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7. 김지영 영화감독
‘백년전쟁’, ‘그날 바다’를 연출한 김지영 감독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해주었습니다~^^
‘백년전쟁’, ‘그날 바다’를 연출한 김지영 감독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해주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문학강좌
[러시아 문학기행]
– 레핀(2) 혁명적인 작품들
주최 : 한국산문
제작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문학강좌
[러시아 문학기행]
– 고리키(1) 어린시절
주최 : 한국산문
제작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문학강좌
[러시아 문학기행]
– 고리키(2) 세상 속으로
주최 : 한국산문
제작 :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공동행동한국위원회가 제작한 야스쿠니의 실체를 파헤치는 영상입니다
주요내용
0:00 2019년 5월 도쿄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 판결
2:14 야스쿠니신사는 누가 왜 만들었나?
4:03 야스쿠니는 침략신사이다
5:37 천황을 위해 야스쿠니신사의 군신이 되라
6:50 오늘날 야스쿠니신사 무엇이 문제인가?
7:30 지금 야스쿠니신사는 종교시설인가?
9:53 야스쿠니신사합사 철폐소송
10:52 야스쿠니신사의 한국인합사는 언제부터?
13:43 야스쿠니신사합사 철폐소송의 역사
17:20 야스쿠반대공동행동위원회
#동암 #차리석 (車利錫)
1881.7.27. – 1945.9.9.
1945년 8월 15일 중국 충칭. 해방의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동암 차리석은 비서장(祕書長)으로서, 임정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환국을 위해 밤낮을 가릴 수 없었다. 결국 노 독립투사는 꿈에도 잊지 못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망명의 땅 충칭에서 1945년 9월 9일 과로사로 순국하고 만다.
순국 직전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죽는구나”하며 통곡하던 차리석 옆에서 김구도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해방된 지 불과 25일 만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문학강좌
[러시아 문학기행]
– 고리키(3) 전쟁과 혁명
주최 : 한국산문
제작 : 민족문제연구소
[앵커]
류석춘 교수의 발언은 자칭 새로운 보수세력이라고 말하는 ‘뉴라이트’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왔던 주장입니다. 일본 내에서도 ‘극우진영’이 쏟아내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김태형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 2004년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TV 토론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공창 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 (유튜브 ‘이승만학당’ / 지난 5월) :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행해지는 위안부 자신의 소규모 영업이었습니다.]
류석춘 교수도 2006년 한 간담회에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습니다.
2013년엔 또 다른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 ‘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차명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은 류 교수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양심적이고 제대로 연구한 학자”라고 지지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뉴라이트’
뉴라이트의 전신은 2004년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출범한 자유주의연대입니다.
이듬해 이 단체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학계는 물론이고 정계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습니다.
지난 2006년 뉴라이트의 ‘창립 1주년 기념식’에는 보수진영의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뉴라이트 4주년 기념식/유튜브 ‘gabje cho’ (2009년 11월) : 더 이상 왜곡된 역사관을 갖지 않도록 하고, 건강한 사회관을 가진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
이들이 ‘위안부’에 대해 내놓는 주장은 일본 안에서도 ‘극우진영’이 말하고 있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과거 뉴라이트는 친일인명사전 제작은 반대했고,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찬성했습니다.
최근 류석춘 연세대 교수까지, 뉴라이트 인사들의 무리한 주장은 잊을만 하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상디자인 : 김충현)
JTBC
☞기사원문: 뉴라이트 ‘왜곡된 위안부 인식’…일 극우진영과 ‘닮은꼴’
日정부, 오키나와 등서 전몰자 유골 수습하며 한반도 출신자는 제외
日 “韓 구체적 제안하면 협의” 약속해놓고 “제안 없었다” 말 바꿔
억울하게 목숨 잃고 묘지조차 없는 강제동원자 유골 2만2천구 추정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정부가 2차대전 당시 격전지에서 수습된 유골이 조선인의 것인지 감정하기 위해 협의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반년 가까이 무시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동안 유골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가 협의를 제안하면 응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일본 정부지만, 정작 한국 정부가 협의를 공식 요청하자 “협의를 제안받은 바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26일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 한국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지난 4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에 유골 문제에 대한 실무 협의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반년이 다되도록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격전지인 오키나와(沖繩) 등에서 유골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인 일본 정부가 발굴 사업 도중 찾은 유골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의 것이 있는지 감정해보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외면하는 것이다.

