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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일도 유흥도 모범 임재성 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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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일도 유흥도 모범 임재성 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금, 2018/08/17- 09:52

일도 유흥도 모범
임재성 변호사를 만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어느 저녁, 약속시간을 살짝 넘겨 법무법인 해마루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야근에 파묻힐 시간에 흔쾌히 일정을 잡아준 임재성 변호사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너무 궁금한 사람이었다. 연예인을 보는 기분으로 사심 가득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보았다. 임재성 변호사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인터뷰어에게 해준 개인 과외는 덤.

먼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재성 변호사입니다. 4회 변호사 시험으로 변호사가 됐고 지금은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사회학 대학원에서 평화연구를 하였구요, 평화단체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로스쿨에 진학한 것인데, 변호사라는 자격이 이후 활동과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도교수도 제 학부가 법대이고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병역법’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군사주의를 다루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기에 법사회학을 잘 해보라며 적극 추천해주셨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난 지금은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연구나 활동보다는 일반 송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요.

로스쿨 전까지 궤적이 통상의 사람들과는 좀 달랐네요?

통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제도가 로스쿨 이 아닐까 합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는 로스쿨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학생이 ‘나’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변호사시험 합격이 부담이긴 하였지만 문 닫고 합격해도 된다 생각에 학점이나 변호사시험 걱정에 매이기보다는 법철학, 헌법이론 등 비수험 수업을 많이 듣고, 틈틈이 논문을 쓰거나 외부 투고를 하면서 로스쿨 시절을 보냈습니다. 졸업한 이후 전형적인 변호사 업무보다는 연구나 활동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좀 다르게 먹었던 거지요.

로스쿨은 직업학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변호사님과 같은 이유로 진학을 결정한다는 게 좀 낯설어요.

현실은 그렇게 운영되지만 제도는 활용하기 나름 아닐까요. 물론 합격률 하락으로 현재 로스쿨의 모습은 암담한 상황이긴 합니다. 처음엔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돌아가서 박사 논문을 쓸 생각도 있었지만, 법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송무 경험에 욕심이 났어요. 다행히 졸업 즈음에 송무를 하면서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지금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그리고 결국 올해 박사학위 논문을 법사회학 전공으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병행이 되셨어요?

사무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세상에! 사무실 자랑도 같이 해서 설명을 좀 해 주셔요.

2016년 10월쯤 제 욕심과 마음을 사무실에 말씀드렸는데, 논의를 하신 후 2017년 1년간 신건 배당에서 제외해주셨어요. 글을 쓰려면 ‘덩어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사무실에서 받은 1년을 좀 넘겨서 이번 1학기까지 논문을 썼고, 이번 7월에 겨우 통과가 되었네요.

사무실 이야기를 좀 하면, 법무법인 해마루는 흔히 ‘민변 계열 펌’이라고 설명되곤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 이유로 입사하신 분들도 꽤 되구요. 해마루에는 민변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있으시지만, 민변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공유는 있습니다. 민변 회원 여부를 떠나 그러한 지향성을 사무실이 지켜나가야 할 가치라고 구성원들이 인식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고용 변호사가 민변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데, 해마루는 ‘지원’까지는 아니라도 ‘응원’해주신다고. 민변 활동을 응원하고 여러 배려도 해주시지만,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놓아야 하는. 회사에 고용된 변호사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민변 회의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앉아있는 새벽에 살짝 힘들 때도 있지요. 아, 민변 회비를 사무실에서 내주시니 ‘지원’은 분명히 있네요. 정정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변호사님들이 특히 고용 변호사님들이 사무실에서는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민변에 와서야 비로소 가치 지향적인 일을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해마루도 회사이고, 회사의 유지를 위해서는 이익을 내야하니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고용 변호사의 이런 심리적 고충도 사무실 내부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나은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요.

 

변호사님께 제일 먼저 여쭈어볼 건 역시 병역거부죠.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사유로 병역거부를 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요?

거의 없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90명 정도가 비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입니다. 2002년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최초의 병역거부 선언자 오태양 이후 17년 동안의 통계이니, 일 년에 5명 정도의 병역거부자가 나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농담처럼, ‘불효자 피가 있다’라고 하는데, 변호사님은 병역거부를 어떻게 마음먹고 실행하셨는지 그 과정이 정말 궁금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학생운동을 꽤 열심히 했어요. 귀가 얇은 편인데, 선배들의 진지함에 혹 했지요.

대단한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데모에 나가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나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보면서 국가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감이 켜졌죠. 특히 집회에서 경찰의 진압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어요. 경찰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치고 들어와 엄청난 구타를 가하기 일쑤였죠. 철거촌에서 경찰 비호아래 이루어지는 용역깡패의 폭력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고요.

현역입영 대상자였기에 군인이 되어야했지만, 앞선 경험으로 국가공권력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그 적대감이 ‘거부’라는 선택항을 바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그냥 “때워야지”생각했고, 학생운동 늦게까지 하면서 최대한 미루다가 갔다 와야지 정도의 계획이었습니다.

2002년 병역거부가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되고, 언어와 선택항이 생겼지요. 병역의 뒤에 ‘거부’가 붙는 언어,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는 선택. 그 때 참 놀랐어요.

다른 길을 발견하신 거네요.

제가 속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201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어지는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결합했어요. 공권력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평화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적 경험을 할 수 있었지요.

질문이 왜 병역거부를 하였냐? 인데, 짧게 정리하면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문제로 고민했던 그 시기에 병역거부라는 운동이 등장했고 제가 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제 선택항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비종교적인 병역거부는 대부분 전쟁의 시기에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베트남전쟁 때 미국의 병역거부가 대표적이에요. 전쟁의 시기에 자신이 입는 군복이, 자신이 드는 총의 의미가 분명해지니까요. 저 역시 이라크로 파병되는 한국군인들을 보면서, 그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권력자들을 보면서 평화라는 것이 신념이 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요?

양심이나 신념은 형성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그 과정이 꼭 긴 시간일 필요는 없지만요. 저 역시 어느 순간, ‘병역거부’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제가 했던 활동들 속에서, 당시의 사회환경들 자연스럽게 ‘살인훈련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겠다’라는 마음을 키워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 시대적 경험을 제가 대학생 시절을 갖을 수 있었던 것에는 운이 분명 있지요.

또 하나는,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운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선택을 했을 때 부모님이 쓰러지셨거나 그랬으면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가 자해를 시도하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분위기거든요. 저희 집 대장이 아직도 할아버지이신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제가 중국에 병역 특례를 다녀왔는지 알고 있으세요. 제가 마음을 꺾지 않자 온 가족이 함께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죠. 만약 할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셨다, 그랬다면 제 결정을 지키는 것이 참 힘들었을 거 같아요. 병역거부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하는데, 저는 그런 측면에서 운이 좋았어요.

다시 그 시기로 되돌아간다면,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요?

모르죠. 조건이 바뀌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내 신념이라 하더라도.
그때로 돌아가도 절대로 총을 잡지 않고 감옥에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자신에 대한 확신인 것 같고.

(이 분 매력있다. 겸손하다. 다시 같은 선택을 하겠다, 라고 말해도 누구나 고개 끄덕일 텐데.)

질문을 좀 바꿔서 후회하지 않느라고 물어보면,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답할 수는 있어요. 병역거부라는 선택과 감옥에서의 시간이 이후의 삶에서 하나의 준거점처럼 저한테 많은 의미를 가지는데 그런 무거운 추가 하나 있으니 어떤 결정이나 판단에 있어서 든든하게 기댈 곳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불이익을 말씀을 하시기도 하는데,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심각한 인권침해지요. 말해 무엇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병역거부 전에도 후에도 많은 것을 누렸다고 생각해요. 출소 이후 제가 진학하였던 사회학과 대학원도 그 결정을 높게 평가해주는 분위기였고, 병역거부로 석사논문까지 썼죠. 로스쿨에서 그랬구요. 해마루 입사에도 ‘전과자 가산점’을 제가 누린 것은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해요, 수많은 이들의 오랜 고통을, 정작 나는 상징자본처럼 누리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요.

구속 생활은 어떠셨나요.

노회찬 의원이 얼마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셨는데,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서울구치소에 접견을 오신 적이 있어요. 노회찬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하였는데, 이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병역거부자들을 만나러 오신거죠. 그렇게 한 번 국회의원이 접견을 온 수감자들은 구치소에서 함부로 못해요. 방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되죠. 쟤는 국회의원이 접견 오는 사람. 노회찬 의원 덕에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살았게요.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을 갇히지 말자, 생각했지만 좁은 방을 여러 명이 같이 쓰다 보니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신문 칼럼 필사를 좀 했어요. 무언가를 쓰면 확실히 집중이 되니까요. 그 때 습관이 지금도 배어서 여전히 신문은 종이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또 스크랩도 하고 있어요.

