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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2018 여름방학 청소년 체험교육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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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2018 여름방학 청소년 체험교육 진행

익명 (미확인) | 목, 2018/09/06- 17:10

근현대사기념관이 여름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2018 여름방학 청소년 한국사 특강과 청소년 도슨트 아카데미를 열었다. 먼저 한국사 특강은 ‘제1차 세계대전과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주제로 총 4강의 연속강좌로 이루어졌다. 올해로부터 100년 전 세계와 동아시아의 상황을 이해하고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세계사적 맥락을 살펴보자는 것이 이번 특강의 목표였다. 청소년을 위한 강좌인만큼 주제의 전달력을 높이고자 현직 역사 교사로 강사진을 구성하였으며 강사 섭외에는 도선고 송치중 교사가 힘써주었다.
제1강은 창의고등학교 이종관 교사가 ‘전쟁에 휩싸인 유럽, 혁명의 폭풍을 맞다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문을 열었다. 제2강은 가재울고등학교 권오청 교사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각국이 처한 상황과 요구가 세계 질서에 적용되는 과정으로 ‘평화를 위한 노력 뒤에 숨겨진 전쟁의 불씨 – 베르사유 체제와 국제연맹’을 다루었다. 강의와 함께 당시 상황을 반영한 사진 전시를 모둠별로 진행하여 청소년의 관심과 흥미를 유도했다. 세번째 강좌는 ‘아시아의 민족 운동이 확산되다 – 민족자결주의와 동아시아의 민족 운동’을 주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원칙을 두고 매일신보에 번역된 내용과 원문을 비교해서 읽고, 아시아 민족운동의 주역들이 영향을 받은 대표적 조항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일초등학교 정미란 교사가 강의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교하중학교 이충모 교사는 ‘만세소리와 함께 온 새로운 시대 – 3・1운동과 민주공화국 수립’을 주제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가 국내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하는 당시의 열망과 그 영향이 백여 년 후 2016년 광장의 촛불까지 지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짚어주었다. 실제 수강 인원은 평균 18명으로 정원에 미치지 못했지만 현직 교사가 직접 참여해 사료 읽기, 체험 활동 등 색다른 수업방식을 채택하여 청소년들의 흥미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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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소년 도슨트 아카데미는 청소년의 참여를 바탕으로 봉사활동의 기회를 부여하고 역사 체험의 장을 확장하고자 마련되었다. 청소년의 눈높이로 전시를 이해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원고를 작성하여 관람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배우고자 하였으며, 3주 동안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총 6회의 수업을 진행하였다. 전현직 역사 교사(선덕중학교 김인애 교사, 신관중학교 변영애 교사)의 이론 수업으로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내용을 이해하고, 이홍관 전시기획가의 특강으로 도슨트로서 박물관에 참여하는 계기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7월 22일 아카데미에 참여한 청소년은 개관 준비가 한창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특별 관람하며 김승은 자료실장으로부터 전시 자료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박물관 개관을 응원하는 메시지도 남겼다. 전시 해설 실습 발표를 참관하고 청소년 도슨트의 향후 방향에 자문한 박찬희 작가는 청소년 스스로가 관심을 갖는 전시 대상과 말하고 싶은 주제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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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방학 청소년 체험교육을 계기로 근현대사기념관은 지난 8월 15일 청소년 도슨트 발대식을 가지고 매월 둘째, 넷째 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정기적인 청소년 전시 해설을 편성하였다. 19일(일)에 처음 시작된 전시 해설에는 총 8명의 청소년이 각각 전시 해설과 참관을 맡았으며, 전시 해설 과정에서 점차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이를 매개로 시민과 소통하는 청소년 도슨트 활동에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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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반민족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

“반민족주의자 김창룡의 묘를 몰아내자!”
“친일청산하고 민족통일 이뤄내자!”
“국회는 국립묘지법을 신속히 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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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현충원 묘지 현충원 묘지 앞 ⓒ 송혜림

6일 10시, 대전국립묘지 현충교에선 뜨거운 열기를 잊은 듯한 힘찬 구호가 울려퍼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이 묻혀진 현충원에 ‘친일파’라니, 과연 무슨 일일까.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김창룡과 5.18 민주항쟁을 진압한 책임자들이 순국열사들과 함께 현충원에 묻혀있다고 문제를 제기 했다.

