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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잡담] 어리버리 신입변의 좌충우돌 사법농단규탄법률가농성단 참가기 / 이경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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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잡담] 어리버리 신입변의 좌충우돌 사법농단규탄법률가농성단 참가기 / 이경재 변호사

익명 (미확인) | 목, 2018/07/19- 17:50

참고로 본 잡담은 1%의 진실과 99%의 허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위법행위에 관한 진술이 아님을 명백히 합니다.

 

<어리버리 신입변의 좌충우돌 사법농단규탄법률가농성단 참가기>

-이경재 변호사

   6월 초순인데도 햇볕이 뜨겁다. 6월이 이렇게 더우니 올해 여름은 정말 덥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법원 동문을 향해 투덜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오늘 11시 대법원 동문 앞에 있을 법률가 기자회견은 여느 회견과 다른, ‘꿍꿍이’가 있는 발표이다. 공표된 사실과 달리 기자회견 말미에 기습적으로 농성 시작을 알리며, 천막을 치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

   현재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원청구가 되어 있기는 하나, 아무튼 현행 집시법 제11조 위반행위이다. 제길 변호사가 되어 공식적으로 하는 첫번째 일이 위법행위라니, 내가 잘못하는건지 법이 잘못된것인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얼추 11시 정각에 대법원 동문에 도착했다. 동문 앞은 ‘피해자 집단고발관련 기자회견중으로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모르겠다. 너무 덥다. 어떻게든 더위만 피하고 싶다. 그늘을 찾아, 선글라스를 꼈다. 아 그래도 덥다. 법률가농성단 상황실팀원 L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농성시작선언’신호에 맞추어 게시판앞에 쌍용차지부, 콜텍지부 등 조합원아저씨들이 천막을 세워주시고, 동시에 ‘젊은’변호사들이 경찰에 대한 스크럼을 짜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래 나보고 몸싸움하라는 거지. 음. 판넬을 들고 얼굴을 가리고 기자회견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11시30분 :
드디어 교수님들, 피해당사자들 및 변호사들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노동위원회 위원장만 수 회 연임하셨다는 K변호사님의 피를 토하는듯한 일갈은 정말 소름이 돋는다. 아 그래도 덥다. 선글라스로 간간이 문 뒤쪽 경찰들 동태를 살폈으나, 피해자 기자회견보다는 오히려 긴장을 늦춘 상태다. 두근두근 거리는 박동소리는 나만 느끼는 건지, 혹시 모를 위급사태에 대비한 녹음은 잘되고 있는지, 모든 것이 걱정이다. 혹시라도 체포되면 이 녹취가 증거자료가 되나? 이거 지금이라도 녹음하지 말아야 하나? 체포되면, 집에 연락가나? 그럼 뭐라 말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정말 덥다.
앞에 있는 기자들도 지치기 시작했는지 점점 현장을 떠나고 있다.

 

12시 20여분경 :
기자회견문은 얼추 끝나간다. 침을 삼켰다. L교수님이 ’농성을 시작합니다!‘ 선언하셨다. 사회를 맡은 R변호사가 “여러분들 뒤를 향해 주십시오” 외쳤다. 대법원 동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경찰들은 당황했는지 미동도 없다.

그 순간 게시판 앞에서는 대형천막이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막으로 향해주십시오” R변호사가 지시한다.
벌써 게시판 앞은 아수라장이다. 사복을 입은 정보과 형사들은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있고, 법률원장인 K변호사님 등은 ’날씨가 덥잖아요. 그냥 그늘 만들려고 친거에요‘라는 말을 넉살좋게 형사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장터에서나 봄직한 대형천막은 벌써 완성이 되었고, 은박 바닥을 한창 깔고 있는 찰나였다. 얼떨결에 천막 안 중앙에 껴서 말려있는 바닥을 피려고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의 “너 뭐야” 소리가 들린다. (아 경찰들이 투입되어 막기 시작하는구나 혼자 생각했다) 그 다음 “막아 막아”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체포되는건가)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잡기 시작했다.
‘뭐지???’ 하는 순간. 당혹. 그리고 깨달음.
‘아 나는 오해당하고 있구나’

“같은편이에요, 같은편이에요! 잡지마세요” 소리를 질렀다. 이런.

이럴수가. 경찰로 여겨지는 허탈함 속에 다시 바닥을 깔았다. 그러나 이미 맥은 빠졌다.
여하튼 천막은 완성되고, 판넬을 든 법률가들은 신속히 천막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다행히도 경찰들의 물리적 저지 없었다. 신난 건 기자들. 후레쉬 소리가 작렬한다.
그래도 덥다.
L변호사의 사회로 1인 발언 시작되고, 천막농성단은 안정기로 돌입하였다.

뭔가 비장함으로 시작했으나 정보과 형사로 오인당함으로 인해 허탈함으로 끝났다.-사복경찰은 정장 차림새에 시커먼 얼굴에 깍두기머리, 그리고 매서운 눈매를 연상했는데, 근데 그런데 그게 나라니. 나라니.ㅜㅜ

이렇게 시작된 법률가농성단의 천막은 시국미사를 끝으로 14일 만에 철거되었다. 쌍차 수석부지부장님은 농성 2주 내내 집요한 나의 원망을 들으셨다. 농성이 끝난 후 며칠간은 아침마다 왠지 동문에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곧 평상시처럼 복귀가 되더라.

그러나 곧 30번째 죽음이 쌍차지부를 찾아왔고,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가 차려 졌다.
모두들 지치지않고 끝까지 연대하길, 그들이 우리를 도왔듯이,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기를.
농성단에서 친해진 D변호사님이 주신 엽서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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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고픈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의 이야기

신안염전노예사건, 고양동 풍등화재사건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정규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출판소통팀은 안산 원곡법률사무소를 방문하였다.

서예가 이완 선생께서 손수 써주신 ‘안산 법률사무소’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의 다른 작품이 걸려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개방형 사무실과 독특한 회의실이 눈에 띈다. 최정규 변호사가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출판소통팀을 맞이해주었다.

 

 

심재섭 출판소통팀장 (심) : 인터뷰에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원곡 법률사무소엔 처음 와봤는데, 회의실이 특이하네요?

최정규 변호사 (최) : 회의실이라고 해서 만들어놨는데 회의할 일도 별로 없고 그냥 편하게 앉아서 영화도 보고 하자고 해서 꾸며놓은 거죠.

기타도… 기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연주는.. (웃음) 집에 애들 책이 생기다보니까, 책을 둘 공간이 부족해서 제 책이 창고에 널브러져 있더라고요. 안 되겠다, 책을 사무실로 가져와야 겠다, 해서 모인 책들이죠. 법학책은 전혀 없죠. (웃음)

 

 

심 : 사무실은 세 분이서 같이 여신건가요?

처음에는 서치원 변호사님이랑 같이 열었어요. 안산역 건너편에 이주민들이 밀집한 원곡동에서요. 처음 1년은 둘이서 했고, 서치원 변호사님 연수원 동기분인 서창효 변호사님이 사무실에 놀러왔을 때 인연이 되어서 2년차엔 세 명이서 같이 운영을 하게 되었죠. 지금은 만으로 7년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셋이 동업하다가 작년에 고용변호사를 고용하자라고 이야기가 되어서 지금은 유승희 변호사님과 조영신 변호사님이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심 : 안산에 연고가 있으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제가 법무관을 마치고 2006년도에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되었는데 첫 발령지가 안산이었어요. 그때 마침 결혼도 하고, 집도 안산으로 구하면서 안산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주민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종교생활도, 이주민을 서포트하는 교회를 찾아보다가 원곡동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곳에서 한글도 가르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런 인연들이 있어서 안산은 제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어요. 그리고 3년 뒤에 서울중앙지부로 발령을 받았죠.

 

그러면서 나름대로 제가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속 공단 변호사로 있을 것이냐, 나갈 것이냐 하는 거지요. 이주민 근로자들에게 밀접하게 법률지원을 해주면서 현장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법률구조공단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한 법교육문화센터를 만들어서 다문화가정을 초청하여 강의를 했어요. 제가 사내 강사로 위촉되어 그분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제가 너무 현장의 이야기를 모르는 거예요. 현장의 문제는 이것인데, 공단에서 사건을 진행하며 알고 있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던거죠. ‘내가 공단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분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 이 간격을 메울 수 있을까?’ 변호사로서 그런 고민이 들더라고요. 가정도 있는 입장이라 공단을 그만두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죠. 2~3년 고민을 하다가 2012년 초에 공단을 그만두고 나왔어요.

제가 파산센터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서치원 변호사님이 마침 연수원을 수료하고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당시에 이주민들에 대한 법률지원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원곡동에서 서치원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심 : 그럼 이주민 관련 업무는 공단에 들어가셨을 때부터 접하셨던 건가요?

최 : 그렇죠. 각종 임금사건, 산재사건들을 했어요. 법률구조공단에서 하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아주 부분적인 일들이었어요. 이주민 근로자들이 체불임금확인서 한 장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근로시간을 인정받는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고 경찰서, 출입국 등에 가는 일도 밀착해서 지원하고 싶었어요. 그런 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나왔는데, 실제로 기회는 무궁무진했어요. 여력이 안 돼서 다 지원하지 못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심 : 그럼 연수원 시절이나 법무관 시절에는 지금 하시는 활동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없으셨던 건가요?

최 : 그렇죠. 인권에 대한 관심은 있었는데 이주민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어요. 대학교 때 수화동아리를 했고 연수원에 다닐 때 시민단체에서 하는 ‘장애우대학’이라는 곳에서 야간 강의를 한 학기 동안 들었어요. 그 시민단체가 지금은 제가 소장으로 있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어요. 장애인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이주민에 대한 관심은 덜했죠. 만날 접점이 없으니…….

 

심 : 원곡 사무실 간판 옆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간판이 함께 있던데요?

최 : 네, 함께 걸려있죠. 처음 사무실 시작할 때는 장애인에 관한 생각은 못했어요. 2012년 당시에 제가 아는 후배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함께걸음’이라는 잡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후배에게 예전에 장애우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법률위원단에 들어와 달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법률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도에 ‘신안군 염전노예사건’이 터진 거예요. 목포까지 내려가서 법류지원을 할 수 있는 변호사가 별로 없던 상황이라 저희에게까지 법률지원요청이 들어왔어요. 사무실을 개업한지 2~3년차 되던 해라 별로 안 바빴어요. (웃음)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할지 몰랐죠. 가해자들과 합의를 하려고 하는데, 피해자를 위해 조언해 줄 변호사가 없다는 거예요. 2014년에 시작했는데 그 법률지원 활동이 아직도 안 끝났어요.

 

심 : 아, 처음에는 합의로 끝내려고 하셨던 건가요?

최 : 네. 그런데 그렇게 끝낼 수가 없었어요. 그때 느꼈던 게 뭐냐면 법률지원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거였어요. 착수금, 성공보수도 없이 열심히 해서 결국 8천만 원을 합의금으로 받았는데, 1년 후에 피해자께서 노숙자로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그렇게 받은 돈을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서 잃으신 거예요. 그때 법률지원이 끝이 아니란 것을 느꼈죠. 마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경기지소의 소장 자리가 공석이었어요. 연구소에서 이쪽에 학대피해자들을 위한 센터를 3년 동안 센터를 운영하려고 하는데, 지역 연구소가 없어질 상황이니 소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저희 사무실 절반 쓰면 되죠’ 라고 하면서 또 아무 생각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웃음) 지금은 3년이 지났고 다른 사업을 또 맡게 되면서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가 2년 더 운영되게 되었죠.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살아 있는 지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염전노예피해자들이 지역사회에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서 활동가분들이랑 임대차계약도 같이 하러다니고, 가구도 같이 사러 다니고 했어요. 그 전엔 차라리 염전에 있었던 시절이 그분들에겐 더 행복하진 않을까라는 고민도 있었어요. 실제로 염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염주와 피해자들 사이에 양가감정이 있었던 거죠. 가족들에게 버린 받은 분들을 염주들이 일을 할 수 있게끔 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다해준다는 거예요. 염전 밖의 삶이 염전에서의 삶보다 더 나아야 할 텐데, 우리 사회가 염전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런 면에서 그분들에게 결국 돈은 의미가 없더라고요. 정말 그분들을 밀착지원해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드려야 했어요, 그러한 영역으로 저희의 활동영역이 확대될 수 있었어요. 법률지원에 멈추지 말고 시민단체와 좀 더 협업을 해보자는 것이 지금 저희의 법률지원 모토가 되었어요.

 

심 : 이주노조 등 이주단체 지원 활동의 경우에도 우연히 시작하신 건가요?

최 : 네, 그것도 우연히 그렇게 되었어요. 이주노조 일을 주로 하시는 마문 감독님이 문화 활동도 같이 하고 계세요. 그 감독님을 예전부터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감독님께서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이 되셨더라고요. 작년에 ‘투투버스’ 관련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공식적으로 그때 처음 지원했어요. 작년 5월, 제주 바다 배 위에서 떠밀린 이주선원들이 있었어요. 그 피해자들을 대리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죠.

장애인 분야 지원만 하다 보니 이주민 분야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던 시기였어요. 마침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생기면서 이주분야의 일들을 더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 모임에서 열었던 강연의 초청 강연자분들과 명함을 주고받고 며칠 후에 그분들이 일하시는 단체에 찾아가서 법류지원을 해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주민분야와 관련하여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기회가 있으면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게 제주도라도. (웃음) 앞서 말한 제주 이주선원들 피해조사를 받으려고 제주도에 네 번을 갔어요. 새벽 6시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면 공항에서 피해자분들을 렌트카로 모시고 서귀포에 있는 경찰서까지 가요. 통역이 필요하다 보니까 조사가 저녁 7시쯤에나 끝나요. 당일에 올라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조사가 끝나면 밤 9시 반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죠. 그런 미친 짓을 했죠. (웃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면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과하게 활동했죠.

 

 

심 : 어떤 계기가 있으신 건가요? 보통은 연차가 있으신 분들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신데…

최 : 제가 그 일에 맞는 것 같아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하는 게 재미있고요. 이주민 분야나 장애인 분야의 경우에는 활동가분들과 주로 활동을 하는데, 그분들이랑 함께 활동하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활동가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상식적인 이야기예요. 법률가들이 봤을 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어요. 법률이 상식에 못 따라가면 해석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게 법률가이지, 법이 이렇고 판례가 이래서 안 된다고만 하는 게 우리의 도리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법률적인 판단이 맞느냐’, ‘네가 하는 이야기는 활동가들 이야기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은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배우는 법들은 이미 기득권들의 논리가 반영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판례를 먼저 찾아 볼 일이 아니라 이게 상식적인지 아닌지부터 먼저 판단하고 소장을 내고, 만약 상대편이 판례가 있다고 하면 그 판례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걸 밝히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많이 활동하려고 하려고 해요. 그게 제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활동가들은 참신한 생각을 많이 해요. 신안염전노예 사건 당시에 저희는 임금을 정해둔 것이 없으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청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활동가들이 노동행위로 착취를 했으면 최저임금 이상을 줘야하고, 농촌에서는 사람구하기도 힘들고 농촌 노임이 도시의 노임보다 높은데 왜 최저임금을 줘야 하느냐는 거예요. 다른 사례를 아무리 찾아봐도 다 최저임금이 기준인거예요. 검사 공소장도 최저임금이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활동가들 이야기가 맞거든요. 노동행위로 착취를 했으면 그것으로 이득을 본 것이고, 노동의 가치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피해자들을 이용한 건데, 적어도 평균임금은 줘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건 저희가 생각한 게 아니고 활동가분들이 생각한 거였죠.

처음엔 소멸시효 관련해서도 20년 동안 착취를 당했는데 소멸시효가 10년이에요. 그런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신의칙위반을 주장했는데 다 인정이 안 됐죠. 대법원 판례에서 신의칙 위반으로 소멸시효 완성 항변이 제한되는 경우는 굉장히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헌법소원을 했죠. 과거사 사건에 관한 국가배상 소멸시효가 헌법불합치가 나와서 이 논리를 적용하자고 했어요. 20년을 착취하고 임금은 10년분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당연한 상식의 논리로 접근했던 거였죠.

우리가 배웠던 알고 있던 법률 지식과 판례에 의심을 갖고 접근하다보니 재밌었어요. 그것이 제가 활동하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활동가들이랑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뭐라도 하나씩 더 건지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현장의 최전선에 있고, 피해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상식적이잖아요. 또 그분들의 이야기가 법으로 되어야 하고요.

전 활동가분들이 편하게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변호사란 어떤 자격 중 하나에 불과한데, 활동가가 훨씬 뛰어난 식견을 가질 수 있고 전 법률 안에서의 식견만 가질 수 있으니, 부단하게 그분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따라가기가 너무 버거워요. (웃음) 우리나라 판례는 제한되어 있어서 연수원, 로스쿨 나오고 나면 더 이상 공부할 게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활동가분들의 생각은 굉장히 진보적이라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런 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심 :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할 시간이 되시나요?

최 : 저희가 시간이 항상 부족한데……. 일반사건도 하거든요. 직원은 있지만 사무장은 없고요.

2012년부터 2017년까지는 직원도 없이 (최정규, 서치원, 서창효 변호사) 셋이서 다 했어요. 최저비용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2018년 전까지는 변호사 셋이서 전화 받는 것부터 다 했죠. 그렇게 만 6년이 넘어가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웃음) 작년에 사무보조 하시는 실무관님과 고용변호사 두 분을 채용했죠. 전자소송이 생겨서 사무보조해 줄 사람이 많이 필요 없기도 했고, 구조공단에 있을 때도 변호사 두 명당 보조자 한 명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업무를 처리하는 게 익숙했어요. 나머지 두 분은 변호사 시작하실 때부터 직접 다하셨죠. 그 분들은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하신 거고요. (웃음) 처음부터 직접 다 하면서 바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심 : 그럼 저녁식사는 집에서 못 하시는 건가요?

최 : 아뇨, 전 라이프 스타일이 완전 반대예요. 전 밤 9시에 자서 새벽 3~4시에 일어나요. 아이들이 많이 어려서 같이 자거든요. 오늘도 이 인터뷰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집에 가서 밥 먹고 아이들이랑 놀다가 9시쯤 자죠. 물론 저녁에 약속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제 라이프스타일이에요.

심 : 그럼 사무실에 오는 시간은 언제이세요?

최 : 오늘처럼 일정이 있는 게 아니면 사무실엔 안 와요. 괜히 전기세만 더 나온다고. (웃음) 컴퓨터도 노트북을 써요. 오늘 같은 경우는 아침 9시에 미팅이 있어서 새벽 5시쯤 여의도 24시간 카페에 가서 일을 하다가 미팅에 갔어요. 의뢰인 분들이 본인이 있는 곳에 변호사가 와주기를 많이 원하시기도 해요. 특히 저는 장애인분들을 주로 상대하다보니 안산까지 오라고 하기 힘들죠. 저희는 재판도 안산에서 많이 없고 거의 전국이기도 하고요, 전국이 저희 사무실이에요. 또 요즘은 메신저도 있으니까 한국에 있을 필요도 없죠. 만나면 괜히 얼굴만 붉히지.(웃음) 그리고 오히려 사무실이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저희는 사무실에 변호사방도 없어요. 처음부터 변호사 세 명이서 좀 더 소통하자는 의미에서 방을 안 만들었어요. 장단점이 있죠.

▲ 원곡 법률사무소 사무실. 회의실은 있지만 변호사 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함께 일하고 있다.

