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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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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39

박광종 선임연구원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 후 조만식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을 거행하였고, <인민신보> 9월5일, <매일신보> 9월16일, <해방일보> 10월3일자등에 현준혁의 장례기사와 조사(弔詞)가 실렸다.현재 현준혁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고, 그가 태어난 개천군 북면 용등리를 ‘준혁리’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해방 후 보름 만에 정치 테러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현준혁의 죽음은 이후 해방 격동기에 벌어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암살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자의 암살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조명받지 못했다. 다음에서 현준혁의 일제시기 활동과 그의 암살과 연관된 백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준혁의 생애와 활동

평안남도 개천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개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1922년 협성학교를 거쳐 1923년 4월 중동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 3월 졸업했다. 4월 연희전문학교 본과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26년 5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졸업했다. 학창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으로 학비를 조달했고, 연희전문학교 때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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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경북도립사범학교였다가 1929년 4월에 교명이 바뀜) 교사로 발령받고 영어, 한문, 교육사를 담당했다. 현준혁은 영어와 한문을 주로 가르쳤지만 한글과 민족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수업시간에 광주학생사건이나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꺼내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현준혁은 1930년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5명을 조직책으로 뽑아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주의 서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에게서 자비를 들여 비밀리에 입수하였다. 이를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 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몇 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이나 잡혀갔다. 현 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범학교 적화사건으로 불리며 일간지에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32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현준혁은 구속 당시의 심정을 친구한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네, 평생의 원한을 풀었으니. 연전 대구사범에 있을 적에 학생들과 같이 수갑을 차고 송국되던 날, 외아들을 가진 과부 어머니가 원망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고로 나의 가슴은 터질 듯하였네. 언젠가 저 원한을 풀어주겠소! 말을 못하고 나 혼자 입술을 깨물어 맹서하였더니, 인제는 내가 일일이 변명을 안 하더라도 그 어머니들이 곧잘 이해할 터이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사회과학연구회 사건으로 교직에서 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1933년 개천과 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종사했고 1935년 무렵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1935년 6월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좌익소비조합을 만들고, 지하층 노동자들에게 적화사상을 고취하고자 개천 천동철광, 봉천탄광, 자작탄광 그리고 영변 용등탄광 등지에다 각 1명씩 동지를 두어 지하운동을 벌이는 한편, 경성에 이광진을 파견하여 적색 팸플릿을 발행하고 노동대중의 적화 교과서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현준혁은 1945년 8월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창당에 힘썼고 모종의 사명을 띠고 8월 17일 평양으로 향했다.

극우테러의 기획자 염동진

현준혁 암살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놓고 1945년 9월 사건 직후부터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그 중의 하나가 소련군의 음모설이다.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 정적이 될 수 있는 현준혁을 미리 제거하고자 소련군 정치사령부가 현준혁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동평양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유기선은 현준혁이 우익의 백색테러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준혁 계열과 적위대를 관할하던 장시우 계열의 갈등으로 적위대원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2002년 1월 20일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회 비밀결사 – 백의사〉에서의 백근옥(백관옥의 형)의 증언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여 2002년 1월 공개한 〈실리보고서(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 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를 통해서 우익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이뿐 아니라 백의사가 해방 공간에서 좌우를 막론한 요인 암살사건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 9월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기도,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암살 등을 백의사 단원들이 직접 실행했으며 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인사 암살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것이다.
백의사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본명 廉應澤)에 대해 알아보자. 염동진은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염도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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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기록에 의하면 염동진은 1934년 3월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낙양군관학교는 1934년 2월 중국 하남성 낙양 소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운영되었던 한인특별반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고, 1년간의 단기과정이었다. 이 한인특별반은 윤봉길의 의거 직후 중국 국민당이 김구와 김원봉을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염동진은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지청천이 남경에 세운 신한독립당 외교부 부장으로 잠시 맡았다. 이후 백의사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춘택이란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하다가 국민당 비밀첩보조직인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다. 1937년 중일전쟁 후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했다. 염동진은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었다.1


