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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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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6:20

[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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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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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 “일본과 협의 안 돼” 답변만 반복
시민단체 활동만으로는 한계

▲ 서울 용산역 광장의 강제징용 노동자상(뉴스1DB) © News1 박지혜 기자

1945년 일본 열도에 광복의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일본 내 한국인들은 3년이 지난 1948년 스스로 배를 마련해 대한해협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1948년 가을 큰 태풍이 방생해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한국인들이 모여든 일본 규슈지역을 덮쳤다. 배는 난파되고 희생된 한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의 이키섬과 쓰시마섬으로 떠내려왔고 이후 수습된 유해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사찰인 곤조인(金承院)에 안치됐다.

지난 2010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의 조사로 곤조인에 강제징용 희생자로 추정되는 13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음이 밝혀졌다. 최근 곤조인에서 더는 유해를 보관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유해를 화장 후 일본 후생성의 창고에 보관될 처지에 놓였지만 한국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22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두 나라 정부에 곤조인에 보관 중인 131위의 유해 보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일본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의 유해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앞서 지난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반환을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도쿄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돼있던 군인·군속 유해 1134위 중 423위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네차례 걸쳐 봉환됐다.

유텐지의 군인·군속 유해의 봉환 작업에 대한 한·일의 합의가 이뤄진 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해 봉환 문제도 제기됐고 약 2700여구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해가 남아 있다고 파악됐다. 하지만 이들의 유해는 여럿이 합장되어 있거나 무연고 유해가 대부분이어서 시민단체의 힘 만으로는 제대로 된 조사와 대응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한일 정부 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정부차원의 봉환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설치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 국내봉환 살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와 3·1절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제99주년 3·1절을 맞아 일본에서 봉환해온 일제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를 모시고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추모제를 거행했다, 2018.2.28/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정부 간 교섭이 멈춰서자 2014년부터 한·일 시민단체가 나서 일본정부에 유해 봉환 문제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봉환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수년 동안 일본정부와 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시민단체에서 향후 일본과의 ‘유골공동조사’에 대한 장기 로드맵 작성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구체화된 계획이 없는 상황이다.

또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역할이 한정될 수 밖에 없어 총리 산하에 행안부, 외교부, 법무부가 참여하는 공동 대책반 구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없다.

특히 지난 2016년 보추협이 요시다 가즈로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 사업과장 등 당국자를 만나 한국인 유해을 찾을 수 있도록 나서달라는 취지의 요망서를 제출했고 일본정부도 “한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없었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본정부가 한국의 요청이 있으면 검토하겠다고 하는데도 한국정부는 요청이 없다”며 “정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있는 관료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 강제징용자 유해 봉환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관련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의 요청이 없었다는 일본 측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한국정부는 지속해서 협의를 요청하고 있으나 일본 측이 답변을 피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현재 한국정부는 일본 내 한국인 전몰자 유해문제에 대해 “국외에서 희생된 한국인의 유해을 국내로 발굴·봉환한다”는 기본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 한·일 간의 민감한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당장 유해 송환 문제에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편, 전몰자 유해 수습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일본정부는 지난 2016년 태도를 바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해서 2차대전 당시 전몰자 유해 수집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유해수집사업에서 한국인은 배제돼 강제동원된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해는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위안부 문제 등을 사실 풀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유해 송환 문제는 한국정부가 키를 쥐고 풀수 있는 문제인데 한국정부는 무슨 이유인지 꼼짝을 안 하고 있다”며 “지금 당장 유해를 가져올 수는 없고 가져오는 것만이 능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장기적인고 종합적인 계획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potgus@

<2018-03-22> 뉴스1
☞기사원문: 일본 내 한국인 유해송환 ‘답보’…정부 미온적 ‘日 정부 탓만’


[TF포토]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창고로 보낼 수 없습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 ‘곤죠인 사찰’에 해방 이후 태풍 등으로 조난을 당한 조선인들의 유골 131구가 유족을 찾지 못한 채 임의로 처리될 상황에 놓여있다며 한일 양국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장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더팩트ㅣ김세정 인턴기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관련기사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도자료]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


연합뉴스: 시민단체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131구 봉환해야”

☞BTV뉴스: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이 창고로?

☞불교신문: 조계종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신속히 봉환하라”

금, 2018/03/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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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철기요일

모교일의  몽욜

밍바기 행림은 길국

동부전녹서로…

촛불겨레들의  감동

…..  …..315

이기무신우사고

안자피간대통령을  뽀반기  마슬끼다.

ㄷㅗㅇ친형!

춘설의서설봄눈

그리고

카메라

 

카메라

초춘메에 내린 늦눈은

ㅊㅗㅅ불  동친형겨레라 해야지  안늘까?

….   …..다어메에  연재(창고사진 깅남민언련

열린마당자유게시판들은

퇴임후에

영새미하고  대중이는  안자피 간거  마째!

 

금, 2018/03/2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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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칠도보통먹치리아이고

교수님

고대하로가야대는지

연대로 하로가야대는지

칠칠이머꼬

ㅂㅐ성들은간대엄꼬

ㅈㅣ새끼는 리ㅗㄹ스로이스고,

이하중생략

 

월, 2018/03/26-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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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전거 탄 오륙칠 노총가근

공일이라

이사주

내라케도 낼때 엄꼬

이러케 조은 봄눈디에

ㅁㅜㅅ새 소리 창중고

팔용산  (배간사 사진을 와 아놀리노)

ㅇㅗ대 가꼬

갈대라곤….(방국장 박교수님 !  비정규회원은  315도부띠기 대회 사진 올리심미더)

사미로의  키워드의  오마이고

월, 2018/03/2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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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성사회학

남성과여성

미투

콘센트와플러그

나트와볼트

자작하는 볼트

그들에게  무신가?

 

월, 2018/03/26-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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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상관엄따

그러나그들은

페미니즘의 반대자

반대자의페미니즘

안티페미니즘은   할마리  엄따.