이번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 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평화재향군인회, 대전충청 5.18민주유공자회 등 시민단체 주최로 현충교에서 진행되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묵념하기 위해 찾는 현충원,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날 행사는 가두 판넬 전시와 홍보물 배포, 성명서 낭독과 파묘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되었다.

현충원의 장군묘역은 반민족 사범들의 안식처인가” 울분의 성명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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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교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든 모습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가 열린 와중,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임재근

오전 9시, 가두 판넬 전시 및 홍보물 배포로 시작한 행사는 본격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를 열었다.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의 대회사와 촉구 발언이 이어지고, 대회 참가자들의 성명서 낭독이 시작되었다. 아래는 성명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으로 구석구석 이 땅의 적폐를 청산중에 있으며, 오래된 민족의 적폐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새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곳 국립묘지는 과거의 적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여전히 ‘국립묘지법’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국립묘지는 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 비호 아래 양민학살에 앞섰고, 민족 지도자이신 김구 선생님의 암살을 사주하는 등, 온갖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김창룡이 ‘국립 묘지법’의 비호 아래 이 곳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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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를 낭독중인 이순옥 부위원장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이 <국립묘지법 개정과 친일파 묘 이전 촉구대회> 성명서를 낭독중이다. ⓒ 임재근

그리고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주범이자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처벌받은 범법자 안현태와, 5.18 민주항쟁 당시 진압군 측 주요 책임자인 유학성, 소준열이 이곳에 버젓히 편하게 잠자고 있다. 이런 자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국립묘지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 국민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짓이자, 이 곳에 고이 잠들어 계시는 순국선열과과 애국지사를 능멸하는 것이다.”

대회 참가자들은 더불어 이해 관계자들에 주장하는 바를 밝혔다. 우선 김창룡과 안현태 등의 유족에는 “그들의 묘가 현충원에 있는 한 국민에게 조롱받을 것”이라며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묘를 이장”하길 요구했다. 또 국회위원들에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개정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길” 촉구했다.

더불어 현충원 유족들과 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우리 호국영령 들은 반민족 반민주 인사들과 한자리에 묻혀 맘이 편하실리 없다. 유족과 국민들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이들을 국립현충원에서 몰아내도록 여론을 만들자”라며 친일파 파묘에 힘을 보태주길 호소했다.

추모의 장에 친일파 흔적은 없어져라… 파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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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현충원 파묘 퍼포먼스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퍼모먼스를 대회 참가자들이 이행하고 있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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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룡 묘 앞에 놓인 피켓들 김창료 묘 앞에 참가들이 준비한 피켓들이 놓여져 있다. ⓒ 송혜림

‘민족의 반역자 김창룡 묘 파가라!’라고 적힌 커다란 삽이 등장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삽에 이어진 끈을 잡고 영차영차 잡아당기자, 마치 무덤을 파내는 듯한 파묘 장면이 연출된다. 현충원 장군묘역에 위치한 육군중장 김창룡의 묘에서는 위와 같은 파묘 퍼포먼스와 묘 이전을 촉구하고 국립묘지법을 개정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

김창룡,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들이 이렇게도 분노하는걸까.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한 그는 1940년에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중지군의 아마카스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다. 중국공산단 거물 왕진리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그는 이후 다수의 항일조직을 적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월남 이후 국방경비대 내부 좌익숙청을 벌이며 육군 방첩대장이 된 김창룡은 1949년 ‘김구암살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며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6.25 전쟁 이후 김창룡은 특무부대장으로 부임 후 정치적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한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암살당한 그의 장례식은 최초의 국군장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서 치뤄졌으나, 1988년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애국지사 조문기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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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원에 이장된 조문기 묘 앞에서 대회 참가들이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송혜림

친일파의 묘에서 퍼모먼스를 이행한 참가자들은 고 조문기 열사의 묘로 이동했다. 조문기 열사는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대한애국 청년당을 개설하고 국내 항일운동을 주도해왔다. ‘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아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하다 2006년 파킨스병으로 사망했다.

