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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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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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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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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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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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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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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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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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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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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2]

도로원표는 왜 칭경기념비전 앞에 놓여 있을까?
일제강점기에 모든 길은 ‘황토현광장’으로 통했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라진 옛 문화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서울시가 처음 10개의 표석(標石)을 설치한 것이 지난 1985년 10월 30일의 일이었다. 이 숫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히 증가하여 지금은 시내 곳곳에 대략 300여 개가 넘는 표석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근대시기 신문사 터와 관련한 것도 다섯 개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사 터’ 표석은 최초에 설치된 10개의 표석군에 포함되어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자리하였고, 그 후에 황성신문(2005년), 조선일보(2005년), 동아일보(2006년), 대한 매일신보(2007년)의 표석도 차례대로 추가되었다. 다만, 독립신문사의 경우 2014년에 이르러 원위치 재고증 문제가 불거지면서 옛 독일영사관 자리에 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앞뜰에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어 설치된 상태이다.

 

근대 시기 신문사 창간사옥 터 관련 표지석 설치 현황

그런데 이들 신문사는 사옥의 위치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닌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 가운데 어느 장소에 표석을 설치하는지가 간혹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논란을 피하고자 대개는 창간사옥(創刊社屋)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며, 실제로 표석 표면에는 ‘무슨무슨 신문 창간사옥 터’라는 표제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황성신문의 경우는 예외였다.
현재 ‘황성신문(皇城新聞) 터’ 표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의 계단 바로 옆 도로를 등진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이 신문사의 사옥이 있었다고 하는 ‘종로 백목전 후곡전 면주전도가(鍾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都家)’ 터와 인접한 지점이다. 서울시에서 이 표석을 세운 때가 2005년 12월이라 하였으니, 필시 ‘을사조약 100년’을 되새기는 뜻에서 만들어진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간사옥도 아닌 장소에 구태여 표석이 설치된 까닭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신문사 사옥 자체의 이동 연혁을 살펴보면, 황성신문사는 창간 이후 무려 4차례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더구나 현재 표석이 설치된 자리는 4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자 ‘창간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신문사가 처음 자리한 곳은 ‘중서 징청방 황토현 제27통 7호 전 우순청(中署 澄淸坊 黃土峴 第二十七統 七戶 前 右巡廳)’이었다.
‘황토현(황토마루)’은 지금의 광화문네거리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며, ‘우순청’은 한성부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구역의 순라(巡邏)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황성신문사는 옛 우순청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3년이 지나 이곳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 게재된 ‘사고(社告)’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왼쪽)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는 조야송축소에서 추진하는 칭경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성신문사 자리(옛 우순청터)가 선정되어 다른 곳으로 신문사 사무소를 옮긴다는 내용의 사고가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 황성신문사가 창간사옥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던 옛 우순청 건물을 헐어내고 1903년 9월 2일에 완성된 칭경기념비와 기념비전의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돌문이 ‘만세문’이다.

 

본사(本社)를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서 기념비(紀念碑)를 수립차(竪立次) 훼철(毁撤)하기로 본사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를 송교 동대로 남일가(松橋 東大路 南一家)로 이정(移定)하고 본 신문은 내(來) 11일부터 부득이 정간(停刊)하였다가 본사를 하처(何處)든지 확정한 후에 계속 발간하겠사오니 제군자(諸君子)는 조량(照亮).

 

여기에 나오는 ‘기념비’는 1902년에 해당하는 고종황제의 등극 40년과 보령(寶齡)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리는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하여 중흥송덕(中興頌德)의 내용을 담아 1903년 9월 2일에 완공된 비석이다. 이때 현직 고위관리가 중심이 된 관주도 성격의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 의해 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토현에 있는 기로소(耆老所, 세종로 149번지)의 남쪽 옛 우순청(右巡廳, 세종로 142번지) 자리가 선택되었으므로 당시 이 건물을 빌려 사용하던 황성신문사는 이곳에서 퇴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전자(篆字)는 황태자(순종)의 글씨이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원수부 회계국총장 민병석(閔丙奭)이 썼다. 비각의 전면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 글씨 역시 예필(睿筆)이라고 하여 황태자가 1902년 9월에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쪽 전면에 조성된 돌문에는 영왕(英王, 영친왕)이 6세에 썼다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고, 이곳과 이어진 벽돌담장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글자문양이 만들어져 있었다.