일부다처제와 일부이처제

여자성이 일마야 오대  ….고기가/

 

월, 2018/03/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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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3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0점 보내와
2월 2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3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공무여행증명서, 1940년도 소작료납입고지서 등 문서류와 일제강점기 농업교과서 등 도서류다.

조영숙 회원(도쿄지회 총무) 자료 기증
2월 1일 조영숙 회원이 지난해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자료에 이어 남편의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이건제 회원 자료기증
2월 20일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교주했던이건제회원이「노동자신문」(1989~1996)과 도서 16권 등 총 464점의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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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73]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2020년 정초 무렵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옛 남면사무소) 앞에 일제 때 만들어진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는 얘길 듣고 서둘러 그곳을 탐방하러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곳은 분명 ‘남면(南面)’인데 그 위치가 정작 양주시의 제일 북쪽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봤더니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이르러 군정청 법령 제22호 「북위 38도 이남에 연접한 군촌면읍시(郡村面邑市)의 관할구역 임시이전」에 따라 ‘파주군 남면’으로 조정되었다가 다시 1946년 2월 5일 ‘양주군’ 관할로 이관 처리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어디까지나 연천군 남면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에 남아 있는 ‘히라누마 젠쵸(윤선장) 송덕비’의 모습이다. 1940년 11월에 건립된 이 비석은 신산체육공원과 남면사무소의 구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일잔재논란과 관련하여 2019년에 철거되어 별도로 보관중인 상태이다.

 

아무튼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의 창고 옆쪽에서 바닥에 뉘어놓은 옛 비석 하나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학무위원 겸 면협의회원 히라누마 젠쵸 송덕비(學務委員兼面協議會員 平沼善長頌德碑)”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이를 단서로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이름은 윤선장(尹善長, 1879~?)의 창씨명이며, 그가 연천군 남면 상수리 구장(1937.6)을 지냈다거나 양주세무서 관내 조선주 제조업자 총회에서 탁주 1등상을 수상(1937.10)했다거나 연천군 남면 면협의회원(1939.5)의 당선자라거나 하는 등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석의 뒷면에도 별도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을 간추려보니 대략 이러하다.

옥전(신사)을 지어/ 숭신의 기풍을 일으키고/ 쌀과 재물을 내어/ 이웃을 돌보며 흉년을 구제하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에 봉사하여/ 한 고을에서 본보기가 되었으니/ 그 공적을 간략히 적어/ 부족하나마 송덕을 표하노라/ 연천군 남면 일동/ 히라누마 아마네가 적고/ 소화 15년(1940년) 11월에 이를 세우다(營造玉殿 興起崇神 捐出米財 保隣救歉 滅私奉公 垂範一鄕略記功蹟 聊表頌德 / 漣川郡南面一同 / 平沼周識/ 昭和十五年十一月 建之)

 

여기에 나오는 옥전(玉殿)은 여러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숭신(崇神)이라는 구절과 맞물려 생각건대 이는 필시 일제가 각 고을마다 설립을 강요했던 ‘신사(神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시절 ‘경신숭조(敬神崇祖)’라거나 ‘숭신경조(崇神敬祖)’라거나 하는 것은 널리 통용되던 관제용어(官製用語)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그가 신사의 건립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용을 부담했다는 뜻으로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이 비문을 정리한 이로 표시된 히라누마 아마네(平沼周)는 1933년 이후 연천군 남면 면장(面長)을 지낸 윤태혁(尹太赫, 1896~1959)의 창씨명으로 확인되는데,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휘보(彙報)」의 ‘신사설립허가(神祠設立許可)’ 관련 항목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남면(京畿道 漣川郡 南面)에 신사 설립의 건(件) 윤태혁(尹太赫) 외 11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본년 11월 28일부로 이를 허가함.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3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연천군 남면 신명신사’의 신사설립허가내역이다. 여길 보면 연천군 지역의 경우 관인면, 삭녕면, 영근면, 중면, 미산면 등이 동시에 신사설립허가(대표 원출자는 그 지역의 면장)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면 1신사’ 조영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황기2600년’에다 ‘황태자 탄생일’에 맞춰 경기도 연천군내 11개면 신사의 진좌제(鎭座祭)가 일괄하여 거행되었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와 고스란히 겹치는 때에 나온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연천군(漣川郡) 일면일신사 완성(一面一神祠 完成), 23일, 일제 진좌제 집행(一齊 鎭座祭 執行)」 제하의 기사가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산와 군수’는 1939년 1월에서 1942년 6월 사이에 연천군수를 지낸 최탁(崔卓, 1892~?)을 가리키며, 그의 창씨명이 바로 산와 타쿠(三和卓)였던 것이다.

 

성전하(聖戰下)에 맞이한 황기(皇紀) 2600년의 심원(深遠)한 의의(意義)를 자자손손에게까지 전하고자 연천군 8만 군민이 계획하여온 군내 11개면 신사 어조영공사(神祠 御造營工事)는 산와 군수(三和郡守)의 열의와 군민의 적성(赤誠)을 다한 근로작업과 소에 나오지(副直司) 씨의 헌신적인 공사봉사로 이즘 전부 준공되었으므로 23일 황태자전하 어탄신(皇太子殿下 御誕辰)의 가일(佳日)을 기(期)하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부터 어영대(御靈代)를 봉천(奉遷)하와 전신사(全神祠)에서 일제히 진좌제(鎭座祭)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산와 군수는 여좌(如左)히 말하였다.
“각 면민의 간절한 열망에 의하여 일면일신사(一面一神祠) 어조영의 계획은 작년말경부터 시작되어 꼭 1개년이 되었는데 기간 면민의 눈물겨운 봉사와 소에(副) 씨의 희생적 공사봉사로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작년의 한해(旱害)로 인하여 식량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면민이 신사에 대하여 진지한 봉사를 한 것은 실로 그들이 얼마나 경신관념(敬神觀念)이 불타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

