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지역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익명 (미확인) | 수, 2018/08/01- 16:30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01

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02

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03

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04

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17
0
0

[초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0
0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9
0
0

[인터뷰]

역사만화 <반민특위>를 펴낸 조남준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이번에 발표하신 <반민특위전-청산의 실패, 친일파 생존기>(한겨레출판) 서문을 보면 작가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광주 5.18과 87년 6월항쟁인데, 반민특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1980년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필독서라고 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면서 반민특위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친일세력이 우리나라에 어느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친일세력의 1세대들은 이제 사라졌고 친일파는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박정희도 일본육사 출신인 게 알려지지 않았죠. 계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는 친일파가 장악하고 그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조중동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으로 언론개혁을 진행했는데 엄청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봤었고요. 2005년에는 사학법 개혁을 하면서 사학재단의 비리를 밝혀보
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의 박근혜가 한달 동안 청계천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반대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개혁이 제대로 안 되는 것들도 보았죠. 이승만 정권 때 친일세력들이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사학을 만들었고 그 학교들에서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또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하고 숨어있던 친일옹호론이 나타났죠. 그래도 처벌되지 않아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움직임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반민특위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모르거든요. 그래서 좀더 알기 쉽게 만화책으로 내게 된거죠.

 

문 : 직접 겪은 6월항쟁은 어땠나요?

답 : 너무 많은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어요. 이한열, 박종철만 많이 알려졌는데 김세진, 이재호, 황정하 등 많은 열사가 있었습니다. 황정하는 이 책 <반민특위전>에도 나오는 독립운동가 황옥 선생의 손자라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선 항상 일부 극소수 극렬좌경용공학생들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과 국민들을 떼어놓기 위한 용어였죠. 당시 사회민주화운동의 주축은 학생운동이었어요. 대학교 교문 앞에는 지독한 최루탄 냄새가 끊이질 않았어요. 그래도 시민들은 학생들 탓을 하질 않았습니다.
공권력은 극대화되어 있고 철의 요새처럼 전두환 정권은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6월 10일 명동에서 지나가는 차들이 약속대로 모두 경적을 울렸어요.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 일은 매일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어요. 계란에 바위치기 같았던 고립감 속에 외롭게 싸우던 학생들에겐 가슴부터 울컥 감동이 밀려오는 거대한 국민들의 힘을 느꼈죠. 전두환은 항복했고 일시 승리감을 느꼈었지요.
제가 85학번이고 1987년에 3학년이었어요. 6.10 때 경찰은 해산작전이 아니라 연행작전을 펼쳤어요. 명동에서만 세 번 끌려갔어요. 그 전에는 경찰서에 가면 몇박 몇일 밤샘 조사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6・10 때는 워낙 많은 사람이 끌려오니까 너무 편하더라고요. 그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식당 같은데 앉혀놓고 그냥 성명, 나이, 소속 이런 것만 빨리빨리 해서 조사받는데 5분, 10분 걸렸나 그랬어요. 그리도 밤새 대기시키다가 아침에 풀어줬어요. 만일 컴퓨터가 있어서 데이터화되어 있었다면 상습범이라고 풀려나질 못 했을 겁니다. 이 경찰서 갔다가 저 경찰서 갔다가 하면서 타자로 친 제 조서는 어마어마한 서류뭉치 중 하나로 캐비넷에 처박혀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죠.

문 : 6월항쟁 이후에 통일운동도 열심히 하셨겠네요. 군대에서 보복조치는 없었나요?

답 : 통일투쟁, 통일선봉대 활동을 했죠. 그리고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중간에 보안사, 지금의 기무사가 저를 추적해서 신원을 알아내 중대장을 굉장히 압박하고 괴롭혔어요. 보안사에서 중대장한테, 네 부대 사병 중에 빨갱이 같은 놈이 있다고 하면서 누군지 가르쳐주지는 않고 오랜 시간 괴롭혔나 봐요.
알아서 나를 조지라는 거였는데, 중대장이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나란 걸 알게 됐죠. 그 다음부터 나를 괴롭히는데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도 학생시절과 사회시절이 더 힘들었기 때문에 군대는 휴가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문 : 졸업과 제대 이후에 사회진로를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화를 하시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원래 미대 출신이에요. 동아리 활동도 했었는데 동아리에 흰 벽이 있었어요. 거기에 전두환에 대해서 만평식으로 처음 낙서를 했어요. 그게 소문나면서 낙서일 뿐인데 많은 학생들이 보러오고 그랬어요. 그림은 자신이 있었지만 만화는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나한테 만화가의 재능이 있나 하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회화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죠. 만화는 회화보다 사람들과 소통에 강력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회화에서 만화로 전환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만화가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웠어요. 중간에 나한테는 만화에 재능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땐 그만두려고도 했어요.

문 : 저는 <한겨레21>을 통해 조작가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간 어떤 작품 활동을 하셨나요?

답 : 시사SF는 1997년도부터 8년 동안 연재했고 그전에는 공동체에서 작업했어요. 만화는 1993년도에 공모전에서 상을 탄 다음에 <내일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4페이지 정도 분량을 매주 그렸죠. KBS에서 ‘조남준의 세상 뒤집어보기’, ‘조남준의 시사포커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2년 동안 100편 정도 만들어서 나름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술자리에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시사만화가로 알려졌지만 남녀 사랑 인생에 대한 장편만화도 그리고 단편만화도 여러 편 냈기 때문에 시사만화가보다 그냥 만화가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도 아마 온라인으로 돌아다니는 ‘균형’은 많이 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문 : 제목을 ‘반민특위전(傳)’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다큐 만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반민특위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 ‘반민특위’가 주 제목으로 들어간 것은 거의 없어요. 반민특위가 많이 알려지고 이슈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에 꼭 반민특위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출판사에 얘길 했죠. 그래서 ‘반민특위전’으로 정해진 거죠. 역사만화를 계속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타이틀도 조남준의 역사만화라고 했고 나중에는 역사만화 1, 2, 3을 붙여 시리즈물로 구상중입니다

문 : 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 참조한 자료는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를 주요하게 봤어요. <친일인명사전>,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 번째가 경향신문의 ‘창간 30돌을 맞이하여 발굴하는 숨은 이야기들’입니다. 이게 1977년도 기사예요. 1년간 연재된 기사인데 그 중에 반민특위 부분이 70회 정도 있어요.

문 : 책에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답 : 다 기억에 남죠. 인물선정을 할 때는 경찰, 관리 도지사, 교육 언론 예술가 등 각계각층을 골고루 분야별로 맞췄어요. 박흥식이 1호 검거자로 경제 쪽이죠. 박중양은 도지사까지 하면서 일본에 대한 아부와 충성심은 최고였고 고위직 권력을 이용해 악행을 많이 저질렀어요. 그의 언행을 보면 일제시대를 민족의 영광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경찰 중에는 노덕술보다 김덕기, 하판락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판락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면서 ‘조센징들’이란 말을 많이했는데 자신을 일본인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문 : 이 책 마지막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선정기준’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친일파들이 잡히고 검거되는 과정에서 ‘중추원’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게 조선시대 중추원도 아니고 도대체 이 직책이 어떤 것인지. 또 경찰의 ‘경시’라던가 ‘경부’란 명칭이 나오는데 지금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이게 지금의 파출소 소장인지 궁금했었어요. 친일파를 선정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어느 선까지 인정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뉴라이트가 흔히 일제 강점기에는 누구든지 친일할 수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이승만은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에게 일제시대 통장을 한 것도 친일이라면서 해임안을 내는 등 공격하고 그랬잖아요.
우리는 보통 친일파로 을사오적의 이름 말고는 알지못하고 그러잖아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낸 <친일인명사전>의 맨 앞에 나오는 친일인물 선정기준을 보면서 이건 꼭 알려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
각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시대 각계각층 여러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서 기준을 세웠던 것은 과거만이 아닌 현대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비교 분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봤죠. 사람들한테 반드시 알려야겠다, 상식적으로도 누구나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정기준을 실은 거죠.

문 : 이 책의 판매상황은 어떤가요?

답 : 아직은 거의 안팔렸어요. 중간에 2주 동안 묶여 있다가 이제 풀렸어요. 이번 주 월요일인가 아마 출고되었을 거예요.

문 :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요?