1 염동진이 관동군 밀정 노릇을 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측 자료인 <日寇關東憲兵隊在吉林省的組織槪況>(吉林省革命委員會淸査敵僞檔案辦公室編, 1965.7.10) 186쪽에 관동군 통화(通化)헌병대 본부 밀정으로 ‘廉應澤’이 나온다. 만일 이자가 염동진과 동일인이라면 염동진의 친일 전력을 확인하는 최초의 문헌이라 할 수 있다. ‘廉應澤’ 항목의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염응택(廉應澤) : 통화헌병대 본부 밀정. 1940년 6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찍이 우리 동북지하당과 항일연군의 조직정황과 교통연락망, 식량과 탄약 등 정황 및 통화지구 중국인과 조선인의 시국 인식에 대해 비밀리에 정찰하였다. 또한 관할구 내 철광, 오도강과 이도강 지구에서 노동자의 사상동태를 비밀리에 조사했을 뿐 아니라 해당 지구의 우리 지구당 구성원의 활동을 추적하였다. 특무비로 34차에 걸쳐 총 2,481위안(圓)을 받았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1943년경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최성률과 결혼했다.
염동진은 평양 기림리 영명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의 주지는 박고봉이었고 그의 주위에는 민족주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1944년 8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 세력이 해방 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박고봉과 염동진은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으며 박고봉의 추천으로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합류했다.
해방 후 대동단이 첫 번째 벌인 일이 바로 현준혁 암살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현준혁을 통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을 제지하려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응징 차원에서 백관옥을 비롯해 선우봉 박진양 등 대동단원이 그를 제거한 것이다. 수사당국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박고봉을 제외한 관련자들이 1945년 9월~11월 사이에 월남했다.

백의사의 테러 활동과 쇠락

소련 당국의 추적을 피해 38선을 넘은 염동진은 1945년 10월 서울 낙원동에서 대동단을 모태로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하고 국민당의 남의사를 차용해 백의사라 이름 지었다. 백의사 총사령에 오른 염동진은 서울 궁정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입수하여 본부로 삼았다.
백의사의 초기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      염동진                               부사령 박경구(함남,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고문         유진산(신민당 총재), 백창섭
조직국장   안병석(노총 조직부장)          정보국장 김명욱         집행국장 한승규
비서실장   백관옥(평양)                      훈련국장 선우봉         총무국장 정병모

염동진은 은밀히 백의사 단원을 모집하였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동진을 통해서만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의사 단원 수는 비밀에 부쳐졌는데 전성기 때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한편 백의사 단원을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 즉 경찰이나 국방경비대는 물론 노동총연맹에까지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정국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나가려 하였다.
백의사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첫째 반공·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이는 1946년 3월에 집중되었으며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에 이루어졌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북한지역에 파견하였는데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백의사 결사대는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의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김일성을 노리고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였고,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되잡아 던지려다 그의 손에서 폭발했다.
1946년 3월 3일과 5일에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3월 9일 김책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 3월 11일에는 강양욱의 집을 습격, 그의 아들·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죽이고 말았다.
둘째 남한 내에서의 반공테러, 암살활동이었다.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여운형을 암살하는 데 쓰인 45구경 권총은 바로 염동진이 암살범들에게 건넨 것이고, 백의사 부사령 박경구는 염동진의 지시로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하였다.
셋째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CIC)와의 연계하에 벌인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을 벌인 것이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백의사 첩보대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백의사 첩보대원들은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을 받았다. 1946년 5월 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하여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냈다. 이러한 대북 첩보·정보수집활동은 1946년에 시작해서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가라앉자 테러집단인 백의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부분의 단원은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던 100여 명의 단원은 대한민국 육군의 첩보부대와 맥아더사령부가 만든 KLO부대에 흡수되었다.
염동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붙잡혀 행방불명되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제20권에 실린 〈염동진〉이란 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 냉혈인간 / 그의 말은 칼끝 /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 그의 하루하루는 / 누구를 죽이는 일 /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 홀연 사라졌다 /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발췌)

[참고문헌]
나일부, 「해방 후 보름 만에 아깝게도 쓰러진 우리들의 지도자 현준혁의 내력」,<신천지> 1946년 10월호.
강만길·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1996,창작과비평사
정병준, 「백범 김구 암살 배경과 백의사」, <韓國史硏究>128(2005,3)
이완범,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 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국가정보연구>제3권1호(2010)
카프, 「잊혀진 역사인물, 현준혁 암살사건을 다시 생각해본다」(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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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
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총칼을 내려놓은 독립군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여 독립군의 역사를
남긴 일기, 수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교우단의 기
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 북로군정서의 훈련교본,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제3호, 봉오동전투상보와 더불어 의병 출신 독립군 김정규 일기, 한국광복군 김문택 수기, 지청천 친필 일기 <자유일기>, 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우석 수기, 한국광복군 지복영 수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를 통해 일제에 맞선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의 간절한 바람과 희생을 되돌아보고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이끌어온 한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특별전은 VR전시로도 제작하였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어 현장 관람에는 제약이 있지만, 2020년 11월에 개막한 상설전시, 특별기획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전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월, 2021/01/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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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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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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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화, 2021/03/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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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화, 2021/03/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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