앞서 행정안전부는 이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167명으로부터 DNA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태평양전쟁의 전몰자를 유족에게 인도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하고 이를 현장에서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해 해당 전몰자의 유족에게 유골을 인도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수습’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죽음으로 몰아댔지만 정작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국민이 아니라며 유골을 고향으로 되돌려주는 사업에서 제외한 것이다.
법 제정 후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가 한국인 전몰자의 유골도 찾도록 나서라고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이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난 4월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연합뉴스가 협의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후생노동성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요시다 가즈로 과장은 “한국 측으로부터 아직 (협의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다”며 “유골 수습 사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본이 모국인 일본군과 군속이며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이라는 외교 루트를 통해 ‘구체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고 딴소리를 한 것이다.
이에 “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가”를 재차 묻자 그는 “그건 한국 측이 결정할 일”이라고 발뺌을 하기도 했다.
과거 후생노동성이 ‘한국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그는 “외교에 관한 일이니 우리들(후생노동성)은 답할 수 없다. 그건(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지) 외무성에 물어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제안했는데도 구체적인 제안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제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말기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군속으로 끌려와 숨진 박희태 씨가 행방불명자로 기록돼 있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행방불명자 명부’. 박 씨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사망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료제공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 2017.8.15 [email protected]
이 관계자는 “작년과 재작년에도 실무자들이 만나서 유골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우리는 이를 협의로 보고 논의 내용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제국주의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격전이 치러진 곳이다.
당시 20만명 이상이 숨졌는데, 이 중에는 한반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군인·군속·노무자·정신대원 1만명 가량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가 전후 미군정 산하에 있었던 까닭에 유골 수습이 진행되지 못해 전몰자의 상당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일본 정부의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통해서는 그동안 800구 가까운 시신이 발견돼 일본인 전몰자 유족들과의 DNA 감정이 진행됐지만, 대부분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죽어 어딘가에 묻힌 채 유족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유골은 팔라우, 사이판, 필리핀 등 일본 밖에도 적지 않다.
오키나와와 남태평양 등에서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자의 유골은 2만2천구로 추정된다. (취재 보조: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모토부초[일본 오키나와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잡지 ‘라이프(Life)’에 실린 무덤 묘표 사진. 오른쪽에서 각각 2번째와 4번째 묘표 속 ‘金村萬斗’와 ‘明村長模’라는 이름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김만두 씨와 명장모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과 함께 게재된 르포 기사의 제목은 ‘오키나와-일본인이 아니라면 오키나와는 살기 좋은 곳이다’이다. [사진 제공=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 2019.2.17 [email protected]
<2019-09-26>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유골봉환 협의하자” 韓 제안에 日 반년째 ‘딴청’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는 소설가 조정래의 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9-09-28> 경향신문

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호(통권76호)
차례
여는 글
금단을 넘은 저항, 금단을 넘는 시선 / 조형열
통일에세이
남북한의 학술 교류·협력과 역사학의 모색 / 신주백
한반도 평화만들기 과제와 방향 / 권영길
북한 백두대간 기행 / 로저 세퍼드
쟁점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과 한국 민족해방운동 연구 / 김영진
신간회, 어떻게 볼 것인가 / 윤효정
지금 우리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양립가능한가? / 류동민
우리는 지금 촛불 시대에 살고 있는가? –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에 대하여 / 정현진
머나먼 한반도 군축, 국방비 동결로 물꼬 터야 / 정욱식
인물로 보는 역사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같은 시·공간, 다른 선택 – 채동선과 홍난파 / 노동은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 ー 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 박순섭
[반독재민주화열전]
남김없이 타버린 불꽃 이야기 – 시인 김남주 연대기 / 김형수
[코민테른인명사전]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1) – 강상주, 박진순, 박애 / 임경석
사실 체크
○ 우리 역사에서 협동조합운동은 무엇이었나? / 김소남
○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 수리조합사업의 실체 / 박수현
사료의 재발견
『동전 오기영 전집』 : 하나 된 조국을 향한 어느 자유주의자의 외침 / 장규식
『대명률』의 편찬과 수용 그리고 적용 / 한상권
북한의 이해
북한 미술, 조선화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가? / 문범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의 기원과 제정 과정 / 강응천
예인열전
동방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2 연구사 / 최열
예술과 현실의 소통
BTS, (케이) 팝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정엽
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서평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보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 –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 정재훈
책소개