(왼쪽)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실린 시가지원표 위치 및 1, 2등 도로표 가운데 ‘경성부’ 관련 내용이다. 여길 보면 최초 시가지원표의 위치가 ‘광화문통 황토현광장’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리는 종로와 광화문통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오른쪽)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이정원표’를 제작 설치할 것을 알리는 ‘관통첩’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원표는 3미터 정도의 소나무 사각기둥에 페인트를 칠하여 거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작양식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화문네거리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칭경기념비전(稱慶紀念碑殿)의 건립내력이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이 비석 말고도 일제강점기에 추가된 또 다른 공간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시가지원표(市街地元標)’ 또는 ‘도로원표(道路元標)’의 설치장소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135호’를 통해 전국 각지 10개 도시에 대해 시가지원표의 위치와 일등 및 이등도로의 구간이 처음으로 지정되었는데, 이때 경성지역에는 “광화문통 황토현광장(光化門通 黃土峴廣場)”이 원표 위치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목포, 인천, 의주, 원산, 양양 등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는 이곳 시발점인 ‘황토현광장’으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독부 고시 제135호(1914.4.11)에 의한 주요 도시 시가지원표 위치지정내역

 

이와 아울러 해를 바꿔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관통첩(官通牒) 제18호’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시가지 원표로 지정된 자리에다 ‘이정원표(里程元標)’를 세울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 원표에는 경성, 관할도청 소재지 및 부근의 주요한 시읍(市邑) 또는 항진(港津)에 이르는 이정(里程)을 기재할 것.
2. 이정(里程)은 원표간의 거리에 따를 것. 단, 원표의 건설이 없는 시읍과의 거리는 그 시읍의 중앙부분에 있어서 적당한 지점을 선정하여 그 지점과의 거리에 따를 것.
3. 표주(標柱)는 지방청(地方廳), 잡급급잡비(雜給及雜費) 중에 ‘잡비’로써 건설할 것.
4. 표주(標柱)의 촌법(寸法)은 1척각(尺角, 사방 1자), 지상(地上) 약 10척(尺, 3.03미터)으로 십분 건조(十分 乾燥)한 송재(松材)를 사용하고 뼁키칠(ペンキ塗)을 할 것. 단, 현재 원표 위치에 건설된 표주로서 이에 맞지 않는 것은 건체(建替)할 때에 개정(改正)할 것.
5. 원표서식(元標書式)은 좌(左)의 예(例)에 따를 것.

 