답 : 초등학생한테는 어려울 것 같고 중고등학생부터는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40대, 50대 이상도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책이 자꾸 커지고 무거워지는데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가벼운 책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 정도면 버스나 전철을 타고가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책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문 : 이 책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답 : 총 합쳐서 1년에서 몇 개월 더 걸렸어요.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는 민족분열’이라는 발언이었어요. 그때부터 그전에 그려놨던 것들을 다시 수정하면서 준비했어요. 나경원의 발언이 이슈화되고 친일 발언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를 만화로 내자고 여러 출판사에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모든 출판사에서 반민특위 만화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회신이 왔죠. 이런 경우는 제 경험상 거의 없었거든요.

 

문 :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요?

답 : 제주 43인데요. 이게 좀 어렵기도 하고 연재만화나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싶어하는 곳이 없어요. 보통 상업성을 많이 따지니까요. 팔릴 건지 안 팔릴 건지를 판단하는 거죠. 근래에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픽션화해서 영화처럼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사실관계에 근거한 다큐적인 작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픽션화해서 사람의 감정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큐로 풀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18을 직접적으로 다룬 다큐만화도 없어요.

 

문 : 이강수 선생이 감수해주셨네요. 도움을 많이 받으셨나요?

답 : <반민특위 연구>를 저술한 이강수 선생이 초고를 보시고 많이 보충하고 수정해주셨는데 대부분 이 책에 반영했어요. 그런데 제가 제일 아쉬운 부분이, 지면 관계상 중간에 보충해주신 것을 다 넣지는 못했어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반민특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실테지만 만화로 쉽게 볼수 있도록 엮어 놨으니까 이 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금, 2019/12/20- 23:35
2
0

[식민지비망록 53]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의 현장, 도화동 공동묘지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나?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와 오랜 세월 출판과 언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남긴 저작물인 <한국의 쇠망(The Passing of Korea)>(1906)에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탓에 여느 사람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이 사진에는 “군율(martial law); 일본이 무상으로 토지를 징발한 데에 항거하여 철로를 중지시킨 일로 총살된 세 명의 한국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찍이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해철처형(害鐵處刑)」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군용철도는 경의선(京義線)을 일컫는 표현이다.

 

작일(昨日) 상오(上午) 10시에 일본 위관(日本 尉官) 1인(人)과 헌병(憲兵) 8명(名)과 병정(兵丁) 40명(名)이 군용철도(軍用鐵道)에 방해(妨害)한 자(者) 아현거 김성삼(阿峴居 金聖三), 양주거 이춘근(楊州居 李春勤), 신수철리거 안순서(新水鐵里居 安順瑞) 등(等) 3인을 공덕리 부근(孔德里 附近)에서 포살(礮殺; 총살)하였더라.

 

이 기사에 따르면 러일전쟁이 터지고 세상이 온통 일본인들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을 때 이에 항거하다가 ‘철도파괴범’으로 처형된 것이 바로 이들 김성삼(아현 거주), 이춘근(양주 거주), 안순서(신수철리 거주) 세 사람의 운명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21일자에 게재된 「가련한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법부에서 외부로 조회하되, 고양군보를 거한즉 음력 7월 17일에 철도역부 일인 3명이 본군 외성동 상리 이덕근 가에 승야 돌입하여 닭을 탈취하려다가 쫓겨 가더니 즉시 또 그 집 내정에돌입하여 부녀를 겁간하려는데 덕근은 출타하고 그 부친 제하와 그 아우 인화가 집에 있다가 일인을 꾸짖었더니 해 일인 등이 몽둥이로 난타하여 제하는 당장 치사하고 인화도 중상하였슨 즉 극히 참혹하다 하였으니 곧 일관에 조회하여 해 죄범을 착득하여 처형케 하라 하였더라.

 

경의철도의 건설에 종사하는 일본인 역부 세 사람이 야밤을 틈타 인근 동네에 들어가 닭을 훔쳐가려다가 들키게 되자, 되려 부녀자를 겁간하려는 것은 물론 사람까지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호머 헐버트의  <한국의 쇠망>(1906)에 수록된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총살형 집행후 군의관에 의한 검시 장면이다. 이때 일본군은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9매에 달하는 연속 사진을 촬영하였고,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이를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대량으로 배포하였다.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이때 처형된 이들의 정체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등 3인이며, 총살형을 당한 장소가 공덕리 부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사진첩(일로전쟁 사진 화보 25권)> (1905년 6월 20일 발행)에 수록된 ‘철도선로 방해자의 사형집행’ 광경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공동묘지는 장소 확인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공연히 남의 나라 백성을 셋이나 처형한 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도 이것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는 일본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부로 보내는 공문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김성삼 등 군율시행통보(金聖三 等 軍律施行通報) 및 대민훈계요청(對民訓戒要請)」이라는 문건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 처형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이러한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한국정부에서 잘 훈계 조치를 하라는 내용으로 일방통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일본의 횡포는 당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서양인들의 경악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대한제국 시절에 궁내부 소속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가 남겨놓은 일기와 서한을 묶어서 엮어낸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서울, 1904년 10월 6일
……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을 게으르고 믿을 수 없는 한국인에게 권리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들은 유럽 사람들이 크게 놀랄 일을 저질렀답니다. 제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한국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죠.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 한국인들을 술에 취해 서울―의주간 철도공사에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여기는 이미 전시법이 공포되어 총살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사형 집행과정을 사진사 두 명에게 찍게 하는 등 일처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은 불쾌했습니다. 이 지독한 총살장면이 담긴 사진을 살 수도 있답니다.
[인용출처 :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136쪽]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사진사 두 명을 동원하여 이러한 잔혹한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내게 했다는 대목이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 무렵 프랑스의 시사화보인 <르 쁘띠 빠리지엥(Le Petit Parisien)> 1904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사격연습」 제하의 기사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에 관한 내막을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사진에 관한 얘기가 등장하고 있다.

(전략) 본지 특파원은 즉석 사진 몇 장과 함께 참혹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였다. 사진은 서울의 일본인 사진사들로부터 돈을 주고 쉽게 구한 것으로, 그들은 이 사진이 가져올 여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인근에 농부 세 명이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중 한 명은 과부의 아들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고, 모두 문맹인데다 아는 것은 없고 술만 마셔댔다고 한다. 생각 없이 행동하던 세 농부는 어느 날 저녁 서울에서 의주로 향하는 철도의 철로를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철로에서 선로변경장치를 발견하고는 신문물을 신기하게 여겨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장치가 상하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하였던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순찰중이던 일본 헌병이 다가와 다짜고짜 불쌍한 사고뭉치들을 검거해 서울로 호송하였다. 세 농부는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백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범죄’현장에서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서울의 공인 사진사들을 인력거로 처형장까지 데려와 흥미로운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략) [재인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 2017, 222쪽]

 

여기에서 보듯이 한국주차 일본군대가 저지른 총살형 장면은 이를 은폐하거나 비공개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그 광경을 찍게 하고 그것을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아무라도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배포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본의 군사시설에 해코지를 하거나 자신들의 위력에 감히 맞선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무력과시의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904년 11월 8일에 간행된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10권(박문관 발행)을 보면, ‘한국철도방해자의 처형’이라는 제목 아래 총살형 장면과 관련하여 넉 장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8월 27일 한국 용산 부근에서 우리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하여 체포된 비적(匪賊)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은 9월 20일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1일 오전 10시 마포가도(麻浦街道) 철도답절(鐵道踏切, 철길 건널목)의 좌측 산기슭에서 총살되었다”는 설명 구절이 붙어 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 흩어져 수록된 이들의 처형 장면을 다시 취합하면, 당초에 최소 9매 이상의 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사진들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세 사람을 인력거에 태워 처형장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석 장이고,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어 처형을 하기 직전 상황을 담은 것이 두 장, ‘무릎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두 장, 총살형 집행 후에 군의관이 검시(檢視)하는 광경이 두 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대개 일본인 사진관을 통해 묶음으로 팔려나가 어떤 것은 낱장으로, 어떤 경우에는 서너 장 단위로 지면에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비단 헐버트의 책만이 아니라 근대시기 이 땅을 찾은 여러 서양인 탐방객들이 남겨놓은 여행기나 회고록, 그리고 화보잡지와 같은 종류의 매체에도 이들의 처형장면이 곧잘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이 총살형을 당한 장소는 어디였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공덕리 부근이라든가 마포가도 철도건널목 좌측 산기슭이라든가 하는 구절을 통해 개략적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단서는 사진 속 배경에 보이는 공동묘지의 존재이다.