한국의 20세기는 식민과 분단으로 인해 전쟁과 생존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의 압살과 청일전쟁, 20세기 전반기의 러일전쟁,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남북 두 분단정부의 수립, 6·25전쟁 등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로 인해 민족사회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에 의해 비민주적 통치가 진행되었고,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시민이 되기보다 절대적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 받았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단 세계적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냉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오히려 치열한 열전 상태로 돌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IMF의 여파와 세기말 증후군이 겹치면서 회색빛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세기 전반에 비해 후반기에 우리 사회가 성취한 역사적 성과를 떠올리며 21세기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이 컸습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던 군사정부의 그늘과 지역주의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이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핵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북미 정상의 협상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갈증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조건이 그나마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지구촌 시민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16년에는 촛불시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굳센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긴 노동유연화, 위험의 외주화와 같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절반의 절반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이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역사를 볼 때 20세기가 직면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와 우리 민족사회가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에 접근하기 위한 역사학의 선택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식민·분단·전쟁 등 온갖 폭력에 맞섰던 저항을 조명하고, 민주·평화·평등의 시선이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금단(禁斷)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구역 또는 범위 안에 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또한 금기(禁忌)는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전자가 주로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애써 기피하려는 의식의 측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체제가 철저하게 막아선 금단의 영역을 넘은 저항을 발굴함으로써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을 갖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여는 역사』가 상상하는 내일을 여는 방법입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편집위원회는 2019년 가을호(통권 76호)에 ‘여는 글’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원고를 수록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북한에 대한 내면적 이해, 남북의 민간 교류를 세밀하게, 그렇지만 맛깔스런 필치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역사적 저항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민행동을 연속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통일에세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남북 교류사업의 성과와 과제를 담았습니다. 신주백은 2000년대 이후 학술 교류를 역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정치적 배려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 맞물릴 때 교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권영길은 평화철도 연결운동이 현실적인 평화 만들기 실천의 길이고 이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두대간 사진전을 열기도 했던 뉴질랜드 사람 사진가 로저 세퍼드는 2011~2012년, 2017~2018년의 종주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남북한의 사람들, 문화, 그리고 산도 똑같았다면서 분단이 바꾸지 못한 것들을 말합니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인 코민테른과 신간회를 다뤘습니다. 김영진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코민테른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역사적 사실과 연구경향 등을 설명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권위’가 각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폭넓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윤효정은 신간회에 대한 이해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민족통일전선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한 뒤, 신간회 평가를 해소 문제에 국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부정을 넘기 위해 중앙 및 지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벌인 활동 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오늘날 현재적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해와 편견도 섞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류동민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상관성을 정리했습니다.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이 정치담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지 입론의 역사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현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 사법부를 통해 법외노조가 된 부당성과 합법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정욱식은 분단체제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국방비 동결을 추진해야 하며, 2019년 현재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 일본이 6위, 북한은 18위로 평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도 제시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고투한 인물 군상의 모습을 주로 다뤘습니다. 먼저 음악가 채동선과 홍난파의 삶을 비교한 고(故) 노동은의 유고를 실었습니다.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난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동선의 삶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순섭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쓴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그렇듯이 그녀도 월북한 이후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형수의 김남주 연대기는 시대의 변화와 시인의 삶을 연결하면서, 또 그가 썼던 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고민한 김남주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한편 임경석은 이번 호부터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인명사전’을 연재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기획된 인명사전에 수록한 14명의 인물 정보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을 위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문체이지만, 강상주, 박진순, 박애 등 한인 사회주의자에 대해 기존 연구보다 한층 보강된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6년 출간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한 종합적 정리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톺아보기 위한 ‘사실체크’에서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과 일제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민간협동조합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소남은 이 운동에 사회운동과 적극적 연계, 좌우 양편을 넘는 통합적 활동,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지원, 생명사상의 수용 등의 특징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연대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박수현은 수리조합사업이 일제 통치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관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중소지주와 자작농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조직적 저항이 속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 재점화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지속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동전 오기영 전집』과 『대명률』을 다뤘습니다. 