 통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제지하려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응징 차원에서 백관옥을 비롯해 선우봉 박진양 등 대동단원이 그를 제거한 것이다. 수사당국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박고봉을 제외한 관련자들이 1945년 9월~11월 사이에 월남했다.

백의사의 테러 활동과 쇠락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하고 국민당의 남의사를 차용해 백의사라 이름 지었다. 백의사 총사령에 오른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입수하여 본부로 삼았다.
백의사의 초기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      염동진                               부사령 박경구(함남,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고문         유진산(신민당 총재), 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노총 조직부장)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평양)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염동진은 은밀히 백의사 단원을 모집하였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동진을 통해서만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의사 단원 수는 비밀에 부쳐졌는데 전성기 때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한편 백의사 단원을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 즉 경찰이나 국방경비대는 물론 노동총연맹에까지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정국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나가려 하였다.
백의사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첫째 반공·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이는 1946년 3월에 집중되었으며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에 이루어졌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북한지역에 파견하였는데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백의사 결사대는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의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김일성을 노리고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였고,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되잡아 던지려다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1946년 3월 3일과 5일에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3월 9일 김책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 3월 11일에는 강양욱의 집을 습격, 그의 아들·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죽이고 말았다.
둘째 남한 내에서의 반공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여운형을 암살하는 데 쓰인 45구경 권총은 바로 염동진이 암살범들에게 건넨 것이고, 백의사 부사령 박경구는 염동진의 지시로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하였다.
셋째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CIC)와의 연계하에 벌인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을 벌인 것이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백의사 첩보대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백의사 첩보대원들은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을 받았다. 1946년 5월 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하여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냈다. 이러한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은 1946년에 시작해서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가라앉자 테러집단인 백의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부분의 단원은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던 100여 명의 단원은 대한민국 육군의 첩보부대와 맥아더사령부가 만든 KLO부대에 흡수되었다.
염동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붙잡혀 행방불명되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제20권에 실린 〈염동진〉이란 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 냉혈인간 / 그의 말은 칼끝 /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 그의 하루하루는 / 누구를 죽이는 일 /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 홀연 사라졌다 /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발췌)

[참고문헌]
나일부, 「해방 후 보름 만에 아깝게도 쓰러진 우리들의 지도자 현준혁의 내력」,<신천지> 1946년 10월호.
강만길·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1996,창작과비평사
정병준,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 <韓國史硏究>128(2005,3)
이완범,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국가정보연구>제3권1호(2010)
카프, 「잊혀진 역사인물, 현준혁 암살사건을 다시 생각해본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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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맞은 대전수요문화제


“굴욕적 한일합의 당장 무효화하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반대한다!”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한다!”
“역사적폐 끝까지 청산하자!”

7월 12일, 20차를 맞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 실현! 대전수요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외친 구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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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2일 저녁 7시, 대전평화의 소녀상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 실현! 대전수요문화제”가 20차를 맞았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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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폐청산, 민족통일’ 구호를 함께 외치자며 선창을 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 ⓒ 임재근

첫 번째 발언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은 “사람이 살면서 3가지 만남이 필요하다”며, 이 3가지 만남을 ‘자기 자신과 냉철한 만남’, ‘국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권위도 살릴 수 있는 역사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회와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런 만남을 위해 여기 오신 분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적폐청산이고, 더불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통일이라며 ‘적폐청산, 민족통일’ 구호를 함께 외치자며 선창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카이스트 내에 작은 소녀상 건립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힌 카이스트 소셜메이커의 정지윤 학생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알이야 한다”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성노예 범죄 해결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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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연리지 장애가족협동조합 회원과 조합원들도 발언에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 임재근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피플큐브’의 최준호, 김관영 회원과 연리지 장애가족협동조합 백장현, 김요진 조합원도 함께 무대 앞으로 나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최준호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참상이 SNS를 타고 퍼지는데도 일본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며,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라며 “일본은 고개를 숙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백장현씨는 “위안부 범죄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가혹한 일”이라며,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라”고 외쳤다.

김관영씨도 “일본이 용서를 구하고, 국가에서 사과문을 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요진씨는 ‘난 알아요’ 곡으로 노래공연을 펼쳐 큰 박수를 받았다.