병역거부 운동이 ‘남성’만의 운동이라고 쉽게 상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관한 의견이 어떠신가요.

모든 사회운동에는 당사자도 참여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죠. 근데 병역거부는 특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치매 노인들이나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치매 노인이 아닌데, 장애인이 아닌데 왜 그 운동을 하냐고 묻지 않잖아요.

저는 안보영역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들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제되지요.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신성‘이라는 것은 세속의 모독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합리적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모욕과 등치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따져 묻게 되는 구조가 바로 병역의 신성화입니다. 지금 육군 사병 기준으로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줄인다고 하는데, 꼭 18개월 해야 돼? 12개월 하면 안 돼? 이런 말을 못하는 거지요. 이런 말을 하면 바로 너 군대 갔다 왔어? 니가 뭘 알아?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는 구조. 병역의 신성화라는 건 결국 정보와 해석의 폐쇄성이에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너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세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병역거부 운동에 있어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참여하였고, 그녀들의 역할도 지대하였습니다. 병역거부운동을 넘어서 한국 평화운동이나 평화연구에 있어서도 여성활동가, 연구가들의 역할이 그러하였구요. 왜일까 생각을 해보면, 생물학적 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일반화하기 조심스럽지만, 군대 경험이 없고 그 이유로 발언권마저 배제 당해온 여성들이 당연시되는 군사주의에 보다 민감했던 것 아닐까, 자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군사주의를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던 것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병역거부운동은, 군대와 관련된 운동은 남성들만의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바로 신성화의 논리,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요?

(질문 하고 혼나는 기분, 오늘 여러 번 느꼈다)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이 특별히 의미가 있으실 것 같아요. 소회를 여쭙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요. 드디어 되었구나 싶지만, 이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야 되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제가 2005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최후 진술을 했어요. 피고인으로서. 2018년에는 변호인으로서 최후변론을 하였지요. 같은 법원에서 저와 똑같은 병역법 88조 위반으로 기소가 된 병역거부자의 변호인으로서 말이에요. 피고인도 안 우는데 변호인이 최후 변론하면서 울었어요. 방청하던 활동가 친구가 판사가 보면 니가 감옥 가는 줄 알겠더라 하더라구요. 당사자는 담담하게 얘기를 했지만, 저는 변론을 하면서 좀 서럽더라구요. 13년 전에 했던 “무죄를 선고해주십시오”를 지금까지 이렇게 간절히 말해야 하다니.

헌재 결정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셨습니까? 물론 기대야 당연히 하셨겠지만.

2015년 이후 하급심의 계속된 무죄판결을 보면서 사법부가 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병역거부 하급심 무죄판결은 한국 사법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어요. 상급법원의 판단이 없는 상황에서 하급심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부터 무죄 판결이 나오자 2016년 대법원 소부에서 유죄를 선고하였는데, 보름도 안돼서 하급심에서 다시 무죄판결을 내렸죠.

2015년, 16년, 17년 3년 동안 80여건의 하급심 무죄판결이 나왔는데, 판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이 사람들 감옥에 보낼 수 없다 선언을 한 것이에요.

헌법재판소의 중요 결정들에 대한 사례분석을 해보면 대부분 시대를 앞서나가는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이번 결정 역시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문재인 정부도 대체복무 도입입장을 수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구요.

지난 총회에서 모범회원 상을 수상하셨어요. 플랜카드에 ‘유흥도 열심’ 이렇게 적혀있던데요.

유흥이라면 좀 포괄적인데, 술을 즐겨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네요. 술을 좋아하고,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고 그러네요. 또 지금 민변 베트남전 티에프에도 술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뒷풀이를 참 성실하게 합니다. 베트남 현지 조사 가서도 일과 시간이 끝나면 불타는 밤들을 보냈는데. 그런 연유로 그런 플랑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해요.

수상 소감 한 번 더 부탁드리면 피곤하실까요.

페이스북에서도 썼는데, 평화운동 하던 사람, 변호사가 되어서도 평화운동 할 수 있게 해준 민변에 감사하지요. 민변 집행국과 공익변론센터에서 시민평화법정 준비에 정말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해주셨어요. 티에프가 크게 지른 사업 수습하게 해주신 거죠.

우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티에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고생일 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보니, 피해자 진술부터 하나하나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제대로 된 베트남어 통역, 번역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구요. 티에프 구성원 모두가 헌신적으로 준비했는데, 모범회원 상은 거기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시민평화법정이 뭔지 제가 몰라서, 준비하신 변호사님께 물어봤어요 이게 도대체 뭐냐, 대본은 누가 쓰고, 대본대로 가는거냐 아니면 돌발사항이 있냐. 결론은 정해져있냐, 이게 하나의 연극이냐, 이런 질문들이요.

연극이라는 평가도 있지요. 민간법정이기에 피할 수 없는 시선이라고 봅니다. 민간법정 자체가 강제력을 가진 판결을 얻기 위한 재판이 아닌 공론화를 위한 운동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형식이 아닌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루어진 주장과 증거의 수준, 법정증언과 판결의 내용 등을 볼 때 저희는 실제 법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기준을 잡고 준비하였어요. 비록 티에프 내부에서 역할을 나눴지만 원/피고 간의 공방도 사전 조율 없이 충분히 전개 하였구요. 방청 오셨던 참천군인분들도 판결에는 불만을 표시하셨지만, 재판 과정에서는 ‘나라에서 하는 것보다 잘하네’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누군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어차피 결론 뻔하게 내려놓고 한 거 아니야?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로 모셨던 이석태 변호사님, 양현아 교수님, 김영란 대법관님 모두 그 부분을 인식하셨습니다. 그래도 더더욱 당위가 아닌 증거로써 주장을 입증해야 함을 강조하셨어요.

한국에서 진행된 어떤 민간법정에서도 이정도의 절차를 진행했을까 싶어요. 2일 간의 법정 전에 2주, 1주 전에 각 두 번의 변론 준비 기일을 진행하였어요. 원·피고 대리인 출석해서 공개된 장소에서 말이죠. 그 공개된 변론 준비 기일에 증거 신청과 증거 검토 그리고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에 대한 석명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민간법정은 널리 활용되는 운동의 방식이기도 해요. 연극적 요소도 있지만, 법정이라는 형식이 주는 실체규명의 과정이 매력적이고, 판결문이라는 결론까지 도출되기 때문이지요. 2000년 동경에서 열렸던 일본군‘위안부’ 관련 국제여성전범법정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9개 국가 6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의 시민사회가 초대를 했죠. 그것이 저희의 롤모델이었습니다. 가해국의 시민사회가 가해국의 수도에서 자신의 책임을 묻는 법정. 2000년에 일본 시민사회가 국제적인 연대로서 이루어냈다면, 2018년에 한국 시민사회가 해보자.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것, 여기서 좀 풀어 주세요.

시작은 소박했어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오랜 전부터 알려졌지만 구체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배상소송 통해 파열구를 내보자 의견을 모았는데, 운동이 너무 소송에 갇혀서도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요. 그래서 소송을 준비하는 품으로 여론을 환기하는 민간법정을 해보자 생각을 한 것이에요. 리서치 과정에서 2000년 동경 법정도 확인되면서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구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너무 커졌죠. 실제 소송이라면 한 쪽 당사자의 주장만 준비만 하면 되지만, 민간법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해야 하는 것이자나요. 법정을 세우고, 절차를 담은 헌장을 공포하고, 재판부를 모시고. 베트남이라는 언어적 지리적 거리가 있는 곳에서 조사를 하고, 원고들을 모시는 작업도 상당한 비용과 공력이 드는 과정이었어요.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인 입장이었기에 언제든 초정이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구요.

티에프에서 2회 현지조사를 다녀왔는데 그 자료들을 번역하는 과정도 참 고달펐습니다. 김남주, 이선경, 배광열, 오민애 변호사님이 번역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하셨어요. 지금까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인터뷰 자료들은 피해자 진술을 그대로 베트남어로 녹취한 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현지 인터뷰 과정에서의 통역자의 진술을 정리한 것이 피해자의 진술로 유통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소송자료로는 전혀 쓸 수 없는 자료였기에 인터뷰를 영상을 바탕으로 라인 바이 라인으로 녹취를 하고 이후 번역을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제대로 처리해줄 수 있는 인력을 구하기 어렵더라구요. 피해지역이 베트남 중부라 사투리가 심하고 피해자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까지 티에프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정작 피해자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있었어요. 준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고, 피해자분들과의 지리적 거리도 먼 상황에서 준비의 대부분이 한국 법률가와 활동가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졌거든요. 물론 시민평화법정을 시작하기 전 피해자분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원고를 해주실 수 있겠냐는 동의를 얻었고, 2차 현지조사를 통해서 다시 설명을 드렸지만 피해자들과 충분한 소통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원고로서 앉아 있으실 법정이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이틀간 15시간에 달하는 과정이었죠. 절차에 익숙한 변호사들도 그 시간동안 앉아있는 게 쉽지 않잖아요. 위스퍼링 통역을 준비하였지만 60에 가까운, 태어나서 재판이라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분들이 이 재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정작 원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복잡했어요.