 

이 기사는 연천군 남면에 만들어진 신사라는 것도 사실은 ‘1면 1신사’ 조영계획에 따라 연천군 전역에서 일괄 조성된 결과물의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이처럼 면 단위의 지역까지 소규모 신사들이 광범위하고 촘촘하게 설립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 건립된 각종 신사들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신사들이 두루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일본 최초의 해외신사(海外神社)로 일컬어지는 용두산신사(1678년)를 비롯하여 원산신사(1882년), 인천신사(1890년), 경성신사(1898년), 진남포신사(1900년), 군산신사(1902년), 용천신사(1905년), 대구신사(1906년), 대전신사(1907년), 삼랑진신사(1907년), 성진신사(1909년), 마산신사(1909년), 송도신사(1910년)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이 제정되면서 신사의 창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엄격한 조건에 따라 이뤄지도록 바뀌게 된다. 특히 부칙규정에 따라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신사들도 모두 일괄하여 이 절차에 따라 재창립되었다.
이를테면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신사의 제도적인 창립절차가 비로소 적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1917년 3월 22일에는 별도의 조선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奉祀)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로 간주되었고, 조선총독에 의한 허가(許可)에 있어서도 각각 창립(創立)과 설립(設立)의 형태로 다르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신사(神社)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사(神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명신사(神明神祠, 신메이신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별칭(別稱)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일제 패망기에 접어들수록 신설되는 신메이신사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곁들여 ‘메이지천황(明治天皇)’도 함께 제신으로 설정되는 사례들이 급증하는 현상도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신사(神社)의 창립 요건과 신사(神祠)의 설립 요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 (1964)에 수록된 조선 관련 신궁(神宮), 신사(神社), 신사(神祠) 집계표이다. 관폐사는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말하며, 국폐사는 경성신사(1936), 용두산신사(1936),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전주신사(1939), 함흥신사(1939),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등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을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조선신궁 권궁사(朝鮮神宮 權宮司)를 지낸 타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던 것으로 적고 있는데, 이 당시 부읍면(府邑面)의 총수(總數)가 2,346개소였으므로 얼추 잡아 면(面) 단위로 보면 하나 건너 한 곳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가 두루 포진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읍면의 숫자에 대비하여 전라남도(100%), 황해도(87.7%), 평안북도(80.8%), 충청북도(69.8%), 경기도(69.2%)의 순서로 집약도가 유난히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여 이를 도표로 만들어 그 추이를 살펴보면, 이러한 숫자라는 것도 대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포착된다.

 

신사(神社)와 신사(神祠)의 창립, 설립, 폐지 허가에 관한 연도별 추이

(✽)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게재된 내역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에 조성된 홍성신사(洪城神祠)의 전경을 담은 엽서자료이다. 입구의 토리이는 1931년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신사설립허가는 1923년 10월 25일에 있었던 것이 맞지만, 정작 <조선총독부관보>에는 관련사실이 전혀게재된 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즈시 미노루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여기에 취합된 자료에 나타난 숫자(즉, 2+80-3+886-16=949개소)와 모리타 요시오의 책(1964)에 수록된 그것(즉, 1,141개소)이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신사 창립과 신사 설립에 관한 허가 사항이 <조선총독부관보>에 100퍼센트 다 게재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사례들도 제법 존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의 경우에도 <조선총독부관보>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경기도보(京畿道報)>를 통해 ‘신사설립허가’의 내역이 확인된 사례가 무려 14곳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해 본 결과, 여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3곳 더 포함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신사 설립의 건수가 두드러지게 증가세를 나타낸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전반도(全半島)에 고조되는 경신열(敬神熱), 신사(神祠)의 인가 격증(認可 激增), 작년(昨年)부터 33신사 늘어, 심전개발(心田開發)의 일증좌(一證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정신(日本精神)의 고양(高揚)과 심전개발(心田開發)의 기운(機運)에 사로잡혀 최근 선내 각지(鮮內 各地)에 신사(神社)의 건립이 많아지고 있는데, 수년 전까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이 작년9년(1934년)에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외에 27신사(神祠)의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금년에 들어와 다시 6신사(神祠)가 인가(認可)되고 또한 출원중(出願中)인 것이 14곳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이한 현상으로서 종래 그 출원자는 전부 내지인(內地人)뿐이었으나 최근에는 건설발기인(建設發起人) 가운데 조선인 유지(朝鮮人 有志)의 이름이 동반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조선인 방면의 경신열(敬神熱)이 고조되어왔다는 증좌(證左)로서 총독부도 가능한 한 인가의 방침(方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이른바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관련하여 신사의 인가 건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의 ‘신명신사’ 진좌제 모습이다. 신사(神社) 규모 이상의 것은 제법 사진자료들이 남아 있으나, 면(面) 단위에서 조성된 신사(神祠)는 이러한 모습이나마 제대로 관련자료가 남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심전개발’은 우가키 총독(宇垣 總督)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일종의 정신계몽운동이었다. 1936년 1월 15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심전개발관민간담회’의 결과를 담아 최종 공표한 내용에 따르면, 심전개발은 “(1) 국체관념(國體觀念)을 명징(明徵)케 할 것,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思想) 및 신앙심(信仰心)을 함양(涵養)할 것, (3) 보은(報恩), 감사(感謝), 자립(自立)의 정신(精神)을 양성(養成)할 것”을 3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때 이를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각지에 신사 또는 사원(寺院)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정신(日本精神)을 고취하는 동시에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자력갱생(自力更生)에 심적 조성(心的 助成)을 이루게 하려고” 했으며, 특히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니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니 하는 표현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사설립허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1939년 이후의 일인데, 이 당시의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를 목표(目標)로 강원(江原)서 건립을 계획, 명(明) 14년도부터 동(同) 20년까지,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도 촉진(促進)」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춘천(春川)] 강원도내에는 현재 신사(神社)가 건립되어 있는 곳이 춘천, 강릉 두 곳뿐이므로 도당국에서는 소화 14년도(1939년도)부터 동 20년(1945년)까지 1군 1신사주의로 신사를 세우고자 계획중인데 14년도에는 우선 원주와 철원 2개 군에 건립하기로 내정되었다 한다. 그리고 명년이 마침 황기(皇紀) 2600년에 해당하므로 각군(各郡)에서 그의 기념사업으로 신사를 건립하겠다는 희망이 상당히 있을 모양인데 신사 1사를 세우자면 약 3만 원의 경비가 들게 되므로 급속한 실현은 보기 어렵게 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신사(神祠)는 현재 30개소가량 되는 바 1면 1신사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나 경비관계로 역시 속히 실현할 수 없으므로 도(道)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각군에서 분발하여 1면 1신사를 실현하기 바란다 하며 철원(鐵原) 같은 곳에서는 벌써 황기 2600년 기념사업으로 관하 각면(各面)에 1신사를 건립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1940년은 이른바 ‘황기 2600년(기원 2600년; 초대 천황의 즉위를 기점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되는 해가 되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으로 곳곳에서 ‘1면 1신사’의 형태로 신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통에 자연히 허가건수가 급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는데, <매일신보> 1942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경신사상(敬神思想)을 발양(發揚), 경기도(京畿道)의 일면일사(一面一祠) 완성불원(完成不遠)」 제하의 기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신사 설립의 추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유구 3천 년을 꿰뚫고 내려오는 경신숭조(敬神崇祖)의 황국정신을 한층 빛나게 하여 성전관철에 3백만 도민이 돌진케 하는 도움이 되게 하려고 경기도에서는 일찍부터 1면(面) 1사(祠)를 제창하고 황기 2천 6백년 기념사업으로 계속하여온 이래 도내 일 면민들은 앞을 다투어 정재를 모두어서 신사(神祠)어조영에 총후의 적성을 바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소화 15년(1940년) 4월 이래로 금년 4월 11일 현재까지의 만 2개년 사이에 73개면에서 새로이 면진호(面鎭護)의 신사 어조영을 완성시켜 현재 도내의 총신사는 111사에 이르렀다. 그중 수원군(水原郡)에는 15사, 연천군(漣川郡)에는 11사, 김포군(金浦郡)에는 8사, 시흥군(始興郡)에는 6사를 각각 어조영하여 1면 1사를 벌써 완성시켰다. 그런데 이 많은 신사에 봉사할 신직(神職)이 부족하여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3천 원의 예산을 세워 각 관공립학교의 교원, 군관리, 경찰관리와 및 신사의 숭경자 총대(總代) 중에서 희망하는 자를 선발해서 황전강구소(皇典講九所) 조선분소에 의뢰하여 신직의 봉무를 수강케 하기로 되었다.