대전청년회 김원진 대표도 발언에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강제징용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원진 대표는 군함도로 대표되는 강제 징용의 사례를 들며, “일본을 제외한 나라들에서는 강제징용과 관련한 사실과 끔찍했던 광경들을 알고 있는데, 당사자인 일본만 피하려고 한다”며 일본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청년회에서는 군함도 강제징용의 참혹했던 피해 상을 고발하는 전시물을 직접 만들어 문화제 주변에 전시했고, 올해 11월에는 군함도를 직접 다녀와 강제징용 여론을 확산시킬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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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강제징용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는 참가자들과 시민들. ⓒ 임재근

보릿고개에 입 하나 덜자고 나선 길이었다.
떨어져 살아도 고향 쪽 하늘 바라보면
엄마도 이쪽을 바라보겠지
그렇게 떠난 길이었다.
한 줌 빛줄기 들지 않는 열차 속에서
겁먹은 표정의 앳된 얼굴의 마주 앉은 낯선 아이의 손을
꼬옥 쥐어주며
이제 공장 가면 돈 많이 벌어
고향 집에 흰 눈처럼 소복한 솜옷 보내자 말했을 때
그 아이는
자기는 이불 보내고 싶어요
수줍게 웃었지…

양보규 대전지역 희망노동조합 위원장은 ‘이 땅 위에’란 제목의 자작시를 지어 낭송하기도 했고, 대전청년회 노래모임 ‘놀’에서는 독립영화 ‘우리 학교’ 삽입곡인 ‘우리’와 통일 노래인 ‘경의선 타고’를 부르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통일을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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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는 대전민중의힘 소속 단체 대표자들. 왼쪽부터 김원진 대전청년회 대표,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정선 공동대표, 대전장애인부모연대 최명진 대표,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 민주노총대전본부 이대식 본부장, 대전민중의꿈 김창근 상임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 ⓒ 임재근

수요문화제는 ‘평화나비대전행동’이 주최하는 데, ‘평화나비대전행동’ 소속 단체들이 돌아가며 주관을 해오고 있다. 이번 달 수요문화제는 대전민중의힘이 주관했고, 소속 단체 대표자들이 함께 나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며 마무리했다.

대전수요문화제는 매월 두 번째 수요일 저녁 7시에 대전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개최된다. 다음 수요문화제는 8월 9일에 개최된다.

임재근 기자

<2017-07-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모두 가혹하고 끔찍.. 일본은 사과하라”

목, 2017/07/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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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 8화 – 2부 「이게 실화냐?」 
“연구소 단독-이준열사 집터 발굴”

팟빵에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7/07/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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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발행심의위, 재심의 끝에 ‘발행 취소’ 공식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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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취임기념 우표 (사진=자료사진)

박정희 탄생 100년을 기념해 찍어내기로 했던 이른바 ‘박정희 우표’ 발행이 결국 없던 일로 됐다.

우정사업본부 산하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12일 전체회의를 열고 박정희 우표를 발행하지 않기로 최종 결론 냈다.

전체 17명 위원 가운데 12명이 참석해 8명의 찬성으로 이 같이 결정했다.

지난해 5월 ‘박정희 우표’ 발행 결정에 대한 번복인 셈이다. 이에따라 당초 9월에 발행하기로 돼 있던 박정희 우표는 발행 근거를 잃게 됐다.

앞서 심의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사전회의를 열고 박정희 우표 발행 결정을 재심의 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 우표 발행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날 결정이 심의위원회의 업무를 규정한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세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심의위원회에서 이미 결정한 우표발행에 대한 재심의 규정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우정사업본부는 해당 세칙에 제17조 2항 2호(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우표발행 및 보급에 관한 사항에 관해 우정사업본부장의 자문에 응한다)를 근거로 들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김기덕 본부장이 이 규정에 따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 재심의 문제에 대한 자문안건을 올렸고, 심의위원회가 재심의를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CBS노컷뉴스는 지난달 23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지난해 박정희 우표 발행 결정 과정에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보좌관 출신 인사, 옛 새누리당 당직자, 박근혜 정부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등이 참여한 사실을 폭로하며 우표 발행 재심의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우표가 19차례 이미 발행한 사실도 밝혀내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 우표 발행에 반대해온 측은 이날 결정을 환영했다.

그 동안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미래창조과학부공무원노동조합(우정사업본부) 등과 함께 박정희 우표 발행을 반대해 온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은 “촛불시민혁명으로 들어선 새 정부에서 지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 잡는 것은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환영할 일이다”고 논평했다.

