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녹천정에서
三載星霜夢裡經 삼년 세월을 꿈속에 지냈네.
心緖人間隨境變 마음이란 곳에 따라 변하는 것이
別時閑看岫雲靑 때로는 한가롭게 구름도 쳐다보네.
(己酉 七月 十有四日 將辭京城 援筆自題 春畝山人 ; 기유년 7월 14일에 장차 경성을 떠나려 하매 붓을 잡고 스스로 짓다. 춘묘산인)
녹천정(綠泉亭)은 본래 철종대에 건립된 정자로 주초만 남아 있었으나, 근처에 통감관저가 들어서면서 이토가 신축하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위의 자작시는 커다란 편액으로 꾸며져 총독관저에 걸려 있었으며, 특히 데라우치 총독은 스스로 이토의 위업을 허물없이 계승하였노라고 하면서 그 유래를 적은 글을 남긴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토의 칠언절구는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한시가 되었고,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신 다츠마(進辰馬)라는 일본인의 헌납으로 경성신사(京城神社)의 구내에 시비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그는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와 가메야(龜屋)라는 제법 유명한 수입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큰 재력을 쌓은 거류민 유지의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토 칠언절구 탁본자료는 바로 이 경성신사에 세워놓았던 시비에서 떠낸 것이다. 이 녹천정의 자작시를 보면 이토가 겉으로는 한가한 나날이 이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꿈처럼 보낸 3년 세월이란 것은 곧 한국병합으로 귀결되는 국권침탈의 치밀한 행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토는 불과 석 달 후에 안중근 의사의 손으로 처단되어 운명을 달리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죄상과 업보는 여전히 무겁고 또 준엄하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caption]


한강 하류 전류리 포구 입구ⓒ김준성[/caption]
한강 하류의 신곡보를 기점으로 위에는 고양시 어촌이 아래에는 김포시 어촌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김포시 어민 한 분을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득 님은 김포시 어촌에서 계장을 지냈던 어부입니다. 한강에서 고기 잡는 걸 보고 자라 여태까지 어업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 시간만 이제 50년이 되었습니다. 50년을 강에서 보낸 사람에게 제 첫 질문이 얼마나 우습게 느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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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전류리에서 잡힌 바다물고기 숭어ⓒ김준성[/caption]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직접 판매하는 어민들ⓒ김준성[/caption]
한강 어업의 어려움을 묻는 말에 백성득 님은 부족한 수량을 꼽습니다. 서해가 몰고 온 펄을 씻을 강물이 흘러야 하는데, 신곡보가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파되기 전의 밤섬ⓒ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밤섬은 본래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죠. 한강을 오가는 목조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뛰어난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한강에 떠다녔던 배의 95%는 거진 밤섬에서 만들어진 거라고 합니다. 밤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밤섬에서 태어나 폭파되기 전까지 사셨던 유덕문 밤섬보존회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얼어 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밤섬 실향민들이 이주했던 와우산 자락ⓒ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caption]
한편, 폭파되어 수면 아래로 잠겼던 밤섬은 1980년대 중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회복했습니다. 지금은 원래 밤섬보다 더 커졌습니다. 강이 옮기는 모래와 펄이 밤섬에 쌓이고 떠내려온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워 초목을 이뤘습니다. 되살아난 밤섬은 새들의 쉼터가 되었고 99년에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2012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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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되살아난 밤섬 ⓒ 뉴스토마토[/caption]
밤섬보존회 회장님과 밤섬부군당 사당ⓒ김준성[/caption]







▲ 팩트체크를 통해 한 시민분이 “속눈썹 접착제 유해성분이 어떤건가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라고 문의해주셨습니다.[/caption]

출처 동아닷컴[/caption]

▲ 붙이는 ‘스티커 네일’…잘못 쓰면 손톱에 ‘독’ (출처 KBS뉴스)[/caption]
▲ 접착제에 대한 안전기준·표시기준에 따른 세정제 품목 안전기준 (출처 환경부)[/caption]
※ 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 캠페인은 노란리본기금의 후원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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