『동전 오기영 전집』은 일제하·해방직후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삶을 영위한 오기영의 생각을 담은 책 모음입니다. 장규식은 오기영을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계승해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자유주의를 제창한 인물로 조명하면서 통일독립을 열망한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합니다. 『대명률』은 조선왕조 형법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서적입니다. 한상권은 14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대명률』이 조선에 수용·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북한의 이해’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강응천은 북한의 국호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닌, 조선인민공화국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후진국 사회주의의 기호이자, 민주기지론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문범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출발한 북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독자적인 조선화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조선화 화단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활발한 논쟁과 화가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실재함을 말합니다. 컬러로 수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열이 연재하는 ‘예인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문화평론가 이정엽이 케이팝(K-pop)의 흐름 가운데 방탄소년단(BTS)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든 반태경 피디는 명동촌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동기와 역사 속 기독교 신앙인이 펼친 사회적 실천의 가치를 담담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는 정재훈이 최근의 화제작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다뤘습니다. 변화보다는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위 책이 왕조교체의 원인과 성리학 수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를 큰 줄기에서 보는 시도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20년이 지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는데, 『내일을 여는 역사』도 바로 21세기의 첫 해인 2000년 3월에 첫 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21세기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도 아닌, 폭넓은 대중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주변’ 또는 ‘경계’에 서서 지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주변과 경계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금기를 넘는 시선이 이 지면을 통해 넘쳐날 수 있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김민철 교수, 발표자로 조목조목 비판
“일 극우 위안부·강제동원 부정 논리
뉴라이트가 진부한 레퍼토리 답습”
주익종 “한반도 재산 85%가 적산” 주장
김창록 “일 재산은 식민지 수탈 산물
일 정부와 법원도 개인청구권 인정”
이영훈 “위안부, 성노예 아니었다” 주장
강성현 “위안부 강제동원 광범위했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 형법에도 불법”

“강제징용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등의 극단적인 역사 왜곡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반일 종족주의>를 향해 학자·전문가들이 포문을 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반일 종족주의> 긴급토론회를 열어 이 책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했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학술단체 차원의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문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듯, 80명 가량의 청중이 찾아와 토론장을 매웠다.
이날 발표자로 나온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한국의 뉴라이트들이 이런 진부한 레퍼토리를 내세우는 건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
토론회에선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조처의 배경이 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논박이 이뤄졌다. 앞서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해방 직후)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은 한반도 총재산의 85%에 달했다. 애당초 한국 측이 일본에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재산은 대한제국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고, 일본인의 사유재산도 식민통치의 비호 아래 이뤄진 구조적 수탈의 산물이므로 정당한 재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주 연구위원의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는데 한국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는 주장도 문제 삼았다. 김 교수는 “개인의 청구권은 협정에 의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일 양국 정부와 법원에 의해 확인되었다”며 “주 연구위원의 논리는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고 전제할 때만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베 정부조차 단언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전제”라고 꼬집었다.
<반일 종족주의>에 나온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주장은 이미 학문적으로 극복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 책에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합법적인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된 것이며, 위안부는 폐업의 권리와 자유를 가졌으므로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현재의 연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식민지 공창제를 모델로 하되 더 억압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라는 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동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본 형법과 국제법으로도 불법이라는 점, ‘위안부’의 생활이 성노예와 같다는 점, 더 나아가 식민지 공창제뿐 아니라 일본 본토 공창제 역시 성노예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표자들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정치적 의도도 지적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필자 대부분은 뉴라이트로서, 이들이 주도했던 대안·교학사·국정 역사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되었다.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의도는 일본 극우세력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모임’같이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창록 교수는 “이영훈이 조정래 소설가를 비난하기 위해 동원한 ‘광기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라는 말이 과연 누구에게 진짜 어울리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10-01> 한겨레
☞기사원문: ‘반일 종족주의 허구’ 벗긴다…학술단체 첫 공동대응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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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당시 거론조차 안돼”
[알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오는 4일 열려…
1919년 치열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조명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다.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는 오는 4일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개최된다.
학술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다.