 

심 : 최근 민변 가입하신 신입회원 분들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변호사로서 원하는 바를 가지고 오시는 경우가 많고 실현할 방법은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점들에 관해서 조언해주실 만한 것이 있을까요?

최 : 만약 경제적 안정을 생각한다면 고용변호사를 할 수 밖에 없어요. 공익소송을 하면서 개업변호사가 안정됐다, 이러면 이상한 거죠. (웃음) 안정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굶어죽기야 하겠어요? 의뢰인이 돈이 없다고 한다면 법원소송구조를 받을 수 있으니까 저희(세 변호사)의 처음 생각은 3~4명 정도의 의뢰인을 만난다면 사무실 운영을 최저로는 할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우리는 소매잖아요, 도매가 아니라. 기업을 대리하면 도매를 할 수 있어요. 저희가 지금 보험사 상대로 소송을 많이 해요. 보험 회사가 아닌 보험 소비자 대리를 하려니까 힘든 거죠. 소매를 하면서 안정을 찾기는 힘들어요. 의료소송도 의료법인이 아닌 소비자를 대리해요. 의료법인을 대리하던 곳이 환자를 진정으로 대리하긴 힘들겠죠. 보험회사를 대리하던 변호사가 보험 소비자를 대리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게 왜 불공정하냐면 의료법인이나 보험회사는 저가의 비용으로 그 분야의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요. 그런데 소비자는 돈을 더 주면서 전문적인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힘들어요. 소수자를 대리하려면 소매로 사건을 가져와야 해서 사건 찾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이게 광고를 한다고 해서 유명해질 수도 없는 거에요. 소매로 사건을 가져오면서 안정을 찾기는 힘이들죠. 그래도 안정적이니까 고용변호사 쓰는 것 아니냐고도 하는데 저희는 매달 적자가 나지 않을까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해요.

그래서 처음 목표한 것들을 실현하는 데에 경제적 안정의 고민이 문제가 된다면, 원래 그 둘이 같이 가기 어렵다고 처음부터 생각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결국 선택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공익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약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 있었는데, 개업변호사를 하면서 그런 고정관념을 깨게 된 것 같아요. 매우 다양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심 : 출판소통팀에서 하는 새해 첫 인터뷰인데요, 혹시 변호사님의 새해 소망이 있다면요?

최 : 그러게요. 뭐가 있을까요? 새해라고 해서 특별히 할 일을 정한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아, 이제까지 제가 너무 ‘일’을 중심으로 지냈어요. 일에 있어서 제가 너무 일 중심으로 한 것 같아서, 관계중심으로 활동하지 못했죠. 최근에 친한 활동가 분이 둘째를 낳으셨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둘째를 가지셨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좀 더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제한되다보니 쉽지는 않아요. 올해에는 좀 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중에 남는 건, 사람 밖에 없잖아요.


의미있는 길을 걷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 읽고 싶다며, 최정규 변호사가 평소 힘이 들 때 가끔 꺼내어 본다고 말했던 시를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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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2/2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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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로 기분 좋은 금요일 오후, 민변 사무실에서 이경재 변호사님, 조미연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뉴스레터 200호 특집을 핑계로 선배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컨셉에서 조금 벗어나, ‘후배(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변호사님’들을 대표할 수 있는 두 분을 뵙고 싶었지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후인정을 닮은, 최순실 변호인과 이름만 같은 이경재입니다.”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두어 시간, 우리 모임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심재섭 출판소통팀장 : 요즘 변호사님들이 가장 관심가지고 계신 건 뭔가요?

이경재 변호사 : 돈 버는 거요. 하고 싶은 활동을 지금처럼 계속 유지하려면 물질적인 불안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개업하면서 지속적으로 민변과 함께하기 위해 내가 할 몫으로 돈을 벌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낀 거예요. 처음 민변에 가입했을 때 최고의 관심사는 단연 사법농단이었습니다. 제가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법농단 이슈가 막 터졌어요. 내가 앞으로 민변에서, 혹은 변호사로서 어떻게 살아 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도 가까워서 농성장에 매일 상주하다시피 살다 보니 활동가분들, 변호사 선배님들을 많이 뵙고 좋았어요.

조미연 변호사 : 전 지금은 취업이 가장 중요해요.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요즘 면접기간이거든요.

 

심재섭 팀장 : 두 분,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어떠한가요?

이경재 변호사 : 원래 노동법 및 공익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공감 등 사회단체를 쉽게 접했던 터라 민변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로스쿨 재학당시 이소아 변호사님 등이 학교를 방문하고, 특별회원 가입 등을 권하시기는 했는데, 변호사도 아닌데 ‘변호사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뭔가 불편해서 좀 미뤘어요. 변호사시험을 끝내자마자 마침 김준우 변호사님의 권유도 있었고, 로스클 때부터 알고 있던 최용근 변호사님이 추천도 했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입했어요.

 

심재섭 팀장 : 가입하기 전부터 민변을 좀 알고 계셨군요?

이경재 변호사 : 로스쿨에서 뵈었던 선배들, 민변 변호사님들이 있었어요.

조미연 변호사 : 한승헌 변호사님, 김선수 변호사님처럼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 동경해 오던 분들이 있었으니까요. 민변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는 쉽지 않아요. 전 전북에서 로스쿨을 다녔는데, 당시 전주전북지부 민변에서 인권법학회 간담회를 하면서 특별회원을 모집했어요. 그 전에 당연히 가입해야하지 하다가 그 기회에 특별회원으로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경재 변호사 : 최근에 SNS에도 글을 올렸지만, MBC 파업 당시에 신인수 변호사님에 대해서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김민석 피디가 ‘현실에서 영웅을 봤다’라는 내용의 글을 썼거든요. 제가 ‘따뜻한 가슴, 차가운 머리’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김민석 피디가 소개한 신인수 변호사님 이야기에서 그런 점을 느꼈어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하면서 냉철하게 다가가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그런 모습이요.

조미연 변호사 : 전 요즘 김종보, 류하경 변호사님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요. 현장연수부터 저랑 가장 가까이 있는 선배이기도 하고, 활동력도 탁월하셔서 배울 점이 많아요. 사실 민변에서 변호사님들을 보면 꼭 하나씩은 배울 점이 있으시더라고요. 누굴 특정해서 닮고 싶다 할 것 없이 주위에 계신 분들 떠올려보면…

 

(민변 소속 변호사로서 잘 살아가는 모습, 그 활동 자체가 홍보가 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심재섭 팀장 : 법조계에 들어오고자 했을 때 생각했던 모습하고 지금하고 얼마나 같은가요?

조미연 변호사 : 전 로스쿨 입학할 때 자기소개서에 검사를 거쳐 10년 뒤에는 우리나라 프로보노 활성화에 앞장서는 공익활동을 하고 싶다고 썼었어요. 검사라는 조직과 직역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스쿨을 다니고 보다 진지하게 공부를 하게 되면서, 그쪽은 내 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변호사인데, 변호사가 되면 공익전담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경재 변호사 :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로스쿨 들어오는 애들 3분의 1은 인권, 3분의 1은 IP, 3분의 1은 M&A 하겠다고 한다는 거지요. 그만큼 공익이나 인권이라는 목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쪽 일을 계속 해나가지 못하는 현실이나 로스쿨 단계에서의 진로 설정이 막연하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 같아요. 공익변호사라는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전 공익인권의 분야를 놓지 않겠다는 정도의 결심은 꾸준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로스쿨에선 다들 불안하고 막연하긴 해요. 저도 로스쿨에서 사람에 대한 기대가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 헌재 결정이 있었잖아요. 당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혼자서 열 받아 있는데 주변 동료들을 보니 어느 누구도 분노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하더라고요. 분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감정적인 변화가 없어 보였어요. 그런 점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마냥 믿고 의지하는 방식은 아니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있을 것이고, 조금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소명이랄까, 그렇게 접근하기로, 실망을 덜하면서 꾸준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좀 외로웠어요. 저와 같이 생각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변호사가 되었고, 민변에 왔지요. 변호사라는 직업이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직업이라 좋았고, 천막농성하면서 만난 활동가분들, 당사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길이 맞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심재섭 팀장 : 민변에 가입하면서 기대했던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경재 변호사 : 동료들을 보면 다들 잘하시니깐, 모든 면에서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기대라는 말은 좀 어색하고, 특히 좋아하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민변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자진해서 감당하려는 자세였습니다. 함께 일을 하다보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민변 동료들은 그런 면에서 달랐던 것 같아요. 정치, 경제 이슈에 있어서 다수의 지지를 당장 얻지 못하는 주제라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다는 판단한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봤어요.

조미연 변호사 : 인권변호사라는 말에서, 인권이란 말을 떼는 것이 맞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굳이 인권변호사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이유는, 변호사라는 일에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공익 이슈, 인권을 수호하는 활동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어려운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고 이를 원하는 많은 변호사들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민변이잖아요. 여기에 들어와서 내가 무엇을 원한다, 하고 싶다 이런 생각조차 없이 당연히 가입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히 제가 색깔이 없어서 그런지 어떤 방향이나 기대를 말씀드리기가 좀 어색합니다.

▲ 2018. 11. 사법적폐청산 국민대회 참가 사진

 

심재섭 팀장 : 특별히 색이 없다고 말씀하시기에는, 지난 1년 가까이 민변의 많은 모임과 사업에 참여하셨어요. 엄청 특징적인 거잖아요. 어느 모임에 계시지요?

조미연 변호사 : 노동위, 민생위, 아동위, 여성위하고 사무처에서 회원팀을 하고 있어요. 봉변님(이경재 변호사님이 동기들 사이에서 불리우는 애칭)은 노동위, 소수자위, 환경위, 여성위 또 뭐 있더라…

심재섭 팀장 : 엄청 많잖아요.

이경재 변호사 : 철이 안 들어서 그래요.

심재섭 팀장 : 동기들은 다른 길을 찾아 가잖아요. 취직을 하든, 개업을 하든… 그런데 이렇게 민변에 시간을 들일 수 있는 동력은 뭘까요.

이경재 변호사 : 그러니까 철이 안 들어서 그렇지요.

조미연 변호사 : 회원분들이 보면 진짜 쟤들 뭐하는 애들이냐 할 것 같기도 해요.

이경재 변호사 : 다들 가입하게 된 사연들이 있어요.

조미연 변호사 : 전 그냥 재밌어 보이는 곳은 다 한 거예요. 이렇게 오래 유지될지는 몰랐어요. 제가 취업하고 싶은 곳의 채용이 최근까지 없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어요. 사실 변호사가 어렵다고 하잖아요. 어렵다는 현실을 부정할 것은 아니지만, 변호사라는 직업도 얼마든지 어려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1년 정도 취업을 미루었다고 하여도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훌륭한 경험을 민변에서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것을 포기하고 민변에 있었다, 이런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경재 변호사 : 저는 변호사를 하면 당연히 생계와 공익 활동을 병행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민변에 참여하는 것이 특별히 무리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종교적인 것이든 아니든 마음속으로 얼마 정도는 이런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거요. 한 2년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심재섭 팀장 : 수습 끝나고 10월 지나서 하나 둘 취업하게 되면 민변에서 뵐 수 있는 동기들 숫자도 줄어드는데 (변시) 7회는 안 그런 것 같아요. 이유가 뭘까요?

이경재 변호사 : 첫째는 저 때문이죠.

조미연 변호사 : 와, 이거 진심이다.

이경재 변호사 : 농담이구요. 다들 서로 애정이 있어요. 독특한, 나름대로 특색 있는 분들이 있어요. 고시공부를 오래 한 분이 있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신 분들도 있고, 오랫동안 나름대로 스텝을 제대로 밟아서 로스쿨 가신 분들도 있구요. 그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긴 정말 쉽지 않고 동기분들과 만난 게 행운이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성인이 되어 만난 모임에서 특히 변호사 모임에서 누군가의 주장을 받아주는 게 쉽지 않은데, 서로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잘 들어주더라고요. 운이 좋았던 거죠. 사법농단 때 농성장을 지키면서 많이 얼굴 뵙고, 농성장 해단하면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조미연 변호사 : 단체톡방도 소소하게 많이 있고, 오프라인에서도 그러니까 민변 행사가 있으면 자주 만나고 해요. 노동위원회의 경우 매주 회의를 하면서 매주 얼굴 보고 밥 한 끼 먹고, 차 한 잔 마시기도 하죠. 한 번이라도 더 많이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특별히 나오라고 독려한 게 아니고 자율적으로 다들 결합하시는데 얼굴 한 번 더 볼 때마다 더 친밀해지는 기회가 되는 거죠.

심재섭 팀장 : 나오라고 두 분께서 독려를 하시는 거군요?

조미연 변호사 :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그냥 다들 시간 되시면 참여해 주세요. 그래서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심재섭 팀장 : 두 분이 참여하는 사업, 소송, 행사들이 많잖아요. 전 처음에 초임인 내가 여기에 참여해도 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두 분은 어떠세요?

이경재 변호사 : 대부분의 민변 회원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입장에서 내가 이걸 해도 되나 하는 두려움이 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참여를 못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요. 저는 제가 무슨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집회나 회의에서 머릿수 채우는 역할만 하자고 맘을 먹는 것이에요. 저희도 두려움은 있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참여하는 게 맞으니까요.

조미연 변호사 : 머릿수를 채우다보면 어느 순간 긴 호흡을 함께할 수 있다고 김선수 변호사님이 말씀해주셔서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이경재, 조미연 두 변호사는 지난해 사법농단 진상규명,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저지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위 사진은 릴레이 1인 시위 당시 모습.

 

심재섭 팀장 : 이런 것은 어때요? 집회나 회의를 참가하기로 했는데 나만 참석하게 되는 경우, 송무를 맡았는데 실제 같이 일을 하는 분들이 나와 같은 초임인 경우…

조미연 변호사 : 실제로 민변에서 미진한 부분들이 그런 점인 것 같아요. 사업에 들어갔을 때 맡게 되는 업무가 생각보다 무거운 업무인 경우도 있고, 역량 밖이라고 느껴질 경우가 있죠. 책임감 있게 하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겠죠. 선배들의 약간의 도움이 있다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아요. 신입설문조사에서도 그런 점이 많이 나타났죠.

심재섭 팀장 : 신입설문조사요?


조미연 변호사 : 네, 이번에 회원팀에서 신입회원들을 대상으로 민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어요. 저는 민변 회원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회원팀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회원팀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회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신입의 입장에서 신입의 목소리를 모아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담으려고 설문조사를 시작했어요. 34분 정도가 설문을 해주셨는데, 지금 주제에 관한 것이 있어요. 신입 회원분들이 민변 활동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바빠서이고요, 그 다음 이유로는 민변에서의 업무가 너무 과중해서, 민변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할지 막연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이 부족해서라고 해요. 첫 번째 바빠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머지 이유는 신입회원의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에 들어오는 시점에서 기존 구성원들의 역할을 고민하게 해주는 유의미한 답변이라고 봐요.

이경재 변호사 : 바쁘다는 건 좀…….

조미연 변호사 : 그쵸, 바쁘다는 건 핑계일 수 있죠. 그런데 한정된 시간에서 민변을 우선할 수 있도록, 조금 접근하기 편하게 선배 회원들이 손을 내밀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두 분 변호사님께서 그간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으셨더라고요. 이 지면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민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감사했습니다.)

 

심재섭 팀장 : 두 분의 의견은 어때요. 기존 선배 변호사님들이 이런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점이요.

이경재 변호사 : 저는 민변이 다른 법조조직에 비해 시대적인 변화에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권위주의적인 양태가 가끔 보일 때가 있어요. 그게 활동의 방향에 관한 거라면,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유연한 태도들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조미연 변호사 : 회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작은 단위에서의 관계요. 평등하고 대등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 일을 같이 하는 데에 있어서 경력과 경험의 차이를 기초로 한 효율적인 협업을 잘 구분해서 둘 다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예를 들어 대등한 관계라는 점이 업무수행까지 적용되면 꼭 필요한 지시 내지 조언이 생략되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실질적인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초임 입장에서 어떻게 보면 방치되었단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경재 변호사 : 서면으로 된 산출물에 대해서, 선배들께서 어려워서든지 다른 이유에서든지 피드백을 주지 않으시는 것이 어떻게 보면 무관심으로 이해될 수 있겠죠. 애정을 가지고 후배들을 많이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떠한 실수가 있을 때 확실하게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미연 변호사 : 신입 회원들에 대해서 계속 궁금해 하셨으면 좋겠어요. 끊임없이 후배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고 많이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경재 변호사 : 후배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성인이잖아요.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했을 때 싫어하시는 선배 변호사들은 없으니까요.

조미연 변호사 : 그럼 서로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 정도로 하면 좋겠어요.

 

심재섭 팀장 : 뉴스레터는 많이 보셨나요? 어떤 파트가 가장 재미있으셨나요?

이경재 변호사 : 전 인터뷰를 주로 봐요. 인터뷰를 제일 좋아하고요. 이유는 오프라인에서 우리 서로 개인적인 일들을 묻지 않는 편이잖아요, 그래도 궁금할 때가 있어요. 이 사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요.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더라구요. 그런 점들, 보통 술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개인의 인생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여서 좋은 것 같아요. 최근 인터뷰 중에 최정규 변호사님 편 정말 좋았어요. 업무적으로도 종종 뵙는데,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던 차에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 되니까 좋더라구요.

조미연 변호사 : 저도 최정규 변호사님 인터뷰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뉴스레터를 잘 못 봐요.

심재섭 변호사: 안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미연 변호사: 음… 귀차니즘인 것 같아요. 다 글이니까. 일하면서도 글을 보고 글을 쓰는데, 대부분의 소식이 글로 오니까 더 핑계거리가 되지요. 같은 소식이라도 영상으로 오게 되면 더 먼저 보게 될 것 같아요. 정보를 수집할 때, 간단한 문자, 짧은 영상이 우선이고, 장문의 글은 그 다음. 만약에 하드카피 문헌이라면 가장 늦게 손이 가요. 그런데 이건 개인적인 문제라, 출판소통팀에서 내용이나 구성이나 부족한건 아니지요. 혹시 여력이 된다면, 출판소통팀에서 SNS나 영상 컨텐츠적으로 접근을 좀 더 한다면 회원들이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아요. 짧은 글이라던지, 짧은 영상들을 더 넣는다면 좋을 것 같아요.

이경재 변호사: 민변이 해야 할 역할 중 진중함이 있을 텐데, 영상으로 할 땐 한계가 있을 순 있을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시도부터 하면 좋지 않을까요? 여전히 글이 길다는 느낌은 받고 있어요. 임팩트라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뉴스레터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마치 우리 출판소통팀 회의 시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선배 변호사님께서 모임에 대한 애정으로 많이 읽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최신의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면)에는 좀 맞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들었습니다.)

 

심재섭 팀장 : 민변 회비는 부담이 되시나요?

조미연 변호사 :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절대적인 숫자가 크다고 할 수는 없는데, 변회(서울변호사협회) 회비도 있고요, 민변에 들어오는 변호사님들이라면 개별적으로 후원하는 단체들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꼭 민변 회비만 떼어서 보긴 어렵고 월 지출 총액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심재섭 팀장 :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조미연 변호사: 첫 직장을 잡는 거죠. 꼭 가고 싶은 직장이 있어요. 민변에서 신입회원으로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직장에서 변호사로서의 처음을 제대로 다지고 싶어요. 거기에 하나 더 생각한다면 민변 회원으로서 긴 호흡법 연습하기가 있어요. 머릿수만 채우면 된다고 하지만 그걸 10년, 20년 머릿수만 채울 수는 없잖아요.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있어요.