추모사를 발언한 박해룡은 “이승만 정권 하에 단독정부와 독재를 반대한 조문기는 민주화 투쟁과 통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현대사를 바로잡고자 노력했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함께 했다.”라며 “승리의 영광없이 고난밖에 없던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다. 그러나 현재 남북회담의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 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시대에 발맞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몰아내는 데 힘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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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곽낙원의 묘와 김 인의 묘 앞 단체촬영 김구 어머니 곽낙원의 묘와 김구 아들 김 인의 묘 앞에서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 송혜림

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의 묘 앞에서는 “민주화를 갈망했던 아들이 부당하게 세상을 뜬지 70년이 되었다. 여전히 국내 곳곳에는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다.”라며 “요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김구와 김구 어머니가 그토록 꿈꾸시던 통일을 앞두고 있다. 조속하게 친일과 유신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노력하겠다. 양심 민주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연대하며 만들어가겠겠다”라며 추도사를 마쳤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 인사 중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으로 총 63명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가슴아픈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의 하나로 이들 묘지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어져 왔으나, 현행 법에 제정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수년 째 미뤄져 왔다. 그러나 최근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사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어 현충원의 진정한 존재가치가 바로잡히길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2018-06-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에 드리워진 그림자, 친일파의 묘?

목, 2018/06/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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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7.6.5. 호외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建制宣言)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한국민족주의계열 등의 연합이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만 남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만주 각지에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국내 진공을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길림・간도·통화 3성연합 치안숙정공작)’을 개시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현에 토벌대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을 토벌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토벌작전에 일본군 6,500명, 만주국군 25,000명, 길림・간도·통화성 경찰토벌대 35,000명 등 총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정찰, 기총소사, 폭격을 가하고 투항 권유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협화회를 동원, 현지 주민들에 대한 사상공작을 펼치고 항일연군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조아범·김일성·진한장·최현에게 1만원, 박득범·방진성에게 5천원, 위증민·전광(오성륜)에게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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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노조에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진들.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러한 소탕작전으로 인해 1940년 1월 이금명 사살, 2월 1로군 총사령 양정우 사살, 1로군 참모장 방진성 체포, 1940년 12월 제5사장 진한장 사살, 1941년 1월 1로군 정치위원 전광 귀순, 1941년 3월 제2로군 군장 위증민 사살 등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는 1941년 3월 19일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성공리에 마치고 해산했다. 노조에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귀순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대와 귀순공작대로 활용하고 그들의 정보를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 곧 밀영·피복창·지하창고까지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토벌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김일성과 최현이 각각 이끄는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 제13여단은 1940년 하반기에 소만국경의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이후 소규모 유격대를 편성해 소만국경을 넘어 관동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대규모 무장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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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에 토벌사령부가 1941년 2월 제작한 길림·통화·간도 3성 지역 요도(要圖).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가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0년 10월 19일에 선전용으로 발간한 소책자 「박득범(朴得範) 김재범(金在範) 김백산(金白山) 내부기록(來部記錄)」(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이다. 총 9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귀순자 3인과 노조에 사령관의 면담, 노조에 사령관의 훈시, 박득범·김재범·김백산의 ‘결심을 말하다’, 기념사진, 박득범 체포시 압수한 총기 일람표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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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의 표지와 기념사진. 기념사진에서 앞줄 왼쪽부터 다나카 경비과장, 노조에 사령관, 유홍순 간도성 차장.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박득범은 김재범, 김백산과 함께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에 방문했다. 사령관실에서 노조에 사령관을 접견했는데 이 자리에 간도성 차장 유홍순(창씨명 中原鴻洵)과 다나카(田中) 경비과장, 사령관 부관 하세가와(長谷川) 소좌가 함께 배석했다. 유홍순 차장,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순으로 노조에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노조에 사령관이 귀순자 3명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해달라”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다.
그러자 박득범이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라고 귀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동일한 취지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노조에 사령관의 선창하에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대일본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만주국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충성 서약을 하였다. 끝으로 노조에 토벌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기념 촬영하였다.