<2017-07-13> 노컷뉴스

☞기사원문: 박정희 우표, 발행 안하기로 최종 결정

※관련기사

연합뉴스: 우정본부,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계획 철회(종합2보)

한국일보: 박정희 100돌 기념우표 발행 ‘없던 일로’

서울신문: ‘박정희 100주년 우표’ 발행 안 한다

오마이뉴스: ‘박정희 우상화’ 논란에 우정사업본부도 손 들었다

SBS뉴스: ‘박정희 우표’ 발행 결국 백지화…구미시 반발

목, 2017/07/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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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 자료집]

 

이준 열사 순국일에 집터 표석 제막식 거행

 

▲ (좌) 이준 집터’ 표석 (시안), (우) 이준 열사의 집터이자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안국동 152번지 구역의 현재 모습

헤이그특사사건 110주년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될 당시에 거주했던 곳에 그를 기리는 집터 표석이 설치된다. 그간 이준 열사가 생전에 안국동에 살았던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주소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가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해 최초로 지번(안국동 152번지)을 확인한 결과,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될 당시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임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표석 설치를 신청하였고,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이번에 집터 표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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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도면 위에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를 표시한 자료이다. (『경성부일필매 지형명세도』,1929)

표석 문안에는 이곳이 1907년 당시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점 이외에 1905년 이준의 부인 이일정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사실도 함께 명기하였다.

표석 제막식은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가 되는 7월 14일 오후 1시부터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덕성학원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리며, 제막행사는 1시 40분에 해영회관 1층(하나은행 안국동지점) 전면에서 거행된다. 이번 제막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준 열사 유족대표로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명예회장이 내빈으로 참석한다.

이에 앞서 낮 12시 30분부터 식전행사로 이준 열사의 생애와 이준 집터에 관한 사료 소개와 전시해설이 있을 예정이다.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사장 이양재)에서 제공하는 전시유물에는 이준 열사의 유묵(遺墨) 2점과 관련 자료 4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목, 2017/07/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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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배우고 깨닫는 아이들, 한뼘 더 성장하다"
 

샤론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샤론 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서대문형무소. 한여름 무더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에 왁자지껄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10여명 남짓한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6월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운동 역사를 배워가는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보다 생생한 독립운동 현장을 경험하기 위해 광복절 즈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프로젝트 초기만 해도 31절을 삼점일절로 읽던 아이들은 불과 두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삼점일절에서 ‘31독립운동 역사와 거리를 좁히다

 

 

“191931일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 명이었는데 이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200만 명이었다고 해요. 전 국민의 10퍼센트가 목숨 걸고 독립만세를 외친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랍니다.”

독립운동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운동이었어요. 말과 글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모두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죠. 그걸 지키려고 애썼던 분들이 계셨고, 총칼로 싸우는 것 못지않게 죽음을 각오하고 활동한 분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쓱 지나가며 곁눈질하는 것과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서대문형무소가 초행도 아니고, 독립운동에 대해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음에도 서대문형무소 도슨트(전시해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윤명희 선생의 설명을 들으니 알고 있던 사실조차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사전 자료조사를 통해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니, 중학교 1학년이면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설명을 듣고도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었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설명을 들으면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독립 운동가 외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후손들을 위한 그분들의 희생이 너무 감사하고 감동적이었어요.”

여성 감옥이 따로 있었다는 건 자료조사 하면서 알고 있었는데, 임산부 독립 운동가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임신한 몸으로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기저귀도 구할 수 없는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저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인데 그 모든 것을 독립을 위해 견뎌내신 분들이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들 스스로 배움과 깨달음 이어가는 역사탐험 프로젝트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샤론지역아동센터는 초중생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프로젝트 수업이다.

선생님은 큰 주제만 제시할 뿐, 그 어떤 설명도 자료도 일절 주지 않는다. 연구 주제를 정하고,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과정은 모두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다.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에 오기 전에도 자료조사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또래와 비교해 이해의 범위가 남달랐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거나,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시큰둥한 표정을 보면서 아직 어려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재미가 없어서 지루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고 오해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무표정이 전부였지만, 그 뒤에서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새로 알게 된 것 사이를 바삐 오가며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사실 저 역시 아이들 표정만 보고 걱정하던 때가 있었어요. 한번은 종일 견학만 다닌 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 걸으니까 아이들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더라고요. 무리한 일정이었나 싶어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설렁설렁 다닌 줄 알았는데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신문기사로 정리해내는가 하면, 그날 다닌 곳들을 그림지도로 만들기도 하고, 직접 대본을 써서 종이인형극을 선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보기엔 떠들고 장난치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마음에 다 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일보다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고요.”