이경재 변호사: 1년차 때에는 머릿수 채우기로 정신없이 보냈는데, 앞으로 더 많이 경험하고 실력을 갖추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면 어설프게 마음만 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도움이 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4월에 새로 합격하시는 변호사님들, 또 그 뒤의 변호사님들께 제가 선배님들에게 받았던 느낌을 똑같이 주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경험과 실력을 갖춰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실력을 갖출 수 있을까가 요즘 가장 큰 고민이에요.

 


처음 민변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1년을 넘겨서도 초기의 활동력과 애정을 유지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갈수록 변호사의 고용‘시장’이 어려워지고, 법률시장 자체가 팍팍해져 가는 현실에서 신입회원들이 빨리 방향을 달리 정하고 민변 활동에서 멀어지는 것 역시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합니다. 오히려 탈회하지 않는 마음이 고맙지요.

이번 두 분 변호사님과의 대화에서 민변에 대한 사랑, 변호사 직업에 대한 열정,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분 변호사님이 신입 회원의 모든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신입 변호사님들이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공감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8년 활동 사진 한 장을 달라는 출판소통팀의 요청에 이경재 변호사님이 아래 사진들을 보내왔습니다. 보낸 모든 사진을 실어달라는 이경재 변호사님의 요청에 답하며 인터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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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03/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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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민변 국제인권기행 후기

조덕상 변호사

 

아인이, 시우에게 보내는 오사카 여행 편지

 

  편지에는 아빠가 처음으로 아인이와 둘이서 일본 오사카를 여행했던 2019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단다. 아인이와 함께 있었기에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더 기억에 남고 뜻깊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해. 여행의 여운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그 느낌을 생생히 기록해두고, 나중에 그때를 추억할 수 있도록 이렇게 너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 아쉽게도 같이 가지 못한 시우도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빠는 원래 해외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2009년에 엄마와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거의 10년간 다른 나라를 가본 적이 없었지. 작년 12월에 우연히 회사에서 도쿄에 보내줘서 갔다 왔는데 그 때 늦바람이 들었는지도 몰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민변에서 제1회 인권기행으로 오사카를 갈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했는데 예전에는 관심 없이 지나갔겠지만 이번에는 꼭 가고 싶었어. 그래서 엄마와 아인이, 시우와 모두 함께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개학이라 출근을 해야 했고 아빠 혼자서 아인이와 시우를 모두 데리고 다니는 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아인이만 데리고 가기로 했단다. 아인이가 흔쾌히 승낙해주어 정말 고마웠어.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설렜던 건 참 오랜만이었지.

 

  발하기 전에 오사카 일기예보를 알아봤는데 처음에 여행기간 내내 비가 온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단다. 여행 중에 아인이를 싣고 다닐 유모차를 깜박하는 바람에 잠깐 막막하기도 했고, 오사카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아인이가 귀가 아프다며 울먹일 때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어. 우여곡절 끝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 아인이 귀도 금방 나았고, 날씨 걱정은 말라는 듯 화창한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또 다행히 호텔에서 유모차를 빌려줘서 여행 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고, 여행 중에 비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 날씨도 참 따뜻했고.

  사이 공항에서 우리는 코리아NGO센터의 김현태 선생님과 몽당연필의 김명준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했어. 두 분 모두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특히 조선학교 학생들이 겪는 차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 오사카에서 첫 점심을 아인이가 열심히 먹고 있던 중에 코리아NGO센터의 김광민 선생님이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고 코리아NGO센터에서 활동하게 됐는지를 찬찬히 들려주셨단다. 어린 시절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으며 선생님은 부모님을 무척 원망하며 방황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해. 오래전부터 지금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비슷하게 겪은 아픔이었지. 그때를 떠올리다 선생님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아빠도 가슴이 먹먹해졌지.

 

  인이가 아빠와 점심을 먹었던 곳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츠루하시’라는 동네란다. 식당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미유키모리 소학교’가 있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방과 후에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모인 ‘민족학급’을 찾았어. 일본 아이들과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학교에서 재일조선인 학생들끼리 한국어와 한글 등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지. 안타깝게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아인이가 곤히 잠들었단다. 10명 남짓한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홍우공 선생님과 일본어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데, 아빠가 일본어를 몰라서 처음에 너무 답답했어. 나중에 김현태 선생님이 수업 내용을 조금 알려주셨는데 학생들이 이번 학기 수업을 들은 소감들을 하나씩 들어보면서 거기서 느꼈던 점들을 서로 이야기했다고 하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남자아이가 너무 자주 손을 들다가 선생님께 가끔 퇴짜를 맞는 풍경이 재밌기도, 딱하기도 하더구나.

  러다 홍 선생님이 한자 이름을 몇 개 적더니 학생들에게 각자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냐고 물었지. 정답은 다들 의외였단다. 누군가 일본식 또는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그 나라 국적은 아니라는 이야기였지. 그 중에는 홍 선생님의 할머니면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분의 이름도 있었어. 이름에는 그 사람의 국적만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 이름을 일본인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것을 알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라면서 놀리고 괴롭히고 차별했으니까 말이야. 앞으로 용기를 갖고 한국식 이름을 당당히 쓰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홍 선생님은 왜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용기가 필요한가. 그런 세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바꿔보자고 이야기하셨단다.

 

  후 유네스코 헌장을 같이 읽었어. 서로의 풍습과 생활에 대한 무지가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전쟁을 일으켰으니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헌장의 메시지가 조선학교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쓰는 문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단다. 이후 홍 선생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적은 일본어 편지를 보았는데, 일본어는 모르지만 한자를 더듬거리며 읽다가 아빠는 왈칵 눈물이 났단다. 아들의 이름 3글자에 증조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억지로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본인의 성씨를 잊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 이후 아버지 대에서 원래의 성씨와 한국식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노력, 아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 식구들이 느꼈던 해방감과 기대 등등. 아빠로서는 감히 짐작하기도 힘든 숱한 이야기들을 조금 상상했다가, 잠든 아인이를 보자 그냥 주르륵 흘러내렸어. 아빠와 너희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름, 글씨, 말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든 아인이를 안고 아빠는 작은 카페에서 코리아NGO센터 활동가분들을 만날 수 있었단다. 4-5년 전에 극성을 부렸던 재특회 같은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동영상을 보았어. 그때 아인이가 자고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왜 저 사람들은 저런 근거 없는 혐오를 양산해내는 것일까. 저런 혐오를 몸으로 겪어야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인이가 나중에 이런 질문을 아빠에게 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 막막한 기분이야. 그나마 다행히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저런 행위는 불법이라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고, ‘카운터스’ 라고 해서 혐오 표현을 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단다. 그런데 카운터스 중에서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시민들이 저렇게 못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해.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각종 차별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얼마나 있을까. 깊게 알면 알수록 힘 빠지고 슬픈 일이야.

 

  은 생각을 하면서 호텔로 돌아와 첫날 일정을 무사히 마쳤단다. 아인이가 곤히 낮잠을 잘 자고 저녁에 일어나줘서 아빠는 늦은 밤에 너를 유모차에 싣고 오사카의 도톤보리를 걸었어. 한국에서 놀러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조선학교 아이들 생각도 많이 나서 묘한 기분이 들었단다. 너무 늦어서 관람차와 작은 배를 타지 못하고 돌아온 건 참 아쉬웠지.

 

   둘째 날에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찾아갔단다. 전날 갔던 곳이 일본 공립학교 안의 작은 교실이었다면, 이 학교는 한국어와 한글로 교육을 받고 싶은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고등학교였어. 학교에 들어서니 교실에는 북한 지도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기도 하고, 학생들이 만든 게시물과 그림에는 마치 북한학교에 온 것 같은 선전문구와 표현이 가득했지. 겉으로만 보면 이 학교 사람들이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일본 정부가 다른 고급학교에는 교육지원금을 대주면서, 조선학교에는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고 있지. 하지만 해방 이후에 남한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버리다시피 했고, 북한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교육을 계속 도왔어. 그리고 무엇보다 재일조선인들이 스스로 우리 말과 글, 풍습을 지켜내려고 지금까지 싸워왔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서 그들을 북한에 종속된 사람들이라며 차별하고 괴롭히는 일본인들에게 아빠는 분노와 허탈감을 느꼈단다.

  교 선생님들의 간단한 안내를 받고 우리는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하러 들어갔어. 아인이와 함께 들어갔더니 많은 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계속 아인이에게 관심을 보였지?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집중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 수업 참관이 끝난 후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는 성악반 학생들이 ‘아침이슬’ 과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을 불러주었고, 합주반 학생들이 ‘군밤 타령’과 같은 민요를 멋지게 연주해주었어. 아인이도 끝까지 잘 듣고는 즐겁게 화답했지. 공연이 끝나고 나서 돌아가는 언니들에게 아인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언니들이 우리말로 ‘귀엽다’라며 까르르 웃던 모습도,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언니와는 하이파이브를 했던 장면도 아빠 기억에 선하단다. 이후 여행하는 동안 아인이는 고급학교 언니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어.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인이가 조아인, 조시우 이름을 적고 아빠는 그 위에 ‘즐겁고 치열하게 도우며 성장해가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기억하고 응원할게요’ 라고 썼지. 남한 학교와는 사뭇 다른 배움에 대한 열의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서로 협동하는 분위기가 참 좋았거든. 이곳 학생들이 남한, 북한, 일본 세 국가의 다양한 모습을 배우면서 따뜻한 마음과 넓은 시야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주길 바랐어.

 

  은 공연이 끝나고 아인이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동안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어머니 2분의 이야기를 들었어. 이 두 어머니는 우리가 여행을 오기 며칠 전에 UN 아동인권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다른 외국인 학교와 조선학교를 차별하지 말라는 권고를 냈는데, 이 권고를 받기 위해 제네바까지 찾아가 싸웠던 분들이라고 했지. 그 전에 UN에서 여러 번 일본 정부에 권고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어. 그나마 이번에 나온 권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일본 정부에게 차별의 근거가 되는 관련 법령을 고치라는 내용으로 나왔다고 하네. UN에 호소하고, 일본 시민들에게 조선학교 차별의 문제점을 알리는 등 어른과 학생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교육 지원금을 받지 못하다보니 학교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고,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도 비싼 수업료를 부담해야 한다고 해. 선생님들과 어머니들은 우리들이 남한 사회에 조선학교의 실정을 널리 알려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셨어.

  교를 나와서는 잠든 아인이를 유모차에 눕혀주고, 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변호사님들을 만났단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에 대한 교육 지원을 끊고 오사카 지방정부마저 지원을 중단하자 양심 있는 오사카의 변호사들은 재일조선인들 편에 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단다. 1심 법원에서 변호사들이 승소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다음 2심 법원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고, 지금 최고재판소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차별하려고 궁색한 핑계를 댔고 변호사들이 그 부당함을 지적했지만 2심 법원은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과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권으로 인정하지 않았단다. 조선학교가 북한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고, 학생들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학생들의 교육권을 왜 침해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아빠와 동료들이 열심히 지적했어. 과연 법정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중에 일본 법원의 판결문을 받아서 읽어 보고 마지막 판결이 나올 때까지 우리가 일본의 변호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단다.

 

 

  째 날의 공식 일정도 아인이 입장에서는 무척 지루했을 텐데, 다행히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 아빠는 아인이와 오락실에 가서 재밌게 놀았단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는 열심히 뛰어가 헵파이브 관람차를 타고 오사카의 야경을 볼 수 있었지. 가는 길에 표를 잃어버렸다가 지하철 역무원에게 사정해서 관람차 마감 시간에 겨우 도착했던 일도 생각나네.

 

  셋째 날 오전에는 ‘사랑방’이라는 재일조선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개호시설을 찾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우리말과 글을 계속 배울 수 있는 곳이었는데 작지만 그만큼 더 따스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단다. 정귀미 선생님과 3분의 할머니가 녹차와 딸기를 대접해주셨는데 아인이가 딸기 한 접시를 다 먹었더니 나중에 남은 딸기를 챙겨주셨어. 정 선생님이 재일조선인을 위한 야간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사랑방의 역사를 차분히 들려주셨고, 마침 같이 계셨던 할머니께서 젊은 시절 중국인 학생들을 부당하게 체포한 일본 경찰을 찾아가 항의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단다. 할머니들과 헤어질 때 아인이가 한 분씩 안아드렸던 장면이 생생하네.

 

  후에는 죠호꾸 조선초급학교 학생들의 예술발표회를 들으러 아사히구 구민홀에 갔었지. 59년 동안이나 이어진 공연이라니 정말 기대가 많이 됐단다. 2부 15개 꼭지였는데, 하나하나 다 기억에 많이 남았어. 아인이 또래 친구들의 합창이나 동화 공연도 재미있었고, 언니오빠들의 악기연주와 농악무 공연도 멋있었지. 1부가 끝날 무렵 아인이가 지루하다며 힘들어해서 나가려다가, 길원옥 할머니가 오셨다고 해서 아인이에게 기다려달라고 했지?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신 김복동 할머니와 이번에 찾아오신 길원옥 할머니는 오래 전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끔찍한 피해를 입고서, 일본 정부와 계속 싸웠던 분들이야. 두 분은 오래 전부터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시고 재일조선인들의 투쟁에 큰 힘을 보태 주셨지.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영상과 길원옥 할머니가 직접 나와 장학금을 전달하시고 ‘두만강’을 조용히 부르셨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구나.

  인이와 근처 개천을 조금 산책하느라 2부 공연은 조금 놓쳤어. 다시 들어왔더니 태권도 공연이 있었는데 아인이도 좋아했던 콩순이 태권노래가 나오길래 참 신기했단다. 마지막에 합창단이 ‘언제 어디서나’ 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얼마 듣다가 아빠는 또 울고 말았어. 차별과 편견에 고통스럽지만 굳건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가사를 카메라에 담아 두었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을 때 재일조선인들은 물자를 일본인들과 함께 나누었고, 조선학교 학생들은 무서워하는 어린 후배들을 선생님들보다 먼저 보듬어주었다는데 그 사연이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어. 작년 민변 송년회 때 공연을 준비하면서 ‘하나’라는 노래를 연습했었는데 조선학교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을 때였는데도 그 학생들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 느껴져서 목이 메었던 기억이 나더구나. 나중에는 ‘우리를 보시라’,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라는 노래도 찾아서 들어보았는데 참 좋더라. 공연이 끝나고 도톤보리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재일유학생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분들과 만난 소중한 자리였지.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일찍 나와 아인이와 약속한 배를 타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놓쳐버렸지 뭐니. 대신 작은 관람차를 타고서 마지막 밤을 아쉽지만 행복하게 보냈단다.

 

 

  지막 날 오전에는 미유키모리 신사를 찾았어. 5세기에 인덕천황이 잠깐 쉬어갔던 곳에 지어진 신사라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자주 봤던 코리아타운이 있었지?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일본에 살았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이런 작은 신사와 코리아타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 그 옛날 사람들이 오늘날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코리아타운을 둘러보면서는 1900년부터 다양한 이유로 경상도, 제주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단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과 남북한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커다란 숙제라는 것을 느꼈던 시간이었지.

  지막으로 찾았던 작은 절은 통국사였어. 이 절은 재일조선인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곳이래. 통국사라는 이름에는 남한과 북한이 더 이상 다투지 않고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 있단다. 우리 같은 남한 사람들에게는 통일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지만,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지.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니까. 아인이는 절 한 켠에 있었던, 낙서가 심했던 돌기둥 2개를 기억하니? 예전에 동과 서로 갈라져 다투었다가 지금은 통일된 독일이라는 나라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이었어. 그리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4.3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비석도 있었지? 아직도 그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계신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어. 아인이가 직접 추모비에 향을 올리는 것을 끝으로 빠듯했지만 풍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 여행이 끝났단다.

  인아, 고마워. 시우야, 미안해. 아빠가 이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것도, 이 여행의 매 순간이 더 감동스럽고 기억에 남게 된 것도, 너희들 덕분이란다. 비록 아인이가 아직은 많이 어려 조선학교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랑 생김새와 말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놀리고 괴롭히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면, 그리고 조선학교 학생들과 재일조선인 여러분의 따뜻함을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 공중파 채널에서 조선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단다(2019. 3. 5. KBS1 시사기획 창 ‘조선학교’). 김복동 할머니가 유언처럼 조선학교 이야기를 남기고 가신 후 조금씩 조선학교에 대한 남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다행이야. 앞으로 아빠도 조선학교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해보려고 해. 일단은 책을 읽고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그리고 너희들이 더 자라서 기회가 오면 다시 너희들과 함께 조선학교 학생들을 만나러 가보고 싶구나. 부디 그 무렵에는 오랜 조선학교의 투쟁사가 그랬듯이 모든 조선학교가 무상화라는 열매를 맺고 있기를 같이 기도하자.

–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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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03/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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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회원 여러분~ 소수자인권위원회입니다. 작년 10월에 뉴스레터를 통해서 활동 소식을 전해드린 이후 5개월 만에 인사드리네요. 작년 하반기와 올 해 소수자위가 주요하게 활동했던 소식들 전달해드릴게요.

(사진1 : 2월 월례회 –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연을 듣고 있는 소수자위 위원들) 

 

  •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연

소수자인권위원회에서는 기존에 주요하게 활동하고 있던 성소수자, 장애 인권 영역을 넘어, 올해는 새로운 소수자 인권 이슈의 발굴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소수자 인권 이슈에 대한 연례 기획강좌를 계획하고 있는데요, 2월 월례회 때는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이날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박상훈 활동가님이 ‘소수자인권의 시각에서 보는 HIV/AIDS 짚어보기’를 주제로,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의 타리(나영정) 활동가님이 ‘HIV/AIDS를 둘러싼 법·정책 이슈’를 주제로 강연해주셨습니다.

HIV, AIDS 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고 AIDS 는 질병의 이름! 이라는 것, 감염의 경로, 치료와 예방 등)를 나누고, UN AIDS 의 예방정책에 대해서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이 감염인에게 어떻게 과도한 인권침해가 되는지(전파매개행위의 금지 조항이 ‘추상적 위험’에 대한 형벌규정의 타당성, 과도한 감염인에 대한 취업제한 조치들의 사례 등), HIV/AIDS를 둘러싼 혐오와 차별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맥락에 의해 유통되고 조장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재소자/이주민/병역/취업 정책에서 어떻게 감염인을 배제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공부하는 등 자세한 논의까지 진행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4회의실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가장 많은 회원이 참여한 월례회였습니다!)

 

 

 

 

 

 

 

 

 

 

(사진2 : 2월 월례회 –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연자 타리(나영정) 활동가) 

 

 

 

 

 

 

 

 

 

 

(사진3 : 2월 월례회 –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연을 듣다가 눈 마주친 김동현 위원장) 

 

 

 

 

 

 

 

 

 

 

(사진4 : 2월 월례회 –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말하다 강연자 박상훈 활동가) 

 

  • 소수자인권판례평석(가칭) 발간 작업

소수자인권위원회는 아동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판례평석집 발간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민변에는 노동위가 편찬하는 ‘노동판례비평‘, 여성위가 편찬하는 ‘사법정의와 여성’ 등 각급 법원의 판결과 결정을 분석하는 평석집이 발간되고 있는데요, 소수자위와 아동위도 소수자 인권의 시각에서 판례평석집을 제작해보자! 하여 의기투합하여 집필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동, SOGI(성적지향·성적정체성), 장애, 수형자, 고령자 등 영역을 선정하고, 영역별 주목하고 비평해야하는 각급 법원의 판결, 인권위 결정을 선정하여 열심히 집필 중 입니다! 6월 발간을 목표로 제작하고 있으니, 회원 여러분들께서 많이 읽어주시길 바랄게요!