경의선 철도와 마포행 전차선로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가 ‘도화동 공동묘지’가 있던 장소이다. (<용산시가도>, 1929)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펴낸 「일만분일 경성(1915년 측도)」(1917년 발행) 지도자료를 보면, 경의선철로와 마포전찻길이 교차하는 지점(지금의 공항철도 공덕역 자리) 아래에 작은봉우리 지형이 있고 바로 이곳에 인근 지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공동묘지’의 표시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가 러일전쟁 시기와는 10년가량의 격차가 있으나, 공동묘지라는 것이 금세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한 공간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를 통해 확인한 ‘도화동 1번지’와 ‘도화동 5번지’의 위치이다. 남서쪽으로 인접한 ‘도화동 7번지’구역은 ‘마포연와공장’(지금의 마포삼성아파트 자리)으로 잘 알려진 공간이다.

 

이러한 표시를 염두에 두고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를 뒤져보니, 경성부 용산면 도화동(京城府 龍山面 桃花洞) 1번지(국유지, 745평)와 5번지(국유지, 5,098평)의 지목(地目)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자리가 이른바 ‘철도파괴범’으로 죽은 세 사람의 처형 현장인 것이다. 이곳과 바로 남쪽으로 이웃하는 도화동 7번지(국유지, 13,969평)는 1907년 10월에 준공된 탁지부 연와제조소(度支部煉瓦製造所; 나중에 ‘경성감옥 연와공장’으로 전환)가 들어서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986년에 한불수교(韓佛修交) 100주년과 관련하여 당시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근대 시기 프랑스에서 발행된 화보잡지에 수록된 한국 관련 삽화들을 소개하는 와중에
이들 세 사람의 처형 장면도 함께 널리 알려진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 확인은 물론 처형지에 대한 고증작업도 추진된 바 있었으며, 자연스레 역사학계에서는 3
인의 항거를 일컬어 새로 발굴된 ‘의병(義兵)’ 활동의 하나라는 평가가 내리기에 이른다.

 

1912년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에는 도화동 1번지와 5번지의 지목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6권(2002)에 수록된 ‘마포아파트’ 일대의 항공사진(1965년 3월 8일 촬영)이다. 오른쪽에 길게
둔덕처럼 보이는 것이 경의선 철길이고, 마포아파트 옆쪽에 주택지로 둘러싸여 민둥산처럼 봉우리만 간신히 남은 곳이 ‘도화
동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이다. (ⓒ국정홍보처)

 

이와 아울러 이들의 항거를 기리기 위한 기념조형물에 관한 공론화의 결과로 서울시에서 이
를 건립하겠다고 공표했는데,
????조선일보???? 198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일제에 학살된 세 의
병 기념물 세우기로, 염(廉) 서울시장 “역사교육장 활용”
」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
온다.

 

속보= 염보현(廉普鉉) 서울시장은 29일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우다 학살당한 세 의병의
처형장소에 기념물을 세워, 후손들이 선조들의 의거를 기리고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염시장은 ‘학살된 3의병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각계의 움직임(조선일보 29일자 11면 보도)
에 서울시가 적극 동참, 수난의 역사를 현장으로 후세에 남겨주는 데 일익을 맡겠다고 말
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 문화유적고증위원회에 보다 더 정확한 사실(史實)과 위치의 규명
을 의뢰하고, 시정자문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기념물의 형태를 결정하겠다고 염시장은 덧
붙였다.
또 기념물 설치부지에 대해서는 학살현장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가 주택재개발구역인
만큼, 재개발사업 추진으로 확보되는 공공용지를 활용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염
시장은 그러나 “기념물 설치로 현지 주민들이 재산상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일을 추진
하겠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1991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공적 평가를 바탕으로 김성삼, 이춘근, 안
순서 등 3인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國章)’이 일괄 추서되었다. 그러나 당초 서울
시장이 언급했던 기념물 건립에 관한 약속은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아직껏 완료되
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토, 2019/12/21- 00:38
7
0

새해 정의와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경자(更子)년 새해 민족문제연구소 모든 회원 가족 그리고 남북 8천만 겨레에게 은총 충만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다른 해보다 더 힘들고 소란했습니다. 십인십색이니 서로 다르고 나아가 갈등도 생겨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글귀로 “시시비비위지지(是是非非謂之知)라 하고 비시시비위지우(非是是非謂之愚)”라. 즉 옳은 것을 옳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틀린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시시비비를 가르는 법률적 판단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 당국이, 일상의 삶에서는 정치가 잘 작동해 대안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고 통합하여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한 해는 법과 정치 모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저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반성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시시비비를 가르고 조정해야 할 법과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에 올해에는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 시시비비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설정해 진실과 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부유하고 오만한 재벌들, 전관으로 수억, 수십억을 받아드는 고위 공직자들, 반공과 거짓 자유를 기초로 역사와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때 서로 편을 가르고 적대했고 우리 겨레는 결국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경자년 새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고 남북 8천만 겨레가 한 어머니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구소 가족들과 연구소를 사랑하는 모든 은인, 동지들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1. 함세웅 이사장

화, 2020/01/21- 02:12
0
0

[특집]

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문제 인식

박수현 사무처장 정리

 

일반 시민들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구소는 지난해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주요 결과를 <민족사랑> 경자년 새해 1월호 특집기사로 싣는다.
이 조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한국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시대정신에 맞는 공익적・미래지향적인 친일청산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친일청산 문제가 핵심이지만, 이슈가 되는 다른 과거사문제도 설문조사에 포함했다.
설문조사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조사방법은 웹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는 성별・연령별・지역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40여 항목이며,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크게 4가지다. (1)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2)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3)<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4)기타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등이다. 다음은 주제별 주요 설문결과와 분석 내용이다.

 

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시민 10명 중 8명, 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 가장 미흡한 분야는 정치, 경제, 교육 순

시민 대다수는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친일파 처벌은 물론 일제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답했다. 민주화 이후 친일청산운동이 꾸준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조차도 대다수 시민들은 체감하지 못했거나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친일청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친일청산이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한 분야(중복 허용)는 정치 75.8%, 경제 53.9%, 교육 47.4%, 언론 44.7%, 사법 43.7%, 군경찰 43.4% 순이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일파를 과거의 역사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 현실 정치와 연계해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주관식)에 ‘자유한국당・’ ‘아베’ ‘나경원’ 등의 답변이 높은 빈도수를 차지했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주관식)에 대해서도 ‘나경원’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의 정치인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시민 10명 중 7~8명,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 … 더욱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7명(72.2%)이 개인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로 평가했으며, 지금까지 친일파를 옹호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1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시민 10명 중 8명(82.7%)이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을 더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81.3%)이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도층 친일인물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더라도 친일행위를 했다면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6명(65.6%)으로, 서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친일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에 과반이 약간 넘는 사람만이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58.2%)을 보여, 다른 분야의 친일 지도층에 비해 비판의 강도가 낮았다. 이는 문화예술계 인물과 작품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효과와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친일인명사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조 …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지도층 인사의 수록은 적절.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젊은 층일수록 낮아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사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9.7%였지만,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78.8%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인지도는 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사전 평가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사전이 친일문제를 공론화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의견에 62.3%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에 62.1%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의견에 62.7%가 동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지도만으로 사전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전에 대한 사회적 평판,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김활란・이광수・최남선・장면・유치진・홍난파・현제명 등 유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그동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은 이들이 사전에 수록된데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층도 사전 수록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거나 찬반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는 사전 수록에 대한 보수층의 의견이 찬성 32.4%, 반대 50.1%, 모름 17.5%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반대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우상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이 조사 결과는 박정희 평판에 대한 보수층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시민 27.6%가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름만 들어봤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65.5%였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의 이념성향별 분포다. 진보층 40.4%, 보수층 25.5%, 중도층 22.1% 순으로 진보층이 가장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보수층은 중도층보다 연구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일수록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34.4%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33.1%, 40대가 26.6%, 30대가 25.8%, 그리고 19~29세가 13.8%로 가장 적었다. 특히 19~29세의 인지도는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소의 장기적인 활동 방향이나 전망과 관련해 반드시 참고 해야 할 내용이다.
연구소를 알게 된 계기 및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이어 친일인물 훈장 취소, 교과서 왜곡 및 국정화 반대운동, 친일인물 기념사업 반대 등의 순이었다.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과거사문제 해결이 사회통합과 발전에 도움.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아,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해야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도 설문조사를 했다. 우선 과거사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5.8%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상당수 시민들이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52.7%),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해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51%)이 그 다음이었다. 또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 왜곡(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64.1%)이 가장 많았으며, 친일 진상 규명(35.1%), 시민 홍보(29.3%), 역사교육 강화(26.3%)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서는 38.2%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11.1%만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나 뉴라이트의 영향력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시민 10명 중 7명(70%)은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처럼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과거사 왜곡과 폄하에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 2020/01/21- 02:41
0
0

[초점]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 개최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12월 13일 한일공동심포지엄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를 개최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두 번째 기념학술회의였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현상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진행하는 자리였다.