 


 

결심을 말하다

박득범

박득범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오로지 암흑이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죄는 실로 엄청 나서 중형에 처해짐이 너무도 마땅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후 각 기관 특히 군부당국이 너무도 친절하고 관대히 대우하고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해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지금 각하의 훈시를 경청하니 우리가 밟아온 길을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 아무쪼록 선도, 지도 편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심경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그동안 만주국 특히 조선인 동포에게 또한 경제와 산업, 문화 기타의 건설에 있어서 파괴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만주국) 부흥에 대해 미력이나마 한층 더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제 「내부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박득범은 1908년 연길현 부암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부암동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적위대 중대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제1로군 사령부 직할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이 되었다. 1939년 8월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40년 9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군경을 전사시켰다. 9월 말 왕청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길로 압송된 후 변절하여 간도성 치안공작반 제2공작반에서 귀순공작을 벌였다.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 하바로프스끄현 세레뜨낀에서 노역하다가 1950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김재범은 1937년부터 1938년 11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단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제1로군 제2방면군)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6월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9월 25일 위증민의 문건 등 주요 정보를 일만군에 제공해 토벌작전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 방문 직후에 동포 여성과 결혼해 연길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만선일보』 1940.10.23). 한편 김백산에 대해서는 제1로군 경위려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고, 1940년 3월 체포되어 투항한 후 김재범, 박득범 체포·귀순에 적극 나섰다고만 알려져 있다.
당시 간도성 차장이었던 유홍순은 전북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민정청 실업과장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간도성 실업청장, 민생청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 간도성 차장에 임명되었고 ‘동남부치안숙정공작’ 시기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조직을 주도, 고문에 선임되어 간도성 귀순공작반을 지휘하였다. 1943년 12월 간도성 차장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강원도지사에 올라 해방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강원도조사부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공민권정지 3년형에 처해졌다.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로 1939년 8월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에 임명되어 그해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1941년 3월 사령부가 해산되자 천진 소재 독립혼성 7여단장으로 부임했고 독립혼성 제30여단장(상해), 마에바시(前橋)육군예비사관학교장, 제63사단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4월 예편했다.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은 만주지역 치안숙정시기에 일제가 집요하게 펼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사상, 귀순공작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가 치안숙정 관련 문서를 통해 선무·귀순공작에 대한 실시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책자로 제작된 것은 드물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8/05/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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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13화 1부 – “뉴라이트 역사 쿠데타 7편 – 박정희 신화의 허구 ④”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7/09/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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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동네책방 아저씨, 풀벌레 일꾼, 은종복 회원 면담기

김진영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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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책방 ‘풀무질’ 대표 은종복 회원을 만났다. 처음에는 연구소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전날 밤 은회원의 새 책(????책방풀무질:동네서점아저씨은종복의25년 분투기????,한티재,2018)을읽고약속장소를서점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장소를 조정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간을 조정하다 결국 서점에서 만나 은회원의 어머님께서 싸주신 저녁 도시락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은회원은 서울 명륜동에서 25년째 ‘인문사회과학 책방-풀무질’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풀무질 책놀이터 협동조합’이라는 마을공동체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동네책방이 살아야 마을이 살 맛 나는 곳이 되고 마을이 살아야 마을사람들도 서로 웃고 떠드는 정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점에 갔을 때도 달님, 토끼님과 주민 한분이 계셔, 서점 한 쪽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공동체 사람들은 ‘덧이름’을 쓴다). 책에 둘러싸여 처음 만난 사람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면담은 책방 계단 아래에 움푹 들어간 작은 공간에 마주앉아서 진행했다.
은회원이 책방을 지킨 긴 세월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았지만 우선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했다. 부모님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종복 회원은 1965년 서울 휘경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경북 군위군 출신이다. 두 분은 1958년 무작정 서울로 오셨는데 “서울에 가면 머슴처럼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 왔다고 해서 쉽게 삶이 달라졌을까, 당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많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도시 빈민의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이었다. 중랑천 뚝방길 판잣집에 살며 두 분 모두 평생 쉼 없는 노동으로 삶을 꾸려오셨다.