 

  •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 참가 신청 및 기획운영팀 모집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는 5월 31일 서울 핑크닷(전야제), 6월 1일 퀴어퍼레이드 본 행사로 날짜와 장소가 확정되었습니다! 민변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소수자인권위원회, 공익인권변론센터 명의로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운영해왔고, 작년에는 민변 무지개 깃발을 제작하여 자긍심 행진에도 참여하는 등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그간 소수자인권위원회와 공익인권변론센터 명의로 부스 참여를 하였지만, 두 단위에 소속되지 않은 많은 회원분들도 부스 프로그램 운영에 참여해왔기에, 올해는 민변 명의로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 운영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스 기획 운영팀을 모집하고 있으니 당일 뜨겁지만 시원한(?) 태양 아래에서 부스 운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 보내실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래요!

부스 기획운영팀 참여 신청 링크 : https://forms.gle/QfXUTTi5ebEuvoLQA

 

 

 

 

 

 

 

 

 

 

(사진5 : 작년 7월 서울퀴어문화축제 때 개시한 민변 프라이드 플래그) 

 

  • 인천퀴어퍼레이드 법률지원단 (인천지부, 소수자위)

작년 인천퀴어문화축제 때 혐오세력의 조직적 방해와 폭력 행동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이후 인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서 민변 인천지부와 소수자인권위원회에 법률지원 요청을 해오셨습니다. 하여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혐오세력의 증오범죄를 방치한 인천지방경찰청과 인천동구청을 상대로 고소 고발을 진행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개별 피해자들의 고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1월 24일에는 <한국사회 증오범죄 진단과 대안 : 2018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중심으로> 토론회를 이정미의원실, 인천퀴어문화축제 비상대책위원회,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공동으로 주최하여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증오범죄 실태를 중심으로, 나날이 혐오와 차별이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증오 범죄의 현황, 문제점 및 제도적 대안 마련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인천퀴어문화축제 토론회 자료집 : https://lib.minbyun.or.kr/document/2331)

 

 

 

 

 

 

 

 

 

 

(사진6 : 인천퀴어문화축제 국회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 

 

  • 수용자 인권 증진모임

천주교인권위,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소수자인권위원회가 모여 현재 수용자 인권 증진모임을 구성하여 해당 이슈와 논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수용자 인권 이슈는 과거 민변에서 활동하던 단위와 회원들이 있었으나, 현재 다뤄지지 않고 있던 이슈였는데요, 수용자의 과밀수용, 재사회화 권리, 최저임금 미달 노역 사례 등을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회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단체에서 수신 받는 구금 서신 중에서 공동대응 사례를 발굴하고, 자유권 규약 심의 중 수용자 부분과 관련한 집필을 진행할 예정이니, 해당 이슈에 관심 있는 회원들은 언제든 연락 부탁드려요!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

민변 명의로 참여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작년 10월의 평등의 행진 이후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및 발의를 목표로 많은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여 단체들을 방문하여 2019년 한 해의 주요 활동 계획을 공유하고, 각 단체의 사업계획과 차제연의 활동의 결합력을 논의하기 위한 ‘똑똑똑, 우리지금만나!’ 간담회도 진행 중입니다. 아 그리고 민변의 김호철 회장님이 올 해부터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직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못한, 어쩌면 ‘금기어’처럼 되어버린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해 민변 회원 여러분께서도 향후 있을 다양한 활동들에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 장신대 무지개사건 대리인단

작년 장신대에서 아이다호(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데이를 기념하여 ‘무지개 퍼포먼스‘를 한 학생들에 대하여 부당징계 처분을 한 일이 있었고, 위 학생들을 지원하는 대리인단이 구성되어 징계에 대한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등 활동 중에 있습니다.

[보도자료] 장신대 ‘무지개 사건’ 징계에 대한 무효확인소송 제기: http://minbyun.or.kr/?p=41297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장신대 뿐만이 아니라 종교를 기반으로 둔 많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데요, 대리인단에서는 종교 학교와 차별의 문제에 대해 전반적인 자료를 보고 스터디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부 모임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소수자위는 매달 3번째 수요일에 월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약물 인권 이슈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있으며, 판례 모니터링 (인권위 결정례, 장애, 수형자, 북한이탈주민, SOGI, 감염인, 고령자 등)을 매달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4월 5일(금)-6일(토)에는 월례회 겸 워크숍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무려 이태원!!!인데요, 이날 아주 재밌는 워크숍이 준비되어 있으니 쭈뼛쭈뼛하시지 마시고 많이들 워크숍에 참여해주세요!

언제든 소수자위는 열려있으니 회원들께서 문을 자주 두드려주세요! 그럼 다음 소식 때 만나요! 안녕~

 

(참여 문의 : 장길완 간사 010-7750-9413, [email protected])

 

 

 

 

 

 

 

 

 

 

 

(사진7 : 2월 뒷풀이 때 – 셀카는 놓칠 수 없다) 

 

 

 

 

 

 

 

 

 

 

(사진8 : 3월 월례회 때 익숙한 뒷모습과 신입회원) 

 

 

 

 

 

 

 

 

 

 

(사진9 : 작년 12월 송년회 때 너무 친해보이는 두 사람) 

 

 

 

 

 

 

 

 

 

 

(사진10 : 열공하는 소수자위 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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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3/2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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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지부에서 진행했던 시영운수 관련 소송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평석입니다.

 

 

통상임금 법정수당과 관련된 신의칙 법리의 쟁점

김주관 변호사 (인천지부)

1. 들어가며

최근 2019. 2. 14.자에 대법원에서 기존 통상임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하여 조금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9. 2. 14.선고 2015다 217287 임금 판결)

대법원은 213. 12. 18. 선고 2012 다 89399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의 사후적 통상임금 청구에 대하여 경영위험을 초래할 경우에 신의칙에 반하여 추가적인 임금 청구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선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판결에서 의미하는 경영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여부 및 신의칙에 위반한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없어서 혼란을 초래한 바 있었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선고를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 기준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번 판결의 요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간단한 평석을 하기로 한다.

 

2. 대법원 2019. 2. 14.선고 2015다 217287 임금 판결의 요지

단체협약 등 노사합의의 내용이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인 경우에, 그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위배되는 권리의 행사라는 이유로 이를 배척한다면, 강행규정으로 정한 입법취지를 몰각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그러한 주장은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없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노사합의의 내용이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을 위반한다고 하여 그 노사합의의 무효주장에 대하여 예외 없이 신의칙의 적용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본 신의칙을 적용하기 위한 일반적인 요건을 갖춤은 물론,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에도 불구하고 신의칙을 우선하여 적용하는 것을 수긍할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그 노사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되어 허용될 수 없다.

노사합의에서 정기상여금은 그 자체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전제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산정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를 전제로 임금수준을 정한 경우, 근로자측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가산하고 이를 토대로 추가적인 법정수당의 지급을 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관념에 비추어 신의칙에 현저히 반할 수 있다(대법원 2013. 12. 18. 선고 2012다 8939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다만 근로관계를 규율하는 강행규정보다 신의칙을 우선하여 적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때에는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하여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고자 하는 근로기준법 등의 입법취지를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업을 경영하는 주체는 사용자이고, 기업의 경영 상황은 기업내.외부의 여러 경제적.사회적 사정에 따라서 수시로 변할 수 있으므로,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중대한 경영상의 위험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기업경영에 따른 위험을 사실상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가 사용자에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여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3.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적 검토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첫째, 통상임금과 관련하여 추가적 법정수당 청구에 대하여 신의칙법리를 도입한 것은 2013년 위 항목에서 언급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였다. 강행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근로기준법의 영역에 신의칙의 법리가 도입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면이 있었으나, 기업측면에서 과도한 재정정 부담을 사후적으로 가지게 되어 기업도산의 위험이 초래된다면 결과적으로 노동자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다는 사회정책적 측면이 대법원 판사들의 논리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전체적인 취지가 기업경영 측면에 우위를 두고 노동자의 법정수당 청구를 하위에 두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보니 하급심에서 여러 혼란이 있었으나 대체로는 노동자의 추가적 법정수당 청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판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그런데 이번 시영운수 사건 대법원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측의 법정수당 청구를 조금더 확장하는 취지의 결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법정수당 청구는 근로기준법령에 의해 보장된 구체적 권리라는 점에서 이를 신의칙에 의해 부정하려면 사용자측에서 적극적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 대해서 입증하여야 한다고 본다. 사용자측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입증노력 없이 쉽사리 경영상의 위험성을 판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것은 노동법의 기본적 법리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이번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시영운수 대법원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해당성에 따른 추가적인 법정수당청구는 법원으로부터 인용될 여지가 높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사용자측에서 적극적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위험초래 상태를 입증한다면 법원도 사용자측의 손을 들어줄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향후에도 “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의 결론적 문구가 암시하듯이, 하급심 법원에서 이러한 추상적 기준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어찌되었든 이번 대법원 판결은 통상임금 관련 신의칙법리에 있어서 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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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3/2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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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위원회 활동소식

박수빈 변호사

지난 10월에 사법위 소식을 알려드렸으니 벌써 5개월이나 지났습니다. 사법위는 여전히 공수처 설치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 및 법원행청처의 사법농단 사태에 관하여 사법행정개혁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련의 사법농단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분노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우리 모임은 사법농단 TF를 결성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사법위원회 위원들도 적극적으로 이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사법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공수처 설치를 비롯한 각종 사법개혁문제가 해소될 수 있도록 우리 모임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18. 12. 11. 김인회 교수(사법위 위원)님을 모시고 ‘사법개혁을 생각하다’를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고, 사법개혁의 출발점이 어디여야 하는지에 대한 교수님의 진단을 들었습니다.

뒤이은 2019. 1. 4. 에는 2018.12.경 대법원이 발표한 법원행정처 개혁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람직한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민변 전 회원님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긴급 집담회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서선영 위원님의 <사법행정 현황 및 문제점과 개혁과제>에 대한 발제가 이루어졌고, 참가하신 사법위 위원님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의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의와 고민을 바탕으로 민변 사무처 산하 사법정책연구지원팀과 협업하여 2019. 2. 15. 민주사법 제1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사법위만의 공은 아니나 이 자리를 빌어 관심가져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현재 법원에서는 지난 2019. 1. 24.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의 중심 인물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민변은 위 재판들의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법농단TF는 대법원에 대하여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의 징계 및 재판업무 배제조치를 요구하였으며, 국회에는 사법농단 관여 법관 탄핵소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법위원회 활동에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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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4/0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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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회원인터뷰 – 천정배 변호사를 만나다

 

본 인터뷰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설립 30주년 사업의 후속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창립회원 아카이브’ 사업을 위해 진행된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당사자의 동의를 얻고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작성합니다.

 

민변 21기 자원활동가분들(김유정, 서승연, 이단비)과 함께 국회의원회관 천정배 의원실로 방문했습니다. 변호사님(‘천’)께서 자원활동가분들 이름을 여쭈시면서 “말이 좋아 자원활동가지, 이거 열정페이..”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주셨고, 이후 편하게 말씀을 이어가 주셨습니다.

 

 

심재섭 변호사 (민변 출판소통팀장, 이하 “심”): 민변 창립회원 선배님들께 민변 창립 당시의 이야기도 듣고, 후배들에게 해 주실 말씀도 듣고자 인터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다른 여러 일정이 많으실 텐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변호사가 되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먼저 여쭙습니다.

천정배 변호사 (이하 “천”) : 오래된 이야기네요. 연수원에 들어갈 때에는 판사를 할지, 검사를 할지 결정을 못했습니다. 연수원에서 실무 수습을 하는 도중에는 검사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위 동기들은 제가 판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한국의 형사사법이 운영되는 실정을, 제가 보기에는, 검사가 중요하지 판사는 좀 소극적이지 않나 하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법연수원 수료하고 78년 도에 수원에 있는 1전투비행단에서 공군법무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각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군복무 기간 중에 여러 일이 있었지요.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군검찰관 일을 했고, 이후 1212쿠테타, 80년 5.18. 전일 당시 김대중 선생의 구속 사건도 있었지요. 518도 있고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전두환 일당, 쿠테타 세력의 하수인으로서 검찰이 될 수는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엄 하에서의 험한 일들은 육군에서 일어났지요. 계엄사령관도 육군참모총장이었고. 전 공군법무관이었기 때문에 좀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육군 중심의 계엄사령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공군에서 법무관 한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을 한 일이 있었어요. 당시 육군에 있던 동기들이 하던 일들이란,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분들을 군검찰관으로서 기소하는 일, 군판사로서 사형선고하는 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인 김재규를 기소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게 되면, 제가 김대중 선생님을 기소, 재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탈영을 했으면 했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요. 김대중 선생을 단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저는 혹시라도 제가 가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미리 동료, 상사들에게 이야기를 해뒀습니다. 난 절대 가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공군에서는 왜 저를 그렇게 봤는지, 저를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당시 제 계급이 중위라서 육군에서 대위급을 보내라고 요청이 와서, 안 갈 수 있었습니다.

심 : 그때 가셨으면 지금의 변호사님은 안 계셨을 수도 있었을까요.

천 : 에이, 아무리 보내도 제가 안 가지요. 탈영을 했으면 했지. 제가 뭐 똘똘하게 잘 한 일은 없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심 : 변호사가 되는 것도 여러 길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 81년도 8월에 제대를 하고, 검사는 못하겠다 생각을 했으니 변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할지, 고향인 목포로 갈지, 광주로 갈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심 끝에 들어가게 되었고 4년 정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송무는 거의 없었고 주로 외국 클라이언트와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외국 변호사들과 팀이 되어서 일을 했지요. 그 안에서 영어도 그렇고 기존의 통상적인 변호사 업무와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운 좋은 기회였습니다.

 

심 : 서울대 법학과, 사시합격, 대형로펌의 국제분쟁 변호사라는 이력과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의 개업은 쉽게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천 : 비즈니스 로이어가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는 그 길로 끝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가겠다고 생각했어요. 4년차 이후에 2년 정도 외국을 보내주는 시점이었는데, 거기를 다녀와서 그만 두는 것은 좀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그 시점에 그냥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것 때문에 우리 딸들에게 타박을 받습니다. 그때 다녀왔으면 영어를 좀 했을 텐데, 아빠가 안 가서 우리가 영어로 고생이라고.(웃음)

85년도에 나와서 조영래 선배, 윤종현 변호사, 박석운 현재 진보연대 대표와 모여서 사무실을 시작했습니다. 김앤장에 있을 때 조영래 선배와 가까워졌어요. 워낙에 유명한 분이라 대학 때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친해진 것은 그때였어요. 그분은 학교 다닐 때부터 운동권의 지도부였고, 연수원에 가서도 운동으로 문제가 되어서 도피생활을 길게 하셨지요. 1980년도에 비로소 다시 연수에 들어갔어요. 원래 2기로 입소한 것으로 아는데, 수료는 12기에 하셨어요. 연수원에 계실 때 김장에 일을 좀 도와주러 오셨는데, 그때 알게 되었지요. 82년에 윤종현 변호사, 박석운 대표와 같이 먼저 사무실을 차렸더라고요. ‘시민공익법률상담소’라고 이름을 붙이고, 주로 산재피해자, 노동약자 등을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제가 김장에 있을 때, 조선배 먼저 나가서 하고 계시라, 저도 곧 나가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김장을 퇴사하고 합류하게 된 것이지요.

 

심 : 민변처럼 인권 신장에 헌신하는 변호사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변호사님께서 민변 창립회원이 된 이야기를 여쭙습니다.

천 : 민변은 88년도에 만들어 졌지만, 그 전에도 이름이 어떻든 조준희, 황인철, 이돈명, 홍성우 이런 분들을 주축으로 인권변호사의 흐름은 있었지요. 조영래 변호사님 역시 같이 활발히 활동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저 자신은 당시 사무실을 유지하는 일을 했어요. 소위 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돈을 잘 벌지도 못했지만요. 당시 조영래 선배가 망원동 수재사건, 권인숙 양 성고문 피해사건 변론을 할 때, 저는 사무실 안에서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관여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86년도 건대 사건이 있었잖아요. 워낙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때 우리 내부에서 일 시키는 것은 박석운 후배 몫이었는데, 천 선배 거기 좀 가봐, 하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접견을 가게 되면서 소위 시국사건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87년 대통령 선거일에 일어난 구로구 부정투표 사건을 본격적으로 맡았습니다. 구로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때 동대문 경찰서에 접견을 가서 만난 분이 김희선 선생하고, 김병곤 선생을 만났어요. 수갑을 차고 오더라고. 지금이라면 수갑을 풀라고 이의를 했겠지만, 그때는 신참이라 그런 말도 못한 기억이 나네요. 그 사건은 제가 끝까지 열심히 한 사건이에요. 그 사건을 계기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민변이 만들어졌지요. 당시 노장 인권변호사 그룹과, 연수원 기수로 13기 전후의 젊은 변호사들이 모여서 만든 거지요. 젊은 그룹으로는 이석태, 김형태, 조용환 이런 분들이었고, 좀 더 후배로 백승헌 같은 분이 있었지요. 전 위치가 좀 애매했던 것이, 나이로는 후배 그룹과 비슷한데, 연수원 기수는 좀 이르단 말이에요. 제 동기인 연수원 8기는 저와 서해교 변호사밖에 없었습니다. 좀 낀 세대였던 겁니다. 그 두 그룹이 주축으로 모였기 때문에 제가 뭘 할 여지가 없었어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을 걸요. 조영래 선배와 윤종현 변호사가 저도 집어넣어서 창립회원이 된 겁니다.(웃음)

정치인이 되다 보니까 민변 창립 주도라고 써주셨는데, 특별히 한 일이 별로 없네요.(웃음) 그러니까 저도 초기에는 좀 서먹서먹했어요. 후배 변호사들하고 잘 알지도 못했고요.

제가 민변 창립 즈음에 다시 김앤장에 들어간 것으로 기억해요. 개업할 때는 세금이다 뭐다 신경 쓸 것이 많았는데, 다시 큰 조직에 들어가니 편하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보장받고 다시 들어갔어요. 송무를 담당했습니다. 동시에 민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9년도 방북사건들, 임수경 의원,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리영희 논설위원 등 사건이 폭주하게 되었고, 제가 임수경 의원 사건, 리영희 선생 사건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김장에서 한 달에 200시간 일을 한다면, 10시간이나 김장 일을 하고, 나머지는 민변 사건을 했던 겁니다. 회사에 미안하기도 해서, 다시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일을 하다보니, 민변이 좀 더 체계적으로 일을 해 나갔으면 좋겠는데 너무 산발적으로 체계가 없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민변 일만 하는 상근 변호사를 뽑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상근 변호사를 하지는 못하고, 제 사무실을 민변이 있던 건물 바로 아래층에 내고 민변 일에 중점을 두어 했지요. 이후에 후임을 못 찾아서 민변 상근 간사는 제가 유일합니다.

이후에 당시 민변에서 제일 파이팅 넘쳤던 임종인, 이덕우 변호사와 함께 91년에 해마루 법률사무소를 만들었습니다.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하셨던 김창국 변호사님이 우리 셋과, 해마루라는 이름을 두고 해가 지는 석양에서 검객 3명이 모인 것 같다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도 모시고, 전해철 변호사님도 모시고 했지요.

 

심 : 민변 초기에 내가 이렇게 기여했다, 하는 점도 자랑을 좀 해 주셔요.

