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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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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익명 (미확인) | 월, 2018/07/02- 17:18

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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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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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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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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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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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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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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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요일해요일

31

사우월1일

 

목, 2018/03/29- 12:45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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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會議員輩特別活動費

 

外面民生苦(외면민생고)

錢與野同(탐전여야동)

如何多歲費(여하다세비)

私慾每無窮(사욕매무궁)

 

국회 의원들의 특별 활동비

 

백성들 삶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돈을 탐냄에는 與野가 똑같다네

많이 받는 그 歲費 어찌 된 건가

사사로운 욕심은 늘 무궁하구나.

 

<時調로 改譯>

 

민생고 외면하면서 貪錢엔 與野가 같네

많이 받는 그 歲費는 대체 어찌 된 건가

당신들 私的인 욕심 언제나 무궁하구나.

 

*歲費: 국가 기관에서 한 해 동안 쓰는 경비. ≒세용(歲用). 국가 기관에서 官僚

등에게 지급하는 돈.법률국회 의원이 매월 지급받는 수당 및 활동비 *私慾:

자기 한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욕심 *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2018.8.9, 이우식 지음>

목, 2018/08/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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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 》

제 6회 아남 툽텐 린포체 방한 프로그램 공고

 

“모든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에 다이빙하는 시간”

자신에게 뛰어든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있는 그늘과 어둠, 삶에서 반복되고 있는 패턴들을 보게 됨을 뜻합니다.

아남 툽텐의 가르침은 솔직하며 특유의 유머가 넘치면서도 매우 심오합니다.

그는 우리의 참본성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 ‘자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내려놓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넘어 철학과 인문학으로도 자리 잡은 이 방법은 우리들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머무르도록 합니다.

◆ 아남 툽텐(Anam Thubten)

티베트에서 태어나 닝마파 불교수행을 하였으며, 9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다르마타재단(Dharmata Foundation)을 설립하여,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다니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 서울 대중 강연 ●

2017. 10. 27(금) – 10.28(토) /2일 (부분 참가 가능)

@ 국제선센터 7층 금차선원 _서울 목동 오목교역 8번 출구

· 인원 : 170명(입금 선착순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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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명상 집중수련 ●

2017. 10. 29(일) – 11.03(금) /5박6일 (전일 참가 필수)

@ 만해마을 문인의 집 _강원도 인제

· 인원 : 80명(입금 선착순 마감)

· 신청하기 > https://goo.gl/h58b4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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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 제도 : 학생 및 사회적 활동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에게 참가비 지원 (별도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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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오후6시 상담 및 문자 가능)

 

수, 2017/09/2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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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븐달

월례회

어시장

수정횟집

그여패

해안희집도 이슴

ㅇㅗ마이고 경상횡재들에게 고함

오마이고경상

모교일

ㅁㅓㅁ춰버린 한반도의 진도

백두에서한라까지   오마이고경상도 함꾸메

화, 2018/11/13-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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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인터뷰 조한성 출판팀장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작업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제대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 속에 잊혀져버린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주체가 역사가냐 아니냐의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충남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박경철 회원은 농업·농촌·농민문제, 즉 3농문제 전문가이지만, 한인애국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하셨던 이화림 지사의 회고록을 발굴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삶을 복원하였다.
충남연구원에 찾아가 이화림 지사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번역해 <이화림 회고록>으로 펴낸 박경철 회원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임무성 교육위원도 함께 했다.

문 : 어떻게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중국 베이징대학 유학 당시 한국유학생 연구생회 활동을 하면서 타이항산 역사탐방을 추진해서 4차례 정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학 가기 전부터 윤세주 열사나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옌안 지역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BS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연구생회에서 뜻이 잘 맞았던 후배 정원식과 함께 역사탐방을 추진했는데요. 당시 베이징대학에 방문학자로 와 있던 서울시립대학 염인호 교수의 소개로 윤세주 열사의 후손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와 연결되었습니다. 또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기념사업회 일도 도와주시던 김영민 선생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영민 선생이 윤세주 열사와 함께 활동하신 분 중에 이화림이라는 분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남기셨다고 하는데, 윤세주 열사의 외종손인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다
는 거예요. 이 얘기를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자서전을 찾아봤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던 때인데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에 들어갔다가 이화림 선생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발견하였습니다. 얼른 그 책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그때 온몸에 흘렀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 이 책이 나에게 오게 되었을까.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문 : 번역은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답 : 그때는 먼저 천천히 정독했구요. 박사논문을 다 쓰고 학위를 받아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도중에 번역을 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다리시는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의 연세도 너무 고령이셔서 마음도 급했구요. 그래서 타이항산 탐방을 같이 했던 김선경 후배와 함께 번역해서 <이화림 회고록>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문 : 회고록을 보면 이화림 지사나 가족이 3·1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것 같아요?
답 : 네. 맞습니다. 먼저 3·1운동 당시 이화림 지사의 오빠들이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어요.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전단지를 인쇄해서 뿌리기도 했구요. 그 과정에서 소학교 학생이던 이화림 지사도 오빠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995년 8월 요녕민족출판사가 출간한 <정도>와 한글 번역판 <이화림 회고록>