하지만 법정에서 원고들은 단 한순간도 법정을 떠나지 않았어요. 잠깐 쉬시다가도 밖에 무슨 소리만 나면 이분들이 뛰어 나가시는 거예요. 궁금하다고. 자기들의 재판이었어요. 피고 대한민국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베트남에서 오신 원고였어요. 혹시 재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시는 것은 아니까 걱정되는 마음에 실제 재판이 아니다 말씀을 드리면, 안다고,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재판을 언제 받아보겠냐고, 지금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해주시더라구요. 제가 얼마나 관념적이었는지, 마음속에서 이 분들을 운동의 주체가 아닌 증언의 도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지요. 뻔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피해자에서 운동가가 되는 과정이 이 분들에게는 이번 법정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다들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셨구나.

대본 짰냐고 물어 봤잖아요. 베트남에서 오셨던 분들의 당사자신문과 최후진술은 전혀 사전준비가 없었어요. 사실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재판부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최후진술. 무엇하나 읽지도 보지도 않고 마음으로 답변하셨어요.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거예요. 최후진술을 하시는데, 여기까지 차오르는 얘기를 그 300명 400명 되는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왔고, 그 진실을 이야기했다. 기억해달라며. 제가 법정이 끝나고 매체에 투고한 글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이었어요(원고 2명의 이름이 응우옌티탄으로 동명이인이었다), 정말 그랬어요. 눈부셨어요.

(대본이 있었냐는 질문에 화가 나서 말이 길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당시를 떠올리는 임재성 변호사의 표정에서 감격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시사인에 고정칼럼을 쓰셨던데, 그 때 변호사님 설명이 ‘평화연구자’더라구요. 보통 변호사, 교수 이렇게 직함을 쓰지 않나요?

일본에서 잠깐 공부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때 참 마음에 들었던 게 그런 거였어요. 우리는 보통 소속을 얘기하잖아요. 무슨 대학, 무슨 법무법인. 소속이 없으면 명함이 없는. 근데 일본에서는 ‘작가’, ‘연구자’ 이런 호칭이 많고, 자연스럽게 통용되요. 또 연구자 앞에는 그 사람이 관심 갖고 있는 주제가 붙는데, 어느 대학에 있다는 호칭보다 그 사람을 훨씬 더 많이 설명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평화연구자, 인권연구자, 이주연구자 등과 같이 말이죠.

조금 더 내심으로 들어가면, 변호사든, 박사든 그것은 자격이나 직업의 문제이고 제가 지향하는 것은 평화연구자에요.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임재성 변호사의 사무실 한편에 시민평화법정 기념사진이 걸려있다.

 

마지막으로 민변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병역거부 운동과 민변이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사실 지금 민변에서는 병역거부 사건을 해보신 젊은 변호사님들이 없어요. 근래에는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변호인을 선임하여 재판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대체복무제가 도입이 되면 관련된 소송들이 증가할 거예요.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불인정 결정을 하면 이를 행정소송으로 다투는 소송이지요.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될지 아직 미지수이지만, 초기에 보수적인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지요. 종교적 사유 및 많은 입증자료가 있는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정도의 범위에서 말이죠. 초기 불인정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을 통해서 나오는 사법부의 판단들이 대체복무심의위원회 방향에 중요한 기준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봐요. 그 과정에서 민변의 변호사들이 세밀한 연구를 통해서 대응해야 겠지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곧 만들어질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병역거부자 여부를 판정하게 될 텐데, 이는 우리 사회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양심 심사 기구가 될 거에요. 그 위원회가 이 사람은 양심 인정. 저 사람은 양심은 불인정, 이렇게 판단을 하겠지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주의 신념’은 인정하지만, ‘남성성이 지배하는 군사주의적 공간은 나의 성적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마음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런 결정이 나왔을 때 소송을 준비해야죠. 초기에 좋은 선례를 만드는 과정에 민변 변호사들이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또한 위원회의 심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의 조력이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역시 준비할 필요가 있구요.

3시간의 긴 인터뷰를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해 아쉽다.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거나, 견해에 전부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이를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멋있는지는 확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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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1

 

고래를 잡아먹는 미친 짓에 대한 단상

-외경에 대하여

  [caption id="attachment_155827" align="aligncenter" width="620"]고래1 고래 ⓒChristopher Michel[/caption]   100미터를 달리는 단거리 스프린터가 초반 작은 보폭으로 추진력을 만들어 겨우 전력을 쏟아 부은 큰 보폭으로 전환하게 되는 거리가 20미터이다. 그는 20미터가 넘는 신장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다. 그는 또 인간의 가청역을 넘나드는 엄청난 음역으로 노래하는 가수다. 그는 숨을 참고 한 시간 이상 견딜 수 있는 인내의 표상과 같은 존재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심폐능력의 소유자다. 위치추적기를 단 한 종은 해저 3킬로미터까지 잠수했고 그의 잠수시간은 거의 140분에 달했다. 그는 자녀를 낳아 지성으로 젖 먹여 키우면서 이웃들과 함께 양육하는 매우 사회적인 생명체다.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는 대항해를 일생에 걸쳐 행하는 대단한 행동가이자, 사랑하는 터에 붙박고 그 터의 변화를 함께 겪으며 늙어가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들의 족속은 놀라울 만큼 다양한 생태적 차이를 가진, 종별로 매우 독립적이고 독특한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다. 신·비·롭·다! 입을 열어 꼭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 이 생명체의 이름은 고래다. 1700년대에 시작된 포경은 1985년 상업포경이 금지됐다. 20세기 들어서만 300만 마리에 가까운 고래들이 포경선의 작살을 맞았다. 지난 세기 초부터 1962년까지 가장 인기 있는 고래잡이 대상이었던 향유고래 포획 수는 그 전 200년 동안 잡혔던 향유고래의 수와 같다(Marine Fisheries Review, 2013 No3.). 포경 300년간 향유고래만 100만 마리 이상 희생됐다. 1879년 에디슨의 전구 발명을 과학의 진보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전구는 고래기름이 없어도 어둠을 밝힐 수 있는 현실을 만들었고 그것은 무엇보다 생태적 진보에 기여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1851)은 성서적 전통에 의지한 작명법으로 캐릭터를 명명했다.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은 뒤 온 마음을 모비딕에게 빼앗겨 일생 그 뒤를 쫓는 에이허브 선장은 구약의 폭군 ‘야합’의 영어식 표현이다. 화자인 이슈메일 또한 예수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고 나중에 사막으로 추방한 아들인 ‘이스마엘’의 치환이다. 폭군은 자연-모비딕에게 대항해 그의 전 세계인 포경선, 피쿼드호와 그 세계의 신민들인 선원들의 몰살을 불러온다. 오직 고래를 잡아 죽이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고래의 세계를 경이의 눈으로 관찰하던 이슈메일이라는 정신적 망명객, 아니 이기심으로 자연을 해치다가 자연의 반격에 복수심을 품는 것이 당연한 세계가 뱉어버린 추방자만이 살아 남는다. 모비딕이 이슈메일을 의도적으로 살려준 것으로 소설은 묘사한다.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기록하고 전하라는 요구였을 것이다. 함께 살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함께 죽을 뿐이라는 ‘생태적 진실의 전령이 되라’는 모비딕의 요구는 그 뒤로도 다른 작품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거쳐 되풀이 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루이스 세풀베다가 1989년에 발표한 『세상 끝으로의 항해』다. 1985년 상업포경 금지에도 일본은 대규모 포경선단을 조직해 남극으로 고래잡이에 나서왔다. 그들을 막기 위해 늙은 어부가 배를 몰아 포경선단이 고래떼를 학살하는 현장에 진입한다. 분노한 포경선 수부들에게 어부가 해를 입게 됐을 때다. 그 때까지 일족의 학살을 운명으로 받아 들인 듯 죽음을 맞던 고래들이 포경선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작은 구원자를 지키기 위해 고래들이 학살자의 배를 공격하는 그 대목이 이 소설의 백미다. 고래들은 목숨을 잃는다. 어부는 살아남아 이 얘기를 작중화자에게 전하는 또 다른 화자가 된다. 생태적 진실의 기록자들을 살리는 두 소설 속 고래의 선택은 그저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조난당한 선원과 승객을 살리는 돌고래의 실화 등이 다수 존재한다. 고래는 다른 생명의 고통에 감응하고 적극적으로 구원하는 공감능력을 가진 생명체다.   [caption id="attachment_155828" align="aligncenter" width="620"]고래2 고래 잡는 포경선[/caption]   일본의 포경, 이른바 과학포경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너무나 공공연히 포경선단을 운용하는 일에 분개한 세계시민들이 이들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고소했고 국제사업재판소는 ‘일본은 포경을 금지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은 그 판결에도 아랑곳 않고 ‘식문화를 재판할 수 없다.’며 포경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전역에 고래고기를 공급하는 상업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과학포경선단이 잡아온 고래들이 해체되어 그 네트워크를 타고 식재료로 공급된다. 한국 또한 고래고기를 먹는다. 장생포의 고래축제는 사실 비의도적인 고래 혼획을 핑계로 그물로 잡은 고래들을 해체해 팔고 사먹는 현장이 된 지 오래다. 온라인에서 고래고기 또는 울산 고래고기를 치면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들과 체험기가 쏟아진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꽤 된다. CITES(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사무국과 그린피스 인터내셔날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연간 80마리 이상의 비의도적 혼획이 발생하지만, 단 한 마리도 도로 풀어주지 않는 나라다. 또 혼획되는 수보다 2~3배나 많은 고래고기들이 시장에서 소비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장생포의 고래박물관에 가면 과거 고래바다(鯨海)라고 동해가 불리던 시절부터 국내 포경산업이 쇠퇴할 당시까지의 기록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전시품 중 고래잡이 작살을 보면, 그 놀라운 살해의 집요성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살촉이라면 두 개의 미늘이 역진하면 살이 찢기는 역방향으로 갈라진다. 예를 들어 화살은 두 미늘 모양이 같다. 고래 작살의 미늘은 한 끝이 더 길고 굽어 있다. 그 미늘 끝에는 날이 서 있다. 한 번 고래의 몸을 뚫고 들어가면 고래가 어떤 몸부림을 치더라도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래 작살의 미늘은 굽어진 것이다. 살해를 위한 고도의 집중력이 작살에 투영돼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먹는 바로 그 존재’라고 『황제내경』은 말한다. 소, 돼지, 닭을 길러먹는 것이 고래를 잡아먹는 것보다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처세라고 잘라 말할 순 없다. 육식문명 자체가 문제라고 단칼에 자를 수도 없다. 다른 생명에 칼을 넣어 그 살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 해도, 이미 인간에 의해 멸종에 이르렀던 바다의 일족이 이제 겨우 멸종으로 치닫던 운명을 간신히 돌이키려 하는 때에 여전히 자신의 혀를 즐겁게 하려고 살해자가 되는 일은, 단언컨대 문명인의 처사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먹고 먹히는 야수들의 세계에 사는 자다. 그것을 ‘당연하다!’거나 ‘별 생각 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렇다면, ‘그대 또한 희생자의 대접을 받아도 마땅한 사냥꾼이자 먹이’라는 생태적 진실만은 끝내 흔쾌히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고래가 유달리 멋진 생명체니까 존중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종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놀라운 생명체’로서 존중한다. 이 마음을 잃는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무서워 않는 인류라는 종은 결국 제 종족의 생명마저 존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말 없는 희생이 인류에게 돌려주는 가장 큰 복수이다. 고래를 먹는 일은 인간의 미래를 먹는 일이다.