천 : 상근 간사로서 1년 정도 일을 하면서 제 업적이라면, 민변 회비를 5만원, 10만 원으로 올린 것입니다.(웃음)

또 기억을 더듬어보면, 국제 연대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서 비슷하게 활동하는 변호사 집단과 교류 기회를 만들었고, 지금도 지속되는 것으로 알아요. 또 제가 상근 간사를 할 때 ICCPR(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 관련 일을 한 것이 있습니다. 80년대 말 전두환 때인가 노태우 때인가, 국제인권규약에 가입을 했어요. 그 사람들 참 재밌어요. 아직 미국도 가입을 안 한 것 같은데, 독재자들이 그런 것은 잘 가입하고 그랬습니다. 규약에 가입한 나라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요구하고, 정부가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때 인권 NGO에서는 카운터 레포트를 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태우 정권 때에 법무부 인권과에서 최초 레포트를 냈고, 민변이 이것을 입수해서 카운터 레포트를 냈지요. 그때 조용환 변호사가 열심히 했습니다. 이후 빈에서 열린 세계 인권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국제 무대에 민변이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해외에서 민변의 위상이 훨씬 높아졌겠지요? 세계에서 최고의 인권단체로 인식을 하지 않겠습니까.

 

심 : 96년도, 그러니까 변호사로서 15년 조금 넘게 일을 하시고 나서 정치에 입문하시게 됩니다. 정치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천 : 인생에 모든 순간이 선택이지요.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처음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실망도 있었고요. 지금이야 김장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길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임용을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부모님 생각해서 못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바로 변호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주류적인 법조 체계에 비추어 비주류,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겁니다.

정치를 하게 된 것도 고민이 컸습니다. 95년에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을 만드셨고, 젊은 전문가 그룹을 영입하셨습니다. 당시 들어갔던 분들이 정동영, 신기남, 추미애, 유선호 이렇게 기억이 나네요. 변호사 일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정치를 하겠다, 이런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변호사로서 엄혹한 시기를 거쳐왔고, 군사독재를 실질적으로 청산했다고 보기 어려운 시점이었고, 김대중 총재를 잘 보필해서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을 했고, 지금 생각해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시 민변 선배들은 거의 반대하셨지요. 그 마키아밸리적인 세계에서 당신이 가서 굳이 상처입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심 : 정치인으로서 지금까지 일하시면서 민변에서의 활동이나 동료들의 존재가 도움이 된 면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천 :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제 정신적 고향은 민변이지요. 그 시절의 열정, 신념, 소명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워낙 정치를 한 세월이 있어서 지금은 이게 팔자이려니 하고 생각을 합니다.(웃음) 실제로 정치가 중요하지요. 사회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정치가 뇌수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하고 중요한 일인 것이 맞습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정말 말로하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명절이라고 쉬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 젊을 때만 해도 일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버릴 수 있다고 하는 시대적인 공감대가 있었으니, 일 중심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세상에 태평양 같은 문제가 있는데, 내 바가지로 몇 바가지라도 변화시킨다, 하는 각오였던 것 같습니다. 민변에서 배운 거지요.

 

서승연 자원활동가 : 정치를 하시면서도 많은 도전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천 : 제가 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기만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말을 해 본다면, 제가 72년도에 대학을 들어갔고 그때가 유신이었지요. 저는 청소년기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컸고, 또 신안, 목포 출신이다 보니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이 김대중 선생님이었고, 부모님도 박정희 독재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 환경에서 대학을 갔지만, 실제로는 사법시험 준비하면서 유신헌법이나 공부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 컸습니다.

이후 민변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 변론도 많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분들, 활동가분들이 극도의 탄압을 당할 때, 그 고난은 말할 수가 없지 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변호사로서 어찌 되었건 밥을 굶길 합니까, 상대적으로 수월했지요. 그런 점들이 부채의식으로 작용했고 심리적으로 압박이었습니다. 지금 내 처지, 내 조건에서 무엇이라도 역사 발전에 기여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후 민변에 있으면서 좋은 분들과 사귀고 함께 일할 수 있었고, 그게 지금까지도 도움이 됩니다.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동화되든지 아니면 떨어져 나오든지 하는데 보통 동화되는 것 같더라고요. 기득권에 있으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다 친구가 좋아서 그렇더라고요. (웃음) 저는 친구를 잘 사귀었던 것 같습니다.

 

김유정 자원활동가: 저도 변호사를 꿈꾸며 민변 자원활동가로 지원했습니다. 제게는 미래의 모습이고, 변호사에게는 한참 후배들이실 민변 변호사님들에게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천 : 제가 젊어서 직접 민변 일을 할 때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냐, 제대로 열심해 해보자, 말들을 해 왔지요. 그런데 지금 민변 후배들을 보면, 다 열심히 하고 아주 훌륭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작년 30주년 행사에 갔는데, 예전에 알던 동료만 알고 후배들은 거의 모르지요. 그럼에도 한국 사회 지식인 집단 중에서 이렇게 훌륭한 집단이 없어요. 흠 잡을 것이 없습니다.

 

 

이후 방송 인터뷰 일정이 있어서 민변에 대한 무한 애정을 표시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민변에 대한 사랑이 지금도 여전하시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기여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민변 초기의 체계를 잡는 데에 누구보다 헌신하셨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이렇게 아쉬울 수 없었습니다. 518 망언에 대한 대응, 선거제도 개혁 등 산적한 현안에서도 뚝심 있게 목소리를 내고 관철해 나가는 변호사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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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4/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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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구지부

영풍 석포제련소 폐쇄를 위한 법률대응단 활동

 

2018. 11. 11. 아침, 제3차 낙동강 현장기행 시민조사단과 함께 영풍 석포제련소로 출발했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의 석포제련소. 영풍그룹 계열인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와 함께 국내 아연 생산의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철제품 부식방지 도금용으로 주로 쓰이는 아연은 한국에서 자급 가능한 몇 안 되는 비철금속이라고 한다.
석포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다가설수록 미세먼지를 머금은 안개가 짙어졌고 인적은 드물었다. 석포 초입의 휴게소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은 차고 맑아보였으나 아래쪽에는 무시무시한 게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길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석포사람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들은, 아직 큰일 없었으니 앞으로도 쭉, 아니 자식들을 먹일 동안이라도 모른 체 해달라고 하는 듯 했다. 허나 그곳엔 진짜 무시무시한 게 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것은 희뿌연 무언가를 쉼 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희뿌연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낸 산은 시뻘건 맨살을 내놓고 있었다. 맨살을 드러낸 산을 감싼 낙동강은 휴게소에서 본 그 낙동강이 아니었다. 48년이나 아팠던 낙동강은 더운 숨을 내쉬면서 왜 이제야 왔냐고 우리를 나무라는 듯했다.

「김무락 변호사(대구지부 사무차장)의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실태 조사 후기」

2018. 11. 11. 제3차 낙동강 기행 중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실태 조사 모습

영풍 석포제련소는 1,300만 영남인의 상수원인 낙동강의 상류에 자리하고 있어 석포제련소가 야기하는 식수원 오염에 대한 불안감이 낙동강을 따라 영남지역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민변 대구지부에서는 법률대응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김무락, 박경찬, 백수범, 성상희, 이유정, 정재형, 최지연 변호사)

1970년 영풍이 봉화군 석포면에 제련소를 준공, 가동하여 온 이래 50년 가까이 누적되어 온 환경오염의 문제는 석포면이 위치한 지역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석포면 인근 주민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6월에 와서야 시민들이 석포제련소부지 내 토양이 중금속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 국민권익위에 신고를 하였고, 2015. 3. 토양정밀조사결과 석포제련소 부지 내 6만여 ㎡의 토양이 토양오염우려기준의 최대 414배 초과하는 중금속이 검출되면서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심각성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봉화군이 1,2공장 부지의 오염토양을 정화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주식회사 영풍(이하 ㈜ 영풍)은 토양정화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가 봉화군에 토양정화기간을 2년 연장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봉화군이 거부하자 2017. 5. ㈜영풍은 봉화군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행정소송에서 1, 2심은 ㈜영풍이 승소하였고, 현재 대법원에 상고심이 진행중입니다.

2018년 2월 시민들이 ㈜영풍의 폐수 70만톤 무단방류 사실을 신고하였고, 관계기관의 합동점검 결과 7가지 불법행위가 적발되어 2018. 4. 5. 경상북도가 조업정지 20일 행정처분을 내렸습니다. ㈜영풍은 이에 불복하여 경상북도지사를 상대로 조업정지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심판을 제기하였다가 기각되었는데도 다시 대구지방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1심이 계속중이고, 2019. 4. 3. 법률대응단에서는 봉화주민 4명, 안동주민 2명으로 피고 보조참가인을 모집하여 보조참가신청서를 대구지방법원에 제출하였습니다. 피고 보조참가인 소송대리인에 대구지부 회원 19명이 연명에 동참하였습니다.

 

▷ 민변 대구지부 주최 토론회

2018. 11. 14. 민변 대구지부와 영풍 석포제련소 공동대책위원회는 ‘낙동강 최상류 영풍 석포제련소로 인한 식수원 오염 실태와 법률대응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백수범 변호사는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행위에 대한 법률대응 방안을 차분히 설명하였고, 토론자로 참여한 최지연 변호사는 백수범 변호사의 법률대응 방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정토론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토론회에는 정재형 변호사(토론사회), 김무락 변호사(전체 사회), 오랜 기간 영풍 석포제련소 문제를 다뤄 온 맹지연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국장,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 이상식 영풍제련소 공대위 공동대표, 신기선 영풍제련소 공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 참여하였습니다.

 

▷ 2018. 11. 30. KBS 추적60분

“낙동강 미스터리, 48년 영풍공화국의 진실”방영

2018. 12. 18.~19. 1박 2일간 봉화 승부리를 방문한 백수범, 김무락 변호사

 

 

2019. 3. 14. 영풍공대위와 법률대응단 합동회의 및 대구민변과의 간담회

 

▷ 법률대응 진행상황

토지정화명령 건은 법률검토를 거쳐 봉화군과 대법원에 법률의견서를 제출하기로 하며 현 상황에서 적절하고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추가 대응방법을 검토하기로 하였습니다. 3공장 불법건축물의 합법화 과정, 2, 3공장 폐수 무단방류와 관련하여서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형사고발과 감사청구 등의 법률대응을 하기 위해 검토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손해배상소송 관련하여서는 우선 소수의 원고라도 모집하여 시범소송으로서 영풍 석포제련소 오염물질 배출로 인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법률대응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 1차 모금 마무리하였습니다. 개인과 단체 합하여 101명이 참여했고 모금액은 2천여만원입니다. 모집된 성금은 원고들이 소송비용에 대한 부담없이 소송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호사보수를 포함한 각종 법률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이 쌓여 다행히도 최근 여러 방면의 환경이 진전되어 가고 있으니 이 불씨를 잘 살려가면 머지 않아 문제해결의 적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민변 대구지부는 그동안 애써오신 영풍제련소 공대위와 봉화대책위 및 활동가 분들과 협력하여 영풍 석포제련소 문제에 함께 대응해 나아기로 하였습니다. 대구지부의 활동에 전국 회원님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며 대구지부 근황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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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4/0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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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광주전남지부 20주년 기념행사 준비기

과연? 과연!

 

–  이소아 

 

 

지난 2019. 9. 9. 저녁 광주지부 20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렸지요. 저녁 6시부터 지하 1층 로비에서 정말 맛있고 예쁜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행사장에 들어서니 민변 회원분들을 포함하여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시는 귀한 손님들이 이미 자리를 많이 채우고 계셨습니다.

김정호 지부장님의 “인사는 생략한다”로 요약되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0년간 광주지부 회원분들이 시민으로서, 변호사로서, 민변회원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를 그 자리에서 모두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나 빨리 끝났다고 느끼는 그 시간 동안 참석한 모두는 감격하고, 감동했고, 울고 또 웃었습니다. 특히 지부 회원분들께서 직접 준비하신 변론기 낭독과 연극 퍼포먼스는 지금 돌이켜 떠올려 보아도 그 감동이 다시 살아납니다.

행사의 내용을 그려드리는 것 대신, 광주지부 회원분들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얼마나 열심히 행사를 준비했는지 그 과정을 이소아 회원님의 글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 2019. 1. 말경 준비단 첫회의

7명이 모였다.

각자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하면 멋진 것을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쉽지 않음을 느낀다. 입 밖으로 꺼내면 해야 하니까.

이러저러한 논의 끝에 행사 자체와 20주년을 갈무리할 백서?변론사? 크게 두가지가 필요하다는 가닥이 쳐졌다.

회의 초반 행사를 가볍게 할 것인가, 멋지게 할 것인가로 나뉘었지만, 멋지고 의미있게 하자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2년 전 대전충청지부 20주년을 보고 왔던 김상훈 전지부장님의 요구도 한몫 했다(나도 그 행사를 함께 보았는데, 여러 시민단체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보였었다). “우리는 무조건! 이보다 멋지게 해야할 것이여!”

멋지게 하려면….

일단 20주년 행사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정할 그 무언가(문구? 슬로건? 목표?)가 있어야 한다. 장은백 변호사가 “이번 행사는 뭔가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묻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답하는 그런 컨셉이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오! 그래! 미래가 과거에 묻다. 과거가 미래에 답하다. 뭐 이런 제목이면 되것네!

 

나는 공익소송기획단장으로서도 필요한 일이기에 변론사 작업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김정희 변호사님이 “10주년 때도 백서를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만들지 못했다. 너무 힘든 작업이다. 그냥 부담을 갖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걱정을 하셨다. 안다. 얼마나 손이 가는 작업이고 피곤한지. 그러나 단체의 지속가능성과 성장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엮어가는 것은 중요하니까, 또 내가 잘 할 수 있으니까, 또 일은 그냥 하면 되니까 하기로 한다.

우리에겐 10년전에는 없었던 훌륭한 후배 동료들이 포진해 있으니까(김수지, 정다은, 송창운, 장은백, 권소연, 류리, 박인동 등등등등등등)!

 

앞으로 정해야 할 것 채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구체적인 내용은 차기 회의 때 기획안을 세워와서 논의하기로 해산했다.

 

#2 – 변론사 밑작업

늘 그렇듯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수소문해서 모으는 것이 힘들다.

수소문해서 사건리스트들을 정리해보았는데 리스트만 40개 사건 정도 된다. 이걸 다 책에 넣을 순 없다. 시의성과 중요성을 기준으로, ‘광주’ 민변에 더 의미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20개 정도를 추렸다. 개중에는 의미는 있으나 기록이 없어서 빠지게 된 것도 있었다.

연초부터 역대 지부장님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돌리고 문자를 드리고, 직접 찾아 뵙고 하여 자료를 모았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만나뵙기 쉽지 않은 경우, 사건에 대한 기억은 있는데 기록이 폐기된 경우, 공동대리로 하다보니 그때 그걸 누가 했는지 정확하지 않은 경우 등등등. 자료를 모으는 것이 오래 걸렸다. 그냥 기록만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간략한 사건메모표(소회를 포함하여)를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요청을 드렸으나, 이것을 독촉하는 것도 일이라는 것을 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이 지루하고 빛이 안나는 밑과정을 끈기 있고 꼼꼼한 정다은, 송창운 변호사가 해주었다. 독촉독촉독촉하다가 결국에 안되면 각자 직접 기록을 보고 사건메모표를 작성하였다.

추려놓고 보니 ‘광주’ 민변의 변론사의 흐름이 보인다. 다양성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익변론들이 어떻게 다변화되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3 인터뷰와 동영상

행사 당일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활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동영상만한 것이 없다. 사진을 모아 편집하는 정도 말고 뭔가 더 나은 뭔가가 필요하다. 선배 지부장님들 인터뷰를 해보기로 한다. 선배들만 하면 재미 없으니 후배들도 집담회 형식으로 인터뷰 해보기로 한다.

학보사 기자 출신인 김수지 변호사가 있으니 주 인터뷰이를 하고, 내가 카메라가 있으니 동영상과 사진을 같이 찍고, 누가 속기를 하면, 인터뷰 할 때 동영상, 사진, 속기를 같이 할 수 있어서 나중에 일을 줄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을 가끔 후회하기도 했다.

첫째로 동영상, 사진, 속기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인터뷰이가 3명은 따라 붙어야 안정적인데 그 일정들을 조율하는 것이 어려웠다. 인터뷰 일정을 여러번 펑크내는 경우도 있었고 솔직히 포기해버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칠만도 한데 한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함께 챙겨주고, 막판에 1천쪽이 넘는 원고를 직접 편집한 김수지 변호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또한 갑작스런 요청에도 흔쾌화게 속기를 맡아준 권소연, 김민아, 류리, 김성익 변호사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둘째로 내 동영상 기술이 무척 후회됐다. 결국 쓰지 못한 컷도 있고…. 결국 전문가의 일은 전문가에게! 라는 깊은 교훈을 다시 새김.

 

#4 행사 장소, 식사 !!!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

식사가 가능하고, 행사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200명 정도는 올 수 있는 곳. 섭외하기도 어렵다. 장은백 변호사, 박상희 간사 등이 여러 장소를 답사한 결과 5. 18 기념문화관이 좋겠다고 결정된다.

5.18 재단 및 광주광역시 담당 공무원과 장소 협의는 20주년 기념사업준비단 단장인 오래한 정인기 변호사님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행사에서 중요한 것은…. 밥이다.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부분도 각자 그리는 상이 다르다. 일단 몇가지 업체에서 견적을 받아보기로 하고 회의 해산.

 

#5 연극 퍼포먼스 라고라고라! – 과연?

민변 본부 총회에서 보았던 변론 낭독회를 하기로 한다. 우린 변호사집단이니까.

그런데 같은 것을 다시 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무얼할까… 하던 중 전두환 회고록 명예훼손 형사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 재판에서 피해자로 나오는 증인 분들의 이야기를 그냥… 간단히 모의법정 같은 증인신문을 요약해서 무대위에서 해보자 라고 의견이 나왔고 장은백 변호사가 주관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장은백 변호사는 모의재판 증인신문에 대한 아이디어와 개요를 마련하기 위해 전두환 재판을 재판방청하고 속기 메모를 해왔다. 재판은 어떤 날은 밤 9시에도 끝나고 그랬다. 메모를 하다 지친 장은백 변호사가 몰래 녹음을 하기도 하였고, 그 녹음한 것을 녹취록으로 푼 값만 30-40만원이 들었다.

그런 원자료들을 가지고 장은백 변호사와 나는 7월 초순엔가, 극단 토박이에서 활동하며 광주의 여성활동가들과 ‘시나페’라는 연극모임을 하는 나창진 감독님을 만났다. 자료들을 감독님에게 넘겨드리고 7월 말로 다음 회의를 잡았다.

충격은 나창진 감독님과 두 번째 회의에서 있었다.

5.18 기억 왜곡과 관련한 것이기는 하나 완전히 다른 내용의 퍼포먼스 대본을 만들어서 오신 것이다. 내용이 좋기는 했지만, 기존에 장은백 변호사가 애쓴 원자료들은 모두 쓰이지 않는 것들이 된 허탈감도 컸고, 춤을 추고, 외치고, 하는 그런 퍼포먼스를 우리가 연습할 수 있을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의심도 들었다.

장은백 변호사와 내가 생각한 ‘증인신문’이라는 방식은, 전문배우들이 구현한다 하더라도 어설프게 보일 수 있는 데다가(왜냐하면 그날 그 상황 그 감정을 알 수 없으니까), 숙련되지 않는 변호사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이야기 한다면, 자칫 무대 위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우습게 보이는 불상사가 생긴다는 취지셨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한 것은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여러 다큐멘터리나 극을 통해서 드러났기에 효과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지 않다는 취지이기도 하셨다. 그래서 역사 쿠데다, 기억 쿠데다를 시도하려는 세력들을 신나게 몰아내고 정화하는 방향의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장은백 변호사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증인신문이 적절하지 않으냐, 또한 우리는 변호사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단체이고 행사가 지향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나창진 감독님의 연극인으로서의 고집.