 

(좌) 이른바 ‘국민정신작흥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 이세신궁의 내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쓴 이러한 신궁대마(神宮大麻, 진구타이마)가 광범위하게 배포되어 이를 카미다나(神棚)에 봉안하도록 강요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우) 조선신기학회(朝鮮神祇學會)가 펴낸 <대마의 제사방법(大麻の 祀り方)>(1938)에 수록된 ‘대마봉안 표준도(大麻奉安 標準圖)’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이를 보관하는 카미다나(神棚)의 형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와 아울러 국민정신을 작흥(作興)하고 경신숭조의 관념을 철저히 하기 위해 집집마다 신궁대마(神宮大麻; 신궁에서 배포하는 일종의 종이부적)를 봉안토록 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권장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대륙신도연맹에서 펴낸 <대륙신사대관> (1941), 176쪽에 수록된 신궁대마의 반포(頒布)에 관한 통계 추이를 살펴보면, 1937, 8년도의 시기에 이르러 급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궁대마의 반포 추이

이러한 신궁대마의 반포와 함께 각 가정과 학교, 그리고 관공서와 직장마다 이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카미다나(神棚; 찬장이나 선반 형태의 작은 제단)의 설치가 강요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료의 말미에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한층 분발하여 지속적인 대마반포의 확산을 독려하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길을 끈다.

 