주최 측은 “3·1운동 100주년인 올 한 해, 자유 평등 민주 평화라는 3·1정신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세력과 뉴라이트 등 한국 내 동조자들의 역사부정과 과거로의 퇴행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결코 용이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며 “그만큼 이들의 궤변을 원천 봉쇄할 연구 성과의 축적과 활용도 절실해지고 있다”고 학술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 자료 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한다. 이 문서들은 1차 관변자료로 3·1운동의 발상에서 지방으로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그 전개과정과 구체적 실상은 물론 일제의 탄압상과 대응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문서는 일제 검사 이시카와가 1919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어난 함경도 지역 3·1운동 참여자를 기소하기 위해 작성한 115개 사건, 총 950여 명의 관련자에 대한 기록으로 재판자료가 거의 멸실된 북한지역 3·1운동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희귀 자료다. 발표자들은 문서를 면밀하게 분석해 3·1운동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전개된 지하조직 결성, 지하신문 발간, 관공서 방화, 관공리 퇴직권고 등 다양한 형태의 항쟁과 새롭게 밝혀진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 행적 등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난 8월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기념관은, 문서철을 탈초·번역하고 내용 분석을 거친 뒤 해제를 붙여 Ⅰ,Ⅱ 두 권의 책자로 펴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기소 준비자료에 등장하는 3·1운동 관련자에 대한 심층 검증과정을 거친 뒤, 독립기념관과 함께 공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 북한 학계와도 관련 자료의 제공 등 협력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와 Ⅱ부 발표 및 Ⅲ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된다.
개회식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로 이뤄진다.
Ⅰ부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주제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과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발표한다.
Ⅱ부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을 주제로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다.
Ⅲ부 종합토론은 발표자 전원과 토론자 김정인(춘천교대), 윤소영(독립기념관), 장신(한국교원대),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허영란(울산대) 등이 참여한다.
<2019-10-01> 프레시안
☞기사원문: 일본서 새로 발굴된 2·8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 공개한다
※관련기사
☞뉴시스: “2·8 독립선언, 시작은 망년회”…日취조기록 첫 공개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해방 이후 73년 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법적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겁니다. ‘불법 식민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권리, 그리고 일제의 위법성이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일철주금 대법원 판결문, 2018.10.30.)
그런데 ‘반일종족주의’는 이 판결이 명백한 역사 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판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강제동원은 과장을 넘어 날조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게 이영훈 전 교수와 이우연 박사를 비롯한 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가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도 이 ‘강제동원’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지난번 ‘위안부’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강제동원’ 이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연관기사]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논박 – ① ‘위안부’는 종족주의의 아성?
■ 이우연 “조선 청년에게 일본은 ‘로망’…수요와 공급 맞아떨어져”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제네바본부 회의실에선 믿기 힘든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일본 극우단체 국제역사논전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석한 이우연 박사가 강제동원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겁니다.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이 임금은 공평하게 지급됐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임금이 더 높았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 노무자들은 쉽고 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우연 박사, 2019.7.2. 스위스 제네바 UN 인권이사회)
이러한 주장은 책 반일종족주의에도 그대로 소개됐습니다. 샤머니즘에 가까운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사법부와 행정부가 ‘자발적 노무동원’을 강제연행과 노예노동으로 오해했다는 게 골자입니다.
특히 이우연 박사는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게 된 것은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임금 역시 정상적으로 지급됐고, 일본인보다 임금이 낮은 경우는 민족 차별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인이 탄광 작업의 경험이 없어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강제저축이나 업무 중 구타와 같은 전근대적 노무관리도 없진 않았지만, 이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습니다.
■ “일베류’ 역사 선동” 반박…일본과 국제사회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

이에 대해 김민철 경희대 교수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왜곡과 무지, 혐오 발언으로 가득 찬 역사부정론자들의 ‘일베(일간베스트·극우 성향 커뮤니티)류 역사 선동'”이라는 겁니다.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自虐史學)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강제노동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덤 속에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역사 부정론이 한국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다만 선수만 한국의 뉴라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치의 발전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면서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인 양 의기양양한 것을 보면 무척 당혹스럽다.”(김민철 경희대 교수)
김 교수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언과 공식 자료들은 차고 넘친다”며 “반일종족주의는 이런 자료와 증언을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일본 사법부와 국제노동기구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폭력 동원·임금 차별…”인질적 약탈적 납치였다”

일본 내무성이 조선의 민정 동향을 조사한 ‘복명서(復命書)'(1944.7.3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의 폭력적인 동원 방식이 잘 설명된 자료 중 하나입니다.
–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으로 송출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질적 약탈적 납치 등이 조선 민정에 미치는 악영향도 악영향이지만, 송출이 곧 그들의 가계 수입의 정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극히 많은 모양이다.”
