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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들어간 어떤 人士

지역

감옥에 들어간 어떤 人士

익명 (미확인) | 화, 2018/07/10- 07:25

入獄某人士

 

避火先奔逸(피화선분일)

何爲入沸湯(하위입비탕)

輕猫逢大虎(경묘봉대호)

晝夜獨多忙(주야독다망)

 

감옥에 들어간 어떤 人士

 

뜨거운 불 피해 먼저 달아나더니

어찌하여 끓는 물 가운데 들었소

고양이 깔보다가 큰 범 만났으니

밤이건 낮이건 홀로 썩 바쁘겠소.

 

<時調로 改譯>

 

불 피해 달아나더니 어찌 沸湯에 들었소

고양이를 깔보다가 큰 범 만나게 됐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매우 바쁘겠소.

 

*入獄: 감옥에 들어감.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奔逸: 뛰어서 도망감. 빨리 달림.

멋대로 행동함 *沸湯: 끓는 물 *大虎: 큰 호랑이 *晝夜: 밤낮 *多忙: 매우 바쁨.

 

<2018.7.10, 이우식 지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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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리 만세운동’과‘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 발굴 첫 행사
부천시민연합• 부천민예총•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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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 전단지<사진=이정성 기자>

[KNS뉴스통신=이정성 기자] 부천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지난 24일 부천 중앙공원과 시청 잔디광장에서 ‘소사리 만세운동’과 ‘계남면사무소 습격 의거’를 발굴하여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부천시 시민단체가 의지를 모아 추진한 3.1절 기념 첫 번째 행사로서 의미가 크다.

이날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은 대회사에서 “부천에서는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계남면사무소 습격의거는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한 각종 문서를 태웠으며, 소사리 6개 마을 사람들은 밤 중에 산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부른 날이 3월 24일이었다”라고 상기했다.

박 지부장은 이어 “지난 100년간 부천 시민에게 3.1 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부천의 독립운동가인 남광욱, 변영로, 이연형 지사 등도 알려지지 않았다”라며 “부천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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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립패가 풍물을 치며 앞장서고 대형태극기가 뒤따르며 남녀노소 시민은 얼크러져 만세를 제창했다<사진=이정성 기자>

장덕천 부천시장은 축사에서 “100년 전, 그날의 꺼지지 않던 횃불에서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국 독립을 외치던 그때 우리는 하나였다. 시민주권의 역사를 같이하는 한 뿌리였다. 이제 계층과 이념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던 3.1 운동의 정신을 되살려 부천시의 희망찬 미래 100년을 우리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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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시‧도의원(시의원 28명, 도의원 8명)은 흰 적삼과 검정 치마, 흰 두루마기(남성의원)를 입고 당시의 분위를 재현했다.<사진=이정성 기자>

김동희 부천시의회 의장은 축사에서 “전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대중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일어난 비폭력 평화시위로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숨은 영웅이 많을 것이다. 부천의 3.1 운동의 역사를 알리고 이 지역의 숨은 영웅들을 재조명하게 될 이번 행사가 부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시민에게 큰 감동의 한 마당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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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참여단체(22개)는 홍보부스(10)를 설치하고 시민에게 활동사업을 설명했다.<사진= 이정성 기자>

김허원배 남북평화재단 공동대표는 “100년 전 3.1 운동은 각지에 분산되었던 독립운동세력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3.1 운동 비폭력 평화시위가 2016년 촛불시민 혁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민주 정부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를 고문하고 탄압했던 세력의 뿌리가 남아 통탄할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광복과 조국통일을 완수하는 일과 민주주의, 민족정신을 계승할 소중한 가치로 삼아 훼손된 독립정신과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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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천 부천시장의 축하 인사<사진=이정성 기자>

이정성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25> KNS뉴스 

☞기사원문: 부천시, 3∙1 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 재현행사 열려

월, 2019/03/2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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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 이순우 책임연구원

 

 