광주 민변의 구성원으로서 행사를 총괄하는 변호사로서의 고집.

둘 사이 팽팽한 긴장감 사이 어딘가에서 안절부절하는 나.

 

 

#6. 연습 시작

준비단 논의 끝에 감독님의 안대로 진행하기로 결정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감독님과 장은백 변호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채 연습이 시작되었다(긴장감은 나만 느꼈을수도).

장은백 변호사의 카리스마로 많은 후배 변호사들이 첫 대본 리딩에 함께 하였다.

대본을 받아든 이들의 눈빛도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아무리 간단한 안무라고 해도 춤도 추고 노래도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한가? 감독님이 말하는 대로 나오는 것인가? 흔들리는 눈빛들을 보니 확신을 주고 싶은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서.

에라이 모르겠다. 쪽 팔리지만 일단 신나게 해보는 거지 뭐.

 

준비물 : 확성기, 빗자루, 모자, 태극기, 일장기, 성조기, 뺑뺑이 안경, 의상, 그리고 5.18 상징물

준비물 중 5. 18 상징물이 중요하다.

나비와 노란리본과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것을 50개 만들어야 한다.

전민규, 김성익 변호사가 주말에 가위질과 본드질을 해서 완성하기로 한다.

재료 구입은 장은백, 박상희, 전민규….

 

#7. 빗자루춤과 5.18 선무 방송

빗자루를 들고 왜곡 세력들을 싸그리 몰아낸 다음 춤을 추는 장면이다. 대본엔 지문만 있고, 7가지 동작이 있다. 말을 안해도 되는 건 좋은데 몸이 힘들다. 춤 연습을 한지 내게는 한 시간 연습한 것 같은데 10분밖에 안지났단다. 동작 외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신나게 추라는 주문이다. 모든 댄서들에게 존경을….

연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당시 선무방송을 외치는 부분이었다. 그 간절함을 사실은 모르겠는 것이다. 안다 해도 그것을 목소리로 외쳐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내 안의 어떤 감정이 ‘이 이상은 안되겠어’라고 차단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넘어서 보기도 전에 연습과 공연이 끝나 버려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넘어보고 싶으면 왠지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아서.

 

#8. 돌발 상황

큰일났다!

좀비 역할이 2명 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한명이 못하게 될 상황이 되었다.

더 큰일 났다!

코러스 4명이어야 하는데 그 중에 한명이 못하게 될 상황이 되었다!

남은 5명으로 어떻게 하나?!!!

결국 만능 재주꾼 박인동 변호사가 좀비와 코러스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좀비 역할을 하던 사람이 코러스로 또 나오면 이상하니까 의상을 바꾸어 입고 태극기 안경도 바꾸어 쓰기로 한다.

처음 7명에서 5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연습을 해가면서 뭔가 조금씩 합이 맞추어 진다.

 

#9. 리허설과 무대감독

극에서 중요한 것은 배경 영상, 음향, 조명이 적절한 타이밍에 바뀌는 것이다.

기술감독, 무대감독이 따로 있는 이유!

나창진 감독님 지도 하에 장은백 변호사가 조명실에서 조명과 음향을, 박상희 간사님이 무대 뒤에서 영상을 맡았다.

행사 일주일 전에 한번, 행사 당일 3시간 전에 모여서 다시 한번 연습을 했다.

무대에 직접 와서 연습을 해보니 조금씩 희망이 보인다.

 

#10. 행사 당일 – 과연!

재판보다 안 떨린다.

재판은 내가 변호사로서 실력을 보여야 하는데, 어차피 나는 전문 연극인이 아니니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큰 실수 없이! 공연을 마쳤다.

모두 집중해 주셔서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믿지 못하는 우리를 이끌고 이 기획을 이루어주신 나창진 감독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법률가인 변호사가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

내년 5. 18 40주년을 앞두고

앞으로 5.18이 어떠한 방향성과 확장성을 가져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어서 기뻤다.

 

 

다음 날 장은백 변호사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로 마무리 한다.

 

“일당백을 해주었던 퍼포먼스팀

5주간의 연습

연출 장인 나창진감독님

수차례 고민과 이견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믿지는 못했지만

시키는대로 따라가니 믿을신 한 글자가 오롯이 남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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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9/2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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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연합산행 후기 –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던 팔공산 산행

대구지부 변호사 박정민

 

2019. 10. 19. 토요일, 총 43명(대구지부 13명, 광주전남지부 10명, 부산지부 10명, 대전충정지부 3명, 본부 7명)의 민변회원·가족들과 함께 팔공산 자락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오전 10시에 팔공산 분수대광장 앞에서 집결한 후 탑골등산안내소부터 깔딱고개를 넘어 동화사까지 2.5km에 이르는 코스였는데 1시간 정도 산길을 걷다가 1-2시간 정도 동화사 경내를 두루 구경할 수 있는 팔공산 올레길 중 하나입니다.

가을비가 자주 내리더니 지부연합 산행을 하는 날에는 간만에 날씨가 화창하게 좋았습니다. 대구에 살면서도 정말 오랜만에 동화사에 가보는 거라서 나름 설레고 마음이 들떴습니다. 대구지부도 총 9명의 회원이 모여서 집결지로 향했습니다. 손님맞이를 하느라 집결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삼삼오오 도착하는 회원분들께 김밥과 과일 등이 든 간식봉지를 나눠드리고 함께 먹으며 모두들 무사히 도착하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등산스틱 등 제대로 된 산행차림을 하고 오신 분들도 계셔서 괜스레 걱정이 되었습니다. 사전답사팀은 회원들이 힘들지 않게 팔공산 구경을 하실 수 있도록 가벼운 산책코스를 짰다고 했기에 혹시나 먼 길 오셔서 실망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산행이 시작되고 처음 시작된 깔딱고개는 거리는 짧았지만 정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듯 하였습니다. 저질 체력임을 실감하는 순간 고개 정상에서 여유있게 쉬고 계시는 회원님들을 뵈니 민망하였습니다. 깔딱고개 위에서 각 지부별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몇 선배님들은 지부연합산행의 시초였던 대구지부가 부산지부 회원들을 팔공산에 초대한 2008년의 추억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때는 케이블카 타고 올라갔다고 하신 말씀에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산행당일에 대구민변은 대구변호사회의 단체여행 일정과 겹쳤었는데 광주변호사회도 단체일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광주민변에서 많은 회원들이 참석해 주셨고 일정이 겹쳐 더 많이 오지 못한 미안함과 안타까움까지 전해 주셨습니다. 대전지부에서는 발목 부상에도 참석하셔서 일당백 투혼을 보여주겠다고 하신 회원님도 계셨습니다. 매번 같은 얼굴을 본다며 나름 반가움을 표한 회원도 계셨는데 저도 그랬습니다. 2017년 부산 금정산과 2018년 순창 강천산 지부연합산행을 다녀온 덕분에 그때 뵈었던 다른 지부 회원님들은 더욱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소개를 마치자 단체사진을 찍은 후 이제 동화사 뒷길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분들을 위해 더 위쪽으로 올라가실 수 있는 염불암 산행을 권해드렸고, 10여명의 회원들이 염불암을 다녀오셨습니다. 저는 체력상 무리하지 않고 가볍게 산길을 만끽하고자 다른 회원들과 바로 동화사로 내려왔습니다.

동화사에 들어서자 작은 음악회가 한창이었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국화로 만든 미로같은 길이 있었습니다. 실제 미로는 아니고 한 방향으로만 길이 나 있어서 걷다보면 출구가 나오는 재미난 곳이었습니다 대웅전 뒤로 하늘하늘 피어난 코스모스, 청명한 파란 하늘, 맑은 바람. 고즈넉한 옛 건물, 좋은 사람… 묵은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리는 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사여래대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예전에는 엄청 크게 느껴졌던 불상이 지금 와서 보니 그리 크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민변의 역할과 위상이 너무 커서 민변 회원이 되는 것 만으로도 어렵고 힘들게 생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편안하게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저의 마음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정된 산행을 모두 마치고 사전답사팀이 자신있게 자랑하던 식당으로 갔습니다. 오리능이백숙과 참나무장작바베큐.. 본부에서 솔직히 대구는 음식은 기대하지 않고 왔는데 정말 맛있다는 칭찬까지 하실 정도였으니 상상이 가시지요? 대구지부 회원께서 본인 대신 보낸 보드카 한 병과 팔공산 불로막걸리에 광주지부에서 공수해 오신 무등산 막걸리까지 더해지니 식사자리는 절로 흥에 겨웠습니다. 이에 광주지부 회원님의 산도깨비 노래 한 자락이 더해져 맛과 즐거움을 돋우었습니다. 여흥을 해소해 드리기 위해 식당에 노래방기기까지 부탁하여 준비하였지만 모두들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오셔서인지 3시도 되지 않아 일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기차예약 시간이 3시간 정도 남은 본부팀과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며 잠시 쉬었다 갔습니다. 대구지부 몇몇 회원들은 그날의 산행이 무척 좋아서 당장 다음 달부터 매월 산행을 함께하자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고, 한라산·백두산·히말라야 등반까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먼저 설산이 멋진 태백산부터 가보자는 꽤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나누었습니다.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는 것 같습니다.

본부팀은 1시간 정도 일찍 기차시간을 당겨 서울로 올라가셨고 대구민변도 저녁 5시 무렵 헤어졌습니다. 집에 가던 길에 대구민변 최지연 변호사와 함께 맥주 한 잔만 마시고 가기로 하였다가 결국 19병이나 마셨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 날이었습니다. 언젠가 민변 회원님들과 다리 뻐근하게 한라산, 백두산을 오르고 밤새워 함께 술 마시며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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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11/0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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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7월에 민변에 가입한 강솔지입니다. 벌써 2019년 한 해가 다 저물어가네요. 올해는 저에게 모든 것이 새로워서 그랬을까요. 다른 때보다도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민변과 친해지고 싶은 당신에게” 신입회원 설명회를 한다는 공지글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는 이곳이 매우 친절한 모임이구나라는 생각. 한편으로는 신입회원 ‘설명회’와 가입시 제공되는 ‘민변 사용설명서’가 보여주듯, 생각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곳이구나라는 생각.

아직은 모임에 나가도 왠지 모르게 머쓱하고 어색한 신입회원인지라, 그런 마음을 좀 덜어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설명회에 참석했습니다.

1부 순서는 민변의 정체성과 활동에 관한 안내였습니다. 김진 부회장님이 ‘민변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 김준우 사무차장님이 ‘민변의 위원회 등의 활동’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주제만 보면 상당히 지루했을 것 같지만, 두 분 모두 얼마나 말씀을 재밌게 해주시는지 웃느라 졸릴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민변의 역사를 깨알같이 적은 ‘민변백서’가 대회의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뿐이지만.. 김진 변호사님 말씀대로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받는 것보다 어딜 찾아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인덱스(Index)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니까 그것 나름대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2부 순서는 민변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3-5년차 변호사들의 경험담을 나누는 자리었습니다. 박수진 변호사님, 임재성 변호사님, 이종훈 변호사님이 패널로 참여하셨습니다. 송상교 사무총장님의 진행으로 신입회원들의 질문을 받아 패널로 참석하신 각 변호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손을 들고 직접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신입회원들이 하는 질문들이 꼭 제가 묻고 싶었던 것들이라 용기를 내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했습니다.

답변을 해주신 선배 변호사님들이 활동 중인 위원회나 가입이유, 민변 활동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던 변호사님이 “사무실 업무가 많아 민변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는 고민 앞에서는 모두 입을 모아 “지금은 바빠도 눈팅을 잘 하고 있으면 언젠가 활동을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위로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다고. 민변의 수 많은 활동 중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면 된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민변 입회원서를 쓰면서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하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민변에 왜 가입하는지, 앞으로 무슨 활동을 하고 싶은지. 그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좀 더 투명하게 그 답을 써내려가겠지만, 누구든지 그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로 괜찮다는 위로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행사를 준비해주신 여러 선배님들, 그리고 참석하셔서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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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11/05-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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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교육청소년위원회 소식

이철승교수초청 ‘불평등의 세대’ 세미나 후기

 

2019년 11월 6일 민변 교육청소년위원회에서 ‘불평등의 세대’ 저자인 이철승교수를 초청하여 저자강의를 듣고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이철승 저,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 지성사 출판) / 사진출처: 문학과 지성사

이철승교수의 위 저서는 ‘386세대의 기득권화’ 담론의 촉매가 된 책으로, ‘조국사태’를 전후하여 ‘386세대의 기득권화와 위선’을 공격한 다른 책이나 기사가 단순히 ‘정치권에서의 386과잉대표’ 만을 언급하면서 ‘세대담론’에 머무르거나 진보를 도매금으로 비판하기 위한 ‘진영논리’의 산물이었던 것과는 달리, 386세대라는 ‘앵글’로 (실제 이 책에서는 1930년대생, 1960년대생, 1990년대생을 기준으로 노동, 소득, 자산 등 경제요소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위계구조‘와 ‘계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철승교수는 강의처음에 ① 80프로는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만 반대급부로 청년층의 실업율이 20프로까지 이르는 남부유럽 유형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등) ② 20프로는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만 나머지 80프로는 비정규직과 청년층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화되어있고 청년실업이 높은 유형 (한국) ③ 노동시장이 모두 유연화되어 있는 대신에 경제가 잘 돌아가서 일자리가 많은 유형 (미국) 의 세 유형을 제시하고 어느 사회에 살고 싶으냐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상장기업중 상위 100개 기업의 출생 세대별 이사진 점유율에 따른 기업의 최근 5년 자본수익율분포입니다.

“국내 100대 기업을 살펴보니 이사진 중 50~60대 고연령자 비율이 80~100%에 이르는 기업들이 실적이 좋지 않았다. 우리은행, 대우조선해양처럼 정부가 최대 지분을 가진 기업들이다. 오너가 없는 기업들에서 한 세대가 연대해서 나눠 먹는 거다. 이런 노동자의 이익집단화와 비효율의 증대는 남미 또는 남유럽 방식인데, 나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생이 20~40%까지 이사진에 포함된 회사들, 네이버·코웨이·아모레퍼시픽·엔씨소프트 등은 자본수익률이 10~30%로 선두그룹을 형성했다. “

이외에도 이철승교수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서의 세대권력의 형성’ (시민단체동원네트웍과 정책네트웍지표의 1991년부터 2016년까지의 시계열변화지표와 1996년부터 2016년까지 연령별 국회의원 당선자수를 통하여 386세대가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서 세대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과 ‘시장에서의 세대권력의 형성’{1998년부터 2017년까지 100대 기업 이사진 세대별 ­ 시기별 분포, 결합노동시장지위 지위별 월평균 임금분포(2004년부터 2015년까지 대기업, 중소기업 / 정규직, 비정규직 / 노조, 무노조의 3요소로 각유형의 월평균 임금을 분석)를 통하여 386세대가 시장에서 세대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을 설명·논증하고 (자산분석도 있는데 자산에 있어서만은 아직 1930년대생인 산업화세대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입니다.) 네트웍 위계의 희생자들로 청년과 여성을 지목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에너지로 충전된 젊은이와 여성들을 조직 최상층으로 끌어올려 ‘무지개 리더십’을 구성하면 (386세대의 자기희생을 요청하십니다.) 경직된 조직 문화와 장기집권으로 인한 생산력 저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장 강사법시행으로 인해 강사채용의 문이 좁아졌는데요 이의 타개를 위해서 국가의 지원확대이외에도 정규직교수의 자기희생모델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철승교수님도 강사법시행으로 인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시면서 정교직교수의 자기희생을 언급하시더군요.

이철승교수님의 강의는 조용환변호사님이 다른 모임에서 이철승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주선을 해주셔서 성사되었는데요, 조국 전법무부장관사태로 촉발된 ‘공정성강화’ 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세미나가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으로 이철승교수님 ‘불평등의 세대’ 세미나 상황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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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11/2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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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에는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동료들이 있다

– 강은옥 변호사 인터뷰 –

 

변호사님 민변에는 최근에 가입을 하셨죠?

아니요, 2007년에 가입했습니다. (웃음)

[, 초장부터 이런 실수를보통 기본적인 사항을 다 숙지하고 가는데, 변호사님과의 친분 때문에 중요한 체크를 빠뜨렸습니다.]

 

변호사님을 처음 뵌 것이 2018년 봄이어서 막연히 그때라고 생각했어요.

그 즈음이 제가 교육부 TF 일을 끝내고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가 슬슬 민변에 다시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온 것이 17년 9월이었어요.

제가 민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됐다고 느끼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공무원일 때는 점심 모임이나 위원회 회의 같은 민변 모임에 나가기가 어려웠고요, 그래서 시간이 맞는 총회나 연말 송년회 정도에만 참석을 할 수 있었어요.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는 더욱 참석이 힘들었지요.

작년부터 개업을 하면서 사무실도 민변에 가까워지고 하니까, 시간이 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자주 참석하려고 해요. 노는 모임에 특히요.

 

민변에 가입할 때 이야기를 부탁드려요.

연수원 수료를 2007년에 했어요. 수료하고 취업된 후 바로 가입했던 것 같아요. 2007년 5월쯤이었나…

민변 변호사님들하고 연을 맺은 건 91년도였어요. 유현석, 김창국, 박연철, 이석태 변호사님께서 도움을 주신 일이 있어서 민변을 알게 되었죠. 당시 변호사님들께서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셨고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법대에 다니면서 사법시험을 응시할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을 때라, 나도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들어가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입할 때 추천인이 누구였더라?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정연순 변호사님이셨을 것도 같고… 그때 정연순 변호사님이 국가인권위에 계셨을 때니까, 김진 변호사가 했나? 잘 모르겠네요

위원회는 여성위, 교육위, 노동위 순서로 가입했어요. 여성인권위원회는 여성변호사로서 민변에 들어오면 당연히 가입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입했었고, 교육청소년위원회는 제가 교육청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니까 이용우 변호사가 같이 일하자고 해서 들어갔죠. 노동위원회는 올해 2월에 김진 변호사 송별회하는 술자리에서 김진 변호사가 ‘노동위에 들어오라’고 가입 권유를 했고, ‘알았다’하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작년에 오사카 노변단 교류회 참석도 했고, 노동위 들어가서 노동 관련 일을 배우고 싶기도 했어요)

변호사님께서는 연수원 마치고 송무를 바로 하실 생각은 없으셨던 건가요?

연수원 나왔을 때 제 나이가 서른일곱이었어요. 당연히 여기저기 지원을 했죠. 용납할 수 없는 사무실을 제외하고요. 어디서든 송무를 해 볼 생각이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 나이대의 여성변호사를 고용하려는 사무실이 거의 없었어요. 흔하지 않았지요. 연수원 수료하고 두어 달 동안은 취직이 안 돼서 고민을 했어요. 그렇다고 아무 회사, 기관이나 가고 싶은 생각은 또 없었고,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그때 마침 인권위에 결원이 생겨서 지원을 한거죠.

제가 인권위에서 나온 게 11년 6월이니까, 4년 2개월 정도 일했네요. 퇴직하고서는 1년 가까이 쉬었고, 12년 5월부터 16년 7월까지 전라북도교육청에서 일을 했어요. 그리고 17년도 10월부터 18년 2월까지 교육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TF에서 일했습니다.