이 내용에 따르면 최초로 설치된 ‘이정원표’는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소나무 기둥으로 만들어 여기에 페인트칠을 하여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설치된 ‘이정원표’의 실물이 궁금하여 여러 사진자료를 뒤져보았으나 당최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더니, 어찌어찌 간신히 하나 찾아낸 것이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일대의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주변의 거리풍경이 담긴 사진엽서이며, 이것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이정원표’의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로 평가된다. 이 엽서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을 확대해 보면 경계부분에 간신히 ‘이정원표’의 실물이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수록된 겨울 풍경 스케치 사진에 우연하게도 그때 막 제작 설치한 ‘도로원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에 도로원표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자료이다. (오른쪽) 현재 칭경기념비전 앞쪽에 남아 있는 석재 도로원표의 모습이다.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후면의 글씨는 깎여 나갔으나, 다행히도 이것과 똑같은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소화 10년(1935년) 5월 건설”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엽서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표주’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지점 바로 안쪽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하얀색 나무기둥에 ‘이정원표(里程元標)’라는 글씨를 또렷이 새겨놓은 형태가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그려놓은 서식과 그대로 닮아 있다. 어쨌거나 이 엽서에 담긴 광경은 이정원표의 설치지점이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토현광장의 중앙이 아니라 기념비전의 옆쪽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념비전 앞쪽에 남아있는 돌로 만든 시가지원표는 언제 처음 등장한 것일까?
우선 현존하는 실물을 살펴보면 2단 높이로 쌓아 올린 표석의 전면에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새긴 글자가 또렷하고, 양 측면에는 각각 북부지역 9개 도시 및 남부지역 9개 도시와의 거리가 천(粁, 킬로미터) 단위로 적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뒷면에는 원래 설치시기를 새겨놓은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해당 구절이 완전히 깎여나간 상태이므로 아쉽게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전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것도 눈에 띈다.
元標眞位置 自本標中心 距離五五米 方向南六九 度一三分西 (원표의 진짜 위치는 이 표석의 중심으로부터 55미터의 거리이며, 방향은 남서쪽 69도 13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치는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황토현광장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관보에 고시된 원표의 지정위치는 교차로의 한 가운데이지만 교통의 편의상 도로원표는 옆으로 비껴난 기념비전의 앞에 따로 설치해둔 것이라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도로원표의 뒷면이 깎여나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한하게도 이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로 똑같은 모양과 내용의 도로원표가 둘씩이나 존재하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어디에서 수습되어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이곳에 남아 있는 쌍둥이 도로원표를 통해 이 원표 자체는 “소화10년(1935년) 5월 건설(建設)”된 사실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때인가 옛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겨울 풍경을 스케치한 보도 사진에서 기념비전 앞에 만들어놓은 도로원표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채록된 유일한 도로원표의 사진자료가 아닌가 하는데, 이를 통해 나무기둥 이정원표를 대체하여 돌로 만든 도로원표가 새로 등장한 때가 최소한 1935년 이전이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일제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의 하나는 바로 국도(國道)였다. 1938년 4월 4일에 제정된 ‘제령(制令) 제15호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에 따르면, 도로는 국도,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 등의 4종류로 나뉘고 이 가운데 국도는 다음 각호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총독이 이를 인정하는 노선으로 정해졌다.

1. 경성부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요항부(要港部) 소재지 또는 개항(開港)에 이르는 노선.
2. 도청소재지, 개항 또는 추요지(樞要地), 비행장 혹은 철도정거장 상호를 연락하는 노선.
3. 군사상 중요한 노선.
4. 경제상 중요한 노선.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국도라는 개념의 설정은 다분히 긴급한 군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8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일등도로(一等道路)는 국도(國道)로, 등외선(等外線)도 개수 승격, 비상시하(非常時下) 경기(京畿)의 각등도로망(各等道路網) 대경성중심(大京城中心)으로 확충」 제하의 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얼마 전 총독부로부터 공포된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은 그 실시를 5월 1일부터 하기로 하였던 것을 연기하여 전조선적(全朝鮮的)으로 도로망의 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는데 경기도에서도 이 도로령 실시를 앞두고 도내 전반에 긍(亘)한 도로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다. …… 더욱이 국제도시 대경성을 중심으로 각군부(各郡府)에 방사선식(放射線式)으로 관통되어 있는 도로망을 차제에 더욱 한번 확충 강화하여 비상시하의 통운(通運)을 원활(圓滑)케 할 터이며 특히 비상시하의 자원개발(資源開發)에 도로가 가진 바 사명을 다하게 하도록 도로정책에 대한 적극책을 취하리라고 한다. (하략)

