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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인 청년들의 운명 –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수료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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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인 청년들의 운명 –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수료증서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6:28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46

01

류제갑의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제2기생 수료증서(1944년 7월 31일 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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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갑의 비봉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1938년 3월 25일 발급, 전북 전주군 소재)

 

조선인의 참정권 및 병역의무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의 주장으로 일본관민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 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 의무」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언어 차이로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겉으로는 ‘내지인(內地人)’과 신분취급상 아무런 차별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본질은 역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가 양주 공덕리에 이어 평양 신양정과 시흥 독산리에 잇따라 설치되었고 1944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입소자들은 현역병 또는 제1보충역의 신분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해군병지원자훈련소(海軍兵志願者訓練所)가 경남 창원(진해)에 설치되었다. 육군에 이어 해군에까지 지원병제도가 확장된 것은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해군병력의 조달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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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해군병지원자훈련소의 간판 모습(『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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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지원병제 발표 현장(해군무관부 앞, 서울 남산동 소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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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지원병 제2기생 모집규정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1월 27일자 기사

 

그러나 때마침 1942년 5월 9일에 공표된 징병제 실시계획이 1944년부터 시행됨에 따라 지원병훈련소는 불과 1년 남짓 만에 해체되었다.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에는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현하여 명실상부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도록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내세워졌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라 제1기생 1,000명은 예정대로 6개월 훈련과정을 거쳤으나 제2기생은 4개월도 채우지 못한 채 조기 수료하기에 이르렀다.
존속기간도 짧고 배출인원도 상대적으로 적은 탓인지 해군병지원자훈련소에 관한 실물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입소허가자 명단이 꼬박꼬박 게시되었던 육군병지원자훈련소와는 달리 해군병지원자훈련소의 모집합격자에 대해서는 군사보안상의 이유 때문인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는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수료증서(1944년 7월 31일 발급)’는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고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수료증의 주인으로 표시된 류제갑(柳濟甲)은 1926년 7월 15일생으로, 이것과 함께 입수된 ‘졸업증서’에 의해 전라북도 전주군 비봉면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18세의 나이였던 그의 생사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인데, 그가 과연 이 광란의 전쟁터를 무사히 빠져나와 평온한 삶을 되찾았는지 그것이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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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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