서경식 교수(일본 도쿄경제대)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과 리버럴 세력의 자기붕괴 내지 변질을 비판적으로 역설했고, 조경희 교수(성공회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과 핵심 아젠다를 짚었다. 이진일 교수(성균관대)는 독일의 홀로코스트부정과 같은 역사수정주의의 전개과정을 발표해 일본의 역사부정 현상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강성현 교수(성공회대)는 뉴라이트의 등장과 역사교과서 파행을 거쳐 ‘반일종족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의 역사부정 현상을 정리하고,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과 한국 뉴라이트의 연대를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표에 대해 권혁태 교수(성공회대), 이동기 교수(강릉원주대),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서대교 기자(코리안 폴리틱스)의 토론이 이어졌다.
또 하나의 논점은 역사수정주의, 역사부정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문제였다. 홍성수 교수(숙명여대)는 한국의 ‘역사부정죄’ 논의와 법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마에다 아키라 교수(일본 도쿄조형대)는 ‘헤이트 스피치(차별혐오발언)’에 대한 일본의 법적 제재 움직임을 발표했다. 토론은 이재승 교수(건국대)와 이상희 변호사(민변)가 맡았다. 역사부정죄 제정과 법적인 처벌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논의되는 자리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문제를 역사적 사실로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고민하는 발표도 있었다. 연구소 김승은 학예실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분석, 검토해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진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연구소 노기 카오리 연구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른바 ‘메이지산업유산’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지방 정부, 시민사회의 입장과 그 변모 양상을 정리했다. 토론에 나선 히구치 유이치 선생은 일본 내 강제동원피해자의 증언 수집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고, 야노 히데키 선생은 메이지산업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조사 연구하여 반영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평일인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종일 이어진 학술회의임에도 많은 학자와 시민들이 참석했다.
‘반일종족주의’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한일공동심포지엄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역사부정 또는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에 부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화, 2020/01/21- 02:49
0
0

[초점]

2019년 일제잔재 청산 움직임이 활발했던 학교 현장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전국의 여러 교육청과 교육단체들은 학교 현장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조사하고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남교육청은 작년 12월 16일 순천만생태문화교육원에서 학교장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도교육청은 지난해 4월부터 전문가그룹이 참여한 가운데 전수조사를 벌여 도내 169개 학교에서 일제 양식의 각종 석물과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무늬나 휘장), 친일음악가 작곡 교가, 일제식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등 175건의 친일잔재를 확인했다.

확인된 친일잔재는 일제 양식의 석물 34건, 친일음악가 제작 교가 96건, 학생생활규정 33건, 욱일기 양식의 교표 12건 등이다. 그 결과 석물 16개가 놓여 있는 현장에 친일잔재임을 확인하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이는 해당 석물이 일제식민통치 협력자의 공적비이거나 일제식 양식임을 알려 학생들의 역사교육에 적극 활용토록 하기 위함이다.

친일음악가가 제작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14개 학교에 대해서도 예산을 지원해 교가를 새로 제작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친일잔재 용어가 포함된 학생생활규정 전체를 수정·보완했고 욱일기 양식의 교표도 시대에 맞게 학교 자체적으로 8개교가 수정 보완했다. 도교육청은 앞으로도 일제식 석물 안내문 설치, 새 교가 제작 등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역대 교육감 중 친일 또는 항일 행적이 뚜렷한 사실에 대해서는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탑재할 계획이다.

광주광역시교육청도 12월 26일 관내 초·중·고·특수학교장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현장 일제잔재 조사 및 청산 사업 성과보고회’를 열었다. 교가의 경우 친일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 14개교 중 6개교의 교가가 교체·완료됐으며 일본 음계, 군가풍 리듬, 7.5조 율격, 선율 오류 등의 교가를 사용하고 있던 5개교의 교가도 교체됐다.

아울러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문양의 교표를 12개교에서 교체했고, 끝이 뾰족한 일본 충혼비 양식의 석물 3건에 대해서도 안내문을 설치하여 교육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성과보고회에 참석한 이재남 정책국장은 “친일잔재 청산사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확산되어야 한다”며 “올해는 학교상징물인 교가, 교표, 석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앞으로는 학교문화 속에 남아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부산, 울산, 경남의 경우는 학부모단체가 앞장섰다. 교육희망경남학부모회(대표 전진숙)는 경남지역 1,656개 초‧중‧고교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10월 23일 경남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 동안 학교 홈페이지와 현장 조사를 벌여 이를 파악했다. 전진숙 대표는 “친일잔재가 학교 안에 의외로 많다. 그리고 교화와 교목, 교가, 교훈이 시대에 맞지 않고 차별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했다.

교육희망 울산학부모회는 10월 22일 울산시교육청 프레스센터에서 ‘학교상징으로 본 일제잔재와 성차별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9월 한 달간 초등학교 119개, 중학교 63개, 고등학교 57개, 특수학교 4개 등 총 243개 학교의 교표, 교화, 교목, 교가 등을 모두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지난해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소속 단체들이 자치구를 나누어 초, 중, 고등학교의 교화, 교목, 교가 등을 중점 검토해 8월 12일 부산시교육청앞에서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잔재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2:53
1
0

[초점]

서울시교육청 2019하반기 교원 특수직무연수 실시

연구소는 2020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전국 초·중등 교원을 대상으로 특수직무연수를 실시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과 상설전시관, 효창공원에서 진행한 직무연수에는 서울, 경기, 강원, 울산, 전북 등 전국의 초·중등교사와 교육연구사들이 참여하여 역사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직무연수는 왜 아직도 ‘친일청산’인가라는 주제로 박수현 사무처장 등 연구소 상근연구자와 한철호 동국대 교수 등 외부 전문강사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유형과 활동을 설명하고 최근의 뉴라이트의 공세로 뜨거워진 ‘기억투쟁’ 등을 분석하는 등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책임윤리와 정의에 대한 이해력과 감각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마지막 강의일인 10일에는 참가자와 진행요원, 내부 상근연구자가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친일문제와 역사교육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직무연수중인 교사 세 분이 신규로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주었다. 또한 연수 종료 직후 참가 교원들에게 연수이수증을 수여했는데, 연구소에서 발간한 <내일을 여는 역사> 76호와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도 함께 증정하였다.

이번 교원특수직무연수 진행은, 지난해 봄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자유시민대학> 캠퍼스로 지정되어 시민역사교육의 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데 이어 교원 특수직무연수기관으로 발돋움하여 앞으로 내실 있는 역사실천운동을 벌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1/21- 02:58
0
0

[초점]

광동지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 주관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라는 부제의 이번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가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 5일 동안 진행됐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연구소 광동지부(지부장 김유, 사무국장 박호균)가 주관한 이번 답사는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과 조선인 혁명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일반적인 역사 답사의 경우 현지 여행사를 통해 진행하는 데 비해, 이번 답사는 광동지부 소속 회원들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숙박, 식당, 버스 등을 예약했고 가이드 역할까지 전담해 참가비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지부 회원들은 주말과 연차를 이용해 <아리랑>과 <김산평전> 그리고 중국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 서적을 펴들고 직접 김산과 혁명가들의 길을 따라가며 답사 코스를 개척했다.