 

문 : 선생님 책을 읽어보면 심성이 곱다고 할까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배려가 느껴집니다.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할까요?

답 : 사실 어머니는 저를 딸처럼 키우셨어요. 저희가 아들 사형제인데 셋째는 딸이기를 바라셨거든요. 막내가 몸이 안 좋아서 제가 어머니와 대청마루 앉아 타래실을 감기도 하고 감자 껍질을 벗기기도 했어요. 집안일은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감자껍질을 깎는 게 아니라 벗기는 거라 손이 빨개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저는 아침잠이 많지 않은데 새벽부터 일어나 중랑천 가에 키우던 호박을 따오기도 하고 닭장서 달걀을 꺼내오기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혼자 움직이며 생명을 대하던 경험이 “풀잎 하나, 벌레 하나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한 것 같다”고 한다. 다만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 질문이 “세상을 밝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자연히 어릴 때부터 그런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은회원이 처음 서점 일을 시작한 것이 1993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날짜가 만우절이기도 했지만 평소 술과 투쟁, 글쓰기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책방 일을 한다니 주변 사람 중에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남을 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풀무질이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아니고 그냥 책을 팔고 이윤을 남기는 곳이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작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겠죠. 이 책방이 그런 가치가 있는 곳이었고 하면 할수록 ‘내가 이걸 지켜야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책방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유인물도 구할 수 있었고, 교보, 영풍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와 공동체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25년 동안 대학가 책방을 운영하면서 은회원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판매’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책방은 몇 차례 폐점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책방 ‘풀무질’의 이름으로 달마다 돈을 내는 곳은 서른 군데, 50만 원이 넘는다.

아껴쓰고, 나눠쓰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어머니,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자기가 만족한 후에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것은 베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고… 연구소도 그렇죠? 저야 잘 모르지만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후원하는 힘으로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문 : 살다보면 골목이나 놀이터 같은 생활환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은회원은 대학가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답 : 돌이켜 보면 제가 학교를 다닐 때 학생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는 학생, 세상을 바꾸려는 ‘척’ 했던 학생, 신념을 갖고 투쟁에 전념하는 학생. 그 중에 저는 두 번째 부류에 가까웠습니다. 학교는 빠지지 않았지만 매일 데모하고 글을 쓰느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투쟁에 전념하고 앞에 나서는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기본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사회 변혁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4·3, 4·19, 5·18이 되면 미리 말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일단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왔습니다. 여학생들도요. 예비역들은 군복을 입고 왔구요. 이런 날은 보통 재학생 중 반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서 도로로 나가기 시작했으니까요. 지금과는 시대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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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 오른쪽 첫 번째가 은종복 회원

 

지금은 사회가 다변화되고 ‘문화식민지’가 되면서 전선이 혼재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제국주의’와 ‘다국적기업’이라는 극복해야 할 분명한 상대가 있었다고 한다. 싸움의 대상도, 명분도 뚜렷했다는 점이 지금과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문 : 지금 학생들은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답 : 10여 년 전에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상업영화로는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대학로 CGV가 바로 옆이니까 학생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추천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온 학생 중에 그 영화가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는 1980년 광주의 모습 중 일부를 압축한 것인데도 학생들은 군인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어요. 지금 학생들은 1980년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학교에서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 와서야 광주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만큼 학생들도 스스로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 않으면 불과 얼마 전의 민주화운동을 모르는 시대가 된 것이죠.
또 한 가지, 지금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1학년 때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제대로 취직하기가 어려워요. 이름난 회사에 들어가려면 자기 소개서를 100번은 써야 해요. 참담하죠. 우리 때는 데모도 하고 술도 마시고 연애도 했지만 취직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주어진 환경이 달라요.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이들은 맺고 끊는 게 확실해요. 자기 책임이라고 할까요.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예전처럼 책을 외상으로 사거나 돈을 빌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문 : 최근 급격히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고 있는 데 대한 소감을 물었다.