이러한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956호’를 통해 전국 각지에 거미줄처럼 얽힌 95개에 달하는 국도노선이 처음으로 인정 공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경성(京城, 도로원표)을 기점으로 하는 노선만을 간추려보면, 부산선(1호), 신의주선(2호), 목포선(3호), 웅기선(4호), 청주선(5호), 춘천선(6호), 해주선(7호), 진해선(8호), 인천선(9호), 군산선(10호), 여수선(11호), 송정리선(36호), 경성비행장선(37호), 강릉선(62호)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길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국도 1호선이라든가 국도 4호선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노선이 완전히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해방 이후 1963년 2월 5일에 이르러 ‘각령 제1191호 1급국도와 2급국도의 노선지정의 건’이란 것이 있었고, 다시 1971년 8월 31일에 이르러 ‘대통령령 제5771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이 공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실린 최초의 국도 노선 지정 내역이다. 이러한 국도노선 지정은 표면상으로 조선도로령의 제정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시체제기라는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한 도로망 구축이 진짜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목포에서 신의주를 종주하여 연결하는 ‘국도 제1호선’은 바로 이때 처음 나타난 개념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국도 노선은 ‘경성’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것이 기본이라면, 1971년 이후에 설정된 국도 노선은 국토의 끝과 끝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따라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가 지녀왔던 국도의 기점(起點)이라는 위상은 바로 이 시점부터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997년 12월에는 광화문네거리의 남서쪽 방향에 새로운 도로원표와 상징물이 만들어지면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사적 제171호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1969년 7월 18일 지정)인 국가문화재 구역 안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저 도로원표가 한낱 ‘일제잔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조차도 품어야할 근대시기의 역사유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지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목, 2020/09/2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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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5/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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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일생을 마키아벨리즘으로 허송하기에는 그래도 진실을 보며 희생도 수용하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충고는 물론 사마천의 영혼의 외침을 그는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마천의 사관으로서의 글쓰기로 돌아선 뒤부터의 작품은 권력의 피해자거나 수난자에 초점을 맞추며, 권력자일 경우에는 비판적 관점이 주류를 형성하게 배치한다.
어림 잡아보면 사마천의 관점으로 이병주가 선회한 것은 1982년 <그해 5월>부터가 아닐까싶다. 바로 박정희 피살(1979.10.26.) 이후부터 이병주는 참아왔던 비판의 해부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옳은 것이다.
국가관이나 민족국가의 정통성보다는 현실정치적인 접근과 통치력의 실세를 중시했던 마키아벨리즘적인 단계의 시각과는 달리 사마천의 단계에서는 통치권력의 집행이 얼마나 역사적인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시각으로 분석해낸다. 물론 이런 분석의 가치기준은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사에 등장했던 역대 집권세력과 그 비판세력과 진보세력을 민족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싸잡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을 가한 게 전반기의 마키아벨리즘 계열의 소설이었다면, 후반기 작품은 균형감각을 갖추고서 진지하게 논구해 들어가는 보고문학적 요소가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전기의 작품이 문학적인 형상화와 구성이 치밀한 데 비하여 후기 작품은 실록적 요소가 더 강화되는 한편 허구적인 사건은 거의 사라지며, 정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작가의 연륜문제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정치적인 이해뿐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과거사 청산의 기초자료는 물론이고 처세술적인 읽을거리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할 만하다.
<그해 5월>은 이병주의 현대사 5부 연작의 마지막 편에 속한다. ①일제 식민 말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회색적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을 다룬 ????관부연락선????, ②같은 기간을 다루되 좌우의 이념적 변별성을 뚜렷하게 경계선으로 삼아 좌익 투사들의 입을 빌려 좌익을 비판하도록 만드는 빨치산 이야기인 <지리산>, ③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집권과정을 합리화한 <산하>, ④분파와 좌절로 얼룩진 것으로 평가절하한 좌익운동사의 르포 격인 <실록 남로당>까지가 마키아벨리즘적인 이병주의 현대사 연작들이다.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처음
으로 발효시킨 소설이 현대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⑤<그해 5월>이다. 이 소설은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개막된 드라마가 장장 18년을 끌다가 1979년 10월 26일 밤, 이윽고 그 막을 내렸다.
”라는 주인공 이사마가 1979년 10월 27일 일기장에 적은 기록처럼 박정희 통치 만 18년을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사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은 차라리 ‘5·16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한 우수한 관찰자의 기초자료 모음집’ 같다.
여기서 연작 5부의 보너스나 부록 같은 작품 <‘그’를 버린 여인>이다. 이 소설은 박정희에게 두 번째 여인에 해당하는 특이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 박정희의 역사적인 삽화를 다루고 있다. 이병주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는 이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의 가슴팍과 머리에다 대고 탄환을 쏘아넣은 사실”이란 점이라고 밝힌다.
“‘그’를 버린 그 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결단에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라는 게 작가의 인과응보식 역사의 변증법이다.