/ 박현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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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6/02/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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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바오로-수녀님-리본-640x148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삽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일합니까? 일자리와 일의 관계는 나뭇잎과 나무의 관계라는 진리를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무가 병들면 잎사귀도 떨어집니다. 잎사귀를 고친다고 법석을 떨어도 나무가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든 나무를 고치기 위해서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잘 치료해야 하듯이, 노동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노동의 근본 의미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고 활동하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때 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입니다. 노동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그러나 노동의 영성이라는 근간이 없다면 일자리는 죽어가는 나무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축복받은 일자리, 직업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유의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노동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의미 있는 노동이란 맨 처음에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모든 노동의 연관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공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생산활동은 창조적인 노동, 새롭고 축복받은 일자리로 이어집니다. 앞으로 가장 중요한 노동은 산업 생산과 관련된 노동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하여 인간과 함께 하는 노동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3827" align="aligncenter" width="300"]거룩한 노동을 하는 땅의 사람들 Copyrightⓒ 밀레, 이삭줍기 거룩한 노동을 하는 땅의 사람들 Copyrightⓒ 밀레, 이삭줍기[/caption]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더 ‘거룩한’ 노동을 하는데 소득은 오히려 적어진다면 뭔가 문제이지 않나요?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도 ‘거룩’하건만 보수는 형편없을 때가 태반입니다. 그런 노동 없이 우리가 온전할 수 있을까요? 논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 식료품을 운송하는 사람, 그 음식을 조리하는 사람,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집을 짓는 사람, 옷을 만드는 사람, 쓰레기나 분뇨를 처리하는 사람 없이 과연 우리의 삶이 온전할까요?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는 수많은 일꾼과 그들의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식료품을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도 예수가 보기에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아는 영적이고 ‘성만찬적인’ 요소가 있을 때, 우리는 노동의 전체 틀을 ‘제대로’ 짜게 될 것입니다.  

생계노동은 줄이고 모두를 위한 노동으로

환경위기는 노동위기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구시대적 가치관에서 헤어나지 못한 정치가들이나 경제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효율적인 환경정책은 상당수의 일자리를 만들어냅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그 일을 하는 가운데 깊은 의미를 찾게 된다면 대량실업 사태는 박물관의 유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노동권은 곧 인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노동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을 위한 노동’이 실현된다면 대규모 기업 경영은 줄어들고 중소기업이 늘어날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노동, 중요한 노동, 많은 노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3828" align="aligncenter" width="640"]세계적으로 높은 아랍지역 청년실업률 Copyrightⓒ. 2013 AL ARABIYA NEWS 세계적으로 높은 아랍지역 청년실업률 Copyrightⓒ. 2013 AL ARABIYA NEWS[/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63826" align="aligncenter" width="530"]중국의 청년구직자들 Copyrightⓒ. 2014 CNBC 중국의 청년구직자들 Copyrightⓒ. 2014 CNBC[/caption]   모든 생명은 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생명을 위해 뭔가 공헌하고 싶어합니다. 스스로 행복한 삶, 그리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노동은 대량실업 시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을 통해 행복과 의욕을 경험하는 사람은 일의 성과가 월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활동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취미활동에서 소명을 체험한 것입니다. 직업은 돈을 벌게 해주지만 그들은 취미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줄 수 있을 때 기쁨과 의욕을 느끼시지요?  

완전 고용은 꿈은 실현된다

태양에너지 관련 산업이나 유기농의 경우처럼, 내가 몸담은 일자리에서 모든 생명을 위한 축복이 흘러나옵니다. 생태적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생태적이고 정신적인 노동을 할 수 있고, 지구의 회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습니다. 태양 정보시대의 전제조건은 외적인 태양에너지이지만, 미래의 사회가 의식의 시대가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태양에너지도 필요합니다. 성직자, 심층심리학자, 의식 조련사, 예술가, 작가, 영적인 치료사 등이 그런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지식 노동자, 의식 노동자는 머리로 일하는 사람, ‘영혼의 노동자’로서 미래의 ‘수공업자’입니다.  

“ Ora et labora 기도하고 노동하라! ”

  이것은 1,500년 전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수도승들에게 내린 지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평일의 노동과 주일의 기도를 분리시켜놓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죽임의 ‘노동’이요 ‘정의로운 전쟁’입니다. 노동의 탈영성화가 전쟁을 일으키고, 자연을 파괴하고, 대량 실업 사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노동의 재영성화는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자연과 조화를 이룬 완전고용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볼 때, 대량실업은 대규모 인권침해 입니다. 많은 생산물을 내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우리시대를 향한 그의 제안일 것입니다. 생태적 예수에게 있어 의미 있는 노동이란 창조세계에 동참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노동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미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노동은 존귀한 노동이며 종교의 실천입니다. 이런 새로운 노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미 있는 노동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확은 엄청날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7-38)

글 │ 성가소비녀회 최바오로 수녀  
관련 글 보기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첫번째 이야기 – 연재를 시작하며..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두번째 이야기 – 생태적 예수 그리고 생태적 거듭남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태양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바람으로 가는 길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 생태적 교통정책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 생태적 수자원 정책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 생태적 농경 정책 바오로 수녀와 함께 읽는 『생태주의자 예수』 – 예수와 동물들
 
목, 2016/07/0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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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 18년 동안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노동 재판 실무 편람과 국내 최초의 근로기준법 주석서인 근로기준법 주해 발간에 큰 역할을 했어요.
  • 그뿐인가요. 판사면서도 SNS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동료 판사들이 옹호하며 나서 징계를 받지는 않았어요.
  •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어요. 2013년에는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을 두고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했거든요.
  • 법원 내 사법개혁 논의를 주도해 온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도 했어요. 지금은 민변 회원이에요.
  • 요즘 일부 언론이 정부 요직을 장악한다는 바로 그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을 모두 관통하고 있는, 그야말로 ‘핫’한 나는, 최은배 변호사(사법연수원 22기)입니다.