…… 이와 같이 반도(半島, 조선)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실로 약진일로(躍進一路)의 호성적(好成績)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화 15년도(1940년도)의 반포수 126만 3,640체(體)는 이를 반도의 총호수(總戶數) 428만 2,754호(戶)에 비하면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마반포의 진정신(眞精神)인 것으로서 일호일체봉재(一戶一體奉齋)의 견지(見地)에서 본다면, 반도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더욱 일층(一層)의 노력과 열의로 대중(大衆)에 대해 그 진정성의 체득(體得)과 봉재배수(奉齋拜受)의 이해를 다시 일단(一段) 깊이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촉발된 비상시국(非常時局)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신사라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전시체제 아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임지(任地)를 부여받은 관리들은 으레 부임 첫날에는 제일 먼저 그 지역의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었고, 지원병에 선발되는 경우에도 입영기(入營旗)를 앞세우고 관내 신사에 봉고제(奉告祭)를 올리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자에는 신임 경기도 광주군수인 전예용이 부임 즉시 ‘광주신사’를 먼저 참배하고 군청에 초등청(初登廳)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6월 13일자에 수록된 최초 지원병 합격자인 최덕윤(崔德潤)이 관내 ‘숭인신사(崇仁神祠)’에서 봉고제를 올리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 수록된 「지원병 경성합격자(志願兵 京城合格者) 봉고제(奉告祭)와 축하회(祝賀會), 12일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초년도 지원병 전형시험에 합격된 202명 중 경성부내에도 영예의 군문을 돌파한 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중 부내 제기정(祭基町) 137번지 최덕윤(崔德潤) 군의 영예의 합격을 신전(神前)에 봉고하는 봉고식(奉告式)은 12일 오전 8시부터 부내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소관 당국대표, 동정회 대표, 생도 대표, 국방부인, 방호단원, 기타 유지 참렬하에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마장(競馬場) 장내에서 축하회도 개회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이르러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따라 침략전쟁의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그 이후 전세가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사라는 존재의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식민통치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매일신보>1943년 8월 6일자에 수록된 「일면인사(一面一祠) 목표로 하여 신사(神社), 신사(神祠)를 어건조(御建造), 경신숭조사상(敬神崇祖思想)을 철저(徹底)히 주입(注入)」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전시체제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망의 징병제도와 해군지원병제도는 드디어 실시되어 반도청년도 내지동포와 어깨를 겨누고 육지로 바다로 나라의 방패가 되어 마음껏 싸울 때가 다가왔다. 이 얼마나 영광이며 영예인가. 그러나 우리는 영예를 치부하고 감격에만 잠겨서는 안 된다. 부르심을 받자올 청년은 수양연성을 하고 그 가정 또한 훌륭한 군인의 가정이 되어 무적황군으로서 손색이 없는 군인이 많이 나오도록 힘써야 된다. 일본은 신국(神國)이오, 만세일계의 천황폐하가 다스리시는 황국(皇國)이라는 국체의 근본을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실천에 의하여 체인(體認)하는 것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길이다.
총독부에서는 경신사상의 근본인 신사를 일면일사(一面一社)를 목표로 어건조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2,346 부읍면 가운데에 신사 신사(神社 神祠) 수는 9백 사밖에 안 되는 부와 읍은 전부 어건조를 보았으나 면에는 3분지 2나 경신사상의 중심되는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사의 어조영(御造營) 같은 존엄한 일은 각 지방민의 적성에 의함이 마땅하므로 당국으로서는 직접 어조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지방관민의 경신사상을 앙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설과 운동을 일으키기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 걸쳐 횡행했던 이러한 신사들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세세한 사례들까지 다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1964), 111~113쪽에 정리된 내용에서 몇 가지 개략적인 단서를 얻어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승신식(昇神式)’은 신사를 폐쇄하면서 제신(祭神)의 신령(神靈)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의식절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총독부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경성신사(京城神社)는 8월 16일 오후 3시에 승신식(昇神式)을 행하였다. 원산신사(元山神社)는 16일 오후 8시, 강원신사(江原神社)는 17일 오전 5시, 인천신사(仁川神社)는 17일, 대구신사(大邱神社)는 18일 밤, 전북의 이리(裡里), 군산(群山), 남원(南原), 대장(大場), 김제신사(金堤神社)는 18일, 전남의 순천신사(順天神社)는 17일, 완도신사(莞島神社)는 18일, 황해도의 해주신사(海州神社)는 17일, 사리원신사(沙里院神社)도 그 무렵에, 평남의 진남포신사(鎭南浦神社)는 17일, 평북의 강계신사(江界神社)는 19일, 강원도의 장전신사(長箭神祠)는 18일에 각각 승신식을 행하였다. 평북의 만포신사(滿浦神社)는 8월 18일에 승신식을 행하고, 신체(神體)를 소각했다. 마산신사(馬山神社)는 9월 4일, 밀양신사(密陽神社)는 10월 5일에 승신식을 행하였다.
……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 것으로 15일 밤에 평양신사(平壤神社), 16일에 정주신사(定州神社), 안악신사(安岳神社), 온정리신사(溫井里神祠), 17일에 안주신사(安州神社), 삭주신사(朔州神祠), 영변신사(寧邊神社), 천내리신사(川內里神祠), 재령신사(載寧神祠), 18일에 겸이포신사(兼二浦神社), 선천신사(宣川神社), 박천신사(博川神社), 소록도신사(小鹿島神社), 21일에 용천신사(龍川神社), 22일에 희천신사(熙川神社), 신막신사(新幕神社)도 그맘때였다. 신막신사의 신체는 17일경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손에 소각되었다. 8월 말에 안동신사(安東神社, 경상북도), 9월 2일에 강계신사(江界神社), 9월 7일에 해주신사(海州神社) 등이 불태워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장연신사(長淵神社)는 8월 20일 무렵 재주민(在住民)과 일본군(日本軍)의 손으로 소각했고, 몽금포신사(夢金浦神祠), 태탄신사(苔灘神祠)는 조선인에 의해 부서졌다. 만포신사(滿浦神社)의 봉재전(奉齋殿)은 19일밤 조선인에 의해 소각되었다. (하략)

 

<대륙신사대관> (1941)에 수록된 평양신사(平壤神社, 1937년에 국폐사로 승격)의 전경이다. 이곳은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 밤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일제 패망 직후의 시점에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게재된 미군정장관 일반명령 제5호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즉시 폐지될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치안유지법과 사상범보호관찰령, 사상범예방구금령 등과 더불어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405~406쪽 부분에는 신사처리방침의 개요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정리되어 있다

…… 9월 21일, 일반명령 제5호에 따라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폐지되고, 신궁 신사의 재산은 미군정청(米軍政廳)에 접수되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의 회계는 세출(歲出)은 이해 8월 31일, 세입(歲入)은 8월 22일로서 중지되고, 9월 22일에 결산보고서, 자금명세서와 현금을 군정청에 건넸다.
각지(各地)의 신사(神社)도 재산목록, 결산보고서 등을 지방의 군정청에 보고하였고, 토지건물은 군정청에 접수되었다. 11월 2일에 군정청은 각도지사(各道知事)에 대해 “각 신사의 본전은 당국의 허가를 얻어 소각(燒却)해도 지장이 없다. 다만, 신사 소유의 서류 및 재산은 도지사가 보관한다. 소각에 있어서는 관리(官吏)의 입회가 필요하고, 또한 10마일 이내에 주류(駐留)하고 있는 미군 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달(通達)했다. 이에 근거하여 지방의 신사 본전은 대다수 일본인(日本人)의 손에 의해 해체, 소각되었다. 신사는 대체로 경승지(景勝地)에 있으므로 이것을 혹은 도서관(圖書館, 춘천신사)으로, 혹은 양로원(養老院, 광주신사)으로, 혹은 학교(學校) 등으로 이용하고 싶다고 하는 요망(要望)이 있었다. (하략)