당초 답사 참가인원을 20명으로 공지했으나 약 60명이 신청하여 최종적으로 34명으로 답사단을 꾸렸다. 답사단원들은 지역, 직업,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해 다양하게 구성했는데 특히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상윤 선생(1897~1927)의 손자인 김기봉 전 광복회 서울강북지회장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의 손녀인 김춘련 현 요녕민족사범고등전문대학 교수 등이 참여해 답사의 의의를 높였다.

그동안 연구소는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로 매년 여름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해왔는데 답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추가 답사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따라서 이번 광동지역 답사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1/21- 03:02
0
0

[인터뷰]

‘아리 랑 로 드 ’에 선 사람들 – 중국 광동지부를 가다

 

김해규 후원회원(평택한광중 교사)

 

김산의 아리랑로드 답사에 함께 한 필자 김해규 회원, 박호균 사무국장, 주동욱 회원(왼쪽부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공통점은 ‘희생’과 ‘헌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희생과 헌신의 기저에는 명료한 역사의식이 요구된다. 2019년 5월 중국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
동지부(지부장 김유)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2020년 1월 광동지부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아리랑로드를 가다’라는 광동지역 독립투쟁 유적답사를 주관했다. 이글은 광동지부와 회원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년 광동지부가 걸어온 투쟁의 서사다.

 

독립투쟁의 성지에 광동지부가 창립되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2019년 5월 창립했다. 광동(廣東)지역은 만주, 상하이와 함께 독립투쟁의 성지(聖地)이며, 중국역사에서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 근대사상가 캉유웨이,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배출한 역사적 고장이지만 중요성에 비해 덜 주목받았고 덜 연구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김유가 광동지부의 창립을 고민했고 박호균이 이에 호응했다.
광저우 한인사회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형성되었다. 대부분 회사 주재원이거나 사업 때문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교민들은 민주평통자문위원회를 비롯해서 다양한 모임을 갖고 있었지만 진보적 역사의식을 공유한 단체는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광동지역 등산모임과 2018년에 창립한 ‘광동포럼’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 등산하며 친목을 나누었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장이 당연직으로 민주평통자문회의 부회장을 맡으며 영향력을 과시했고 정부(총영사관) 주도의 각종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8년 민주평통자문회의 광동지부가 주최한 통일강연회는 그동안 유지되었던 밀월관계에 균열이 가게 했다. 몇몇 인사들은 교민들의 교양강화를 위해 ‘광동포럼’을 결성했고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 창립’을 도모했다.

김유 지부장과 ‘아리랑로드 답사’

 


광동포럼은 최철호 씨가 주도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가 깊이를 추구하는 단체라면 광동포럼은 역사문제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업이나 생활과 관련된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대중조직이라고 정의했다. 광동포럼은 창립 직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을 초청하여 한국독립운동사 강연을 개최했다. 또 개성공단지원협력관리위원장을 지낸 김진향 박사를 초청하여 개성공단의 불편한 진실과 통일문제, 남북경협에 관한 두 차례의 강연도 열었다.
KBS스페셜 ‘헤로니모를 찾아서’의 판권을 구입하여 교민 대상으로 무료상영도 했다.
하지만 광동 일대에 뿌려진 전사들의 피땀 어린 독립투쟁사를 발굴하여 교민사회에 친일잔재청산의 당위성과 역사의식을 불어넣고 싶었던 김유와 박호균은 ‘광동포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창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등산모임과 각종 단체 활동을 통해 교류했던 김유, 박호균이 중심을 이뤘고 신광용, 최철호, 배상철이 적극 가담했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어떻게 회원 중에는 등산모임 멤버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에, “등산과정에서 서로의 성향과 생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동지부는 김유가 초대 지부장, 박호균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광동지역 교포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기에 한 번씩 독립운동유적 답사도 실시한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를 위해서는 김유, 박호균뿐 아니라 신광용, 배상철 회원의 역할이 컸다. 수차례의 학습모임과 무려 5차례의 현장답사도 실시했다. 이번 답사에 활용된 유적들 가운데 상당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고 현장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성과물이다.

투쟁정신으로 녹록치 않은 상황을 극복해

광동지부장 김유(1955년생)는 사업가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경에 입사하여 해외근무를 많이 했다. 1995년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광동성 동관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무척 잘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1992년에 인연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의 명칭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김유 지부장이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려대 학교에 입학해서다. 당시 학장이 역사학자 김준엽 교수였는데 “학생은 왜 고대에 입학했나?” 라는 질문에 “선생님 뵙고 싶어 입학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학 내내 역사학에 관심을 두었고 졸업할 때는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박호균 사무국장

신광용 씨

 

생업 때문에 미뤄뒀던 독립운동사에 대한 갈증은 광동지역 동관에 정착하면서 다시 발현되었다. 사업이 순탄하고 생활이 안정되자 2000년 초부터 광동일대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를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은 한국인으로 광동지역 독립운동유적이 정비되기 전에 답사한 것은 본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관심에만 머물렀던 독립운동사를 사회적으로 확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2018년경 갖게 되었다.
2019년 초 사업에서 은퇴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을 다짐하고 평소 교분을 나눴던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동지역 교민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신광용, 최철호 씨도 함께 했다. 이번 독립운동가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도 김유 지부장이 제안했다. 광동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 가운데 김산(본명 장지락)은 중국과 한국, 북한에서 모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김유 지부장은 올해 경희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지금껏 발품을 팔며 조사하고 연구한 것을 신문과 잡지에 싣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열혈남 박호균(1964년생)은 광동지부 사무국장이다. 부산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그가 광저우로 이주한 것은 2009년이다. 지인이 운영하던 나이키 협력업체의 현지 주재원이었다. 4년반을 근무한 뒤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김유 지부장과는 동관등산회를 통해 만났다. 몇 년 동 안 광동지역 명산을 누비며 새로운 등산코스를 개발하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박호균은 등산모임을 통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뜻을 읽었다고 말했다. 2018년 후반 김유 지부장이 광동지부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등산모임에서 뜻이 맞았던 사람들에게 회원가입을 권유했다. 그렇게 광동지부가 탄생했다.
현재까지 가입한 회원은 19명이다. 초기에는 월 1회 모임을 추진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근래에는 모임을 적게 하고 인터넷이나 위쳇으로 소통한다. 박호균 씨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김산과 광동지역독립운동에 관심 갖게 됐나요?” 필자의 우문에 박호균 씨는 ‘미안
함’ 때문이라고 답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미안함, 친일잔재청산에 동참하지 못했던 부채의식이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근원이란다.
광동지부에는 김유, 박호균 외에도 17명의 회원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답사준비에 동참한 회원도 있고 형편에 따라 잠시 짬을 내서 참가한 회원도 있다.
신광용(1958년생) 씨는 노동자 출신이다. 10대 어린나이에 청계천 평화시장에 취업하여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수형생활도 했다. 섬유사업을 시작했다가 국내 여건이 나빠지면서 몽골을 거쳐 광저우에 정착했다. 광저우에서는 산악회를 비롯해서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신씨가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에 참가한 것은 2018년에 개최된 민주평동자문회의 강연회가 계기가 되었다. 광동지부 창립 후에는 박호균 사무국장과 함께 독립운동유적 발굴 및 각종 활동에 앞장섰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 준비와 모든일정에도 그의 애정과 열정이 담겼다.
장두인 씨는 재일교포 3세로 ㈜혼다의 광저우 주재원으로 광동지부 회원이 되었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활동으로 민족문제에 새로이 눈떴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회원활동을 할 생각이다. 이은교(여, 1966년생) 씨는 광저우의 모 대학에서 한국어교수로 일한다. 6년 전 취업 때문에 광저우로 이주했다. 등산모임에서 만난 박호균 씨가 ‘역사와 관련해서 독서하고 답사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회원으로 가입했다. 평균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하는 독서모임과 답사는 항상 즐겁고 화기애애하다.
이혜정(여, 1970년생) 씨는 10여 년 전 광저우로 왔다. 근무했던 회사가 광저우로 이전할때 6개월 동안 출장 왔던 것이 계기다. 그에게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단체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등산모임에서 박호균 사무국장을 만나 광복절행사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씨는 아직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지만 각종 모임에는 뜻을 같이한다. 하루뿐이었지만 이번 ‘아리랑 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동참했다. 이민우(1960년생)씨도 회원가입을 하지 않았지만 지부활동을 돕는 특급 도우미다. 이번 ‘아리랑로드를 가다’ 답사에도 마지막 1박 2일을 동행하며 사진촬영을 도맡았다.