– “징용과는 별도로 기타 어떤 방식에 의하든 출동은 모두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은 만약 사전에 이를 알리면, 모두 도망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습, 유출(誘出),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해서 인질적 납치상태의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일제 말기 전남 장흥의 유생이 쓴 일기에도 강제동원의 실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동원의 폭력성과 강제성은 더욱 짙어졌습니다.
–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하여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가기 시작했다. (…) 도망자가 많아지자 모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군면의 관리들이 밤중에 마을을 습격해서 노동자를 잡아갔으며, 모집된 자가 도망가면 가족 중 1명을 대신 데려가서 머릿수를 채웠다.”
임금 차별 경향 역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김민철 교수는 조선인 임금은 금속광산과 철강업에서는 일본인의 60% 정도였고, 조선인 광부의 임금은 일본인 광부의 70% 전후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업주가 ‘강제저축’을 이유로 들어 매월 임금의 일부를 가져가서, 조선인 광부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실제 월급은 10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강제저축은 퇴직 때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조선인의 절반 이상, 지방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도망·소재불명·불량송환 등으로 정상 퇴직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학문적 사망선고”…이제 기댈 곳은 대중뿐

이영훈 전 교수 등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우리 안의 견고한 ‘통념’에 대해 거듭 경고합니다. 실증적으로 취약한 한국인의 통념과 달리, 이 책은 실증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 학술적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며, 잘못으로 판명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이들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지만, 지금까지 비판을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이 책의 상당 부분 또한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원래 그대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젠 “‘자기 확신에 빠진 오만함’이란 말도 과찬일 정도로 광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인데, 박 사무처장은 이들이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도 이런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필자들은 대부분 뉴라이트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이 주도한 ‘대안교과서’·’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 처분되었다. 이 교과서들이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은 이들에게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기댈 곳은 이제 학계가 아니라 대중들, 그중에서도 과거 독재 정권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층이었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궁극적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이들의 의도일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을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설파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인데, 일본 극우단체 ‘새역모'(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역사 부정’ 사이에서, 이제는 진지한 대응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019-10-07> KBS

전남 광양시가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시민의 노래’를 당분간 부르지 않기로 했다.
광양시는 7일 “연말로 예정된 ‘시민의 노래’ 폐지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때까지 공식석상에서 이를 제창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지난달 16일 실·국장이 참여하는 시정조정위원회에서 이 같은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광양시는 8일 열리는 시승격 30주년 기념 광양시민의 날 행사에서 ‘시민의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시민의 노래’는 1989년 시인 서정주가 노랫말을 짓고, 김동진이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95년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하면서 노랫말 가운데 ‘동광양’을 ‘큰광양’으로 바꿔 불러오고 있다.
서정주는 친일 작품 11편을 남긴 것으로 조사돼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보고서 1006인 명단’에 올랐고, 작곡가 김동진도 일제 침략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 행적이 확인되면서 2006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든 인물이다.
광양시의 ‘시민의 노래’ 제창 일시 중단은 너무 소극적인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친일 청산작업을 활발히 펴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광양시는 ‘시민의 노래’ 폐지를 위해서는 읍·면·동 의견 모으기, 시민 대상 설문조사, 시민공청회 등 다단계 절차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눈치보기 행정’이라는 비판도 부르고 있다.
광양시 관계자는 “폐지 여부는 시민 의견을 모아봐야 최종 결정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부에서는 ‘시민의 노래’의 작품성 등을 높게 보는 평가도 있다”고 말했다.
광양시의회도 지난달 24일 ‘시민의 노래’ 존치 여부에 대한 시의원 간담회를 열었으나 광양시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광양시의회 ㄱ의원은 “두 인물에 대한 친일 시비가 수십년 전부터 일어왔고, 특히 올 들어 3·1운동 100주년, 일본의 경제침략 등 일련의 상황을 감안해볼 때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청산 작업에 동참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관계자는 “대표적인 문화계 친일인사들이 짓고 만든 광양시 ‘시민의 노래’는 이미 역사 속에 묻어놨어야 마땅했다”면서 “다른 지자체보다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2019-10-08> 경향신문
☞기사원문: ‘친일 논란’ 광양시 ‘시민의 노래’ 언제 폐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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