 

위의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군정장관(軍政長官) 아놀드 소장 명의로 공포된 미군정청 「일반명령 제5호(1945년 9월 21일)」의 앞머리에는 특별법의 폐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관련보도에는 일제의 의해 생성된 특별법의 목록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1919년 4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6권 제14집 1024엽)
(ロ) 예방구금규칙(1941년 5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8엽)
(ハ) 치안유지법(1925년 5월 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16엽)
(ニ) 출판규칙(1910년 1월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55엽)
(ホ) 사상범보호관찰규칙(1936년 12월 12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30엽)
(ヘ) 신사에 관한 건(1919년 7월 1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6집 188엽)

 

이 내용은 그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11호」 ‘일반명령 제5호의 개정(1945년 10월 9일)’에 그대로 재반영되었는데, 여기에 즉시 폐지의 대상으로 언급된 특별법이란 것은 일제가 조선인 탄압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해왔으며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라든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라든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동일한 반열에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기간에 신사라는 존재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끼친 폐해가 그만큼 깊었고 또 고약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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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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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교장 김완태 중장)는 3월 1일 육사 충무관 앞에서 홍범도·이회영·지청천·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전쟁 영웅 5명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육사는 지난해 12월 11일 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을 위한 특별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최근 홈페이지에서 백선엽을 미화하는 웹툰을 삭제하는 등 군 역사 재조명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에 앞서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임원들은 지난해 11월 9일 육사를 방문해 김완태 교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연원은 신흥무관학교-한국광복군 등 독립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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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에 따르면, 다섯 분의 흉상은 군 장병들이 실제 훈련에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는데 5.56mm 보통탄 5만 발에 달하는 양이다. 이에 대해 김완태 교장은 “총과 실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에도 봉오동·청산리 대첩 등 만주벌판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조국독립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 선배 전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이다”라고 설명했다.

흉상 표지석 위에는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는 독립군의 ‘압록강행진곡’ 가사를 새겼으며 아래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이해 후배 장병들이 사용했던 탄피를 녹여 흉상을 만들어 세우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흉상 제막식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이종걸 국회의원, 한시준 단국대 교수,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독립운동가 후손, 육사 간부·생도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육사는 이날부터 ‘독립군·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독립전쟁의 영웅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특별전시회를 충무관 1층 로비에서 12월 30일까지 개최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8/03/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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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집들이가 2월 23일 오후 5시에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연구소는 지난 해 12월 18일 용산구 청파동으로 이전했으나 내부 정리 작업에 의외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전 소식을 듣고 거의 매일 손님들이 찾아왔으나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상태여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회원들을 모시는 집들이는 3월 24일 정기총회 날 갖기로 하고 이날은 그동안 연구소와 연대했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하는 수준에서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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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홍보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함세웅 이사장의 환영사, 강만길 명예 이사장과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장이 인사말을 했다. 끝으로 2월 13일 연구소 집행위원회가 앞으로 연구소도 통일문제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가입키로 결정했기에 함세웅 이사장은 집들이에 참석한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에게 민화협 가입신청서를 전달하는 순서를 가졌다. 김홍걸 상임의장은 연구소가 민화협 활동에 많은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막걸리와 시루떡 등 간소하게 마련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2시간 만에 마쳤다. 아래는 집들이에 오셔서 축의금을 비롯해 화분과 화환,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 명단이다.

 

[축의금] 4•9통일평화재단 권오헌(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김숙자(한국산문작가협회, 이하 ‘한국산문’으로 줄임) 김형자(한국산문) 김혜자(한국산문) 도면회(대전대 교수) 박서영(한국산문 사무국장) 박재호(생각정원출판사 대표) 박중기(추모연대 명예의장) 사월혁명회 신성호(전교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서울디지털대 수수밭 송경일(국가공무원노동조합 사무총장) 송학삼(재미 통일운동가) 역사문제연구소 임종명(역사학연구소장) 염무웅(문학평론가) 이경희(전교조) 이영희(한국산문) 이옥희(한국산문) 이용길(전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장) 이충재(공공서비스노조총연맹 위원장) 이형철(우정사업본부노조위원장) 이항증(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해동(목사) 임왕택(전 5·18서울기념사업회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역사교사모임 전재진(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장) 참교육학부모회 최만립(전 KOC 부위원장) 한국산문작가협회 한국산문문학회 한국진보연대 RTV시민방송

[화분 및 화환] 계간<문학의 오늘> 김대원(평론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이사장 윤경로, 소장 김승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부영) 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 서중석) 우당이회영장학회(이사장 이종찬) 세자시강원(원장 강신석)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 국가공무원노동조합(위원장 안정섭) 한국산문작가회(회장 정진희) 수림문화재단(상임이사 신경호) 안희정

[선물 및 축전] 금아피천득선생기념회 구대회 사무총장,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이장호(영화사 임원), 송영길 의원, 정숙항

 