① 경성 종로통 :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전경이다. 추가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일본 군인들이 이곳을 장악한 직후 모든 출입구는 폐쇄되고 말았다.
② 덕수궁 대한문 앞 : 이곳은 고종 국장 행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공간 자체가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차지점이 되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대한문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이다.
③ 경성우편국 앞 : 종로에서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거나 덕수궁 대한문 쪽에서 본정통(혼마치)로 이동할 때 교차지점이 되는 경성우편국 앞 광장의 전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조선은행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선은전(鮮銀前, 센긴마에)’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④ 남대문정거장 앞 :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의 전면 모습이다. 이 자리는 다시 수 만 명이 참여한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의 집결지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반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신임 총독이 부임하던 날 다시 강우규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⑤ 조선보병대 앞 : 광화문 앞 옛 삼군부 터(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있었고, 그 아래로 헌병대 숙사(宿舍)와 경성제2헌병분대가 나란히 터를 잡고 있었다.
⑥ 미국총영사관 : 독립선언서를 미국총영사관(정동 10번지)에 전달하고 덕수궁 담장길을 따라 되돌아나오는 만세시위행렬의 모습이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서울 주재 서양 각국의 영사관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였다.
⑦ 본정통 : 일본인들의 중심 거리인 본정통(혼마치, 지금의 충무로) 일대의 거리풍경이다. 만세시위행렬은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본거지인 조선총독부가 있던 남산 왜성대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이곳에서 일제의 방어선에 막혀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⑧ 종로경찰서 앞 : 다수의 시위참여자가 체포된 종로경찰서 앞의 거리 풍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시계탑 건물이 옛 한성전기 사옥이자 1919년 당시 종로경찰서로 사용된 건물이며, 오른쪽으로 붙어있는 건물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이다. 종로경찰서는 1923년 1월 김상옥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일제는 탑골공원(塔洞公園, 파고다공원)과 명월관 지점(明月館支店, 태화관)에서 촉발된 ‘독립선언’이라는 우리 민족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강압적 식민통치기구를 대거 동원하여 시위참가자들에 대해 구타, 체포, 구금,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일체의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대의를 외치는 큰 흐름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3월 7일에 이르러서야 이른바 ‘소요사건(騷擾事件)’이라는 제목이 붙은 각 지역 만세시위의 양상에 대한 기사가 처음 신문지상에 등장하게 된다. 이때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19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울 지역에서 이뤄진 시위양상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3월 1일 오후 2시 반에 학생 3, 4천 명은 경성 종로통 ①에 모여 군중이 부화하여 여러 대로 나뉘어 일단은 덕수궁 대한문 앞 ②에 이르러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일시 대한문 안으로 침입하였다가 다시 대한문 앞 넓은 마당에서 독립연설을 하였고 일단은 경성우편국 앞 ③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남대문정거장 앞④에서 의주통으로 나아가 불란서영사관에 이르고 일단은 창덕궁 문 앞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단은 조선보병대 앞 ⑤으로 가서 그 영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못하고 또 대한문 앞에 단체에서 나뉜 일단은 미국총영사관 ⑥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단체 약 3천 명은 총독부로 향하려 함으로써 본정통 ⑦에서 이것을 막아 운동은 일시 표면으로는 진정되었고 군중 중에 괴수로 인정할 만한 자 130명을 체포하였으며 처음의 소요가 진정된 후 1일 오후 8시 경에 마포전차종점 부근에 약 1
천 명이 모였었고 또 11시쯤에 야소교 부속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학생 약 200명이 집합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헤어졌고, 2일 정시 20분에 종로네거리에서부터 약 400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앞⑧으로 지나가매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제지하고 괴수로 인정할 만한자 20명을 체포하였는데 나머지 군중은 모두 헤어졌더라.
그러한데 이 군중의 다수는 노동자요 학생도 더러 섞여 있었고 3일의 경성은 전일 이래로 매우 고요하여 훈련원 장제장의 장식은 성대 무사히 마치었고 3월 4일에는 각 관공사립학교에 결석생도가 많고 혹은 한 명도 출석치 아니한 학교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불량학생들이 이번 시위운동에 참가치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거나 또는 부형이 위험을 염려하여 출입을 금하고 혹은 3월 1일 소요 후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많은 까닭이라더라.

1919년 당시 20세였던 이학(李鶴)이라는 중동학교(中東學校) 중등과 학생이 있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일리동에 본적지를 둔 그는 공업전습소 학생인 안형선(安衡善)과 함께 경성부 연건동 39번지에서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3월 1일 아침 낙원동에서 만난 친구 안형선에게서 오늘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선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서 만세시위행렬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하루 그는 서울 시내의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며 거의 전 행로에 동참했으며, 3월 5일에 다시 남대문 역전에서 벌어진 제2차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북미창정(지금의 북창동)을 거쳐 대한문 앞으로 나가는 도중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그는 5월 3일 총독부 판사 앞에서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에 찬성하여 파고다공원에 갔다”고 당당히 밝혔는데, 그의 신문조서에는 만세시위에 동행한 행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안형선으로부터 위의 말을 들었으므로 그와 함께 정오가 지나서 파고다공원에 갔다. 그때는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지 않았으나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점차 사람이 많아지고 마침내 다수의 군중이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오후 2시경이 되니 육각당 쪽에서 누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혹자는 독립신문을 살포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주워 보았다. 그러는 중에 군중은 박수를 치고 또 독립만세를 불렀으므로 나도 거기에 맞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나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와 남대문역전, 서대문 밖, 영성문(永成門) 앞을 거쳐 미국영사관 앞으로 갔다가 거기서 대한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서대문 밖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서소문정, 대한문앞, 장곡천정(長谷川町)을 거쳐 본정 2정목에 이르렀더니 경찰관이 제지했으므로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위의 행로에 나오는 ‘영성문’은 경운궁 선원전 구역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나가는 쪽에 설치된 북쪽 대문이며, 1900년에 만들어졌다가 덕수궁 해체과정에서 1920년에 철거되어 사라진 유적이다. 그리고 ‘장곡천정’은 일찍이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3.1 당시의 조선총독)가 자신의 관저로 삼았던 대관정(大觀亭)이 있는 동네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소공동(小公洞)’의 일제식 지명을 가리킨다.
이학이 만세시위행렬을 따라 다닌 행로는 앞서 보았던 ????매일신보???? 첫 보도에 기술된 장소들과 거의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3일에 있던 고종 국상일을 넘기고 다시 5일에 열린 제2차 만세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기에 이른다. 비록 닷새 남짓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삶을 통틀어 가장 자유롭고 가슴 벅찬 나날들을 보낸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금, 2019/03/2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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邦之羞辱(방지수욕)

 

忘置邦羞辱(망치방수욕)

民無奮發心(민무분발심)

唯私唯利己(유사유이기)

嘆此拙儒吟(탄차졸유음)

 

나라의 수치와 모욕

 

나라 수치와 모욕 까맣게 잊으니

백성에겐 분발하는 맘 따위 없네

오로지 私에 또 오로지 이기심뿐

이를 탄식하며 못난 선비 읊는다.

 

<時調로 改譯>

 

수치, 모욕 잊으니 분발의 그 맘 없네

오직 사사로움에 또 오로지 이기심뿐

이것을 탄식하면서 못난 선비 읊는다.

 

*羞辱: 부끄럽고 욕됨 *忘置: 망각(妄却). 亡失.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 *奮發心:

마음과 힘을 다해 떨쳐 일어나려는 마음 *利己: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함.

 

<2018년 6월, 이우식 지음>

화, 2018/06/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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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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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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