답 : 제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에 눈먼 세상을 없애야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탐욕에 젖어서 세상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세상을 바랍니다. 저도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아 걱정되는 면도 있습니다. 차츰 다른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겠지만, 경제이야기만 하다보면 한반도 북녘을 또 다른 식민지로 만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긴 시간 많은 노력이 필요할 텐데, 남쪽도 북쪽도 민의가 반영된 정당성 있는 국가권력이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급격한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화가 진전되고 평화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면 국가보안법 문제나 주한미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남북문제가 미국의 입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은 참 아픈 부분입니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로 의지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쪽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을 반대하고, 남쪽이든 북쪽이든 군대가 없는 꿈같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입니다만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겁박하지 않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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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나마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세상에서 동네 작은 책방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 : 지금 상태라면 풀무질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작은 책방들은 모두 버텨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에서 작은 책방이 살아나려면 일등주의, 학력중심주의, 경제지상주의 이 세 가지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은 기회균등이라고 하며 힘이 있건, 돈이 많건, 약하건, 장애가 있건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경쟁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각자 다른 것을 갖고 태어나죠. 그래서 사람은 신 앞에서 그 자체로 소중하고 모두가 평등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모조리 일등주의에 매몰되어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고, 서로 경쟁하며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일등주의 때문에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영어학원을 등록하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남보다 이름난 학교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정말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 욕심을 부추기는 경제지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 권정생 선생님은 “사람들이 밥하나 국 하나 반찬 두, 세 개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어느 날부터 더 맛있게, 더 많이 먹으려 하다 보니 다른 나라 아이들의 목숨 줄을 조이게 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맛있고, 더 좋은 게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고르게 가난하게 살려고 하면 다 함께 웃음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요, 경제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회원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구를 망가트리고 결국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야 하고 경제성장은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날 때부터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다.

 