 

 

이혜정 : ‘판사 최은배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페이스북 글이 먼저 떠올라요. 당시 응원이나 비판도 많았겠지만, 특히 법원 내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최은배 : 사실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크게 번질 줄 몰랐어요. 그런 부분도 생각 못하고 올렸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죠. 글을 쓸 때는 페이스북 친구 200명 정도가 보고, 서로 공감하고 말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글을 밤 9시쯤 올렸는데 이틀 후 조간신문부터 조선일보에서 “이 사람이 이랬다더라”하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제 일이 더는 제 일이 아니게 돼버린거죠.

그때 사용했던 말 자체는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어요. 당시 이상득 의원이 미국 대사한테 했던 말이거든요. 이상득 의원이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은 ‘to the core’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미동맹에 대한 의견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걸 약간 비틀어서 “그래서 FTA 했나보다” 한 거였어요.

 

사실 제가 FTA나 통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FTA에 대해 오해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국회 비준 절차가 충분한 토론 없이 날치기로 진행됐고, 시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잖아요. 국가 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농림수산업을 희생시키고 공업, 특히 자동차를 더 팔기 위해서 우리 경제 안에서 형성되는 부를 밖으로 이전하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로 서민들이 더욱 고통당한다는 공감도 있었고요. 공직자로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문제는 구분되는 일입니다. 지금도 공무원법 집단행동 금지 조항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부정선거의 악몽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법에 못 박았지만, 사실 정치적 중립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거든요. 공직자가 의무를 다하는 것과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양립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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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제가 무슨 말만 해도 반응이 득달같이 일어나는 상황이 됐어요. 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어딘가 휘말릴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아닌데요. 2012년 대선 때 대선후보 토론회를 보고 페이스북에 “국가원수가 되면 외신 기자 앞에서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하니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썼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법원장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판사로서 나라 일을 한다고 앉아있는데, 정말 판사가 말을 못하게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2013년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을 때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걱정되고, 누구하고 토론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하게 페이스북에 올려봤다가 사단이 났어요.

 

남이 하는 말을 내 뜻과 맞지 않다고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떤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틀리거나 잘못된 의견이라면 자연히 사라지겠죠. 그런 사회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헌법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이렇게 네 가지 자유를 규정해요. 앞의 두 가지는 개인적인 표현이고 뒤의 둘은 집단적인 표현이죠. 40년 전에 처음 헌법을 공부할 때는 왜 ‘결사’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귀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모여서 노는 것도 결사이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모이고 동창 만나러 모이는 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후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룰 때에야 이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인지를 깨달았어요. 어느 조직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상대의 생각을 재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사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연결되더라구요. 우리나라는 반공이라는 이념 하나로 다른 의견을 완전히 배제해왔고, 또 이렇게 얻은 권력이나 이득을 지키려는 습성으로 항상 적을 만들어왔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같은 모임은 ‘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잣대나 도구가 돼요. 옛날에는 ‘빨갱이’라는 말로 배제하면 다 통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은 말에 반응해주지 않으니 어떤 소수자를 만들어서 배제해요. 소수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상대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극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혜정 : 일반 시민들은 비슷한 정치적 표현으로 실제 기소된 분들이 많아요. 민변에서 표현의 자유 기금으로 도와드리기도 하구요.

 

최은배 : 표현의 자유에 대해 형법으로 제한하고 민사상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게 분명히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프랑스 식 관용, 즉, 똘레랑스의 훈련이 되면 사회적으로도 나 역시 저런 상황의 당사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프랑스는 시민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의 경험이 쌓였고, 2차대전 같은 비극의 피바람도 겪는 과정에서 똘레랑스를 확립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도 동족상잔, 이념갈등 같은 피바람을 겪을 만큼 겪었는데.. 우리는 똘레랑스로 서로를 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요.

 

정치나 선거의 영역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명분은 대체로 ‘선거가 혼탁해진다’ 이런 얘기잖아요. 옛날에는 일반 시민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많지 않았죠.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같이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뿐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설을 한다든가 그냥 확성기나 스피커에 대고 말하는 것,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것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퍼스널 미디어가 발달했고, 이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건, 보기 싫거나 듣고 싶지 않으면 피하면 되잖아요.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 서구에서도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옹호하는 등 반인류적인 발언,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처벌해요. 이런 부분은 제한되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정당한 발언을 했음에도 ‘혐오발언’으로 몰려 처벌당할 위험도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이론이 충분히 쌓여야겠죠. 혐오발언과 혐오발언이 아닌 것을 구분할 충분한 기준이 있다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발언에 대해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나도 어떤 점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기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학교 현장에서는 앞만 보고 가르치잖아요.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이런 게 행복이다, 노력하면 오늘은 괴로워도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 이런 이야기 대신 내가 실패를 겪거나 약자가 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죠.

그래서 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의 삶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어요. 다들 자라서 노동자가 될 텐데 노동3권 같은 기초적인 권리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죠. 노동자의 권리도 가르치고, 토론과 회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면모도 겪어보게 해야 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걸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요.

 

법률가로서의 소양에도 문제가 있죠. 예를 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단체법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차이가 있어요. 총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토론하고 결의하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 결의는 무효잖아요. 이런 과정이 민법의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배우거나 겪어보지 못하다가 법조인이 되어서야 주입식으로 배우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아요. 그나마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그 세대 때부터 조금씩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이혜정 : 그런데 오랜 법관 생활 후 어떤 계기로 민변에 가입하시게 되었나요.

 

최은배 : 제가 민변에 가입할 때 민변 회장이셨던 한택근 변호사님이 저와 연수원 동기입니다. 사법 연수원 때부터 같이 지냈고, 모임도 같이하고 해서 저는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가입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변 가입을 안 하면 한택근 변호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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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법원에 있다가 나와서 변호사가 되면 공직 출신이기 때문에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법원에 있을 때도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때도 비슷한 프레임이 있었어요. 보통 법원행정처 업무로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의 법관들이 우리법연구회를 탈퇴하고는 했어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이유가 많았죠. 그런데 저는 법원행정처에서 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이혜정 : 판사 재직 시절에 바라보았던 민변은 어땠나요?

 

최은배 : 사실 제가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본적으로 민변에 아는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제 시각이 일반적인 판사들의 시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때부터 조영래 변호사님을 비롯한 정법회 변호사님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이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한 저는 민변이 모든 변호사의 가치를 포함할 수 있다고 봐요.

70년대에는 사법시험을 통과해 법조인이 되는 것이 운동의 차선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8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87년 이전에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뭔가 양심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법시험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시절에 제가 사법시험을 치르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제 주변 사람들도 지금과 달랐을 거고, 제 생각도 지금과 달랐겠죠. 87년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사법시험을 부담 없이 치를 수 있게 되었고, 저도 주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혜정 : 그렇다면 법원에서 판사로서 민변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민변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민변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최은배 : 저는 법관 생활 하면서도 노동법을 많이 다뤘고, 민변에서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법원에 있을 때터 노동위원회 위원들과 이미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점이 좀 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민변에 막 가입했을 때도 낯설거나 겉도는 느낌은 받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법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전관예우’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거든요. 새내기 변호사님들은 민변 활동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이랑 같은 스텝으로 함께하기는 어렵더라고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비슷한 법조경력에 잘 알고 지냈던 분들이 여기서는 너무 높은 자리에 계세요. 회장 하시고, 총장 하시고(웃음). 그렇다고 막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과 같이 다니기에는 또 세대차이가 나고요. 활동하면서 그런 부분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지만, 다들 너무 잘해주시기 때문에 민변에서 늘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혜정 : 혹시 판사일 때 할 수 없었던 일 중에, 민변에서 회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은배 : 법원에 있을 때는 사실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았거든요. 판사를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여기면서 언젠가 변호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판사로 계속 일할 생각이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로 사직을 결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변호사가 되었고요. 판사로 일하는 동안에는 변호사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구사항을 주로 들었죠. 피드백이나 모니터링 중심이었고요. 내가 변호사가 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준비를 하지는 못했고요.