뒤편에 장두인, 이은교 씨(왼쪽)

사진촬영을 담당한 이민우 씨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는 아직 젊다. 앞으로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김유지부장은 향후 일정기간은 회원확대보다 내실을 다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호균 사무국장도 본업에 충실하며 미완성의 아리랑로드를 착실히 보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 쪽 인사들과 학문적, 인적교류도 확대할 것이며, 김산 선생의 후손을 초청하여 연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유 지부장은 양세봉 장군 유적답사에도 관심이 많다. 박호균 사무국장은 국내 회원들을 대상으로 1년에 2회 정도 ‘아리랑로드’ 답사를 개최할 계획도 갖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의 ‘청년백범’ 담당자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향후 답사를 주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리랑로드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필자는 김유 지부장과 박호균 사무국장에게 부디 ‘건강하시라’고 당부했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토록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친일잔재청산에 노력해달라는 당부였다.

화, 2020/01/21- 03:23
1
0

[기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보자!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일러스트 작가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작년 12월, 3년 만에 서울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친구이자 가족처럼 지내는 김영환 씨가 활동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 시내에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별로 없어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스마트폰 지도를 보여주며 향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에는 꽤 가파른 비탈길이 있습니다. 상쾌한 날씨여서 다음번엔 지하철로 천천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가고싶은 곳에 있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는 한글과 영어로 박물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Museum of Japanese Colonial History in Korea.
’ 왠지 꾸밈없는 이 이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이 역사에 대해 정부의 방침에 휘둘리듯 에둘러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역사임에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피해왔습니다. 동시에 100여 년 이상 전에 시작된 이 고통의 역사가 내가 살고 있는시대에 이렇게 교류와 배움의 공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현관문을 열자 1층 공간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가 특별전시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2층의 상설전시장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한국 학생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전시를 접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전시 설명은 대부분 한글로 쓰여 있지만, 일본어 가이드북이 있어 참조하면서 순서대로 전시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왜 조선을 침략했는가?”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 표제. 그 아래설명은 구미를 필두로 세계적인 식민지화와 노예제도 등의 움직임 속에서 일제에 의한 침략이라는 문맥으로 짧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침략의 역사를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 사이의만의 문제로 생각하여 그 역사를 접한 우리들 개인까지가 피해와 가해라는 범주로 이분화되어버리는 일이 많은데, 이 설명에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나누지 않고, 책임의 근본에 있는 구조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 자료와 유물은 내용으로도 양적으로도 충실합니다. 특히 조선 전역에 수없이 있었던 경찰서에 관한 사진과 문헌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신사(神社)의 설치도 그렇습니다.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폭주한 아시아 침략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창씨개명과 천황숭배 등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위해 비참하고 비인도적인 방법이 이용되었습니다. 최근에 주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인종차별, 토지약탈, 성차별 등의 폭력을 이용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문헌을 다소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을 떠올려보면, 일제의 지배로 인한 인간의 비극은 단지 우연처럼 ‘일어났다’가 아니라 필요한 폭력으로 자본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고 지배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의 분단을 명확히 확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표현한 사람들은 경찰의 과도한 단속을 받은 것이 자본과 국가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지배의 구조는 지금 사회에도 줄곧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본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자국이 내건 경제대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내셔널리즘적인 사상이 고양되고 외국인과 소수자가 된 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전시 후반에는 식민지시대에 목숨을 걸고 일본에 저항한 사람들과 최근의 다양한 운동에 관한 소책자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저항사(抵抗史)를 접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기억을 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내용을 조금 쓰고 싶습니다. 전시 가운데에 ‘한 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이란 작은 코너가 있습니다. 낡은 목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심문관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어 감옥의 심문실을 재현한 듯합니다. 몇 개의 단추를 누르면 심문내용을 재현하여 녹음한 음성이 흘러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3·1운동 당시 잡혀온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번역문이 비치되어있어 귀중한 체험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역시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에 가장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한국에서 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생과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박물관 자체는 평가하지만 심문 장면의 그 전시는 약간 지나치지(표현의 지나친 극화) 않은가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이해할 수 없어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전시가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사람들의 체험을 제3자가 전하고자 할 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조금 과장해서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심문 장면은 실제로 식민지 시대의 정부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연극의 퍼포먼스와 달리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떤 표현이 가장 좋은것일까요. 역사로부터 배운 것을 오늘의 운동에 살리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이러한 개인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자료와 구조적 폭력을 분석한 자료가 함께 있어 귀중한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에 관계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씨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출신. 1997년 홋카이도 슈마리나이(朱鞠內)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한 한일공동워크샵(현재 동아시아워크샵)에 참가했고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는 뉴욕에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화, 2020/01/21- 03:29
0
0

[후원회원마당]

강원 영동지역에서는 정말 독립운동을 안 했을까?

김인성 후원회원(MBC강원영동 기자)

 

지난해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이었습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그야말로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며 우리 정부와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슈들이 쏟아졌습니다. 언론에서도 의미 있는 보도와 프로그램을 연이어 쏟아냈죠. 저도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월 1일 강원영동’을 방송했었고, 11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동안 영동지역의 항일운동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엔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을까요? 아니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을까요?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20년 1월 현재 15,825명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은,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공식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 30명이 1962년 가장 높은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까지 7종류의 훈장을 15,825명이 받은 겁니다.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백성이 없었을 텐데 고작 15,000여명만 인정하는 정부의 서훈 정책이 옳은 거냐고 묻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있습니다.(MBC강원영동 ‘뉴스데스크 강원’ 2019년 12월 31일.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사 재정립 원년으로’ 참고) 이렇게 서훈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직계가족이 독립운동 행적을 문서로 입증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면 소요죄, 보안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등 특정한 죄목을 적용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때 ‘문서’란 바로 체포된 죄목과 어떤 활동으로 체포됐는지를 알 수 있는 일제 검경으로부터 수사를 받은 기록, 기소로 이어져 재판을 받은 뒤 나온 판결문, 그 판결에 따라 형무소에 갇혔던 수형기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입증되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강원 영동지역은 이렇게 문서로 증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증명해야 할 문서를 생산했을 기관이 함흥과 원산, 그러니까 지금의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원과 검찰은 함흥지방법원에, 형무소는 함흥과 원산에 있었는데 그렇다보니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할 문서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동지역에서 가장 거센 항일운동이 펼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을 제외하곤 3·1 만세운동 관련 독립운동가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1990년대 중반에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강릉의 만세운동 기록이 발굴되며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나마 다른 지역의 경우는 지금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양양도 오로지 3·1 만세운동만 알려져 있고, 다른 항일운동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또, 3·1 만세운동도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시 함흥지방법원에 근무하던 일본인 검사 이시카와 노부나가의 수사기록을 10년쯤 전 우연히 일본에서 발굴해 지난해 10월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했습니다. 당시 국내 각종 기관과 일본의 도서관 네트워크 등을 통해 ‘함흥’이란 키워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적하고 있던 저는 ‘3·1 만세운동 100주년, 도쿄에서 함흥까지’란 제목의 이 세미나 개최 소식을 듣고 개인휴가를 내고 찾아가 들었습니다. 그리곤 그 자료에서 양양군 기사문리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함흥이란 지역이 일제강점기 내내 강력한 항일운동이 이어졌던 곳이어서 발견된 자료에도 대부분 함흥지역의 체포자들에 대한 기록이었지만 딱 한 건, 양양의 기록이 나온 겁니다.