 

변호사가 인권위에서 하는 업무에는 어떤 것들인가요?

기관마다 다르겠지만, 송무를 하기도 해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들어갈 때를 생각해보면 인권위에서 변호사를 꼭 배치하는 몇몇 부서가 있었어요. 결정문 작성할 때 검토를 하기 위해 상임위원실에 한 명, 조사국에도 변호사를 배치했고요. 법무감사실에도 변호사를 배치했는데, 송무, 질의회신, 법규제개정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요. 인권상담센터에도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인권위 시스템이 그랬어요. 저같은 경우는 정책 업무도 했고, 조사과에도 있었고 상임위원실, 법무에도 있었어요. 교육 쪽 말고 인권위에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업무는 제법 많이 경험했습니다.

 

인권위원회 업무라고 하면 막연하게 보람도 있고 재밌도 있겠다고 생각이 드는데, 퇴직하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하시게 되셨나요?

제가 들어갈 때의 인권위와 나올 때의 인권위는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2008년 쯤 이명박 정권 때 제일 먼저 시도했던 것이 ‘인권위 없애기’였어요.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정부에서 인권위의 소속을 변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원래 인권위는 정부 부처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걸 대통령 산하로 두느냐 마느냐 하는 작업이 진행되다가 그것도 잘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인권위의 힘을 빼는 나머지 방법은 결국 기구 축소, 구체적으로는 정원 축소가 있지요.

제일 먼저 별정직과 계약직부터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계약직 공무원은 통상 최초 2년 계약 기간이 지나면 3년을 재계약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공고를 내어 다시 5년을 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요. 본인이 원하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인권위 내에서 처음 5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은 경우는 제가 알기로 없었어요. 실제로 대부분 그 사람들이 일을 다들 정말 잘했으니까요. 2010년 말이었어요. 5년 계약이 끝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인권위에서 그분들과 재계약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내부에서 직원들이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지요. 그러다가 당시 노조 부지부장이었던 분이 2년 계약이 끝나고, 3년 추가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 분에 대해서 추가 계약을 하지 않고 내쫓아버렸어요. 참고 있던 직원들이 그때는 ‘더 이상 이건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고,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같이 했어요.

그러자 1인 시위한 사람들을 감사하더라고요. 저는 감사를 거부했습니다. 감사를 받을 수가 없다고 했던 것이, 감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재계약 대상자들의 인사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이었고, 또 구체적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들이 감사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시 제가 조사국에 있었는데, 국장님이 다른 사람에게라도 감사를 받으라고 했는데, 저는 잘못한 게 없다고,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 이후 직장내에서 저를 따돌리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 같이 일하면서 친해진 사람들도 유학, 육아휴직 등을 이유로 회사를 나와 뿔뿔이 흩어져 있고, 남아있는 동료들도 각자가 다들 힘든 상황이라 서로 연대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어요.

입사해서 만난 제 남편은 이미 회사를 떠나 지방으로 내려간 상태이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저희 엄마가 돌아가신지 1년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간병 등으로 몸도 많이 안 좋아진 상태였어요. 내가 여기 더 있으면 정말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럼 퇴직 후에 1년 정도 쉬셨다고 말씀하신 때가, 요양 목적도 있었던 거군요.

그렇죠. 남편이 전북교육청에 자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해서 먼저 내려갔어요. 전북교육청에 교육감이 새로 취임하고 감사팀을 새로 만드는데 조사경력 있는 사람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한거죠. 감사과가 1, 2, 3팀, 그리고 법무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4팀을 새로 만들면서 외부인력으로 채우기로 했어요. 남편이 먼저 들어갔고, 저는 좀 쉬다가 2012넌 5월에 학교폭력 담당으로 변호사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당시 대구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해서 학생이 자살하는 일이 있어서, 대대적으로 학폭법이 개정되고, 교육부에서 교육청별로 특별교부금을 지원해서 학교폭력과 교권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채용하도록 했습니다. 신분은 공무원은 아니고, 근기법 적용되는 기간제 근로자였어요. 그렇게 2년 3개월을 일했고, 그 이후 2년은 임기제 공무원인 인권옹호관(학생인권교육센터장)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전주에서 생활은 가족과도 함께 있고, 더 좋으셨겠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은 굉장히 좋았어요. 전주가 생활 여건이 좋은 도시예요. 편안하고.

근데 일을 하면서 불편함을 느낀 부분이 있었어요. 지역적인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제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 성에 관한 의식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당황해서 그냥 넘어가기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지금 상황과 제 의식 사이에 괴리감도 커지고, 어느 정도 지나니 제 의식이나 생각이 고인 물이 되어 썩어간다는 느낌마저 들더라고요.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부분들에 대해 지적하면, 오히려 그런 점을 지적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미처 인터뷰에 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아직도? 라고 생각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또 토박이가 아닌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텃세(?)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변호사여서 이 정도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16년 7월 교육청에서 재계약이 안되고, 17년 가을 서울에 올라와서 개업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 또 마침 교육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TF에 지원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이것도 지금 아니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을 한거죠.

 

지금은 송무를 하시는 거죠.

그쵸. 그렇지만 그렇게 많이 하고 있진 않아요. 개업 초반에는 아무래도 일이 많이 없잖아요. 개업하고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성북구 인권위원 활동이었어요. 경력이 있어서인지, 여기저기서 소개를 많이 해주셔서인지 위원회 위원 제의가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배워보고 싶어서 먼저 지원한 곳들도 있고요. 그렇게 일을 늘려가다 보니 지금은 참석해야 하는 위원회가 너무 많아져서 정리하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는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을 하게 되었는데, 어휴, 그거 되게 힘들더라고요. 사전에 안건을 다 검토해서 의견서도 내야 하고요, 회의도 네 시간 걸렸는데 다른 위원님들이 그거면 빨리 끝난 편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작년에 친한 언니가 하는 말이, ‘너 초반에 일 없다고 이것저것 다 받으면 나중에 가랑이 찢어진다’고 했는데…(웃음) 진짜 그래요. 그래서 지금은 정리하려고 하고 있어요. 다음 주 월요일엔 회의가 4개가 있네요.

일 하면서 많이 배우는 경우도 있어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방심위 실무자분들께서 일을 워낙 잘 처리해주셔서 가서 회의에 가서도 부담이 많이 없기도 하고요.

 

재판 수임을 일부러 좀 가리시는 면도 있으신 것 같아요.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돈을 벌어야 할 시기라 가릴 처지는 아닌데… 막상 이 일을 맡아야 되나 하고 생각을 해보면, 힘들겠다 싶은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제가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이라, 합이 안 맞는다 싶으면 수임을 거절하기도 해요. 많지는 않은데, 그런 적이 약간 있었죠. 아직 배가 덜 고픈 건가 잘 모르겠네요. (웃음)

제가 비교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잘 참는 편인 것 같은데, 정신적 스트레스에는 너무 취약해요. 정신적으로 공격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하느니, 아예 시작을 안 하는거죠. 여가 시간을 보낼 때에는 머리를 안 쓰는 일을 선호해요. 예를 들어 제가 야구를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건 일하는 것처럼 머리를 쓰지 않아서 좋아하는 면이 꽤 커요. 남편이 제가 야구를 좋아하니까 에이전시 같은 업무를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요즈음 변호사님들중 하는 분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에이전시 일을 하게 되면, 야구는 더 이상 오락이 아니라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안 하겠다고 했지요.

 

변호사님을 민변 모임에서는 자주 뵐 수 있는 건, 변호사님께 민변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인가요?

네, 그렇죠. 제가 역량이 좀 되면 가고 싶은 모든 모임을 다 나가서 활동하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것하고 별도로 민변 모임이 요즈음은 아주 조금 부담이 되는 면이 있어요. 예전에는 모임에 나가서 같이 어울리고 노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 민변 모임에서 어떤 사업에 대해서 함께 협업을 하게 되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는데, 역량도 부족하고 아직 그럴 상황이 못 되는 것 같아서 조금 고민스러워요.

민변이 맘 편하고 좋은 이유는 계산하지 않는 동료가 있다는 점이에요. 지난 신입회원 설명회 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게 참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서로가 되게 많이 다르지만, 큰 그림에서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또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물론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런 불필요한 사심 없이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동료들이란 점이 참 좋지요. 그런 편안함에 끌려서 민변에 가는 것 같아요.

 

2018.10. 민변 회원월례회에서.

 

계속 공직에 계셨으니, 변호사님 해 오셨던 일 중에 지금 하고 계신 일이 가장 (경력상으로는) 짧은 일이겠어요.

그렇죠. 월말과 월초에 쌓여가는 정산금과 마이너스액을 보면서 역시 고정된 월급이 좋다면서 후회를 하다가도, 국정감사 시즌이 딱 되는 순간, 친구들이 SNS에 국감, 행감 이야기를 올리는 걸 보는 순간 아, 그쪽엔 이게 있었지, 하면서 위안하죠. (웃음)

 

오랫동안 조직(?)에서 일하다가, 이제 혼자 일을 하시는 게 낯설지는 않으신가요?

조직에서 일할 때는 결재를 받으면서 다른 사람이 같이 업무를 보잖아요. 이게 단점이면서 장점이지요. 물론 상급자가 이상한 지시를 하면 굉장히 피곤해지지만 그래도 결재 라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변호사는 순간순간 혼자 결정해야 하고, 내가 내린 판단과 결정이 과연 맞는 것인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는 고충이 있지요. 이 일이 제가 전에 했던 것과 연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니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니까 사전 지식이 충분하다고 할 수도 없고요.

내 문제라면 내 결정에 나만 책임지면 되는데, 재판은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 더 부담스럽지요. 특히나 이혼 같은 가사사건의 경우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라서 늘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해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노동쪽이나 가사사건에서 모르는 점이 생기면, 그 분야를 잘 아는 변호사님께 물어봅니다. 솔직히 저는 물어보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남한테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알아서 최대한 혼자 이리저리해보다가 마지막에 묻는 스타일이에요. 아무래도 연차로는 적지 않은 연차여서 묻는 일이 자존심 상할 때도 있지요, 솔직히.

 

다시 변호사 초임 때로 돌아간다면, 송무를 선택하시겠어요, 아니면 공직에 가실 것 같으세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기관에 가기로 했으면 그 기관에 계속 있거나, 나중에 퇴직하고 관련 업무를 변호사로서 계속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둘 다 아니었거든요. (웃음) 전에 일했던 기관들에서 사건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가끔 자문요청이야 들어오지만요. 지금은 서울에서 개업했으니 제가 만약 수도권에 있는 기관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겠지만, 저는 지방에 있었으니까요.

연수원을 나오면서 개업을 같이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때는 되게 겁을 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겁낼 일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몰랐죠. 제일 좋은 건 고용변호사로 배우고 일하면서 차곡차곡 업무역량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아마도 저는 고용변호사로 일하는 것을 못 버텼을 확률이 굉장히 높아요. 업무강도가 워낙 세니까요… 다시 돌아가서 그 상황이 된다면, 지금은 다 아니까, 개업을 그렇게 겁내진 않았어도 괜찮았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건 아직 변호사의 주 업무는 송무잖아요. 가급적이면 변호사로서의 업무를 많이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개업을 그렇게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개인적으로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저희 때랑은 상황이 너무 달라서, 그걸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한 신입변호사님에게 개업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뭐, 저도 그랬는데요. 얼마 전에 만났던 한 선배변호사님에게 어떻게 돈을 버시냐고 여쭈었더니, 먹고 살 만큼은 번다고 하시더라구요. 의뢰인이 다른 의뢰인을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어떻게든 되는 것 같긴 해요.

그래도 요즘의 개업은 예전과 또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요. 무어라 말하기 쉽지 않네요.

 

민변 후배님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시간 날 때마다 부담 없는 자리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참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업무가 많이 부과될 일은 없으니까요. 물론 여건이 되면 일도 같이 하면 되는 것이고요. 아시는 것처럼 제가 노는 자리는 안 빠지잖아요. (웃음) 그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야 나중에 일할 때도 서먹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고용변호사로 일해본 것이 아니라, 요즘 고용변호사님들이 얼마나 바쁠지 가늠은 안가지만요. 그래도 잠깐이라도 짬 내서 서로 얼굴을 익혀놔야지 서먹해지면 어느 순간 참석하고 싶어도 쉽지 않게 되는 때가 와요. 같이 일을 하건, 같이 놀건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연대와 신뢰니까요. 처음에는 부담 갖지 말고 자주자주 나오면 어느 순간 관계도, 신뢰도 넓혀지고 민변이 편하고 좋아지는 때가 올 거예요.

 

무뚝뚝한 표정에서 이따금 터지는 유머에 정신 못차리는 인터뷰어 사진으로 당시 인터뷰 분위기를 전하며, 인터뷰글을 마무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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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11/20-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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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전북지부 20주년 기념회 소회

송경한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북지부 20주년 기념행사가 2019. 11. 9. 16:00 전북 전주시 터존부페 하이든룸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는 박민수 변호사(2기 지부장 역임, 연27기), 안호영 국회의원(전북 완주군진안군무주군장수군, 3,4,6기 지부장 역임, 연 25기), 황규표 변호사(5기 기부장 역임, 연27기), 장석재 변호사(7기 지부장 역임, 연33기), 김현승 변호사(8기 지부장 역임, 연39기), 김석곤 변호사(현 민변전북지부장, 연 37기) 등 전 · 현직 지부장을 포함하여 민변 전북지부 회원 20여명과,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동아리 ‘퍼블리코’ 회원 10여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서는 역대 지부장님의 민변 전북지부 20주년을 맞이한 소회 및 축하 인사말을 시작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을 세상에 알린 이탄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연34기)를 초청하여 「우리는 왜 법원, 검찰을 알아야 하는가? -30년간 미뤄온 사법개혁」 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2시간여에 걸쳐서 진행되었습니다.

강연은 현재까지 사법 검찰 개혁이 미루어진 역사적 배경을 판사 재직 시의 경험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법원개혁의 과제, 검찰개혁의 과제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민변 전북지부 회원 및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동아리 회원들을 상대로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탄희 변호사의 법원행정처 재직시절 겪었던 생생한 경험에 기초한 강연 내용을 통해 모두가 공감하는 법원·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질의·응답시간에서는 맥주 등을 가볍게 마시는 분위기 속에서 ‘판사를 그만둘 때 부인의 반응은 어땠는지’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오지는 않는지’ 와 같은 다소 짓궂은 질문에도 맥주를 쭉 들이킨 후 편안하게 응답해주었던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탄희 변호사 강연 후에는 박민수 변호사의 ‘국가보안법 사건 무죄 변론기’를 강연 형태로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내용은 햇수로 3년, 19회에 걸친 변론기일, 최초 구속 후 2번의 구속적부심 신청 및 기각, 2번의 보석청구 및 2번째 보석청구 인용으로 인하여 6회 기일부터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으며 결국 무죄 판결까지 이르는 과정, 국가보안법 해석의 기준, 그리고 법원의 시각 등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더불어 박민수 변호사는 민변 전북지부의 초대 사무국장으로서 전 지부장들을 대표하여 민변 전북지부 개설과정, 20년의 역사, 활동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박민수 변호사 강연 후, 민변 전북지부 8기 사무국장을 역임한 박재홍 변호사의 ‘국정농단 촛불집회 소회’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6년 뜨거웠던 겨울의 열기는 전북 시민들의 민심을 모았고 전주에서는 풍남문 앞에서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열기 속에서 허리가 좋지 않음에도 ‘민변 전북지부’의 깃발을 들고 한주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던 박재홍 변호사의 소회를 들으며, 민변 전북지부 회원들도 그 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전주 터존부페에서 있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북지부 20주년 기념식 후에는 근처 가맥집으로 이동하여 진한 뒤풀이를 하며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갖고 행사를 마쳤습니다.

민변 전북지부는 최초 5인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활동하는 인원이 30명에 이르도록 성장하였고, 지역현안과 관련하여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현안으로는 ‘장점마을 환경피해사건’과 관련하여 박민수 변호사를 TF팀장으로 하여 수 명의 회원 변호사들이 애쓰고 있고, ‘장수 벧엘장애인의 집 사태’관련하여 김용빈 변호사가 사건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자랑거리로 민변 지부 최초로 지방변호사협회장까지 배출하는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회원들 서로 형·누나·동생으로 호칭하는 애정이 넘치고 끈끈한 지부입니다. 또한 1년에 한 번씩 있는 지부행사 때마다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및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동아리 회원들이 자리를 빛내주면서 향후 회원으로 뜻을 같이 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민변 전북지부가 20년을 넘어, 50년, 그 이상 영속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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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12/0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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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션 1 > 대만의 다중채무문제 입법과정과 미해결 과제

– 김소리 변호사 –

첫 번째 세션은 ‘대만의 다중채무문제 입법과정과 미해결 과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이치현 변호사회의 츠케 나오야 변호사가 퍼실리테이터로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대만의 우페이리엔 변호사님과 첸체민 변호사님이 대만의 다중채무 문제의 입법과정과 미해결 과제에 대해 발표했고, 우리 민변의 백주선 변호사님께서 한국의 개인채무조정제도의 최근 동향에 관해 발표했습니다.

대만측에서는 대만의 소비자 채무정리 조례에 의한 회생, 청산절차를 중심으로 발표했습니다. 대만측에서는 대만의 채무정리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강제적 사전절차’를 지적했습니다. 대만의 채무정리는 협의, 조정, 회생, 청산 4개의 제도로 되어 있는데, 회생이나 청산 절차로 가기 전에 반드시 협의 또는 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협의단계에서는 사실상 채무자는 금융기관의 부당한 협의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 점, 이러한 사전절차는 종종 법률요건에 맞추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해 자원 낭비 등 비효율을 낳는 점 등에서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사전절차의 강제를 폐지하고 채무자에게 절차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대만의 회생제도 변화 과정에 대한 설명도 있었는데, 크게 회생안 인가 결정시 변제노력여부를 고려하게 된 점, 회생안 변제기간의 한도를 6년으로 명문화한 점(2012년 개정), 회생절차 기각 사유를 제한한 점, 채무자가 면책되는 최저 변제비율을 3/4에서 2/3으로 인하된 점을 주된 변화점으로 꼽았습니다.

대만의 청산절차와 관련하여서는 2012년 개정으로 기존에는 채무자의 사치나 낭비로 인한 부분은 면책될 수 없었던 부분이 청산 신청 전 2년 안에 사치나 낭비가 없으면 대부분 면책이 가능해진 점을 긍정적 변화로 꼽았고, 가처분소득 계산 시 압류 등으로 월급에서 강제로 공제되는 부분까지 포함시키는 것이 현재 법원의 다수의견이어서 이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2018년 강제집행법의 개정으로 채무자는 최저생활 기준액의 적어도 1.2배 및 월급의 2/3 금액을 보장받게 된 점을 이야기하며 엄청난 진보라고 밝혔습니다.

백주선 변호사님께서는 한국의 개인 채무조정제도의 최근 동향과 관련하여 개인회생 변제기간상한이 5년에서 3년에서 단축된 점 및 법개정 전 변제계획 인가자들에 대한 소급적용이 불가하다고 한 최근 대법원 판결의 내용, 대법원의 개인파산 신청서류 간소화 권고 등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또, 한국 도산제도의 개선 방안과 관련하여서 도산전문법관제도의 도입, 직권주의에서 대심구조로의 전환, 파산자에 대한 신분상 불이익 등 차별대우 금지, 파산절차에서의 중지명령 도입, 면제 재산의 관대한 설정, 면책범위의 확대, 파산선고 후 5년 경과시 당연면책되는 제도 도입, 주택에 대한 담보채무에 대하여도 가용소득으로 변제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 생계비와 주거비를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가용소득으로 하도록 명백히 규정, 개인회생절차에서의 생계비의 현실적 적용, 변제기간의 탄력적 운용, 보증채무자의 보호, 파산관재인이나 개인회생위원에 대한 평가제도 도입, 도산 관련 통계관리 개선 등의 필요성을 지적했습니다.