4. 이병주와 박정희의 첫 만남

부산의 명 일간지였던 <국제신보>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이병주가 영입(1958.11.5.)된 것은 전임자인 명 주필 황용주(黃龍珠)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떠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영입과정에 대해서는 ① 이병주 자신은 ????국제신보????의 김형두 사장이 황용주에 대항할 만한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고, ② 김형두의 회고로는 인물을 찾다가 “감탄을 불금케 했던 인물로 진주농고의 후배이면서 전 주필 H(황용주) 씨와는 동창 간으로 마산대학에 재직중인 사람”에다 “천하호걸이며 재사이자 소설가인 나림 이병주”(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 시대> 까치글방, 2013, 301쪽)였다고 했는데, 두 주장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병주는 희대의 명문으로 <국제신보> 주필(1959.7.1.)에 이어 편집국장 겸 주필(1959.9.25.)로
부산지역뿐이 아니라 전국적인 명 논설가로 명망을 누렸다. 이승만 독재시절이라 시국은 답답했으나 사설은 끗발 나가던 이 시기에 부산군수기자사령부 사령관(1960.1.21.~7.30 전라도 제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이었던 박정희를 이병주는 처음 만났다. 신도성 도지사가 경남도청 의회 회의실에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던 자리였는데, 이병주는 <국제신보> 사장대리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여윈 몸집으로 작달막한 군인이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색안경을 쓰고 가죽으로 된 말채찍을 든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도지사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회의장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획 하고 나가버렸다.
회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호기심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도지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군인이 누구며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왔다가 불참하고 돌아간 이유가 뭐냐고.
신도성이 쓴 웃음을 띠고 한 대답을 요약하면, 그는 2관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인데 자리가 도지사석과는 먼 말석인 것이 불만이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 書堂, 1991, 90쪽. 이하 모든 인용문은 이 책) 그 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고조되자 4월 10일 전국비상계엄령이 내렸고,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정희가 지역 기관장들을 소집해서 이병주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부산일보> 주필(황용주)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장군 곁으로 다가
가서 “아, 너 복세이키 아니야?”라고 하니 박 장군은 “음, 너 코류슈구나” 하며 서로 손을 붙들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황용주가 이병주를 불러 “이 사람이 박정희 장군이다. 나완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지. 그동안 소식을 몰랐더니만 20수 년 만에 만났구먼”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황용주는 역시 대구사범 동창으로 의사인 조증출과 함께 이병주도 동석시켜 어울렸는데,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박은 “이 주필, 이래 갖고 나라가 되겠소”라며, “이놈저놈 모두 썩어 빠졌어”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도대체 오열(간첩)이란 게 뭣고. 오열이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 국민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사람 죽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원!” 등등 “욕설과 비난을 섞은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느 사람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혁명이 나자 박정희는 학생들이 쿠데타를 망쳤다고 투덜거렸다.
1960년 4월 27일자 <국제신보> 사설에 「이대통령의 비극! 그러나 조국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다」라 하고는 그가 물러난 지금은 이승만의 공죄를 논할 시기 아니다, 학생들에 배척받는 이승만은 결코 적이 아니라며 동정론을 폈다. 물론 이병주가 쓴 글로 그의 한계가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이걸 보면 나중 <지리산>과 <산하>, <남로당>에서 이승만을 추켜세운 이병주의 역사의식을 예단할 수 있다.
그 며칠 뒤 이병주가 황용주, 박정희와 만나자 박정희는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것 아닙니까?”라고 이승만에 동정적인 걸 따지고 들었다. 이에 이병주는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대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라고 변명하니, 박은 “그거 안 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4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게 필주(筆誅)를 가해야 해요”라고 단호했다. 이에 이병주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박정희는 “독립운동 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응대했다.
이어 박정희가 일본 청년장교들의 반역사건(5·15, 2·26 두 사건)을 거론하자 황용주는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라고 단칼에 비판했다. 이에 박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항의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황이 “고루한 생각”이라고 하자 박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등등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이어졌다.