 

최미란 샤론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2012년부터 매년 올해로 네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고되고 힘든 순간이 적지 않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단번에 잊게 만들만큼 아이들의 빛나는 성장을 매순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어루만지는 따뜻한 돌봄아름다운 동행 계속되길

 

샤론지역아동센터 최미란 센터장

 

샤론지역아동센터가 2010년부터 아름다운재단과 인연을 맺어온 것도 아이들을 향한 남다른 애정 덕분이다. 아름다운재단이 문화소외지역 아동청소년들에게 문화체험 활동을 지원하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에 지원해 정서적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태권도와 피아노 레슨 기회를 연결한 것이다. 최미란 센터장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 센터는 지역 특성상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도 많은데, 다행히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레슨을 받으면서 큰 힘을 얻었어요. 그중 한 아이는 3년간 피아노를 쳤는데 음악으로 마음의 병을 이겨냈고요.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성장했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돌봄과 더불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주고 있는 샤론아동지역센터. 아이들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만큼 앞으로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동행도 끝없이 진화되길 간절히 바란다.

 

글. 권지희 | 사진. 김흥구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은 아름다운재단과 한국아동단체협의회가 파트너쉽을 맺어 공동으로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아름다운재단 꿈꾸는나무기금, 성도지엘삼더기금, 아름다운영화인기금, 효주기금, 행복한쉼표기금을 기반으로 전국 문화소외지역(농어촌, 광산촌, 섬지역 등)에서 저소득가정 아동청소년을 위하여 활동하는 단체나 아동청소년 이용시설 및 양육시설에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문화예술교육, 현장탐방 등)을 지원합니다. [지원사업 자세히 보기]




 

숨요 변화사업국 사업배분팀전서영

 

아이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꿈꾸는 다음세대' 영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월, 2015/09/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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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주기로 하고 안 줬나 봅니다.





수, 2017/07/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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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옮겨는데책자가안오는데궁금합니다

수, 2017/07/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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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乙(갑을)

 

同人誰甲乙(동인수갑을)

貴賤亦如何(귀천역여하)

旣定因錢貨(기정인전화)

難期止不和(난기지불화)

 

甲과 乙

 

같은 사람인데 뉘 甲, 뉘 乙인가

귀함과 천함일랑 또한 어떠한가

돈으로 인하여 이미 정해졌으니

不和를 그침은 기약하기 어렵다.

 

<時調로 改譯>

 

甲과 乙 누구인가 貴賤 또한 어떠한가

저 돈 따위로 인하여 이미 정해졌으니

오호라! 不和를 그침 기약하기 어렵다.

 

*同人: 같은 사람. 바로  그 사람.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甲乙:

乙을 아울러  이르는  . 순서나  우열을 나타낼 때, 첫째와 둘째 *貴賤:

부귀(富貴)와 貧賤.  신분이나   따위귀함과 천함 *旣定: 이미 결정되어

있음 *錢貨: 돈 *不和: 서로 화합하지 못함. 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함.

 

<2017.7.12, 이우식 지음>

수, 2017/07/1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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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我國某名詩人之詩後

 

美人眞若此(미인진약차)

素面却佳容(소면각가용)

麗句雖盈滿(여구수영만)

全無動我胸(전무동아흉)

 

우리나라의 어떤 이름난 詩人의 詩를 읽고 나서

 

미인이란 참으로 이와도 같느니

민낯이 되레 아름다운 모습이라

고운 글귀들로 비록 가득하지만

내 가슴 動搖 따위, 전혀 없구나.

 

<時調로 改譯>

 

미인 이와 같느니 민낯 되레 佳容이라

곱게 꾸민 글귀 따위 비록 가득하지만

어쩌랴! 나의 가슴은 動搖함이 없구나.

 

*我國: 아방(我邦). 우리나라 *若此: 이러함 *素面: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佳容: 아름다운 용모(容貌)  *麗句: 아름답게  꾸민  글귀  *盈滿: 가득하게

*全無: 전혀 없음.

 

<2017.7.12, 이우식 지음>

수, 2017/07/1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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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某刹一柱門

 

無根寧滿發(무근녕만발)

坐食入多錢(좌식입다전)

佛泣登途久(불읍등도구)

僧徒夢老仙(승도몽노선)

 

어떤 절의 一柱門에 쓰다

 

뿌리가 없음에도 어찌하여 滿發

놀고먹는데 많은 돈이 들어오나

佛, 흐느끼며 길 떠난 지 오랜데

중들은 늙은 神仙을 꿈꾸는구나.

 

<時調로 改譯>

 

無根에 어찌 滿發 놀면서 多錢을 버나

부처는 흐느끼며 길 떠난 지 오래인데

중들은 늙은 신선의 꿈을 꾸고 있구나.

 

*無根: 뿌리가 없음. 근거가 없음 *滿發: 만개(滿開). 전개(全開). 꽃이 활짝

다 핌 *坐食: 와식(臥食). 도식(徒食).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음 *多錢: 돈이

많음.  또는      *登途:  등정(登程).  길을  떠남  *僧徒:  수행하는  승려 무리.