< 세션 2 > 각국의 생활 보호제도와 운용 상황

– 박인숙 변호사 –

두 번째 세션은 ‘대만의 사회 구조의 빈곤 상황과 전망, 대만 공법 구조와 사법상의 부양과의 모순, 계쟁 및 해결 방법’, ‘한국의 공공부조 및 관련 제도의 현황과 평가’, ‘일본의 생활보호제도와 운영 상황’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쿄토 변호사회의 비토우 히로키 변호사가 퍼실리테이터로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각국이 위 내용으로 발표를 하고 발표자들이 서로 질의하는 형태로 진행했습니다.

대만의 사회구조법은 1980년에 제정되어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2015년 개정 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회구조법은 교육, 보육, 사회복지, 의료, 경찰, 촌(리)의 간부 등 직원에게 사회구조 대상자를 알게 되었을 때에 주무기관에 통보하도록 의무를 정하고 주무기관은 신청 후 5일 이내에 조사하여 긴급구조를 3일 이내에, 의료보조를 15일 이내에, 생활 부조를 30일 이내에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수입세대 및 중수입세대의 신청자격을 1인의 매달 평균소득, 동산 한도액과 부동산 한도액으로 심사를 합니다. 취업알선 서비스, 직업훈련 또는 구제를 대신하는 직업보장에 참가하면 창업자금 보조 또는 교통비 보조가 주어지고 일정기간 및 한도액 내에서 취업하여 증가한 수입은 저수입세대 및 중저수입 세대 신청시에 가정의 총수입 재산 심사시 최장 3년을 한도로 산입이 면제됩니다. 정부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위탁한 시책에 참가하면 일정기간 혹은 한도액 내에서 시책 참가로 증가된 수입도 가정총수입을 심사할 때에 최장 3년을 한도로 산입이 면제됩니다.

한편, 대만의 법률구조 기금회는 2004. 7. 1.부터 사회적 약자의 소송 대행 등을 하고 있는데 최근 수년간 부양비 관련 사건이 증가하여 가사사건 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여 이혼 사건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만의 사회 부조와 법제도로 인한 것으로, 가족의 총수입을 가족 인원수로 나누어 1인당 수입이 최저 생활비 이하이고 가정의 재산이 매년 공표하는 금액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가족의 범위에 배우자, 일촌 직계친족, 동일 호적 또는 함께 생활하는 기타 직계친족, 종합소득세 상의 부양친족 공제를 받는 의무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가족에서 제외되는 자에 ‘기타 특별한 사정으로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신청자의 생활을 곤경에 빠트려서 주무기관이 신청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고려했을 때에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정한 자’를 규정하고 있어서 가족에 포함되는 자도 법원이 부양 의무가 면제된다는 판결을 하면 가족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처자식과 강물 투신자살을 하고 싶어 하는 81세의 부친, 저수입 심사 탈락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명의를 빌려준 노인, 친부에게 성폭력을 당한 딸이 십수년 후에 친부에게서 부양청구를 당하는 고통에 직면한 3가지 사례를 통해서 위 법제도로 인해서 사회구조의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 법원에서 신청인은 과거의 문제를 언급해야 하고 상대방은 법원에 가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양자가 힘든 과정을 겪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노익창 호서대 교수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사회보장급여의 이용 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이 2014. 12. 30. 제정되어 2015. 7. 1.부터 시행되고 있으나 인원 및 역량의 한계로 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생활보호법’은 1961. 12. 31. 제정된 후 1997. 8. 22. 개정으로 최저생계비 개념이 법률에 반영되었습니다. 1998. 9.경 초등학생 강정우군의 아버지가 1천만 원 생명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강도사건으로 위장하여 허위신고한 사건을 계기로 1999. 9. 7.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고 2000. 10. 1. 시행되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급여를 지급받으려면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미만일 것과 부양의무자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엄격한 요건과 낙인효과, 인격적 모멸감으로 인해서 수급신청을 하지 않는 빈곤층이 존재하고 실제로 빈공한 상태이나 수급대상에서 탈락하거나 수급을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관할 관청이 근로능력있는 수급자의 경우 자활사업에 참여할 것을 조건으로 생계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데 만일 수급자가 자활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 관할 관청이 임의로 파악되지 않는 소득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소득을 인정해서 2014. 2.경 서울시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에 세들어 살던 세 모녀가 빈곤에 지쳐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두 딸에게 행정청이 각 60만 원 정도의 추정소득을 부과했기에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이상이 되어서 기초생활보장급여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 사건을 계기로 위 법이 2014. 12. 30. 개정되고 2015. 4. 20. 같은 법 시행령이 개정되어서 실무상 ‘확인소득’이 도입되었습니다.

개정된 법은 최저생계비가 삭제되고 중위소득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각 급여가 종류별로 수급요건이 달라져 개별 급여화 되면서 급여의 종류별로 수급자 선정기준 및 최저보장수준이 차별화되어 실질에 가깝게 바뀐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사항이었던 부양의무자 요건의 폐지가 단계적으로 추진되는 중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생활보호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인구대비 1.7%밖에 안 되는 상황으로, 빈곤한 사람 중에서 10 ~ 20 % 정도밖에 이용할 수 없는데 국가나 지자체의 창구직원이 상담자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되돌려 보내는 신청권 침해가 만연하여 전국 각지에서 굶어죽는 사건이나 자살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6년 이래 일본변호사연합회 등의 요구로 변호사 법무사가 생활보호신청에 대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2007. 6.경에 생활보호문제 대책 전국회의를 설립했습니다. 2011년 이후 창구직원의 정보제공의무 위반을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다수 선고되면서 2014. 7. 생활보호법 시행규칙에 보호를 실시하는 기관은 신청이 신속히 진행되도록 필요한 원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친족의 부양의무가 생활보호를 적용하는 요건이 아니지만 친족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식으로 위법하게 돌려보내는 복지 사무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생활보호기준을 넘으면 일체 급여를 받지 못해 면제되는 혜택에서 제외되기에 생활보호를 받는 세대보다도 더 어려운 생활을 하는 역전현상이 발생합니다. 보호비 1개월분 이상의 예금이 있으면 생활보호가 개시되지 않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사례관리자가 관리하는 세대가 법률로 80세대라고 정해져 있으나 100세대 이상인 경우도 적지 않고 전문성도 요구하지 않아 복지와 무관한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이 사례관리자로 종사합니다.

한편, 일본은 2012년 봄 인기 코미디언 어머니가 생활보호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생활보호에 대한 비난을 하면서 자민당은 2012. 12. 총선거에서 생활보호비 10% 삭감과 부정수급대책강화 등의 공약을 내세우며 정권을 탈환하였고 2013. 1.경 사상최대 생활부조기준 인하를 결정하고 2013. 8.부터 3년에 걸쳐 실행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전례가 없는 공격에는 전례가 없는 반격을!’을 구호로 1만 건 심사청구 운동에 착수하여 기각 재결된 심사청구에 대해서 1,000명 이상의 원고가 위헌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일본, 독일, 프랑스, 스웨덴, 영국 미국, 한국에 정통한 연구자와 함께 7개 국가의 제도를 철저히 비교하여 일본에 개정 제안을 하는 생활보호법에서 생활보장법으로라는 서책을 2018. 8. 발간하였습니다.

퍼실리테이터인 쿄토 변호사회의 비토우 히로키 변호사가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특히 부양의무 요건에 대한 질문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만, 한국, 일본의 사회구조의 문제점과 장점에 대해서 알게 되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세션 3> 각국의 다중채무자ㆍ생활빈곤자에의 자립 지원, 연대와 협동

– 이연주 변호사-

세션 1과 2가 금융 피해자와 관련한 각국의 입법ㆍ사법 동향과 현행 운영 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세션 3은 각국의 사회단체 들이 금융 피해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지원활동, 연대 활동 등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시민단체 주빌리은행 홍석만 사무국장님이, 대만에서는 LIAO, YI-TING 변호사님(타이베이 변호사회)/ WU, CHUNG-SHEN 준교수님/ KUO, LI-TING 님이, 일본에서는 사토우 미츠유키님(아키타 의존증 문제를 생각하는회 대표)/ 이시쿠로 요시토 님(아키타시복지총무과생활지원담당주석주사)이 각 발표를 맡아 수고해주셨습니다.

한국에서 발표를 맡은 홍석만 사무국장님은 구체적인 자립지원 현황이나 대안을 설명하기에 앞서, 다중채무자의 60~80% 이상은 소득기반이 취약한 저소득층, 노년층에 해당하는 사회적 취약계층에 해당하고,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이 한 번 부채를 부담하게 되면 이를 변제하기 위해 다시금 추가 대출을 받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다중채무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러한 부담이 결국 한국의 “네모녀 자살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금융피해자 교류회의 취지가 담긴 서두 발언으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대목이었습니다.

한편, 다중채무자 취약계층의 자립을 지원하는 한국의 현행 정책(① 희망키움통장, ② 국민행복기금, ③ 정책자금대출)을 소개하면서, 저소득층의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오히려 공적 권한을 이용하여 과도한 추심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 등 각 제도의 문제점도 잘 짚어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금융 피해자에 대한 정부 인식 전환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오히려 민간 비영리 부분의 자립지원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도 설명되었습니다. 정부가 채무자도 국가의 구성원이자 경제주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인식을 전환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정책을 마련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중채무자가 한 번 채무를 부담하면 계속적인 채무부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인 관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홍석만 사무국장님의 지적이 매우 타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 측에서는 법률구조기금회 타이베이 분회, 카드채무 피해자 자구회 등 채무자 자립을 지원하는 정부기관, 민간단체를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재단법인 불광산 자비 사회 복지 기금회가 긴급한 사건에 휘말려 당장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긴급 구조를 해주는 방식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망초심 자선 협회는 노숙자 대부분에게 채무가 있고, 불법 명의 대여 등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문제점을 인식하고 노숙자나 빈곤자에게 자립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측에서도 시민단체의 지원활동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곤궁자의 자립에 있어 ‘정직하게 말할 장소 제공’,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중요히 여기면서 곤궁자의 존엄성 확보를 강조하는 등 시민단체의 정서적인 지원까지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금번 교류회가 개최된 아키타의 복지총무과에서는 매년 2회 정도 외부기관도 참가하는 사례검토회를 개최하여, 변호사, 법무사, NPO법인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가해서 곤궁자 지원 사례를 토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기관의 지원 내용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상호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실제로 곤궁자를 지원할 때 다중적이고 적절한 지원이 있을 수 있다며 상당한 자부심을 내비췄습니다. 우리나라도 금융피해자에 대하여 정부보다는 NPO단체가 먼저 문제점을 인식하고 활발히 운동을 전개해 온 만큼, 관계 협력기관 간의 공동 연구 체계 구축이 자주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측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세션 3의 발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세션이라 시간이 부족하여 각 국의 발표자간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많이 아쉬웠지만, 한국의 금융피해자 지원 제도의 문제점, 개선 방향을 알 수 있었고, 각 국이 실제 금융피해자 지원을 어떻게 해가고 있는지 보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저녁 만찬 스케치 >

– 조미연 변호사 –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이어진 교류회는 저녁 만찬으로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교류회 발표가 진행된 아키타 국제학교에서 단체로 일본 측에서 준비한 버스에 탑승하여 만찬장으로 이동하였고, 만찬장에 들어가서는 참가자들 이름표에 적힌 알파벳으로 배정된 테이블을 찾아 삼삼오오 모여 앉았습니다. 테이블마다 구성원이 다르니 특유의 분위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겠지만, 건배할 때만큼은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공통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저녁 만찬은 크게는 각국의 대표가 나와 교류회 소감을 나누면서 건배 제의를 하거나 서로가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이었고 작게는 각 테이블에서 만난 참가자들 사이 인사를 나누며 소소한 공감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각국의 대표로 나와 발언한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이 짧아 아쉽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하루종일 진행되었던 교류회 일정으로 피곤하고 많이들 지쳤을 시간이었는데요. 다들 단상 위에 오르는 순간 상기된 표정과 빛나는 눈빛으로 저마다의 소회를 밝히는데 어찌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던지요. 직접 마주한 자리에서의 온기가, 교류회 참가자들을 이렇게 뜨거운 열의에 찬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위 사진 오른쪽 세 명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교류회의 포문을 열었던 기조연설 발표자 킨조가쿠인 대학의 오오야마 교수님과 남편 그리고 딸의 모습인데요. 운이 좋게도 알파벳 J 테이블에 같이 자리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오야마 교수님 기조연설 이후 함께 참가했던 한국 참가자들과 발표가 정말 훌륭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부터 꼬마 숙녀님의 나이는 이제 4살이 되었고 작년 한국 교류회에 함께 참가했었다는 사실 등 서툰 영어와 통번역 어플 등을 활용한 대화였지만 기조연설자와 만찬 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줬던 것 같습니다.

각자 테이블에서 이야기꽃이 피어가는 과정 속에서 틈틈이 진행되었던 각국 대표자들의 이야기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실 단상 위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 교류회 규모가 커진 만큼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모든 시간에 다 집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위 사진의 한국 금융피해자협회 윤태봉 회장님께서 발언에 앞서 “ 내 얼굴이 빨간 이유는 술에 취해서가 아닌, 술을 잘 못해서일 뿐입니다.” 라고 하신 안내? 말씀이라던가 각국에서 다양한 술과 과자 등 선물을 준비해와 교환했던 장면들은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웃음). 물론 선물 내용이 궁금해서 유독 귀를 쫑긋 세웠던 것 같기는 하네요.

위 사진은 일본 변호사님과 한국 파산회생변호사회 김관기 변호사님이 대만 측에서 가져온 선물을 받아든 장면입니다. 교류회를 통해 각국의 금융피해사례, 정책 및 입법현황 뿐 아니라 소소한 먹을거리 등 선물을 나누면서 오가는 정이 또 있나 봅니다. 한층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것 같습니다.

저녁 만찬의 통역은 비교적 본 교류회 때보다 간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양방향 통역은 위 사무국장님이 수고를 해주셨고, 중국어와 일본어의 양방향 통역은 본 교류회 통역 중 한 분이 맡아주셨습니다.

비록 통역은 간소화한 자리였지만, 참가자들 사이 마음의 거리는 훨씬 좁혀질 수 있었습니다. 같은 테이블의 한 일본 참가자는 한국에 방문해서 행사에 참가 했던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활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고, 대만의 한 발제자는 알고 보니 동갑내기 친구였는데 생각지 못하게 LOL 이라는 게임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선수단의 팬이며 주로 사용하는 게임 캐릭터가 무엇인지 등까지 예기치 못한 취미 이야기까지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갑자기 대만과 중국이 하나의 국가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아 당황하기도 했었고요. 그렇지만, 교류회 내내 무언가 차오르는 기쁨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책으로 읽었던, 통계로 그렇구나. 라고 이해했던 부분들을 각국의 참가자들이 생생한 음성으로 전달했던 자리. 그런 자리에 이어서 ‘어떤’ 참가자들이 함께했는지를 직접 눈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으며 이야기했던 만찬 시간. 맛있는 음식과 아키타의 깔끔한 사케가 같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만큼 잘 어우러졌던 기회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아키타 풍경스케치>

– 김재희 변호사 –

(1) 아키타로 떠나던 첫 날(2019. 11. 08.)

< 도쿄 하네다공항 >
– 아키타는 한국에서 직항이 없어, 도쿄 하네다 공항을 경유하여 갔습니다. 아이리스(김태희, 이병헌 주연)라는 드라마 방영시 배경으로 아키타가 나왔고, 당시 아키타행 직항기 운항이 되었었다고 하나 현재는 한국에서 아키타로 갈수 있는 직항은 없는 상태입니다.

– 도쿄 하네다 공항 전망대에 도착하여 인증 샷

 

<아키타공항>

– 아키타 공항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만난 것은 아키타 강아지 인형~

일본의 대표적인 견종으로 아키타 견종이 유명합니다. 일본 황실에서 아키타 견종을 많이 아껴 황실 소수의 사람만 이 견종을 키우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 아키타 공항 앞에서 인증샷

 

–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메뉴로 기리탄포 라는 아키타 향토음식을 먹기 위해 들른 음식점 앞에서 찍은 한 컷입니다.

 

(2) 둘째날(2019. 11. 09.) – 학술대회일

제10회 동아시아 금융피해자교류회는 아키타 국제교양대학에서 열렸습니다.
아키타 국제교양대학은 2004년 미국의 인문학, 사회과학, 어학 등 교양과목에 중점을 둔 교양대학인 Liberal Arts College를 본 따서 설립했고,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고 하네요. 47개국 185개 기관과 인턴쉽을 맺고 있어서 학생들은 대학생활 4년중 1년은 해외에서 공부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키타 교양대학은 건축물이 독특하고 층고가 낮았습니다. 건축물들 사이에 어우러진 단풍이 아름다웠습니다.




 

학술교류대회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발표는 기조연설이었습니다.

기조연설은 일본 킨조가쿠인(金城学院)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오오야마교수는 일본사회에서 파산신청 건수가 급증할 무렵, 다중채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오야마 교수는 기조연설자로 나서 ‘동아시아 다중 채무 대책의 전개’라는 주제로 연단에 올라, 일본의 지난 40년과 한국 대만의 지난 10년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한중일 금융피해자교류가 시작된 역사, 연결된 지점에 대해 발표를 하였습니다.

오오야마 교수의 기조연설 발표를 들으면서, 동아시아금융피해자교류회가 왜 생겼고, 상호교류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 오오야마 교수의 발제 모습

-오오야마 교수의 발표자료(한국어, 일본어, 대만어로 모두 준비한 PPT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심시간>
점심은, 대학 내 카페테리아로 이동하여, 준비된 도시락으로 먹었는데, 작은 도시락에 아기자기 닮긴 반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커피브레이크>
-세션 2와 세션 3 중간에 커피브레이크가 있어, 역시 카페테리아로 이동하여 준비된 다과와 함께 커피를 마실 시간이 있었습니다. 단풍으로 물든 교정을 지나 커피를 마시러 가던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웠습니다.


 

< 교류회장 >
– 커피브레이크가 끝나고 돌아온 교류회장에서 한국에서 오신 분들 모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 만찬장-간친회 >
– 한국, 대만, 일본의 대표자들은 각 국에서 준비해온 선물을 서로 나누며 만찬행사를 시작했습니다. ^^ 각 테이블에는 각국에서 오신 분들이 섞여 앉아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3) 셋째날(2019. 11. 10.) – 자유시간

<아키타미술관>
–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타오가 설계했다는 미술관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인테리어가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심한 시멘트 벽, 나선형으로 높게 설치된 계단을 올라 나오는 곳은 미술관 카페였습니다. 잔잔한 물이 찰랑대는 것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 가쿠노다테(무사마을)>
-가쿠노다테는 일본에서 작은 교토라고 불리는 정취가 감도는 관광명소로, 옛 무사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아키타 센슈 공원>
– 아키타 센슈공원은 아키타 영주 사타케 요시노부가 1604년에 쌓은 구보타성의 옛터에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일본 벚꽃명소 100선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라는데요. 가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이 꽃핍니다.


 

끝.

The post [민생위] 제 10회 동아시아금융피해자 교류회 후기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월, 2019/12/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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