2심 재판인 복심 재판 기록이 경성지방법원에서 나오거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기록이 나오거나,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확인한 게 아닌 영동지역의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검거 직후의 수사기록이 발견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 한 달간 여러 가지 데이터 분석과 독립운동가 단체와 후손들에 대한 취재를 이어간 뒤 11월 4일 ‘뉴스데스크 강원’ 시간을 통해 첫 번째 보도를 했고, 이후 다행히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러시아 연수 과정에 선발돼 러시아 취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그 결과 11월 4일부터 12월 31일 보도까지 모두 16건 보도했습니다. 보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일본인 검사의 3·1 운동 수사기록 최초 발견 – 2019. 11. 04
2. 일제 검사 수사 자료에 독립운동가 후손 관심 – 2019. 11. 05
3. 영동지역에 독립운동 자료 적은 이유 – 2019. 11. 07
4. 영동지역의 독립유공자 수는 정말 적다! – 2019. 11. 12
5. 독립운동 행적 찾아도 서훈 받기 어려워 – 2019. 11. 14
6. 서대문형무소에서 실마리 찾을 수 있다! – 2019. 11. 21
7.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의 13.7%만 서훈 – 2019. 11. 22
8. 일제강점기 범죄인명부 전수조사 – 2019. 11. 29
9. 향토사연구소가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 – 2019. 12. 06
10. 해외에서 활약한 강원도 의병 찾아야 – 2019. 12. 13
11.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 – 2019. 12. 18
12.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흔적 찾기 – 2019. 12. 19
13.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 – 2019. 12. 20
14. 강원도가 고향인 고려인들 – 2019. 12. 26
15. 영동지역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 2019. 12. 27
16.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史 재정립 원년으로 – 2019. 12. 31

강원 영동지역에서 독립운동가를 새로 찾아내기 위해선 실제로 실행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선행돼야 합니다. 정부가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북한과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또,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이시카와 검사의 수사기록을 통해 저는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지만 이는 그대로 북한의 입장에선 함흥지역의 항
일운동을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남북이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남북이 힘을 모아 일본과 러시아, 중국의 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이를 원해야 하고, 남북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는 등의 또 다른 전제들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를 통한 독립운동가 발굴을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가 뱃길로 연결돼 있었고, 1860년대부터 이주가 시작돼 연해주에는 많은 우리 국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가 벌어져 우리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조국과 고향, 우리말과 글을 잊은 채 살게 됐습니다. 광복 이후 서둘러 이 사람들을 찾아나섰어야 했지만 냉전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적성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한 채 오랜 세
월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도 살고 있지만 국내에도 고려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그들을 통한 독립운동 역사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마침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양국이 좀 더 적극 나서면 좋겠습니다.
영동지역에선 정말로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일까요? 정부와 지역사회, 한국과 주변국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들과 국내에 사는 고려인들이 모두 힘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면 좋겠습니다. 백수십 년의 세월을 초월해 힘과 지혜를 모아 그때 그 우리의 처절했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수, 2020/01/22- 01:01
0
0

[식민지비망록 54]

일본 개신교의 가마쿠라보육원으로 변신한 후암동 ‘전생서’ 옛 터
결국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힌 소다 카이치 원장

이순우 책임연구원

전의감(典醫監), 전옥서(典獄署), 전원국(典圜局), 전선사(典膳司), 전설사(典設司), 전생서(典牲署), 전교서(典校署), 전농사(典農司), 전연사(典涓司), 전비사(典備司), 전함사(典艦司)등등 ……
.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전(典)’자 돌림으로 시작하는 조선시대의 관아 명칭이다.

‘전’이라는 것은 “무엇 무엇을 관장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전생서’의 생(牲)은 우리가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관용구에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데, 이는 곧 여러 제향(祭享)에 쓸 희생(犧牲, 제물로 바칠 짐승)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는 전구서(典廐署)가 설치되어 이 일을 맡았으나, 세조 때에 이르러 이곳이 ‘전생서’로 개칭된 것으로 알려진다.
순조 때의 인물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전생서의 항목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전생서는 숭례문 밖 남부 둔지방(南部 屯智坊) 목멱산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창설하였고, 희생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정청(正廳)은 간줄헌(看茁軒)이라 하며, 곁에 연못이 있어 정자를 일컬어 불구정(不垢亭)이라 한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의 간줄헌기(看茁軒記)가 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에는 양(羊)이 없으나 이곳에서만 양과 고력(羖䍽, 흑염소)을 길러 제향에 공급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염소만 있고 양이 없다고 한다. 생우(牲牛)로는 종묘(宗廟)에는 검은 소를 쓰고, 문묘(文廟)에는 성(騂, 붉은 소)을 쓴다.

 

이곳 전생서는 도성 남쪽 일대에서는 유달리 그 존재감이 두드러진 곳이었으므로, 두텁바위(蟾巖, 두껍바위)에서 유래한 후암동(厚巖洞)이라는 지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전생동(典牲洞)의 사용빈도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1914년 4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 당시 일본식 지명인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구역은 종전의 ‘갈월리(葛月里) 일부’와 ‘전생동’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더구나 전생서 앞을 지나는 길은 한강나루로 이어지는 주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 ‘성문분로(城門分路)’에 표시된 내용에 따르면, 서울 도성 숭례문에서 벗어나 부산 동래(4대로)를 향하는 이들이 거쳐야하는 행로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숭례문 남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주교, 청파역, 석우참까지 4리이다. ○ 석우참 동남쪽으로 둔지산을 지나 서빙고진에 이르기를 6리(한강진 아래에 있고 숭례문에서 10리 거리)이다.
(4대로를 보라) ○ 이문동에서 도저동을 경유하여 남묘, 이태원을 지나 곧장 서빙고에 이르는 것이 이것의 지름길이다. (崇禮門南經里門洞舟橋靑坡驛石隅站四里○石隅站東南經屯之山至西氷庫津六里在漢江鎭之下卽漢江津距崇禮門十里○見四大路○自里門洞由桃楮洞經南廟利泰院直至西氷庫此捷路)

 

여기에서 보듯이 동래 방향으로 내려가는 행로는 본디 청파배다리, 돌모루, 둔지산을 거쳐 서빙고나루에 닿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 남묘와 이태원을 거쳐 바로 서빙고로 가는 샛길이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경우 남묘 앞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우수현(牛首峴, 雨水峴)을 넘어오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전생서 앞길을 거쳐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숭례문을 빠져나와 남묘, 이태원을 거쳐 서빙고에 이르는 전생서 앞길(지름길)의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전생서는 갑오개혁 당시 궁내부의 종백부(宗伯府) 소관이 되었다가 이내 혁파(革罷)되었고, 희생을 기르는 일은 1897년 1월 29일 이후 봉상사(奉常司)의 소임으로 넘겨졌다. 그러다가 1902년 4월에는 포달(布達) 제82호를 통해 궁내부 소속 직원으로 내장원 전생과(內藏院 典牲課)를 증치(增置)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흔적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옛 전생서 터는 본격적으로 공간해체의 위기에 몰리는 상황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1911년 11월 29일 기사에는 “중부 황토현 기념비각(記念碑閣), 북부 관광방 옛 도서과(元圖書課) 및 부속지, 남부 둔지방 전생서 기지(典牲署 基址), 중부 황토현 옛 기로소(耆老所) 토지 건물이 총독부에 인계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7월 11일자에 게재된 ‘불필요 관유재산 입찰불하공고(不必要 官有財産 入札拂下公告)’의 내용을 보면, 여기에 전생서 터에 포함된 토지와 건물 일체가 매각대상에 나왔던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 표시된 택지면적(宅地面積)을 단서로 살펴볼 때 ‘ 삼판통 370번지(1,028평, 국유지)’가 전생서 터였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부속지로 표기 된 곳이 어딘지는 아쉽게도 구체적인 지번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元 典牲署) (조서 제328호)
一 택지면적 1,078평(坪) 2합(合) 8작(勺)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9동(棟), 136평 6합 8작
경성부 용산 삼판통 원 전생서 부속(附屬) (조서 제330호)
一 택지면적 232평 5합 7작
이 자리 안에 있는 조선식 기와건축은 2동, 33평 6합 6작

 

<매일신보> 1914년 7월 12일자에 수록된 ‘관유토지건물 입찰불하공고’ 내역에는 옛 전생서 터와 부속지에 대한 내용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때의 공매처분은 응찰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인지 끝내 무산되었고, 그 후 1917년에 이르러 무상대여의 형태로 이곳을 차지한 주체는 일본 기독교 계열의 사회사업기관인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財團法人 鎌倉保育園 京城支部)’였다. 이 단체의 연혁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편, <조선사회사업요람(朝鮮社會事業要覽)>(1924)에 잘 기술되어 있다

 