 

<2017.7.12, 이우식 지음>

수, 2017/07/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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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人君言我邦無力乃上疏

 

大韓衰弱國(대한쇠약국)

上疏我心欣(상소아심흔)

美日爲親父(미일위친부)

中俄事若君(중아사약군)

 

나라님이 우리나라는 힘이 없다고 말함을 듣고 上疏함

 

대한민국은 매우 쇠약한 나라이오니

上疏하는 저의 마음일랑 기쁘답니다

미국과 일본을 친아버지로 삼으시고

중국과 러시아를 임금같이 섬기소서.

 

<時調로 改譯>

 

우리나라 쇠약하니 제 마음 기쁘답니다

저 미국과 일본일랑 親父로 삼으시옵고

중국과 또 러시아를 임금같이 섬기소서.

 

*人君: 임금. 나라님 *我邦: 우리나라 *無力: 힘이 없음 *上疏: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衰弱: 힘이 쇠하고 약함 *弱國: 힘 약한 나라 *親父:

친아버지 *俄: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의 약칭(略稱).

 

<2017.7.11, 이우식 지음>

화, 2017/07/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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逢富僧說夢

 

免罪祈三佛(면죄기삼불)

前宵現夢言(전소현몽언)

救靈眞不易(구령진불이)

速覺貨錢元(속각화전원)

 

부유한 중을 만나 꿈을 말함

 

免罪해 주십사 三佛께 빌었더니

간밤에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영혼을 구하기 참으로 어렵느니

돈이 으뜸임을 빨리 깨달을지라.

 

<時調로 改譯>

 

三佛께 免罪를 비니 간밤 現夢言하길

영혼을 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느니

금전이 으뜸이란 걸 빨리 깨달을지라.

 

*免罪: 지은 죄를  면함. 또는  면하여 줌  *三佛: 극락에 있다고 하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통틀어 이르는 말 *大勢至菩薩: 아미

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 지혜문(智慧門)을 대표해 중생을 삼악도(三惡道)

에서 지는 무상(無上)한 힘이 있다. 그 형상은 정수리에 보병(寶甁)을 이고

천관(天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前宵: 전야(前夜). 어젯밤

*現夢: 죽은 사람이나  신령 따위가  꿈에 나타남. 또는 그러한  꿈 *救靈: 신앙

  힘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不易: 쉽지  아니함.  어려움  *貨錢: 錢貨.  돈.

 

<2017.7.9, 이우식 지음>

일, 2017/07/0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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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美國(고미국)

 

焉非羊面虎(언비양면호)

未覺爪牙衰(미각조아쇠)

促買新兵器(촉매신병기)

諸邦起大疑(제방기대의)

 

미국에 告함

 

어찌 羊 낯짝의 범이 아니겠는가

발톱과 어금니 쇠함 아직 모르네

새 兵器를 어서 사라고 재촉하니

여러 나라가 큰 의심을 일으킨다.

 

<時調로 改譯>

 

羊 낯짝 범이 아닌가 爪牙 쇠함 모르네

새로운 兵器 따위, 어서 사라 재촉하니

오호라! 여러 나라가 큰 의심 일으킨다.

 

*爪牙: 발톱과 어금니 *兵器: 전쟁에 쓰는 기구를 통틀어 이름 *諸邦:

제국(諸國).  여러  나라  *大疑: 크게  의심함.  또는 큰 의심이나 의혹.

 

<2017.7.9, 이우식 지음>

일, 2017/07/09-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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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邦態(탄방태)

 

僅僅成邦態(근근성방태)

時時不禁嘆(시시불금탄)

如居無法境(여거무법경)

未久恐衰殘(미구공쇠잔)

 

나라 꼴을 탄식하다

 

겨우 나라의 꼴 이루게 되었건만

때때로 탄식일랑 禁할 수 없다네

무법천지 지경에 사는 것 같으니

오래지 않아 衰殘할까 썩 두렵네.

 

<時調로 改譯>

 

나라 꼴은 이뤘건만 때때로 탄식하네

무법천지 지경에 사는 것과도 같으니

마침내 오래지 않아 쇠잔할까 두렵네.

 

*僅僅:  겨우  *時時: 가끔.  때때로  *不禁:  하거나  말리지  아니함.  찌할

없음 *無法: 법이나 제도가 확립되지 아니하고 질서가 문란함. 도리에

긋나고 예의가  없음  *未久: 얼마  오래지  아니함 *衰殘: 쇠하여  힘이나

세력이 점점 약해짐.

 

<2017.7.10, 이우식 지음>

월, 2017/07/1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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