문 :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로 한다면 저는 따라서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답 : 그래서 마을책방의 역할, 지역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렇게 최근 몇 백년간 인류는 전례 없는 엄청난 양의 자원을 소비하며 지구를 망가트리고 있어요. 그 전까지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소비하며 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서로 돌보고 필요한 것을 나누며 함께 사는 방식으로 산 것이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공동체적인 생활방식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책방 풀무질이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이 아니라 일등주의, 학력주의, 경제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지역주민과 학생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터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책방 풀무질에서 책읽기 모임, 밥상공동체, 돈 없이 사는 세상, ‘풀무질 책놀이터 협동조합’을 꾸려가고 있고 이런 활동이 결국은 우리 공동체와 책방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수익이 있어야 책방을 운영할 수 있을 텐데 실제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은회원은 손전화로 통장 잔액을 보여주며, “내일은 풀무질 문을 닫을지도 몰라요.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전화기에는 조금 전까지 얼마 남아 있던 통장 잔액이 ‘0’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함께 밥을 먹고 조합을 운영하고 활동하는 것은 책방 매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여기 오는 사람들이 도와주고 책을 많이 구입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책방의 주 매출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과 수험생들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 중 열에 아홉은 가까운 곳에서 싸고 빠르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책방에 오지, 풀무질의 생각에 공감해서 오는 것은 아니에요. 최근에 거대 기업들이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면서 재정상황이 훨씬 더 어려졌구요.
따지고 보면 제가 책방 풀무질을 25년이나 한 것은 기적에 가까워요. 지금도 빚이 많고 한 달 이자도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책방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의 힘이 큽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서점에 들어서면서 ‘풀벌레 아저씨 오늘 할 일 없어요?’라고 먼저 묻고 함께 일을 합니다. 서로 돌봐주는 이런 마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죠. 이런 마음이 이 책방을 유지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장이나 대표라고 하지 않고 ‘일꾼’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내가 풀무질의 소중한 정신을 망가트리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고민해요. 언젠가 우리사회에 큰 변화가 필요할 때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회원이 1993년 처음 책방을 시작하고 3, 4년 정도는 한 달에 50만원씩 적금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4월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면서 700~800만원의 빚을 졌다. 그 후에는 점점 인터넷 책방이 들어서면서 제대로 수익이 난 적이 없었다. 최근 4~5년 동안은 ‘하루 살았네’라고 하면서 산다고 한다. 하루씩 살아가니 오히려 더 얼굴이 환해지고 삶에 힘을 느낀다고 한다.
하루살이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었다. 은회원이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도 책방 풀무질을 계속하는 것은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책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세대가 태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알고 싶은 것을 검색해서 바로바로 확인하고 정보는 빛의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종이책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은회원은 니체의 말을 인용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살던 대로 살고, 남들이 사는 것을 따라 살아요. 타고난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게 되면 약자, 소수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고, 자신을 찾는 좋은 방법입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보다 많이 걸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늘과 바람과 땅, 풀과 들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도록 더 많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원들과 청춘들에게 2권씩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100권을 고르라면 쉬울 텐데 두 권만 고르라니 더 어렵다’고 하면서도 바로 네 권을 추천했다. 우리 회원들에게는 권정생의 산문집 ????우리들의하느님????(녹색평론사)과존 로크의????통치론????(까치글방)을,청춘들에게는 리영희, 임헌영의 ????대화-한지식인의삶과사상????(한길사)과님 웨일스,김산의????아리랑????(동녘)을 추천했다.
책을 읽는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책방을 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헌책방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일하는 사람과 살가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숨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거꾸로였다. 은종복 회원과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하며 생각을 나누면 좋은 사람이었다.
새로 사람을 사귀면 그만큼 마음을 내어주어야 한다. 제 혼자 살기도 바쁜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고 싶어 점점 사람들을 사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있는가? 은회원은 원래 사람들은 서로 사귀고 돌봐주며 살아야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방 문을 나서면서 행복을 위해 끝까지 간직해야 할 다짐들이 다시 떠올랐다.

월, 2018/05/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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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뺀 것입니까?

일부러 뺐을 리는 없겠지요?

연구소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후원하는 회원이나 시민들에게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을테니까요

저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 1만여 회원들만의 연구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훌쩍 커버렸고 또 정말 어려울 때 3000원 5000원 후원했으며, 혹 금전적 후원을 못해도 마음으로 성원하고 사랑하며 지지한 많은 국민 또는 시민들의 연구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홈페이지에 회원들을 위한 열린게시판에서 게시된 사안과 의견에 대하여 당연히 읽은 이의 의견을 달거나 의문점을 물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홈페이지는 댓글 다는 기능이 없습니다.

아니면 실수로 빠뜨린 것입니까?

자칭? 완벽에 가깝다는 연구소가

어느 연구소보다 능력이 뛰어난

그리고 헌신적인 전문 상근 담당자들이 홈페이지를 새로 개편하면서

실수로 빠뜨렸다고 하면 삼척동자도 웃겠지요?

이 글을 읽는 즉시 빼야만 했던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던지 아니면 기능을 추가해 주세요

그리고

1만여명이 넘는 회원들이 찾아와서

전 국민이 찾아와서

각자 연구소에 대한 칭찬도 격려도 비판도 생각도 말하고 공유하는 연구소가 되고 회원들이 되기를 바란다면 한시바삐 댓글달기 기능을 살려 주세요

수, 2018/04/2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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