대신 법관으로서 법원을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있어요. 법원을 나오면 변호사가 되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죠. 민변에서는 사법위원회가 법원 개혁에 대한 일을 주관하고 계시죠. 저보다 전문성을 갖춘 분들도 계시고요. 저는 법원 안에서도 사법제도나 앞으로 법원이 추구해야 할 지향보다는 재판을 잘 하는 것, 어려운 사람이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를 위한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법제도나 외국의 법관 양성, 외국의 사법 인사 제도 같은 분야는 저 말고도 전문성을 갖춘 분들이 많으니 오히려 제가 따라가기 바빠요.

 

이혜정 : 판사하고 변호사를 경험하셨는데, 그 중 어느 쪽이 더 적성에 맞으신가요.

 

최은배 : 판사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입니다. 사실 가정경제면에서 보자면 월급은 모자란 편이죠. 물론 판사가 받는 월급은 공무원 중에서 최고액에 가깝고, 흔히 ‘월급쟁이’라 말하는 분들에 비하면 많기는 합니다만, 반대로 변호사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니 능력에 따라서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역으로 경기 부침에 따라 집에 월급을 못 가져다 줄 수도 있더라고요. 저도 작년에 한 달 반 정도 집에 월급 가져다주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다행히 제가 노동법에 특히 전문성이 있다는 약간의 이름을 얻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는 면이 있어요. 그 덕에 다른 부장판사 출신들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인데, 흔히 아기가 태어나서 사주를 보면 관운이 있다, 재물 복이 있다, 혹은 장수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준 작명소에서 제 사주를 봤더니, 행정 관료가 될 거라고 했답니다. 법관이 아니고요.

 

이혜정 : 판사는 변호사가 서면으로 정제하고 정리한 언어로 사건을 접하고, 변호사는 정제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사건을 만나게 되죠. 양쪽을 경험한 지금, 느낌이 어떤지 궁금해요.

 

최은배 : 일반론적으로 답하자면, 저도 절실하게 깨달았죠. 법원에 있을 때 변호사인 친구들이 “변호사가 서면으로 법원에 제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변호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법률 언어로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변호사는 사건의 전후와 쟁점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이성으로 파악하는 얘기고요, 사실 판사는 괴로워요.

봐야 하는 서면도 많고, 재판도 많고, 일에 시달리고, 짜증도 나고, 변호사하고 싸우기도 하죠. 가끔은 변호사의 서면을 받았을 때 “이렇게밖에 못하나”, “이런 신청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하나,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제로 법정에서 “그쪽에서 받아봐라, 당신이 요청한 그 자료 받으면 제대로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판사일 땐 제가 판단하기에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취하시키라고 하기도 했는데, 변호사가 되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 편에 서게 되더라고요. 의뢰인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는 “판사한테 오히려 인상만 망가진다”고 말리기도 하지만요.

 

변호사가 되어보니 알게 된 점은, 법원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기관이 법원의 명령을 핑계로 미룰 수 없어요. “판사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고요. 법원의 명령이 강력해요. 실제로 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영업비밀이라고 자료 요청을 거부할 때 법원이 명령해주면 훨씬 쉽게 풀리잖아요. 판사일 땐 몰랐는데 의외로 법원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법원이 강하게 나갈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변호사들이 많은 부분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법원이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 많아요.

 

이혜정 : 작년에는 변호사님이 민변에서 신입변호사를 위한 강연도 하셨죠. 판사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좋은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인지, 후배 법조인들에게 팁을 주시다면.

IMG_0312최은배 : 사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내용 없는 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면은 공들인 만큼, 공부하고 쌓아온 실력만큼 나오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판사 입장에서 가장 보기 편한 서면을 내는 사람들은 부장판사 출신인 변호사가 직접 쓴 서면이에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자기 판결문을 쓰듯 써 낸 서면이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판사를 경험할 수 없고, 또 부장판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잖아요. 그러니 이건 특별한 일부의 이야기죠.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컴팩트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이야기 많이 하는 게, 서면 60페이지씩 써 내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고민하는 만큼 정제된 서면을 쓰게 됩니다. 분량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판결문도 너무 긴 판결문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읽을 만한 판결문이 더 좋고요. 짧게 쓴다고 생각도 짧은 건 아니에요.

둘째는 국어 실력입니다. 법학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그 변호사를 가르친 국어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부장판사가 되고 남의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나이 드신 변호사님들 중에 서면의 문장이 항상 ‘것입니다’로 끝나는 분들이 있어요.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게 모든 문단에 나와요. 그러면 읽는 입장에서 지쳐요. 최근 문장 교정하는 법을 다룬 책이 있는데, 전문교정인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적, 의, 것, 들 이 네 가지만 주의하면 훨씬 깔끔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중언부언하는 서면, 보여주기 식으로 분량만 길게 쓴 서면, 습관적으로 문장에 군더더기가 붙어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면. 이런 글쓰기와 국어 실력 문제가 두 번째 문제예요.

세 번째가 법학이론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공부를 충실하게 한 만큼 장기적으로 실력차이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사법시험 세대에 빗댄다면, 민법 총칙 교과서 네 권을 다 읽은 사람과 수험서로 본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길게 보면 노동법을 다룰 때도 민법을 성실하게 공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정치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혜정 : 서면이 중요하다, 판사님도 정성들인 만큼 본다, 글 잘 쓰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죠. 그런데 가끔은 저 수많은 사건과 기록을 판사님이 정말 다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최은배 : 기본적으로 눈에 들어와야 더 읽게 된다는 건 맞아요. 사실 세 페이지 정도 넘기다가 덮게 되는 서면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했던 말 또 내는구나, 상대방이 서면 써냈으니까 반박하겠지’ 지레짐작으로 안 본 서면도 있었고요. 그런 재판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서면이 몇 개 안 나와요. 소장, 답변서, 답변서에 대해 제출한 원고의 서면, 그리고 끝이죠. 나머지는 감정이 필요할 때, 혹은 중요한 증거 조사 결과가 밝혀졌을 때 보면 되고요.

민사재판도 재판이 수십 차까지 길어지는 재판이 많고 변호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자기가 원고라면 첫 번째 변론기일, 증거조사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법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이 두 가지이고, 시간이 모자라 똑같은 말 그대로 쓴 똑같은 서면 내는 것보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 싶어요. 변론의 기술보다 강력한 건 진실이에요. 사실관계가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글도 간단히 핵심만 전달하면 되죠. 그게 아닌데 어떻게든 돌이키고 만회하려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고 변명처럼 느껴집니다.

 

이혜정 : 지금 민변 활동 중에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노동법 전문가로서 최근 통상임금 판결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은배 : 저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사용자 입장이 되었어요. 도발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사용자가 큰돈을 버는 것은 위험부담을 떠안는 대가 아닐까요? 기업이 성공과 실패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사업적 위험을 감수한 결과 성공하여 큰돈을 벌었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사업 기반이 모두 마련되어있어 땅 짚고 헤엄치면서 들어오는 돈만 챙기는 기업도 있어요. 특히 지금의 통신사 같은 기업들이요.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CEO는 앉아서 1억 이상 급여를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스톡옵션으로 수십억씩 챙겨가기도 하죠. 그런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주주들도 마찬가지고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기업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기업 그 자체가 기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세팅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사람의 조직과 사업 기반에서 재화가 생산되고, 용역과 재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의 조직체고 용조물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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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기업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비용’ 취급하면서 기업 그 자체의 보전만을 가치로 삼고 있어요.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돈입니다. 매출이 적어서 임금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하더라도 그게 정당한 사업의 결과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상한 일이 아니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두는 유보금, 예비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기업에서 실제로 일을 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의 절반도 안 된다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대기업의 순수익 중 일부는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들여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 분배해줘야죠. 결국 임금, 세금, 상품 원가를 제하고 나면 주주가 가져갈 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주주가 자본을 투입한 것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보상해주는 게 맞지만, 회사가 주주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주주자본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 나타난 극단적인 이론이에요. 지금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있다는 게 정설이에요. 기업의 기반은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첫째, 회사의 사업에 노동을 투여하는 노동자가 둘째입니다. 자본은 마지막이에요. 소비자, 노동자,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기업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기업과 노동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회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는 비용 지출을 발생시키는 대상으로만 보고, 이윤이 안 나면 인건비를 가장 먼저 깎아요. 일을 할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기업의 존재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공헌은 ‘비용’으로 환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판결을 본다면 임금을 더 주는 바람에 적자가 생겨도 그 때문에 기업이 망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사람이 모이는 조직체이니 이 문제도 사람이 해결하겠죠.