• 사무국

월, 2018/03/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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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22일부터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 터에서 제5차 유해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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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1951년 1월 7일과 8일 ‘마을회의’ 또는 ‘도민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나온 주민 약 200~300명이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해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가 덮어 씌워졌다.
10여 일 동안의 발굴작업 결과, 3월 8일 현재 4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발굴된 유해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성들이고, 너무나 참혹한 희생자들의 모습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거꾸로 처박혀 발견된 두 구의 유해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로 보인다. 그 아이의 다리뼈 옆에서는 희생된 아이가 갖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슬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옥비녀와 은비녀 10여 개, 돌반지로 보이는 아기의 은반지도 발굴되었다. 67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국가에 의해 이곳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박선주 단장을 비롯한 발굴단 관계자들은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을 해왔지만, 참혹하게 아무렇게나 포개져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는 처음 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산시의 예산 지원과 연구소 아산지회의 전면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번 발굴작업은 3월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3/2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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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이사장은 2월 11일(일요일) 연구소 워싱턴지부(지부장 박진영)가 페어팩스 윌리엄조평화센터에서 개최한 동포간담회에 참석하여 동포들과 뜻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윤흥노 워싱턴지부 이사장과 박진영 지부장을 비롯한 워싱턴 지부 회원들과 그 지역 한인들, 함 이사장의 막역지우 이용규 씨, 21년 전 결혼식 주례를 해준 최태영・임수아 부부, 대한민국 의문사 1호 최종길 서울대 교수 동생 최종선 씨, 독립운동가인 조성환 선생 손녀 조은옥 씨, 상록수를 지은 심훈 선생의 손녀 심영주 씨,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의 전 소장이자 내과의사인 이화영 씨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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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영 사무국장이 진행한 간담회는 윤흥노 이사장의 환영사, 영화 <1987>에서 함 신부 역을 맡았던 배우 이화룡 씨의 깜짝영상, 최태영・임수아 부부의 환영사, 함 이사장의 강연 순으로 이어졌다. 함세웅 이사장은 참석자들과 통일과 한반도 정세, 정치인과 국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대화를 이어가며 “동포들은 나라를 떠날 때 가졌던 ‘꿈과 의지가 깃든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초심을 지킬 때 비로소 내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샘솟고, 남북 일치와 화해·민주주의 실현의 염원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연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는 문재인 정권과 트럼프 정권의 한・미문제 해법, 통일에 대한 대응방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과 앞으로 과제, 미주지역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의 임무와 활동 방향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한편 함세웅 이사장은 전날인 2월 10일(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워싱턴협의회(회장 윤흥노)가 조지메이슨대학 존슨센터에서 연 평화통일 공감포럼에서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민족의 초심’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 함 이사장은 “한국에서는 ‘이게 나라냐’는 말처럼 ‘이게 종교냐’, ‘이게 교회냐’는 외침이 일고 있다. 요즘 하나님 이름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실한 사람이라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해야 한다.” “(종교는) 잘못된 구조와 문화, 관념과 논리에 대해서는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한국 교계의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 편집부

월, 2018/03/2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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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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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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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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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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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8/03/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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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4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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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15년판조선사정> (1939)에 수록된 센닌바리 자료사진

 

여기 일제강점기에 제작 배포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소화15년판조선사정(朝鮮事情)>(1939)에 수록된 이 사진은 그냥 보면 여느 조선인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빨랫감을 건네며 정담을 나누는 일상풍경인 듯이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진 아래에는 ‘천인침(千人針, 센닌바리)’이라는 짤막한 구절이 친절하게도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의 정겨운 시골풍경이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자행된 군국주의 동원체제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매일신보> 1944년 8월 12일자에 실린 「단성(丹誠)의천인침,여학생들이학병(學兵)에게」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여름에 여름방학은 고사하고 근로봉사에 더하여 이러한 센닌바리 제작에 여학생들이 광범위하게 동원된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경성부내의 여학도들이 더운 여름 근로작업하는 중에 틈을 내어 정성껏 만든 학병 오빠에게 보낼 센닌바리가 총독부 학무국 안에 있는 조선장학회에 연달아 들어와서 관계자들을 감격시키고 있다. 실로 조국의 흥망이 달려 있는 이 싸움에 안연히 교실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연필 대신 총을 잡고 지난 1월 감연히 입대한 반도인 학병들의 사기를 격려하고저 조선장학회에서는 그동안 총독부 조선연맹 등과 협력하여 이들에게 센닌바리를 만들어 보내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내 각 여학교에서는 자진하여 이 귀중한 일을 맡아 갔다.
각 여학교에서는 전력증강에 봉공하기 위하여 여름휴가도 없이 운모(雲母)의 가공이며 군의(軍衣) 재봉 등 근로봉사작업을 하는 터이었지만 학병을 위하여 이 일을 자원한 것이었다. 그 후 각 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이 정성껏 한 바늘씩 뜬 다음 천 명이 다 못되는 남은 것은 거리로 가지고 나가서 땀을 흘려가면서 지나가는 부인들에게 청하여 한 바늘씩 얻어서 전부 완성시킨 것이다. 군국여성의 사무치는 열성과 의기로 뭉친 이 센닌바리에 관계자들은 감격하는 터인데 장학회에서는 이것을 조선신궁에 가지고 가서 참배하여 학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한 후 근근 조선 내 각 부대에 있는 학병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 <매일신보> 1944년 7월2일자에 수록된 「이만큼 성장한 반도해병(半島海兵) 연마의 공(功) 일등병(一等兵)에」 제하의 기사에도 센닌바리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 아들의 이날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저 식장에 임석한 해병의 어머니 경상남도 마산부 교방동 이와모토(岩本大山, 47) 여사는 말한다. 내 자식 석원(石原)이가 형설의 공이 이루어져 일등병에 진급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 애가 출정할 때 주려고 한 바늘 한 바늘 꿰맨 센닌바리를 줄 때는 이때라고 생각되어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애는 이미 폐하께 바친 병정입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 가는 이때 석원이가 제일선에서 훌륭한 무훈을 세울 날도 머지않았거니 생각하면 감격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26<일로전쟁 시사화보> 제2권(1904년5월8일발행)에는일본오사카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백목면으로 하라마키(服卷)를 만드는 풍경삽화가 묘사되어 있다.