재단법인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 소재지 : 경성부 삼판통 370번지
△ 설립 : 대정 2년(1913년) 8월 11일
△ 연혁 : 본원(本園)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보육원의 지부이다. 원주(園主) 사타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는 대정 원년, 2년(1912, 3년)에 걸쳐 조선시찰의 결과 신개지(新開地)에서 고아구제(孤兒救濟)의 필요를 느끼고, 동 2년(1913년) 8월 본부 출신의 남녀 2명씩을 동반하여 경성으로 와서 장곡천정(長谷川町, 지금의 소공동) 일본기독교회(日本基督敎會)에서 결혼을 시키고 곧장 한 부부를 남만주 여순(南滿洲 旅順)으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보육(保育) 및 개간(開墾)의 사업을 개시하도록 했으며, 다른 부부를 당지(當地)에 남겨 지부를 창설하도록 했다. 부부, 즉 전 주임(前主任) 사타케 곤타로 부처(佐竹權太郞 夫妻)는 한강통(漢江通) 삼각지(三角地) 부근에 협소한 집을 빌려 사업을 개시하
였는데, 이보다 앞서 인천(仁川, 내지인)으로부터 소아(小兒) 5인에 대한 구호신청이 있어서 사업개시와 동시에 이들을 인수하여 양육하여 왔으나 지부의 방침은 오로지 조선인 고아의 수용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이들 내지인 아동은 가마쿠라 본부로 옮기고 그 후 조선인만의 수용에 주력하였다. 대정 4년(1915년)에 이르러 한강통 일본기독교회의 신축 이전에 따라 그 터를 빌려 이전하였다. 당시 가족(家族; 본원은 고아 및 종사자를 전부 일가족으로 부른다)은 21명이다.
대정 6년(1917년) 8월 총독부에게서 경성 삼판통 옛 한국정부 전생서 터의 토지가옥을 무상대하(無償貸下)를 얻어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자리는 천여 평의 면적을 지녔고, 커다란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산(南山)의 남록(南麓)에 있어서 조망이 좋아 대단한 건강지(健康地)여서 이 사업을 위해서는 실로 천여(天與)의 호적지(好適地)이다. 후에 가옥을 수선하고 증축하여 대정 7년(1918년) 경성부에서 수용 구호했던 빈아(貧兒)와 기아(棄兒)의 양육업무를 넘겨받아 해마다 사업을 확장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씨 부처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하략)

 

이곳에서는 경성부에서 맡겨지는 조선인 아동들을 양육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았다. 여기에는 고아(孤兒, 홀로 된 아이)뿐만이 아니라 미아(迷兒, 길 잃은 아이)와 기아(棄兒, 버려진 아이)도 포함되는데, 서울 지역에서 해당 사례가 발생하면 대개 이곳 가마쿠라보육원이나 ‘옥천동 126번지’에 자리한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1920년 1월 3일 창립)으로 나뉘어 수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7)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에 ‘간줄헌(看茁軒)’ 편액이 또렷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옛 전생서 건물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소다 카이치 내외가 가마쿠라보육원 원생들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옛 전생서의 정청(正廳)이다. (조선총독부, , 1935)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탐방기사에는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 고아들이 죄다 일본 복장에다 조선어는 잊어버린 상태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당시는 아직 전생서 터를 무상 대여하기 전이므로, ‘일본기독교회 터 (한강통 13번지)’에 있던 시절의 모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매일신보> 1916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일본화(日本化)된 가련아(可憐兒)」 제하의 보육원 탐방기사를 통해 또 다른 운영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지나간 8일에 경기도청에서 다년 자선공공에 종사한 점으로 표창된 용산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씨를 방문하여 씨의 다년 진력하여 오던 소아보육 사업을 구경 갔더니 마침 사타케 씨는 집에 없고 부인이 정답게 면회하여 이층 위 한 방으로 인도하는데 창문 밖에는 뚝뚝 덧는 녹음이 어우러졌으나 방안에는 월계의 조화 하나 밖에 아무 장식품도 없더라.
부인은 근신하는 태도로 말하여 왈(曰) “지금 아이들은 열여섯 명 있는데 다 조선 아이들이나 아주 일본 아이들 모양이 되었고 또 말도 조선말은 잊어버리고 일본말을 잘 합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여덟 살이요 제일 어린 아이가 네 살인데 다 말도 잘 듣고 조용히 잘 있습니다.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돝(돼지)과 닭을 치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고 아침저녁에는 찬미가를 노래하고 기도를 할 뿐입니다. 또 매일 냉수목욕을 시키는데 전체가 다 건강은 합니다. 조선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여 재주들이 있고 공부를 시키면 한나절이고 하루 동안이고 싫어하지 아니하고 잘 합니다. 일본 아이들과는 달라요. 풍금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아이들을 위로하여 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녁때는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의좋게 산보를 다닙니다.
뜰에 나가본즉, 등꽃이 곱게 피어있는 아래에서 아이들이 닭의 모이도 주고 군대의 남은 밥을 얻어다가 돝을 기르기도 하는 옆에서 조그마하나 아이가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모양이 참 평화한 지경을 이루었더라.

 

약간 특이한 점은 이곳이 이른바 ‘사회사업기관’이라고 하여 해마다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을 기려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사회사업장려’ 명목의 내탕금(內帑金)을 수령하는 수혜기관의 명단에 가마쿠라보육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1934년 4월 6일에는 당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엄창섭(嚴昌燮)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의 안내를 받아 직접 이곳을 시찰한 일도 있었다.

 

<황성신문> 1906년 10월 4일자에 게재된 ‘황성기독교청년회 학원 모집광고’에 일본어 교사 ‘소다 카이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마쿠라보육원이라고 하면 으레 함께 떠올려지는 인물은 앞서 연혁 설명에서 나온 소다 카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이다.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니 일찍이 1906년 이래로 황성기독교청년회관(종로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활동한 사실 정도가 우선 눈에 띈다.
그 후 가마쿠라보육원의 운영을 떠맡게 되는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윤치호일기> 1919년 7월 10일자의 기록에는 옛 전생서 터였던 가마쿠라보육원 지부를 방문한 일과 관련하여 당시 이곳의 운영자로 일본인 기독교도인 사타케 곤타로(佐竹權太郞, 본부 원주인 사타케 오토지로의 아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보면, 소다가 선임자인 사타케에 뒤이어 두 번째 주임으로서 이곳에 처음 부임한 때는 최소한 1920년을 넘어가는 시점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38년 5월 8일에 “내선인 기독교인의 단결을 도모하고 서로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의 실효를 선양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총후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선인기독교연합회(內鮮人基督敎聯合會)가 결성될 때 평의원(評議員)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지만, 그에 관한 여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1940년에는 원산(元山)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전도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패망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아일보> 1962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소다 카이치의 사망 기사이다. 그는 전년도인 1961년 5월 7일에 입국한 지 10개월여 만에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자리인 영락보린원에서 숨졌다.

<경향신문> 1950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소다 타키코 여사(소다 카이치의 처)의 사망기사이다.

 

해방 이후 소다 카이치는 1947년 가을에 일본으로 되돌아갔으나 그의 처인 소다 타키코(曾田瀧子, 1878~1950)는 홀로 잔류하였다가 1950년 1월 14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졌다. 이때 사회부장관이 장의위원장이 되어 소다 원모(院母)의 사회장이 거행되었고, 유해는 ‘홍제동 화장장’으로 옮겨진 바 있었다.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자리한 ‘고아의 자부’ 소다 카이치의 묘소 전경이다. 오른쪽은 소다 카이치의 묘비이고, 왼쪽은 1987년에 사타케 신(佐竹伸)이 건립한 소다 카이치와 강진형(姜振馨, 가마쿠라보육원의 조선인 주임) 묘역 참배 기념비이다.

 

이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1961년 5월 7일, 이번에는 90세를 훌쩍 넘긴 소다 카이치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고, 해를 넘겨 1962년 3월 28일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1947년 가마쿠라보육원 터 불하, 1948년 서울보육원 인가, 1956년 영락보린원 개칭)으로 전환된 옛 전생서 터이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5년 가량에 걸쳐 조선인 아동들에 대한 보육활동을 한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문화훈장이 주어졌으며, 그는 ‘고아(孤兒)의 자부(慈父)’라는 수식어와 함께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1947년 이후 서울보린원을 거쳐 영락보린원으로 변신한 옛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터의 현재 전경이다. 정문 앞쪽에는 ‘전생서 터’ 표석 하나가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

화, 2020/01/21- 03:45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