 

이혜정 : 마지막으로, 요즘 법원개혁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가장 시급한 사법개혁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최은배 : 법원 내부의 문제라서 국민들이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로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 문제가 있어요. 기업에서도 직급별로 권한이 구분되어야 하잖아요. 판사도 스스로 협의회를 구성해서 의견도 내야하고, 사법 현장에서 대법원장 개인의 판단에만 근거하여 행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러 판사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권력이나 권한을 분산해야 해요. 지금은 전국의 모든 법정이 일사분란하게 의자 개수까지도 대법원의 결정을 따르고, 법원장은 법원 안에서 기금 운영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권한을 모두 분산시켜야죠. 연방제 국가는 주 법원과 연방법원이 완전히 달라요. 우리나라도 법원 자체적으로 특색 있는 법정도 만들어보고,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의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법원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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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법부가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판사 수 늘리고 법정 늘리고 법원 많이 만들어서 국민이 재판을 받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게 가장 급선무입니다. 판사나 사법부의 틀도 국회의 입법에 의해 결정되고, 행정부는 공무원의 정원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사실상 검사가 민사재판을 하고 있거든요. 판사가 모자라니 민사재판을 진행하는데 오래 걸려서 재산 분쟁이 일어나면 사기, 횡령, 배임 같은 형사 사건으로 해결하려 해요.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면 재산 문제나 개인 분쟁을 민사 재판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하는 많은 일을 법원이 가져와야 하고, 그러려면 법원이 경찰서만큼 많아야 해요. 경찰서는 자치구마다 하나씩 있잖아요. 법원이 인구 50만명당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 검사가 형벌로 다스려 사회 질서와 사법정의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금, 2017/09/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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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논평]

 

집회·시위의 자유를 확인한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

 

서울행정법원 제6행정부(재판장 김정숙 판사)는 12. 3. 오후, 백남기농민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가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하여 제기한 옥외집회 금지통고 처분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을 하였다.

 

재판부는 옥외집회 금지통고 처분의 효력이 계속될 경우 범대위가 예정된 시각에 집회를 개최할 수 없게 되어 범대위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을 수 있는 반면, 집회가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하거나 집회 개최장소와 주변 도로의 교통 소통에 장애를 발생시켜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재판부의 결정은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가 우리 사회에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집회·시위를 마치 허가제처럼 운영하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다. 경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위 집회를 충실히 보장하고, 차벽 설치·물포 및 최루액 살수 등 집회 참가자들을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임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확인한 법원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환영하며, 광장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울려퍼질 수 있도록 공권력남용 감시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15123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 장 한 택 근 

목, 2015/12/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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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백두대간생태문화탐사가 아무 사고 없이 마쳤습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다들 인생의 한가지 맛을 얻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번은 추풍령~덕유산까지 충북구간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갔었습니다

충북구간에는 속리산국립공원, 월악산국립공원, 소백산국립공원  등 세군데 국립공원이 백두대간 줄기에 있습니다

백두대간의 허리 지역으로 그 가치가 남다름을 일찍 인식하여 지금과 같은 조사활동과 보전활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2015 백두대간생태문화탐사가 진행됐던 6월26일 부터 7월3일 까지 7박8일간의 일정으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 6월26일 전날부터 시작된 비는 탐사 당일 오전까지 촉촉하게 대지를 적셔주었습니다

모두 봄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시기였기에 탐사를 시작하는 우리 또한 많이 반가웠고 좋은 징조라 생각하며 발대식을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허석렬 탐사단장님의 인사말씀으로 2015 백두대간생태탐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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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이재은 청주충북환경연합 공동대표님의 무사히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격려사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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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업을 후원해주는 충청북도 산림과에서도 응원해주기위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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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도 부터 시간나실때마다 참석해주시고 있는 이광희도의원께서도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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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힘찬구호와 함께 출발입니다

이번 백두대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런지… 모두 기대반 걱정반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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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산행이 없어 발대식도 오후에 했었고 도착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습니다

첫날 숙소는 추풍령 바로 아래 있는 은편리 마을회관입니다

저녁 먹고 늦게 방문해주신 청주충북환경연합 연방희 대표님으로 부터 인사말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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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날 6.27(토) 모든 아침은 식사로 시작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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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먹을 간식과 주먹밥을 챙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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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동안 우리들의 짐을 다음 숙소까지 그리고 대원들을 산행지까지 태우고 다닐 트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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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풀지 않으면 산행하다 사고가 발생할수도 있습니다 매번 산행의 시작은 몸풀기 체조부터…

이번구간은 은편마을회관에서 괘방령까지 10.4km 거리를 걷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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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팅도 외치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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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에 앞서 이번 탐사대장이자 인솔을 해주실 박연수 대장님으로 부터 주의사항을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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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밭을 지나 이제 백두대간의 줄기로 진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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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탐사구간 조사를 합니다. 1구간은 추풍령에서 장군봉을 지난 안부까지 입니다

이 구간에 있는 식물군락을 조사하고 있는 초본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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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선에 올라서니 이렇게 온 몸이 시원해지는 바람과 함께 풍경도 펼쳐집니다

이 맛에 산을 오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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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의산에서 단체사진 한컷

처음 시작하는날이 가장 힘들지요 그래도 표정이 아직까지는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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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구간들이 비슷하겠지만 이번 구간은 워낙 유명한 산들이 많다보니

표식 리본이 나뭇가지에 지저분하게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참 쓸데없는 리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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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이 한 여름에 더워서 산에 어떻게 가냐 합니다 그러나 산은 도시의 온도보다 많이 낮습니다 그래서 시원하답니다

초록이 싱그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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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슨 호사일까요 산행중 점심을 먹고 가볍게 한숨 낮잠도 잡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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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사중 가장 힘든 팀은??? 바로 관리실태팀 관리실태팀은 매번 이렇게 등산로 구간을 자로 재고 다녀야 합니다

관리실태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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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중 5 ~ 10분정도 생태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종범 선생님이 해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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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첫날 구간이 끝났습니다 시작하면서 설레었고 끝나면서 시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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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는 마을회관이나 야영이 기본입니다 아무래도 집과 비교할수는 없겠지요

땀 흘리고 내려와 계곡물에 씻고 다들 편안해 보입니다 두번째 숙소인 용촌리마을회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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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은 에너지충전팀이라고 말씀하시던데 짐을 옮기는 지원팀 말고 이렇게 방문하셔서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첫날 발대식이 시작되기 전 이근호 회원님은 맥주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둘째날 방문해주신 조용숙회원이 아들 재후와 함께 와서 시원한 맥주, 수박, 통닭, 과일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충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의 김대광 국장과 정태영 팀장이 또 방문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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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충북환경연합 이재은 대표님은 시원한 맥주를 아이스박스에 담아 오셨습니다 수박도 함께

사) 풀꿈환경재단 상임이사님은 쐬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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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일과 마무리 시간입니다 각 팀별 조사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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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피곤하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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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충북환경연합 영동지부 지부장님도 막걸리와 수박을…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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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우 이사님의 백두대간에 대해 ’7인7색’ 이야기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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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8(일)둘째날입니다

기상 5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가벼운 체조로 시작합니다 서로 안마도 해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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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구간은 괘방령~우두령까지 12.4km 거리 입니다

산행 전 몸풀기 체조가 날도 진화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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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이 이렇게 무너져 있어 보수가 필요한 구간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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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같은구간 똑 같은 장소에 사람만 다른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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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우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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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마무리시간 팀별 조사내용 발표시간

이날은 흥덕리경로당에서 하루를 신세졌습니다

- 이날은 박연수 탐사대장이 나가시고 김동화 인솔대장이 들어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이 끝나는 날이다보니 많이 분들이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 그리고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박설아대원이 들어오며 아버님께서 또 아이스박스에 맥주를 한가득,

이수현이 합류하며 이광희 도의원께서 과자를 또 한가득…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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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9(월) 우두령~ 삼도봉주차장 까지 10.8km 길이입니다

시작은 항상 몸풀기 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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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간은 건강한 숲이 참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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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일이 지나다 보니 이제 양발도 부족 옷도 부족해 이렇게 배낭에 걸고 다니는 풍경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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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뭇잎으로 사랑을 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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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식사후 오수를 즐기는 시간, 무리한 발도 쉬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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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삼도봉입니다

이곳은 충북, 전북, 경남이 만나는 지점으로 매년 10월경 이곳에서 삼도가 함께 행사를 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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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 할 능선이 웅장하게 펼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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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야영하는날 이었습니다