황 :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박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황 : 배워야 할 것은 기백이 아니고 도의감이다. 도의심의 뒷받침이 없는 기백은 야만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조선일보, 2001, 186~187쪽)

이 대화로 박정희의 역사의식이나 정치관과 민족관의 피상성과 밑천의 마각이 드러나고도 남는다. 그리고는 이내 5·16쿠데타가 닥쳤다. 쿠데타 직후 <국제신보>는 사설 「민주발전에의 획기적 대사업이 되도록 혁명군사위원회의 성의 있는 노력을 바란다」(1961.5.17.)로 군부의 행동을 환영했다. 마치 쿠데타 세력과 교감이라도 있었던 투라 해도 지나칠 건 없다. 그만큼 박정희-황용주-이병주 사이에는 주석에서 온갖 정치론을 다 펼쳤던 게 입증된 셈이다.
그 나흘 뒤 오후 5시, 경찰은 편집국에서 이병주를 연행했다. 경남도경 유치장에서 만난 이병주와 황용주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자? 우리는 도의혁명을 하자고 했는데 반공혁명이 뭐꼬?”(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 2013, 359쪽)라며 어리둥절했다.

5. 쿠데타 직후에 구속당한 이병주

여수순천 병란(1948) 때 군부 내의 남로계 관련자 명단을 넘겨줌으로써 극형을 모면한 트라우마가 박정희에게는 강하게 작용했다. 이 전력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자 쿠데타 세력은 좌익, 혁신정당, 교원노조, 각종 노조 지도자, 보도연맹원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그래서 4천여 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판결을 내렸다. 자유당 때 사형언도자 중 미집행 백여 명은 일거에 처형시켰다.
“박정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의혹을 받자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김삼웅,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황용주는 한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기소됐다.
정당 사회단체 간부로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에게 10년 이상 사형이었던 이 법. 그런데 이병주가 뒤집어쓴 ‘교원노조 고문’ 직함이 기록도 증언도 없자 논설위원 3명을 더 연행했다.
한편 경찰 공작반에서는 앞잡이를 시켜 남로당 재건운동을 탐색 중 한 청년이 걸려들었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이병주는 경찰이 내사 중인 바로 그 청년의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은 1961년 5월 22일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일망타진해 남로당 재건 공범으로 엮을 계획이었는데 공작반의 내막을 모르던 다른 부서에서 하루 전인 21일 이병주를 신문사에서 덜컥 체포해버렸다.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병주는 필화로 내몰렸다. 연행된 동료 논설위원 중 변노섭(1930~2005)은 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원회 무임소 상임위원으로 날카로운 논설 필자였기에 이병주와 공범으로 엮였다.(<그해 5월>, 한길사) “그런데 술친구였던 박 대통령이 자기를 2년 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잡혔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원한이 사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에는 예를 들어 <‘그’를 버린 여인>에서처럼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
다.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하우스. 2014, 54쪽)
바로 이병주가 마키아벨리에서 사마천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관으로 쓴 두 편의 소설은 우리 시대 정치소설로서는 최고봉을 형성하고 있다.
(2015년 이병주 심포지엄 발제 및 여러 강연을 간추려 재정리한 글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 수록)

화, 2020/05/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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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화, 2020/05/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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