이화림 지사나 오빠들이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 듯 해요.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숭현소학교에서 일하셨는데,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셨어요. 구들장에 태극기를 숨겨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요.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경찰들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거구요. 오빠들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독립군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는 언제 중국으로 망명하셨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당시 나이도 어렸고 공부도 계속해야 해서 어머니와 함께 국내에 남았어요.

1938년 중경 시절의 이화림 지사

 

이화림 지사는 숭현소학교와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역사문학연구회’라는 독서클럽에 가입했어요. 그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저서들을 처음 접합니다. 그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얼마 후 이화림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빠들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떠나는데 오빠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문국의 소개로 김두봉 선생을 찾
아 상해로 갑니다.
그런데 김두봉 선생이 말하길, 독립운동은 김구 선생에게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김두봉 선생의 소개를 통해 김구 선생을 찾아갔는데 김구 선생이 이렇게 물어요.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이화림 지사는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의 비서 역할을 하며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거사하러 갈 때 폭탄을 넣어갈 속옷 고쟁이에 주머니를 만드는 일도 했구요. 윤봉길 의사의 거사 때에는 윤봉길 의사와 일본인 부부로 위장해 홍커우공원을 미리 정탐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화림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활동한 바로 이것이 이화림 지사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화림 지사가 이렇게까지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구기념사업회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이화림 지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 같아요. 이화림 회고록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역사학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문 : 이후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과 헤어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이화림 지사가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에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화림 지사도 그 과정에서 자연히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된 거죠. 이화림 지사는 광저우로 피신하는데 거기서 유학생이었던 김창국이라는 분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도 낳게 되요. 그런데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 윤세주가 광저우에 와서 유학생들에게 연설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나서달라는 것이었죠. 이화림 지사는 그
연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하게 된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경을 넘어놓고 지금은 유학생과 결혼해서 애기를 낳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려고 했으니까요. 이화림 지사는 고민 끝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두고 민족혁명당이 있는 난징으로 떠납니다. 이화림 지사는 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지사와 함께 열심히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윤세주의 후손 분들이 생전에 이화림 지사에게 연락하고, 자서전을 찾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윤세주 열사 때문에 이화림 지사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버리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윤세주 열사의 마음의 빚을 그 후손 분들이 나누고 계신 거지요.
1942년 5월 일본군 수십만이 팔로군을 섬멸하기 위해 타이항산지구로 쳐들어왔던 유명한 타이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팔로군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윤세주, 진광화 열사가 전사하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이화림 지사는 중산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배워왔던 의술을 발휘해서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화림지사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시절 가장 빛나는 활약은 바로 이것이
라고 할 수 있죠.

문 : 이화림 지사의 해방 후 활동은 어떠했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서 해방을 맞습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북진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중국 내전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화림 지사는 당시 무정 장군의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정 장군이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 남아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이화림 지사는 1947년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옌볜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이화림 지사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북한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의무병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구요.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를 다쳐 다시 랴오닝성 선양으로 복귀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부상 치료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 후 이화림 지사는 중국에서 의사로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1955년에는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국장, 옌볜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 당대표 등을 역임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1984년 퇴직하는데, 그동안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 1만 2천 위안을 옌볜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놓고 왔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아동단체에 대한 기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문 :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셨는데, 해방 후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군요.
답 : 네. 그렇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독립운동, 사회주의자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요. 이화림 지사의 서훈이 이 문제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 같아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하더라도 이분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다는 점에서 좀 더 전향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MBC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와 관련해 이화림 지사를 취재해 갔는데요. 그런 관심이 좀 더 널리 퍼져서 서훈 문제도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에 대해 여쭙느라고 정작 선생님에 대한 질문은 못했습니다.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고, 올해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농민수당, 농민기본소득에 관해 연구해서 전국에 알리고 중앙정부부터 지방까지 이 정책이 채택되고 추진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이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것 인데요. 현재 농민들의 소득은 도시 농촌 간에도 차이가 크지만 농민 간에도 소득차가 큰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사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농민에게 농민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공론화되어 현재 해남, 강진, 부여 등지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한 상태이구요. 조만간 경기도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으로 30여 차례 농민기본소득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 외에 농촌의 사회문제, 복지, 개발문제도 연구하고 충청남도와 중국과의 교류 활성화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올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의 풍경을 뒤로 하고 박경철 회원과 인터뷰를 마쳤다. 역사가 왜 연구와 실천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목, 2019/01/2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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