 

센닌바리라는 것은 1미터 남짓 되는 흰 천에다 붉은 실로 천 명의 여성들로부터 바늘 한 땀씩을 얻어 매듭지어 만들며, 이렇게 하면 적의 탄환에 맞지 않는다고 믿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던 다소간 해괴한 물건을 가리킨다. ‘천’이라는 숫자는 “호랑이가 하룻밤에 천리를 오고 간다”는 속담에 따른 것이라 한다.
제작 주체는 출정군인을 둔 가족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군국주의가 가속화하면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와 같은 관변단체가 개입하거나 여학생들이 대거 동원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초창기에는 범띠 여성 1천 명에게서 바늘땀을 받는 식으로 이뤄졌으나, 여러 차례의 침략전쟁을 거치고 특히 중일전쟁 때에 이르러 출정군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런저런 형편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하자 범띠의 여성에게는 나이 수만큼, 다른 일반여성에게는 한 땀씩 수를 놓게 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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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전쟁시사화보>제6호(1904년5월25일발행)에수록된 삽화자료. 센닌바리 제작광경이 담긴 이 그림에는 ‘센닌리키(千人力)’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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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에 처음 등장한 ‘구멍 뚫린’ 오전짜리 동전(왼쪽)의 모습. 센닌바리의 제작에는 이런 유공동전은 총알구멍을 연상시킨다 하여 그 사용이 금기시되었다.

 

센닌바리의 제작에 관한 연원을 좇아가다보면, 러일전쟁 때 출정군인을 둔 가족이 무사귀환을 비는 뜻에서 백목면(白木綿)으로 만든 복권(腹卷, 하라마키) 또는 천인결(千人結, 센닌유이)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실제로 <일로전쟁사진화보>나 <일로전쟁시사화보>와 같은 당시의 전시화보잡지를 보면 길거리를 지나는 여인들에게서 바늘 한 땀을 얻어내는 장면이 묘사된 삽화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원래 센닌바리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봉제선을 이어 만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나 사봉(仕奉), 필승(必勝)과 같은 구호문자나 호랑이 문양 또는 일장기의 모습을 함께 새겨 넣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밖에 센닌바리 안에 여자의 머리카락을 넣으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것을 모자에 꿰매거나 복대의 형태로 착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신주처럼 몸에 계속 걸치고 있는 바람에 오히려 몸에 이가 번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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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에는 일본인과 조선여인이 함께 어울려 센닌바리 바늘땀을 짓고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구멍이 없는’ 5전짜리 동전이나 10전짜리 동전을 함께 꿰매어 넣는 일도 성행했던 모양이다. 이 경우 총알구멍을 연상시키는 유공동전(有孔銅錢)은 당연히 사용치 않았다. 오전(五錢, 고센)은 사전(四錢, 시센)과 발음이 똑같은 사선(死線, 시센)을 지났다는 뜻으로 새겨지며, 또 십전(十錢, 쥬센)은 구전(九錢, 쿠센)과 발음이 같은 고전(苦戰, 쿠센)을 넘어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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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 여기에는 길거리의 남자들에게서 글자를 받아 센닌리키를 제작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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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27일자에 소개된 친일조각가 윤효중의 목조 ‘천인침’. 이 작품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천인침과 거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천인력(千人力, 센닌리키)라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9년 2월9일자에 수록된 국방헌금 및 위문품등의 내역을 보면 중일전쟁개시 직후인 1937년 8월 이후 1938년 12월말까지 이 기간에 위문대(慰問袋)가 149,204개, 그리고 센닌바리 및 센닌리키가 모두 4,185점이 헌납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센닌리키라는 말은 초창기에 센닌바리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원래는 천 명의 남성으로부터 역(力)이라는 글자를 얻어 제작한 것을 착용하면 남자 천 명의 힘과 동일한 용맹함을 얻게 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여자들에게서 바늘땀을 얻고, 남자들에게서 한 글씨를 받아내는 장면이 일상풍경처럼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것조차 나중에는 변질되어 ‘역(力)’이라는 스탬프를 만들어 급조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모두가 다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침략야욕이 낳은 서글픈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난데없는 센닌바리의 제작 열풍에 부화뇌동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의 윤효중(尹孝重, 1917~1967)이 여기에 속한다. 그가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바로 바늘땀을 짓는 조선여인의 모습을 나무에 새긴 ‘천인침’이었으며, 그해 특선(特選)에 선정되는 한편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센닌바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는 <매일신보> 1944년 1월20일자에 수록된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의 기고문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천인침」이다. 여기에 나오는 마츠무라는 친일 문인으로 변절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삼팔조끼(명주조끼)에 풀솜을 두어 붉은 실로 한 바늘 두 바늘 천 사람의 어머니와 누이의 정성을 모두어 뜨는 ‘센닌바리’. 학병의 입영날짜를 앞두고 종로네거리 백화점 어구에 세패 네패로 벌어진 정성의 바느질. 어제날까지도 보기 어렵던 새로운 풍경을 나는 가던 발을 멈추고 묵묵히 본다.(중략)
그 정성은 곧 무운장구를 비는 정성인 동시에 임전무퇴의 용기를 비는 것이요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충성을 비는 것일지며 옥쇄(玉碎)의 영광과 격멸의 기백과 필승의 신념을 바늘마다 아로새긴 정성일 것이다.
대동아전쟁 이후로 오늘날까지 흰옷 입은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그의 지킬 본분을 지켜온다 하였지마는 오늘처럼 뜨거운 가슴을 정성 드린 ‘센닌바리’를 누비어 본 적이 없었으리라.(중략)
저기서는 더벅머리 여학생 한 떼가 바늘을 움직이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마스크 쓴 노인이 붉은 실을 꿰고 있다. 웃옷을 입은 상점의 점원들도 웃는 낯으로 한 바늘 꿰매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 굳센 어머니 굳센 누이 굳센 병정 그리고 굳센 나라. ‘센닌바리’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나타남인 동시에 이 땅의 가장 굳셈을 자랑하는 풍속임을 이제사 나는 깨달았노라.

 

자랑스런 풍속으로까지 미화한 센닌바리야말로 일제의 군국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교묘한 자
기위안의 최면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책임마저 고약하게도 그저 개개인과 그 가족의 운수 탓
으로 돌려버리는 일종의 면죄부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화, 2018/03/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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