사람의 불빛하나 없어 반딧불이가 저녁하늘을 수놓는 곳, 물이 어름같이 차가워 땀에 찌든 몸도 담그기 힘들었던 곳,

오직 우리들의 소리와 나뭇잎 부딪는 소리만 들려오는 곳, 보름에 가까운 달빛이 서럽도록 맑았던 곳

다들 기억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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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0(화) 삼도봉주차장~덕산재구간 13.1km입니다

이곳부터는 우리가 처음 조사하는 구간입니다

2012년도에는 삼도봉까지만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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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자욱한 숲이 신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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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박8일중 유일하게 비가 온 날입니다 오후부터 시작된 비는 그날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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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도 계속 비가 내려 부득이하게 야영을 접고 아랫마을 민박집을 빌렸습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도 주문해서 먹고 하루 마무리 시간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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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수) 덕산재~빼재 구간 14.3km로 이번 탐사중 가장 긴 구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구간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산 두개를 넘어야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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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사 내내 어려움이 많았는데 힘들어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소 같은 웃음을 선사한 대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세안 대원~~~ 모두들 고마워 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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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탐사에서 이 멋진 사진들 찍느라 수고한 김다솜 대원 또 이성우 대원

멋진 풍경 눈과 마음으로만 남을뻔했는데 사진으로도 남겼네요 본인도 이렇게 사진찍는 자세가 멋진줄 몰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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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으로만 다니던 마룻금이 이제 시원해졌습니다 많이 내려왔고 다시 올라가야 하지만 풍경은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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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산행인솔 마지막날 이었던 김동화 대장님이 끝나고 내려오는 대원들을 한명한명 수고했다고 안아주시는데 울컥했습니다

정말 따스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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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허석렬 단장님이 피자를 사오셔서 내려오는 대원들의 입을 호강시켰답니다

피자뿐아니라 곱창전골도 사오셔서 푸짐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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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숙박지는 덕유산자연휴양림입니다 탐사 시작한 이래 가장 좋은 숙소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3일동안 수고해주신 김동화 인솔대장님이 개인사정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모두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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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백두대간의밤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초본팀부터 시작합니다

그 동안 조용조용하기만했던 황연주 대원의 ‘마리아’ 열창 배꼽 빠지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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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안 대원의 이번 탐사대원들 흉내는 ~~~~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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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본팀은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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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가장 고생했던 관리실태팀은 팀원들이 총 출동해 대원들의 흉내를내고 문제를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네요

그런데 지영이는 선물을 뭘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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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신 4분 많이 고민되실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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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받은곳은 대원들이 함께 몸으로 표현했던관리실태팀입니다

축하해요^^

이날 들어와 저녁을 맛나게 해준 박종순 회원, 정진 회원, 신희주 회원, 정란희 회원 모두 고맙습니다

녹색청주협의회에서는 시원한 맥주를 후원해주셨어요

박연수대장님 후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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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목) 자! 이제 덕유산 빼재~향적봉대피소까지 10.6km구간입니다

좀 힘들기도하고 기대도 되는 구간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인솔대장으로 강성구 대장이 함께 했습니다

2009년 백두대간탐사에서 인연이되어 2012년 백두대간보전시민연대 활동가로 일했고

지금은 ‘월간 마운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간 내줘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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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박8일동안 산행총괄을 해준 김경중 대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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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곳에 있는 벌레들과도 많이 친해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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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미터 고지에 이르니 산길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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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유산에 왔으면 향적봉은 올라야죠

곤돌라타고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기념사진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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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하루면 끝나는 탐사입니다

이제 이 멋진 풍경도 내년을 기약해야겠죠~~~ 시원 섭섭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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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날 숙소는 향적봉대피소 입니다 우리 외에 2명만 있어 완전 전세냈습니다

1500 고지 숙소에서 하룻밤이라 기대가 많이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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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삼대가 잘한거로는 별빛 쏟아지는 하늘은 볼수 없었습니다

자욱한 안개와 밤을 같이 했는데 나름 멋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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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금) 이제 마지막날 아침입니다 이곳에서도 체조는 뺄수 없죠

- 향적봉대패소~삿갓재구간까지 10km가 조금 넘는 구간인데요

원래는 남덕유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마지막날 너무 늦게 끝나면 안될것 같아 구간을 좀 줄이고….

빠른 시간안에 삿갓재에서 남덕유까지는 별도로 산행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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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날 몸은 무거운데 맘은 날개같은 날~~~

풍경은 눈도 시원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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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는데 뭔가 자꾸 뒤에서 땡기는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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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박8일 열씨미 걸었는데 이곳을 보니 다리가 풀렸다는 대원이 있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지만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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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에 내려와 계곡에서 발을 담그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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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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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로 올라와 해단식을 가졌습니다 해단식에서 우수대원을 뽑게되는데

우리에게 큰 웃음을 준 오세안 대원이 뽑혔습니다 받을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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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수고했던 2015 백두대간생태탐사 대원들입니다

먼저 윗사진에 있는 허석렬 탐사 단장님

아래 사진에 있는 박연수 탐사 대장님

s_박연수 대장

▼ 3일 동안 인솔해주신 김동화 인솔대장

 

 

 

 

s_김동화 대장

 

▼ 2일동안 인솔해주신 강성구 인솔대장

 

 

s_강성구 인솔대장

▼ 이번 탐사 총괄을 담당했던 오경석 대원

s_오경석 총괄

▼ 7박8일간 산행총괄을 담당했던 김경중 대원

s_김경중 산행총괄 (2)

▼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 고주범 대원

s_고주범 대원

▼ 4차원 소녀 김나림 대원

s_김나림 대원

▼ 사진뿐만 아니라 이것 저것 할일이 많았던 김다솜 대원

s_김다솜 대원

▼ 기록을 담당하고 전일정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김말숙 대원

s_김말숙 대원

▼ 멀리 평택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충북대에서 숲치유 공부를 하고있는 김윤수 대원

s_김윤수 대원 (2)

▼ 몇년간 백두대간탐사에 참여했고 전일정 참여가 앞으로는 힘들듯하여 이번에 전일정 참가했다는 민의기 대원

s_민의기 대원

▼ 다리가 아파 고생고생 생고생했지만 기억에 남는 산행이었고 앞으로 할까 말까??? 고민중인 박설아 대원

s_박설아 대원

▼ 제주환경연합 집행위원장이었고 지금은 경기대 교수로 있는 박진우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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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탐사에서 목본팀장을 하며 대원들에게 구라와 웃음의 경계를 없게 만들었던 박현수 대원

s_박현수 대원

▼ 단 이틀 올해 자신의 생일 선물로 백두대간탐사를 선택했다는 신선영 대원

s_신선영 대원

▼ 짧은 일정이라 아쉬움이 컸던, 내년에는 꼭 다 참여하겠다는 신준수 대원

s_신준수 대원

▼ 웃음과 끼를 제대로 발산해 미친× 소리도 들어야 했던 오세안 대원

향유고래 소리가 그리울듯~~~

s_오세안 대원 (2)

▼ 무릎이 움직이기 힘들정도로 아팠음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이미경 대원

s_이미경 대원

▼ 올해는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역할을 담당했고 내년에는 반드시 운전면허를 따 지원을 하겠다던 이성우 대원

s_이성우 대원

▼ 중3때 아빠와 함께 참여했던 계기로 고등학교때도 참여하고 이제는 당당한 대학생으로 아빠없이 묵묵히 걷던 이수연 대원

s_이수연 대원

▼ 이틀동안 참여해 찍어준 사진이 모두 멋있었고, 버섯에 대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던 이종범 대원

s_이종범 대원

▼ 멀리 용인에서 정말 때가 잘 맞아 참여했고 지금은 회사일을 잠시 쉬면서 산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이주식 대원

s_이주식 대원

▼ 이번 탐사에서 관리실태팀장을 맏았고

2012년, 2014년, 2015년 전일정 참여해서 수많은 별명과 개그를 남겼던 이창호 대원, 이번 별명은??? ‘꼭지’ 뭘까????

s_이창호 대원 (2)

▼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직장이 있다보니 이번 탐사에 참여하게됐고

예전 환경연합 활동가로 있을때 지원만 시켜서 이번에는 직접 발로 걷도 싶어 신청했다는 임창우 대원

s_임창우 대원

▼ 이번 탐사에서 초본팀장을하고 백두대간탐사를 오기 위해 휴가 7일이나 쓰신 전숙자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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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참여했지만 의미있었겠죠!!! 정남득 대원

s_정남득 대원

 

s_정진대원 s_지영 대원 (2) s_최민주 대원 s_최영미 s_황연주 대원 (3)

금, 2015/07/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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